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원 때였다. 직속상관으로는 주임, 계장, 과장, 지점장이 있었다. 체력단련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야유회를 갔던 날, 족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낸 뒤 오후에는 부서별 술판이 벌어졌다. 술은 친목을 도모하는 윤활유 역할도 하지만 지나치면 싸움판이 되기도 한다. 그날도 삼삼오오 나뉘어 술을 먹다가 다른 곳에서 온 행락객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났다. 누군가 뛰어와서 과장에게 필자가 싸우고 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멀리서 필자와 비슷한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급히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올해 설날은 2월 16일 금요일로 주말을 포함해 나흘의 연휴를 즐길 수 있다. 지난해 추석 황금연휴처럼 쉬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30년 전만 해도 음력설에 이러한 연휴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89년, 민속의 날로 정했던 ‘구정’을 ‘설날’로 개명하며 동시에 이틀의 연휴가 더해졌으니 말이다. 한편 당시 3일 동안 쉴 수 있었던 신정연휴가 2일로 단축되며 설날연휴에 고향을 찾는 귀성객이 점차 늘어났고, 연휴를 여유롭게 즐기러 고궁과 테마파크 등을 찾는 이도 많아졌다. 설날 귀성 열차표 대란 1
100세 시대라고 한다. 과연 100세를 산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축복일까. 저출산과 맞물린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여러 면에서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주거 문제도 마찬가지다. 라이프사이클이 바뀌면서 시니어들에게 집은 더 크고 빈 공간이 된다. ‘노후에 어디서 살고 싶은가?’라는 설문에 많은 시니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답을 한다. 살고 있는 집에 정이 든 이유도 있고 지역을 잘 알고 있어 편리한 면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그 지역에서 살면서 형성한 인간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아파
블로그 글을 쓰는데 글이 자꾸 길어진다는 사람이 많다. 한 문장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는 것이다. 간결한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게 어렵다 한다. 해답은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하세요”다. 그러나 말이 쉽지 실행하기에는 좋은 답이 아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필사’ 방법이 있다. 간결하게 잘 쓴 작가의 글을 그대로 써 보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면 어디서 글을 단락을 짓는지 알게 된다. 본인도 모르게 그대로 따라 가게 된다. 신문 기사도 좋은 교재다. 신문 기사야말로 가장 간결하게 쓴 글이다. 이것을 그대로 베껴 써 보
이번 제주 여행은 맛집 순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행들은 이미 여러 번 제주에 다녀온 사람들이므로 관광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간 다녀오면서 맛이 좋았던 음식점을 추천하고 아들딸에게 전화해서 맛집을 검색해달라고 했다. 식사 때마다 서로 자기가 추천한 집에 가자고 다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제주도 음식값은 서울보다 비싸다. 관광지로 성장하다 보니 손님은 많고 자리는 모자라니 값이 계속해서 오른 것 같다. 도착한 날 점심 메뉴는 생선구이였다. 삼치와 고등어구이였는데 가격이 1만2000원이었다.
느닷없이 옛날 일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가다 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날보다 아팠던 상처들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딸들을 향한 시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며느리인 필자가 극심한 차별을 당했을 때, 또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아내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남편. 눈앞의 억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시절이다. 이럴 때 여자들은 대부분 친구나 지인을 만나 수다로 그 상처를 달래고 스트레스를 푼다. 그들은 함께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쯤은 있다. 필자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인기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필자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충남 태안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또래가 모두 겪었듯 필자도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필자는 소위 보릿고개를 체험한 마지막 세대다. 먹고사느라 바빠 부모의 교육열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대표로 한 명만 중학교 이상의 상급학교에 다니는 ‘특권’을 누렸다. 우리 집에서는 둘째 형님이 고등
영하 10℃ 이하의 날씨다. 오랜만에 동장군(冬將軍)의 위력을 실감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약식 점검을 해보니 난방라인은 이상이 없는데 온수라인은 냉수가 들어오는 부분이 얼어서 물을 밀어주지 못해 온수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전화를 했다. 기사를 보내왔는데 아무런 연장을 들고 오지 않고 빈손으로 왔다. 그러면서 필요한 이런저런 연장을 빌려달란다. 기사가 연장통을 들고 와야지 빈손으로 온 것이 못마땅했지만 당장 아쉬운 것이 필자인지라 짜증이 나도 응했다. 대충 이곳저곳을
몇 해 전, 세계태권도연맹(ITF) 부총재를 비즈니스차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인데 처음엔 필자보다 몇 살 연하로 봤다. 얼굴이 맑고 귀티가 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살이나 연상이었다.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채식주의자라고 했다. 술, 담배는 물론 고기와 우유도 안 먹고 생선, 조개류 등 해산물까지 전혀 안 먹는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다. 살면서 식도락이 얼마나 중요한데 동안을 위해 그걸 다 포기한다는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채식주의
전직 상사와 아랫사람 사이 진흙탕싸움이 한창이다. ‘나 살고 너 죽기’이다. 상사에게 토사구팽 당하였다는 하소연부터 아랫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까지 다양하다. 상사가 다 부려먹은 아랫사람을 자르는 것을 토사구팽이라면 아랫사람이 상사와 등을 돌리는 것은 배신이다. 언뜻 달라 보이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부산물이다. 추적자와 도망자가 뒤엉켰다. 누가 포식자인지 먹이가 될지 알 수 없다. 관중은 허망한 약속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교훈을 곱씹는다. 토사구팽은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유래한다. 오월동주로 잘 알려진 월왕 구천
문형! 독하게 추운 겨울입니다. 한파가 그야말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수도가 얼고 비닐하우스의 농작물도 성장을 멈추어 서민들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이은 화재 참사도 한파 이상으로 춥게 합니다. 기후 온난화를 꽤 걱정했으나 올겨울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입춘 절기가 코 앞인데 추위는 물러갈 줄 모릅니다. 예전부터 입춘 추위가 있다 했으니 봄기운은 더 멀리 머물고 있나 봅니다. 이런 겨울이면 지리산 청학동 계곡 언덕배기 자그마한 마을 초가집에 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방문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겨
‘포미 족’이란 영어 그대로 ‘나를 위한’이라는 뜻도 되지만, 포미(FOR ME)는 건강(For health), 싱글(One), 여가(Recreation), 편의(More convenient), 고가(Expensive)의 알파벳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를 말한다. 이들은 자신이 가치를 두고 있는 제품에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작은 사치’를 추구하는 소비 경향을 보인다. 가격대비 마음의 만족도를 따지는 ‘가심비(價心比)’ 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트랜드는 곧 단독가구가 복수 가구를 넘어서는 추세로 볼 때 상당히 관심
"너무 예쁘셔요." "그렇다고 빠지지는 마세요. 책임 못 져요." 며칠 전 남자 파트너와 홀딩을 하고 왈츠를 추는 중에 나눈 대화다. 물색 모르는 사람들은 필자가 춤을 꽤 잘 추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왈츠나 탱고는 가까운 거리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춤을 춰야 하니 뭔가 ‘썸’을 타지 않을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춤을 한번 배워보라 하고 싶다. 모든 일에 있어서 기본이 중요하다. 춤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 인터내셔널 왈츠는 루틴이 복잡해서 루틴 외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
A라는 사람은 “될 대로 돼라.” B라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겨우 열넷, 열다섯 살이었던 우리들에게 이따금씩 이런 물음을 넌지시 던지면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시던 분이 있다. 바로 통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박순직 선생님이다. 필자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은사님 중 한 분인데 그 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가 필자 생활의 지표가 되었다. “사과 반쪽이 남아 있으면 A라는 사람은 ‘겨우 요것밖에 안 남았어?’ 하고 B라는 사람은
청년 시절, 내 편이 되어준 처사(불교에서 성인 남자 신도를 이르는 말) 한 분을 잊을 수 없다. 그분을 생각하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그분과의 인연은 5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가 15세 때였다. 불일폭포 가까이에 있는 초가지붕의 한 암자에서 생면부지의 처사를 만났다. 행동과 말이 어눌한 60대 노인(지금은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엔 노인이었다) 한 분이 건강을 위해 입산해 혼자 살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빈둥거리던 필자는 새싹이 막 돋아나오던 이른 봄에 쌍계사와 불일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