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미술이 한 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 2시간마다 해설도 있다.
전시회 이름은 이태준의 소설 ‘꽃나무는 심어 놓고’에서 차용해 왔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30명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좋은 기회다. 김환기, 김기창, 권옥연, 박수근, 이대원, 이중섭, 장욱진, 천경자 등 7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몇 작품을 소개한다.
이중섭의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는 1953~54년 종이에 유화로 그린 그림으로 한국전쟁 이후 가족을 일본에 보내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그림이다.
김환기의 ‘영원의 노래’ 작품이다. 2018년 홍콩 경매에서 ‘붉은 점화’는 85억원으로 한국 경매 사상 최고가의 경매가 이루어졌다. 김환기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천경자 화백의 ‘나의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이다. 힘들었던 22세 때를 회상하며 1977년에 그린 작가의 자화상이다. 천경자의 데뷔작 ‘생태’도 전시되어 있다.
박수근의 ‘두 여인’은 1960년대 한국전쟁 이후 가난했던 시대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노상에 나와 좌판을 벌이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 등 서민들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미술관으로 가족과 함께 나들이로 가볼만한 곳이다.
-전시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실 2, 프로젝트 갤러리 2
가시는 길 : 지하철 7호선 중계역 3번 출구 도로 5분
서울시 노원구 동일로 1238. 02-2124-5201
-전시일정
2019년 7월 2일(화)-9월 15일(일)
-관람시간
평일 10:00-20:00
토.일.공휴일 10:00-19:00
-전시기간 중 관람료 : 무료
전쟁 직후이니까 한 해를 보태면 70년 전 일입니다. 그해 겨울을 간신히 지내고 이듬해 이른 여름에 저는 ‘길에서 주워온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저는 6세에서 12세까지 아이들 여섯 명이 기거하는 방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기묘한 구조의 커다란 한옥 구석방이었는데 햇빛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까지 모두 일곱 명이 나란히 누울 수도 없는 크기여서 다른 아이의 배나 등에 발을 얹거나 팔을 감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벽에는 사방에 횃대가 있어 거기 옷을 걸었고, 작은 판지(板紙) 상자 세 개가 있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책을 거기 넣어두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방을 열었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작은 쪽문을 열자 아이들은 일제히 13세인 저를 바라보았는데 제가 압도된 것은 그 눈망울들이 아니라 그 방의 냄새였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저는 그 냄새를 묘사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취였습니다. 그것도 역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코가 막힐, 그래서 숨이 막힐, 그런 냄새였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시궁창 냄새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이윽고 그 냄새가 역하지 않게 되고, 그 냄새가 내 냄새라고 여기게 되었을 즈음에, 저는 비록 그 냄새를 묘사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명명할 수는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곳에 살지 않는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묘사하는 언어였는데 그것은 ‘거지새끼들 냄새’였습니다.
그 명명은 옳았습니다. 듣는 우리의 자존을 마치 발꿈치로 싹싹 비비는 것 같은 ‘독한’ 발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 표현에는 ‘사람’이 들어 있어 다행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때 제가 지금 표현하듯 그렇게 다듬어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궁창 냄새’로 몰아 치워버리는 것보다 ‘거지새끼들 냄새’는 냄새의 주체가 사람인 것만은 인정하고 있는 반응이라는 어떤 느낌이 제게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랬습니다. 씻지도 않고, 빨래도 잦지 않고, 대소변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도 있고, 남몰래 먹을 것 감춰둔 것이 상하기도 하고, 비를 맞은 담요가 곰팡이가 나도 바꿔 덮을 것이 없는 터에 시궁창이 바로 그 방인데, 그 냄새가 극한 악취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살고 있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냄새에는 웃음도 시샘도 다툼도 살핌도 섞여 있었습니다. 거창한 개념어를 사용한다면 그 냄새에는 꿈도 절망도, 희망도 자학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움도 있었고 회상도 있었습니다. 울부짖는 잠꼬대 끝에 깨어난 아이에게 웬 악몽이냐고 물었을 적에 “엄마를 만났어!” 하는 대답마저 섞인 냄새였습니다.
저는 악취가 싫습니다. 당연합니다. 누구나 그러합니다. 그런데 저는 향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집안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제게 주어진 일은 향로를 닦고 모사(茅沙)를 담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제사 때 피어나는 향이 참 그윽했습니다. 그 향의 맑은 기운이 돌아가신 조상의 혼령을 모셔올 만큼 지금 이곳을 정화(淨化)해준다는 어른들의 설명이 감동스러웠습니다. 인간의 아픔이 가장 순수하고 오롯하게 다듬어지는 종교의례의 차례가 분향(焚香)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은 지나칠 수 없는 귀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종교사를 공부하던 어느 계기에 저는 난데없는 ‘고약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에게, 또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기의 ‘아픔’을 아뢰어야 한다면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드러내야지 왜 아름다운 냄새로 자기를 치장하면서 “잘 봐주십사” 하고 아뢰나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정성이고 예의이지 하는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러한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왠지 ‘분향’은 ‘외식(外飾)’의 극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니 제단에서 나는 향기가, 그곳이 어떤 종교의 제장(祭場)이든, 점점 불편해집니다. 향이 저어해지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추한 곳을 가리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향수를 뿌리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집니다. 늙은이 냄새는 목욕을 아무리 해도 가시지 않으니 향수를 뿌려 견딜 수밖에 없다면서 귀한 프랑스제 향수를 선물로 준 친구가 있습니다. ‘나한테서 그리도 역한 냄새가 나느냐’면서 고맙게 받긴 했지만 아직도 그 향수를 사용하지 못해 못내 미안할 따름입니다.
삶은 냄새를 지닙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맛도 없고, 만질 수 없어도 냄새는 어디에나 언제나 어떤 것에나 있습니다. 삶은 이런저런 냄새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혹 내게 마땅치 않은 냄새라도 ‘잘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도 냄새를 지닌 주체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맑고 따뜻하고 그윽한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하지만 ‘모자란 냄새’를 지우거나 더 좋은 냄새를 내려, 냄새에 냄새를 더하는 억지를 부려 자칫 악취만을 낼 수도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까마득한 ‘거지새끼 냄새’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삐뚤어진 생각 고치고 늙은이 냄새를 향수로 조금은 가려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이나저나 제가 사람 노릇을 하면 사람 냄새를 지니고 고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여 아예 냄새에 대한 ‘긴장’을 털어내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딸의 방에서 우연히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내 어머니인 할머니가 내 딸인 손녀에게 보낸 편지다.
80세 넘은 어머니는 공교육을 받지 못했다.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몰랐다. 그런 문맹 상태로 한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여 우리 삼 형제를 키우셨다. 70세가 다 되어 장사를 그만두신 후 첫 번째로 하신 일이 ‘학력 인정 성인학교’인 ‘양원초등학교’에 입학한 거다. 살아오시면서 글을 몰라 답답한 일이 얼마나 많았으면 제일 먼저 학교로 달려가셨을까! 그때부터 학교는 엄마 생활의 첫 번째 순위가 되었다.
이해 안 되고 모르는 것이 많았나 보다. 그럴 때면 손녀를 불러서 도움을 받으셨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한글도 깨우치고 학교도 졸업하셨다.
엄마가 학교에 다니실 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가장 편한 상대인 손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본 편지가 그 편지다.
할머니의 애정이 담긴 짧은 내용의 편지다. 누군가가 맞춤법을 조금 고쳐준 거 같은 연필로 쓴 글씨였다. 지극한 사랑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저녁에 아내, 딸과 함께 식사를 하며 편지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편지 한 통으로 우리와 사랑이 넘치는 교감을 하신 것이다. 누구든 이렇게 가족에 대한 사랑의 공감이 형성될 때 인생의 소소한 행복에 빠지게 된다.
편지는 ‘공감’ ‘회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아날로그 감성 매체다. 디지털 시대를 살면서 점점 상실해 가고 있는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5월이 되면 ‘가정의 달’이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곳곳에 걸리고 많은 행사가 열린다. 아름다운 계절에 가족과 같이 식사하고 여행 가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 하나 더 보태서 가족 공감을 만드는 작은 일을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2019년 5월에는 오랜만에 부모님, 자녀, 손주들에게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자.
주변에서 어려운 노인들이 늘어나는 요즘 다시 생각나는 오래 된 일 하나. 10여년쯤 됐나? 동료 노인들에게 선행을 베풀다 간 노인의 장례식.
행색이 초라한 노인들이 장례식장 안에 삼삼오오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고인의 오랜 친구들도 잘 모르는 낯선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은 하나같이 "천사 같으신 분이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프다."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 많은 노인들이?
고인은 젊은 시절 사업이 잘되어 잘 살았으나 환란 때인 1997~1998년에 사업이 실패, 노후를 어렵게 보내고 있었다. 여든 살이 넘었을 무렵 전에 사두었던 충청도 지역의 땅값이 크게 올랐다. 땅을 팔아 상당한 현금을 만질 수 있었다. 돈이 생기자 그는 탑골공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 주머니에 5만 원을 챙겨 넣었다. 점심때 공원 근처 무료급식에서 준비된 음식이 끝나 먹지 못하는 노인들이 생긴다. 고인의 베풂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음식을 받지 못한 열 명을 데리고 근처의 국숫집으로 간다. 한 그릇에 3천 원이었다. 아침에 챙겨온 5만 원 중에서 10명분의 국숫값 3만 원을 계산한다. 나머지 2만원은 별도로 만나는 노인이나 친구들을 위한 저녁 식사나 소주 값으로 내주고 빈 지갑으로 돌아간다.
매일 이런 일이 계속되자 고인은 곧 노인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되었고 유명을 달리하자 그를 따르던 많은 노인이 조문을 와서 안타까워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길을 뜻있게 보낸 노인, 가진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잘 가르쳐주고 떠난 그 분. 꽤 지난 이야기지만 살기가 어려워지고 인심이 각박해지고 있는 요즘에 다시 생각나는 노인이다.
3월 초, 이제 막 새 학기를 시작한 동아대학교 캠퍼스는 꽃다운 청춘들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학생들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하형주(河亨柱·58) 동아대학교 예술체육대학 학장이다. 35년 전 국민들 손에 땀을 쥐게 했던 LA올림픽 유도 금메달의 주인공. 그를 만나 당시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무이~ 내 보이나? 이제 고생 끝났심더.”
하형주가 1984년 LA올림픽 유도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뒤 가족과 통화하는 모습은 의외였다. 경상도 남자는 무뚝뚝하다는 선입견을 깨트리기라도 하듯 방글방글 웃는 표정과 구수한 사투리가 방송을 탔다.
“그때 제 통화가 전국으로 중계되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말도 함부로 했죠. 어머니한테 ‘어무이~’ 이러고 형님한텐 ‘행아~’라 하고. 경상도에선 말을 좀 편하게 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런 모습이 몇몇 사람한텐 안 좋게 보였나봐요. 버릇없다고, 호래자식이라고 욕 좀 먹었죠.(웃음)”
LA올림픽은 유난히 국민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 이유엔 1988년에 개최되는 다음 회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린다는 점이 한몫했다. 국민들이 주목하고 있는 와중에 호쾌한 메치기로 우승을 거둔 그는 대한민국의 스포츠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는 인기의 원인(?) 중 하나로 ‘잘생겼음’을 꼽기도 했다.
“우승 후 한국에 돌아오니까 갤로퍼 지프차, 박카스, 화끈함과 시원함을 강조한 약품 등 각종 CF 섭외가 물밀듯 들어왔어요. 근데 돈이 많아지면 내 마음대로 살까봐,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차라리 없이 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 안 했죠. 그때로 돌아간다면… 찍어야지요.(웃음)”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세월은 지났지만, 그의 호쾌함은 여전했다.
모두의 예상을 깬 일본전에서의 승리
1984년 LA올림픽 8강전 (vs 미하라 마사토)
대진표를 본 언론은 하형주의 대진운이 좋지 않다고 보도했다. 8강에서 유도 종주국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와 맞붙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말했다.
“속으로 ‘아, 얘는 내 밥인데’ 하며 쓱 웃었죠.(웃음) 사실 8강전 전까진 한 번도 겨뤄본 적 없는 선수였는데 언젠가는 만날 것 같아서 분석을 많이 해뒀어요. 아니나 다를까 시합 때 자기 주특기인 허벅다리걸기 기술을 쓰더라고요. 이미 제 머릿속엔 어떻게 받아칠지 다 구상을 해둔 상태였어요. 그 기술에 넘어가주는 척하다가 방심하는 틈을 타 들배지기 기술을 응용해 바닥에 꽂아버렸죠.”
한 선수가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해 등 전체가 바닥에 닿도록 메쳤을 때 주심은 한판을 선언할 수 있다. 하형주가 성공한 공격은 한판처럼 보였지만, 심판은 절반으로 판정했다.
“당시 심판위원장,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일본인이었거든요. 심지어 마사토가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총장으로 있는 도카이(東海)대학교 졸업생이었어요. 그러니 심판들이 일본의 눈치도 봐야 하지, 또 처음 보는 기술이지, 그래서 절반을 준 것 같아요.”
이어진 경기에서 하형주는 보란 듯이 똑같은 기술을 이용해 다시 한번 그를 매트에 내리꽂았다.
“넘어간 방향만 반대였지 똑같은 방법이었어요. 동일한 기술에 두 번이나 당하고 마사토는 완전 스타일 다 구겼죠.(웃음) 그때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지켜보고 있다가 자기네 학교 졸업생이 내팽개쳐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장면이 찍혔더라고요.”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져서는 안 된다는 게 우리나라 국민감정이다. 그가 일본 선수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TV로 경기를 보며 응원하던 국민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1970년대에는 북한 선수한테 지면 그야말로 ‘작살’이 났죠. 그 당시에 지고 나서 입국하면 공항에서부터 짐 검사를 하는데 옷밖에 없는 캐리어를 그 자리에서 탈탈 털었어요. 그러고 나선 가져가라고 하는데, 다시 옷을 개서 넣으려고 하면 문은 왜 또 잘 안 닫히는지….(웃음) 그런 식으로 망신을 줬죠. 북한은 당연히 이겨야 하고 일본에 지면 매국노인 거라. 근데 제가 질 줄 알았던 경기에서 일본 선수를 두 번이나 메쳤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38초 남기고 거둔 역전승
1984년 LA올림픽 준결승 (vs 군터 노이로이터)
야구의 9회 말과 2~3분의 추가 시간이 주어진 축구 중계를 중간에 끄지 못하고 끝까지 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도 하지 않던가. 1984년 하형주의 ‘결승을 향한 역전승’은 가장 극적인 반전 드라마였다. 1984년 LA올림픽 8강전에서 미하라 마사토를 꺾고 준결승에 오른 하형주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인 독일의 군터 노이로이터와 맞붙게 됐다. 상대에게 먼저 효과를 내준 그는 경기 종료 38초를 남기고 유효를 얻어내 역전승을 거뒀다.
“시간이 계속 흐르니까 초조하긴 했죠. 근데 계산해보니 두 번 정도는 기술을 걸 수 있겠더라고요. 그중에 한 번만 걸려라 하고 딱 잡았는데, 낚시해보셨어요? 낚시할 때의 손맛처럼 유도도 도복을 잡아챘을 때 느낌이 딱 옵니다. ‘아, 이건 넘겼다’ 하고요.”
그가 노이로이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81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였다. 하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가 어떤 선수인지 알았으면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놨다.
“당시 노이로이터의 지도감독이 우리나라 분이셨어요. 그분을 직접 찾아가서 ‘선생님, 제가 독일 선수랑 붙는데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씩 웃으시면서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당연히 제가 이길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들어갔죠. 만약 그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다고 알려주셨으면 겁나서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노이로이터와 겨뤘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지금까지도 궁금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유도 선수들이 모여서 일주일간 하는 합동 훈련이 있어요. 근데 이상하게 노이로이터랑 연습게임을 하면 항상 제가 졌어요. 그가 저를 던지면 이리저리 처박히기 바빴는데… 이런 선수를 어떻게 이겼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라를 꺾은 그는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우승 후보를 거듭 제치고 올라온 긴 여정이었다. 시상대에 오르며 그동안의 부상이며 고생했던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 오를 만도 했지만, 그는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금메달을 딴 기쁨보다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잘 극복했던 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금메달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결과였죠. 그러니 울 이유가 있나요? 행복해서 그냥 활짝 웃었어요.”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그는 올림픽 이후에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 아시안게임 금메달,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등을 따며 메달 행진을 이어나갔다.
“선수 시절엔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봐서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은 잘 몰라보죠. 근데 행복해요. 평범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웃음)”
‘살다 보면 잊는다’란 말을 종종 하게 된다. 시간이 가고 나이 듦의 가치 중 하나가 ‘기억의 희석’일 게다. 무뎌지다 사라지기도 하고, 아련하게 추억이란 이름으로 저장된다. 그것이 좋았건 슬펐건 간에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매일 쌓이는 것이 인생. 그렇게 흘러가기만 하면 좋으련만 뜬금없이 연극처럼 플래시백(과거의 회상을 나타내는 장면)을 경험할 때가 있다. 길에서 누군가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과거의 나에 대해 상세하게 기억한다. 상대는 전혀 알 수 없는 사건을 나열해 추억 소환에 애쓰지만 새까맣게 잊힌 사건들. 정황상 나일 수밖에 없기에 반갑게 이야기 해주는 상대방을 배려해 결국 동화(同化)의 과정에 빠져버린다. 함께 기억을 해내다 보면 잊었어야 했던 사건과 마주하기도 한다. 연극 ‘51대49(작·연출 오재균)’는 어린 시절의 사건 하나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인생 중반을 넘어선 남자 배영광(윤상호 분)과 천진한(서삼석 분)이 만나는 공간은 낙엽이 깔린 어스름한 새벽녘 공원 벤치. 술에 취해 벤치 위에 잠든 배영광 옆으로 천진한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등장하면서 막이 오른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를 이기지 못해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것도 모자라 사생활 관리에 실패한 배영광은 팀원들과 마지막 회식을 하고 공원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세상 불쌍해 보이지만 이름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삶을 살던 잘나가는 여의도 증권맨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천진한은 과거 행적이 묘연하다. 남루한 옷차림의 천진한은 배영광의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친구인 척 대신 받는 돌발 행동을 한다. 배영광은 자신의 전화를 받은 것도 모자라 지갑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되자 천진한을 추궁하며 의심한다. 자신만의 확고함으로 상황을 재단하는 배영광에게 중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였다고 천진한이 정체를 밝히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로 접어든다. 쉽게 기억해내기 어려운 옛 이야기 꺼내는 천진한. 그 속에서 배영광은 자신을 발견하지만 세월 속에서 인식했던 나와 다른 자신을 만나면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제목처럼 51%와 49%의 거짓과 잊혔던 기억, 진실이 오가고, 각각 51%와 49%에 속하던 두 남자가 실제와 마주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 작품은 글을 쓰고 연출한 배우 겸 연출가인 오재균이 실제 겪은 일화로 시작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30년 만에 만난 어릴 적 친구와의 술자리가 이야기의 큰 틀이 됐다.
“서삼석 배우처럼 생긴 친구였어요. 정말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만나자고 했습니다. 만나서는 제가 학교 다닐 때 선망의 대상이었다면서 기억에 없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러다 술을 한잔 먹고 났더니 행동이 과격해지고 뭐가 꾹 눌러왔던 것들을 말하더라고요. 그 속에는 저에 대한 동경도 있었고, 질투, 증오가 있었습니다. 연극의 중심 이야기는 허구로 꾸몄지만 헤어지고 난 뒤 생각했죠. ‘내가 뭘 잘못하고 살았을까’ 하고 말이죠.”
극단 놀터(대표 서삼석)의 여섯 번째 정기공연으로 오른 ‘51대49’는 작년 2월 초연 당시 ‘미투 사건’과 맞물리면서 짧은 공연 기간에도 불구하고 40대와 50대 여성 관객들의 공감을 얻었다. 배영광을 연기한 윤상호도 이런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작년에 놀터공방이라는 곳에서 초연을 했어요. 처음에는 남자 관객들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남자들의 기억을 꺼내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남자의 대화 속에서 등장하는 여자로 인해 여성 관객들은 또 다른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거나 당시 상황을 생각했지 싶습니다. 여성 관객들이 많이 울더라고요.”
가벼운 말장난처럼 이어지나 싶던 두 남자의 대화가 점점 짙어지고 처절하게 변하면서 관객들이 맞닥뜨리는 감정에도 적잖은 파문이 일어난다. 탄탄한 연기력으로 대학로를 대표하는 배우 윤상호와 서삼석의 호흡만으로도 볼만한 연극으로 회자된 작품 ‘51대49’. 연극이 끝나고 나면 그 고민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지 마시길. 나는 살면서 뭘 잘못했을까. 연극 ‘51대49’는 대학로 소극장 후암스테이지에서 4월 14일까지 공연된다.
화려한 액세서리, 깔끔한 외투, 잘 정돈된 소매와 옷깃. 센스 있는 옷차림은 눈길을 끈다. 하지만 향기로운 사람에겐 눈길이 머문다. 길을 걷다 우연히 코끝을 스친 향기는 절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패션의 완성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향수다.
보이지 않는 패션, 향수
어떤 향기를 맡고 자연스레 내가 만났던 사람,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를 맡고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한다. 이후 사람들은 향기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불렀다. 또 미국 모넬화학감각센터의 레이첼 헤르츠(Rachel Herz) 박사는 실험을 통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가 더 자극적이고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향기는 상대방에게 나를 제대로 각인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명함인 셈이다. 당신은 어떤 향기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만의 향기를 찾아서
국내 향수 브랜드 ‘톰빌리’의 퍼퓸 디렉터 박재석(29) 씨는 먼저 내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를 파악한 후 각각의 향이 지닌 매력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신이 활발한 이미지의 사람이라면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를 활용해 활발함을 더 강하게 표현할 수도 있고, 좀 더 무거운 계열의 향으로 활발한 이미지를 중화시켜 균형을 맞출 수도 있다.
향수공방 ‘센토리움’을 운영 중인 오원택(33) 씨는 겨울에는 긴 소매, 여름에는 짧은 소매의 옷을 입듯 향수도 하나의 패션으로 계절에 맞춰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봄과 여름에는 가볍고, 경쾌하고, 싱그러운 느낌의 시트러스, 그린, 플로럴, 프루티 계열의 향수를 쓰고 가을과 겨울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의 애니멀, 우디, 바닐라, 구루망(쿠키 같은 디저트류) 계열의 향수가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향이어야 하며, 향수로 개성 있는 스타일링을 연출하려면 다양한 향을 직접 맡아보고 경험해봐야 한다.
①시트러스(Citrus) 레몬, 자몽, 라임 등 감귤류의 향으로 상쾌하고 활동적인 느낌을 준다.
②아로마틱 (Aromatic) 라벤더, 바질 등 허브류의 향으로 진중한 느낌을 준다.
③플로럴(Floral) 장미, 재스민 등의 꽃향기는 우아한 느낌을 준다.
④프루티(Fruity) 시트러스와는 다른 달콤하고 싱그러운 과일 향으로 발랄한 느낌을 준다.
⑤우디(Woody) 나무 향으로 향긋 하면서도 무게감이 있어 중후한 느낌을 준다.
향수, 제대로 맡는 법
향수의 향을 맡는 과정을 ‘시향(試香)’이라고 한다. 시향을 할 때는 향수와 시향지 사이에 7~15cm 간격을 두고 향수를 분사해야 한다. 시향지에 너무 가까이 대고 분사할 경우 본연의 향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향수는 분사 후 시간 경과에 따라 톱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 3단계로 나뉘는데 톱 노트는 15분~2시간, 미들노트는 3~5시간, 베이스노트는 10~15시간 향이 지속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향수를 뿌린 직후의 향, 즉 톱 노트만 맡는다. 향을 단계별로 제대로 느끼려면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갖고 맡아야 한다. 반나절 정도라면 베이스 노트의 향까지 경험할 수 있다. 만약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최소 15분 정도의 시간을 갖고 시향할 것을 권한다. 또 한 번에 3개 이하의 향수만 시향하는 게 좋다. 너무 많은 종류의 향수를 연달아 시향하면 후각이 무뎌져 나중에는 향을 제대로 못 맡게 된다. 이럴 때는 ‘커피’를 활용해보자. 커피 원두 향이 피로한 후각을 진정시켜준다.
마지막으로 피부에 ‘착향(着香)’을 해봐야 한다. 사람마다 고유한 체취가 있고 피부 온도와 습도 차이에 따라 같은 향수라도 향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잔향까지 마음에 들어도 꼭 착향을 해본 뒤 구매해야 후회가 없다.
향수, 제대로 입는 법
이렇게 고른 당신만의 향수, 어떻게 뿌리는 것이 좋을까? 향수는 기본적으로 맥박이 뛰는, 온기가 있는 부위에 뿌린다. 손목 안쪽, 목 뒤, 왼쪽 가슴 부근이 대표적이다. 손목에 향수를 뿌린 후엔 가볍게 톡톡 두드려주면 된다. 간혹 양 손목에 뿌려 비비는 사람이 있는데, 향수의 노트가 뭉개져 본연의 향을 잃어버린다. 팔꿈치 안쪽은 옷으로 덮여 있는 경우가 많아 향을 은은하게 오래 즐길 수 있다. 여름에는 소매가 짧은 옷을 주로 입기 때문에 발향이 강한 편이다. 이외 외투 안쪽, 넥타이 뒷면, 바지, 치마 등 옷에 뿌려도 된다. 다만 실크와 가죽옷에 뿌리면 옷이 상하거나 향이 변할 수 있으므로 피하는 게 좋다. 향의 지속력을 높이고 싶다면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하면 된다. 무(無)향 로션을 바르고 그 위에 향수를 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말이다. 그만큼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는 특별하다는 의미다. 당신만의 향기로 누군가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다면 집을 나서기 전, 가볍게 향수를 걸쳐보자.
짧지만 강렬하다. 자신의 몸무게보다 두 배, 심지어는 세 배가 넘는 무게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가 내려놓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남짓. ‘무거움’을 넘어서 인간의 한계를 들어 올린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역도 라이트급에 출전해 용상, 인상, 합계 전 종목을 석권한 원신희(74)를 만났다.
“시골에 바벨이라는 게 있었겠어요? 빈 통에 모래랑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돌역기’밖에 없었어요.”
또래 중에서 가장 힘이 셌던 그는 동네에서 돌역기를 들 때마다 “잘한다, 잘한다”고 말해주는 어른들의 칭찬을 듣는 재미에 본격적으로 역도를 시작하게 됐다. 대전공업고등학교 역도부에 진학한 그는 1965년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추상(125kg)과 합계(392.5kg)에서 주니어 세계 신기록을, 인상(120kg)에선 주니어 세계 타이기록을 세우며 주목을 받았다. 혜성과 같이 나타나 1966년부터 12년간 역도 국가대표로 활약한 그는 “손가락이 좀 더 길었으면 더 잘했을 텐데 짧아가지고… 그래도 한의사이셨던 아버님이 달여주신 인삼 덕을 많이 봤어요” 하며 웃었다.
“아버님이 항상 술, 담배, 여자는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수촌에서 서로 눈 맞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전 워낙 이성관계에 둔해서… 연애도 안 하고 중매결혼으로 했죠. 아버님의 세뇌(?) 교육 덕분에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웃음)”
‘국가대표’ 하면 생각나는 곳이 바로 선수촌. 원신희는 1966년에 설립된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다.
“태릉선수촌이 설립된 이후 한국의 스포츠가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운동생리학, 운동역학 등 스포츠과학이 접목되면서 체계적인 훈련이 가능했죠. 효과적으로 훈련을 하다 보니 성적도 잘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엔 헝그리 정신이 있었죠.”
스쿼트 훈련을 하고 나면 다리에 쥐가 나서 오르막길을 뒤로 걸으며 올라갔다. 바벨에 쓸려 손 가죽이 찢어지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 상처는 굳은살로 메워졌다. 마치 발바닥 같았다고 말하는 그의 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굳은살 대신 흘러간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름이 자리 잡았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죠. 힘들어도 참고, 포기하고 싶어도 이 꽉 물고 했어요. 죽도록 힘든 와중에도 근육이 붙고 새로운 기록을 내면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역도는 남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무게를 들어 올리는 순간 역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죠.”
1978년 전국체육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원신희는 1983년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역도 선수들을 육성했다. 그가 선수들을 가르칠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단다. 바로 ‘욕심을 버려라’다.
“기술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 몸을 내가 이길 때 비로소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해요. 역도도 마찬가지예요. 내 몸이 준비가 안 됐는데 무거운 무게를 들겠다고 하면 그건 욕심이죠. 그전에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몸, 기초를 다지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금메달 3관왕의 영광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을 꼽았다. 라이트급에 출전해 인상(130kg), 용상(165kg), 합계(295kg)의 기록으로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한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건 개최국 이란의 잔머리 덕분(?)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세 종목의 시상을 따로 하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은 용상과 인상의 합계로만 시상해요. 근데 역도 강국인 이란이 종합순위를 올리기 위해 전무후무하게 아시안게임에도 세계선수권대회처럼 한 체급당 3개의 금메달을 건 거죠. 자국 선수가 금메달을 딸 거라고 확신했었나 봐요.”
그에게 금메달을 예상했냐고 묻자, 후보로는 거론이 됐다고 말했다.
“전년도에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라이벌이었던 이란의 데나비 선수가 동메달을 따고 제가 4위를 기록했어요.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했죠. 결국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만난 그를 꺾고 우승했어요. 아마 이란에서는 아차 싶었을 거예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은 중국을 비롯해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와 더불어 바레인, 이라크, 라오스 등의 국가가 처음 참가한 대회였다. 때문에 우리나라와 북한과의 종합순위 경쟁도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북한 선수와 처음엔 신경전도 있었다고 말했다.
“서로 안 보는 척 힐긋힐긋 쳐다보곤 했어요.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다른 대회에서도 마주쳤는데 그땐 서로 인사도 건네고 대화도 나눴죠. 북한 선수가 밝은 표정을 지으면 남북관계가 좋았던 거고 서로 딴청 피우고 만나주지도 않을 땐 남북관계가 냉랭한 시절이었죠.(웃음)”
우리나라는 금메달 한 개 차이로 북한을 누르고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금메달 3개를 보탠 원신희가 귀국하자 국민들은 열띤 환호를 보냈다.
“카퍼레이드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지방까지 환영식이 이어졌어요. 심지어 제 고향에선 사물패까지 동원해서 잔치를 열어줬죠. 그 시절엔 그랬어요.”
메달은 하늘이 주는 선물
그에게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딴 금메달이 더욱 값진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부상을 이겨내고 거둔 우승이기 때문이다. 1967년 무릎이 탈골되는 부상을 당한 그는 선수생활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역도에 추상이라는 종목이 있었는데 무릎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는 기록을 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은퇴까지 고려했죠. 근데 1972년 뮌헨올림픽 이후부터 추상 종목을 폐지하더라고요. 저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 거죠.”
그는 메달을 따는 데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그가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할 때 추상 종목이 폐지된 것처럼 말이다.
“메달은 하늘이 주는 선물 같아요. 노력한다고 다 목에 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원한다고 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비슷한 실력의 상대에게 패했을 땐 결코 그 사람의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단지 운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우승자에게 많은 관심이 쏠리는 법이지만 우승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노력에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면 좋겠어요.”
최근 매스컴에 노출되지 않던 인사, 특히 고령 유명인의 이름이 인터넷에 회자되면 ‘혹시 돌아가셨나?’ 생각한다. 몇 년 사이에 생긴 달갑지 않은 버릇이다. 지난 일요일 밤, 그렇게 김금화 만신의 부고를 접했다. 23일 새벽에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많은 매체가 실시간으로 그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지만 그저 됐다 싶었다. 88년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으니 고인은 참으로 편하겠다. 만신의 지인에 따르면 22일 점심식사 뒤 호흡 곤란으로 119 구급대에 실려 인근 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콩팥 기능은 이미 망가진 후였고 혈액 투석으로 고비를 넘기는 듯했으나 다음날 새벽에 운명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인 김금화 만신.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큰 무당이라지만 신앙적 의미를 떠나 우리 무속을 문화예술의 경지로 이끈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굿판은 곧 무대였고, 세상과 소통하는 신명 나는 오페라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수차례 외국 공연을 하면서 한국의 미와 전통예술을 전파해온 '한류의 초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김금화 만신과 마지막 인터뷰를 한 기자가 바로 나인 듯싶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2018년 2월호에 게재한 ‘만신 김금화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다’란 제목의 기사가 최근 인터뷰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뜨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와의 인터뷰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연세가 많으시고 몸도 쇠약했다. 혹여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하면 도리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설 참이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김금화 만신의 무릎은 말을 안 들었고, 입 속 상황도 좋지 않았다. 특히 얘기하거나 먹을 때 고생이 심했다. 오전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손님들을 만나 점을 쳤으니 힘들게 뻔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취재를 고사하면 물러나야지 싶었다. 다행히 인터뷰에 응했고 사진작가와 함께 자택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너무 시간을 뺏지 말아달라”는 김금화 만신의 말로 시작한 인터뷰. 지금까지 많은 기자를 만나와서일까? 취재 왔다는 말에 늘 했던 옛 얘기를 꺼냈다. 일반적으로 아는 김금화 만신의 이야기. 무병을 앓고 외할머니에게 신을 받고 큰무당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인생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선생님 그런 거 말고요. 다른 얘기 해주세요. 요즘 사는 얘기요.”
막상 요즘 얘기하라고 하니까 말문이 막혔나 보다. 그렇게 첫 만남은 20여분만에 끝이났다. 두 번째에 만나 어릴 적 꿈에 대한 이야기와 소소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과 함께 하는 만신 말고 여자로서 질문이 이어졌다. 당시 인터뷰의 의도 자체가 ‘신 말고 김금화’였으니 나름 신선했던 인터뷰가 됐다. 그가 나온 잡지가 발간 됐을 때 또다시 찾아가 만났다. 달콤한 케이크도 사 들고 말이다. 같이 밥도 먹고, 떡도 나눠 먹었다. 김금화 만신을 3번 이상을 만났으니 복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입이 참 아플 텐데 기운이 어디서 나는지 많은 조언을 해준 기억이 난다.
김금화 만신의 근황을 접한 것은 돌아가시기 딱 한 달 전인 1월 23일. 회사 이메일로 누군가 간곡하게 김금화 만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잊지 말고 연락을 해보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아 이메일을 받은 상황을 전할 겸 김금화 만신의 일을 돌보는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장은 “현재 선생님께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병원 입원을 두 번씩이나 한 상황에 몸이 안 좋다”고 했다. 나라도 가서 만나겠다고 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조만간 슬픈 소식을 들을지도 모르겠구나.’
부고를 접하고 침착할 수 있었던 건 그때 걸었던 전화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무장 말에 의하면 곱고 예쁜 모습만 남기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나 또한 눈물 보다는 미소가 지어진다. 류머티즘으로 다 굽은 손가락이 펴지고,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던 무릎도 곧게 펴진 김금화 만신을 상상하니 말이다. 부디 꽃신 신고 사뿐사뿐 세상 소풍가시길 바란다.
작심삼일(作心三日). 1월을 벗어나 2019년이 익숙해질 즈음 떠오르는 단어다. 동해로 솟아오르는 새해를 바라보며 우리는 많은 것을 다짐하고 각오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수년간 벗어나지 못한 일상의 습관을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담배. 늘 “이번이 마지막 한 대”라고 각오하지만 어느새 한 개비의 담배가 또 손에 들려 있다. 그리고 자책한다. 경기북부 금연지원센터(국립암센터) 센터장 서홍관 교수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포기 않고 계속 도전하려는 각오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이 제게 주셔요.” 싸늘한 표정의 며느리의 한마디가 A 씨의 가슴에 와 박힌다. 아들 내외가 찾아오는 날은 한 달에 한 번뿐. 이때마저도 손주를 맘껏 안아보지 못하니 서러울 뿐이다. 이런 신경전이 시작된 것은 며느리가 3차(간접)흡연이 영유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기사를 본 다음부터다. 손주에게 해롭다니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만지지도 못하게 하니 자신을 마치 병균 덩어리 취급하는 것 같아 자괴감마저 든다.
서 교수는 “실제로 이런 갈등 때문에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이 꽤 많고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한다.
건강 걱정보다 왕따 싫어 금연 결심
“예전에는 건강을 생각해서 금연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런데 최근엔 그렇지 않아요. 간접흡연이나 3차흡연 때문에 흡연자가 배척당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흡연자들이 못 견뎌하는 경우가 많아요. 가족들도 싫은 티를 내는데 남들은 어떻겠어요. 사실 길거리에서는 흡연이 가능하지만 비흡연자의 부정적 태도나 언행 때문에 맘 편히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어렵죠. 이런 사회적 따돌림이 싫어 금연클리닉을 찾는 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 시니어 세대에게 흡연은 한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찬밥신세가 더 서러울지도 모르겠다. 서 교수도 흡연을 성인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담배 피우는 사람이 많았어요. 성인 남자의 흡연율은 80%를 넘었고, 의사들도 예외는 아니었죠. 대학에 가면 음주가 허락되는 것처럼 흡연도 성인이면 누려야 할 권리처럼 여겼으니까요. 저의 가족도 형님 세 분과 아버지 모두 담배를 피우셨죠.”
서 교수도 1977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흡연을 시작했다가, 1988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양담배 수입 저지 투쟁을 하다가 담배를 끊었다. 그는 “중독 상태가 심하지 않았는지 크게 괴롭진 않았다”고 회상했다. 서 교수는 이 과정에서 담배의 해악을 알게 되었고, 남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더 많은 자료를 읽다가 금연 전문가가 되었다. 현재 그는 한국금연운동협의회 회장이자 국내에서 손꼽히는 금연 전문가 중 한 명이다.
금연캠프 활용하면 성공률 높아져
서 교수는 “끊는 과정이 괴로워도 금연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국내 사망 원인 1, 2, 3위가 암과 뇌혈관, 심혈관 질환이에요. 중풍이나 심장마비 등이 대표적 질환이죠. 그런데 이 질환을 일으키는 공통 위험인자가 바로 니코틴이에요. 30년 이상 담배를 피웠다면 이미 혈관이 좁아져 있을 거예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죠. 자발적으로 발암 물질을 몸 안에 집어넣고 있는 셈이에요. 당장 끊으셔야 합니다.”
30년쯤 담배를 계속 피워온 사람이라면, 서너 차례쯤 금연을 시도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험했던 좌절감은 금연 도전을 주저하게 만든다. 서 교수는 “금연은 혼자 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으므로 국가의 금연 관련 서비스를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특히 고령 흡연자는 오래도록 니코틴에 중독된 상태이기 때문에 의지만 가지고 끊기가 어렵습니다. 주변의 도움이 필요해요. 국민건강보험공단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지역별로 금연 진료병원을 찾을 수 있어요. 약값이나 진료비는 나중에 환급되어 공짜나 마찬가지예요. 껌이나 패치 같은 니코틴 보조제 또는 부프로피온, 바레니클린 등의 약물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도 어렵다면 지역금연지원센터의 ‘금연캠프’를 이용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4박 5일 일정이며 금연과 관련한 교육, 건강검진도 받습니다. 참가비는 무료이고 약제비만 부담하면 되는데 이 비용도 환급이 되니까 경제적 부담은 없어요. 이 캠프를 체험한 흡연자 중 65% 정도는 6개월 이상 금연에 성공했으니까 효과가 높은 편이죠.”
금연 실패해도 구박 말고 응원해줘야
흡연자들이 금연에 도전할 때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스트레스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흡연을 통해 해소했는데,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하느냐는 고민이다. 서 교수는 이에 대해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비흡연자들도 나름의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잘 살고 있잖아요. 실제로 설문을 통해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해보면 오히려 흡연자들에게 스트레스가 더 많은 것으로 나와요. 되레 해소를 못하고 있다는 의미죠. 금연은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해요. 다만 주변인들이 도와줘야 합니다. 금연에 실패해도 구박하지 말고 또 도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격려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최근 유행하는 전자담배에 대해서도 서 교수는 할 말이 많다. 담배회사에서 마치 전자담배가 훨씬 덜 유해한 것처럼 홍보하고 있는 것이 마뜩찮기 때문이다.
“궐련형 전자담배도 연초담배하고 다를 바 없다고 봐야 해요. 물론 액상형 전자담배도 해롭고요. 담배회사에선 유리한 결과가 나온 성분 자료만 골라 발표하고 있지만, 모든 유해물질을 고려하면 유해성은 연초담배와 다를 바 없어요.”
올해 7월부터 30갑년(매일 1갑씩 30년 혹은 매일 2갑씩 15년 이상 흡연) 이상 흡연자를 대상으로 실시되는 저선량 폐CT를 활용한 폐암 검진 사업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다. 흡연자들이 금연을 선택하기보다는 검진과 흡연을 병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폐암은 5년 생존율이 25% 전후에 불과해 일찍 발견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