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얼굴. 보송보송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 한 떨기 수선화처럼 여리여리한 배우 예수정(芮秀貞·60). 수줍은 소녀 같았던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소녀가 아닌 소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 석유통을 지니고 있다며 야무지게 쥐는 두 주먹. 연극을 이야기할 때 빛나는 눈동자. ‘5월은 역시 어린이달’이라며 개구지게 웃음 짓는 모습까지. 건강보조식품이 아니라 연극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그녀. 그래서일까? 무대 위에서 더 건강하게 빛나는 배우 예수정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79년 연극 으로 데뷔, 그야말로 인생의 반 이상을 연기자로 살아온 예수정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내면 연기로 보는 이의 심장까지 쿵쿵거리게 만드는 그녀가 요즘 가장 설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서 실질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설레는 게 줄어서인지, 자연이 주는 설렘이 커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여명(黎明), 길을 나설 때 찬란한 햇빛, 이렇게 꽃이 핀다든지 나뭇가지가 새순 내느라고 그러는 것을 봐도 설레고요.”
조금은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래도 예수정 하면 ‘배우’라는 타이틀을 빼놓을 수 없는데, 작품 속 역할이 주는 설렘은 없는지 궁금했다.
“어떤 역할을 맡아서 설레는 것보다는 어떤 작품을 대할 때 설레는 마음이 커요. 내 심장을 가장 뛰게 했던 작품은 2012년과 작년에 했던 이에요.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죠. ‘구조가 왜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가?’, ‘우리는 해방을 향하여 걸어나가야 한다.’ 등의 메시지는 평생 머릿속에만 있거든요. 실제로 내가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늘 삶의 과제처럼 남아 있는 거죠. 근데 작품에서는 액팅(acting)이 되어 있고 난 액팅 아웃(acting out) 하잖아요. 그런 작품을 만나면 피가 뜨거워지죠.”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은 가슴속에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펼쳐낸다는 기분일까? 그녀는 그보다도 더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했다.
“펼쳐볼 수 있다는 말로는 모자라요. 그대로 행위하니까, 그때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것을 느껴요. 평상시 제 삶은 고즈넉해서 뭔가 역동치는 것은 없거든요. 그런데 같은 작품을 만나면 굉장히 행동적으로 변하죠. 실제 삶 자체보다도 더 큰 의지를 갖고 한 발을 딱 내딛는 거예요. 언젠가 나도 내 삶에서 그 한 발을 분명히 내디딜 것을 희망하지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작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그 한 발을 내딛거든요. 사고가 현현화되고, 나의 이상이 현상화되는 순간인 거죠. 그래서 공연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배우로서의 삶이 어렵지만, 실제 삶은 굉장히 생생하고 풍부해지죠. 우리 딸도 연극공부를 해서 지금은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물론 고생할 게 눈에 선하죠. 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아는 것이 있어요. 연극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이 풍부해질 것이란 거죠. 그래서 딸에게도 ‘훌륭한 길 택했다’고 얘기해줬어요.”
내겐 참 고마운 직업 ‘배우’
단순히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기한다’기보다는 한 인간이 거대한 사고를 이뤄내는 과정에 연기가 양질의 영양분을 더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았다.
“배우라는 직업이 무척 고마워요. 내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을 향하는 길에 현재 내 직업이 절대 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온전히 만족하고 행복하죠. 직업과 내 인생은 서로 보탬이 돼요. 작품을 통해서 나 개인 예수정보다 더 나은 정신을 들여다보고, 그 정신을 들여다봄으로써 나의 삶이 더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죠. 사실 작품이 끝나면 배우는 다시 누추해지거든요. 그것을 인지하면서 덜 누추해지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되고, 그 노력한 만큼이 분명히 작품에 입혀진다고 봐요. 그런 과정에서 작품을 보는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인생을 사는 폭도 넓어지죠. 이렇게 서로 도와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최고의 직업이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배우라는 직업이 숙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이 숙명을 직감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순간 역시 운명과도 같았다.
“대학교를 (고려대) 독문학과를 나왔는데, 그때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알게 됐어요.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계몽의 공간이다’라는 말을 알고서는 ‘아, 내 평생 여기(극장)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라고 강하게 느꼈죠. 그 이후로 연극반에 들어갔고 엄마(배우 故 정애란) 몰래 연기를 시작했어요. 내가 고생할까 봐 연기하는 걸 반대했던 엄마의 마음도 이해했지만, 저 나름의 신념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배우라는 것이 굉장히 소망이 가득한 일이라는 것 말예요.”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살아 숨 쉬는 ‘열정’
처음 배우를 꿈꿨던 그때의 열정이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연기 인생 37년, 그때 가슴을 울렸던 그 결심이 현재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 생각을 남 앞에서 이야기할 만큼 내 삶 자체가 계몽적이거나 혁명적이지는 못했어요. 때문에 입으로 말할 순 없지만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속에서 없어지지는 않죠.”
그동안 쌓아온 연기 내공이 있는데 나름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은 분명할 것 같았다. 그런 기자의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내공’이나 ‘연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끄럽기만 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까지는 없고요. 소신이라면, 내 사고가 계속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는 한 이 직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나도 모르죠. 어느 순간 나 스스로 느낄 때 내 사고가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빨리 떠나야죠. 무대나 필름에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요. 그때는 무슨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때문에 질질 붙들고 있지 말고 떠나야죠. 떠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걸어나가야겠지만.(웃음)”
그녀의 말처럼 정년이 없는 배우로 살아가다 보면 쌓여가는 경력만큼 부담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담을 설렘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떤 작품이 나에게 왔을 때 내가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그 특성을 얼마만큼 표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겉으로 찌글찌글한 모습만이 나이든 사람은 아니거든요. 나 역시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만큼(60년)을 살아왔다면 중간에 실수도 있었겠지만, 단 1초라도 은총을 받아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나갔다면 그 흔적들이 어떤 작품을 만났을 때 여태 먹은 끼니만큼의 밥값은 해야지 될 텐데, 그게 어떻게 묻어져 나올까? 나도 궁금해요.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없어요. 어떤 역할이든 좋아요. 거기에 내 끼니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궁금하고 설레거든요.”
어떤 역할이든 좋다고 말한 그녀. 요즘 떠오르는 중년의 로맨스, 특히 젊은 남자배우와 중년 여배우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도 적지 않다. 유독 멜로물과는 거리가 먼 배우 예수정. 혹시 그녀도 그런 로맨스를 꿈꿔본 적은 없을까?
“저는 뭐랄까. 사람이 참 건조해서. 아마 제가 만에 하나 그런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리고 그 역할이 제 피를 끓게 한다면 조금 또 다른 시각을 볼 것 같아요. 인생의 경험이 많아진 만큼 역으로 젊었을 때 청춘의 삶 속에 있었던 보석 같은 정서가 흐려졌을 수가 있죠. 어떤 젊은이를 만났을 때 남성이라서 끌리는 로맨스가 아니라, 그 젊은이를 통해서 다시 내 안에 생성되는 조금은 잊고 지냈던 그런 것들이 소생되면서 꽃처럼 피어나는 그런 거라 할까? 아, 소통하는 것. 그 노인 안에도 있는 젊음의 생기, 그 외부의 매개체와 함께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그런 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이 아닌 실제 그녀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남달랐다. 아니, 오히려 방법이 없는 것이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그냥 친구처럼 지내요. 그게 아마 동지의식이 있어서인가 봐요. 같은 작품을 하다 보면 동료애로 만나게 되죠. 제자들이 스승의 날 이야기를 꺼내면 ‘야야, 친구의 날은 없니? 하긴 에브리데이 친구의 날이니 친구의 날은 없나 보다.’고 말하기도 해요. 저는 아마 ‘공연’이라는 분명한 매개체가 있어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무대 앞에서는 다 같은 배우니까요.”
조금 전 이야기와는 다른 면모였다. 자신을 건조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친근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녀는 왜 자신을 건조하다고 생각할까?
“옛날에 어떤 분이 날 표현하기를 ‘습기 없는 나무’ 같대요. 어? 이 사람 나를 참 잘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이 좀 촉촉한 느낌이 나야 로맨틱하고 그런데, 그걸 아마 무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사는지 몰라요. 스스로 습관들인 자신의 삶이 건조한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말하다 보니 그게 나만의 (실수하지 않으려는) 방어책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연극’을 먹어 건강하고, ‘연기’를 해서 행복한 그녀
그녀는 배우로 살아가며, 연극을 하는 것이 곧 삶의 행복이자 건강의 비결이라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건강한 에너지가 샘솟는 법. 그녀가 하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지 물었다.
“하고 싶은 역할이요? 다 해봤어요. 대학 때부터 굉장히 하고 싶었던 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한 여성이 굉장히 육체적으로는 쇠퇴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젊었을 때 순수성을 잃고 거기다 마약까지 하게 되죠. 그 여인은 자기가 본의 아니게 영혼, 정신, 육체가 다 망가진 삶 속에서도 순수함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게도 그 역할을 두 번이나 할 수 있었어요.”
예수정의 데뷔작 의 연출을 맡았던 한태숙 감독은 당시 ‘예수정은 속에 불덩이가 있는 여자’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그 불덩이는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는 준비할 것도 없어요. 늘 내 속에 있으니까요. 없어지지 않아요. 넘칠 듯한 석유통을 품고 있거든요. 불은 언제나 붙어요. 오히려 그게 내 인생의 커다란 함정이랄까?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나를 건조하게 만드는지도 몰라요. 삶 속에서 그게 확 타버리고 난 다음에는 어떠한 고통으로 다시 그 열량을 채워가야겠죠. 배우는 숙명적으로 ‘고통은 성숙의 미로’라는 말처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한 송이 꽃을 피워내야 해요. 그 고통을 지나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땐 ‘아, 이 고통이 결국 내 삶을 꽃을 피우는 대미지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곤 하죠. 또 한 가지, 나는 연극을 먹고 건강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연극이 날 건강하게 하고, 내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죠. 누구든 매 순간 충실하면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어요. 저는 연기가 생활이니까, 그걸 날마다 충만히 하는 가운데 늘 무언가가 채워지는 거죠. 그게 제겐 힘이 되고 행복인 셈이에요.”
예수정(芮秀貞)
1979년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 1980년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대학원 문학석사, 1984년 독일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 연극학석사, 2004년 제5회 김동훈연극상, 2005년 제26회 서울 연극제 여자 연기상, 제10회 히서 연극인상, 제41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2006년 제1회 한국 여자 연극인상 등 수상.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19그리고 80’, ‘고곤의 선물’, ‘벚꽃 동산’, ‘허난설헌’, ‘바다와 양산’, ‘그린 벤치’, ‘손님’, ‘늙은 부부 이야기’ 등 주연.
“엄마,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2015년 홍수환이 어머니 황농선씨를 기억하며 부르는 호칭은 40여년 전 그대로 ‘엄마’다. 왜 어머니가 아닌 엄마라는 호칭을 쓰냐는 질문에 “그냥 엄마는 엄마가 좋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그의 마음속에 아직까지 어머니는 따뜻하고 인자한 그런 ‘엄마’로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 “수환아, 대한민국 만세다”라고 외쳤지만,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故황농선씨. 챔피언 홍수환의 ‘엄마’. 홍수환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챔피언이 된 후 엄마를 찾은 것일까?
아버지는 심장마비였다.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았다. 1964년, 그 해 소년 홍수환의 나이 15세. ‘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모자가 겨우 익숙해질만 할 즈음이었다. 홍수환 7남매는 아버지의 부재(不在)에 대한 준비를 하나도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그 슬픔과 맞서고 있었다.
7남매는 어머니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한다. 여인은 함께 슬퍼할 새도 없이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평생 집안 일밖에 할 줄 몰랐던 그녀에게 딸린 7남매를 홀로 키워야 하는 일, 지병을 앓고 계신 시어머니에게 이 비보(悲報)를 전하는 일을 생각하니 현실이 너무나도 참혹한 것이었다.
꽤 넉넉한 집안의 안주인이자 홍수환 7남매의 어머니였던 황농선씨.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녀의 미래를 180도로 바꿔놓았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7남매를 짊어져야 하는 미망인(未亡人)이 됐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홍수환은 그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 자체로 사랑 덩어리였지. 자식이라면 사족을 못 썼으니까. 자식들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해주셨어요. 큰형이 독일제 ‘KUBA’라는 전축을 갖고 싶어 했는데, 그것을 어디서 구해오셨죠. 우리나라에 당시 부통령이랑 우리 집 단 두 대밖에 없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어요.”
◇ 자식 못 이기는 엄마
1974년 7월, 홍수환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왔다. 빛나는 챔피언 벨트를 가지고 귀국한 홍수환에게 온 국민이 환호했다. 공항은 취재 인파로 북적였고, 국가는 카퍼레이드로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했다.
그러나 그 환호성 뒤에서 어머니 황씨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멍이 가실 날 없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챔피언의 영광은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홍씨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뚫고 달려가 아들에게 묻는다. 챔피언인지 뭔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수환아, 다친 데는 없니?”
아들이 자랑스러워 웃고 있는 챔피언의 어머니, 그 찰나의 미소를 위해 황씨는 늘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수환이 권투를 한다고 하자 만류를 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금쪽같은 아들이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오는 모성애 말이다.
“고등학생 때 권투를 하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수환아, 네 아버지 친구 중에 권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40세가 지나니까 침만 질질 흘리고 다니더라. 너도 이렇게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르고, 고생만 할 텐데 왜 하려고 하니’라고.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엄마! 나는 공부도 잘 하니까 권투도 잘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이에요.”
황씨는 아들을 이길 수 없었다. 뜻이 그렇다니 아들의 상처를 볼 용기를 냈다. 결국 권투를 말리던 황씨는 수환의 설득에 KO 당한다. 적극적인 조력자가 된 것이다.
“엄마가 아침에 운동 가라고 매일 깨워줬어요. 운동 열심히 하라고 뱀탕을 끓여 주셨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챔피언 홍수환? 그거 우리 엄마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예요.”
◇ 48세,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엄마
“집 안에서 살림만 하시던 분이 아버지 돌아가시고 미군부대에서 스낵바를 하셨으니까 그것을 보는 게 참 안쓰럽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권투에 미쳤었지. 엄마가 거기서 고생하는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었으니까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황씨는 남편을 잃은 4년 후, 그녀의 나이 48세에 인천 부평에 있는 미군 부대 안에 스낵바를 열었다. 그것은 7남매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사회 경험 초짜 엄마’의 선택이었다. 당시 미군부대 안에서 스낵바를 연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는데, 동업자의 도움으로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거기서 황씨는 카투사가 가져오는 미제 버터와 음식을 교환해 주기도 하고, 한국 음식이 그리운 카투사들에게 음식을 해주기도 했다. 카투사의 제 2의 어머니였던 셈이다.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장사가 뜻대로 되지 않자 동업자가 떠나갔다. 그러나 황씨는 7남매 생계의 불씨였던 스낵바를 포기할 수 없었다. 막막하긴 했지만, 억척스럽게 스낵바를 이끌어갔다.
“엄마도 힘들었겠지요. 애들은 커가지 할 것은 이것밖에 없지. 거기에서 죽으란 법은 없더라고요. 결국 우리 큰 형님과 함께 스낵바를 하면서 7남매를 다 키웠으니까. 우리 엄마는 정말 극성이었어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
“엄마한테서 강단을, 아버지한테서 체력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은 유독 운동에 강하죠. 큰형님도 젊었을 때 유도를 하셨으니까 말이에요. 이런 내 근성의 바탕은 부모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홍수환은 권투를 하기에 무엇보다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특히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패기는 그를 챔피언으로 만들어 준 결정적 요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유전자가 챔피언을 만들었다면, 어머니의 사랑은 그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홍수환은 어머니에게서 조건 없는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자라서 자신도 자식들에게 사랑을 줄 수밖에 없게 된 거 같다고 얘기한다.
어머니가 준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기에 홍수환은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을 너무나 후회한다고 했다.
“운동하고 돌아오면 뜨거운 밥에 미제 버터 두 조각 넣어 간장에 비벼 주시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기억나네요. 참 그렇게 사랑을 많이 주셨는데 말이야. 94년도에 어머니가 지병으로 고통스러워 하시니까 그냥 편안히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권투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엄마 가슴에 못을 박은 일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가 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고요.”
“엄마한테서 강단을, 아버지한테서 체력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은 유독 운동에 강하죠. 큰형님도 젊었을 때 유도를 하셨으니까 말이에요. 이런 내 근성의 바탕은 부모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죠.”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큰 화두는 복지 문제였다. 당시 대선 후보들이 나왔던 TV토론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반박했었다.
그때만 해도 이후 3년여의 세월이 흘러 ‘증세 없는 복지’가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난무했던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이 가진 허점을 일찌감치 꿰뚫은 이가 이미 있었다.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며 건전재정포럼을 만들어 이끌어 가고 있는 최종찬(崔鍾璨·65)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건전재정포럼 주간회의를 하고 있는 그의 아침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종찬 대표가 건전재정포럼 설립에 참여한 것은 대선을 코앞에 둔 2012년 가을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가 양쪽이 서로 복지 공약 많이 하면서 경쟁하는 모양새였어요. 그래서 그 양상을 본 재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 대체 나라를 어디로 가게 만들려고 복지 얘기만 하는가’ 해서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전재정포럼이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그때 발기인을 보면 아무래도 재정 쪽에 몸담았던 공무원 출신들이나 장,차관들, 그리고 언론계 출신들이 많았죠.”
최 대표를 인터뷰한 건전재정포럼 회의 장소에서는 안병우 전 국무조정실장,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장준봉 전 경향신문 사장, 고광철 전 한국경제 편집국장, 허승호 신문협회 사무총장, 이계민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KDI 박진 교수, 김원식 한국재정학회장 등등 쟁쟁한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실무 경제에 있어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에서조차도 정보를 참고한다는 건전재정포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박근혜 정부 지난 2년간 재정정책 평가 및 향후 대응방향에 대한 주제 회의 안건이었다.
“나라 걱정하는 열정이 남들 못지 않잖아요. 새벽에 나와서 이러는데, 이게 무슨 대통령 앞에서 국무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국무회의 못지않게 진지하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무슨 내가 재정정책 만든다고 누가 물어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자진해서 걱정하는 이런 분들이 많거든요. 누가 귀담아 듣지도 않는데, 이걸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까, 말귀를 알아듣게 할까, 어떻게 보면 이런 분들이 많고, 어떻게 보면 이게 국가의 자원이고 힘이죠. 이런 분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지탱이 되는 거지요.”
한국 사회를 향한 거침없는 쓴소리를 모으니 ‘부족한 복지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라는 발제였다. 토론을 통해 박 대통령 공약 검증과 복지 어떤 모양으로 갈 것 인지, 법인세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증세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짚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나라 걱정에 쓴소리 쏟아내는 건전재정포럼의 현장
이처럼 운영위원들의 의견을 아울러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고심하는 최 대표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발을 들인 그는 이후 경제기획원, 제1대 기획예산처 차관 등을 거치며 경제통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국민의 정부에서 건설교통부 차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맡은 후 참여정부에서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참여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2008년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그는 같은 해 저서 을 펴냈다.
“평생 공직생활을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느냐’는 생각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시스템 개혁을 하는 데 일조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허한 것보다 구체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날 하는 총론이나 ‘막연히 열심히 일해라’라는 말이 아니라 열심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말로만 대의를 찾는가?
최 대표는 우리 사회를 보면 시스템이나 현실과 안 맞는 것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사회를 향한 최 대표의 시선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고, 수많은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정치가들은 지역 균형도 말만 할 게 아니라, 중대선거구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지금보다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만날 지역균형 하자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구체적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호남에서도 새누리당이 당선될 수 있고 대구에서도 민주당 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고….”
‘국회의원들이 왜 자기 지역에 다리 놓는 문제에만 신경 쓰고 있을까’에 대해, 최 대표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도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만약에 전국 비례 대표로 한다면 우리 동네 다리 놓는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안 할 거 아니냐는 반문이다. 정치가들이 말로는 대의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어물쩍 비켜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논리가 없는 현재의 교육감 제도, 고쳐야 한다
국민들이 골고루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는 데 작은 힘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인생 후반부에서 불합리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 사회시스템 전반적인 공부를 하고 있다. 그중에 최 대표의 직설은 교육 부분도 건드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교육자치와 지방자치를 엄격하게 분리해놨단 말이죠. 여기에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어요. 지자체장은 무상급식에 대해 ‘내가 공약한 것도 아니고 내가 왜 돈을 대느냐’라며 관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여다보니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같은 교육자치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최 대표는 교육감이 정치적으로 무소속이라는 것이 논리가 없는 제도라고 질타했다.
“교육감은 당적을 갖는 것이 안 좋다, 이거잖아요. 그런데 어느 나라고 교육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대통령 아니에요? 대통령은 정치인이죠. 그리고 교육부 장관은 현직 국회의원이잖아요. 교육감은 교육부에서 정한 것의 일부를 집행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두 사람이 다 정치인이에요.
서울시 교육은 서울시 교육감이 다 하는 게 아니라 예산은 서울시 교육위원회, 조례는 서울시 의회 교육 분과에서 정해요. 다 정치인들로 구성됩니다. 아, 그럼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이 온통 정치인인데, 정작 교육감은 당적이 있으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논리예요.”
예를 들어 현재 강원도는 교육감은 전교조 출신 야당 성향이고 도의회 교육위원들은 다 새누리당 계열이다. 교육감은 혼자 야권 출신인데, 대통령, 교육부 장관, 강원도의회, 전부 다 여권인 상황에서 어떻게 당해내느냐는 반문이다. 교육 시스템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받는 학부모들조차도 자식들 교육은 중요하다면서 이러한 모순적인 교육감 시스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 분노한 최 대표는 그에 관한 칼럼을 쓰고 난생 처음으로 지난해 1월에 가두시위도 했었다.
시니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사회를 바꾼다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의미있는 일을 찾아 거침없이 피력하던 최 대표는 그래도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뭐 요란스럽게 신문, 언론에 안 나서 그렇지 요즘 제가 볼 때는 우리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고 봉사하는 게 과거에 비해 많아졌어요. 제가 여러 군데 참여도 해봤는데, 우리 건전재정포험, 또 시니어 어치브먼트(Senior Achievement : SA)라든지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선진사회만들기연대, 돌아가신 남덕우 총리, 지금은 이승윤 총리가 하시는 선진화포럼 등, 그런 곳들을 보면 오시는 분들이 다 옛날에 상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던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이 뭘 바라고 아침부터 토론하고 그러겠어요. 우리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하려는 의지가 참 많아요.”
최 대표는 건강한 시니어들이 과거에 비해서 많아졌고, 경제적으로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뤄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파악했다. 요즘은 60대 전후로 은퇴해도 향후 20~30년은 더 사회적으로 활동하게 된 세상이다. 시니어의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공익을 위해 애쓰는 대한민국 멘토가 많아지는 현상에 긍정적 의견이다.
의미 찾는 일에 미래를 만들며 살고 싶다
성공적인 포럼 운영과 인생 후반전을 드라이빙하고 있는 최 대표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최 대표는 생애설계를 하면서, 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 있었을까?
“딱히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요. 옛날처럼 밤새워 일할 순 없지만 만날 놀 수도 없으니까. 그 의미 있는 일이라면, 역시 우리 국민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쪽에 내 경험이나 능력을 살려서 재능기부 비슷한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만화계의 거장 장태산이 웹툰 로 돌아왔다. , 등 굵직한 작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만화가 장태산 그가 맞다. 말이 필요 없다. 지난 1월 연재를 시작한 이후 반응이 뜨겁다. 어린 독자들은 그런다. 내가 어려서 모르겠지만 그림을 보니 대단한 사람인 것은 알겠다고.
“선생님, 이거 배경 다 안 그리셔도 돼요.”
포털사이트의 웹툰을 담당하는 젊은 직원의 눈에 만화가 장태산은 괴짜다. 컴퓨터 조작 몇 번으로 만화 한 컷의 배경을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을 일일이 수작업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작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후배들에게 배웠다. 그러나 그냥 그것이 40년 동안 우직하게 만화책을 만들어 온 그만의 방식이다. 베테랑 만화가인 그가 포털 사이트 직원에게 대답한다.
“내가 밥 지어 보니까 가스보단 장작으로 밥 짓는 게 더 맛있더라고.”
그래서인지 장태산의 첫 웹툰 데뷔작 은 다른 웹툰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평이 많다. 스토리와 데생부터 캐릭터의 표정까지 옛 무협 만화책 보듯 섬세하고 날렵하다.
장씨는 자신을 ‘미련한 놈’이라고 표현한다. 평생 만화를 그리며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어 그렇게 그리면 될 일이지만, 여전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다룬 웹툰 에도 이런 의지가 투영돼 있다. 인생의 반 이상 펜과 붓을 잡았던 만화가 장태산. 이제 그의 무기는 전자펜과 키보드다.
독자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아 미련하다? 틀린 것 같다. 그 미련함에 대한 독자들의 대답은 환호와 찬사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화책을 향수하기 시작했다.
◇ 도제식 만화책 vs 나홀로 웹툰
“어느 날 강풀이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림을 못 그려서 선생님들이 문하생으로 안 받아주신 덕분에 저만의 색깔을 가진 작가로 살아남은 것 같아요’라고 말이에요. 그 말에 아주 많이 공감합니다.”
장씨는 요즘의 웹툰 작가들이 순발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만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부족한 점은 최소화 하고, 장점은 부각시켜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웹툰계의 현실도 한 몫 한다. 도제식으로 문하생들과 함께 팀을 꾸려 만화책을 냈던 옛날 방식은 스토리와 데생, 펜 터치 등이 분업화돼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반면에 혼자서 그 모든 것을 1주일 안에 토해내야 하는 웹툰 작가들에게는 단점을 일정 부분까지 끌어올리는 것보단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저는 이게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죠. 김두호 선생님 밑에서 문하생으로 13년을 했고 그 방식 그대로 40년 동안 만화를 그렸으니까요. 만약 그림 실력이 떨어진다면 어떻게든 그것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지. 근데 웹툰은 또 다르더라고요. 그림 실력이 떨어지더라도 남다른 공감 능력이나 스토리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탁월한 친구들이 많더군요. 생각해보니 우리 세대 만화가 들은 필요 이상으로 엄숙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랑, 복수 등의 명제로만 작품을 다루려 했지. 근데 지금은 소재가 너무나 자유롭고 다양해요. 도제식 방식이 어쩌면 너무 우리를 획일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 만화책 이 아닌 웹툰
“예전에는 세상의 변화에 쉽게 따라갈 수 있었는데, 최근 10년의 변화는 너무 빨라 따라가기 힘들더라고요. 만화도 그래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독자층이 어리다는 것이죠. 근데 지금 어린애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만화를 보더라고요. 만화책은 몰라도 웹툰은 안다는 것이죠.”
장씨의 웹툰 입성은 이러한 사회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사실 은 10년 전에 출판을 하려고 했다. 여러 출판사와 조율했지만 결렬의 연속이었다. 종이시장의 몰락으로 출판사는 장편보다는 단편으로 만들기를 원했지만, 장씨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버리면서까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즈음해서 그도 갈팡질팡했다. 작가로서 작품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생명력을 다했다는 방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것은 세월이었다. 정교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만화 작업에 노안(老眼)은 불편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곳을 확대해서 볼 수 있는 컴퓨터 작업은 그래서 안성맞춤이었다. 익숙하진 않았지만 편한 점도 많은 것이었다.
“컴퓨터 작업이 좋긴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기껏 다 그려놓고 하나 실수하면 종이를 찢어버렸어야 했는데, 이건 그냥 취소해버리면 되니까. 근데 그런 건 있지. 손맛이 약간 떨어진다는 거?”
◇ 창녀를 취재한 이야기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퀴퀴한 담배 냄새와 연기가 방 안 곳곳에 가득하다. 그 연기와 냄새를 오랫동안 머금은 빛바랜 사진과 책들은 한곳에서 오래 끓여진 사골처럼 장태산의 만화에 깊은 맛을 내주고 있다. 어떤 만화가나 그렇겠지만 책이든 신문이든 사진이든 직·간접적인 사건들은 작품에 중요한 재료가 된다. 그래도 역시 그중의 으뜸은 오감을 이용한 취재다.
“시리즈는 나중에라도 꼭 완성하고 싶습니다. 성인 단편 만화였는데 그것을 위해 창녀와 깡패를 직접 만나 취재한 적이 있었죠.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이야기를 드러내보고 싶었거든요.”
그녀들은 장태산을 쫓아내기 일쑤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같이 술 마시고 만나서 회유하기를 여러 차례. 마침내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것만 해주면 내 모든 것을 말해주겠다고 하면서.
“차 한 잔 마시고, 밥 같이 먹고, 영화 보면서 데이트하는 것이 꿈이라고 하더라고요. 까짓 것 어려운 것 아니니까 함께 했죠.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들도 똑같은 사람이구나.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고요. 정말 인생 공부 많이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꾸준히 책을 읽고, 사회를 탐구하는 것은 작품에 독자들이 생각해 볼 만한 화두를 던지기 위해서다. 도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칭기즈칸의 일대기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읽는 독자, 그리고 인간들을 향해 있다.
“에 야만스럽고 척박한 땅 몽골에서 살아남은 칭기즈칸의 이야기를 통해 극한에 다다랐을 때 인간의 현실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 처참한 현실을 마주한 인간의 감성을 말이죠. 그 처참한 현실을 더럽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현실은 그보다 더 비참할지도 모릅니다.”
명함은 역사다. 현재의 명함을 갖기까지, 많은 명함이 내 호주머니를 떠나갔다. 여기 누구보다 깊이 있는 명함을 가진 사람이 있다. 어렸을 때 절도로 소년원도 갔다왔다. 지금 하는 일은 노무사.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이 사람 인생, 롤러코스터다. 소년원에서 나와 ‘여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역전’으로 바꾼 사나이. 노무사라는 명함을 가진 구건서의 ‘He Story’다.
글 양용비 기자 dragonfl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부드러운 인상이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매너가 넘쳤고, 사람에게 풍기는 미소에서는 푸근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악수를 할 때 내미는 손은 예사롭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두껍고 다부졌다. ‘반전이 있는 사람이구나!’ 솥뚜껑만한 큰 손을 보고 기자는 직감했다.
40년 전 소년원에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소년. 그 소년의 2015년 명함에는 노무법인 더 휴먼의 회장이자 공인 노무사라는 직함이 자랑스럽게 새겨 있다. 무일푼 인생에 처절함과 절박함이 더해지자 노력이라는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 동아줄을 붙잡고 오로지 성공이라는 한 곳만 보며 올라왔다. 공부의 절대 시간이 부족한 것은 그에게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의 명함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그를 만난 곳은 신사동의 한 갤러리. 사진전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제는 사진에 관심을 가져보고 싶어 친구가 회장을 맡은 동아리가 연 사진전에서 당번을 하는 날이었다. 노무사 구건서.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기자에게 내민 하얀 명함 속에서 깊게 팬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 고생이 많았다.
◇ 첫 번째 명함, 건달과 택시 기사
“세상에 대한 분노뿐이었어요. 중학생 때 지나가던 아줌마 가방을 훔쳐 소년원에 갔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사는 집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가’ 하면서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었죠.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모르고 남 탓, 환경 탓하기 바빴던 거죠.”
그렇게 꼬박 1년을 소년원에서 지냈다. 복역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밑천이 들지 않고, 육신을 쓰는 일뿐. 가방끈은 턱없이 짧았고, 어떤 일을 펼치기엔 땡전 한 푼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막노동, 노점상, 포장마차, 엿장수나 고물장수 같은 것이었다. 일을 어느 한곳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학연, 지연, 혈연이 전무한 상태에서 세상은 그에게 투쟁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자신에 대해 “그때는 건달이었죠. 뭐”라고 표현하며 웃어넘기지만 말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구씨가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유명자(60) 씨의 역할이 컸다. 1981년부터 약 9년간 택시 기사를 하면서 노무사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디로 튈지 몰랐던 구 씨를 끝까지 믿어 준 아내 덕분이었다.
“이런 나를 믿어주는 아내와 아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누라랑 자식새끼는 굶기지 말아야겠다’고 말이죠.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운전수로 세상을 마치는 것을 너무 억울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 두 번째 명함,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노무사 구건서
“택시 기사를 하던 중 존 네이스비츠의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보니 블루칼라는 멸종하고, 화이트칼라 같은 지식 노동자들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노무사에 도전해 보기로. 인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었죠.”
24시간 격일제 운전.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운전수로 평생 살기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더 이상은 몸으로 때우며 살기는 싫었다.
소년원 시절에도 놓지 않았던 독서와 택시 회사 노조활동을 하며 틈틈이 배워 둔 노동법. 이것을 바탕으로 노무사에 대한 도전의 칼을 갈았다. 독서광이었던 그에게 공부는 오히려 체질이었다. 하지만 택시 운전을 하면서 공부의 절대 시간을 확보하기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구 씨는 자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자동차 핸들에 법전이나 노무사 관련 책을 오려 붙여 달달 외웠다. 차량 정체 시간이나 신호 대기 시간이 그의 공부 시간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손님을 태우면 노무사 관련 테이프를 틀어 눈이 아닌 귀로 공부를 했다. “아, 칙칙하게 이런 거 틀지 말고 음악 좀 틀어주세요.” 손님들의 볼멘소리가 나올 만했다.
그만의 택시 독서실(?)은 그렇게 꼬박 3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명문대 졸업생도 합격하기 어렵다는 노무사 시험을 전국 4등이라는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루살이처럼 살던 구 씨의 노무사 합격은 ‘인생 여전’이 아닌 ‘인생 역전’의 시작이었다. 구 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본 문구가 있습니다. ‘하루는 8만 6400초다. 이것을 돈으로 바꿔라’라는 것이었죠. 저에게 깊은 영감을 준 이 문구를 전 이렇게 바꿨습니다. ‘조물주가 매일 8만 6400초를 무통장으로 입금해준다고 생각하자. 대신 12시가 되면 못 쓴 것에 대한 값은 다시 빼간다’라고요. 저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값지게 쓰고 이것이 쌓이니 재산이 되더군요.”
◇ 세 번째 명함,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이제 나이 60을 기점으로 제3의 인생을 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첫 번째 인생이 나를 위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면, 두 번째 인생은 노무사로 활동하면서 사회와 소통하는 과정이었죠. 이제 세 번째 인생은 남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진 것을 사회에 보태고 나누고 싶어요. 그래서 내비게이터십과 인생학교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명함은 이제 새로움이 더해지고 있다. 그가 쓴 책 의 표지에 쓰여 있는 ‘Keep Looking, Don’t Settle!(안주하지 말고, 계속 찾아라)’이라는 말에 걸맞게 명함도 미래를 지향한다. 그의 명함 오른쪽 상단에 쓰여 있는 횡성군 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신선마을 촌장 겸 인생학교 교장, 내비게이터십코칭 대표 등의 직책은 구 씨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명함 중앙에 ‘공인노무사’이라는 이름이 크고 위엄 있게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직책들을 소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구 씨다. 이제는 노무사에 대한 것은 많이 내려놓은 듯했다.
“고생한 것이 있으니 지금 명함이 더 빛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되죠. 명함도 마찬가지로 매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뀌지 않는 명함은 정체하는 인생과 다름없기 때문이죠. 직책이 있든 없든 말이에요. 직책이 있든 없든 미래는 그려볼 수 있으니까요.”
◇ 명함 오른쪽 상단, 그의 새로운 역할
횡성군 발전위원회 자문위원
구 씨가 횡성군에 인생학교를 차리고, 자리를 잡을 예정이라서 횡성군에 직접 요청했다. 횡성 발전에 기여를 하면서 상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횡성에 기업 유치를 하고 귀농·귀촌인을 유치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신선마을 촌장 겸 인생학교 교장
횡성의 신선봉이라는 곳 앞에 세워지는 인생학교. 아직 학교는 없다. 하지만 곧 생길 학교에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 교장이라고 기재했다. 이곳은 아이를 키우는 30~40대 부모들이 자유롭게 놀고,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구 씨가 여기서 하는 역할은 마을의 어른이자 할아버지로서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에게 인생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내비게이터십코칭 대표
자신의 강점과 단점을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인생 설계도를 그려주는 일이다. 사실 시니어들은 은퇴 이후 미래 설계도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인생 설계도를 제대로 그려보는 것도 중요하다.
피플스그룹(現) 부이사장
HR의 노동조합 형태인 피플스그룹이다.
해가 뜨려면 아직 두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주위에 있을 법한 사물도, 스치는 바람도 멈춘, 고요 가운데 내가 서 있습니다. 사진 작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깰 때가 있습니다. 이번 촬영의 주제는 빛이 만난 바람과 물입니다. 이렇게 빛이 약할 때에는 조리개와 필름감도의 한계를 시간이 감당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 삼각대에 사진기를 고정하여야 시간이 확보됩니다.
먼저 사진기와 볼 헤드, 그리고 삼각대가 한몸이 되도록 모든 연결고리를 되풀이 점검하고 노출계로 셔터와 조리개 값을 계산해봅니다. 필름 스피드를 감안하더라도 210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코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아무리 머리로 상상하며 따져 보아도 빛이 양으로 덧입혀 만들어 낼 질감과 색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계산해 나온 시간은 3분 30초입니다. 평상시 사용하던 250 분의 1초에 비해 쉽게 감당하지 못하는 양입니다. 이렇게 큰 볼륨은 기계에 맡겨야 합니다. 일상적인 스틸 사진의 시간에 비해 4만 5000배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백, 천이라는 숫자는 사람의 감각을 넘어선다는 것을 사진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만 배라는 양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근육운동을 위해 날마다 턱걸이를 10번 하던 사람에게 1000번은 감당할 수 없는 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겨우 100배일 뿐입니다. 하물며 천 배? 만 배?
그렇게 빛의 양을 계산하는 사이 사진기가 4만 5000 번 필름에 덧칠한 빛이 드러납니다. 신선한 코발트색입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나무의 실루엣이 그럴 수 없이 섬세합니다. 멀리 그리고 더 멀리서 받쳐주는 산의 능선 덕이기도 했지만, 바람마저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이며 색입니다. 우리는 나온 결과를 색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의 감각은 놀랍습니다. 단순한 겉껍질의 색에 복잡한 인간의 오랜 기억이 덧입혀지는 순간입니다. 하루가 채 끝나기 전에 날은 또 다른 하루를 품어내듯, 내 생각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온갖 바람을 잉태하고 있는 몽골평원 새벽이 사진기에 담겼습니다. 어떤 바람도 풀어내기 전, 고요가 필름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렇게 푸른 바람의 연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작품입니다.
연작의 매체는 나무입니다. 바람을 끊어뜨리지 않고 드러내는 선(線)은 땅에게는 나무이며, 나무에게서는 가지가 담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신경 줄 시냅스(synapse)가 나무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언뜻 봐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 사람의 감각을 넘어서는 4만 5000배의 시간을 덧바르니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실체를 드러냅니다. 맨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섬세한 빛을 기계를 통해 이렇게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기를 사용해야 하는 시각예술의 한계가 오히려 인간의 눈을 확장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보입니다. 내가 못 본다고 없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나선 한국 실버의 몽골 정착기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여행은 인기 있는 오락이며, 취미, 유익한 공부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여행을 사진가로 평생 해온 우리 부부는 이름난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으며 돌아갈 집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쇼핑하는 여행이 아니라, 살면서 점검해 온 높은 가치에 나를 던지는 임상적이며 실험적인 삶을 위해 낯선 몽골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손 청 몽골국제대학교 예술감독)에게는 무리인 줄 알면서도 고국의 살림살이를 정리하였습니다. 재미를 위한 여행에서 더 짙은 삶을 위해 나이 먹은 부부가 소꿉장난처럼 삶을 던지는, 적어도 우리에겐 진한 여행기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디에도 고향이 없는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형제이길 바라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을 만날지, 어떤 작품을 만들지 스스로도 모르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바람처럼 만나는 몽골 생활의 기쁨과 설렘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사진으로 대상 수상. 저서 , 등.
소한(小寒)인 1월 6일 한국투자증권 광명 지점 객장에서 만난 임용목(林容睦) 할아버지는 이미 객장 유명인사였다.
광명 지점장은 “처음 봤을 때 70세쯤 되신 줄 알았다. 늘 욕심이 없으신 편이고 잘 웃고 즐기신다”라고 말했다. 잠깐,70세쯤으로 보였다는 말이 이상하다. 임용목 할아버지에게 태어난 해를 물어보니 1909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굴곡진 현대사를 몸소 겪으며 한 세기를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2015년인 올해로 106세!직접 객장까지 와서 주식 투자를 즐기는 106세 할아버지라니, 믿기는가? 그러나 그저 100세가 넘은 나이를 지탱하느라 애쓰는 수준이 아닌, 누구보다 즐겁게 사는 모습을 실제로 확인하니 의심은 경탄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가 배워야 할 임용목 할아버지의 특별한 장생(長生) 라이프 .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임용목 할아버지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일기예보가 빗나가서 따뜻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유난히 매서운 한파가 계속되는 올해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뚜벅뚜벅 계단으로 걸어 내려와 식당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이분이 한 세기를 자신의 나이로 채우고 올해로 106세를 맞이했다니. 굳이 비유하자면 한 사람이 태어나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은퇴를 하고, 다시 태어나서 또 한 번 은퇴를 맞이하는 걸 준비하고 있어야 맞먹을 수 있는 나이다.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이가 올해 112세. 임 할아버지와는 불과 6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 세기를 넘기고도 앞으로의 삶이 더욱 기대된다는 임 할아버지는 85세의 친구와 얘기하느라 객장에서도 활기가 넘친다.
“26년 전 45만 원으로 시작한 주식 놀이야. 아직도 꾸준히 즐기면서 하고 있는 중이지. 욕심을 부렸으면 예전에 사단 났을 거여, 내가 죽든가 돈이 떨어져 우울하게 살고 있겄지.”
임 할아버지가 놀라운 점은 나이뿐만이 아니라 그 나이에도 여전히 펄펄하게 일상을 즐기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귀가 다소 안 들리는 듯했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더 목소리에 깃든 힘이 뜨거웠고, 그런 기질은 30년은 어린 70대로 보이는 외모로 이어지는 듯했다.
“한 세기를 넘겼지만 앞으로의 삶이 더욱 기대돼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던 배움의 욕구
경기도 이천 장호원에 자리한 유난히 가난했던 집에서 태어난 임 할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초등학교 6년을 교장 선생님을 도와 학교 정비를 하는 대신 학비를 면제 받으며 다녀야 했다. 첫 직장은 일제가 운영하던 한국산업은행이었다. 그곳에서 말단 직원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15년 근속했지만 결국 해고된다. 일하던 15년 동안 월급으로 사서 읽은 6000권의 책으로 인해 민족의식이 강해진 그가 조선의 열등함을 비난하던 은행장과 부딪친 결과였다. 일자리는 잃었지만 배우고 싶다는 욕구는 더 커져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직장에서 안 좋게 끝나는 바람에 일본 입국이 가능할지가 불확실했다. 그러나 천운이 따른 덕분에 그는 일본에서 당시 유일한 종합대학교였던 일본대학교의 상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운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임 할아버지는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학도병 모집에 붙들려서 결국 중국으로 끌려가게 된다. 중국에서 갖은 고생을 겪다가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게 됐고 1946년 6월에 귀국하게 됐을 때 그의 나이는 37세, 어느새 30대 후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평생 베필을 만나게 됐다. 아내와는 결혼 이후 63년을 함께 했다. 결혼할 때 임 할아버지보다 17살 연하였던 20살의 아내는 어느새 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나이가 됐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7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임 할아버지가 다니는 밀알교회는 아내가 생전에 권사로서 설립한 교회다.
불혹의 나이에 고려대 1회 졸업생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가 민족학교의 기치를 걸고 고려대학교가 되어 2학년 학생을 모집한다는 걸 보게 됐어요. 그래서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게 됐죠. 1949년에 졸업하게 됐지. 1회 졸업생이었어요.”
청량리에서 영등포까지 걸어서 왕복 두 번 씩 의류배달을 해야 하기에 학교도 갈 수 없었다. 졸업하기까지 동기들이 출석을 해주고 해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했을 때가 이미 불혹의 나이인 40세였다. 결혼도 하고 학업도 이루고 나이도 찼으니 안정적인 중년을 맞이할 때였다. 그러나 시대 자체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졸업 후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져, 그는 피란을 떠나야 했다.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있는 자리는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던 자리였고, 동대문운동장은 임 할아버지가 가게를 운영할 때는 서울운동장이라고 불렸었다. 임 할아버지는 피난에서 돌아와 서울운동장 밑에 제일체육사라는 가게를 차려 이후 30년을 운영했다. 그러나 70세가 되던 해에 건물에 불이 나서 물건이 모두 불탔고 그걸 갚기 위해 가게를 정리해야 했다. 그는 서울에서 밀려나서 광명시에 정착해야 했다.
“광명시에 와서는 약간의 돈으로 장사를 좀 하다가, 지금은 5남매인 자식들이 생활비랑 이것, 저것하면 한 달에 한 90만 원 정도 받네. 생활하고 남는 돈은 객장 손님들에게 커피를 주거나 공원에 가서 노인들이나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고 있어요. 내가 광명의 사탕할아버지로도 유명해요(웃음).”
욕심이 없기에 건강하다
임 할아버지의 집안은 장수 집안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비록 아편을 하고 자다가 요절했지만 아버지는 그 시절에 85세까지 살았다. 하지만 장수와는 별개로 임 할아버지의 건강은 나이에 비해 이상적이다. 그는 아침에 혈압약, 저녁에 전립선약을 먹고 감기약을 타기 위해 병원을 가는 정도로 자신을 관리하고 있었다. 임플란트, 틀니 치료 안 하고도 치아가 여전히 튼튼했다. 음식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드셨으며 함께 식사를 하면서 밥알 한 톨도 남김없이 한 그릇이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의 건강함을 증명하는 지표는 인터뷰 내내 볼 수 있었다. 그런 활기는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바탕하고 있어서 가능한 부분처럼 보였다.
“욕심이 없다.” 임 할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도 지금까지 긍정적으로 살 수 있는 이유를 욕심이 없다는 것에서 찾았다. 살펴보면 그의 삶에는 욕심보다는 배움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독학으로 배우고 익혀 일본으로 갔던 일, 불혹의 나이에 대학교를 졸업한 일, 새벽 3시에 일어나 10시에 객장에 나와 주식 투자를 하는 모습 등등은 배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심이 없으면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심지어 젊은 시절의 그는 시를 쓴 적도 있었다. 당시 임성산이라는 필명을 썼던 그는 아직 무명이던 박목월, 서정주 시인들과 함께 문예지에 글이 실린 적도 있다고 했다. 대표로 뽑혀 학도병 수기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교우회가 교우들에게 제공하는 월례강좌에서도 꾸준히 30년동안 개근했다. 물론 지하철에서도 다른 노인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임 할아버지는 거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70대가 아니냐고 물었었다고.
100여 년의 인생, 잃지 않고 살았다
“살아오면서 못 해서 아쉬운 건 하나도 없어요. 난 그리 가진 게 많지 않은데도 내가 부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주식 투자를 시작한 이후로 돈을 잃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물론 처음 투자한 45만 원이라는 돈이 확 불어나지도 않았지만, 잃지도 않고 투자를 즐길 수 있는 수준. 임 할아버지는 그걸 하나님 덕분으로 돌렸다. 자신의 마음이 평화롭다 보니 하나님이 그 돈을 그대로 쓰라고 놔두고 있다는 것이다. 106세가 되었음에도 꾸준하게 가지고 있는 긍정의 정신은 천성이기도, 그동안의 삶을 통해 단련된 것이기도 했다.
“희망을 갖고 인생은 영원히 빛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에 이렇게 살 수 있었다고 봐요. 그래서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올바르게 사는 것, 그리고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게 중요해요.”
임 할아버지는 “진실로 열정을 다해 미련없이 살아왔다”며 “미련없이 살아야만 버리는 것도, 내려 놓는 것도 순수해질 수 있다”고 마무리 지었다.
‘58년 개띠’란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행처럼 쓰였던 말이다. 같은 개띠인 1982년생은 ‘82년생’이라고 할 뿐 ‘개띠’를 강조한 적은 없다. 그러나 1958년생은 다르다. 늘 개띠가 따라붙는다. 왜 유독 58년생의 띠만 유별나게 불렀을까. 1958년생은 어디서나 튄다. 숫자가 많고 삶의 스펙트럼도 워낙 넓다 보니, 어디에 가든 한두 명씩 만나게 되는 게 바로 58년 개띠다. 그래서 우연히 만나서 나이를 물어보면 ‘저도 58년 개띠예요’라고 할 만큼 흔하게 볼 수 있는 세대들끼리의 진한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세대들로서, 세상을 향해 짖는 그들이 가진 감성의 이유를 들여다본다.
어떻게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중간’이 되었는가
“어디를 가나 사람에 치이는 일은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의 숙명이었다”
1958년 생 동갑내기 4인의 삶의 질곡을 그린 은희경의 장편소설 127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58년 개띠가 겪어야 할 이야기들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 치여 살아야 하는 삶, 그것은 그들이 대학교에 입학했던 1977년도 대입 시험이 인구학자들의 예견대로 광복 이후 최다 학생들이 응시해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나타냈던 지표로도 증명된다.
모든 제도의 테스트는 58년 개띠부터였다는 말이 있다. 하라면 해야 했다. 콩나물 교실, 본고사가 면제된 첫 ‘뺑뺑이’ 세대, 고교평준화제도, 경쟁자로 가득했던 77학번, 국민교육헌장, 10월 유신, 긴급조치, 교련실기대회, 올드팝, 이소룡, 임예진 등이 58년 개띠들이 겪은 시대를 읽는 문화 코드다.
학교도 회사도 최고 경쟁률
58년들은 본성이 모험보다는 부지런히 일해서 먹고 사는 기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근면성과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원칙주의자라는 소리는 듣지만, 주변의 신뢰도가 높아 두둑한 성과를 이루게 됐다.
혹자들은 58년을 너무 앞서가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세대라고 했다.
사이먼앤가펑클, 양희은, 김민기의 노래를 듣고 공부하며 10대 시절을 보낸 이들은 자연스럽게 과거 세대의 문화를 유지하는 한편, 과거에 대한 반항으로서 정착된 포크와 블루스 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다. 가장 감수성이 강했을 때에 이미 양편의 문화를 접하며 이중적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20대로 들어서면서 더욱 격렬해진 민주화의 열풍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을 통해 극단적인 양편의 교차를 보여주게 된다. 잠시동안 있었던 민주화에 대한 희망은 금세 꺾이고 20대를 맞이한 58년 개띠들을 벼락처럼 내리친 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이들은 민주화 투사를 선택하여 화염병을 던지고 어떤 이들은 진압군이 되어 거리에서 친구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쳐야 했다. 58년 개띠의 정치적 허무감, 혹은 조심스러운 중도로서의 포지션은 이때 결정적으로 마련되지 않았을까.
제2의 인생을 마주하게 된 가장 커다란 세력
민주화로 인한 경제 호황이 시작된 90년대는 이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수도권 개발, 신도시들이 마련되기 시작했고, 58년 개띠들은 40대로 들어가면서 완연히 사회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그들이 중역으로 점프하는 시점에 IMF체제가 닥쳐왔다. 그들의 코앞에 놓여 있던 평생직장의 꿈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중산층의 중심이 됐어야 할 58년 개띠들은 중산층의 씨를 말리는 가혹한 구조조정 속에서 가족과 함께 죽음과 파멸에몰리거나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했다.
전병헌, 추미애, 정병국, 전하진, 김부겸, 심재철, 이정현, 한선교 등 국회의원들이 있고 주병진, 임백천, 신문선 등 방송인과 홍서범, 남경읍, 장미희, 이동준, 강남길 등 연예인이 있다. 미래에셋 그룹 박현주 회장, 표현명 KT렌탈 사장, 정미홍 J&A 대표이사, 강대석 신한금융투자 사장,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 김주원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 김석중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사장, 하태형 현대경제연구원 원장,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반도체총괄 사장 등 기업인이 많은 편이다.
지독한 혼돈의 시대를 거쳐 2015년, 어느덧 58년 개띠들은 사회적 은퇴, 그리고 제2의 인생을 바라볼 시점이 됐다. 살아오는 동안 겪어야 했던 온갖 변화는 그들에게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체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인구수는 그들에게 우리나라에서 흔치않은 ‘중도세력’으로서의 분명한 성격을 부여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제2의 인생 앞에 선 이들이 펼쳐 보일 행복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예술가란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는 자다. 예술을 나타내고 예술가를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글을 시작하기 전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의 아름다운 구절은 꼭 인용하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글을 쓰기 전 그 빛바랜 책을 들고 있으면 정말 빛이 난다고 느꼈다. 어린 마음에도 언젠가는 어머니가 아름다움을 창조할 날이 올 거라고 믿었고 그 믿음은 이루어졌다. 어머니에 관한 글을 쓰면서 ‘행복한 예술가’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어머니에 대한 최상의 찬사라고 생각했다.
현대문학의 어머니 故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작가. , 등 따스한 작품들로 사랑받아온 그녀도 작가이기 전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 박완서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이가 있으니, 그녀의 맏딸 호원숙(扈源淑·61)씨다. 호씨가 말하는 어머니 박완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봤다.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신 나의 어머니
1970년 마흔 살의 나이에 소설 으로 등단한 박완서 작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호씨는 어머니가 세상에 알려진 그날이 ‘혁명’과도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화려한 혁명이 휩쓸고 간 다음 날의 허전함처럼, 그녀도 남모를 상실감에 마음을 앓아야 했다.
“예전부터 ‘나는 박수근에 대한 글을 쓸 거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아 올 것이 왔다’ 생각했죠. 이미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어머니였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 거란 막연한 예감이 들었어요. 을 읽고 ‘이건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다. 그저 소설일 뿐’이라는 건 알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이제는 어머니가 우리만의 어머니가 아닌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셨다’는 깨달음을 줬죠. 그 깨달음이 저에겐 상실감을 안겨줬고, 어머니가 전과 다르게 행동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식구들의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장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내리셨죠.”
가장 평범하고도 가장 비범했던 어머니
박 작가는 한 강연에서 “마흔 살까지의 보통 여자의 삶의 경험을 지금도 파먹고 있다. 그동안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글을 쓰지 않고 보통으로 산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평범한 엄마로 살아온 넉넉한 경험들이 녹아나 그녀의 작품에 온기와 생명력을 더한 것이다.
“어머니는 40세에 글을 쓰셨고, 이미 다섯 아이의 엄마였어요.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 시대의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갑자기 그런 생각들을 하신 건 아니에요. 언젠가는 쓰려고 했던 인물이나 소재, 모티브 등을 다 어머니의 머릿속에 저장해 두셨어요. 어머니는 어쩌면 태생적인 작가였을지도 몰라요. 만나는 이웃이나 집에 일하러 오는 사람들에게도 층을 두지 않고 모두 인격적으로 대접을 해주셨어요. 그렇게 따뜻한 만남을 가졌던 인물들의 캐릭터가 모티브가 돼 문학 속에서는 특별한 인물로 다시 태어난 거죠.”
엄마의 말뚝
박완서 작가의 수많은 작품은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을 일깨워주는 보드라운 각성제와도 같았다. 호씨는 문학에 대한 어머니의 강한 소명의식이 일궈낸 산물이라 말했다.
“어머니는 40년 동안 단편, 장편, 수필 등을 끊임없이 글을 내시면서 당시의 화제작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어요. 항상 시대상을 읽으면서 쓰셨기 때문이죠. 그 시대의 아픔이나 갈등, 문제점, 인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나치지 않고 어떠한 형태로든 글을 쓰셨어요. 신문 연재소설도 쓰셨는데 산업화 과정에서 피폐해지고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이 어떻게 하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문학을 통해 세상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소명의식이 강하신 분이셨죠.”
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신여성’이 될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여자를 말하는데, 그녀 역시 교육을 통한 자존감 확립에 가치를 두었다.
“공부를 해서 자존감을 찾고 자유로운 여성이 되는 것이 곧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말씀하셨어요. 그렇다 해서 ‘공부해라’라고 말씀은 안 하셨어요. 늘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셨죠. 저에겐 공부하라는 말 대신 을 읽으라 하면서 재미있는 장면을 이야기해 주셨어요. 저는 그 장면을 상상하다가 그것을 보기 위해 두껍고 글씨가 촘촘히 박힌 책을 읽어냈어요. 그렇게 책을 읽고 나면 ‘아 해냈다’는 승리감이 들기도 했고, 어머니의 칭찬을 받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죠.”
웃음 뒤에 가려진 어머니의 쓸쓸함
유난히 밝게 웃는 사진이 많은 박완서 작가. 푸근한 미소로 기억되는 그녀지만, 호씨는 시간이 흐른 뒤 읽는 어머니의 글에 숨어 있는 슬픔을 발견할 때가 많다고 했다. 1988년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낸 가슴 아픈 일이 있기 전에도 그녀의 외로운 감성은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언젠가 을 보는데, ‘아 어머니께서 그때부터 벌써 외로움을 예견하셨구나’ 라고 느꼈어요. 그때는 우리 에게 슬픈 일이 생기기 전이었는데도 그런 외로운 글을 쓰셨더라고요.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이미 70대 노인의 쓸쓸함이라든가, ‘빈 둥지 증후군(자녀 독립 후 부모가 경험하는 슬픔)’ 같은 걸 먼저 느끼신 것 같아요. , 등을 봐도 노년, 중년 이후의 외로움에 대해 많이 쓰셨어요. 근데 그때는 어머니가 외로움에 대해 글을 써도 어머니는 외롭지 않다 생각했었어요. 글은 글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버지와 남동생이 떠난 뒤 찾아온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박 작가의 책이 나오자 사람들은 ‘이 사람이 슬픔을 극복하고 글로 승화시켰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속하기만 했다.
슬픔이 가시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호씨는 뼈마디가 녹는 듯한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자신의 아픔을 쓴 글이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된다면 ‘내가 밥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셨어요. 요즘 어머니 작품을 볼때 그 시점을 먼저 봐요. 이 글을 언제 쓰셨는가 보면 그땐 무슨 일이 있을 때였다는 걸 알게 되죠. 작품 속 인물을 통해 그때는 몰랐던 어머니의 감정을 많이 느껴요.”
어머니는 평등주의자
사소한 것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박완서 작가의 통찰력. 세상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봤던 그녀였기에 가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시선에서 태어난 문학은 삐뚤어지고 모난 우리의 마음을 둥글게 다듬어주었다.
“하찮은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대단함, 대단한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하찮음을 단순하게 쓰진 않았어요. 그런면에서 보면 어머니는 평등주의자예요. 잘난 사람도 약한 구석이 있고, 약한 사람도 훌륭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고, 실제로 발견해내는 분이셨죠. 그 발견이 곧 어머니의 문학이에요.”
‘박완서라는 작가가 있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축복’이라는 찬사를 받아왔지만 늘 겸손을 잊지 않았던 그녀다. 젊은 작가들과 소통하면서도 그들을 거느리려 하지 않았고, 상석보다는 함께 둘러앉아 대등하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혼자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으셨어요. 그 겸손함이 과장된 낮춤이 아니라 진실된 느낌이었어요. 자존심을 세울 때는 당당하게 행동하시면서도 항상 다른 이를 존중 하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태도가 제 인생에 가장 큰 교훈이 됐어요.”
문학과 일치했던 어머니의 삶
“어머니는 생활과 떨어진 문학을 하신 분이 아니셨어요.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았고, 그걸 가장 중요시하셨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쓰셨고, 겪지 않았더라도 작가의 모습과 생각을 바탕으로 상상하셨어요. 그래서일까 어떤 인물도 악인도 아니고 완전한 선인도 아니게 쓰셨던 거 같아요. 어머니 작품을 봄으로써 다양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어요. 그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머니의 작품이 주는 큰 가르침이죠.”
호씨는 “나는 박완서 작품을 읽으며 성장해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머니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거고, 같이 느끼고 고민 한 모든 것들을 작품을 통해 이야기해 주셨던 거죠. 어머니의 작품은 그대로 어머니의 역사가 되었고 우리의 역사가 된 거예요.”
어머니와 함께한 행복의 나날들
박완서 작가가 평생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이는 그녀의 맏딸인 호씨였다. 호씨는 그런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담아 책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이전에 나왔던 호씨의 책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이야기와 개인적인 글들이 많았던 반면 이번 책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느낀 그리움이 주를 이룬다.
“제일 행복했던 기억은 마당을 같이 가꾸고, 피어나는 꽃을 보며 즐거워했던 거예요. 제가 꽃을 사오면 함께 심고, 그 꽃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그런 날들이 가장 행복했어요. 또, 어머니께서 제가 해드린 음식이 맛있다며 칭찬해주셨을 때도 참 행복했고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거. 그랬던 나날들이 당시에도 굉장히 소중하고 행복해서 깨질까 봐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어요. 어머니는 항상 같이 있는 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신 분이셨으니까요.”
서울 강남구 동부금융센터빌딩,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100세 시대’를 말하는 전 부총리이자 현 SA(Senior Achievement) 대표인 강경식 대표의 눈빛은 노련함과 친절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대화 내 상식을 파괴하고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는 자유로운 사고가 그의 넉넉한 아우라가 되어 빛났다. 그가 제창한 SA는 시니어들의 성공적 노후를 위해 마련된 사회운동으로, 모바일을 기반으로 한 자유롭고도 다양한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다. 100세시대 참여마당, SA를 창립하게 된 배경과 시니어들의 등대로 자리하는 그의 존재감을 확인해본다.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Q. 100세시대를 맞이하는 현재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사실 100세시대 이야기들은 많이 하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시스템이나 정책에 대한 발상 자체는 옛날 ‘환갑시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틀에서 100세시대를 생각한다는 점이 문제다.
소위 과거의 환갑시대 시스템은 인생을 초년, 중년, 노년의 삼분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공부할 때가 따로 있고, 일할 때가 따로 있다는 게 아니다. 그런 구별이 없이 일생이 하나로 쭉 연결이 되면서 이 두 가지가 함께 융합된 생활을 해야 한다.
과거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94~95년도에 21세기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해서 부문별로 모아 공론사업을 벌였다. 연구하고, 추진해봤지만 그런 것들이 지나고 나니 대개 일회성으로 끝나고 지속성이 없더라.
Q. SA의 시작은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1960년대 초반에는 평균수명이 50대 초반이었다. 지금은 80대 초반 정도다. 따지고 보면 30년 정도가 길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한다. 실제로 과거보다 늘어난 수명 연장의 혜택을 받아 현실을 살아가는 노인들이 있는데 그들에 맞춘 시스템이 필요하다 느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한번 모아봐야 겠다 해서 1년 반 전부터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한 만 명 정도 모아서 대대적으로 하려 했으나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일단 시작했다. 차차 1주년, 2주년 행사를 하며 늘려갈 계획이다.
나는 2002년부터 아이들에게 경제교육을 하고 있다. 386들이 집권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시장경제교육 을시켜야겠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뉴욕에서 JA(Junior Achievement)를 알게 됐다. 아이들에게 경제 교육을 하는 매뉴얼이 굉장히 좋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JA 코리아를 만들었다.
당시 그렇게 ‘청소년의 성공이 우리 모두의 성공이다’라고 외쳤던 ‘주니어 어치브먼트(Junior Achievement)’를 응용하여 ‘시니어의 성공이 우리 모두의 성공이다’라는 ‘시니어 어치브먼트(Senior Achievement)’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Q. SA를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슬로건이라면?
‘얼론 투게더’(Alone Together)다. “홀로서기, 그리고 함께 가자.” 각자가 자기 인생을 홀로 선다. 이제는 예전 대가족제 시대처럼 자식들한테 효도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얼마 안 있으면 은퇴 노인 한 명당 일하는 인구는 둘도 안 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결국은 ‘Alone!’ 각자 자기 인생을 홀로서기 해야 한다. 투게더는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 사는 사회를 말한다.
오근재 전 홍익대교수가 쓴 이라는 책은 우리나라의 퇴직한 사람들이 마치 효용을 다한 쓰레기처럼 퇴적된 공간에 머문다는 내용을 담았다. 정년퇴직한 시니어는 지식과 경험을 고루 갖춘 우리 사회의 엄청난 리소스다. 그런 리소스를 활용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손해다. 이러한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도움 되고 사회에도 도움이 된다. 자원을 어디에 투입해야 생산성을 발휘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Q. 구체적으로 실행하고자 하는 활동이라면 무엇이 있는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여러 가지 활동 중 하나가 있다. 같은 아파트 사는 시니어하고 같은 아파트 사는 아이하고 함께 베란다에 상자 등을 놓고 농작물을 심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본인과 아이에게 정서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농작물을 심고 관리하는 것은 시간도 할애해야 하고 손이 많이 간다. 이런 일을 시간이 비는 시니어들이 함께 하면 좋지 않겠나 하는 거다. 지역사회 발전에도 도움 되고, 자원으로서 은퇴 시니어들도 생산성 있는 활동을 하게 되고, 이런 것이 ‘투게더’다. 이 활동을 실행한 날 참여한 사람이 250명 정도 있었는데, 다들 취지는 좋다고 한다. 그리고 이걸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이냐 하는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익 단체가 아니다. 나는 SA에 대해서 보통 생각하는 단체의 콘셉트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있다. 사실 SA에 모인 사람들 중 상당수도 무언가를 내걸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는데, 그런생각을 바꾸는 데도 오래 걸렸다.
1968년에 만들어진 해외의 어떤 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4살부터 19살까지 학년 구분이 없이 다닌다. 교과서, 커리큘럼, 교실도 없다. 전부 앉아서 논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친구에게서도 배울 수 있고 선배나 후배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하고 싶은 것을 게시판에 적어내면 아이들이 사인을 해서 함께 클래스를 만들고, 아이들 한 표, 선생님도 한 표, 교장도 한 표 이런 식으로 규율도 만들고 한다. 짜여진 틀 대신 자기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파고들 수 있어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에도 잘 간다. 그야말로 행복한 생을 사는 아이들이다. 우리 아이들은 살아갈 때 문제가 생기면 엄마부터 찾는데, 그 아이들은 문제해결능력을 스스로 키웠다. 교육이라는 것은 지식을 전수 받는 것인데, 요즘은 지식을 얻기 위해선 웹서핑만 하면 가능한 시대다. 그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발적으로 찾아 몰입하는 것을 더 중요시 해야 한다. SA도 똑같은 것이다. 회원들 각자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함께 여행도 가고, 국내 탐방도 가고,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 하면 그것도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하고. 나는 성과가 천천히 나오더라도 계속 갈 생각이다. ‘Slow but Steady’.
Q. SA에 가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스마트폰 번호와 자기 이름만 있으면 가입이 된다. 이메일 주소는 옵션이다. 전화번호는 있어야 그래도 소통이 되니까. 그 정도의 최소한의 소통 창구만 있으면 된다. 다른 무엇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주로 문자로 소통한다. NSI(국가경영전략연구원) 사이트를 빌려 쓰는데, 홈페이지는 따로 만들어 갈 예정이다.
나중에 독자적으로 운영될 정도가 되면 사단법인 같은 구조는 복잡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로 운영하고자 하는데 현재 고민 중이다. NPO와 같은 형태의 단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할수 있겠다.
Q. SA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미국에는 연령제한금지법이 있다. 우리나라도 연령제한금지법을 만들고자 한다. 활동하고 싶은 사람에게 제도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은 없어야 한다. 소위 평생 경력으로 사는 데 방해되는 요소를 차단하자는 의미다. ‘돈 달라고 안 한다. 취직시켜달라고 안 한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텐데 못하게 막지는 말아라’는 것이다. 그게 민주주의 사회이고 시장경제 사회다. 이런 데에 관심이 있고 참여 가능한 사람만 모아서가고자 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다 설득하고 이끌어 갈 수는 없다.
그러니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 다. 단, 무언가를 숨기거나 패거리를 만들진 않는다. 열려 있다. 전화번호만 있으면. 그래서 ‘참여마당’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강압적으로, 동기 없이 참여만을 강요하는 단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는 오는 사람 안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방식이다.
기존과는 다른 이런 방식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래 걸리기 때문에 우선은 익숙해지게 하는 것 자체가 목표다. 그런 방침이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내가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다 흥미를 보이고 인연이 되면 이야기를 해서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언론에 공개된 오비들도 일부 소식지에 알리는 정도다. 입소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SA를 통해서 여러 가지 활동이 있을 수 있다. 함께 북카페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떠한 부조리에 대해 사진을 찍어 신고하는 활동을할 수도 있는 것이고, 동네에 독거노인들이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이들을 돌보고 약간의 돈을 줄 수도 있고. 이렇게 하면 공무원을
채용하는 것보다 큰 부담 없이 사회에 필요한 일들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도움이 될 만한 걸 모아서 SA뉴스 이런 식으로 해서 몇 번 발행했다. 아직까지는 정보 위주였지만 앞으로는 활동 위주의 뉴스가 될 것이다. 그들의 활동을 알리고 그걸 보고 관심 있는 분들이 신청을 하는 것이다.
웹진도 활용할 계획이다. 운영 시스템은 준비돼 있으나 무엇이 올라 오느냐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마트폰을 통해 보고, 전달하고 쌍방향식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
Q. 삶의 성공 기준은 무엇인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내년이면 고등학교 졸업한 지도 환갑이다. 동창들끼리 고졸 환갑잔치를 하려 한다. 내가 문집을 내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고등학교 때의 강경식’에게 ‘지금의 강경식’이 편지를 쓰자는 콘셉트였다. 그걸 나중에 아이들에게 주면 좋지 않겠나 했는데, 반대가 심해 채택은 되지 않았다.
이런 것이 어찌 보면 과거로의 복귀다. 인생이라는 것은 한 번 살지 두 번 못 사니까 그렇게라도 복귀해보자 하는 것인데, 다들 복귀하기 싫단다.(웃음) 그 친구들이 봤을 땐 내가 인생을 다 이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있다. 우리 살 때는 가난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생각을 못 했다. 선택의 기준이 좁았다. 요새 아이들도 그런 좁은 선택의 기준을 강요받는 게 안타깝다.
Q. 후배 시니어들에게 던지는 화두라면?
내가 골프를 가끔 치는데, 스코어를 안 본다. 잘 치고 기분 좋은 것만 기억한다. 애써 나쁜 것을 뭐 하러 알려고 하나.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을 되풀이하지 않는 선에서 끝내고 그 기억은 털어버린다.
그리고 사람마다 취향도, 롤모델도 다르다. 그러니 자신의 고정관념을 덮어씌우는 것만은 안 했으면 좋겠다. 나도 누군가 조언을 구할 때 그 사람이 아주 잘못된 길로 갔을 때만 지적하는 정도다. 그 사람의 선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말을 해줄 수도 없고, 그 사람 자신도 어떠한 선택을 했다고 후회할 수도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