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변란과 함께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4ㆍ19가 발발했다. 그 때 누나가 내 손을 잡고 데모대를 따라갔다. 갑자기 내가 있던 데모대를 향해 종로경찰서 쪽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자전거 위에서 구경을 하던 내 옆의 어른이 쓰러졌고 그 때 처음으로 사람의 피가 매우 끈적거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넘어진 자전거 바퀴에 발이 끼어 울부짖는 나에게 누나는 길모퉁이에 숨어 자신에게 기어오라는 손짓만 해댔다. 다음 해 오월의 새벽,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군인(해병)들이 기관총을 설치한 지프차를 타고 서울역 방향에서 필동 방면으로 와, 남산 밑의 헌병대 쪽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2층 방에서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 인생에 가장 놀랐던 순간은 군대 생활 중에 발생했다. 결혼하고 딸을 가진 후 늦게 입대해 휴가 중이었는데, 훈련경보가 아닌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휴가 중인 군인은 즉시 귀대하라”는 방송이 계속 반복되었다. 순간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바로 중국민항기가 국경을 넘어 왔을 때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이웅평 대위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했을 때 또 한 번 공습경보를 들어야 했다. 그것을 전후하여 10ㆍ26, 12ㆍ12, 5ㆍ18, 6월 항쟁 등 정치적 변란들이 이어졌고 1998년 IMF사태, 2008년 금융위기 등의 경제적 변란들도 겪게 되었다. 최근에는 사스, 메르스 같은 바이러스들까지.. 그러니 외국에는 한반도의 안보, 정치, 경제위기까지, 늘 부정적 뉴스들이 전달되었다.
그러다가 이번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보고 그들이 놀란 것 중 하나는 사재기가 없다는 보도였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일본·이탈리아·스페인·일본 등의 휴지와 생수가 사재기로 인해 품절되었으나 한국은 생필품의 품절률이 0%대에 머물렀고, 그것은 탄탄한 물류망과 성숙한 온라인 시장 체계 덕분이라고 분석되었다. 하지만 표면에 수치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간의 상기와 같은 수많은 변란으로 단련된 국민성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공비들은 내려오고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핵실험을 해대는 속에서 경계경보, 공습경보로 이어지는 민방공훈련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0월 위기설, 0월 전쟁설들을 끼고 살았다. 그 수많은 변란과 위기 속에서, 과연 우리들이 사재기를 한 번도 안 해 봤겠는가? 예전 필자의 어머니는 위기설이 닥칠 때마다 제일 먼저 모든 항아리에 물을 받아 놓으셨다. 필자도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양초와 라면을 사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재기를 해 봐도 잠깐 버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결과, 우리는 사재기에 목을 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스와 메르스를 겪어내면서 면역이 생겼듯이 이미 사재기에도 면역이 생겼다고나 할까.
사진에서와 같이 지금 프랑스에서는 식료품을 중심으로 사재기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선진화 된 유통 체계로 한국은 사재기가 없다는 보도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파리에 사는 딸은 상기의 내 얘기들을 하지 않았단다. 한국의 높은 위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직접 보거나 겪지 않은 그간의 힘든 세월들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내가 초등학교 때 부른 ‘이승만 대통령 찬가’는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로 끝난다. 그러나 찾아보니 원전은 그게 아니올시다였다. 경향신문 1953년 8월 15일자에 실린 가사를 보면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각하’다. 박사와 각하는 음운상 비슷하지만 엄청 다르다. 내 기억의 착오인가, 아니면 이승만 우상화에 염증을 느낀 우리 계룡초등학교 선생님이 바꾸어 가르쳐주신 걸까? 후자였으면 정말 좋겠다.
그 가사가 실린 건 6·25 정전협정(1953.7.27.)을 체결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인데, 노래에 대한 해설기사는 전혀 없다. 서울방송 어린이노래회가 그해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1~3절을 신문에 실린 그대로 옮긴다.
一. 그어느곳에 슬기었던가 원한의거슬린 피뛰어솟는곳 온땅에믿음이 피어나리고 정의의불가마 밝게안기인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二. 그어느곳에 약속이던가 온하늘사랑이 높이솟으라 그리움에물이여인 내를쌓고 평화의너럭 바위굳이간직한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三. 그어느곳에 결의었던가 삼천리맑은물결 길이이끌어 백두의정수리높이 보살피는데 행복의 넓은바다 인자로그은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정의의 불가마 밝게 안기고, 그리움에 물이 여이고, 행복의 넓은 바다 인자로 그은, 무슨 말인지 참 알아듣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그 어느 곳의 슬기였던가…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이렇게만 기억하고 있었던 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난 불러본 적 없지만 알고 보니 “우리 대통령’이라는 노래도 있었다. 전체 3절 중 1절은 이렇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고마우신 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이 전 대통령은 1875년생이니 여든이면 1955년에 나온 노래인가보다.
‘10월 유신’의 해인 1972년엔 그에 못지않은 박정희 대통령 찬가(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도 발표된 바 있다. 지금은 누구나 북한의 김 씨 일가 우상화를 비웃고 놀리지만 우리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성향의 보수단체 자유기업원(구 자유경제원)이 2016년에 ‘이승만 시 공모전’을 주최한 일이 있다. 건국 대통령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바로잡으려고 기획한 일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시인데도 내용을 잘 모르고 최우수작(영시)과 입선작으로 뽑은 탓이다. 입선작 ‘우남찬가’의 경우 각 행의 첫 글자를 세로로 이어서 읽으면 ‘한반도분열 친일인사고용 민족반역자 한강다리폭파 국민버린도망자 망명정부건국 보도연맹학살’이 된다. https://blog.naver.com/fish96/220806135895
이런 걸 아크로스틱(acrostic, 삼행시처럼 각각의 행에서 처음이나 중간 또는 끝의 말을 서로 연결해 어구나 문장이 되게 만드는 방식) 기법이라고 하나보다. 영시는 물론 한시에도 그런 게 있다. 잡체시(雜體詩)의 일종으로 분류되는데, 엄연히 문학적 족보가 있는 창작 기법이다. 자유기업원은 입상을 취소하고 명예훼손 혐의로 응모자를 고소했지만 결국 그 사람만 유명해지고 말았다.
아크로스틱 문자희롱의 사례를 찾아보자. 집을 나가는 아내(완전 가출은 당연히 아니고)와 남편이 주고받은 말이 널리 퍼져 있다. 어떤 아내가 집 나가면서 냉장고에 써 붙인 글을 세로로 읽으면 ‘까불지 마라’, 남편이 이에 대해 휴대폰으로 응수한 글은 ‘웃기지 마라’다.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데, 내가 ‘원전’(?)을 좀 더 멋지게 고치고 다듬었다.
까스 조심하고
불내지 말고
지퍼 막 내리지 말고
마누라 찾지 말고
라면이나 끓여 먹어
VS
웃음이 절로 나고
기분 정말 째진다
지퍼야 내 맘대로지
마누라는 오든 말든
라면? 호텔 뷔페다!
근데, 가스를 조심하라거나 불내지 말라는 말은 사실 그게 그거니까 ‘불’을 어떻게든 바꾸면 좋겠다. 시에서 동어 반복은 어디까지나 기피해야 할 일 아닌가? ‘불평불만 입 닥치고’ 이래볼까? ‘불타는 금요일은 개뿔’ 또는 ‘불안에 떨지 말고’?, 아니, ‘불두덩이나 만지고’ 이러면 어떨까? 이게 그 아래 ‘지퍼 막 내리지 말고’와 어울릴 법하다.
그런데 그것도 말이 친숙하지 않고 야해서 좀 거시기하다. ‘불량(또는 불순)한 짓 하지 말고’나 ‘불 켜놓고 자지 말고’, ‘불쌍한 척하지 말고’ 이런 건 어떨까? ‘불콰해져 해롱거리지 말고’도 괜찮을 거 같기는 하다. 에이 모르겠다. 다 맘에 들지 않는다. 더 재미있는 말이 불현듯 생각날 때가 있겠지.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채소(菜蔬)는 ‘산채’와 ‘야채’를 모두 아우른다. 산나물, 들나물을 모두 아우르면 곧 채소다. 소채라고도 한다. 야채는 일본식 표현이다.
재미있는 것은 산채(山菜)다. 우리만 널리 쓰는 표현이다. 일본, 중국은 산채라는 표현을 널리,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 중국에도 산채는 있다. 그들은 산채를 즐겨 먹지 않는다. 중국은 버섯 등을 제외하고 거의 먹지 않는다. 일본도 마찬가지. 버섯과 몇 가지 산나물을 먹는다.
한국은 일상적으로 산나물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로 비빔밥을 만들고 취나물은 곰취, 참취, 수리취, 단풍취, 미역취 등으로 가른다. 이름도 외우지 못할 숱한 산나물을 일상적으로 먹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산마늘, 명이나물이 대유행이었던 적도 있다. 웬만한 고깃집에서는 아직도 명이나물절임을 상 위에내놓는다. 국내 생산량이 부족하니 수입도 많이 한다.
제사를 지낼 때 고사리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나물, 산나물을 사용하는 나라도 우리뿐이다.
산나물은 우리 민족 특유의 음식문화
한국일보 기자였던 故홍승면(1927 ~1983년) 씨는 “산나물 문화는 우리 핏속에 녹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에는 여러 민족이 살았다. 그중 한국인을 찾아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른 봄 바구니를 끼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 처녀, 아녀자들이었다.”(‘대밭에서 초여름을 씹다’, 삼우반, 2003년)
봄에 산나물을 채취하는 이들은 한국인이 유일했다. 우리는 냉이, 달래, 쑥을 캐며 봄을 맞았다. 흔히 산나물을 가난, 궁핍함,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상징으로 여긴다. 틀렸다. 당시 간도, 만주 일대에는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다. 한국,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원주인인 중국인, 중앙아시아인들, 러시아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먹고살기 어려워 먼 곳까지 온 사람들이다. 대부분 가난했다. 살림살이는 그저 그만했을 것이다. 궁핍한 살림살이다. 유독 한국인들만 더 가난했다고 이야기할 근거는 없다. 그중 한국인들만 봄철이면 산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산나물은 초근목피의 상징이 아니다. 산나물은 우리 민족 특유의 음식문화 중 하나다.
오래전에는 중국, 일본인들도 산나물을 먹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중국, 일본의 산나물 문화는 사라졌다. 중국인들은 버섯을, 일본인들은 들나물을 주로 먹는다.
재미있는 것은 산나물 중 ‘고사리’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사육신 성삼문은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죽기 전 그는 시조를 남긴다. 제목은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다. 소재는 중국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굶어 죽은 백이, 숙제의 이야기다. 고사리를 캐 먹었다고 ‘채미가’(採薇歌)라고도 한다.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이제(夷齊)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은나라 고죽군의 아들이었던 두 사람은 주 무왕이 은 주왕을 정벌하는 것을 말린다. 무왕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은나라를 정벌하자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곧은 충절과 청렴의 상징이다.
백이, 숙제가 먹은 것은 ‘산나물 고사리’가 아니라 한낱 ‘풀’이었을 것이다. 고사리를 먹을 것으로 여겼다면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고사리를 상식(常食)하지 않는다. ‘고사리를 먹었다’와 ‘굶었다’가 같은 뜻이다. 고사리는 먹을 것이 아니었다.
성삼문은 한글 창제 당시 북경을 갔다. 이때 이제의 묘를 지난다. 이제의 묘를 보고, 남긴 시가 있다. 백이, 숙제를 기리는 글이다. 내용은 ‘수양산 바라보며’와 비슷하다.
그때 말 머리 부여잡고 ‘그르다’ 했음은/대의가 당당하여 일월처럼 빛났네/초목(草木) 역시 주나라 땅에서 자란 것인데/부끄러워라 그대, 수양산 고사리는 어찌 먹었던가
재미있는 것은 ‘초목’(草木)이다. 여기서는 먼저 ‘초목’이라고 하고, 뒤에서 ‘수양산 고사리’를 먹었다고 했다.
왜 한반도에만 ‘산나물 문화’가 전승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은 ‘이제’와는 달리 이제는 고사리를 널리 먹지 않는다. 고사리는 생산하되, 대부분 한국으로 수출한다. 일부 먹는 곳도 조선족이 많이 사는 동북 삼성이다.
우리는 고사리뿐만 아니라 모든 산나물을 귀히 여겼다. 농암 김창협의 시다(농암집 제6권). 제목은 ‘저녁에 읍내에 묵으며 숭아의 시에 차운하다’이다.
현령께서 가져오신 술을 따르며/봄 시내 띄운 배에 올라 노닐 제/날 위해 내온 밥상 진기한 음식/때 일러 신선한 산나물일레
배경은 영평현(경기도 포천시 영중면)이다. 현령이 뱃놀이에 상을 내놓는다. 진기한 음식=일찍 나온 산나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포천 주변에는 산이 깊다. 그 산에서 마련한 산나물이었을 것이다. 가난의 상징이라고 부르는 산나물을 진기하게 여겼다.
농암은 명문세가 출신의 벼슬아치다. 굳이 ‘가난한 산채’를 두고 진기한 음식이라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벼슬아치들도 산나물을 귀히 여겼다.
산나물은 임금도 귀하게 여겼다
성군 세종대왕(1397~1450)도 여러 차례 산나물을 이야기한다. 세종 25년 1월 14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제목은 ‘온천에 가기로 결정하고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충청 감사에게 이르다’이다.
비만에 운동 부족, 과로 등 당뇨병 발병 요건을 다 갖추었던 세종대왕은 말년에 당뇨로 인한 실명도 겪었다. 치료차 온양온천에 여러 차례 갔고, 그때마다 지역 주민들이 고생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대개 남의 고생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중략) 대신들이 심히 청하므로 마지못해 억지로 좇겠노라. (중략) 내 민폐를 절대로 없게 하여 (중략) 충청 감사에게 이미 마른반찬을 준비한 것 외는, 비록 산나물이든 들나물이든 쉽게 구할 물건일지라도 올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산나물은, 가난하여 마지못해 먹었던 식재료가 아니었다.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국왕도 귀하게 여겼다.
‘산나물=가난의 상징’은 일제강점기에 비롯되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산나물이 곧 풀이었다. 풀은 초근목피다. 산나물을 널리 먹지 않는 일본인들이 보기엔 한국인들이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찾아서 먹는 풀뿌리, 나무껍질이었다. 왕과 관리들은 고기를 먹는다. 일반 서민들은 먹지 못하는 것, 초근목피로 목숨을 잇는다. “자기들만 배를 불리는 썩어빠진 조선의 고관대작 대신, 일본 제국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낫다”는 말이 나온 이유다. 전형적인 일제 식민사관이다.
산나물의 계절이다. 냉이, 달래, 명이나물 등만 이야기하는 우리 시대가 부끄럽다. 우리 선조들은 제사상에 미나리, 부추, 당귀 등 숱한 산나물, 들나물을 빠짐없이 올렸다. 산나물, 들나물은 한반도의 식문화가 풍성했음을 보여준다. 초근목피라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2017년, 갑작스런 사위의 발령으로 인해, 손자들은 어학 준비를 못 한 채 파리의 국제학교에 입학했다. 영어, 불어, 모국어 사이에서 방황하는 손자들은 매일 아침 등교를 거부하였다. 낯선 이국생활의 시작은 딸 자신에게도 매우 버거웠다. 급기야 나에게 SOS가 날아왔고 딸바보인 나는 이틀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손자들의 등하교 챙기기였다. 군소리 안하고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등교 시 1유로씩, 하교 시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앞장서서 제대로 집을 찾으면 1유로씩을 지급했다. 그리고 각종 생활수칙을 잘 지키면 즉시 현금 포상을 하였고, 특히 그 돈들은 절대 딸 내외가 손을 못 대게 하였다. 이렇게 등하교 및 이국생활 문제들은 해결되었고 애들은 점차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자 손자들의 학교생활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먼저 식당에서부터였다. 프랑스에서는 급식시간에 모든 학생들에게 잼이 지급된다. 그런데 그 용기는 햄버거 가게의 토마토케첩처럼 손톱으로 찢어야만 한다. 그런데 외국 아이들은 그것에 매우 서투르다. 하지만 우리 손자들은 옷에 흘리지 않게 귀퉁이를 잡아 찢는, 그 섬세한 작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사리 해 냈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에게 잼 봉지 찢기 봉사를 하며, 손자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 후 체육시간에 신발 끈을 제대로 못 매 쩔쩔매는 영국 애들, 교복 넥타이를 못 매는 독일 애들, 연필을 칼로 못 깎는 미국 애들까지 도와주면서, 타고난 손재주를 과시하며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모두 한민족 유전자 덕분이었다.
프랑스 주최인 2019년 5월의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명성은 상한가를 쳤다. 딸네가 살고 있는 파리 근교의 자그마한 동네(Chatou) 영화관에서도 ‘기생충’이 상영되었다. 딸 부부는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자막 없이 보는 한국 영화가 반가웠기도 했지만, 영화 종료 후 동네사람들이 딸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축하를 받으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갔다.
2020년, 우울한 시작이었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한반도를 급습했다. 그러자 프랑스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교장선생님은 직접 딸에게 전화를 해 겨울방학 중 한국에 다녀왔는지를 물었다. 길거리에서의 동양인들은 기피 대상이었고, 2월인 작은 손자의 생일파티는 당연히 취소되었다. 그들에게 우리 한국인은 검정색 마스크를 쓴 채 파리 중심가에서 쇼핑하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유력 신문인 ‘르몽드’에 코로나19 확산의 주역인 신천지교회 이만희 총회장이 땅에 엎드려 절하는 사진이 실리면서, 그동안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급락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IT산업 강국인 한국과 이상한 종교가 판치는 한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원래 신체가 건장하고 생활수준도 높아 코로나19쯤은 걸려봤자 감기처럼 금방 낫는다고 자부했다. 자신들의 문화와 어긋나는 마스크 착용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그들에게 코로나19는 먼 극동의 비위생적인 국가들 얘기였다.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코로나19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는 마크롱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코로나19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로 인해 G20 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다시 롤러코스트를 탔다. 이제는 한국 방역모델이라는 말이 일반명사화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하고, 한국을 걱정하던 이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로 급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앞으로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리에서 3명의 자녀와 함께 4년째 거주하고 있는 딸과 사위는 이렇게 고국의 위상 변화에 얹어져 어지러운 롤러코스트를 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겨울이 채 물러나기도 전 얼음장을 뚫고 복수초와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이 서둘러 피더니 순식간에 온 숲에 연둣빛이 차고 넘칩니다. 산비탈과 계곡에 나뒹굴던 칙칙한 갈잎은 어느새 저만치 물러나고, 생기발랄한 신록의 이파리들이 오가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 이양하의 ‘신록예찬’ 중
그렇습니다. 이즈음의 신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하다는 데 동감하지만, 그럼에도 연둣빛 숲에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또 다른 주연이 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지랑이 피는 들녘을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노랑나비처럼, 여기저기 피어나는 샛노란 노랑붓꽃이 그 주인공입니다.
꽃봉오리가 먹물을 머금은 붓을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은 붓꽃. 붓꽃과 식물은 세계적으로 1500여 종이, 우리나라에도 20여 종이 자생한다고 합니다. 꽃이 크고 모양과 색이 화려한 데다 잎도 풍성해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하기에 적합해서인지, 예로부터 많은 화가의 그림 소재가 되어왔습니다.
전 세계인이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도 붓꽃을 즐겨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가 입원해 있던 프랑스 남부의 한 정신병원 화단의 붓꽃을 보고 그렸다는 일련의 붓꽃 그림은, ‘아이리스(Iris·붓꽃) 연작’이란 이름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노란색 꽃병에 가득 담긴 붓꽃’이 그러하듯 그 색은 보라색 일색입니다. 대표작 ‘해바라기’처럼 노란색 붓꽃도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아쉽지만 이는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바람입니다. 노랑붓꽃은 한국의 특산식물이기에, 그릴 수 없었겠지요. 학명의 ‘koreana’는 바로 노랑붓꽃이 우리나라의 토종식물임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노랑붓꽃은 금붓꽃과 더불어, 4~5월 노란색 꽃을 피웁니다. 계곡 주변 숲속 그늘에서 자라고, 키는 20cm 정도로 대표 종인 붓꽃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뿌리에서 나오는 3~4장의 잎은 선형인데 폭 1.3cm, 길이 35cm까지 자랍니다. 꽃 색과 형태는 금붓꽃과 흡사합니다. 다만 꽃대 하나에 1개의 꽃이 피는 금붓꽃과 달리 항상 2개씩 꽃이 달리는, 즉 1경(莖·줄기) 2화(花)라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화창한 봄, 연초록 숲에 핀 수십 송이의 노랑붓꽃은 하늘에서 내려온 샛노란 요정들을 보는 듯한 황홀경을 선사합니다.
Where is it?
봄부터 가을까지 산과 들에 다양한 붓꽃이 핀다.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보라색 꽃을 피우는 붓꽃을 필두로 각시붓꽃과 난쟁이붓꽃, 솔붓꽃, 대청붓꽃, 부채붓꽃, 노랑무늬붓꽃, 등심붓꽃 등 20여 종이 조금씩 다른 저만의 독특한 꽃을 피운다. 제주도 이외 전국에 분포하는, 개체 수가 풍부한 금붓꽃과 달리 노랑붓꽃은 전북 변산반도 일대와 전남 내장산 일대 등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한다. 한반도 고유종인데, 이는 국내 자생지가 파괴되면 종 자체가 절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각별한 관심과 보호가 요구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복어? 오해투성이다. 누구나 복어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지만 오해가 많다. 복어에 대한 환상(?)도 많다. “죽음과도 바꿀 맛”이라는 표현은 널리 쓰인다. 이 말도 틀렸다. 세상의 어떤 진미도 사람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다. 유독 복어에 대해서만 유난스레 과한 표현을 쓴다.
필자도 복어로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전복을 복어로 오인했다. 조선시대 문종 때의 이야기였다. 국왕이 서거하면 그날의 왕조실록에, 돌아가신 국왕에 대한 조사(弔詞)를 기록한다. ‘관례상’ 내용 대부분이 찬사다. 효자였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식이다. 문종도 마찬가지. 1452년 음력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이날의 조사 중에 복어(?)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친히 ‘복어’(鰒魚)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임금이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뿔싸, 이 글에 나오는 ‘복어’는 전복이다. 복어는 ‘하돈’(河豚)이라고 표기했다. 강에 사는 뚱뚱한 돼지 같은 녀석이다. 당뇨로 고생하는 아버지 세종을 위해 세자 문종이 이른 아침부터 직접 ‘복어’(전복)을 요리하도록 관리해서 올렸다는 내용이다.
당시 복어, 전복, 하돈 등을 혼동했다. 전복을 복어로 알고 글을 썼다. 누군가 지적하기에 자료를 다시 봤더니 복어가 아니라 전복이었다. “실수를 했다”고 다시 글을 썼더니, 희한한 반응이 나왔다. 그중 하나가 “조선시대에도 복어를 먹었어요?”라는 질문이다. 또 “복요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퍼뜨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지는 않다. 한반도 남부 지역인 김해 등의 패총에서 졸복 등의 뼈가 발견되었다. 한반도의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복어를 먹었다.
소동파의 ‘복어 찬미’는 과하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 오히려 지금보다 오래전에 복어를 더 즐겨 먹었다. 소동파(1037~1101년)는 11세기 사람이다. 조선시대 문인, 관리들은 소동파의 글을 죄다 읽었다. 복어를 모를 리 없다. 소동파는 여러 편의 ‘복어 찬미’를 남겼다.
이런 글을 읽고, 복어의 존재를 알고도 조선의 선비들이 복어를 먹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 중, 성종 24년(1493년) 4월, 경상도 관찰사 이계남이 조정에 보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웅천(진해)에 사는 주민 24명이 해산물을 먹고 죽었다는 것. 당시 이계남은 “공약명 등 24명이 굴과 생미역을 먹고 죽었다. 인근 주민들의 해물 채취를 전면 금지하겠다”고 보고했는데 조정의 반응이 놀랍다. “사람들이 굴과 생미역을 먹고 죽는 예는 없다. 반드시 복어[河豚, 하돈]를 먹었을 것이다”라고 답한다. 섣불리 복어를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1741~1793년) 가족은 모두 ‘복어 식용 반대론자’였다.
(전략) 왕고(王考)인 부사공(府使公)의 유훈에, “백운대(白雲臺)에 오르지 말고, 하돈탕(河豚湯)을 먹지 말라” 하였는데, 우리 제부(諸父)들이 그 유훈을 삼가 지켰고 나의 형제들 대에 와서도 역시 지킨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中
이덕무의 왕고(할아버지)는 이필훈이다. 유훈이 “위험한 복어 먹지 말라”다. 청장관의 아버지 통덕랑(通德郞) 이성호도 마찬가지.
(전략) 흡연(吸煙)을 가장 싫어하고 하돈(河豚)을 들지 않았다. 항상 하돈 먹는 사람을 경계하기를 ‘어찌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하여 생명을 망각하랴’ 하였다. (후략)
―‘청장관전서’ 中
‘구복’(口腹)은 입과 배다. 맛있게 먹거나 배를 채우려고 생명을 망각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청장관 이덕무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유훈을 잘 지켰다.
복어에 대한 오해들
일본은 오랫동안 복어 채취를 금했다. 중앙 정부 격인 바쿠후(幕府, 막부)는 늘 사고를 일으키는 복어의 채취, 식용 모두를 금지했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지방분권의 나라다. 중앙 바쿠후의 말을 듣지 않는 ‘항’[藩, 번]도 있다. 복어를 먹지 말라는 바쿠후의 명령을, 시모노세키(지금의 야마구치 현) 등 조슈 번(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큰 번)이 어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조슈의 정치가들이 일본 중앙 정계로 진출한다. 이들이 복요리를 유행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다. 복요리를 특별히 좋아한 그가 메이지 유신 이후 전국적으로 퍼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인들이 ‘복어는 시모노세키의 특산’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복어에 대한 환상’의 시작은 소동파다. “죽음과도 바꿀 맛”이라고 표현한 것은 과장된 주장이다.
“물쑥은 땅에 가득하고 갈대 싹은 짤막하니, 지금이 바로 하돈이 올라오려는 때로다. (하략)”
소동파 시 ‘혜숭춘강만경’(惠崇春江晩景)의 내용 중 일부다. 복어를 특별히 좋아했으니 이런 시를 남겼을 것이다. 복어에 대해 소동파만 찬사를 남긴 건 아니다. 송나라 매요신(梅堯臣, 1002~1060년)도 복어를 주제로 한 시를 남겼다. 내용은 소동파의 시와 비슷하다.
“봄 물가에 갈대 싹 나오고, 봄 언덕에 버들개지 난다/하돈이 이때를 만나면, 귀하기가 생선, 새우에 비교하랴? (하략)”
―‘범요주좌중객어식하돈어’ (范饒州坐中客語食河豚魚) 中
매요신의 시가 오히려 복어 맛을 더 강조하고 있다. “복어는 생선, 새우보다 더 귀하다”고 분명히 밝힌다. 매요신은 소동파보다 30년 정도 앞선 시대 사람이다. 이 시대에도 복요리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복어, 봄철, 소동파, 죽음과도 바꿀 맛’의 키워드는 황복(黃鰒)이다. 복어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소동파의 황복’에서 시작된다. 소동파와 매요신 모두 ‘갈대 싹이 물가에 올라올 때’를 복어 먹는 계절로 여겼다. 갈대 싹은 민물 강가에서 자란다. 더러 복어를 ‘담수어(淡水魚)’라 말한다. 틀렸다. 우리가 알다시피 복어는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다. 민물고기로 여긴 이유는 간단하다. 황복은 이른 봄,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온다. 산란하기 위해서다.
소동파 시대에는, 멀고 깊은 바다로 나가서 어로작업을 할 선박도 없었고, 그물도 성겼다. 무동력선으로 깊은 바다에서 생선을 잡기는 어려웠다. 육지와 가까운 곳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생선만 건졌다. 이때 만만한 게 바다에서 민물로 거슬러 오는 생선들이다. 복어, 위어(葦魚) 그리고 민물에서 살다가 바다로 돌아가 산란하는 뱀장어 등이다. 이른 봄에 강화도 일대에서 위어[熊魚, 웅어]를 건져서 왕실로 보낸 이유다. 소동파의 복어는 황복이었을 것이다.
황복의 실체도 애매하다. 임진강 등으로 거슬러 오는 산란기 복어는 흰 배 부분이 노랗다. 그래서 황복이다. ‘황복의 전설’은 배나 그물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생긴 것이다. 황복과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복어는 다른 게 아니다. 복어는, 생긴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눈다. 우리는 까치복, 자주복(참복), 졸복, 은복, 밀복 등을 주로 먹는다.
까치복처럼, 1년 내내 즐겨 먹는 종류가 있고, 겨울철에 많이 생산되고 맛이 좋은 것들도 있다. 황복은 어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의 ‘봄철 특산물’이다.
중국은 황복이 멸종되었는지 혹은 널리 먹지 않아서인지 복어에 대한 별다른 이야기가 많지 않다. 일본과 한국은 복어 혹은 황복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인다. 과연 황복은 가격에 걸맞은 맛을 지니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동해안에서 널리 먹는 참복, 까치복, 밀복 등은 마리당 가격이 1만~2만 원 선이다. 황복은 수십만 원 혹은 그 이상의 가격을 요구한다. 황복이 수십 배 혹은 백 배 이상의 맛을 지니고 있을까?
황복의 맛, 가격은 ‘전설’이다. 멸종 위기에 처하니 귀하다. 귀하니 가격이 높다. 멸종 위기종, 천연기념물이 반드시 맛있다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목숨과 바꿀 맛은 없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로 글을 시작한다. 널리 알려진 ‘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부모님과 가족, 주변 친지, 친구 등 한 사람을 키우는 건 많다. 미당의 경우, 그런 요소는 2할이다. 나머지 8할은? ‘바람’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시래기였다”. 1960년대. 필자가 자란 곳은 내륙의 작은 시골 마을. 하루에 대처(大處)에서 버스가 네댓 번 정도 왔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아주 넓었던 신작로였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먼지가 겨우 가라앉으면 집마다 담과 벽에 걸어둔 시래기가 겨울바람을 맞으며 누렇게 말라갔다.
시래깃국에 시래기무침. 배추김치와 큼직한 무김치. 나를 키운 8할은 시래기였고, 2할은 김장이었다. 겨울이면 어느 집이나 시래깃국과 시래기 무침으로 버텼다. 가난한 이나, 밥술이나 뜰 만한 집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거지는 날것, 시래기는 말린 것
사람들은 우거지와 시래기를 혼동하며 물어본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늘 간단하게 설명한다. “우거지는 날것, 생것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가 혼란스러워한다. 다음 내용은 도종환 시인의 작품 ‘시래기’ 중 일부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중략)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중략)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중략)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상당 부분 우거지에 대한 내용이다. 우거지는 채소의 윗부분 혹은 바깥 부분이다. 웃자란 부분이 우거지다. 땅속에서 가장 먼저 나와 싹을 틔우는 배추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위로 자란다. 윗부분, 위, 웃걷이, 우거지다. 바깥바람을 가장 오랫동안 견딘 것도 바로 우거지다.
불행히도, 우거지는 가장 먼저 버려진다. 배추를 뽑을 때 버리기도 하고, 다듬을 때 먼저 들어낸다. 가난한 이들은 버려진 우거지를 주워서 죽을 끓였다. 우거지 죽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우거지를 말리면 시래기가 된다. 배추 우거지를 말리면 ‘배추 우거지 시래기’다. 줄여서 배추 시래기다. 시에서는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라고 설명한다. 우거지를 벽에 혹은 담장에 걸면 시래기가 된다.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시래기는 소중하지만 귀한 건 아니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바깥에 걸려 긴 겨울을 난다. 눈도 맞고, 바람도 겪는다. 가장 먼저 땅을 뚫고 나와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다음, 마지막에는 버림받는다. 우거지의 슬픈 일생이다.
시래기는 맛있다. 어린 시절, 거의 매 끼니 시래기를 먹으며 “또 시래깃국이야?” 하고 투정했다. 먹어본 게 별로 없으니 ‘시래깃국 대체품’을 주워섬길 수도 없었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사실, 시래기는 전 국민을 키웠다.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는다
음식 공부를 하면서 문득 “외국 사람들은 시래기를 먹지 않는다”는 희한한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은 드넓다. 어느 구석에서 어떤 음식, 식재료를 먹는지 모두 파악하기 힘들다. 먹긴 하지만, 우리처럼 일상적이지 않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중국 여행을 다녀온 이가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더라” 해서 ‘음식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시래기는 아니고 우거지와 시래기 중간 정도의 식재료였다. 위치는 동북삼성(東北三省) 부근이었다. 조선족들의 풍습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예전의 간도 지역, 중국 동북삼성의 조선족들은 여전히 우거지, 시래기를 먹는다. 그뿐이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시작되었다. 배추 이파리의 줄기 부분은 흰색이다. 그래서 백채다. 지금도 배추의 한자 표기는 백채다. 배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중국 배추가 우리 것보다 크고 맛있었다. 숱한 기록들이 “중국 배추가 크고 맛있다”고 말한다. 중국에 갔던 사신단은 “중국 간 김에 좋은 배추 씨앗을 사오려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미처 사오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무는 오랫동안 ‘무우’라고 불렀다. 무는 ‘무후’(武侯)에서 비롯되었다. 무후는 높은 벼슬아치의 이름이다. 무후 제갈량이 좋아했던 채소라서 무후, 무우, 무로 변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배추와 무 모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 원산지가 어디든, 우리는 중국을 통해 무와 배추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는 우거지와 시래기가 없다? 그렇지는 않다. 중국에도 시래기가 있었다. ‘지축’(旨蓄)이다. 지금도 중국 사전에는 지축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검색 엔진 바이두에도 ‘旨蓄’이 버젓이 나와 있다. 지축은 ‘채소, 푸성귀[菜]’를 말린 것이다. 우리도 ‘지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날짜는 성종 18년(1487년) 9월 11일. 제목은 ‘양양 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의 연기를 상서하다’이다.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유자한(柳自漢)이 상서(上書)하였다. (중략) “신(臣)이 보건대, 강원도(江原道)는 다른 도와 달라서 서쪽으로는 대령(大嶺)에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서 그쳤으며,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 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화곡(禾穀)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민간에서 상수리 수십 석(碩)을 저장한 자를 부잣집이라 합니다. 농부를 먹이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충족할 길이 없고, 백성이 이것을 줍는 것은 다만 9월·10월 사이일 뿐인데, 이제 순행(巡幸)이 마침 그때를 당하였으므로 (후략).”
양양은 지금의 강원도 양양이다. 강무는 국가의 군사훈련과 사냥을 겸하는 주요 행사다. 왕이 현장에서 직접 훈련을 감독하고 사냥을 한다. 문제는 인근 주민이다. 강무가 있으면 길을 닦고, 훈련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한다. 현지 주민들이 말먹이부터 행사 참가자의 식사까지 챙겨야 한다. 중앙에서 곡식을 가져간다 해도 현지에서 챙겨야 할 게 많다. 사냥과 현장 막사를 만드는 일에도 현지 주민들이 참가한다. 원래 곡식이 많지 않은 곳이다. 겨울에는 ‘지축’을 챙겨야 한다. 지축은 목숨을 잇게 해주는 귀한 먹거리다. 겨울에 임금의 순행이 있으면 굶어 죽을 판이다. 현지 관리인 유자한의 상소는 “강원도 백성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하니, 강무를 늦추자”는 내용이다.
500여 년 전에도 우리는 시래기를 챙겨 먹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그때도 마찬가지. 시래기는 주요 식량이자 반찬거리였다. 시래기가 단순히 ‘배추 시래기’, ‘무청 시래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아래 내용은 여말 선초를 살았던 문신 권근(1352~1409년)의 시 ‘축채’(畜菜)의 일부분이다.
시월이라 바람 높고, 새벽 서리 내리니/울에 가꾼 소채 거두어들였네/지축(旨蓄)을 마련하여 겨울에 대비하니/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후략)
권근은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뼈대를 세운 높은 벼슬아치였다. 그도 10월(음력)이면 채소 갈무리를 놓치지 않았다. 지축, 시래기가 반드시 가난한 이들의 먹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축은 단순히 배추 우거지 시래기, 무청 시래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밭에서 수확한 대부분의 채소류로 준비한 겨우살이 준비 채소를 뜻한다.
중국도 우리도 모두 먹었지만, 중국은 버렸고 우리는 지금도 소중하게 여기고, 먹는다. 우거지, 시래기는 한식의 특별한 음식 중 하나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유서 깊은 옛길과 불교 유산을 함께 답사할 수 있는 명품 코스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대원지를 탐승 기점으로 삼는다. 하늘재 정상까지는 약 2km. 정상에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 재 너머 반대쪽 길이 끊겼기에.
옛날 이름은 계립령, 요즘은 하늘재로 부른다. 옛길 중에서도 옛길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옛길이다. 고증할 수 있는 역사로 볼 적에 그렇다. ‘삼국사기’는 적시하고 있다. 신라 초, 156년에 이 길을 열었다고. 근 2000여 년 전에 생긴 길이니 아득하다.
두 발 달린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마다 의미심장한 산길이 열렸겠지. 하늘재보다 더 오랜 길이 왜 없으랴. 역사가 채록하지 않은 고갯길들이 그 얼마나 많으랴.
그러나 인간은 시간 저편을 보는 눈이 없어 역사를 빌려 사라진 과거 한 줌을 움켜쥔다. 없는 게 시간을 보는 눈뿐이랴. 삶을 보는 눈이 없어 편견에 기대어 내가 아는 것만 우기며 산다. 사랑을 보는 눈이 없어 편린으로 남은 추억을 쥐어짜 아픔을 아로새긴다.
하늘재 옛길로 접어든다.
겨울 숲의 알싸한 냉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완만한 흙길이라서 걷기에 좋다.
물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작은 계류에 서린 물빛이 투명하다. 거기에 무엇이 있나? 들여다보니 송사리 떼가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무슨 열정으로, 무슨 정념으로 온몸을 휘저어 흐름을 거스르는가. 그러나 거스름이란, 거역이란, 살아 있는 증빙이기에 순연(純然)이다.
삶의 고역스러움은 거역해야 할 때 거역하지 못한 응징으로도 주어지는 게 아닐지.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성에 젖어 생활에 순종해왔던가. 얼마나 자주 본연을 잃은 굴종으로 ‘쌩쇼’를 일삼았던가.
송사리들의 용을 쓰는 역행엔 남세스러운 게 하나 없다.
잠깐의 걸음만으로도 숲의 안통에 닿는다. 숲이 깊어 나무들과 가까워진다.
헐벗은 저 나무들. 헐거운 저 표정들. 초록 이파리를 무성히 달아야만 생동하랴. 얻어 걸친 것 없이 태연한 겨울나무들도 알고 보면 씨억씨억 거센 숨을 토한다. 숲 그늘 새로 비집어 든 햇빛 한 조각이면 거뜬하다. 햇빛과 물과 공기만으로도 평생을 말짱히 사는 나무들의 청빈한 삶이라니….
그에 비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비경제적인가. 나무가 남이 아니라지만, 남이 아니기 이전에 어쩌면 고등한 선생님이다.
길은 굽이굽이 연신 휘어진다.
경사도가 낮아 숨찰 게 없다.
새소리마저 그쳐 그지없이 고요한 오후다.
쥐죽은 듯 조용한 숲길이다.
음미할 만한 적막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고요에 마음을 담근다. 그러자 새삼스럽게 귀가 열린다. 두 귀를 마냥 열어두는 건 산 아래 저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 이 순간엔 들을 수 없는 것들마저 듣는 기분이다.
일테면 메마른 낙엽들의 밀어를. 나무가 나무를 어루만져 내는 첼로의 저음을. 또는 하늘재 길 공사를 하는 신라인들의 두런거림을. 귀에 고이는 상상의 독주(獨奏), 들을 수 없는 걸 듣는 청각의 뻥에 나는 기꺼이 속는다. 만상의 비밀을 품은 고요가 주는 선물이라 믿기에.
하늘에 닿을 지경으로 높고 가파른 잿마루라 하늘재? 그렇지 않다. 해발 525m로 그다지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 경탄할 만한 산경을 펼쳐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하늘 아래 처음 열린 길이라는 뜻으로 지어 붙인 이름이리라.
신라의 드높은 이상을 유비(類比)한 지명으로도 손색이 없겠지. 신라가 이 길을 개설한 게 민생의 편익만을 위해서였겠는가. 영토 확장의 욕망과 군사적 요충 확보라는 계산까지 실린 길이지 않겠는가.
하늘재의 쓰임새는 실로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맞먹을 핵심 도로 인프라였으며, 불교문화의 유통 교차로였고, 툭하면 창검이 각축하는 전장(戰場)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멀지 않은 문경 새재에 열린 새로운 고갯길이 각광받으면서 하늘재의 이용 빈도가 낮아졌다. 종단엔 잊히기에 이르렀다.
하늘재 마루에 올라서자 전망이 탁 트인다. 백두대간 첩첩준령들이 출렁거린다.
마의태자도 저 헌걸찬 산 물결을 바라봤을까. 신라 패망의 한에 겨워 명멸하는 세사의 덧없음을 한탄했을까. 고증할 방법이 없으니 전설일 뿐이지만, 마의는 하늘재를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늘재 들머리에 있는 미륵대원지의 미륵리석불입상도 마의가 세웠다 하고.
하늘재에서 펼쳐진 인간사의 영욕과 부침의 드라마는 이미 연기처럼 사라졌다. 시간의 파괴력 앞에서 그 무엇인들 지속할 수 있으랴.
자연은 인간사와 달라 고요처럼 의연하다. 그저 유유자적으로 영속한다. 따져놓고 보면 놀랄 만한 대비이지 않은가.
여수엑스포역은 관광지 철도역으로는 만점짜리 자리에 있다. 열차에서 내려 역 구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엑스포 전시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 왼쪽에서는 쪽빛 바닷물이 넘실댄다. 일정이 바쁜 사람들은 열차 도착 시각에 맞춰 역 앞에 긴 줄로 늘어서 있는 택시를 바로 잡아탄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끌리듯 엑스포 전시장으로 직진한다. 높낮이 없이 평평하게 설계된 전시장 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어도 걸리는 곳이 없다. 시니어들에겐 맞춤 산책길이다. 자기도 모르게 왼쪽에 있는 바다 쪽으로 접근해 걷게 된다.
조금 걷다 보면 왼편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조그만 섬 하나가 눈에 잡힌다. 소문 난 오동도다. 전시장 끝자락에서 이어지는 다리가 있으니 그 섬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만한 섬! 천천히 걸어도 30분가량이면 다 돌 수 있다. 이 섬이 소문난 건 동백꽃 덕분이다. 동백꽃은 한창 피어나는 겨울보다는 지기 시작하는 초봄에 장관을 이룬다. 바닥에 무리를 이뤄 떨어져 있는 빨간 꽃송이와 꽃잎들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들에게도 질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지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그 교훈을 실감
나게 체득하려면 동백꽃이 떨어지는 3~4월께 오동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
실비로 먹는 ‘시골밥상...’ 식당
오동도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뱃속에서 신호가 오게 마련이다. 더욱이 이곳이 맛의 고장 여수임에랴! 오동도 앞에서 돌산으로 가는 해상 케이블카 탑승장 바로 밑에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다.
8000원짜리 여수 가정식 백반을 파는 ‘뚱땡이 할머니의 밥상 시골밥상’ 집은 언제나 손님이 차고 넘쳐 끼니때는 이용이 쉽지 않다. 칠순을 넘긴 뚱땡이 할머니와 마흔도 채 안 돼 아이를 넷이나 출산한 ‘애국자’ 따님이 운영한다. 맞은편 엠블 호텔 투숙객들도 이 식당을 많이 찾는단다.
특별한 반찬은 없지만, 하나하나 간을 잘 맞춘 맛깔스러운 반찬들과 매일 바뀌는 국 종류 때문에 밥 한 그릇을 더 시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식사를 끝낸 자리엔 종업원이 큰 통을 들고 가서 남은 ‘아까운’ 반찬들을 모두 담는다. 음식 재활용을 않는다는 걸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좁은 자리가 꽉 차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 사진도 못 찍고 문전에서 아쉬운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아쉽기는 뚱땡이 할머니와 따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문 앞에 서서 손님을 그냥 보내는 눈빛에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진남관 앞 ‘서울해장국’ 식당
그렇다고 애써 맛집을 다시 찾아야 한다면 여수가 아니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진남관. 그 오른쪽 앞과 길 건너편 거리에 여수의 오래된 먹자골목이 있다. 모두 다 소개하고 싶은 맛집들이다. 그중에서도 시민들이 많이 찾는 ‘서울해장국’이 있다.
아니, 맛집 고장 여수에서 엉뚱하게 옥호를 ‘서울~~’로 쓰다니! 그러나 사실 이상할 게 없다. 수십 년 전 여수가 관광지로 채 발돋움하기 전에 개업했으며 그 당시만 해도 서울은 대단한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마치 50, 60년대 서울의 빵집과 양복점 등의 이름으로 뉴욕, 파리, 런던 등을 많이 썼던 것처럼.
이 식당은 새벽 5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영업한다. 바싹 말린 우거지를 장어로 국물 맛 낸 된장국에 넣어 푹 끓여낸 우거지국, 바삭바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는 콩나물국, 두툼한 선지국은 모두 한 그릇에 6500원, 돼지고기를 아낌없이 넣은 김치찌개(8천 원) 등이 하나같이 별미다. 이 식당은 특히 밑반찬에 들이는 정성이 남다르다. 그 때 그 때 구워주는 생김을 찍어 먹게 집간장과 양념간장을 함께 내주고 갓 만들어 내오는 숙주나물, 고추멸치볶음, 계란부침 등도 모두 싱싱하고 맛깔스럽다.
주인 할머니와 따님이 조그만 식당을 무려 종업원 10명가량을 쓰며 운영한다. 김 굽는 직원, 식재료 다듬는 직원, 우거짓국 끓이는 직원, 김치찌개 끓이는 직원 등이 제각각이다. 맛집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불친절은 찾아볼 수 없고 직원들이 손님상을 수시로 체크하며 모자란 반찬은 알아서 채워주는 친절함까지 보인다. 손님들이 저마다 이 식당 칭찬하기에 바쁘다. 팔순이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선짓국을 들고 계신다. 궁금해서 말을 붙여보았다. “40년 단골이지. 맛도 맛이지만 정성이 들어간 건강식이고 배고프던 시절 추억을 떠올려 더 좋지.” 여러모로 완벽한 맛집인 셈이다.
그 밖에도 복춘식당, 조롱박 등 여수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맛집들이 이 일대에 많다. 서대회, 아귀찜, 아귀탕, 생선 내장탕, 돌게장, 삼치회 등이 주메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의 많은 아귀찜 식당과는 비교도 안 되게 풍부한 아귀를 넣은 아귀탕이 1만 원. 둘이서 다 먹기 부담스러운 양의 아귀찜도 2만 원 미만이다. 마산 일대가 주산지로 알려진 아귀는 여수에서 더 풍족하게 요리된다. 여수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삼치의 선어회는 여수의 특징적인 음식 중 하나다. 처음 접하면 물컹한 식감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지만 익숙해지면 삼치회만 찾을 정도로 중독성이 있다. 구이로 먹는 삼치 머리는 클수록 맛이 좋다.
진남관. 이순신광장. 장군섬
식사를 마치고 여수의 상징인 진남관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이순신 광장을 ‘참배’ 할 차례다. 여수를 하루만 둘러봐도 곳곳에 있는 이순신의 흔적을 발견하곤 새삼 놀라게 된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거처했던 곳까지 여수에 있고,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리하던 ‘선소’도 세 곳이나 있다. 어머니 처소는 보존작업이 마쳐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띄엄띄엄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는 그 앞에 새로 이순신 공원 조성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심지어 실재하지 않은 소설 속 인물까지 끄집어내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데 ‘점잖은’ 여수 시민들은 ‘이순신 자원’을 그리 요란하게 활용하지 않는다. 기자도 여수를 몇 번 찾기 전까지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전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해 곳곳에 이렇게 많은 흔적을 남긴 줄은 알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사후에도 여수민들을 여러모로 ‘살려주고 있는’ 중이다. 거북선 빵집, 이순신 햄버거 등 여수 상가의 옥호 중 이순신과 거북선이 가장 많이 활용된다. 여수민들의 충무공에 대한 애정과 충성도 역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 충정이 한없는 불멸의 영웅은 여수에서 그 숨결이 가장 생생하게 느껴진다.
진남관은 2020년 봄까지 보수 일정이 잡혀있어 내부 관람이 금지돼 있다. 광장의 장군 동상 앞에 실물 크기로 지어졌다는 거북선도 기자 일행이 찾았을 때는 수리 중이어서 입장을 할 수 없었다. 관람객이 너무 많아 수시로 보수를 해야 한단다.
진남관 입구와 장군 동상 너머 장군섬에 이르는 곳까지 장군의 위세가 당당하게 뻗쳐져 있는 일대를 보는 것만으로 성웅 충무공에 대한 참배를 대신해야 했다. 참고로 해방 즈음까지는 장군 동상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단다.
종포공원 거쳐 오동도 가는 길
이순신 광장에서 오동도 방향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자산공원이 있는 방향으로 나지막한 언덕길을 거쳐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몇 해 전부터 여수의 포장마차 촌으로 유명해진 종포공원을 거쳐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이다. 우선 종포공원부터 걸어보기로 한다.
이 일대는 여수의 오래된 바닷가 놀이터 중 하나다. 지금은 공원으로 명칭이 붙여져 있지만, 낚시꾼이 모여들고 고기잡이배가 들락날락하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바로 옆에 새벽마다 경매가 열리고 종일 생선 판매가 이뤄지는 선어 시장이 있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낚시꾼들도 간간이 모습을 보인다.
몇 년 동안 성시를 이루던 포장마차 촌은 인근 하멜기념관 옆으로 옮겨졌다. 정비 차원이었던 모양인데 아직은 포장마차 촌의 모습으로 보기엔 익숙하지 않다. 행정력도 자연스러움에 초점이 맞춰져야 바람직한데...
종포 공원 일대에 펜션 서너 곳이 있고 펜션 부근에 맛집이 꽤 늘어서 있다. 포장마차와는 구분되는 식당들이다. 여수 특산물 중의 하나인 돌문어 식당이 많다. 돌문어삼합, 돌문어라면 등등. 진화한 여수 음식 종류 중 하나는 해산물을 활용한 라면 요리다. 이 돌문어 식당엔 점심때부터 줄이 늘어서 있다. 젊은 층이 많다. 돌문어라면 뿐만 아니라 해물라면, 돌문어삼합 등 새로운 메뉴가 계속 개발되고 있다. 돌문어라면 1만 원, 네 사람이 먹어도 남을 정도의 푸짐한 돌문어삼합은 3만9000원.
기자도 몇 년 전 여수에 와서 라면 요리를 ‘개발’했었다. ‘꼴뚜기 라면’. 시장 아지매한테 1만 원만 주면 한 접시 가득 주는 꼬록(여수에선 꼴뚜기를 꼬록이라고 부른다)을 특별한 레시피 없이 라면과 함께 끓여주면 색다른 국물 맛을 내는 아주 맛깔스러운 라면이 완성된다. 강추!!!
몰포 나비와 나비 반도 여수
자산공원은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걸어 올라가기에 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관광버스들도 코스로 잘 잡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 체력으로도 천천히 걸어 올라갈 만 하다. 아침저녁으로 산이 아름다운 자색으로 물든다 하여 자산으로 이름 붙여진 그 산속 공원엔 여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또 생뚱맞은 이름의 전시관이 하나 있다.
곤충체험관인데 이름하여 ‘빠삐용(나비) 전시관’이란다. 여수에 빠삐용 전시관이라니.. 입구에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미국 배우 ‘스티브 맥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여수에 빠삐용? 생각해보고 거듭 생각해 봐도 생뚱맞다!
전시관에 들어가 설명을 들어봤다. 여수시의 전직 공무원 한 분이 현직에 있을 때부터 집념으로 나비를 채집해 개인적으로 만든 전시관이다. 시에 기증해 지금은 시가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나비 표본 중에서 대표적인 전시물이 저 멀리 중남미 원산의 몰포나비. 푸른 금속성 광택이 나는 아름다운 몰포나비와 그 나비 모양을 빼닮은 여수반도 그림이 나란히 전시돼있다.
아하! 그제야 조금 몰포나비 채집자의 의도가 이해될 듯했다. 그는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폈음 직하다.
“지구 저편에서 몰포나비가 너울너울 날아와 한반도 끝자락에 앉았다. 여수반도다!”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에서
여수에서는 걷다가 가끔 시내버스도 타볼 만하다. 2층 관광버스도 좋지만 무작정 시내버스를 타고 한가롭게 시내를 돌다 보면 대충 여수 시내의 윤곽이 들어와 다음날 일정에 참고하기에도 좋다.
물어물어 버스 몇 번 갈아타고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지역으로 갔다. 고급 아파트촌이 있고 인공 해변이 조성돼있으며 입구 상가엔 여수답지 않게 주차난이 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울 사람들에겐 식상한 풍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구원은 ‘예울마루’다. 전시회와 음악회를 수시로 여는 이 건물은 여수 산단에서 매출을 많이 올리는 어느 대기업이 외국인 건축가에 설계를 맡겨 지어서 시에 기부한 것이다. 건물 외벽 없이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 건축물 문외한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건물 바깥쪽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있는 것도 특이한 모습이다.
예울마루 관람을 마치고 15분가량 옆의 산길을 돌아 걸어가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짓고 수리했다는 선소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작품 ‘선소’
이 선소는 여수반도를 에워싼 바다의 ‘골목길’ 맨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적군에게 노출되지 않는 장소를 고른 것이다. 실제로 가까운 웅천 쪽에서도 선소는 보이지 않고 웅천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촌에서도 이곳이 보이지 않는다. 입지 선택이 탁월했던 셈이다. 그러니 여유롭게 안정적으로 거북선을 짓고 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북선과 수전의 각종 전략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지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영국의 넬슨 제독과 함께 세계 해전사에서 최고의 명장으로 기록된다.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일본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 장군에게 존경을 표한 것도 거북선 뿐만 아니라 해전 전술, 주민 친화력, 그리고 선소 운영 능력 등을 보았기 때문이다. 충무공께 새삼스러운 존경의 묵례를 보내고 이번엔 선소 길 건너의 그 유명한 보리굴비 식당으로.
명사들이 찾는 여수의 보리굴비 식당 ‘석정’
굴비 하면 영광 굴비, 법성포 굴비다. 그런데 여수에 명사들도 즐겨 찾는 보리굴비 전문식당이 하나 있다. 옛 여천 지역, 여수 시청 부근에 있는 석정 식당이다.
이 식당도 덕장은 법성포에 두고 있다. 법성포에서 굴비를 말려 여수로 가져와 조리한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굴비 정식엔 굴비와 함께 해물 보쌈김치, 여수산 각종 나물 등 17가지의 반찬을 내놓고 직원이 각 테이블을 돌면서 먹기 좋은 크기로 굴비를 찢어 준다. 기름기 잘잘 흐르는 보리굴비 속살, 군침이 돈다. 보리굴비 정식 2만 원. 여수엑스포 준비위원장을 지낸 전 건설교통부 장관 강동석 씨, 지금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윤정희, 백건우 씨 부부 등 명사들이 오래된 단골이란다.
여수에서 11월에 열렸던 세계한상대회 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대회기간 중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참가자들이 각자 이 식당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단다. 각국 한인들에게까지 이 식당 소문이 났다는 식당 측의 자화자찬이다.
식당 판매보다는 전국에 보내는 택배 영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선물 포장된 다섯 마리에 택배비 포함하여 6만5,000원, 10마리 세트는 12만5,000원.
구여수와 신여수
여수시청이 있는 구 여천지역과 구 여수를 잇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내륙 쪽 버스들이 다니는 길과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이다. 웅천지역을 지나 구 여수로 가는 길목 왼쪽에 한국화약 소유 대지가, 있으며 그 건너편엔 여수반도에서 가장 탁 트인 넓은 바다가 있다.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든지 아니면 대단위 리조트로 개발할 만한데, 웬일인지 방치되고 있다. 띄엄띄엄 바닷가 길을 둘러 가면 구 여수의 전통 항인 국동항이 나온다. 옛 여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동항엔 항상 낚싯배들이 수백 척 정박해있고 경매장에선 새벽마다 활발하게 경매가 이뤄진다. 바로 앞 경도엔 미래에셋이 경도 리조트 재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경도는 골프장과 함께 여름 한 철 먹거리인 하모(갯장어의 일본말)의 주산지이다. 경도와 고흥 일대의 하모를 최고의 갯장어로 꼽는다. 경도 안엔 하모를 회와 샤부샤부(일본말. 유비끼라고도 함)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있다. 혹자는 일본사람들처럼 갯장어에 기름이 끼는 7월 이후엔 맛이 별로라고도 하고 혹자는 그때의 하모 맛이 일품이라고도 한다. 정답은 없고 각자 취향에 따르면 될 일이다.
자매식당 등 국동항의 맛집들
그러나 여름철이건 겨울철이건 바닷장어 요리를 꾸준히 하는 식당들이 여수에 많다. 특히 국동항 주변엔 갯장어를 통째로 끓여 내놓는 통장어탕 식당이 몇 곳 있다. 그중에서 여수 시민들 사이에서도 소문 난 자매식당을 찾았다.
장어를 잘라서 국 끓이는 게 아니라 통째로 넣어 끓인 후 손님상에 내와서 종업원이 국자로 장어를 으깨서 먹기 좋은 크기로 나눠준다. 된장 국물에 우거지를 넣어 장어 맛과 함께 시원하고 구수한 맛이 잘 어우러진다. 일반적으로는 토막 낸 장어를 숙주나물을 넣어 함께 끓여 내놓는다. 통장어탕 14000원, 장어 소금구이 2만 원을 받는다.
여수에 가장 많은 식당이 장어탕 식당과 돌게 간장게장 식당이다. 장어탕 식당은 수산시장 안, 시청 주변, 시내 곳곳에 있다. 그중 자매식당이 가장 생명력이 있다는 여수 지인들의 전언이다. 이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내놓는 멍게 젓갈이 또 일품이다. 자꾸 더 달라는 손님이 늘어나 포장 판매를 시작했단다. 한 통(3kg)에 3만 5000 원, 택배비 4000원이란다.
여수의 수산시장
여수에는 수산시장이 몇 곳 있다. 수산시장, 특화시장, 교동시장, 선어시장. 그중 수산시장이 중앙시장 격이다. 몇 년 전에 이 시장에 큰불이 나서 시장이 완전히 전소했었다. 주변의 지원과 상인들의 복구 노력에 힘입어 업그레이드된 새 시장 모습으로 태어났다.
시장 내 수십 곳 되는 활어 판매대에서 펄펄 뛰는 생선을 잡는 활발한 모습은 장관이다. 생선 잡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매우 좋다는 어느 보고서에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새횟집 아지매. 수십 년간 온 가족이 이 업에 종사해왔단다. 종포공원 옆에 자그마한 건물도 소유하고 있다. 재빠르고 시원시원하게 생선을 잡고, 손님과 흥정도 시원시원하게 하며, 횟감은 그야말로 맛깔스럽게 썰어낸다. 전문가가 따로 없다. 일본 시장 상인들과 일 합을 겨루게 해봤으면 좋겠다. 여기서 회를 떠 가져갈 수도 있으나,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2층 식당으로 올라가 상차림 값으로 한 사람당 4,000원과 매운탕값 5,000원을 주고 식사를 한다. 서울의 가락시장, 노량진 시장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실비다. 생선 산지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세 명이 싱싱한 돔, 갑오징어, 농어, 삼치 등 각종 회를 남길 정도로 푸짐하게 먹고도 6만 원 미만을 냈다.
시내의 실비식당 ‘와사비’
게장 골목 소개는 생략한다. 여수의 전통적인 먹거리 중의 하나인 간장게장 식당들은 이제 시설과 메뉴에서 한 등급 더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신 시내의 횟집 한 군데를 더 소개하고 여수의 맛집 소개를 마친다. 여서동 네거리 근처의 ‘와사비’식당. 옥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름 때문에 최근 곤욕을 치렀단다. 얼마 전부터 보는 시선들이 좀 누그러지더란다.
옥호를 ‘고추냉이’로 바꿀 생각은? 이제 겨우 정착단계인데요... 이 식당은 문 연 지가 몇 해 되지 않았다. 6년 전께 문을 열자마자 여수에서 오래된 횟집들을 제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유는 초간단. 남자 사장이 새벽에 바다에 나가 직접 생선을 잡아 오고 여수 주변에서 구하기 어려운 건 통영 등지로 달려가 구해와서 오후부터 바쁘게 회를 만든다. 혼자서 몇 사람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게 몇 년을 일해 얼굴이 수척해졌을 정도다. 부인은 서비스 메뉴를 개발하고 상차림을 연구하는 한편 수시로 주방에 들어가 남편과 주방 보조 여인을 돕기도 한다. 이들의 노력은 상차림과 회접시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 식당도 갈치회, 삼치회가 일품이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 회 한 접시에 4만 원에서 6만 원이면 세 사람이 푸짐하게 즐길 수 있다.
맛집 몇 곳을 소개했지만, 여수의 장점은 어느 식당에 가든 다른 지방에 비해 만족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식당마다 자부심이 대단하고 음식에 들이는 정성이 손님들 눈에도 보일 정도다. 전통인지, 요즘의 트렌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특히 엑스포 이후 시설과 함께 식당들의 자세가 확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먹방과 인터넷에서 칭찬은 많이 받고 악평은 덜 받는 곳, 여수가 됐다.
오동도 입구의 일출
여수에서 일출을 보는 장소로는 돌산섬 일대를 많이 꼽는다. 그중에서도 섬 끄트머리의 향일암(向日庵)은 일출로 유명해진 곳이다. 정동진과 함께 일출 사진이 워낙 많이 나돌아다녀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일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여수 현지의 정보로는 요즘 오동도 입구의 일출이 장관이란다.
새벽에 일어나 이틀을 기다렸다. 해는 우리의 애를 태우면서, 햇살만 내려보내 고기잡이배들을 비춰줄 뿐이었다. 붉게 솟아오르는 태양 대신에 빛줄기만 담았다. 일정상 일출 장면 촬영을 포기하고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면서 여수 지인에게 일출 촬영을 간곡히 당부했다. 간곡히 간곡히 거듭 부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일출 사진이 메일로 왔다.
쌩큐 오 선생!
쌩큐 여수!
글로벌경기와 위험자산에 대한 우호적인 소식들이 발표되고 있지만 원화는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10월 글로벌 선행지수가 24개월 만에 전월 대비 플러스 전환했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은 지난 11월 초 1157원을 기록한 후 한달여 만에 30원가량이 상승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크게 두가지 요인이 원화 약세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먼저 11월 중순 전후의 ‘홍콩 인권법 통과·서명’과 관세 철회 및 지재권 보호 강화 요구 등을 둘러싼 ‘무역협상 불확실성 고조’가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이에 위안화가 11월 초순 6.98에서 7.03~7.06 수준으로 절하되면서 원화 약세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또 최근 연일 연저점을 갱신하고 있는 JPM EMBI global spread(12월7일 302bp)의 하락에도 원/위안은 오히려 상승했다. 여기에는 2017년 상반기와 같은 국내 고유의 요인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최근 불거진 북한의 태도변화가 주된 이유로 판단했다.
이승훈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연말을 앞두고 북한 노동당의 정책변화, 미국과의 대화 재개 여부에 따라 원화의 단기 방향성이 결정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며 “오는 15일 관세가 유예된다고 해도 한반도 지정학적 위험에 대한 우려가 완화되지 못하면 위안화 대비 원화의 강세폭은 제한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