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샛노란 개나리꽃을 바라보며 현기증을 느낀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이 저문다. 앳된 청순으로 눈을 홀리던 봄꽃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매정하게 그냥 떠난다. 더 놀다 가도 좋으련만, 공연히 사람의 마음만 들쑤셔놓고 재 너머로 사라진다.
황산들꽃정원으로 가는 시골길 양편 숲에 가득한 건 봄꽃 대신 이젠 초하의 녹음이다. 남도 특유의 황토밭과 황톳길에 자글자글 한낮의 열기가 끓는다.

여름 초입이지만 마음속에선 여전히 봄이 서성거린다. 봄은 기억할 만한 계절이지 않던가. 놀랍게도 만물을 깨우는 계절이라는 점에서는 예찬할 만한 철이다. 게다가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이 저마다 섬려하다. 향기를 풍겨 능숙히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는 재주꾼답게 감미롭다. 그래 사람의 춘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봄꽃을 일컬어 옷고름 입에 물고 은근한 눈짓을 보내는 미색이라 한들 어떠랴.
그러나 봄은 늘 너무 짧다. 온 줄을 알자마자 저만치 달아난다. 까르륵 웃으며, 연분홍 치마 휘날리며, 날 좀 잡아보란 듯 요리조리 내빼다 순식간에 산등성이 너머로 후다닥 사라지는 가인(佳人). 무슨 수로 가는 봄을 움켜쥘 수 있으랴. 내가 아는 봄이 그렇게 무정하다. 말뚝에 잡아맬 길이 없다. 그래 봄이면 푼수처럼 들뜨다가 헛물을 켜고 만다.

결핍이 많은 자는 충만한 봄에도 실속을 차리지 못한다. 그저 아득해지더라. 그게 봄날에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세월의 끝이 어딘지 알면서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시간을 낭비한다. 아름다운 가치들을 존중하지만 나의 것으로 삼지 못한 채 허울만 뒤집어쓴다. 때로 생각은 미끈하고 말은 기름지지만 알고 보면 물 위에 뜬 올리브유 같은 것일 뿐, 실제론 허세와 퇴행이 잦다. 이렇게 살면 살수록 모자란 자신이 보여 무색하다. 삶이란 난관의 연속이다.

황산들꽃정원은 널따랗다. 1만 평(약 3만 3057㎡)이나 되는 부지를 온갖 식물로 빼곡히 채웠다. 숲을 이룬 수목들과 별도로 꾸민 서너 개의 소박한 꽃밭들, 그리고 사방으로 열린 산책로 외엔 이렇다 할 치레가 없는 정원이다. 양념과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 꾸몄다. 조용히 거닐며 모처럼 식물에 집중할 수 있는 참신한 정원이다. 그런데 이곳엔 자못 특별한 게 있다. 돌연변이 식물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돌연변이로 나온 특유의 수목들이 저마다 이색을 뽐내는 일종의 경연장이다. 따라서 관람객들이 반색하며 감탄사를 발한다.

인간 세상에서 돌연변이는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딱하고 난처한 사회적 약자로 간주될 뿐이다. 식물 세계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드러낸다. 돌연변이 수목을 환영한다. 대표적 변이식물인 네잎클로버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흔히 변종 식물에 호기심과 호감을 표한다. 평범하지 않고 흔하지 않아 신선한 감흥을 야기하기 때문이리라.
세상의 돌연변이 식물 중엔 소름 끼칠 정도로 기괴한 것들도 있다. 애호가들이 열광하는 종류는 그런 게 아니다. 시각적 즐거움과 식물의 신비를 만끽할 수 있고, 관심을 갖고 찾을 경우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종을 선호한다. 그게 이른바 ‘무늬종 식물’이다. 이 식물의 잎사귀엔 색과 무늬가 박혀 있다. 초록 일색의 여느 식물과 달리 흰색이나 연노랑으로 물든 면과 줄, 또는 점으로 어우러진 문양을 잎사귀에 품고 산다. 그래서 이색적이며, 희귀종이다.

황산들꽃정원은 무늬종들의 집합소다. 이곳 정원주는 일찍이 20여 년 전부터 무늬종에 심취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집에 열을 올렸다. 원래 소나무를 집중적으로 길렀으나 무늬종으로 전향해 개성 넘치는 정원을 만들었다. 이러한 성취에 따른 정원주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국내에서 무늬종을 가장 많이 보유한 정원이다. 묘한 잎 무늬가 노골적으로 발현된 참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동백나무, 산딸나무, 산사나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늬종이 모여 사는 이방이다. 연일 희귀종들의 이벤트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변종 잎사귀들이 초록 잎들에 섞여 바람에 살랑거리며 반짝이는 장면은 가히 명랑한 집단 댄스와 맞먹는다.

잎사귀 하나만 들여다봐도 상큼하긴 마찬가지다. 색과 문양이 곱살해 간명하게 쓱쓱 그린 수채화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자연이 붓을 휘저은 결과가 이렇게 빼어나다. 자연이 인간에게 건네는 농담과 장난과 위트가 이렇게 고상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무늬를 입은 잎사귀는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잎의 흰색과 무늬의 발현은 돌연변이 유전자의 횡포로 말미암아 광합성에 필수적인 엽록소를 갖지 못한 탓에 얻은 특질에 불과하다. 광합성을 못 하는 바람에 양분을 얻지 못한 잎사귀는 빈사 상태로 몰릴 수밖에 없다. 간신히 잎 노릇을 하지만 이미 생기 잃은 중환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얗거나 누렇게 말라가는 이 고독한 환우는 죽을힘을 다해 생명을 지속하고자 분투한다. 한사코 햇빛을 향해 몸을 들이민다. 그에겐 지지 세력도 있다. 마른 잎과 한 몸 되어 사는 녹색 부위가 바로 그렇다. 녹색은 흰색을 껴안아 격려한다. 흰색은 녹색에서 얻은 용기로 난세를 극복한다. 마치 미더운 오누이처럼 서로 이해하며 산다. 내 눈엔 그렇게 읽힌다. 그게 맞다면, 이 조용하고 뜨거운 연대를 사랑의 본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