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의 위상이 올라간 건가 아니면 떨어진 건가? 최근 도깨비의 출몰로 여자들 마음이 뒤숭숭하다. 그런 멋진 도깨비의 등장이 전통적인 도깨비의 권위에 손상을 입힌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무섭기는커녕 데이트라도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인 도깨비라니! 도깨비뿐만 아니라 저승사자마저 팬클럽이 생길 정도니 저승의 권위가 온통 땅에 떨어졌다.
요즘 어린 애들이 저승사자를 몰라서 그렇지 저승사자가 얼마나 무서운가. 옛날 동네 뒷산을 올라가면 서낭당이 있었다. 서낭당 옆에 상여가 놓여 있는 상엿집을 지날 때마다 느꼈던 등골이 서늘한 기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염라대왕이 보낸 저승사자는 곧 죽음에의 초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무서운 저승사자가 그토록 귀엽다니 이런 도착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수천 년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음산한 전통이 드라마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을 보니 드라마의 위력이 대단하다. 그러나 도깨비의 책임도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그토록 열심히 활동하던 도깨비들이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밤에 화장실에서 놀던 달걀귀신은 어디 갔으며 빗자루 귀신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사실 우리나라는 도깨비 친화적인 나라였다. 시골 마을마다 도깨비 설화가 없는 곳이 없고 동네 할머니들도 자신만의 필살기인 비장의 도깨비 이야기가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있었다. 우리 외할머니도 이야기를 조르는 우리에게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도깨비 이야기를 풀어놓으시곤 했다. 늘 비슷한 이야기였지만, 들을 때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오죽하면 역사서인 삼국유사에도 도깨비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경주 황천 언덕에서 밤마다 귀신들과 놀던 화랑 비형랑은 귀신들의 대장이었다. 진평왕의 명을 받아 귀신들을 동원해 하룻밤에 다리를 놓기도 했다. 그래서 이름도 귀교(鬼橋)라고 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러나 진짜 귀신이 곡할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 같은 비형랑 출생의 비밀에 있다.
비형랑의 아버지는 신라 25대 왕인 진지왕이다. 그러나 이름처럼 진지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폐위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비형랑의 탄생과 관련된 기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진지왕은 경주 사량부에 사는 도화 부인을 흠모했으나 남편이 있는 도화 부인이 거절하자 만약 남편이 없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얄궂게도 진지왕이 먼저 죽었다.
2년 후 도화 부인의 남편이 죽자 깊은 밤에 죽은 왕이 찾아와 약속을 상기시켰다. 삼국유사에 이렇게 나온다. ‘왕은 7일간 머물렀다. 그동안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후 왕은 사라지고 여자의 몸에 태기가 생겼다.’ 비형랑이 이렇게 태어났으니 그가 귀신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할머니는 귀신을 만나면 반드시 아래를 바라보라고 일러 주셨다. 귀신을 올려다보면 귀신이 산만큼 커져 무섭기 짝이 없지만, 내려다보면 좁쌀만큼 작아져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도깨비들은 그러니까 우리들의 염원을 담은 피사체인 셈이다. 한국인들은 마음속의 소망을 도깨비에 의탁해 표현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최고 기업 총수가 구속되는 현실은 마치 도깨비 장난 같기만 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마냥 남의 일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마음에 깃든 사악한 기운들이 모여 도깨비 같은 세상을 만든 것은 아닌가? 그동안 잠잠하더니 멋진 두 사내 도깨비가 세상에 나와 도시를 횡행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이제 사진은 대중화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스마트폰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답게 보이는 장면이 있으면 스마트폰을 바로 꺼내 촬영을 망설이지 않는다. 반면에 사진을 취미로 막 시작했거나, 조금 배운 사람들은 무엇을 찍어야 할지 망설인다. 사진 소재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이다. 또 사진을 시작한 지 꽤 됐고 사진 찍기가 취미인 사람들도 촬영지에 가면 주변을 휙 둘러본 후 “찍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 일쑤다. 하지만 피사체를 보는 마음과 시선을 달리하면 주변에 사진 소재가 널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보기 나름’이란 말과 같이 피사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그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눈높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위치를 달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습관의 이면에는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이 있다.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고 뭘 계획해도 작심삼일이 된다. 현재 상황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더 괜찮은 사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 자기 편한 대로 한다면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성장은 없다. 사진에도 마찬가지다. 사진 찍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다. 새로운 시선이나 마음으로 접근하면 주변에 찍을 거리, 즉 사진 소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상생활 중에 사진 소재를 발견해 촬영한다면 사진 작품을 위해 별도의 시간을 낼 필요가 없게 되어 귀중한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필자는 그런 방법으로 작품을 만든다. 사진작가나 사진을 취미로 하는 분들이 사진 촬영을 위해 서너 번은 다녀왔을, 해외도 간 적이 거의 없다. 해외 사진 촬영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 부담할 여력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일상에서 소재 찾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생활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나는 풍광이나 물체가 곧 사진 소재다. 매일 다니는 같은 곳이어도 사계절에 따라, 아침저녁 시간대에 따라 다르다. 해가 맑게 뜨는 날과 흐린 날, 눈이 쌓인 모습과 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은 같은 길이어도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비가 내린 다음 날도 아침 풍경이 다르다. 줄곧 다니는 길도 시간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소재는 많다는 의미다. 주변의 소소한 것들이 모두 사진 소재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도 찍어보자. 눈이나 눈썹, 발가락이나 불거진 힘줄, 발등도 찍어보자. 앞의 사진은 이른 아침 창틀 사이로 비친 한 줄기 햇살이 너무 좋아 냉장고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필자의 발 옆에 놓고 찍은 사진이다. 늘 함께 생활하는 가족과 자주 만나는 친구의 환하게 웃는 모습도 훌륭한 소재다. 일부러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도 좋다. 강아지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도 훌륭한 사진 소재가 된다. 그리고 집집마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한두 개의 오래된 인형도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찍어도 된다.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토바이를, 기타를 좋아하면 기타를 사진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집 안에서 가꾸는 화분과 장식품도 소재가 된다. 바깥에서도 직장 주변의 오가는 길목에서 수없이 만나는 자연과 사람들,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 홀씨, 서산에 걸려 있는 초승달과 하현달, 보름이 되면 창문 사이로 찾아드는 둥그런 보름달도 창틀을 액자로 해서 찍을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이러한 시선으로 다가가면 언제 어디에 있든 찍을 거리는 수없이 많다. 더불어 피사체를 바라보는 눈높이(사진 전문용어로 앵글)를 다양하게 해서 보면 피사체는 더 늘어난다.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서 다양한 피부 증상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후기의 걸출한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당헌 서매수(戇憲 徐邁修, 1731~1818)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심한 여드름 자국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부과학을 전공한 뒤 그동안 수많은 여드름 환자를 진료해온 필자가 보기에도 서매수 초상화에 묘사된 여드름 자국은 생생하기 이를 데 없다.
서매수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흔히 관찰되는 천연두 자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얽은 자국’이 코, 입 그리고 턱 주위에 퍼져 있었다. 요컨대 코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안에 ‘얽은 자국’이 모여 있었고, 이마와 양 볼에는 상대적으로 증상 밀도가 낮았다. 이는 여드름 병변의 교과서적인 분포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여드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피부의 기름샘, 즉 피지선(皮脂腺)이 상대적으로 코와 입 주변에 몰려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피사체인 선비가 청소년 시절 겪어야 했을 심리적 고뇌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어 애잔하기까지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드름 때문에 겪는 아픔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날, 한 지방법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법원에서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라 고개를 갸웃하며 받았다. 그런데 첫마디가 “저는 ○○○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말을 이어왔다. “얼마 전 여드름을 치료해주신 ○○○의 아비입니다.” 그제야 환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대학생인 그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을 때 필자는 내심 놀랐다. ‘어떻게 얼굴을 이런 상태가 되도록….’ 그 정도로 여드름 병변이 심각했던 것이다. 대학생인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방치한 부모의 무관심을 속으로 탓했다.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의 상태는 예상보다 빠르게 호전되었다. 여드름이 치유되자 우울해 보였던 청년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담당 의사로서도 너무나 기쁜 일이라 자연스레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환자의 부친은 필자에게 “요즘 아들 방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서, 너무 기쁜 마음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젊은 학생이 그동안 느꼈을 마음고생이 한층 무겁게 다가왔다. 그 무렵 인천에 사는 한 여학생이 심한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문득 필자가 전문의 수련 과정을 밟을 때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하찮은 뾰루지 하나가 이마나 볼에 생겨도 힘들어하는 환자가 있다. 의사는 그런 마음을 늘 헤아려야 한다.” 환자의 부친과 통화를 하면서 새삼 스승의 가르침을 한 번 더 마음에 새겼다.
앞서 언급한 초상화의 주인공도 젊은 시절 심한 여드름 때문에 꽤나 마음고생을 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여드름을 ‘청춘의 꽃’이라고 했던가. 이 그럴듯한 말에 숨겨진 심리학적 해석을 차치해도, 그동안 여드름 때문에 필자의 진료실을 찾았던 수많은 환자들의 잔영이 기록영화처럼 뇌리를 스치는 날이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창덕궁 후원에 부용지라는 연못이 있다. 거기 갈 때마다 흐뭇한 추억에 잠긴다. 연못가에 큰 단풍나무가 한 그루 있다. 거기 올라가 찍은 사진이 필자 인생에서 큰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1972년 대학교 사진반에서 활동할 때의 일이다. 창덕궁 후원에서 전국의 프로 아마추어가 모두 참가하는 ‘전국 사진 촬영대회’가 있었다. 필자의 집에서는 필자가 사진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 사진을 찍을만한 카메라도 없었다. ‘미놀타 하이매틱’이라는 2안리플렉스 카메라로 기념사진이나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술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주제를 제외한 배경은 흐리게 찍히게 하는 아웃 포커스 효과가 있는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필수였다. 후배가 일안리플렉스 니콘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필름을 한 통 사주고 절반씩 찍기로 했다. 오전에는 광선 조건이 안 좋기 때문에 오후 측광이 들어 올 때까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측광이 되는 오후 4시쯤 되자 후배의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연못가로 갔다. 마침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여인들이 있어 피사체로 잡았다. 한복도 아름답고 춤추는 모습은 더 아름다웠다. 사진은 물에 비친 모습이 있으면 더 아름답다. 이것을 모두 한 커트로 잡아 셔터를 눌렀는데 3장에서 멈췄다. 그 당시 필름은 100피트 필름을 암실에서 20장으로 잘라 파는 형식이었는데 간혹 자투리에 걸리면 그런 일이 있었다. 후배는 정확히 먼저 10장만 찍었다.
인화를 해보니 단 3장의 사진이었지만, 왠지 큰일을 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유명 상업사진가로 이름을 떨치던 고문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술만 마시다가 겨우 3장밖에 못 찍었다는 것에 대해 큰 질책을 당했다. 사진 예술을 대하는 자세가 불량하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자신 있게 내 보인 사진도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느껴져 일단 사진을 대회 주최 측에 필자 임의대로 접수시켰다. 고문 선생님도 당연히 여러 작품을 접수시켰다.
심사 발표 며칠 전 다른 촬영대회 입상작을 전시한 사진전시회에 갔었다. 그때 대상작이 필자가 찍은 사진과 거의 유사했다. 장소와 모델, 그리고 화면 구성이 거의 비슷해서 놀랐다.
드디어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필자 작품이 당당히 입상한 것이다. 고문 선생님은 여러 작품을 냈는데 한 편도 입상을 못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입장이 ‘청출어람’이라 하기에는 난처했다.
이 작품은 1979년 미국은행(Bank of America) 재직 중에 다시 한 번 큰일을 냈다. 당시 미국은행 본사에서 월간으로 사내보가 나왔다. 전 세계 미국은행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진 콘테스트가 있어 이 작품으로 응모했다. 꿈에 내 작품이 표지사진에 실린 것이 보였다. 출근하자마자 지점장이 불러 갔더니 잡지 표지사진에 내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이었다. 꿈과 현실이 딱 맞은 것이 처음이다. 이 일로 당시 사내 결혼을 목표로 연애 중이던 아내가 처가에 알리고 장인어른이 필자에게 당시 50만원을 주며 카메라를 사도록 했다. 그 돈으로 니콘 FM을 샀다. 꿈에 그리던 일안리플렉스 카메라를 갖게 된 것이다.
병원 진료실을 찾는 환자나 그 가족이 전해주는 사연은 참으로 다양하다. 특히 희귀한 피부 질환을 앓는 환자를 만나면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임상 진료 분야와 달리 피부 질환의 특성상 다른 사람 눈에 쉽게 노출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안면에 나타난다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고(故) 이강칠(李康七, 1926~2007) 선생이 편찬한 귀중한 화보 (탐구당, 1972)을 살펴보다가 유복명(柳復明, 1685~1760)의 초상화를 만났다. 얼굴색이 좀 어둡게 그려져 있기에 휴대용 단안확대경으로 피사체의 안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이 온통 털로 뒤덮여 있었다(그림). 즉 초상화 주인공의 코에서는 여드름 자국이 보였고, 안면은 다모증(多毛症, hypertrichosis)이라는 희귀 피부 질환을 앓고 있음이 확인됐다.
남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다모증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안 된다. 수염이나 눈썹 등에 유난히 많은 털은 고민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미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androgen)이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위에서 체모(體毛)가 두드러지게 많이 난다면 상황은 다르다. 온몸 또는 얼굴이 털로 뒤덮인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수년 전 해외 가십으로 소개된 ‘원숭이 인간’이 그 한 예다.
초상화 주인공인 유복명의 경우 안면 다모증이 보이지만, 다행히 털의 밀도가 아주 높지는 않다. 눈 밑 부위까지 난 안면 전체 체모의 올이 머리털처럼 굵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의 손등에도 굵은 털이 났으리라 짐작된다. 피사체인 주인공이 유·청소년기에 ‘털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으리라 생각하니 필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초상화를 보면서 한 환자가 떠올랐다. 임상에서 눈썹이 없어 진료실을 찾는 무모증(無毛症, atrichosis) 환자를 만나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지만, 다모증 환자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다. 어느 날 여성 한 분이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필자의 진료실로 들어왔다.
의자에 차분히 앉는 여성의 얼굴 표정을 보며 왜 눈길을 피하며 이야기하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환자를 보는 순간, 참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는 여성에게 나타나는 다모증의 일종인 조모증(粗毛症, hirsutism)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환자는 중학교 선생이었는데, 입 주변과 윗입술 그리고 턱 부위가 옅은 잔털로 덮여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검게 보였다. 국소 다모증이었다. 사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임상적으로는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환자는 철없는 학생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해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임상적 원인 분석을 떠나 미용 차원의 교정이 가능한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피부 치료용 레이저광 치료 기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다양한 레이저 치료 기기가 개발되어 많은 환자가 큰 도움을 받고 있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제모(除毛)용 레이저 기기는 가장 뛰어난 임상 효과를 보인다. 필자는 1980년대에 진료실을 찾아왔던 그 여선생도 레이저 치료를 받고 밝은 얼굴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면서 조선시대에 살았던 유복명 귀인에게 막연하게나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은퇴 후 주어진 한가한 시간, 즉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이냐는 설문에 가장 많이 희망하는 것이 취미생활이다. 100세 장수시대에서 100세 건강시대이기에 주어지게 될 여가는 해가 지날수록 늘어난다. 여가생활이 필요한 이유다. 인생 1막에서는 생존과 경쟁을 했다면 후반 인생은 시간과의 전쟁을 하게 된 셈이다. 사진활동은 여가를 잘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취미생활 중 하나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선호한다. 카메라 기술, 특히 스마트폰에 부착된 카메라 기능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면서 사진의 대중화가 앞당겨지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사진 취미활동에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KBS 1TV의 에 사진작가로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방송을 봤던 아내의 친구와 그 남편들은 “저 친구(필자를 지칭)는 먹고살 만하니 사진이나 찍고 다니네”라고 얘기하더란다. 돈이 많이 드는 취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그런 형태의 취미활동을 해왔음도 사실이다. 우선 사진 장비들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밥을 먹는데 꼭 은수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손으로도 먹을 수도 있다. 은수저를 고집하면 돈이 더 들게 마련이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따라 기기가 달라져도 된다. 소셜 미디어용으로 쓸 사진이라면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하다. 적은 비용으로도 얼마든지 사진 취미를 즐길 수 있고 오히려 이러한 취미가 기회가 되면 돈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필자의 경우가 그렇다.
사진을 취미로 하는 분들은 장비에 많은 돈을 들이는 편이다. 고급 카메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고급 카메라의 기능과 성능은 우수하다. 일반 카메라가 갖고 있지 않은 여러 가지 뛰어난 성능도 연출할 수 있다. 화질이나 사진의 크기 등도 탁월하다. 환경이 열악한 환경에서 피사체를 담아내는 기술도 뛰어나다. 특히 전문 사진작가들이나 기자들은 고급 카메라를 선호하게 마련이다. 용도에 맞는 사진을 찍기 위해 좋은 카메라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직업인으로서 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대형 사진 작품을 만들 때도 거기에 맞는 장비가 필요하다. 천체를 관측하는데 작은 망원경으로는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취미의 본질은 무엇인가? 취미로 시작한 일에서 전문가가 되기도 하지만, 취미는 말 그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활동이며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여가활동이다. 사람들은 간혹 이러한 취미와 전문가의 영역을 혼동하고 있다. 물론 사진을 열심히 공부하고 촬영 기술을 익혀 전문 사진작가가 되어 직업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면 사진 찍는 일은 취미가 아닌 직업이 되는 셈이다. 사진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얻어내면 말이다. 그림이나 서예, 조각, 집필 등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예술활동을 우리는 취미활동으로 보지 않는다. 취미는 본업이 아닌 또 다른 활동이다. 그러므로 취미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된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본업이 아닌 순수한 취미로 한다면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
촬영 도구의 발달로 스마트폰으로도 사진 취미를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현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소형 카메라나 스마트폰 카메라 기능을 스마트하게 이용하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동 촬영 모드를 주로 이용한다. 아무리 훌륭한 기능이 장착되어 있어도 잘 활용하지 않는다. 화질도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고 편리성도 늘어나 셔터만 눌러도 어느 정도의 사진이 나온다. 심지어 “침팬지도 사진을 찍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러한 기능들을 익혀 제대로 활용하면 취미로 사진을 즐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요즘은 사진을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사진의 소재도 우리 주변에, 일상에 널려 있다. 이러한 점들을 이해하고 사진 취미활동을 하면 적은 비용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뿌리가 명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뿌리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우뚝 선 장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 바로 초상화다.
명나라 왕조 376년(1368~1644), 청나라 왕조 275년(1636~1911) 도합 51년을 거치면서 초상화 제작과 관련한 중국의 화풍(畵風)도 많이 바뀌었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규모가 너무나 광대해 문화적 통일성을 간직하고 유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시대와 왕조에 따라 각기 다른 화풍이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화가가 너무 작고 사소한 것에 급급하면 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畵者謹毛而失貌]’라는 생각이다. 이는 당시 초상화 제작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국 초상화의 뛰어난 필력(筆力)과 무관하게 시대와 왕조에 따른 화풍은 결과적으로 ‘질의 들쑥날쑥한 현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우리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지켜온 무변(無變)의 원칙과 사뭇 다르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피사체의 부(富)나 권력의 고하와 무관하게 많은 경우 조정에서 신하에게 내린 하사품의 성격을 띠었다. 더불어 조정의 도화서(圖畵署) 출신 화인(畵人)의 손품이 묻어 있어 높은 질적 수준을 유지함과 동시에 ‘균일성’도 간직할 수 있었다.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개최한 ‘조선공신(朝鮮功臣)’ 전을 둘러본 적이 있다. 왕을 헌신적으로 섬긴 공을 인정해 조정에서 신하에게 하사한 초상화를 모은 전시회였다. 작품 중 조선시대 후기 숙종(肅宗)과 영조(英祖)시대를 산 오명항(吳命恒, 1673~1728)의 분무공신상(奮武功臣像)을 보며 몇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필자가 오명항의 초상화를 처음 본 것은 1980년대 초다. ‘초상화’ 하면 피사체의 모습이 화려하지 않아도 우아한 것을 기대하는 ‘관습’에 젖어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오명항의 초상화는 안면이 온통 천연두(天然痘, 媽媽)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간(肝) 질환 증상과 비슷한 흑달(黑疸)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사진 1).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1950년대만 해도 거리에서 천연두를 앓은 흔적의 얼굴을 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한 필자로서는 흔히 일컫던 ‘곰보 자국’이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명항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무서울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천연두 자국이 있는 조선시대 초상화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얼굴까지 아주 검게 그린 초상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만성 간경화증(肝硬化症)에서는 먼저 황달(黃疸)이 나타나고, 말기가 되면 흑달로 이어진다. 초상화에서 오명항의 사인이 무엇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오명항의 다른 초상화(사진 2), 즉 ‘분무공신상’을 보면서 필자는 또다시 놀랐다. 두 개의 초상화를 제작한 연도는 똑같이 오명항이 사망한 해인 1728년이었다. 그런데 ‘분무공신상’에 나타난 안면 피부 색깔에는 ‘황달기’가 여실히 보이지만 ‘흑달’까지는 진행이 안 된 상태였다. 그에 반해 다른 초상화에서는 안면을 검게 그린 점이 두드러졌다. 요컨대 ‘분무공신상’ 제작 이후 간경화증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얘기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의 임상 증상인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우리 초상화의 ‘별난 특징’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면 참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지닌 세계 미술사적 의미를 되새기면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다양한 문화 예술 장르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상화가 삼국에서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각기 다른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결과를 비교해보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몽골인이 세운 원(元) 왕조(1271~1368)가 쇠퇴하고 한족(漢族)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원나라 문화와 거리를 두려고 시도한 차별화 정책 중 하나가 초상화다. 초상화는 조상숭배 정신을 함양하는 풍조에서 더욱 큰 힘을 얻어 명나라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각되면서 꽃을 피우게 됐다.
이때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의 초상화(사진 1)가 그려지고, 초상화 문화는 조선에까지 전해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초상화(사진 2)가 탄생한다. 또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초상화(사진 3)도 등장한다.
위의 세 사람의 초상화를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비단에다 그렸다는 사실과 함께 제작 방법도 똑같은 족자(簇子) 양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권이었다는 맥을 짚을 수 있다. 다만 중국과 우리나라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에 비해 훨씬 긴 직사각형인 데 반해, 일본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와 가로 길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다. 이는 일본의 피사체가 중국과 우리나라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닌 방바닥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의 핵심인 피사체의 안면 부위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의 경우 후덕하면서도 권위적인 면모가 뚜렷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안면 묘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측 눈썹 위에 작은 혹, 일명 점(母斑)이 그려져 있다(사진 4). 그런가 하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은 분(粉)을 바른 듯 하얗다.
소중현대(小中顯大),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본다”는 말이 있다. 중국과 일본, 한국 초상화의 차이는 비록 작지만 문화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면 참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지닌 세계 미술사적 의미를 되새기면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다양한 문화 예술 장르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상화가 삼국에서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각기 다른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결과를 비교해보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몽골인이 세운 원(元) 왕조(1271~1368)가 쇠퇴하고 한족(漢族)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원나라 문화와 거리를 두려고 시도한 차별화 정책 중 하나가 초상화다. 초상화는 조상숭배 정신을 함양하는 풍조에서 더욱 큰 힘을 얻어 명나라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각되면서 꽃을 피우게 됐다.
이때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의 초상화(사진1)가 그려지고, 초상화 문화는 조선에까지 전해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초상화(사진2)가 탄생한다. 또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초상화(사진3)도 등장한다.
위의 세 사람의 초상화를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비단에다 그렸다는 사실과 함께 제작 방법도 똑같은 족자(簇子) 양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권이었다는 맥을 짚을 수 있다. 다만 중국과 우리나라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에 비해 훨씬 긴 직사각형인 데 반해, 일본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와 가로 길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다. 이는 일본의 피사체가 중국과 우리나라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닌 방바닥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의 핵심인 피사체의 안면 부위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의 경우 후덕하면서도 권위적인 면모가 뚜렷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안면 묘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측 눈썹 위에 작은 혹, 일명 점(母斑)이 그려져 있다(사진4). 그런가 하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은 분(粉)을 바른 듯 하얗다.
소중현대(小中顯大),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본다”는 말이 있다. 중국과 일본, 한국 초상화의 차이는 비록 작지만 문화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오랜만에 ‘용산가족공원’에서 사진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작업의 특성상 약속시간에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하나둘씩 흩어져 사진을 찍다가 정해진 시간에 다시 만나는 모임이다. 피사체를 찾아다니던 중 가족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벤치에 혼자 쓸쓸히 앉아 있는 노인을 보았다. 오후 네댓 시쯤 되는 시간이었다. 계절과 시간까지 어우러져 그 뒷모습에서 외로움이 잔뜩 묻어났다. 부자나 빈자나 나이가 들면 똑같이 맞이하는 모습이다. 젊을 때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차츰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소외감과 함께 외로움도 점점 깊어진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비 안 올 때 미리 우산을 준비하듯 인생의 가을 초입에 겨울 준비를 해놓는다면 조금 덜 힘들지 않을까.
사랑 없인 못 살아요
이 글을 쓰면서 위의 사진에 어울리는, 조영남이 부른 ‘사랑없인 못살아요’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밤 깊으면 너무 조용해/ 책 덮으면 너무 쓸쓸해/ 불을 끄면 너무 외로워/ 누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사랑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사랑 없인 난 못 살아요/ 한낮에도 너무 허전해/ 사람 틈에 너무 막막해/ 오가는 말 너무 덧없어/ 누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런 가사가 어느새 마음에 다가오는 것을 보니 필자도 이 가을엔 어쩔 수 없이 쓸쓸해지려나 보다.
외로움은 삶을 성찰하게 한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인간관계도 맺으면서 살아가지만 관계에는 기쁨도 있지만, 책임감도 따른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행복이 있다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려움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행복하기만 바라며 그 외의 어려움은 외면하려고 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서가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