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해가 찾아왔다. 무수히 왔다 가는 새해인데도 그 시간 앞에선 언제나 마음가짐이 새롭다. 한 해의 첫머리이고 겨울의 한가운데이기도 하다. 높은 산꼭대기엔 차갑게 얼어붙은 상고대가 새하얗고, 짙푸른 겨울 바닷바람에 연신 입김을 뿜어낸다. 온기 품은 편안한 여정이면 좋겠다. 벼르고 벼르지 않아도, 촘촘한 계획이 없어도, 멀리 있거나, 요란하지 않아도 무언가 채워지는 곳, 하루쯤 마음 챙김의 청주 아트투어다.
이토록 친밀한 자연 속에서, 청주동물원
청주에 닿자마자 바람이를 보러 청주동물원부터 간다. 우암산 중턱에 자리 잡아서 저절로 아침 산책도 겸한다. 동물들에게 최적화된 가파른 지형도 자연스럽다. 비탈진 동물원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각자의 습성대로 움직이며 사는 동물들의 발소리가 들리고, 나무 위에선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청주동물원은 야생동물 보호·구조에 최고의 동물원으로, 환경부가 전국 처음으로 지정한 ‘제1호 거점동물원’이다. 야생을 닮은 친자연적 환경을 조성한, 진정 동물을 위한 동물원이다. 정해진 시간에 동물 공연을 보는 동물원이 아니다. 바람이나 다른 동물들을 만나러 갔어도 금방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기억해야 한다. 이른바 자만추의 동물원이다.
이렇게 자연에 푹 안긴 동물원에 바람이가 살고 있다. 어느 동물원의 열악하고 위태로운 사육장 환경에서 구조된 노령의 사자 바람이. 온몸에 온통 뼈만 보여서 갈비사자라 불렸는데, 이제는 바람이라는 이름을 얻고 청주동물원에서 스트레스 없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04년생 수컷인 스무 살 바람이는 사람 나이로는 백 년을 산 할아버지 사자다. 하늘도 땅도 자연도 낯설게 살아온 바람이가 청주동물원으로 온 지 1년여 지난 지금, 눈매나 몸매와 갈기가 살아 있는 완연한 사자로 회복된 모습이다. 따뜻한 햇살을 좋아하는 바람이는 까무룩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졸음에 겨워한다. 바로 옆으로 바람이의 딸 구름이도 데려왔는데, 관계 회복을 위한 시간이 지나면 3월쯤 합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깊이 있는 예술, 충북문화관과 청주시립미술관
청주동물원에서 내려오면 충북문화관이 가깝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옛 충북도지사 관사는 청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우암산 자락에 앉혀졌다. 2012년 충북 도민의 문화쉼터로 열린 공간이 된 근대문화유산이다. 숲길을 가듯 따라 올라가면 자연 속에 조각 프로젝트인 예술작품이 공존하는 야외정원 숲이 나타난다. 양식과 일식으로 지어진 이색적인 문화의 집과 숲속갤러리를 이어주는 공간에서 역사를 느껴보는 시간이다.
숲속갤러리에서는 지역 작가들의 다양한 기획 전시를 볼 수 있다. 운치 있는 갤러리에서 보낸 시간은 예쁜 기억으로 남는다. 문화의 집은 근대 문화의 느낌이 물씬하다. 일본 전통적인 주거 양식인 다다미방과 서구 건축의 혼합이다. 대들보의 상량문도 그대로다. 내부의 천장을 올려다보니 건축 당시의 전깃줄과 애자가 어지러운 채 옛 구조의 원형을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실내에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의 삶과 작품, 기록물 전시를 둘러보고 미디어를 이용한 상세 관람도 할 수 있다. 관람 후 문화사랑방과 북카페에서 여유롭게 여행을 되새겨본다. 인근의 청주향교도 들러보자.
청주시립미술관은 청주 사직동에 위치한 미술 문화공간으로, 전시 문화를 좋아한다면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 기획하는 전시는 언제나 믿고 보는 뿌듯함을 안겨준다. 지난여름과 가을 사이에는 평소 보기 어려운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 작가 故 윤형근 화백의 ‘윤형근: 담담하게’, 뉴욕에서 활동 중인 설치미술가 강익중의 ‘청주 가는 길: 강익중’을 기획 전시했다.
두 작가 모두 청주 출생이다. ‘예술은 심심한 거여’ 했다던 윤형근 화백의 느리고 평온했던 삶의 배경이 작품과 연관 있었을 듯싶다. 이토록 심심하고 슴슴한 듯 질리지 않는 매력을 지닌 청주에서 전시 제목처럼 담담하게 녹여내는 창의적 예술성이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특이한 사실은 K팝 그룹 BTS의 리더 RM이 윤 화백의 그림을 솔로 앨범에 배치했다. K팝 아이돌이 사랑한 작가이기도 하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빛내는 예술가 강익중 작가 역시 고향 청주를 회고한다. 전시를 통해 작가가 추구하는 화합의 주제도 무심천과 우암산이 바탕이 되었다. 간혹 어디서 들었다면서 노잼이란 섣부른 말로 청주를 아는 척한다. 수수하고 겸손한 미덕의 시간 속에서 발효시켜 표현하는 청주만의 예술성은 차원이 다른 노잼의 결과가 아닐까. 청주시립미술관에 가면 제대로 맛을 내는 이런 본연의 예술을 접하게 된다.
시립미술관 건너편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직지’가 있다. 새롭게 설치된 디지털 북 ‘직지’도 경험할 겸 들러봐도 좋다. 정보 하나 추가한다면, 청주 문화예술의 대표 공간인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옆으로 멋스러운 청주 여행자센터가 마련되었다. 청주 여행과 문화예술에 관한 스마트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행자 쉼터도 있으니 기억해두면 유용하다. 진화를 거듭하는 청주공예비엔날레를 진행하는 문화제조창도 바로 옆에 있으며, 언제나 전시 관람이 가능하다.
그들만의 도심 속 중앙공원 은행나무
미술관에서 나와 중앙공원에 잠깐 들러 은행나무를 보고 가는 걸 추천한다. 천년 세월이 다 되어가는 은행나무를 비롯해 망선루, 척화비, 병마절도사영문, 순교자 현양비, 의병장 한공봉수송공비 등 청주의 역사를 담은 공원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은행나무 압각수는 고려 공양왕 2년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목은 이색을 비롯해 어진 신하들을 홍수로부터 구해주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푸르른 여름을 지나 가을이면 공원 한복판에서 은행나무가 불을 켠 듯 투명한 노란빛으로 빛난다. 잎을 떨군 겨울에도 오랜 세월을 보여주는 무게로 자리를 지킨다. 나무 아래엔 드라마 속 송혜교가 바둑을 두던 바둑판 위로 은행잎이 뒹군다. 공원 옆 골목의 쫄쫄 호떡집 앞에는 한낮인데도 호떡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다.
역사와 일상의 공존, 상당산성과 자연마당
상당산성은 청주를 말할 때 먼저 떠올리는 배경이다. 청주 동쪽으로 솟은 상당산을 감싸는 모양의 성벽 둘레가 4.2km 정도다. 상당산성 옛길은 삼국시대 백제 토성을 조선 숙종 때 축조했고, 상당산성과 청주를 잇는 역사 속의 옛길이다. 성벽을 따라 힐링길, 회생길, 흔적길, 3코스의 생명력 넘치는 건강한 명품 숲길이 이어진다. 걷다 보면 정자 명암정과 출렁다리, 생태숲길과 전망대가 나오는데, 걷기에 따라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연말이나 새해엔 정북토성의 일몰과 함께 청주의 해넘이나 해맞이 명소로 의미 있다. 이른 새벽에 올라 상당산성 성곽에서 맞이한 일출은 역시 품격이 남달랐다.
상당산성을 넘어가면 성내방죽과 청주의 새로운 감성 여행지 자연마당에서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멋을 만나게 된다. 그동안 무심히 방치되었던 휴경지가 생태공간으로 거듭났다. 다랑이논과 연꽃 군락지를 가로지르는 산책길을 지나면 억새가 바람에 날리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자연환경대상을 받았을 정도로 살아 있는 자연 생태계다. 순수한 자연 속에서 오가는 이들의 잔잔한 힐링 감성이 절로 전해진다. 입구 외딴 고택의 오래된 감나무에 까치밥이 넉넉히 매달렸다.
깊은 산속 마동창작마을
시간을 좀 남겨두었다가 청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의 마동창작마을을 향해 달려보자. 유년의 꿈을 찾아가는 길이다. 대청호 500리 길의 숨은 아트로드다. 조붓한 시골길을 주춤주춤 가야 하는 깊은 산속의 폐교가 창작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지 오래다. 교정을 채운 조각작품들, 실내 갤러리엔 작품들이 빼곡하다. 문화 향기 흠뻑 맛볼 수 있는 공간으로 일상이 예술이고 창작이다. 오래된 나무에 매달린 그네가 추억을 소환한다.
그 옛날 먹티고개를 넘으며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쉬어 갔다는 마동리. 마동창작마을 앞으로 허리 굽은 동네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는 시골 풍경 속으로 겨울 볕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