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오랑주리 미술관 가는 길

기사입력 2020-05-07 09:52 기사수정 2020-05-07 09:52

[여행 작가와 떠나는 공감 투어]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스무 해가 훌쩍 넘어서 다시 온 파리에 낯섦이 기다려주어 다행이다. 그러나 파리는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수백 년 된 건물에 거뭇하게 묻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센강은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고 퐁네프 다리도 더 깨끗하거나 새롭게 단장되지도 않았다. 센강 양쪽으로 오래된 옛 건물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산천은 의구하되 나만 바뀌어 왔다.

김영하 작가의 글에 “한 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어서가 아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오는 '나'만 바뀌어있다는 것, 내가 늙어간다는 것,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 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시 가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조라는 뜻일 것이다."라고 김화영 선생님이 사석에서 말했다며 덧붙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십 년 세월을 훌쩍 넘겨 찾아와 늙어가는 내가 느릿느릿 걸으며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보는 건가. 어쨌든 다시 찾은 여행지의 맛을 느껴본다. 다만 그 옛날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제외했다. 에펠탑은 강 건너 빌딩 사이로 멀리서 탑 끄트머리만 힐끗 쳐다보았다. 샹젤리제 거리나 루브르 박물관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센 강 변을 따라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걸었다. BC 2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파리시의 기원이 된 센 강의 시테(Cite) 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 그 옛날 찬송 미사가 울려 퍼지던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만 본다. 이전엔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들처럼 기도하고 오르간 연주와 장엄한 노래를 들으며 예배에 함께 참여했었다. 높은 천정까지 울리는 오르간 연주와 신부님의 기도소가 온몸을 휩싸던 감동의 시간, 순박한 콰지모도가 치는 듯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종탑, 에스메랄다의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듯 성당의 성스러움을 온몸으로 받았던 그 옛날이었다.

흐린 하늘에 바람이 불고 간간이 빗방울이 흩뿌린다. 비를 피해 지하철역으로 얼른 뛰어들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걷는 속도는 여전하다. 도무지 비를 피할 생각이 없는 모습이다. 일상의 자연 속에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눈과 비도 함께 하듯.

노트르담 역에서 오르세 역까지는 10여 분이다. 역에서 나와 미술관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 같은 방향으로 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길가 강변의 가게에서 머플러를 하나 사서 둘렀다. 한결 온기를 준다.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오르세 미술관이 먼저 나타난다. 역시 예상한 대로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빗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저 행렬에 서서 보낼 시간이 없다. 애초에 두 개의 미술관 중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갈 생각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필생 역작인 '수련 연작'을 다시 볼 생각이다.

이날은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의 수련과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만 시간을 집중하기로 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오르세 역사(驛舍)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규모도 크고 볼거리도 엄청나서 한나절을 다 보내야 한다. 그 옛날 그렇게 다리 아프도록 실컷 보았던 오르세 미술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그냥 지나치고 사랑의 자물쇠가 빽빽이 걸려있는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근처에 다다르면서 익숙함의 안도가 생긴다. 그래, 여기쯤에서 잠깐 앉아있었지. 오래전 엄청 추웠었던 공원은 그대로군... 김영하 작가의 글에서처럼 나만 변해서 다시 하는 여행을 맛본다. 기분이 촉촉하다.

시간이란 게 참 별거 아니다. 스물 몇 해 전 꽁꽁 손이 얼던 겨울 속의 파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이제는 이렇게 촉촉했던 파리를 또 기억하게 되었다.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을 향하는 길의 튈르리 정원은 오래된 정원의 멋이 물씬하다. 튈르리 궁전 정원 별채의 자연광이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수련 연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천정의 빛과 자연광이 날씨에 따라 또는 일출과 일몰에 따라 환상적이다가 몽환적이다가 하며 최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다.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흐린 날에 찾아간 모네의 대작들은 조용히 그 자리에서 수련의 멋을 보여준다. 오직 자연의 원초적인 빛을 찾아 그의 영혼을 불어넣은 수련 연작이 갤러리 내부에 가득 차 있다. 모네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생각하며 가슴 벅차게 그의 예술혼을 흐뭇하게 느껴보는 시간이다. 모네의 방에서는 그 날의 자연광에 따라서 수련 연작은 언제든 다른 그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여행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기념하여 모네가 작품을 기증하면서 요청한 조건이 있었다.

1. 작품을 시민에게 공개할 것

2.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할 것

3.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하게 할 것.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지하로 내려가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다닥다닥 전시되어 있다. 고풍스러운 액자도 눈길을 끈다. 모네, 마네, 모딜리아니, 피카소, 르누아르, 루소, 마티스, 위트릴로, 시슬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들의 맛을 실컷 느껴볼 수 있었다.

더 꼼꼼히 그림을 즐기기 위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그리고 가이드 투어를 이용해서 작품 이해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들러볼 일이다. 그래야만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작품과 연결해서 완전한 감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나와 눈을 들어보면 저편으로 콩코드 광장도 보인다. 파리의 동선은 생각보다 길거나 힘들지 않다. 얼마든지 파리를 느끼며 걷기 좋다. 이날처럼 비 오는 날의 여행은 감성지수를 자극한다.

미술관을 벗어나니 센강엔 파리지엔느들이 하나둘 나와 걷고 있다. 바람 불거나 비가 오거나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 미술관 정원을 거닐며 가끔 센 강 변을 거닐며 그렇게 여행자가 되는 파리 사람들, 센 강을 배경으로 여행자처럼 사진을 찍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감성은 축복이다. 일상 속에서 즐기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발걸음은 풍경이다. 나는 어떤 여행 중인가.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사진 이현숙 시니어기자)

여행이 끝났어요. 즐거움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제는 내가 파리와 모네의 정원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에펠탑은 어땠니?' 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에펠탑은 볼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봐야 했거든....'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모네의정원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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