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엄마 아닌 황영희, “극과 삶 사이를 견디는 순간”

‘왔다! 장보리’, ‘김과장’, ‘황후의 품격’, ‘동백꽃 필 무렵’, ‘눈물의 여왕’… 다양한 극에서 무수한 엄마들을 만난 배우 황영희. 무수한 정체성은 곧 그의 주체성을 거쳤기에 오롯할 터. 배역을 두 팔 벌려 마주하고, 다시 속절없이 떠나보내며 굳건해진 황영희의 시간은 어땠을까.

굉장히 오랜만의 인터뷰이자 화보 촬영이에요.

이런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에요. 활동하다 보면 종종 요청이 오는데, 드라마 ‘왔다! 장보리’ 이후로는 지양했던 것 같아요. 내가 뱉은 말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너무 쉽게 이야기해버린 거 아닐까?’ 곱씹으면서 잠을 설친 적도 있어요. 그만큼 조심스러워요. 맞지 않는 옷이라 느낄 때도 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직업 특성상 해야 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어요.

오늘 비가 많이 왔는데도 즐거워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비가 와서 어떡하죠?’ 하고 물으셨지만 저는 오늘따라 비가 와서 좋았어요. 현장에 계신 분들이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오히려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눈물의 여왕 그 이후

최근 작품 ‘눈물의 여왕’이 큰 사랑을 받았어요. 분위기를 체감하시나요?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많이 알아봐 주세요. 저기 멀리서부터 달려와서 드라마 잘 봤다고, 응원한다고 그래요. 드라마가 사랑받아서 기쁘고 뿌듯해요. 대본이나 연출은 물론이고, 주연뿐 아니라 조연들의 서사 역시 좋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전봉애는 백현우(김수현)의 엄마기도 하지만 그의 성격이나 특징까지 잘 드러난 것 같아요. 사실 제 캐릭터와 연기를 통해 누가 얼마나 위로받는지 가늠하기 힘들잖아요.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많았으면’ 하면서 지냈는데, 이번에 피부로 느낄 수 있었어요. 덕분에 용기를 얻어요.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고 들었어요.

어찌나 즐겁던지, 웃음 코드가 잘 맞았어요. 제가 경험한 현장은 대체로 분위기가 나빴던 적이 없지만요. 장영우, 김희원 감독님과 평생 작업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동료들과의 호흡은 말할 게 있나요.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다들 베테랑이에요. 용두리 가족들이랑 주로 촬영해서 추억이 많아요. 전배수 씨 덕에 너무 많이 웃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죠. 우리 큰아들 김도현은 정말 순둥하고, 윤주는 그렇게 리액션이 좋아요. 김수현, 김지원 두 주인공과 사돈네도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현우 고향으로 나왔던 용두리가 문경이었는데, 갈 때마다 여행하는 기분이었죠. 촬영 전날 근처에 미리 가서 컨디션을 조절하거나 여유롭게 산책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문경은 약돌 삼겹살이 진짜 맛있거든요.(웃음)

전봉애를 연기해보니 어땠나요?

전봉애는 백현우의 엄마이자 마을 최고의 일꾼이에요. 슈퍼 운영도, 농사도 다 해요. 그리고 남을 이해하며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그 범위가 굉장히 넓고 커요. 저는 그렇게 성숙하고 강인하지 못해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어요.

우선 조금이라도 전봉애와 가까워져야겠다 싶어서 나라는 사람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어요. 누구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했나 하고. 두 명 정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 연기하면서 흘려보내게 됐어요. 불완전한 사람 사이의 일이니까, 누구나 실수할 때가 있으니 그럴 수 있다, 했죠. 전봉애는 전보다 나를 조금 더 성장시킨 캐릭터예요.

지금까지 ‘엄마’ 역할을 굉장히 많이 소화했어요.

같은 엄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 달라요. 작품마다 인물이 지닌 특성과 서사가 다른지라. 아무리 분량이 적어도 뻔하게 그려지지 않도록 힘쓰는 편이에요. 물론 전형적인 엄마를 표현해야 할 때도 있어요. 그 자리에, 그 역할이 있는 이유가 있거든요. 모든 인물이 살아서 펄펄 날면 자칫 작품이 산만해질지도 몰라요. 저의 숙제는 제한된 분량 내에서 맡은 인물이 어떻게 잘 보일 수 있을지 완급 조절을 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엄마 역할도 세대 교체가 될 테니, 그때까지 더 노력해야죠.

작품 선택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그건 영업비밀입니다.(웃음)

황영희의 극과 극

드라마가 끝나고, 연극 ‘진천사는 추천석’에도 참여했다고요.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가깝게 마련돼 있어 관객들의 반응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축제를 벌이듯 현장에 있는 모두가 하나 되는 순간이었죠. 같은 무대에서 하나의 작품을 여러 번 선보이는데도 매번 다른 느낌이었어요. 저승사자, 서민 아빠, 중 역할을 맡으며 무대를 휘젓다 보면 몸이 힘들 때도 있지만 오히려 마음은 채워져요. 연극을 보기 위해 귀한 발걸음을 해 응원해준 분들께 감사해요.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 열정이 조금이나마 전달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진천사는 추천석’을 통해 좋은 동료들과 함께해서 매회 온 힘을 다해 즐겁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배운 것도 많고요. 다시 그들과 무대에 설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연극의 매력과 의미를 꼽자면요?

특유의 생동감과 현장감이 좋아요. 연습이 끝날 무렵이면 모든 배우가 땀에 흠뻑 젖은 상태임에도 표정은 늘 밝아요. 완벽한 무대를 위해 실전처럼 매일 연습하죠. 합을 맞추면서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고, 개인 레슨 선생님이 여럿 있는 기분이었어요. 다른 배우들이 지닌 에너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내가 자동차라면 연극은 엔진 같아요. 정기적으로 해야 마음이 고장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연기에 몰입했다가 다시 삶으로 빠져나오는 과정은 어떤가요?

방법이 없어요. 슬프면 슬픈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견디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아, 나 거기서 못 빠져나왔구나’ 깨달아요. 정 힘들거나 새 작품에 들어갈 시점에는 기도를 해요. 내 힘이 미약하다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함께해 줄 거라는 위안을 얻고 싶어서요. 내면을 다지는 과정이죠.

직업인으로서 여전히 고민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나로부터 가지를 뻗는 연기를 했어요. 나이 들수록 오히려 반대예요. 배역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나를 버리려 노력하죠. 어떤 방법이 나은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더 잘하고 싶어요. 대중에게 사랑받고 싶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흐르는 대로 겪어보려 해요.

하반기에 출연할 드라마는 사극이라고요. 촬영에 어떤 자세로 임하셨나요?

연기에 애정을 갖고 잘하는 배우들이 너무 많은데, 그 기회를 대신 얻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더 잘 해내야지 다짐하게 되고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관계자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영상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닿을 거라 믿어요.

Bravo Question -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일이 너무 재밌고 행복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건강 상태나 주변 환경, 대중의 흐름에 따라 연기를 지속하지 못할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의연하게, 그저 버티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주어진 상황을 탓하고 미워하지 않는 마음. 조금 괴롭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견딜 수 있다’고 여기는 심지가 제 안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