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소멸 해결하는 日 ‘이동 슈퍼’, 지역 돌봄 인프라로 발전

기사입력 2024-10-07 07:59 기사수정 2024-10-07 07:59

트럭 슈퍼 도쿠시마루, 10년 새 10배 증가... 18만 고령자 도와

(사진=이연지 기자, 디자인=이은숙)
(사진=이연지 기자, 디자인=이은숙)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 특별기획 [고령화에 갈 곳 잃은 교통난민]

제1부 인국절벽에 가로막힌 노인 이동권

제2부 전용 교통수단으로 활로 찾은 일본

제3부 첨단 기술과 공유경제, 미래 이동권의 키워드


‘슈퍼까지 어떻게 가야 하지?’ 취재 장소인 슈퍼까지 택시를 탈 생각이었지만 도착한 곳은 역무원도 없는 아주 작은 지하철역이었다. 이동 수단이 없어 슈퍼를 갈 수 없는 상황이라니. 이처럼 교통 난민과 쇼핑 난민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운전면허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고령자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일본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하나의 대안으로 이동 슈퍼가 등장했다.

카페도 편의점도 사람도 많은 도시의 지하철역과 달리, 고요하고 한적하고 사람도 없는 와카바야시역(若林駅)에서 처음으로 ‘어떻게 이동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역에서 슈퍼인 야마노부(やまのぶ) 와카바야시점까지는 걸어서 15분 남짓이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무색하게 태양이 아주 높고 뜨겁게 걸려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걸으며 나에게는 15분 걸리는 이 길이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에게는 1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무더운 여름날 이 햇빛을 맞으며 무거운 물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욱 힘들게 느껴질 테다.


“집 앞에서 장 보세요”

‘슈퍼가 멀다, 날씨 영향을 받는다, 걷기가 어렵다’는 고령자들을 위해 집 앞으로 슈퍼를 보내주는 회사가 있다. 이동 슈퍼 도쿠시마루(とくし丸)다. 도쿠시마루의 ‘도쿠시’(とくし)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등 사회적으로 좋은 일에 참여하거나 돈을 내놓는 사람이라는 뜻의 독지가(篤志家)의 ‘독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앞으로 ‘쇼핑 난민’이라는 단어가 없어질 때까지 이동 슈퍼 차량 수를 늘리겠다는 미션을 가지고 있다.

도쿠시마루는 약 400품목, 1200~1500개의 상품을 경트럭에 싣고 고령자의 집, 대문 바로 앞까지 간다. 이렇게 일본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트럭은 2012년 도쿠시마루 설립 이후 2016년 100대를 돌파하더니, 2024년에는 1180대가 됐다. 도쿠시마루 이용자는 약 18만 명에 이른다. 이용자는 대부분 80세 이상 여성이다.

도쿠시마루 커뮤니케이션부 홍보 담당 오가와 나오미(小川奈緒美) 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젊고 건강한 사람은 점포가 크면 클수록 상품이 다양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령자는 ‘너무 넓어 원하는 상품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면서 “경트럭은 현관 앞까지 가기에 부담 없고, 좁은 주택가를 방문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이연지 기자, 디자인=이은숙)
(사진=이연지 기자, 디자인=이은숙)

도쿠시마루는 지역 슈퍼와 제휴를 맺고 지역에서 트럭을 운영할 판매 파트너를 모집한 뒤, 이용자의 신청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판매 파트너가 제휴 맺은 슈퍼에서 물건을 담고 오전 10~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고령자를 방문한다. 이후 남은 물건은 다시 슈퍼로 가져와 저녁 시간대에 할인된 금액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보통 하나의 트럭이 하루 10곳 정도 방문하며, 1인당 쇼핑 시간은 10~15분 정도 걸린다. 식품 판매를 하기 때문에 3일에 한 번, 주에 2회 방문하는 것이 원칙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은 반찬이며, 다음으로 채소 등의 신선식품이 인기다.

본사에서 전국을 관리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기업과 제휴를 맺고 일부 운영을 위탁하기도 한다. 취재를 위해 방문한 슈퍼 체인점 야마노부의 경우 포인트 서비스 회사인 블루칩에서 관리한다. 블루칩 담당자는 “전국으로 이동 슈퍼 시스템을 넓히기 위해 도쿠시마루와 협력하고 있다”면서 “야마노부는 중소 정도 규모의 체인이기 때문에 이동 슈퍼로 인한 매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1% 정도지만, 지역에서 한두 개 매장을 운영하는 곳이라면 매출의 30~50%를 차지할 정도로 지역 슈퍼 매출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지역의 슈퍼 역시 방문하는 소비자가 줄어들면 운영이 어려워지는데, 곳곳에 매장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동 슈퍼를 통해 새로운 판매 루트를 만드는 것이다.

판매 파트너는 개인사업자로 트럭을 직접 구매하거나 대여해서 이동 슈퍼를 운영한다. 슈퍼 입장에서는 정규직 직원을 고용하지 않아도 돼 운영 부담을 덜 수 있다. 이동 슈퍼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판매하는 모든 물품에는 20엔의 수수료가 붙는다. 판매 파트너는 판매수수료로 수익을 낸다. 도쿠시마루는 신입 판매 파트너를 대상으로 첫해에 4회 교육을 실시하며, 매출이 낮은 판매 파트너에게는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판매 파트너를 채용할 때는 도쿠시마루 창업자인 스미토모 다쓰야(住友達也) 씨의 원칙을 따른다. ‘자신의 부모에게도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기준이다.


▲기본적으로 도쿠시마루 트럭에는 냉장 시설이 있고, 일부 트럭은 냉동고도 있다. 물건을 고르는 고령자의 즐거움을 위해 판매 파트너가 직접 트럭을 꾸미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도쿠시마루 트럭에는 냉장 시설이 있고, 일부 트럭은 냉동고도 있다. 물건을 고르는 고령자의 즐거움을 위해 판매 파트너가 직접 트럭을 꾸미기도 한다.


지역 지킴이, 도쿠시마루

‘도쿠도쿠도~쿠 도쿠시마루~’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트럭이 아파트 입구에 멈춰 섰다. 9년 차 베테랑 판매 파트너인 가쓰미(勝見) 씨가 트럭을 열고 뜨거운 햇빛을 가려줄 천막을 펼친 뒤 어르신들이 편하도록 장바구니를 펼쳐뒀다. 하나둘 나온 어르신들은 ‘지난번에는 왜 안 나왔느냐’며 서로 안부를 묻기도 했다. 65세인 오타 씨는 “노래를 들으면 왠지 나오고 싶어요. 이곳은 주민들끼리 이야기 나눌 커뮤니티가 없어서, 쇼핑도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는 게 즐거워요. 혼자 살기 때문에 하루에 한마디도 안 할 때도 있거든요. 혹시 내가 아플 때 쇼핑하러 나오지 않으면 누군가 들여다봐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라며 이동 슈퍼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쿠시마루 트럭이 방문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도쿠시마루 트럭이 방문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다 보니, 이용자와 판매 파트너의 관계는 오히려 자녀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고 한다. 고령자를 만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대화를 통해 사회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동 슈퍼의 중요한 역할이다. 오타 씨의 말처럼 커뮤니티 역할도 한다. 아파트 단지의 경우 많게는 30명 정도가 모일 때도 있다고 한다. 주택가 역시 도쿠시마루 노래를 듣고 이웃집 주민이 나와보기도 하면서 대화의 장이 열린다.

가쓰미 씨는 “물론 처음부터 어르신들이 마음을 여는 건 아니지만, 자주 보다 보면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나누게 된다”면서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한다”고 했다. 대부분 혼자 살면서 하루 종일 TV만 보거나 한마디도 하지 않는 고령자가 많은데, 대화를 많이 해야 치매 예방에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판매 파트너끼리 뇌를 활성화하는 방법을 공유하거나 할머니,‧할아버지에게 도움 되는 정보를 공유한단다.

이렇게 이동 슈퍼는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지역 지킴이’ 역할도 한다. 판매 파트너가 고독사한 어르신을 발견하거나, 생명이 위독한 어르신을 구하는 사례도 있었다. 오가와 씨는 “각 지자체와 미마모리(見守り, 지켜본다는 뜻) 협정을 맺고 있다. 사회복지 협의회, 지역 포괄 센터, 케어 매니저, 민생 위원 등과 협력한다. 이동 슈퍼 이용자는 관심이 필요한 고령자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동 슈퍼는 해당 지역에서 중요한 ‘돌봄’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객과 판매 파트너가 자녀만큼의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면, 앞으로 식품 외의 서비스 제공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도쿠시마루의 최종 목표는 고령자의 요청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콘세르주(コンセルジュ, 호텔 등에서 고객 만족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가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판매 파트너는 손님에게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는 물품들을 직접 골라 담는다. 최대한 많은 물건을 싣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래도 없는 물품은 직접 주문 받아 다음 방문 때 전달한다.
▲판매 파트너는 손님에게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는 물품들을 직접 골라 담는다. 최대한 많은 물건을 싣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래도 없는 물품은 직접 주문 받아 다음 방문 때 전달한다.

(사진=이연지 기자, 디자인=이은숙)
(사진=이연지 기자, 디자인=이은숙)

mini interview

◇야마노부 와카바야시점 도쿠시마루 총괄, 우에다(うえだ) 씨

“우리 지역에 재개발 이슈가 있어서 슈퍼가 없어졌어요. 일종의 사명감으로 도쿠시마루를 도입했습니다. 9년 전만 해도 고령자 비율이 20% 정도여서 ‘이동 슈퍼라니, 10년은 빠르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령자 비율이 점차 늘어났어요. 도입하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와카바야시에는 10대의 트럭이 운행되고 있어요. 이용을 원하는 분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이동 슈퍼가 먼 곳에 혼자 사는 분들이 쇼핑하는 데 문제없도록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시설, 그러니까 인프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이동 슈퍼가 있는지 없는지가 곧 인프라가 좋은지 안 좋은지의 기준이 될 정도예요!”

◇도쿠시마루 판매 파트너, 가쓰미(勝見) 씨

“식료품 관련 일을 하다 어느 날 TV에서 도쿠시마루를 봤어요.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판매 파트너를 신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치매에 대해 잘 몰라 치매가 있는 어르신과 말다툼을 한 적도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하네요. 이 일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물건 고르는 즐거움을 드린다’는 거예요. 부탁받은 물건만 전달하는 건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거든요. 마지막 순서쯤에 물건이 다 떨어지면 미안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실으려고 해요. 특히 채소 같은 신선식품은 상태를 보며 고르는 기쁨이 있었으면 합니다.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일이 아니라, 어르신들을 돌보는 역할도 하고 있어 무척 보람되고 이 일을 이어가는 동기가 됩니다.”

현지 취재 일본 야마노부(やまのぶ) 와카바야시점, 와카바야시(若林)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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