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2년생이다. 19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생 이후 글 쓸 일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일주일에 한 시간 ‘작문’ 수업이 있었지만, 그 시간조차 읽었다. 우리 세대는 읽기와 듣기에 능하다. 참으로 많이 읽고 많이 들었다. 전 세계에서 수업 시간이 가장 길었다. 8교시, 9교시 수업을 하며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야간 자습까지 하며 읽었다.
많이 읽고 들으면 다섯 가지 특성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한다. 당시 우리 사회는 이 다섯 가지 특징을 지닌 사람을 필요로 했으며, 이런 사람이 직장 생활을 잘하고 인정도 받았다. 이들에게는 ‘공부를 잘한’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공부는 읽기·듣기가 전부였다. 읽기·듣기를 열심히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부를 잘했다는 건 읽기·듣기를 많이 하고 잘했다는 의미다.
다섯 가지에서 더 나아가기
첫째,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아는 게 많다는 특징을 띤다. 선생님 말과 책에 있는 글을 많이 읽고 들으면 아는 게 많아진다. 나는 1990년부터 직장 생활을 했는데 10년 가까이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는 세상을 살았다. 자기가 모르면 알 수 없었다. 요즘같이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아는 게 힘이었다. 각자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걸 갖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렇다 보니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이 아는 게 많았고, 사회는 그들을 대우해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은 어떤가. 읽기·듣기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도 인터넷이나 유튜브, 심지어 인공지능의 힘을 빌리면 얼마든지 잘 알 수 있다. 물론 많이 아는 사람이 인터넷이나 인공지능 활용도 더 잘하긴 하지만, 읽기·듣기를 하지 않았다고 무지의 암흑 상태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는 시대는 아니다. 학창 시절 읽기·듣기를 게을리했다고 평생 모르는 사람 취급받으며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둘째,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모방 능력이 우수하다. 읽고 듣는 것의 본질은 이미 있는 걸 닮아가고 흉내 내는 데 있다. 읽고 듣는 행위는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이 아니다. 있는 걸 이해하고 분석하는 일이고, 그 끝은 기존에 있는 것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나은 걸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어 선생님의 말을 듣거나 교과서를 읽고, 아는 것에서 선생님과 교과서 수준에 근접해가는 게 읽고 듣는 공부다.
우리 시대는 모방 능력이 필요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만들 수 있는 게 없었다. TV나 자동차는 물론이고 라디오조차 만들 기술이 없었다. 베껴야 했다. 읽기·듣기를 많이 한 사람들이 잘 베꼈다. 처음엔 신발, 의류를 베끼다가 TV, 자동차, 선박, 반도체, 휴대폰 등으로 대상을 넓혀갔다. 급기야 그걸 처음 개발한 나라의 제품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 모두가 읽기·듣기를 많이 시킨 학교와 부모의 교육열, 읽기·듣기를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한 덕분이다.
문제는 앞으로다. 더 이상 베낄 데가 없다. 우리 기업은 이미 세계 최선두가 됐다. 뒤에서는 중국이 추격해오고 있다. 지금 우리가 잘하는 건 중국이 금세 베낄 수 있다.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살아남으려면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걸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새로운 걸 만들려면 각자가 자기만의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그걸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개인의 서로 다른 것들이 밖으로 나와 연결되고 결합되어 새로운 게 만들어진다. 남의 것을 읽고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것을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진 것이다.
셋째,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그걸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참을성, 끈기, 집중력 등을 키웠다. 읽고 듣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사람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읽고 듣는 것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걸 참고 남들이 하라고 하는 읽기·듣기를 잘했다는 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거나, 자신의 의지로 마음 근력을 키운 덕분이다.
그런 마음 근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시키는 일을 잘한다. 야근도 잘하고 힘든 일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근면 성실하다. 이런 특성은 사람을 부리는 조직에서 가장 긴요한 것이다. 회사 조직이든 공무원 조직이든 말이다. 일을 시키면 군말이나 불만 없이 잘한다.
근면 성실은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필요로 하는 게 창의성이다. 우리 세대는 열심히 하면 됐다. 남들이 8시간 일할 때 10시간 일하고, 남들이 두 개 만들 때 세 개, 네 개 만들면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기업은 근면 성실성으로 승부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충분히 쉬고 놀아도 좋으니 성과를 내놓으라고 한다.
읽기와 듣기는 과정이고, 말하기와 쓰기는 결과다. 읽고 들은 결과로 우리는 말하고 쓴다. 읽기·듣기만 하면 과정만 있고 결과는 없는 셈이다. 우리 세대는 읽고 듣는 과정을 참고 집중해서 끈기 있게 해내면 됐지만, 이젠 참고 집중하지 않아도 되니 결과로 보여달라고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수백·수천 명의 몫을 하는 시대다. 자기 시간을 최대한 쏟아부어 그것으로 자신의 희생정신과 애사심을 보여주면서 근면 성실로 승부하는 사람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넷째,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승부욕이 있고 경쟁심이 강하다. 학교 다닐 적을 생각해보라. 앞서 말했듯이 공부를 잘했다는 건 많이 읽고 들었다는 것이고, 많이 읽고 들은 결과로 석차가 높았다는 것이다. 학교 공부는 자기 반 친구를 이기기 위해, 등수를 높이기 위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부욕과 경쟁심이 전혀 없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긴 쉽지 않다. 승부욕은 또한 인정욕구의 다른 이름이다. 승부욕이 센 사람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또한 강하다. 부모님과 친구들,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직장에 가서도 열성적으로 잘한다. 열심히 해서 동기들보다 인사고과도 잘 받고 승진도 빨리 하려고 한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일도 자기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서 기필코 해낸다. 그럼으로써 인정받고자 한다. 성적이 안 나오는 과목을 열심히 해서 올려본 경험, 반에서 1등을 해본 경험과 그때 느껴본 성취감을 아는 사람은 어려운 과제를 줘도 그 희열을 다시 맛보기 위해 시도하고 도전한다. 지고는 못 배기는 성질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자존심이 상해 밤잠을 설치고, 다른 조직이나 다른 회사보다 앞서가려고 안달한다. 어떻게든 남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회사나 상사 입장에서 이런 사람이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이런 승부욕과 경쟁심이 필요할까. 그렇다.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때로는 남과 겨루어 이기거나 앞서려는 욕심이 독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개방과 공유, 융합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그것들을 섞고 융합해야 한다. 경쟁을 잘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 협력하고 연대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시대다. 남을 이기려면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어디 출신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사회는 어디 출신이라는 간판을 중시했다. 실제로 그 간판을 가진 사람은 아는 게 많았고, 모방 능력도 있었고, 근면 성실했으며, 경쟁심과 승부욕도 강했다. 그래서 그 간판이 통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간판을 가진 사람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간판의 효험을 극대화했다. 역량이 부족한 사람도 간판이 좋으면 상부 조직과 선을 대는 데 쓸모가 있기에, 조직은 그런 사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특정 간판을 가진 사람은 일을 잘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중요한 일을 할 기회를 많이 주고,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실제로 일을 잘하게 됐다. 그럼으로써 특정 간판을 가진 사람은 유능하다는 일반화와 과대 해석의 오류를 범해왔다. 일이라는 건 하면 할수록 요령을 터득해 잘하게 되는 건데 말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어디 나왔느냐고 묻지 않는다. 내가 직장 다닐 적만 해도 ‘어디’가 중요했다. 어디 들어갔는지, 어디 나왔는지, 어디 다니는지, 어디까지 올라갔는지가 중요했다. 좀 더 나은 어디, 좀 더 높은 어디에 이르고자 아등바등했다. 하지만 그건 오프라인만 있을 적 얘기다. 온라인 세상이 활짝 열린 지금, 이제는 굳이 어딜 나오지 않아도 되고 어디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젊은이들은 어디까지 올라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를 언제 그만둘지 고민한다. 대신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궁리한다. ‘어디’로 살아가지 않고 ‘무엇’으로 살고자 한다.
역전의 기회될 글쓰기
이제는 오래 산다. 나 같은 1960년대 생도 살 날이 많이 남아 있다. 그게 50년이 넘을 수도 있다. 아니 지금까지 살아온 기간보다 더 길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세상은 읽기·듣기를 많이 하지 못했어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모방 능력이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됐고, 참을성과 끈기가 부족해도 상관없어졌다. 경쟁심과 승부욕, 간판도 의미가 없어졌다. 나같이 직장을 다니지 않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나는 쉰 살까지 반사체로 살았다. 나에게 일을 시킨 사람의 말과 글을 읽고 들어서 그 사람이 원하는 말과 글을 만들어주는 일을 했다. 말과 글을 받아서 말과 글로 되쏴주는 일로 월급을 받았다. 나뿐 아니라 직장 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이와 유사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직장을 그만둔다. 더 이상 반사체로 살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땐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로 살아야 한다.
읽기·듣기 삶에서 뒤처지고 낙오했다는 사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패자부활과 역전의 기회가 있다.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를 돌파구로, 읽는 소비자에서 쓰는 생산자로 거듭나야 한다.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그랬다. “죽어서 육신이 썩자마자 사람들에게 잊히고 싶지 않다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쓰든지 글로 남길 만한 가치 있는 일을 하라.”
매일 조금씩 쓰면 된다. 한 문장으로 시작하면 된다. 때로는 쓰기 싫어도 계속 써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쓰기만 하면 된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찾아내자. 글을 쓰고 책을 써서 내가 가진 그 ‘무엇’을 세상에 보여주자. 그 무엇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자. 그런 당신의 앞길을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사용이 늘면서 손목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손목은 평소 움직임이 많은 부위인 데다 힘줄과 근육, 근막 등 다양한 부분이 존재해 잘못 사용하게 되면 통증이나 염증이 생기기 쉽다. 손목건초염이 발생하면 통증 등으로 일상생활에 여러 가지 불편함을 겪는 것은 물론, 손을 사용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손목건초염은 손이나 손목의 과다 사용 등으로 손목에서 엄지손가락으로 이어지는 힘줄(신전근건)에 손상이 발생하면서 염증이 생기는 질환이다. 건초(sheath of tendon)는 힘줄(건, 腱)을 칼집처럼 감싸고 있는 얇은 막(초, 鞘)이다.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건이 건초 안을 왔다 갔다 하는데 이때 건초는 건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2층 구조로 외면은 섬유 조직(섬유초), 내면은 액체(활액초)로 구성돼 있다.
간혹 손목터널증후군과 혼동하기도 하는데, 두 질환은 과도한 손목 사용으로 통증이 발생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증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손목터널증후군은 신경이 눌려서 생기는 질환으로 손가락이 저리거나 아픈 반면, 손목건초염은 손저림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욱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손목건초염이 발생하면 가벼운 움직임에도 통증이 느껴지고 손목의 찌릿찌릿한 증상으로 가벼운 물건을 잡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면서 “손목을 굽혔다 펴거나 손가락을 움직일 때 손목 부위에 뭔가 걸리는 느낌과 통증이 심해지며 글쓰기나 젓가락질이 어려워진다면 손목건초염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치질 힘들다면 의심해야
손목건초염은 보통 손목 근육이나 관절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생긴다. 피아니스트, 수공예가, 요리사, 게이머 등 손목을 많이 쓰는 직업군에서 흔하다. 또 손목을 많이 안 쓰던 사람이 갑자기 무리해서 사용했을 때도 발병률이 높아지는데 골프, 자전거, 테니스 등 평소 안 하던 운동을 과도하게 하면 생길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는 것도 영향을 미친다. 여성에서는 임신과 출산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울러 젊은층보다는 중노년층에서 발병률이 높다. 젊은층은 대사가 활발해 염증이 생겨도 금세 가라앉지만, 나이가 들면 염증이 축적되며 증상이 더 심해진다. 또 여성 환자가 남성보다 3배 이상 발병률이 높은데, 여성 호르몬 탓에 염증이나 부종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또 여성은 기본적으로 뼈가 가늘고 손목 근력이 약해 같은 일을 하더라도 손목에 좀 더 무리가 갈 수 있다.
대표적인 증상은 통증과 부종이다. 이외에 누르면 아픈 압통, 관절 운동의 장애, 근력 약화 등이 나타난다. 증상이 심해지면 휴식을 취해도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
손목건초염을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엄지손가락을 나머지 손가락으로 감싼 후 주먹을 쥔 상태에서 손목을 아래로 꺾는 핀켈스타인 검사(Finkelstein test)가 있다. 이 검사를 진행했을 때 통증이 심하거나 방사통이 있으면 손목건초염을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통증 발생 시 병원을 찾는 것이 좋다. 치료 시기가 늦어질 경우 만성 통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 방치해선 안 된다.
이상욱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손목건초염에 의한 통증은 심하다가도 휴식을 취하면 사라지는데 일상에서 병마개를 돌리거나 양치질 등의 동작이 힘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최상의 치료법은 ‘휴식’
손목건초염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휴식이다. 특히 엄지손가락과 손목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안 하던 운동을 하다 발생했다면 운동을 그만둬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손목건초염이 발생한 손은 쉬도록 하고 소염제로 붓기를 가라앉힌다. 그래도 증상이 지속하면 심한 부위에 국소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는다. 강력한 소염진통 효과로 붓기를 가라앉힌다. 일련의 치료에도 증상 호전이 없다면 수술을 고려한다. 수술은 힘줄을 덮고 있는 활차(인대)의 일부를 잘라 힘줄에 대한 압박을 풀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상욱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손목건초염은 손목의 무리한 사용 때문에 발생하는 질환이기 때문에 손목의 운동을 제한하는 보조기나 깁스 착용만으로도 호전될 수 있다”며 “손목을 이완시켜줄 수 있는 운동치료, 물리치료 등과 함께 약물이나 주사치료를 하면 통증과 염증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손목건초염은 증상이 나타나도 방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하게 아파 일상생활이 힘들면 그때 서야 병원을 찾는다. 초기에는 휴식과 간단한 보존 치료로 완치할 수 있지만, 방치하는 기간이 길수록 치료의 강도와 재발 확률은 높아진다.
이상욱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평소 손목 건강을 위해서는 지나치게 반복적이고 무리한 동작은 피하는 것이 좋다”며 “손목을 자주 사용한다면 충분한 휴식과 더불어 틈틈이 손목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은퇴 후 자서전 쓰기. 많은 중장년의 로망 중 하나다. 얼핏 문턱도 낮아 보인다. 고가의 장비가 필요하지도, 대단한 조건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막상 책상에 앉아보면 다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자서전이라니…’ 갑자기 거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땐 자서전을 이렇게 바꿔보자. ‘나의 역사 쓰기’.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전하는 나의 역사 쓰기 3원칙이다.
1. 사실성과 객관성 유지하기
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마치 제3자가 바라보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한마디로 꾸밈없는 진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등의 주관적 관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팩트에 따라 담담히 써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 사진이나 일기장, 메모 등을 참고해도 좋다.
2. 연속성 있게 쓰기
연속성이란 나의 과거를 연대기처럼 서술하는 것이다. 출생, 가족, 고향, 학교, 친구, 직장 등을 시간 순서대로 적다 보면 평소 생각지 못한 기억과 경험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렇게 연대순으로 나의 역사를 써야 비로소 인생에서 관련 없던 일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3. 가능한 구체적으로 적기
타인에게는 평범하고 사소한 내용일지라도 나에게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나라는 사람만큼이나 나의 과거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다. 정말 나를 이해하고 관계 회복도 하고 싶다면 그대로의 나와 직면해야 한다. 최대한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써보자. 디테일에 힘이 있다.
한혜경 교수의 한마디
“나의 역사 쓰기란 내가 나에 대해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적어보는 거죠. 인생 2막, 3막을 준비하려면 과거와 현재의 나를 잘 이해해야 해요. 그 과정 속에서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경험도 할 수 있어요. 나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꼭 한번 써보길 권합니다.”
“더 늦기 전에 나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내 역사를 꼭 한번 써보세요.”
에디터 조형애 취재 이지혜 도움말 한혜경 교수 디자인 이은숙
나는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글을 쓴다. 이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싶다.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지 알려주기는 어렵다. 나도 잘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감을 키움으로써 글을 써왔다. 나처럼 타고난 기질이나 환경이 아닌 순수한 노력으로 자신감을 키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감을 키워 글을 쓰는 방법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글쓰기는 자전거 타기와 같다. 자전거 타는 법을 말과 글로 가르칠 수 없지 않은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해서 썼다’, ‘이렇게 하면 써지는데 왜 못 쓴다고 하는가’ 일깨우는 데 있다. 그리하여 ‘나도 쓸 수 있겠네’라는 반응을 얻어내기 위함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것을 현실로 만든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은 뇌의 입장에서 두려운 일이다. 그런 일에 자신감조차 없으면 안 쓰게 되고 안 쓰면 못 쓰게 된다. 그리고 못 쓰면 더 두렵다. 글을 쓰려면 자신감이 필요하다. 글 위에서 호령해야 한다. ‘네 이놈’ 하면서 글을 한 손에 쥐고, ‘남들 다 쓰는데 나라고 못 쓸라고’ 하는 마음으로 주도해야 한다.
글쓰기에 자신 없는 이유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자신보다 나은 글을 쓰려 하기 때문이다. 본시 글이란 쓴 사람 자신보다 낫다. 그래서 자신보다 나은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린다. 자신만큼 써도 된다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자신보다 나은 글을 쓰지 못해 본색이 탄로 날까 두려운 것이다. 자신감을 갖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남이 쓴 글 때문이다. 남이 쓴 글은 잘 쓴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글은 숱한 퇴고 과정을 거쳐 나온 글이다. 우리는 이런 글을 보고 자신의 수준과 비교하면서 자신 없어 한다. 그 글도 초고는 엉망이었을 텐데 말이다. 더욱이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국어 교과서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글만 봐오지 않았던가.
나는 글쓰기에 자신 없어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그냥 쓰지 말고 말해보고 쓰세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한 번에 다 쓰려고 하지 말고 나눠서 여러 번에 걸쳐 쓰세요. 일필휘지는 나도 못 해요. △정답을 쓰려고 하지 말고 오답을 쓰지 마세요.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잘못 쓰는 걸 줄이세요. 정답은 누구도 몰라요. 하지만 어떻게 쓰면 안 되는지는 알잖아요. △모르는 것 말고 잘 아는 걸 쓰세요. 굳이 남의 구장에 가서 어웨이 게임 하지 말고 홈그라운드에서 경기하세요. △써야 하는 것 말고 쓰고 싶은 걸 쓰세요. 평소에 쓰고 싶은 걸 써놨다가 써먹으면 되잖아요. △정리해서 쓰지 말고 쓰면서 정리하세요. 쓰기 시작하면 생각도 나고 쓰다 보면 정리가 되잖아요. 다 쓰고 나서 정리해도 되고요. △특별한 것 말고 평범한 걸 쓰세요. 특출 난 것 말고 나만의 특별한 것, 정상(頂上)이 아닌 정상(正常)을 추구하세요. △길게 쓰기 어려우면 짧게 여러 개를 써서 연결하세요. 문단의 개수를 늘리면 긴 글도 써지잖아요. △창조하지 말고 모방하세요. 맨땅에 헤딩하면 머리만 아파요. 다른 사람이 써놓은 글을 많이 읽고 참조하세요. 다른 사람의 글 속에 내가 쓸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어요. △장문 말고 단문으로 쓰세요. 문장을 길게 쓰긴 어렵잖아요. △화려하게 말고 담백하게 쓰세요. 수식어를 넣고 수사법을 구사하면서 쓰려면 힘들잖아요. 담담하게 쓰세요. △첫 문장부터 쓰려고 하지 말고 생각나는 것으로 아무 데서나 시작하세요. 첫 문장을 못 쓰면 글을 한 줄도 못 쓰게 되잖아요. 쓸 수 있는 것부터 써서 다 쓰고 난 후 그 안에서 첫 문장을 찾으세요. △분량을 딱 맞춰 쓰려 하지 말고 많이 써서 줄이세요. 인터넷의 도움을 받으면 분량 늘리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요약하는 것도 많이 해보셨고요. △잘 쓰려 하지말고 대충 쓴 후 잘 고치세요. 방송도 생방송은 어려워요. 녹화방송하듯 일단 써놓고 편집하세요. △혼자 쓰지 말고 함께 쓰세요. 쓰기 전에 주변 사람에게 물어 아이디어도 얻고 의견도 받아 수정하세요.
사실 글쓰기를 자신 없어 할 이유가 없다. 외국어로 써야 하는가, 아니면 한글을 모르는가. 또는 논술 시험 보듯 아무 자료도 찾아볼 수 없거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인가. 혹은 컴퓨터로 고칠 수 없이 원고지에 일필휘지해야 하는 상황인가. 잘못 쓰면 신변이 위태로워지거나, 천하의 명문을 써야 하는가. 이런 상황만 아니면 글 앞에 쫄 필요가 없다.
직장 생활하며 글을 써야 할 때 나는 늘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글쓰기에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하고,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다 찾아보며, 더 이상 고칠 게 없을 때까지 고친다는 생각으로 썼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감은 떨어졌다. 자신감이 떨어지면 잘하는 일만 하려고 하고, 새로운 일은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며, 남의 도움도 기피한다. 남에게 내 실력을 들킬까 봐 걱정되고, 남이 도와줘서 해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노력해서 내 수준과 실력을 높이거나, ‘이게 내 수준인데 어쩔 거야’ 하면서 나답게 써야 하는데, 나는 둘 다 못하고 어정쩡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쓸 힘을 얻을 방법
직장을 나와서는 그런 상태로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한다.
첫째, 일단 쓰고, 자주 쓴다. 글은 막상 쓰기 시작하면 그 전보다 몇 배는 자신 있어진다. 뿐만 아니라 쓸거리도 생기고 쓰고 싶은 마음도 든다. 자주 쓰지 않으면서 자신감을 키울 길은 없다. 자주 쓰면 익숙해지고, 익숙하면 자신감이 붙는다. 반복이 자신감을 키운다. 반복하다 보면 미세한 차이만큼 점차 나아지고, 거기서 자신감이 샘솟는다.
둘째, 남들의 평가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춘다.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순 없다. 연연하되 기대치를 낮추자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나이 먹어가며 몸도 쇠약하고 집중력과 기억력도 떨어지는데, 여전히 젊었을 때 기대치로 평가받고자 하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끌어내는 건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스스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기대 수준을 낮추면 좀 더 쉽게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만큼 자신감도 생긴다.
가능하다면 남들의 평가에 둔감해질 필요가 있다. 사실 남들은 내게 그다지 관심 없다. 어떤 평가는 깊은 생각 없이 무심코 던지는 경우도 있고, 평가를 했다가도 곧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남들의 평가가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 게 좋다. 근본적으로 남들의 평가에 의존해 나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남들의 평가에 우쭐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있다.
셋째, 모든 걸 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내가 가진 실력, 내가 들인 노력 이상으로 평가받으며 살아왔다.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한다. 이제는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두려울 일도, 자신 없어 할 일도 없다.
넷째, 단점을 보완하지 않고 장점을 살리고자 한다. 학교 다닐 적부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모르는 걸 알아야 성장한다고 배웠다. 이제부턴 잘하는 걸 더 잘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장점을 키우자고 생각하면 자신 없을 이유가 없다.
다섯째, 하나에 집중한다. 재능 있는 사람은 여러 개를 섭렵해도 두루 잘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대신 하나에만 힘을 모은다. 글의 주제와 장르도 자신 있는 것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나다운 스타일을 구축한다.
여섯째, 완벽주의에서 벗어난다. 가진 역량에 비해 완벽주의를 추구하면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게 되고, 일의 진척도 느리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방법은 완벽 대신 완료를 추구하는 것이다. 조금 허술하더라도 끝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일곱째,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하면 자기비하나 시기, 질투에 빠지거나 허황된 꿈을 꾸면서 자신감이 훼손된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과거와 비교해본다. 나의 과거와 비교해보면 현재는 과거보다 훨씬 낫다. 그러면 됐다.
여덟째, 성공을 경험하고 칭찬을 듣는다. 글쓰기의 성공 경험은 끝까지 쓰는 것이다. 잘 쓰든 못 쓰든 끝까지 쓰고 나면 뿌듯함과 함께 자신감이 차오른다. 끝까지 가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직접 성공 경험을 못 하더라도 칭찬을 자주 들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칭찬을 자주 들으려면 칭찬해주는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 나는 아내가 그 역할을 해준다.
아홉째,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축적해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반드시 벽에 부닥친다. 이때 굴복하면 자신감을 잃을 수밖에 없다. 길을 잃었을 때는 멈춰서 원인과 이유를 찾아보거나, 오던 길을 되돌아 초심을 되살려야 한다. 리셋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위기를 당했을 때 그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고,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 순 없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위기가 끝났을 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위기가 더 큰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깊이 생각한다. 위기 국면이 끝난 후에는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같은 위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한다.
열째, 말로 자기암시를 한다.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우기 위해 되뇌는 말들이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딘가에 답이 있다. 아직 못 찾았을 뿐이다. △한 번에 풀리는 일은 없다. 여러 번 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시작이 어렵지 뒤로 갈수록 쉬워진다. △언제 끝날까 싶은 일도 반드시 끝이 온다.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 없다. △최선이 아닌 차선도 괜찮다. △언제든 그만두면 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힘든 일은 지나간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누가 알겠는가. 나이 먹어 최고의 작품을 쓸 수 있을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울 게 없다. △나는 나를 믿는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자신 안에 쓸거리가 있고,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쓸거리를 잘 길어 올린다. 그렇게 길어 올린 내용을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쓴다. 나아가 세상에 그렇게 잘난 사람도 별로 없다고 믿는다. 자기 얘기는 자기가 가장 잘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 가진 것을 다 보여주려고 조바심 내지 않는다. 가진 것의 일부만 보여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힘줄 때 주고 뺄 때 빼면서 강약 조절도 잘한다. 끝으로 잘 버틴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한줄 한줄 써나가다 보면 써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믿는다. 기본적으로 괴로움을 견디는 역치가 높다. 그래서 칭얼대거나 죽는 소리 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자신감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글을 쓰면 생기는 게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감은 일상을 사는 힘이 된다. 나는 글을 쓰면 힘이 난다.
인공지능(AI)이 음악도 만들고, 그림도 그린다. 인간 고유의 재능으로 여겨졌던 ‘창작’이라는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AI가 더욱 고도화될 거라는 건 정해진 미래다. 사람들이 ‘어떻게 AI를 활용할 것인가’ 고민할 때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변호사가 있다. 아니, 그는 소설가다.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는 “AI와 공동 집필에 몰두했던 소설가의 미스터리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한 작가는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상징적 죽음’이라는 평을 내놨다. AI의 발달로 인간 고유의 영역을 빼앗기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위태로운 저자의 지위’와 ‘왜 창작하는가’ 같은 뿌리에 가까운 질문이 담겨 있다. 저자 조광희 변호사는 왜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됐을까?
영화에서 소설까지 ‘올라운더’
법무법인 원에서 근무하는 조광희 변호사는 ‘올라운더’라 불린다. 올라운더는 스포츠 등에서 모든 역할을 골고루 하는 선수를 가리키는 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이 별명이 이해가 된다.
1990년 제3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영화사 봄의 대표이사를 지내며 ‘밤과 낮’, ‘해변의 여인’, ‘멋진 하루’ 등을 제작했다. 그리고 선거캠프에서 세 차례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씨네21’, ‘한겨레’, ‘경향신문’의 칼럼니스트로 글을 썼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2003년에는 영화인들의 필독서로 유명한 ‘영화인들을 위한 법률가이드’를 펴냈다. 이후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 산문집 한 권과 ‘리셋’, ‘인간의 법정’, ‘밤의, 소설가’까지 세 권의 소설을 냈다. 이뿐인가. 소설 ‘인간의 법정’은 뮤지컬로도 제작됐는데, 조 변호사는 이 뮤지컬의 각본까지 맡아 각본가로도 데뷔했다.
“변호사 일은 30년째 하고 있어요. 문화예술, 엔터테인먼트 관련 업무를 주로 합니다. ‘평판 관리’라고 하는 대중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분야도 담당하고요.”
이 정도 이력이면 작가로 전업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조 변호사는 변호사로 오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전업 작가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유죠.(웃음) 두 번째로 변호사는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일이 결국 소설의 토양이 됩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간접 경험을 많이 할 수 있거든요.”
버스에서 설계하는 소설
조광희 변호사는 뮤지컬 각본 작업도 소설 집필도 변호사 일을 하며 병행했다. 무척 바쁜 일상이었을 텐데 어떻게 일의 균형을 잡았을까? 작품들이 그의 일상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은 소설을 쓰는 그의 방식과도 관련 있었다. 조 변호사는 ‘필 꽂히는’ 대로 써 내려가면서 수정을 거듭하기보다, 처음부터 구조를 짜임새 있게 구성한 뒤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소설을 설계하는 셈이다.
“처음에는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아이디어와 콘셉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밤의, 소설가’는 ‘10여 년 전 알았던 여성이 소설가가 돼 법률사무소에 나타나 일을 맡긴다’는 내용으로 시작했어요. 아이디어는 버스 타고 출퇴근할 때, 산책할 때,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실 때 등 일상에서 떠올리는 편입니다.”
다음으로 시놉시스를 쓰고 트리트먼트를 만든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 변호사는 영화에서 쓰는 개념을 가져와 설명했다.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역시 산책하다가 휴대폰에 메모하거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작성하는 방식으로 채워나간다.
“시놉시스는 한 페이지 정도의 줄거리를 쓰는 일이에요. 인물과 사건을 그럴듯한 구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한 페이지지만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시놉시스가 완성되면 이를 바탕으로 20~30장짜리 트리트먼트를 씁니다. 좀 더 자세한 줄거리죠. 인물이나 사건 설명이 더 상세하게 나와야 합니다. 저는 트리트먼트 작업을 할 때 챕터를 나누어서 써요. 트리트먼트가 일종의 설계도 역할을 하는 셈이에요. 여기까지 완성되면 이제 조금은 기계적인 작업이 됩니다. 살을 붙이는 과정이죠. 이때는 책상에 딱 붙어 앉아 쓰는데요. 주로 집에서 하지만 자주 가는 카페도 있고, 어떤 때는 2~3일 정도 여행을 떠나 작업하기도 합니다.”
소설을 처음부터 설계한다는 건 꽤나 논리적인 작업이다. 변호사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이 소설 쓰기에도 반영된 듯한 방식이다. 하지만 ‘밤의, 소설가’는 기존과는 좀 다르게 완성됐다. 처음에는 한 문예지에서 작품 요청을 받아 쓰게 됐는데, AI는 비서 역할로만 등장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작품을 완성한 후 문우들과 대화하다가 생각이 확장됐다.
“발상의 전환이 되면서 ‘소설 쓰기에 관한 소설’이라는 주제까지 다루게 됐어요. 소설 속에 소설 집필 과정 자체를 노출시키는 일종의 메타 소설이 된 셈인데요. AI에게 창작의 영토를 빼앗기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러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이 꼬리를 물더라고요.”
‘왜 사는가’에 대한 고찰
AI ‘레비’와 함께 소설을 써 내려가던 소설가 건우의 고민을 따라가다 보면 조광희 변호사가 작품을 통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을 만나게 된다. ‘저자의 위태로움’이다.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지만, 동시에 ‘대중과 시장이 요구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요즘 사람들은 고전문학을 잘 안 읽잖아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쓰면 달콤한 글만 쓰게 되죠. 저자라는 지위 자체가 위태롭다고 보는 지점이에요. 그걸 AI가 가속화하는 거죠. 심지어 AI와 소설 쓰기를 경쟁합니다. 나보다 더 글을 잘 쓰는 AI라니, 그렇다면 저자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민에 빠지게 되겠죠. 차라리 AI에 기대는 노예가 될까 고민도 하게 되고요.”
벌써 AI는 단순노동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고 있다. 변호사 업무에도 쓰이니 말이다. 조광희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가 됐을 때만 해도 판례가 전산화되지 않아 법원도서관에서 종이 파일을 뒤져야 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모든 판례를 검색할 수 있고 AI에게 말하면 대신 검색해줄 수 있는 지경에 가까워지고 있다. 실제로 AI가 영문 계약서를 번역해주는 일은 제법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소설 속 소설가는 AI와 소설 쓰기에 관해 경쟁하지만 현실에서는 변호사가 AI와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소송 기록을 주면 논점이 뭔지 분석해내는 것까지 AI가 해낼 거예요. 그렇다면 변호사의 주요 업무는 재판에서 어떻게 전략적인 접근을 할 것인가, 법정에서 증인의 말을 신뢰할 것인가 아닌가 등의 인간적이고 섬세한 일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뀔 거라 봅니다. ‘일’이라는 영역에 AI가 계속 침식해 들어오니까요. 결국 인간은 어떤 일을 도대체 ‘왜’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예술, 문학, 바둑, 체스 등 많은 분야에서 AI는 인간의 창조성과 지적 능력을 대체하고 있다. 조광희 변호사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어떤 일을 할 때 ‘무엇을 이루고 싶다’는 목표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AI라는 존재가 단 몇 초 만에 허물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을 왜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돼요. 그걸 고민하다 보면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까지 이어지겠죠.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단순히 책을 팔고자 하는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로 토로해내는 일종의 쾌감과도 연관된 일이거든요. 자신의 미학적인 정열 때문에 글을 쓰는 건데, AI가 소설을 더 잘 써내는 시대가 온다면 미학적인 쾌감을 빼앗기는 거죠.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위협받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품으로 녹아드는 삶
조광희 변호사의 이런 고찰과 경험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첫 소설 ‘리셋’은 주인공인 변호사 강동호가 현직 서울시장의 의뢰를 받아 미스터리한 정치적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돈과 권력, 그것을 쫓는 정치 세력 간의 블랙 커넥션을 파헤치는 내용인데, 아무래도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을 테다.
두 번째 소설 ‘인간의 법정’은 주인을 살해한 AI ‘아오’가 재판을 받는 이야기다. AI와 인간의 관계, 생명과 소수자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제시한다. 이 책이 뮤지컬로 탄생한 것은 뮤지컬 ‘그날들’을 작업했던 장소영 음악감독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무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영화 각본처럼 썼고, 장 감독의 도움으로 극에 맞춰 수정을 거듭해 완성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시를 습작했던 경험이 아리아 가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됐고, 영화사 대표로 일하며 수많은 영화 시나리오를 본 것이 체득되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도 반영됐다.
세 번째 소설 ‘밤의, 소설가’는 두 번째 소설을 쓰면서 AI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봤던 것이 도움이 됐다. 어느 정도 AI에 대해 학습되어 있었기에 이야기를 확대해갈 수 있었다.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소설 ‘도시의 은자’는 대중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이야기다.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자신은 정작 숨어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계획이다. 소설뿐 아니라 드라마도 준비하고 있다. 영화감독인 동료 변호사와 함께 드라마 기획을 완성하고 대본을 쓰고 있다. ‘올라운더’의 면모가 돋보이는 행보다. 분야가 무엇이든 그가 만드는 작품에는 그의 삶이 녹아 있다. 아니, 작품으로 녹아드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기작들에도 역시 변호사가 나올 것 같다. 그는 “꼭 변호사를 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경험과 인생관을 녹인 캐릭터를 고민한다면 “변호사가 자주 등장할 가능성이 높겠다”며 웃었다. 어쩌면 ‘변호사’라는 등장인물이 그의 상징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소설 쓰는 변호사 조광희가 있고, 그 소설 속에서 변호사이면서 뮤지컬을 만드는 인물이 있고, 소설 속에서 만들어지는 뮤지컬에서 변호사를 연기하는 배우가 있을 것만 같다. 마치 ‘밤의, 소설가’ 작가의 말에 그가 남긴 말처럼.
여기 ‘밤의, 소설가’를 쓰는 조광희가 있다. 소설 ‘밤의, 소설가’에도 소설을 쓰고 있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가 쓰는 소설 속에서 ‘먼저 상상하고 나중에 움직이다’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여자도 있다. 소설 ‘먼저 상상하고 나중에 움직이다’에서도 주인공인 여자가 소설을 쓰고 있을 것이다.
-‘밤의, 소설가’ 中
어떻게 놀아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동행이 있다면 더욱 고민이 필요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여행관이 맞지 않으면 ‘갈 때는 같이, 올 때는 따로’가 된다는 괴담(?)도 들린다.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 나와 동행의 성향·취향을 계획에 적절히 반영한 뒤 실행해보자. 여행 말미에는 ‘잘 놀았다!’는 말이 절로 나올지 모른다.
결국 여행의 목적은 ‘환기’다. 나를 위협하는 그림자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김영하 작가는 저서 ‘여행의 이유’에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기왕 어딘가 향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미리 짜인 틀에 맞게 움직여야 하는 패키지여행보다 내 취향과 상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자유여행은 어떨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계획해야 할지 막막할 때 참고할 만한 몇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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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여행에서 하지 말아야 할 십계명이 화제다. ‘부모님 버전’은 ‘아직 멀었냐, 음식이 달다, 음식이 짜다, 겨우 이거 보러 왔냐, 조식 이게 다냐, 돈 아깝다,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는 게 낫다, 이거 무슨 맛으로 먹냐, 이거 한국 돈으로 얼마냐, 물이 제일 맛있다’가 포함됐다.
‘자녀 버전’은 ‘똑같은 거 물어본다고 짜증 내기, 1시간 이상 외출 준비하기, 하루 종일 휴대전화 하기, 30분 이상 맛집 줄서기, 음식 사진 다 찍은 다음 먹기, 못 알아듣는 줄임말 쓰기, 사진 다시 찍어줘, 조금만 더 가면 돼, 다시는 같이 여행 안 올 거야, 엄마는 몰라도 돼’가 꼽혔다.
평소 잘 통하는 사이여도 여행지에서 생각지 못한 문제로 부딪힐 수 있다. 따라서 여행 전 서로의 성향을 확인하는 편이 좋다. 합의점을 찾으며 맞춰갈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동행이 없다고 해도 본인의 스타일을 파악해두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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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성향 체크리스트
겉핥기는 그만, 맞춤 테마 찾기
# 책방에서 얻는 감성: 한정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명소를 둘러보며 ‘도장 깨기’(유명한 도장을 찾아가 그곳의 실력자들을 꺾는 것처럼, 특정 분야에서 어려운 장벽이나 기록 따위를 넘는 일) 하듯 다녀본 경험이 있는가? 몇 개국 몇 도시를 다녀왔는지 세어보는 재미도 있지만, 낯선 공간과 마음을 나누며 고유의 기억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나에게 맞는 테마를 잡아보길 권한다.
아직 목적지와 테마를 선정하지 못했다 해도 괜찮다. 여행 관련 서적을 소개하는 책방을 방문해 아이디어를 얻어보자. 뮤지컬 주인공의 대사 한 줄에 감명받아 해당 장소를 뒤따르는 이야기, 현지인들의 생생한 삶을 포착할 수 있는 마트와 슈퍼마켓 중심으로 돌아다니며 맛있는 상품을 발견하는 이야기, 유명 화가에 대한 단서를 수집하러 무작정 떠난 이야기 등 저마다의 가치를 찾는 과정을 엿보다 보면 어느새 묻어뒀던 로망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걸 느낄 테다. 고른 책을 한 손에 들고 여행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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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볼 만한 여행 책방(자세한 영업시간은 홈페이지 확인)
책방 여행마을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17길 57 지층. 월·목 정기 휴무. 여행 관련 독립출판물과 여행 에세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책방지기는 왕초보 여행 짜기, 맥주 마시며 여행 수다, 부루마블로 여행하기 등 관련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책을 만들고 싶은 이에게 한컴으로 책 만들기 수업, 꾸준히 글쓰기 모임을 통해 독립출판물 제작을 돕기도 한다. 캠핑 장비로 분위기를 낸 공간이 돋보인다.
책크인 :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29안길 29 2층. 영업일은 매달 상이. 매달 열흘간 여행을 떠날 정도로 진심인 책방지기는 여행사도 운영하고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인상적인 카페 혹은 근사한 맛의 커피를 만나면 원두를 구매하고 돌아와 ‘이달의 원두’로 사용한다. 매달 세계 곳곳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셈이다. 와인도 판매한다.
공간인흑석 : 서울시 동작구 흑석로5길 94, 1층. 예약제 북카페. 시즌별·나라별로 새로 출간된 여행책을 전시 중이다. 러시아, 중국, 몽골, 스웨덴, 독일 등 해외 서적도 보유하고 있다. 2~4층은 게스트하우스 및 임대주택, 옥상에는 셀프 사진관이 마련돼 있다.
스페인책방 : 서울시 중구 퇴계로36길 29 기남빌딩 302호. 일요일 정기 휴무. 스페인 사진집과 여행 에세이를 꾸준히 펴내던 독립출판 제작자들이 연 책방. 스페인어 문화권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한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책과 원서도 있다. 명확한 테마가 있는 장소라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거나 다녀온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 AI가 안내하는 코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기 위해 일정을 짜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AI는 우리의 여행 코스를 구성해줄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원하는 방향과 인원수, 기간 등을 입력하거나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명소를 추천받을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오류가 조금씩 있고 면밀하지 않기 때문에 참고만 하거나, ‘AI의 말대로’ 떠나는 여행을 시도해보는 데 의의를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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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만 느껴진다고? 작은 목표 세우기
장소 위주로 계획을 짜기보다 나만의 목표를 정해 챌린지를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 우선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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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에 따른 추천 과제
인간관계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은 사람 : ‘여행 기간 타인에게 하루에 세 번 이상 연락하지 않기’, ‘일상과 관련 없는 현지인 친구 한 명 사귀기’, ‘한 시간씩 바닷가에서 멍때리기’
루틴을 잃어 건강을 되찾고 싶은 사람 : ‘하루에 만 보 이상 걷기’, ‘서핑·승마·스쿠버다이빙 등 레포츠 한 종목 배우기’, ‘간편식 끊기’, ‘7시간 이상 수면하기’
나쁜 습관을 고치고 싶은 사람 : ‘동네 반경 5km 안에서 생활해보기’, ‘전자기기 없이 살기’,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기’, ‘최소한의 돈으로 살기’
흔한 기념품보다 색다른 물건을 수집하고 싶은 사람 : ‘그 나라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향수 구매하기’(뿌릴 때마다 해당 장소를 떠올릴 수 있다), ‘여행지의 언어로 된 좋아하는 책 찾아보기’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선생님 글을 회보에 실어도 되겠습니까?”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인즉 친일파 자손이라는 사실을 커밍아웃하라는 뜻이다. 내가 쓴 글 제목은 이러했다. ‘저는 친일파의 손자입니다.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드립니다.’
2011년,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한 내가 처음 받은 과제는 가족을 주제로 에세이 쓰기였다. 난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아버지가 늘 궁금했다. 1890년대 일본 유학을 다녀와 대한제국 농상공부 관리를 하고, 나중에 군수까지 했다는 나의 할아버지. 무척 영특했다던 사진 속 그를 찾아 나섰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한 건 도서관에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일인명사전을 꺼내 들었고 물음표는 느낌표가 됐다. 마음이 이상했다. 나라의 명운이 왔다 갔다 하던 때에 유학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석연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친일파이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것이 역사의 치명적 약점이라며 누구보다 분개하던 내가 그 후손이라니…!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첫 과제를 제출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도 회원 가입하고 숙제를 갈무리해서 회원만 볼 수 있게 올렸다.
얼마 뒤 사무국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넌지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우린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세간은 잠시 난리가 났다.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올랐고,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첫 과제를 내고 13년여가 흘러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 치열하게 글을 배우고 또 썼다. 공저 포함 다섯 권 넘게 출간했고, 글쓰기 강사로도 일한다. 할아버지를 제대로 마주하게 한 에세이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내가 민족문제연구소 회비를 내는 회원이라는 사실이다.
“시니어 글쓰기 강사, 윤석윤입니다. 할아버지를 제대로 마주하게 한 에세이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에디터 조형애 디자인 유영현
학창 시절 내내 읽고 들으면서 살았다. 직장 생활 할 때도 그랬다. 지금은 듣거나 읽은 걸 말하고 쓰면서 산다. 읽고 듣는 만큼 말하고 쓴다. 말하기와 쓰기가 내 삶에 비중 있게 자리 잡았다. 또한 말하고 쓰려니 읽고 듣지 않을 수 없다. 읽고 듣기만 하면서 살 때보다 읽기와 듣기가 더 소중해졌고, 더 많이 읽고 듣는다. 이로써 읽기, 듣기와 말하기, 쓰기가 서로 통한다.
듣는 것은 어릴 적부터 잘했다. 어른들 말씀을 잘 들었다. 선생님 말씀, 직장 상사 말을 잘 듣는 것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 잘 들어주면 자기를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잘 들어준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열린 자세로 자기와 다른 생각,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자기 말만 하기 바쁘다. 남이 말하는 사이 할 말이 생각나거나 그 말이 자기 생각과 다르면 말을 자르고 끼어든다. 생각의 속도는 말의 속도보다 빨라서 남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 생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진득하게 듣는다. 별로 할 말도 없거니와, 내겐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수지맞는 일이다. 그들의 말에서 뭐 하나라도 알고 배우는 게 좋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경우에도 혹시 몰라 끝까지 들어본다. 그러니 듣는 태도가 나쁠 턱이 있겠는가. 그 덕에 기업 회장과 대통령의 말을 듣는 자리에서 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얻는 게 많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고 기대하는지 알 수 있다. 그걸 알아야 그들이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대통령이나 회장의 글을 쓸 때 네 사람에게 듣고 썼다. 가장 중요한 건 대통령이나 회장 본인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분들의 말을 전해 듣기도 하고 배석해서 듣기도 하지만, 직접 만나 궁금한 건 물어보면서 듣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기본적인 사항을 숙지하고 관련 내용을 충분히 공부한 후 만나야 한다. 두 번째로 듣는 대상은 대통령이나 회장의 말과 글을 듣거나 읽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무엇이 궁금한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물어야 한다. 세 번째는 전문가다. 대통령이나 회장이 하고 싶은 말과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쓰려면 이걸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론이나 제3자의 객관적인 의견을 듣는다. 이렇게 네 사람에게 잘 듣기만 해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잘 듣는다는 의미는 일곱 가지를 잘하는 것이다. 첫째는 ‘이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어야 한다. 이를 위해 듣는 내용에 대한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둘째는 ‘요약’이다. 들은 내용을 압축하고 핵심을 추려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듣기는 요점을 간추리는 행위와 다름없다. 셋째는 ‘유추’다. 말하는 사람은 다 말하지 않는다. 건너뛰는 게 많고 표정과 감정으로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듣는 사람은 눈치로 말하지 않는 빈칸을 채우고 비언어적 표현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눈치가 유추 능력이다. 넷째는 ‘질문’이다. 들으면서 물어봐야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알고 싶은 걸 알 수 있다. 질문을 통해 대화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공감’이다. 얘기를 듣고 간추리고 궁금한 걸 물어 대답을 들었으면 그 말에 동의하고 동감을 표해야 한다. 그래야 말하는 사람이 신이 난다. 여섯째는 ‘비판’이다. 상대 말을 듣기만 하고 공감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말도 추가해야 한다. 상대 말에 반발하고 반대하고 이의를 제기하라는 게 아니다. 상대 생각을 보완해주고 도움으로써 더 나은 대안이나 제3의 의견을 찾아가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건설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일곱째는 ‘실행’이다. 들은 내용을 적용하고 활용하고 응용해서 글을 쓰거나 일을 하거나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들은 다음은 말할 차례다. 들은 내용은 남의 것이다. 내 말이 내 것이다. 듣기만 하며 살다가 내 삶을 끝낼 순 없는 것 아닌가. 말해야 한다. 말을 하면 또한 얻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말을 하면서 할 말이 생각난다. 무슨 조화인지, 말하기 전에는 없던 생각이 말하면서 떠오른다. 그럴 때 알 수 없는 희열을 맛본다. 뿐만 아니다. 말을 하면 생각이 정리된다. 자기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나 자신이 참으로 기특하다는 효능감을 느낀다. 나아가 말을 하면 반응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떤 말에 시큰둥한지 알 수 있다. 말을 하면서 반응 좋은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
나는 주로 말해본 걸 글로 쓴다. 말할 수 있으면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말이 거듭되면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가 내 말을 더 재밌게 진전시킨다. 또한 말은 하면 할수록 말하는 내용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이것을 글로 쓰는 걸 촉진한다. 말한 내용을 글로 쓰면 구어체로 쓰여 읽기도 편하다. 그래서 나는 써야 할 글이 있으면 먼저 말해본다. 아니 말해보지 않은 내용은 쓰지 않을 정도로 내가 쓰는 모든 건 말해본 것들이다. 말해보면 쓸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말해보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얼 더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말하다 보면 읽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왜 읽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지고, 읽고 싶은 욕구가 커진다.
읽기는 크게 세 방향으로 해왔다. 첫째는 내 문체를 만드는 읽기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롤모델인, 그처럼 쓰고 싶은 작가가 있을 것이다. 그가 쓴 글의 내용이나 세계관과 상관없이 그의 문장과 표현, 문체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다. 나 역시 이병주, 김훈, 이문열 선생 등이 본받고 싶은 모델이었다. 그런 사람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의 글을 흉내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글을 쓰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내가 쓸 글감을 얻기 위한 읽기다. 나는 쓰기 위해 읽는다. 그러므로 읽으면서 쓸거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눈을 부릅뜨고 쓸거리를 찾으며 읽는다. 한 꼭지 글을 읽었는데 쓸거리를 얻지 못하면 다시 읽는다. 찾을 때까지 읽는다. 그러면 반드시 찾게 된다. 찾은 건 누군가에게 말해보고 내 글에 써먹는다. 어느덧 내 뇌는 쓰기 위해 읽고, 읽으면 무언가를 기필코 찾아내고야 마는 습성을 갖게 됐다.
세 번째는 벌이를 위한 읽기다. 나는 강의가 주 수입원이다. 강의를 잘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그런 콘텐츠를 구축하는 유일무이한 길이 독서다. 적어도 내가 강의하는 분야인 글쓰기, 말하기, 소통 등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읽고, 읽어보지 않은 책이 없다고 자신할 정도의 독서를 하려고 힘을 쏟는다.
듣고, 말하고, 읽었으면 다음은 쓰기다. 나는 들은 내용을 쓰고, 말하기 위해 쓰고, 읽은 후 무언가를 쓴다. 그 무언가가 바로 메모다. 내게 메모는 일상적인 습작 활동이고, 언젠가 써야 할 글쓰기의 재료를 장만하는 일이다. 읽고 들은 내용을 그대로 메모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받아쓰기는 내 글쓰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용하기 위해 메모한 건 나중에 찾아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자주 사용할 수도 없다. 내 글에서 남의 글 인용 비중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읽고 들은 것 중에 내 것을 찾거나 내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메모한다. 그건 메모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 것으로 체화된 것이다. 굳이 나중에 찾아볼 필요도 없고 내 글에 내 것으로 써먹을 수 있다.
나는 메모할 요량으로 글을 읽고 남의 말을 들으므로, 메모는 글을 읽고 말을 듣는 목적이 된다. 만약 메모하지 않고 읽고 들으라고 하면, 나는 읽기와 듣기를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메모는 읽기와 듣기를 이끄는 견인차다. 메모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 읽고 더 듣고 싶다. 그럴수록 메모를 더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모해둔 분량이 늘어나면 메모 덩어리 표면적이 넓어져 메모에 와서 붙는 메모거리가 많아지고, 메모끼리 연결되고 결합해 새로운 메모거리를 던져준다. 메모가 메모를 낳는 선순환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밖에도 메모는 감정을 정리하고 스스로 성찰하는 도구가 된다. 나는 내가 느끼는 부정적 감정들을 메모하면서 그 감정에서 벗어난다. 느끼기만 하는 감정은 왜곡되고 증폭되기 쉽지만, 글로 썼을 때 객관화되고 정화된다. 내가 한 일과 앞으로 할 일도 메모하면 이미 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다.
‘동의보감’에 ‘불통(不通) 즉 통(痛)이요, 통(通) 즉 불통(不痛)이다’란 말이 나온다. 서로 통하면 아프지 아니하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뜻이다.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있어야 하고, 날숨이 있기 위해선 들숨이 있어야 하는 게 세상 이치이고, 이런 이치에 순응할 때 우리는 건강하다.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는 순서가 없다. 들은 걸 쓰기도 하고, 쓴 것을 말하고, 말하기 위해 읽는다. 읽기와 듣기만 있고 말하기와 쓰기가 빈약한 때는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않는 불통이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말하기와 쓰기가 없는 읽기, 듣기는 허망했다. 말하기와 쓰기를 잘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읽기와 듣기가 말하기와 쓰기로 확장한 삶을 산다.
말하기와 쓰기도 연결됐다. 많은 사람이 말하기와 쓰기 가운데 어느 한쪽에 과도한 무게중심을 두고 산다. 주로 말만 하고 살거나 쓰기만 하면서 사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말하기와 쓰기의 불통을 낳는다. 나는 말한 건 쓰고, 쓴 건 말한다. 말하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 말한다. 말하기와 쓰기가 상부상조하고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일상을 산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하루하루가 활기차고 의욕에 넘친다. 읽고 듣기만 하며 살 때보다 벌이도 낫다. 독자 여러분도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가 순환하는 삶, 말과 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은 어른입니까?” 이 질문에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당당하지 못할까. 그렇다면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해 중장년의 나이에도 공부하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의 어느 날, 남산 자락 아래에 있는 ‘감이당’을 찾았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른들의 공부방 같은 곳이었다. 20대부터 80대까지, 전문직부터 프리랜서까지, 나이도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수양의 시간을 쌓는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찾아와 공부하고, 식사를 해도 된다. 식당과 식사 공간이 있으며, 그날도 2030 청년들이 밥 짓는 냄새가 모락모락 났다.
감이당을 설립한 이는 고전 평론가인 고미숙 작가다. 스스로를 ‘백수’라 부르는 그는 “혼자는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서 공부 공동체를 꾸렸다”고 말한다. 인문학 공부를 위해 감이당을 찾은 이들은 작가가 되기도 하고, 이곳에서 수업을 하는 선생도 되고, 또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 외부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감이당의 학생이자 선생인 60대 오창희 작가, 50대 문성환 작가도 그러한 경우다. 오 작가는 벌써 10년, 문 작가는 20년 넘게 감이당의 일원으로 함께하고 있다.
교감과 통찰의 중요성
감이당은 고전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인문의학연구소다. 21세기 인문학의 화두는 ‘생명과 우주’인데, 동양 사상에서는 이를 합쳐 ‘의역학’이라고 불렀다. 밝은 모습에 몰라봤지만, 오창희 작가는 20대 때부터 40년 넘게 류머티즘을 앓고 있다고 했다. 오 작가는 “몸이 안 좋아서 ‘동의보감’을 배우러 왔다. 동양 고전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도 커졌다. 병이라는 것에 집착하던 것이 줄어드니 몸도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걷는 것도 힘든 시절이 있었는데, 현재는 감이당에서 탁구를 제일 잘 치는 사람이 됐단다.
감이당 수업에서는 ‘글쓰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글이라는 창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동의보감’ 속 한 구절을 활용해도 좋고, 그날 수업에서 느낀 감정을 녹여 글을 쓰면 된다. 고미숙 작가는 “어떤 특별한 수행 체계가 아닌,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구도는 글쓰기”라고 평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 간혹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부 중장년의 경우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거나, 피드백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대체로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을 즐거워한다. 문성환 작가는 “그 과정에서 자기 성찰도 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친구도 생긴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고미숙 작가는 어른의 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교감’과 ‘통찰’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세대, 또는 지금까지 몰랐던 사람들과 교감할 때 생명력이 올라가고 통찰이 늘어난다. 그래야 삶이 확장된다”라는 설명이다.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공부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문성환 작가는 “어른이 되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스승이 옆에 있을 때, 또는 내가 누군가에게 스승이 될 수 있을 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마음이 나를 어리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는 전자의 어른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오창희 작가 또한 인간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고자 공부를 지속한다고 밝혔다. ‘성숙이란 어떤 사건을 더 큰 좌표 속에서 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그는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면 어린아이고, 우주적 차원까지 넓어지면 성인이라고 하며, 이걸 아는 게 어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1960년생인 고미숙 작가는 60대가 되자 “인생의 변곡점에 도달했다”고 느꼈단다. 그동안 성취와 단련의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 세상에 보답하고 잘 죽는 것이 중요해진 때가 됐다고. 고 작가는 “나는 뭔가 결핍됐다, 모자라다고 생각하면 절대 어른이 될 수 없다. 60대 이후에는 확실히 삶의 긍정이 생겨야 한다”라면서 “나는 어른이 된 것 같지만, 진짜 좋은 어른이 될 것인가는 앞으로의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지혜와 통찰력을 더 길러야 한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은퇴 후 소원해지는 인간관계에 실망하는 이가 적지 않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안부도 주고받고 종종 식사도 했던 사이인데, 회사를 나오니 연락도 만남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명함이 없다고 얕보나’, ‘내가 돈을 안 번다고 무시하나’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자. 혹시 ‘내가’ 스스로에게 그런 편견을 갖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만약 그렇다면 주변은 잠시 제쳐두고 나와의 관계부터 돌아봐야 할 때다.
퇴직 이후의 삶이 길어지며, 노후 대인관계가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다만 원활하고 지속적인 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자신과의 관계를 다지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 ‘은퇴의 말’, ‘은퇴의 맛’ 등의 저서를 펴내며 수많은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들을 만나온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은퇴 후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는 자신과의 관계에 달렸다”고 언급했다. 그는 “직장 생활로 생겨난 공적 관계망은 보통 퇴직 후 6개월 이내 소멸된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명성을 얻은 분일수록 이러한 변화에 취약하다. ‘그동안 나를 잘 따랐던 부하 직원들이 연락하겠지’ 같은 기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어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크고, 실망이 쌓이면 절망하게 된다. 점점 위축되고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작은 일에도 버럭 하고 화를 내는 등 이른바 ‘앵그리 올드’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주변에서는 회피하고 멀리하게 마련인데, 결국 대인관계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들 좋아할까
한혜경 교수의 경험에 의하면 은퇴 후 화가 많아지고 이를 표출하는 중장년이 적지 않다고. 겉으로는 타인을 향해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이는 결국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단다. 스스로에게 답답하고 불만스러운 심정을 그러한 방식으로 토로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과의 관계가 평온하고 긍정적인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 또한 순조로운 편이다. 한 교수는 “최근 뇌과학 분야 연구 중에 흥미로운 결과가 있었다. 나에 대한 정보처리와 타인에 대한 정보처리가 동일한 뇌 신경망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나를 좋게 보는 사람이 남도 좋게 보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이 남도 존중한다는 얘기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와의 관계, 자기 내면과의 소통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이 곧 타인과의 관계에도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나와의 관계가 편안하고 능숙한 사람들은 웬만한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회복탄력성 또한 높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만이 많고 소통이 어려운 이들은 사소한 일도 크게 힘들어하고, 회복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한 교수는 “살다 보면 유난히 사람들이 미워지거나 괜히 무시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혹시 내가 나를 미워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봐야 한다. 마치 거울처럼 누군가에게 갖는 나의 마음이 알고 보면 나를 향한 마음은 아닐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인정중독에서 벗어나 ‘셀프 칭찬’ 필요해
경쟁과 성취를 강조해온 한국 사회에서 현재의 중장년 세대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 어떤 이들은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잘 사는 삶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가령 어느 대학과 직장을 다닐지, 얼마만큼의 집을 사고 무슨 차를 타야 할지 등 자신보다 타인의 인정이나 평가를 따르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한혜경 교수는 “이러한 삶이 계속되다 보면 인정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타인 때문에 상처받으며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았을 때만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라며 “30~40대에는 타인의 관심과 인정이 성장의 디딤돌이 되기도 하지만, 50대 이후까지 이에 얽매이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와의 관계를 더 행복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지 말아야 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엔 차이가 존재한다. 그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나아가 잘난 척, 괜찮은 척이 아닌 솔직한 나를 드러낼 수 있을 때 개인적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면서도 실제 자신을 향한 칭찬에는 의구심을 갖거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엄격하고, 스스로의 능력과 장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반응이다. 한 교수는 자신의 좋은 점과 강점 등을 발견하는 과정이 매우 가치 있기에, 때때로 스스로를 칭찬해보는 시간도 마련해보길 권했다.
나를 위한 삶, 건강한 자기중심성 갖기
은퇴 후 또는 자녀 출가 후에도 끊임없는 희생을 감수하는 부모들이 있다. 가령 노후자금이 부족한데도 자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준다거나, 몸이 아프고 힘든데도 손주 육아를 돕는 등 자신보다는 자녀를 중심으로 노후를 살아가는 것이다. 타인 중에서도 자녀가 주는 기쁨이 상당하지만, 결국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지속적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자녀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정작 자신의 인생을 누리지 못하고, 나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행복한 노후를 가꿔가기 어렵다.
한혜경 교수는 “초고령사회, 수명은 길어지고 1인 노인 가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어떻게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누가 끝까지 나를 돌봐줄까’, ‘누가 내게 삶의 기쁨이 남아 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꼭 해봐야 한다.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독립돼야만 자신을 스스로 돌보며 잘 지낼 수 있고, 자신을 잘 돌볼 수 있어야 자식이나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도 건강한 관계를 오래오래 유지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결국 나를 위하고 사랑해줄 사람, 내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할 사람은 곧 나 자신이다. 스스로를 위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인본주의 심리학자로 유명한 로저스(C. Rogers)는 말년에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더 많이 돌보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나는 나를 좋아한다. 나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보았고,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내가 매우 아프지만 내 삶을 사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 교수는 “로저스의 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나이 들수록 ‘건강한 자기중심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건강한 자기중심성은 본인의 가치와 독특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태도다. 스스로를 홀대하고 혹사하는 건 짧고 굵게 살던 시대의 논리다. 100세 넘게 사는 요즘 시대에 필요한 건 자기중심적인 삶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존중하고 사랑할 때, 타인도 나를 그렇게 존중하고 사랑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의 역사 쓰기’로 회복하는 나와의 관계
교수 은퇴 후 현장에서 중장년을 대상으로 ‘나의 역사 쓰기’를 운영하고 있는 한혜경 교수는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나의 역사를 쓴다고 해서 유명인이 자서전을 내듯 거창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글쓰기가 어렵다면 나의 삶을 한 권의 책이라 여기고 목차를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은퇴 후에는 대인관계를 비롯해 여러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내 인생의 해답 또한 내 안에 있는 법. 찬찬히 과거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스스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발견하게 된다.
한 교수는 “나의 역사 쓰기란 내가 나에게 나에 대해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다. 현역 시절 이력서에 보기 좋게 썼던 나의 모습과 달리,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적어보는 것이다. 퇴직 이후 인생 2막 또는 3막을 준비하려면 과거와 현재의 나를 잘 이해해야 한다. 나를 헤아리는 과정 속에서 자신과의 갈등 고리를 풀어내기도 하고,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나의 역사 쓰기도 너무 말년에 했다가는, 과오를 발견하고도 ‘이제 와서 달라질까’, ‘너무 늦었구나’라며 개선할 시간이 없다고 여겨 절망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나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나의 역사를 꼭 한번 써보시길 바란다”고 권했다.
도움말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기꺼이 오십, 나를 다시 배워야 할 시간' 저 , '나의 역사 쓰기'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