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작품과 안 좋은 작품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우“단연 최고의 작품은 입니다. 는 사실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우리 조상의 집단의식을 발견한 것입니다. 워스트 작품은 또 다른 나의 베스트라고 생각하는데 입니다. 내가 가지고 전통과, 현실과 예언적인 것과 이런 것들 모두 포함된 것인데 평단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어요. 는 내가 너무 앞질러 갔어요. 그런데 김숙현이라는 분이 도솔가를 가지고 엄청 긴 논문을 썼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그분의 석사학위 논문이더라고. 라는 작품이 연극 학자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됐다는 점에서 워스트라고 할 수 없으니 내 인생에는 워스트인 작품을 없지 않을까요? 제 작품에 워스트는 없습니다.(웃음)!”
형이상학적 가족사랑? 가족을 패거리 품 안에…
이윤택은 연극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단원들과 줄곧 생활해 왔다. 국내는 물론 외국 각지를 돌며 공연하고 강의하는 삶, 쉬지 않는 일상을 반복했다. 연극 장인에게 가족은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 어떤 아버지, 가장으로 살아왔을까?
“사람들은 내가 가장으로서 행동을 안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결과론적으로 얘기하면 안사람이 밀양연극촌 자료관장으로 있고, 큰딸이 연극·뮤지컬 작가이자 연출가고, 내 작은딸은 도요출판사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내 가족이 완전 100% 가업을 물려받고 있는 거잖아요? 가정을 팽개친 아버지라고 할 수 없죠.”
이 특별한(?) 예술인 가족은 지금도 같이 살지 않는다. 이윤택은 도요에, 부인 이연순씨와 두 딸 채경, 상경 자매는 밀양연극촌 안에 있는 집에 살고 있다.
“나는 일상적인 것과 가정적인 것을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예술적 거리라는 것이 필요해요. 너무 일상적인 것과 가정적인 것은 예술적이지 않다고 보거든요. 예술은 좀 낯선 것이다, 가정적이지 않아 보이죠. 하지만 대단히 창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나는 결코 가정적이지 않다고 볼 수 없어요.”
“딸들이 서운해 한 적은 없었나?”라는 질문에 목소리를 죽이며 “많이 하지, 많이 하지”라고 말하는 이윤택. 그러면서도 본인은 무조건 아버지로서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카페 ‘오아시스’를 운영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편안한 질문을 던졌다. 평생을 내달린 그에게도 나름 색다른 인생에 대한 갈구가 있지 않았을까? 흥미롭게도 커피숍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부산 국제시장 근처에 ‘오아시스’라는 커피숍이 있었어요. 당시 돈으로 80원만 내면 하루 종일 있어도 뭐라 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 커피숍이 문을 닫던 날 마지막 손님이 나였죠. 그날 다짐했죠. 그런 다방을 만들겠다고요.”
20대 젊었던 시절 도서관이며 음악실이었던 공간의 따뜻함을 잊을 수가 없다고. 현재 부산 기장군에 신축 중인 6층짜리 가마골 소극장의 건물 1층은 포장마차로, 2층은 카페 오아시스로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위층은 극장과 극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커피는 바리스타 자격증 있는 단원이 하면 될 것 같고, 나는 음악을 틀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웃음).”
시간은 그에게 남다른 여유와 또 다른 시도를 주고있다. 휘몰아치던 폭풍을 맞은 뒤 푸르고 따뜻한 숨으로 정화해 버렸다고나 할까? 기 세던 그에게서 잔잔한 흐름이 느껴졌다. 현재 그는 올해 하반기 부산 기장 가마골소극장과 서울에 삼공스튜디오 개관을 앞두고 있다. 그의 또 다른 도전과 방랑은 계속될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날마다 축제라 그가 말했듯. -끝.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사소한 문제로 부딪힌다. 부부 간에 항상 마음이 일치가 되기는 쉽지 않다. 살아온 환경, 습관, 성격, 남녀 간의 사고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까. 어떻게 조화시켜 원만한 가정을 만들어 갈까 고민해도 매번 크고 작은 소란이 계속된다. 부부 간의 의견다툼이 심해진 것이 최근에 이혼율이 높아진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로가 자기 입장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해답이 없다.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줄거리는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지구라는 행성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 그들은 서로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게 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때때로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자는 문제가 생기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이 관여하는 것을 싫어한다. 반면 여자는 문제가 생기면 같이 이야기 하는 중에 푼다. 여자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단지 들어 주길 원하지만 남자는 성급하게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여 다툼이 생긴다.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
아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고, 정리를 하지 않으면 정신이 어지럽다며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주변을 청소하고 정돈하며, 약속을 하면 시간보다 30분 이상 먼저 가서 기다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고, 금전관계에 철저하다. 이중에 금전 문제에서만 일치하고 다른 면에서는 차이가 난다. 그러니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저녁에 늦게 자는 것이나, 주변 정돈을 못하는 것이며, 한꺼번에 여러 일을 벌려 놓고 허둥대는 것과, 약속시간에 꼭 맞추어 가는 것, 빨리 식사하는 것 등에 대해 잔소리를 듣는다. 그만 인정하고 살라고 사정해도 에누리가 없다.
아내에게 빚지고 있는 면이 많다. 결혼하여 지금까지 30년 이상 시집살이를 하고 있고, IMF 이후 조기 퇴직하여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고정수입이 없어 아이들 교육과 가정살림을 책임지게 하고 있다. 그 와중에 막내는 첼로 공부한다고 유학까지 가 있으니 통 면목이 없다.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아내는 필자에게 평강공주이다. 역사상 유명한 공주는 선화공주, 요석공주, 평강공주이다. 그중 평강공주를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바보 온달을 인물로 만들었으니까. 필자는 기꺼이 바보 온달이 되고 싶다. 그래서 자기 소개할 때마다 바보 온달임을 알리고 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문화여행 차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동상이 있는 아차산성에 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아차산성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까지 평생 평강공주만을 바라보며 한 눈 팔지 않고 살았던 바보 같은 남자 온달과 신분의 차이를 무시하고 가능성만을 보고 결혼하여 온달의 죽음 소식을 듣고 버선 걸음으로 달려 온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요즘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를 아내와 같이 읽고 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려하며 사는 것을 배운다.
다들 진정한 친구가 몇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생각해 보면 필자도 주위에 친구가 많기는 하다. 대학 졸업 후 몇십 년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이어오는 동창모임이 있는가 하면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 맞는 친구 셋은 삼총사가 되어 맛집 탐방이나 국내, 해외여행도 함께하고 있다. 여행은 역시 친구들하고 떠나야 자유롭고 좋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또 다른 친구는 우리 아이 초등학교 때 만난 네 명의 학부형 모임이다. 이들과도 어언 30년 가까운 세월을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이쯤에선 필자 성격이 원만해서라고 자부심을 가져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오래된 인연이 아니라도 이웃이나 시니어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된 좋은 친구도 많다. 하지만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아무것도 재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친구는 누구일까? 한 드라마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요즘 방금 종영한 한 드라마에 빠져 울고 웃었다. 젊고 예쁜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제는 인생 다 산 듯한 60~70대 어르신의 이야기이다.
어르신이라는 말보다는 극중에선 꼰대라고 표현했지만 시니어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도 이미 그 대열에 합류한 지 꽤 되었기 때문에 어르신이나 꼰대라는 단어가 내게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드라마에는 이리저리 얽혀 친구처럼 지내는 선 후배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사람은 37세의 딸로 글 쓰는 작가이며 엄마와 그 친구들의 노년 인생에 대해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엄마는 음식점을 경영하며 억척스레 돈을 모아 친정 부모와 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장애인 남동생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이모라 부르는 엄마의 친구나 선배인 등장인물로 이들 중에는 암에 걸려 투병 중이지만 탤런트로 활동하는 아직도 아름다운 외모의 영원 이모와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 꽤 탄탄한 재산가가 되었지만 그러느라 결혼도 한 번 못 해 본 노처녀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해 학력콤플렉스에 걸린 충남 이모, 어릴 때 잃은 큰아들을 가슴에 품은 소녀 감성의 희자 이모, 희자의 첫사랑이었던 성재아저씨, 딸 셋과 남편 뒷바라지에 평생을 짓눌린 정아 이모와 가부장적으로 아내를 무시하고 부려먹는 정아의 구두쇠 남편이 나온다.
매 편마다 재미있고 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에피소드가 이어졌다. 검진 결과 암이라 진단받는 엄마 장난희 여사, 낙담하고 절망하는 가운데 그래도 친구들의 격려와 보살핌이 있다.
필자 또래의 나이로 설정되어 있으니 필자가 어느 날 저런 진단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상황이 깊은 고민과 공포로 다가왔다. 드라마 주인공은 가족 외에 친구들의 전폭적인 보살핌을 받지만, 필자는 남편과 아들 외에 누구에게 저런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까?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친구 희자 이모는 혼자 사는 이미 깊어진 치매 환자이다. 낮에는 멀쩡하지만, 아기 때 죽은 첫아들의 트라우마로 밤마다 인형을 업고 밤길을 배회한다. 그를 지키는 친구들과 첫사랑 성재아저씨의 보살핌이 눈물겹다.
성재 씨는 아내와 사별하고 첫사랑 희자를 찾는다. 사별한 성재 씨의 아내는 참 현명했던 것 같다. 죽기 전 남편에게 요리하는 법이나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트레이닝을 시켰다. 그래서 변호사인 성재 씨는 제법 혼자 요리도 잘하며 살고 있다.
정아 이모는 평생을 남편 뒷바라지를 한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생활비도 아끼라고 요구하는 구두쇠로 물 한잔 떠다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걸 당연한 줄 알고 살아왔다. 정아 이모는 나이 들어 자녀들 출가시키고 나면 남편과 세계여행을 떠날 희망으로 버티고 살아왔는데 남편은 돈 아깝다며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이에 정아 이모는 집을 나온다. 변두리 산동네에 집 한 칸을 얻어 혼자 살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맥주 한 병 자유롭게 마시고 싶다는 희망을 이룬 것이다.
그의 남편은 불편한 생활을 견딜 수 없다. 평생 그렇게 다해 줄 것처럼 잘해놓고 이제 자기의 곁을 떠난 아내를 원망하고 있다. 이러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이 나이가 되니 암이라는 병과 치매라는 무서운 질병이 복병으로 숨어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는 암 수술 후 앞으로 치료를 계속해야 하고 치매가 심해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친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해 보이는 따뜻한 내용이다.
그들은 별것 없는 인생 이만하면 괜찮다고 하며 서로를 보살피며 살기로 한다. 인생은 죽음만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내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모두 뭉쳐 커다란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건 좋은 인간관계라는 걸 느끼게 해 준 부럽고도 잔잔한 아름다운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드라마가 끝났을 때 필자는 사랑하는 가족, 친구를 떠올리며 나직하게 뇌어보았다. ‘디어 마이 프렌즈…’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한동안 TV 드라마 가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더니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여전히 그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2002년 방영된 드라마 의 인기가 여전히 높은 데 놀랐다. 드라마가 끝난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일본 여인들의 감성을 적시고 있다는 것이 놀라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상향은 무엇일까?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떠나 더 유명해지고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점점 다양화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용도로 사용하던 온라인 서비스가 이제는 자신을 알리면서 스스로를 세상에 과감하게 노출시켜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의 장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알리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로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하면 그들은 ‘유명인’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아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이 천지허공을 가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해 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이 우리의 행복을 가늠하는 가치 기준이 되고 있는 것 같아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 적이 있다. 우리 본연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으로 잠을 설친 기억도 있다. 인상학자로 살면서 ‘사람 개개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근본은 무엇이며 변화하는 삶과는 어떤 연관 관계를 맺고 있나?’는 평생을 풀어야 할 숙제로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옛 성인들은 가장 높은 것이 하늘이고 모든 생명은 천지에 근원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인간의 몸은 형체(形體)와 기질(氣質)이 결합된 음양오행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형체는 몸을 이야기하며 몸 안에 기질이 흐르면서 우리는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천지가 없다면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순자(荀子)는 “하늘이 사람에게 형체를 부여하면 그에 따라 정신이 생겨나니 이것이 하늘의 신기한 능력이다. 하늘은 사람을 낳음과 동시에 본성을 부여한다. 나면서부터 그러한 것이 본성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본성은 하늘이 부여해 준 생명과 함께 본래 갖추고 있는 우리 고유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과 욕구는 우리의 본연의 모습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되어 있다. 눈을 뜨면서부터 느끼기 시작하는 배고픔은 먹고 싶은 욕구를 만들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본성을 충족하고 싶은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듣고 학습하였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 내어보자. 맹자(孟子)는 인간은 선하다는 ‘성선설’을, 순자는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고 시험지 답을 적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화두 역시 “인간의 근본은 과연 착한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해 필자는 “근본은 착하다 그러나 태어남과 동시에 이기심을 만나서 그 이기심과 타협하는 과정을 겪으며 변하는 것이다”라고 주장 한다.
그 이유인즉 탄생하는 순간의 아기의 얼굴을 보면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고 이 세상에 나왔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순수하고 맑고 투명하여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순수의 세계로 몰아간다. 한순간 자신의 마음에 담겨 있는 순수한 본성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 부단한 노력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탄생 순간의 얼굴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이라 할 수 있고. 지금의 모습은 시간이 만들어 준 후천적인 얼굴, 즉 운명을 만들고 다듬어서 가꾸어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선설’을 신봉하고 따른 사람의 얼굴은 편안하고 여유로우며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바라는 삶을 저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욕구가 있다. 욕구하는 것을 얻으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지려 하고 구함에 법도와 분수가 없으면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본성을 ‘예의’라는 것을 만들어 교육하고 익히게 하여 욕망을 누르고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순자의 생각이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반영된 얼굴이 사람에게 호감을 주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며, 그의 언사가 상대를 행복과 불행을 넘나들게 한다고 하였다. 지금의 얼굴을 만든 것은 자신의 생각과 습관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잘생기고 호감 가는 얼굴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자신 있게 마주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얼굴을 가져야 하고 그 얼굴이 사람과 소통하면서 상대와 여유롭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모습을 만드는 작업을 하여 보려고 한다. 삶이 여유롭고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본다.
밤새 내리던 비가 개었다.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하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들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냅다. 동 뛰었다. 동네 입구를 막 빠져나가는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범아! 어디 가니?” 논에서 줄을 지어 모내기하던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예, 학교 가요.” “오늘 일요일인데 무슨 학교에 가니?” 그랬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늦잠을 자다가 보니 깜박 잊고 학교가 늦었다고 생각에 빠른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신용리 장교부락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농사라야 논 1,200평 정도, 밭이 300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가난한 집안이었다. 소득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웰빙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래기밥, 콩나물밥, 무밥, 꽁보리밥 등으로 식사하거나 고구마, 감자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통구이 굽는 장면을 보고 고기를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겠다며 올라갔다. 이후 남겨진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장남이었던 필자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농사일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50여 평 되는 하천가 논은 품을 사지 않고 어머니와 필자가 직접 모내기를 하곤 하였는데, 중학생의 눈으로 보기에 넓기만 하였다. 다리에 행정을 두르고 모를 심는다고 엎드리면 허리가 너무 아팠고, 행정을 두른 다리에 수많은 거머리가 달려드는데 묶은 끈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머리를 때어보면 피가 한 대롱 맺혀 있는데, 이내 피는 종아리를 타고 줄줄 흐른다. 물린 곳은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농사는 짓고 살지 않겠다’고 되네 곤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연 서울에 올라간 아버지가 흑석동 성모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당시 동작동국립묘지에 다녔던 넷째 숙부 집에서 숙식하면서 고무신 노점상을 하였는데, 장사를 마치고 나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해서 강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위가 약해져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병원비가 28만 원(7년 후 공무원에 들어가 받은 첫 월급이 2만 원 수준)이나 되었는데, 필자 집에 그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을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누구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6남 2녀였고 아버지의 둘째 형님은 80여 마지기(16,000평)나 되는 농사를 지었는데도 고개를 돌렸다. 부득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눈을 돌려 4자매 중 가장 친근감이 있는 셋째 이모님 댁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모부님으로부터 3푼 이자로 돈을 빌려 병원비를 지급하였다. 그 돈은 필자가 공무원을 하면서까지 갚아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명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는 수술받은 이후 건강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그후 7년여 기간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시다 1984년 54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갔고, 어머니도 그후 5~6년 동안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합병증이 악화하여 2000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모가 모두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가진 재산이 없어 치료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필자는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이후 차츰 재정상태가 나아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4남 2녀의 장남으로서 돌아간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뒤치다꺼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 처지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고된 농사일만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한 고통에 돌파구가 생겼다. 하루는 집에 사촌 형이 찾아와 “공무원시험 보기 위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러 간다”며 “너 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 하고 물어온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따라가 함께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운 좋게 필자만 합격하고 형은 낙방하였다. 사촌 형은 3년 후 필자가 서울 관악노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가리봉동 한일합섬 부근에서 자취하였는데, 그때 함께 생활하며 필자가 수학을 가르쳐준 이후 서울시 공무원에 합격하였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은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으로 났다. 시골에 사는 필자로서는 사실 그곳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또한 당시 시골에서 동사무소나 우체국에서 근무하려면 돈을 써야 하는데 필자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였다는 말에 20만 원을 벌었다느니 50만 원 벌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 어디 가도 자연스럽게 필자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는데, 우연히 옆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처음 보는 노인장 한 사람이 “참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네”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노인장에게 “할아버지 노동청에 대하여 잘 아셔요. 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을 도와주려면 자기 돈을 써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공직 생활을 퇴직할 때까지 이를 새기고 일했다.
노동청에서의 첫 근무지는 부산 동래온천장에 있는 한독직업훈련원(발령일 74년 11월 11일)이었다. 한독직업훈련원은 진학을 못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정부가 무료 직업훈련을 시키고 취업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선배 한 사람이 지방 관서에 근무하다가 훈련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필자가 지 방관서 발령을 받은 이후 그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공직사회는 급여 수준이 낮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금품 수수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욋돈이 없는 곳에 발령받으면 좌천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다른 사람처럼 상납이나 술대접도 잘 못 하고, 배경도 없었던 필자는 공직 생활하는 동안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향마저 전라여서 그 고통은 더 컸다.
필자는 한독직업련원에서 일하다 지방 관서로 이동했다. 지방관서에서는 주로 산재보험 징수 및 보상 업무를 담당하였고, 25세가 되던 해부터 대부분 근로감독관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사분규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6.29선언 이후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때 분규는 너무도 거칠어 근로감독관들이 분규 현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경험이나 지식이
짦았음에도 책임감 때문인지, 젊은 혈기 때문인지 분규 사업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양쪽 이야기를 듣고 완화해보려고 노력하였고 뜻밖에 성과도 많았다.
그때 느꼈던 것은 사용자의 말을 들으면 사용자의 말이 옳고 근로자의 말을 들으면 근로자의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분규를 해소하려면 누가 잘못했는지 짚어내고 잘못한 쪽이여금 고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러한 갈등은 노사분규 현장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과학ㆍ문화ㆍ예술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음을 알았다.
필자의 공직 생활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라는 엄청난 국가적 정치적 변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국가적으로 보면 78ㆍ87ㆍ97ㆍ2008년 등 10년 터울로 변화했다. 우선 1978년 이후 YH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대통령 서거, 5.18광주민화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다. 87년에는 6.29선언 이후 공권력 약화에 따라 노사분규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97년에는 대통령 출마자 세 사람이 각서를 쓰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150만~200만 명의 근로자가 실직하는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2007년이 되면 다시 미국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건이 터지고 그 파장이 세계 경제에 미치면서 한국도 2008년에 또다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였다. 41년 7개월이라는 근무 기간 9명의 대통령(정부)이 바뀌고, 그때마다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고 정책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기 맞춰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힘든 삶이었다.
공직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느꼈던 아버지 형제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모습과 공직 생활 동안 직장에서의 편견, 편향, 편애, 편파 등의 모순, 노사관계를 지도할 때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무렵에 읽었던 책 등의 영향으로 필자는 정신세계 공부에 심취하였다. 1984년 무렵부터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종교, 사상, 철학, 역사, 역학 등 잡다한 서적을 사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다양한 단체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항상 생각한 것은 ‘진리라면 무엇을 공부하든 반드시 일맥상통한 것 즉 보편 당성이 있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차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스님들이 쓴 화두 관련 책을 집중으로 읽고 명상을 거듭하다 성(性)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낼 수 있었다.
94년에 그것을 정리하여 ‘진과 사(眞과 邪)’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세계에는 수많은 석학이 있고 평생 몸을 받친 종교인들도 많은데 필자가 아는 것을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혹시 허상이나 망상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다시 20여 년 동안 깨달은 내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사지도에 적용해보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해보고, 직장 생활에 활용해보고, 각종 고전 등도 다시 읽다. 그 결과 필자의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2015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원리로써 풀어낸 ‘새로운 경세학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논어 위정편 제4장에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삽십이입(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라고 하였는데 필자도 이순의 나이이다. 황하의 신이 바다를 보고 할 말을 잊는다고 하는데 고용노동부라는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알기 위하여 20여 년 전에 했던 방황을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도사 되는 법?
무림의 비급은 인연 있는 자의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어 비급이라 했던가
어언 나이 70을 넘었다
고령사회에서 평균연령 100세 이상을 산다고 하는데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고, 계속해서, 새롭게 변하는 IT 세상에서 알파고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앞장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뒤따라가기도 버겁고, 쳐지면 짐이 되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날에는 명절이다 하면 시끌벅적 건너 뛴 시간 이어주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요즘은 “안녕 하세요” 인사만 끝나면 각자 스마트 폰 하나씩 들고 어느 구석 찾아 벽에 기대 카톡, 게임, 페북에 열중하며 혼자서 웃고 찡그리고 즐겨서 명절이어도 고향이 조용하다는 쓴웃음 소리도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귀엽고, 궁금한 게 많으신 조부모님께서 말을 붙여보지만 눈길 한번 없이 입으로만 단답식 대답에 부모가 꾸지람도 해 보지만 소용없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 내 자신이 바뀌어보자 생각하고 IT를 배워보기로 했다.
우선 컴퓨터를 배워 메일이라도 보내봐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 시작한 컴퓨터.
시작은 켜고, 끄고, ID 만들고 독수리 타법이었다.
친구들에게 짧으나마 10행 미만의 글 하나 보내는데 한나절
그런데 격려의 답장이 오고
곧 이어 전화가 와 컴퓨터 배우길 참 잘 했다며 별 다섯짜리 도장을 찍어준다느니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났다.
뭔가 하나 시작 했는데 주위에서 그게 잘 한 짓이라니 너무 신났다.
문장이 늘어나고 답장이 여러 곳에서 오는데도 글 쓰는 시간은 좀체 줄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엉덩이 진물 날 정도로 앉아 보내고 또 보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조선일보와 유어스테이지 (주)시니어 파트너즈에서 강사과정 안내문을 컴퓨터로 받아보니 새삼 신기했고 그 위력을 알 것 같았다
강사과정을 공부하며 아쉬웠던 부분은 파워포인트 강의안을 만들어야하는데 그런 실력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만들려니 그때마다 부탁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나의 부족함이 싫어 새삼 컴퓨터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2015년 도심권 이모작센터에서 SNS기초반이 있다는 광고를 컴퓨터로 접하고 등록해 가보니 베이비부머 수강생이 많아 정말 놀랬다
시작이란 이제까지 해보질 않던 것을 하는 것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나처럼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면 척척 되던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울타리에 모아놓은 모습이었다.
켜고, 끄기부터 시작해 자판을 외우라는 숙제가 떨어졌고 독수리 타법을 생소한 10손가락 운지법으로 고치는데 집에 와서도 계속 연습하다보니 이젠 독수리 타법으로는 오히려 불편해지며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애국가, 명시 등을 치며 어느 시점에서 행을 바꾸고, 여백의 아름다움을,
글자체의 종류와 적용 사례, 내용에 따라 한 장에 들어가는 글자 크기, 배열 그리고 속도를 익혀갔다
노트북을 하나 사 지참하고 교육을 받다보니 손에 익숙해져 슬슬 넘어가는 손놀림만으로도 신기했다
3개월 후 시험에서 1/2 합격선에 들어 심화반에 들어갔다
문제는 스마트폰이었다
컴퓨터와 함께 스마트 폰 교육이 병행되었는데 컴퓨터보다 어려운 게 스마트 폰이란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스마트 폰만 제대로 알면 컴퓨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페이스 북, 트위터, 밴드로 영역을 넓히다보니 재미있어 하나하나 신기함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블로그, 카페, 동영상을 배우며 숙제는 간단했다
단 한줄, 한 컷도 좋으니 매일 올리라는 것이었다.
남들은 매일이라는 이게 쉽질 않았나보다
나는 무슨 일이든 남보다 빠르질 못 해 오죽하면 별명이 “느림보”일까.
그렇지만 느리기는 해도 꾸준함은 있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올리길 해
3개월 후 1/2 탈락자 명단에서 빠져 전문가반으로 올라갔다.
구글의 여러 기능, 스프레드시트, 모두, 마인드맵, 음악 동영상 시간과 분위기에 맞는 것 골라 넣기, 유튜브 옮겨 자르고, 붙여 필요 부분만 사용하는 법 등을 신나게 배웠다
무엇보다 강사로서 PPT 배우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장 백미는
누구나 팀을 이뤄, 새로 공부하시는 분들 기초반에서 선생님 보조강사 하는 것이었다.
그때 보조강사는 물론이고 누군가를 가르쳐봐야 가르치기 위해서도 자신이 배운 걸 제대로 익힐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료를 위한 마지막 시험은
자신의 스프레드시트 만들어 자신의 전문분야 동영상 15분 이상 6개 만들어 그 주소를 넣을 것
SNS 관련 모임 6번 개최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타 SNS 관련 모임 6번 참석해 자신이 타 모임에서 기여, 보조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등을 스프레드시트 지정 란에 채우고 클릭 한 번으로 바로 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니 거짓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강사다보니 내 강의 장면을 누군가 동영상 찍어주질 않으면 안 되는데 미리 알았으면 틈틈이 준비했으련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 약 한 달을 만사제치고 그 일에 매달려도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강의가 곳곳에 있어 첫 번째는 채울 수 있었다
SNS관련 모임 6번과 타 SNS관련 모임 참석은 동기생들과 짜고 서로 모임 주선하고 참여해 주는 것으로 하렸다가 선생님께 들켜 자신의 집 구역을 설정하고 그곳에서 모임 하라니 지역이 각각이라 동기들도 가고 오기가 버거워 잘 되질 않았고 나 자신도 멀리까지 찾아가 참석해 줄 형편이 되질 않아 애를 먹다 미완성인체 겨우 턱걸이로 수료증을 받고나니 어느새 1년이 지났다
평생 써먹을 걸 배웠는데 얼마나 큰 성과인가
스마트 폰이 내 손 안에 착 달라붙은 기분이다
바로 IT 비급은 내가 차지한 것이었다.
요즘 중학생 학습 방법은
한 반을 1팀 5~6명, 4~6팀에게 다음 시간 수업할 내용을 팀별로 나눠주고 각 팀별로 주제 만들어 PPT 만들어 발표하게 해 시험, 발표 각각 50%씩 반영 성적을 낸다고 한다.
효과는 팀웍의 중요성과 협동의 가치를 자연히 익히게 하며, 있을 수 있는 지진 한 친구를 어떻게, 각기 다른 능력의 조화여부, IT는 물론 회전식 역할분담까지 하다보면 자연히 인성을 익히고 학습을 놀이형태를 빌려 재미로 승화시키는 것이라 한다.
중학생들 IT 능력은 뛰어나다
노트북, 스마트 폰은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난감에 불과하다
우리와 실력인지도 모르고 일상에서 즐기며 놀이로 자유자재 다루는 그들과는 게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사실 버겁다
IT 도사되는 비급을 열어보니
“IT 지름길은 없다
꾸준히 만지며 실패하고 익히는 길만 있을 뿐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사실 필자는 아직도 IT도사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블로그에 글을 쓰고, 강의안 파워포인트를 작성하고, 대학원 과제물을 제출하거나, 스마트폰의 유용한 앱을 이용하는 데는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이다.
필자 또래의 세대는 IT에 익숙한 세대는 아니다. 필자는 30년 이상 직장생활을 했지만 직장생활 초기에는 IT의 활용이 미미한 시대였고, 퇴직 전 10여 년은 관리자로서 실무자들의 보고를 받거나 결제하는 정도이면 충분하기에 PC 등의 IT 기기를 직접 다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퇴직을 하고 나니 컴맹이 돼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팩스 하나 보내는 방법도 서툴고 집에서 PC를 다루려고 하니 기초적인 지식이 없어 답답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퇴직 후 수년이 지나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려 하나 PC를 할 줄 모르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옛날 직장에서처럼 알아서 해주는 직원도 없고 매번 아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래서 PC를 기초과정부터 배우기로 작정하고 경기 과천시에서 실시하는 한글, 파워포인트, 엑셀을 배우는 2개월 과정에 등록했다. 강의 첫날 가 보니 수강생의 대부분이 40, 50대 주부들로 구성돼 있고 남자는 혼자뿐이었다. 그러나 퇴직 후 몇 년 동안 문화센터, 도서관 등에서 여자들 속에서 플루트 악기를 배우고 인문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기에 쑥스럽거나 하진 않았다.
문제는 PC 기초 과정이라 하지만 완전 초보는 혼자뿐이고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컴퓨터 교육을 몇 번씩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선생님이 그들의 수준에 맞추다 보니 강의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었다는 점. 어쩔 수 없이 옆자리의 짝꿍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렵게 2개월 과정을 마치고 내친김에 다음 중급 과정에까지 도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개강해 좌석을 정하는 날 좀 서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수강생들이 재빠르게 자기들끼리 짝궁을 정해 앉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필자를 기피하는 것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내심 좀 서운한 감이야 들었지만 늦게 배우는 처지에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민폐를 줄이려고 집에 가서는 복습도 하고 과제물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어려운 몇 개월 과정을 마치고 나니 어느 정도는 자신감이 생겼다. 컴퓨터에 대해 좀 알고 나니 집에서 컴퓨터 고장으로 기사를 부르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2015년 서울 종로구 수표로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 열린 강사로 선정이 되면서 강사 활동에 필요한 페이스북, 블로그, 구글 등의 활용법에 대해서 열심히 배웠다. 서울소셜 토요 SNS 강좌에도 몇 달 동안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어렵게 배운 PC의 실력이 위력을 발휘하는 날이 왔다. 50플러스센터 열린 강사 과정의 강의를 다 마치고 전체 강사들이 모여 강의 평가를 받는 날, 파워포인트는 필자 것이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선생님과 동료들로부터 받았다. 그후 동료들 몇 사람으로부터 파워포인트 작성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도 받아 개인적으로 지도해준 적도 있고, 현재 공무원연금공단 강사로 활동하면서 파워포인트로 교안을 작성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한때 IT는 어렵고 필자 세대에게는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아 구태여 뒤늦게 배울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 한 적이 있었다. 특히 친구 중에는 아직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과연 평생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거부하며 살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할 것이다. 배우는 데 늦은 것은 없다.
윤무부(尹茂夫·75) 경희대 명예교수는 1990년대 TV 톱스타였다. 에 나와 조근조근 새 이야기를 해주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연예인도 아니고 스포츠 스타도 아닌데 지금도 ‘새 박사님’하면 떠오르니 대단한 인기인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최고의 팬은 아마 아들 윤종민(尹鍾旻·42) 박사가 아닐까? 다른 공부를 해도 됐을 텐데 아버지를 따라 굳이 ‘새 박사’가 됐다. 대를 이은 새 사랑 이야기,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들어봤다.
화창한 일요일 경희대 근처 윤무부 교수의 집을 찾았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평생 산과 바다를 함께 누볐을 카메라 삼각대가 신발장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생물학 분야에서 이렇게 같은 공부를 하는 건 아마 우리 부자가 유일할 겁니다.” 아들 윤종민 박사가 조류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학자 선·후배로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부자지간이 됐다. 윤무부 교수는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모르는 것이 있으면 국제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도 했단다.
“제주KBS와 사수도에서 앨버트로스 20~30마리가 와서 관찰하고 있었어요. 아침 8시쯤 나갔다가 캄캄한 밤 12시가 다 돼서 둥지로 돌아오는데 어떻게 찾아오나 궁금했어요. 아들한테 전화를 했더니 ‘아빠, 새는 냄새가 중요해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걸 몰랐어요.”
가끔 아버지와 아들의 견해가 충돌하고 의견이 안 맞아 말다툼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서로를 버팀목처럼 의지하는 든든한 사이다. 윤무부 교수는 자신과 아들이 평생 공부하는 삶을 사는 것에 관해 ‘선비 집안의 내력’인 것 같다고 말한다.
“6대조 할아버지가 고향 거제도 선비였어요. 충청도에서 거제도로 유배 갔다는데 옥씨, 신씨, 윤씨가 그곳에 많아요. 다 양반들이에요. 5대조 할아버지가 예언을 했대요. 우리 대에서 유명한 학자가 나올 거라고요. 옛날에 시골에 가면 꼭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젊은 시절 윤무부 교수는 전국 방방곡곡 새를 찾아다니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구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의 발이 닿는 곳에는 어린 윤종민 박사도 함께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산이고 섬이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생물학자들도 많이 만났고요. 혜택을 받은 거죠. 다 아버지 덕분입니다. 과학자가 꿈인 아이들도 많았을 때였어요. 저도 그게 아주 좋고,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다른 공부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윤종민 박사는 아버지가 재직하던 경희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윤종민 박사가 새에 관한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 김정애씨는 반대했다. 윤무부 교수가 어렵게 고생하는 모습을 평생 보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종민 박사가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윤무부 교수의 집은 부부가 함께 쓰는 안방과 주방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새 박사를 위한 공간이다. 각종 새를 촬영한 비디오테이프, 서재를 꽉 채운 기록들, 세월을 말해주는 낡은 사진기들. 집안 구석구석이 새 박물관이고 도서관이었다. 새 박사 씨앗을 뿌렸으니 새 박사 꽃이 피는 것 아닌가.
미국 콜로라도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윤종민 박사는 한국 새가 그리워서 돌아왔다.
“유학생활 10년 중 5년을 산에서 살면서 그곳 새들을 봐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새가 그리워서 오래 못 있겠더라고요.”
아들 윤종민 박사는 현재 한국 교원대학교 황새생태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황새를 복원하고 방사하는 일뿐만 아니라 박새, 인공둥지에 관한 연구를 한다. 최근에는 검은머리갈매기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검은머리갈매기는 매립지에만 번식해요. 매립지가 개발되면 육식 포식자가 몰려드는데 이를 피해 검은머리갈매기가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이 최근 파악됐어요. 올해부터 소수지만 알을 가져다가 인공부화하고 새로운 서식지에 방사하는 연구를 할 겁니다.”
윤종민 박사는 멸종위기 야생생물의 증식·복원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16년 환경부장관상을 받았다. 윤무부 교수는 자신도 못해낸 일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윤무부, 윤종민 부자는 인터넷에 새 박물관을 여는 것이 꿈이다.
“새소리는 여름 철새와 텃새 100여 종. 비디오로 찍어놓고 사진이 있는 것이 300종이 넘습니다. 어렵겠지만 꼭 만들 겁니다.”
윤무부 교수는 10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몸이 불편하지만 새를 찾고 찍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윤종민 박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버지가 얘기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1,2세대 학자는 거의 물러나셨는데 그 세대의 것도 젊은 학자들이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