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만드는 제조 공장에 가면 생산 라인이 있다. 공장 노동자가 일하기 싫어도, 혹은 지난밤 술을 많이 마셔 몸 상태가 안 좋아도 생산 라인은 돌아가고 물건은 제조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써야 한다는 의지만으로는 쓰기 어렵다. 우리의 의식은 글 쓰는 일을 귀찮아하고 싫어할 뿐 아니라 두려움까지 느끼기 때문이다. 해결 방법은 튼튼한 생산 라인을 구축하는 것이다.
내 무의식을 글쓰기 최적 환경으로 세팅해놓는 것, 즉 글쓰기 좋은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첫째,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을 곁에 둬라.
힘들여 써본들 그걸 보여줄 사람이 없으면 과연 쓰고 싶을까. 그것처럼 부질없는 일이 있을까. 학교 다닐 적 시험 보는 게 싫었다. 그럼에도 시험을 잘 보기 위해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이런 생각을 했다. ‘시험 결과를 보여줄 사람이 없으면 내가 이렇게 할까?’ 스스로의 실력만 확인하기 위해서 시험공부를 했다면 나는 아마 밤을 새우지 못했을 것이다. 시험 성적을 보여줄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들이 있었기에 싫어도 공부했다.
나는 주말마다 시험 보듯 글을 써서 아내에게 보여준다. 아내가 내 글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자다. 나는 기고하는 매체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 않는다. 오직 아내를 상대로 쓴다. 내가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상대하는 일은 버겁다. 나는 아내에게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쓴다. 그러면 아내는 여지없이 좋다고 말해준다. ‘이상한 데 없어?’, ‘고쳐야 할 곳은?’ 이런 물음에 늘 귀찮다는 듯 ‘없다’고 답한다. 그러면 나는 자신 있게 투고하곤 한다.
둘째, 나만의 관심사를 갖는다.
글쓰기는 쓸거리가 필요하다. 쓸거리가 항시적으로 있어야 지속적으로 글을 쓸 수 있다. 활을 쏘고 싶다 해도 과녁이 있어야 한다. 나의 과녁은 ‘글쓰기’, ‘말하기’, ‘소통’, ‘관계’ 등이다. 고등학교 시절 바둑에 심취한 적이 있다. 그때 자려고 누우면 눈앞에 바둑판이 그려졌다. 나는 요즘도 자기 전이나 아침에 샤워할 때, 혹은 산책할 때 글쓰기나 말하기에 관해 생각한다.
자기만의 관심사가 있는 사람은 그것에 관해 알고 싶어 한다. 보고 듣고 읽고 느끼는 모든 것에서 관심사와 관련 있는 것을 찾는다. 모든 일이 관심사와 연결된다. 무엇에 자극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느닷없이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하려고 한 게 아닌데 불현듯 생각이 난다. 그것이 첫 단계다. 다음 단계는 수다 떨듯, 랩하듯 생각이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들을 자동 기술한다. 끝으로 연상된 것들의 의미를 곰곰이 따져본다.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그러면 생각이 정리된다. 모든 생각은 나름의 결론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글감이 된다.
셋째, 글 쓰는 장소를 정해둬라.
그곳에만 가면 쓰고 싶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카페여도 좋고, 도서관이어도 상관없다. 작가마다 글이 잘 써지는 공간이 있다. 타니아 슐리의 책 ‘글쓰는 여자의 공간’에서도 많은 여성 작가가 자기만의 방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글 쓸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같은 위대한 작가는 주방 식탁 위에서 명작을 썼고, 어떤 작가는 화장실에서, 또 어떤 작가는 욕조 안에서 썼다.
나는 동네 카페에서 쓴다. 카페에 가면 내 몸이 글 쓰는 모드로 전환한다. 카페만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 있는, 다소 시끄러운 장소만 가면 글이 잘 써진다. 누구는 새벽 침대 위가, 또 누군가는 골방 앉은뱅이책상이 그 공간이 된다.
넷째, 자신에게 익숙한 글을 쓰는 것도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 조건이다.
누구에게나 쓰기 편하고 좋아하는 글의 장르가 있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독후감이나 서평이 쓰기 좋을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기행문을 쓰면 될 것이고, 기록을 즐기는 사람은 블로그나 일기를 쓰면 된다. 칼럼이 쓰기 편한 사람도 있고, 에세이가 쓰기 쉬운 사람도 있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지속할 수 있고, 좋아하는 걸 통해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외국어를 잘하는 방법도 자신이 좋아하는 매체를 통해 배우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외화를 반복해 보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팝송을 계속 들으며 외국어와 친숙해진다. 나는 칼럼 형식의 글이 가장 쓰기 편하다. 그래서 늘 칼럼을 읽고 칼럼을 쓴다. 그리고 칼럼을 모으면 책이 된다.
다섯째, 지속적으로 쓰려면 글을 공유할 거점이 있어야 한다.
거점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고, 거점이 글을 쓰게 한다. ‘어포던스(Affordance)’란 용어가 있다. 우리말로 ‘행동유도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물이나 환경이 사용자에게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색연필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고, 가위나 칼을 보면 무언가를 자르거나 썰고 싶다. 마찬가지로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같은 공간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유발한다.
나는 페이스북, 블로그, 카카오스토리, 트위터(엑스), 카카오톡채널, 인스타그램, 스레드, 티스토리, 워드프레스 순으로 거점을 옮겨왔다. 한 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지루하고 식상하다. 그럴 때마다 게릴라가 아지트를 옮기듯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나를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의 폭이 넓어지고, 그런 분들이 내 책의 독자가 되어주고 내 강연을 들어준다.
자기만의 채널을 확보할 필요도 있다. 이제는 스스로 매체를 갖고 있어야 하는 시대다. 자기 이름의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개설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돈도 들지 않는다. 나는 꽤 오래전에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개통했다. 방문객이 많지는 않지만 개의치 않는다. 내 채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홈페이지는 내가 만든 신문사이고, 유튜브는 나의 방송국이다. 언젠가 빛을 발할 날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여섯째, 글 쓰는 양과 반응을 측정하고 기록한다.
힘든 다이어트를 지속할 수 있는 배경에는 체중계가 있다. 다이어트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체중이 줄어드는 걸 확인하는 기쁨으로 배고픔을 참고 러닝머신을 달릴 수 있다. 게임이 재밌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게임 실력이 수치로 나타나고, 그게 발전하는 재미로 게임에 몰두한다. 대학교 1학년 때 ‘갤러그’라는 게임이 유행했는데 4만 점을 돌파하는 게 목표였고, 14단계를 한 단계씩 올라가는 재미로 게임에 빠져 살았다.
글쓰기도 글이 쌓여가는 걸 수치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력에 상응하는 발전 모습을 조금씩이라도 그때그때 보여주면 좋으련만 글쓰기는 인내심을 시험한다. 열심히 쓰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으면 글쓰기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게 마련이다. ‘괜한 고생만 하는 것 아냐? 포기할까?’ 이 고비를 넘어 흔들림 없이 글을 쓰려면 글이 축적되고 있는 걸 수치로 확인해야 한다. 내 실력이 향상되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글의 개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블로그 등에 2만 5000개의 글을 썼다. 글의 개수가 늘어나는 재미로 글을 써왔다. 한때는 하루 3개씩이란 목표를 두고 쓰기도 했고,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달리는 ‘좋아요’와 공감 개수를 늘리는 재미로 썼다. 그렇게 쓰다 보니 어느 날부터 글이 잘 써졌다. 글쓰기는 우상향의 완만한 그래프를 보여주지 않는다. 계단식으로 상승한다. 매일 글을 써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일시에 수직 상승하는 것으로 보답한다. 이런 상승은 조급증과 답답함을 이겨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일곱째, 글을 읽는다.
먹지 않고 쌀 수 없듯이 읽지 않고 쓸 수 없다. 그것이 책이든, 칼럼이든, 뉴스든, 사회관계망서비스 글이든 상관없다. 지속적으로 쓰려면 꾸준히 읽어야 한다. 읽으면 쓸거리가 생기고 쓰고 싶어진다. 길든 짧든, 그 무엇이든 아무것도 읽지 않고 넘어가는 날은 없어야 한다.
읽기가 어렵다면 보고 듣고 경험해야 한다. 읽어서 알게 된 것만 글쓰기 대상이 아니다.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을 써도 된다. 관찰하고 대화하고 경험한 후 생겨난 생각과 느낌을 쓰면 된다. 생각과 느낌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삶과 씀은 하나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삶이 있듯, 자기만의 글이 있다. 모든 사람의 삶은 한 편의 작품이다.
여덟째, 필사한다.
하루 한 줄이라도 좋아하는 작가의 글이나 아끼는 책의 문장을 베껴 써보라. 하루 한 문장 필사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놀랍다. 베껴 쓰는 방법은 여럿일 수 있다. 반복해서 여러 번 쓰기, 쓴 문장 고쳐보기, 쓴 문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감상 보태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필사해보자.
아홉째, 자료를 모은다.
사람은 수집벽이 있다. 모으는 걸 즐긴다. 나도 어렸을 적 우표나 스티커를 모으기도 했고, 커서는 책을 모았다. 직장 다닐 적에는 ‘조직문화’에 관한 자료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뿌듯함을 맛보기도 했다. 무언가 자료를 모아보라. 컴퓨터에 모을 수도 있고, 종이 형태로 모을 수도 있다. 나는 종이로 모으길 권한다. 컴퓨터를 쓰기 전 스크랩북에 정성껏 오려 붙였듯, 클리어 파일 채우는 맛으로 자료를 모았듯, 자료 사냥에 나서보길 바란다. 자료를 모으면 모은 자료를 써먹고 싶고, 자료에 관한 글을 쓰게 된다. 아울러 예쁜 노트나 멋진 필기구 같은 문방용품을 장만하는 것도 자료 모으는 일과 함께 글 쓰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열째, 글 쓰는 모임에 나간다.
그곳에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자극도 받고 위로도 받는다. 그들의 품평을 받고 글쓰기 실력이 향상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책을 낼 수도 있다. 그런 ‘그들’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 환경이 다르다. 글쓰기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이어서 그렇다. 그 고독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대나무처럼 당신의 글쓰기도 자란다
대나무는 씨를 뿌리고 한 해, 두 해 기다려도 싹조차 보이지 않는다. 죽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드는 셋째 해, 죽순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넷째 해에 또다시 그대로다. 도무지 더 이상 자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다 다섯째 해에 하루 1m씩 자라 불과 달포 만에 15m를 넘는다. 당신의 글쓰기 실력도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매일 자라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깊이 뿌리내리며 대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계속 쓰면 잘 쓸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지속적으로 쓰자. 잘 쓰려 말고 늘 쓰려고 하자. 잘 쓰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지만 자주 쓰는 건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