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초 청와대를 나온 후 만나는 사람마다 8년 동안의 청와대 경험에 관해 물었다. 청와대에서 무슨 일을 했으며, 내가 모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고, 재미있는 일화는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때마다 주저리주저리 얘기했고, 이렇게 5년 동안 말하다 보니 내 머릿속에 긴 이야기 한 편이 만들어졌다.
자서전을 써보라고 하면 대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손사래를 친다. 나는 그런 변명을 들으면서 자서전에 대한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장 대표적인 편견이 자서전은 나이 많은 사람이 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쓴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자서전은 나이와 무관하다. 자서전은 인생을 정리하며 쓰는 유서가 아니다. 오히려 일찍 쓸수록 좋다. 한 번만 쓸 필요도 없다. 나이대별로 쓸 수도 있다.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것 아닌가. 살아 있을 때 기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쓸 것인가. 자기 삶을 결산하고 싶은 분, 자신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 분, 자기 삶의 경험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분,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고 싶은 분, 자신의 삶이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분, 무엇보다 내가 나를 발가벗길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분은 지금 당장 자판 앞에 앉길 바란다.
자서전을 둘러싼 편견
유명한 사람만 쓴다는 편견이 있다. 어불성설이다. 외려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사람은 자서전을 쓸 필요가 없다. 자신이 쓰지 않아도 남들이 써준다. 그래서 기록이 남는다. 평범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쓰지 않으면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는다. 자서전은 과거에 관해서만 쓴다는 것도 편견이다.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나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갈지, 마지막은 어떻게 맞이하고 싶은지 등도 다룰 수 있다.
자기 얘기만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부모, 자녀, 배우자, 친구 등 주위 사람 누구나 포함할 수 있다. 경험 위주로 써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자서전’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생애나 생활 체험을 소재로 그 행적을 적은 기록’이라고 나온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일어난 사건이나 업적 등 경험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낀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신념, 삶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감정과 기분, 심정을 담은 자서전이 자서전답다. ‘나는 자랑할 거리가 없다’는 분도 있는데, 자서전은 자기 자랑이 아니다. 오히려 반성이고 회한이다. 밝은 면만 부각해선 곤란하다. 어두운 면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앙드레 지드의 말이 비수처럼 꽂힐 수 있다. ‘자서전보다 허구가 더 진실한 장르다.’
자서전은 글 좀 쓰는 사람이 쓴다는 편견도 있지만, 자서전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내 삶 속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면 된다. 나만큼 내 이야기를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글솜씨가 부족해도 상관없다. 진정성으로 승부하면 된다.
자서전을 써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자서전을 써야 하는가. 자서전을 쓰면 무엇이 좋은가. ‘자서전을 씁시다’를 쓴 안정효 작가는 ‘누구나 자서전의 원자재가 될 경험과 느낌과 이야깃거리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심지어 노년에 이르러서조차 자신의 삶이 지닌 교육적 또는 오락적 그리고 문학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소중한 자료를 씨앗으로 뿌려 농사를 짓고 키워 수확하는 특별한 재배법을 알지 못하면 소중하고 평범한 원자재는 그냥 썩어 없어진다’고 했다.
자서전을 써야 할 이유는 많고도 많다. 첫째,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가 크다. 나는 언젠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지만 자서전을 쓰면 내 흔적이 남는다. 나를 영원히 존재하게 한다. 아울러 개인적 기록은 공적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소소한 개인의 기록이 모여 장대한 역사를 만드는 법이니까. 둘째, 자기 탐색이 가능하다. 자서전 쓰기는 내가 누구인지 탐구하는 체험이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쓰고 나면 나조차 모르던 나를 발견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셋째, 실토와 자백으로 마음속에 담아뒀던 감정을 분출함으로써 자신과 화해하고 스스로를 치유한다.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기도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넷째, 자서전 쓰기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계기가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시간 사이에서 삶을 재정비하는 기회다. 자서전의 목차를 보면 무엇이 비어 있는지, 앞으로 무엇으로 채워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다섯째, 자서전을 쓰는 동안 내 인생의 소중한 사람들과 재회하고, 내 삶의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과 마주하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여섯째, 나의 과거를 복원해낸다. 잊고 묻혀 있던 나의 자취와 흔적을 발굴해 나의 과거를 재건한다. 단순 복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의 과거를 재해석, 각색, 정리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일곱째, 자서전은 가족과 후대에게 유산을 남기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제공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도서관이라고 했다. 모든 삶은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에는 내 가족과 후손이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자서전의 형식과 구조
자서전은 대표적인 세 가지 형식이 있다. 전기(傳記), 평전(評傳), 회고록이 그것이다. 전기는 말 그대로 어렸을 적 읽은 위인전처럼 쓰는 것이다. 전기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이야기다. 평전은 전기보다 제3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전기에 평론과 비평을 곁들여 쓴다고 보면 맞다. 전기와 평전이 3인칭 시점으로 쓴다면 회고록은 1인칭 시점이다. 스스로 지난 일을 돌이켜 쓰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전기를 묶는 형식의 열전(列傳)으로 쓸 수도 있다. 공저로 자서전을 쓰는 것이다.
소설 형식으로 쓸 수도 있다. 일종의 자전적 이야기, 성장소설로 쓰는 것이다. 체험 수기(手記) 형태의 수필 형식도 무방하다. 쓰기 쉬운 일기 형식도 괜찮다. 성웅 이순신의 ‘난중일기’,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도 일종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서간문 형식도 나쁘지 않다. 인터뷰나 기사 형식으로 쓸 수도 있다. 스스로를 화제의 인물로 설정해놓고 자신이 자기를 인터뷰하고, 자신에 대한 뉴스를 전하는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쓰든 쓰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세 가지를 찾는 일이다.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은, 이른바 잘 썼다는 자서전을 찾는 일이다. 나도 이런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책을 찾아 서너 번 읽자. 내게는 ‘김대중 자서전’이 그런 책이었다. 다음으로 찾아야 할 것은, 내 얘기를 들어줄 대상이다. 자녀도 좋고 친구도 좋다. 자서전도 결국 누군가에게 읽혀야 의미가 있다. 그 누군가가 정해지면 쓰기가 훨씬 쉬워진다. 끝으로 찾아야 할 건 자서전의 주제다. 내 자서전을 다 읽은 독자가 ‘이 사람이 자서전을 통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 떠올릴 수 있는 한 문장을 찾아보라. 내 인생의 키워드, 내 자서전의 제목을 찾아봐라. 독자가 자서전을 읽고 뭐라도 하나 깨닫고 얻는 게 있다면 대성공이다.
본격적인 자서전 쓰기
그러면 어떻게 쓸 것인가.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시간순으로 기술하는 방식이다. 편년체 역사 서술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연도별로 주요 사건을 정리하는 연보를 작성한다. 그런 후 시기별로 묶어서 장을 구성한다. 기-서-결(학창 시절-직장 시절-은퇴 이후)로 기술하거나, 기-승-전-결(유아 시절-청년 시절-중년 시절-노년 시절)로 서술한다.
인물 중심으로 서술할 수도 있다. 일종의 기전체식 서술 방식이다. 소설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다. 이 가운데 인물 설정이 우선이다. 마찬가지로 자서전에 등장할 인물 고르는 일을 우선 한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들을 다 써본다. 살면서 인연 맺었던 사람들을 망라해본다. 휴대전화에 있는 연락처를 들여다보는 것도 좋다.
그런 후 자신을 중심으로 계보 그림을 그린다. 당연히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가까운 사람부터 그려나갈 수도 있고, 내게 도움이 됐던 사람과 나를 방해한 사람으로 구분해서 정리할 수도 있다. 인물 중심의 서술에서는 관계로 인해 일어난 갈등과 위기, 그리고 해소 과정이 중요하다. 무슨 원인과 이유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위기로 치달았으며,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 과정에서 나의 조력자와 적대자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나는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고, 누구를 동경하고 선망했으며, 누구로 인해 피해를 봤는지 등을 얘기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지대해서 기전체식 자서전은 독자에게 흥미와 재미를 안겨주기 쉽다.
사건 중심으로 서술할 수도 있다. 우선 내 인생에서 일어난, 기억나는 사건을 모두 열거한다. 그리고 질문해보자.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은? 고통스럽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사건은? 가장 좋았던 여행은? 이런 물음을 통해 주요 사건을 발췌하고 서술한다. 이때 주의할 게 있다. 모든 얘기를 다 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건너뛸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해야 한다. 채택된 사건들도 강약 조절을 해야 한다. 어떤 사건은 길고 상세하게, 어떤 사건은 짧고 두루뭉술하게. 하지만 모든 사건을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 설명하기보다는 눈에 그려지게 보여주면 좋다. 각각의 사건에서 배우고 깨달은 점을 포함하면 더 좋다.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까지 넣어주면 금상첨화다.
공간을 기준으로 쓸 수도 있다. 누구나 사는 곳이 변해왔다. 다니는 데가 바뀌어왔다. 삶은 공간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나의 경우 고향 전주 시절과 서울 생활로 크게 나눌 수 있고, 직장도 대기업, 청와대, 벤처기업, 출판사 근무 시절로 분류할 수 있다. 끝으로 변곡점 서술도 가능하다. 내 인생의 변곡점을 기준으로 시기를 분할해서 그 이전과 이후를 대비하고, 해당 시기가 갖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굽이굽이 인생에서 내 삶은 어머니 돌아가시기 이전과 이후, 직장 다니기 이전과 이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정 시기를 하나만 딱 떼어서 그것만 집중적으로 다룰 수도 있다.
거듭 말하지만 자서전 쓰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자기소개서를 쓴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자. 우리가 읽는 책은 완성본이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엔 한 쪼가리 글에 불과했다. 영화 시나리오도 처음엔 ‘~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로그라인’ 한 줄로 출발한다. 그다음에 태어남-사랑함-헤어짐-죽음 등 몇 줄의 ‘시퀀스’를 쓴다. 그런 후 A4 용지 1쪽 이내의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다음에 A4 용지 15~20쪽 분량으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트리트먼트’를 쓰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트리트먼트를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쓴다. 우리는 그 시나리오를 볼 뿐이다. 그저 한 줄에서 시작하면 된다.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이미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쓰고 있다. 잘 살았으면 누구나 자서전을 쓸 자격이 있다. 자서전은 글로 그리는 자화상이다. 내가 주인공인 연극의 대본을 쓰듯, 고해성사하듯, 내 인생의 사진첩을 스크랩하듯 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