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싸움 구경이 최곤데…

기사입력 2020-06-29 09:39 기사수정 2020-06-29 09:39

(사진 정원일 시니어기자 )
(사진 정원일 시니어기자 )
새치기 싸움

어릴 적, 동회에 가서 급히 등초본 떼는 심부름을 할 때, 어머니께서는 담배 한 갑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이른바 동회 직원에게 줄 ‘급행료’였다. 그 시절, 서류 한 통 발급받으려면 몇 시간이 걸렸다. 새치기를 해서라도 빨리 처리받고 싶은 마음에 작은 뇌물을 바친 것이다. 은행에서도 대기 줄을 섰다. 여기서도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들은 새치기를 했고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국민들 수준이 갑자기 높아졌다. 새치기는커녕 집에서 안 읽던 잡지까지 읽으며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순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새치기 시비에 삿대질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로 ‘번호표’ 뽑는 기계 덕분이었다.

싸움질해야 어학 실력 는다!

18개월의 외국생활을 하는 동안, 현지에서 어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그동안은 문법 위주로만 공부를 해 교재 해석은 되는데 회화 실력은 영 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현지인과 연애를 하면 어학 실력이 금방 는다는 솔깃한 얘기를 하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오십을 넘긴 유부남에게 그런 기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CCTV가 없는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으로 경찰관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억울하고 당황스러웠던 나는 언성을 높였다. 험한 표정에 큰 몸짓, 그리고 뭐라 내뱉는 한국어 욕설은 경찰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경찰서까지 갔다. 그 후로 몇 주간 한인회의 도움을 받아가며 경찰서를 들락날락했다. 서류 작성이나 대답을 잘못하면 큰일이 나니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 일이 있고 난 뒤 영어가 막 들리기 시작했다! 영어로 시비를 가렸더니 실력이 팍 늘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로 유학 온 외국 학생들은 불리하다. 싸워서 시비를 가릴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전국 어디든 깔려 있는 CCTV라는 기계 덕분이다.

차고 넘치는 증거들

어린 시절, 셜록 홈스와 괴도 뤼팽 시리즈는 우리의 추리력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아가사 크리스티는 ‘(쥐)덫’을 놓았고 형사 콜롬보는 ‘안심시켜 질문하기’ 신공을 펼쳤다. 그렇게 그들은 치밀하게 수사 계획을 짜거나 영리하게 피해가며 서로를 시험했다. 그리고 결국 범인이 꼼짝 못하거나 자백할 정도의 증거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 과정들이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지금의 영화나 드라마 속 너무나 많은 증거들은, 휴대전화로 촬영된 동영상이나 녹음파일, 그리고 위치추적 자료로 끝난다. 그러니 요즘의 너무 순한 범인들은 증거를 들이대면 곧바로 인정, 반항하거나 싸우려 들지 않는다. 차라리 휴대전화 안 쓰는 범인이 그리울 정도다!

다툼이 줄어든 사회

불 구경, 홍수 구경보다 더 짜릿한 싸움 구경도 사라지고 있다. 그동안 가장 흔한 길거리 싸움 풍경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발생하곤 했다. 서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우기며 욕설과 삿대질을 하다가 몸싸움으로 발전하는 광경들이, 이번에는 블랙박스라는 기계로 사라졌다. 사고가 나면 보험회사 직원들이 나타나 블랙박스를 회수해 조용히 가버린다. 그러니 당사자들도 조용하다. 서로 멱살잡이를 하며 원수지간으로 발전해야 구경꾼들이 재미있는 법인데, 오히려 서로의 안위까지 묻고 밋밋하게 그냥 헤어진다.

( 사진 정원일 시니어기자 )
( 사진 정원일 시니어기자 )

이렇게 작은 기계들이 시스템의 개선을 가져오고, 그것들이 모여 오늘날 우리 국민의 수준을 형성했다. 지금처럼 소소한 일상의 갈등들이 줄고 있는 때야말로, CCTV와 블랙박스로도 안 찍히는 우리 사회의 숨어 있는 큰 갈등을 해결해야 할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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