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엔 잠깐인 줄 알았죠.”
황혼육아 가정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말이다. 조부모도 부모도 잠깐 아이를 봐주는 걸로 알고 시작한다. 하지만 보통 아이가 혼자 학원 스케줄을 챙길 수 있는 초등 고학년이 되기까지 태어나서 최소 10년이다. 입학을 앞두고 조부모와 자녀 세대는 다시 한번 ‘돌봄의 경계’ 앞에 선다. 등·하원(등·하교) 시간, 학원 스케줄, 숙제 지도, 방학 계획까지. 갈등의 표면은 일정과 방식이지만, 그 아래에는 말하지 못한 기대와 역할의 혼선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보연 깨알육아연구소 상담가는 “황혼육아 갈등을 개인 성격이나 세대 차이로 보지 않는다. 합의 없이 시작된 돌봄은 구조적으로 갈등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갈등은 가족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입학은 아이의 성장단계 변화지만, 황혼육아 가족에게는 생활 구조가 바뀌는 사건이다. 어린이집 시기까지는 낮 시간 위주의 돌봄이 가능했다면, 초등 입학 이후에는 돌봄의 시간대가 분절되고 역할도 복잡해진다. 등·하교, 방과 후 공백, 학원 이동, 숙제 지도까지 돌봄은 단순히 아이를 ‘봐주는 일’을 넘어 생활 전반을 관리하는 단계로 확장된다.
이보연 상담가는 입학 시즌을 “황혼육아 갈등이 가장 자주 촉발되는 시기”라고 짚는다. 돌봄의 양과 질이 동시에 달라지지만, 많은 가족이 이를 사전에 조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의 학교 일정은 공유하지만, 그로 인해 달라지는 조부모의 생활 변화는 논의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입학 전에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힘들어졌다’는 말씀을 자주 하세요. 돌봄이 갑자기 어려워진 게 아니라, 돌봄의 성격이 바뀐 겁니다. 시간의 밀도와 책임의 무게가 달라졌다는 걸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황혼육아가 이어지고 있어요.”
이보연 상담가는 특히 세대 간 인식 차이를 갈등의 출발점으로 꼽았다. 그는 “입학 시기에는 조부모 세대, 자녀 세대, 손주 모두 긴장도가 높기 때문에 돌봄의 재정의가 필요하다”라며 “이때 가족 내 역할 구조를 점검하지 않으면 이후의 갈등은 피하기 어렵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이의 변화보다 가족 각자의 역할 변화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입학과 함께 돌봄은 ‘양육’에서 ‘생활 관리’로 성격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때 전환이 이뤄지지 못하면 갈등이 반복되기 쉽다.

갈등의 본질은 ‘합의되지 않은 역할’
황혼육아 갈등은 종종 ‘훈육 문제’로 드러난다. 숙제를 얼마나 시킬 것인지, 학원을 몇 개 보낼 것인지, 아이를 얼마나 엄격하게 대할 것인지가 다툼의 소재가 된다. 그러나 이보연 상담가는 “훈육은 표면일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 갈등의 뿌리는 훈육 방식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훈육을 누가, 어느 정도의 에너지로 감당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는 특히 훈육이 조부모에게는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이라고 말한다. 손주를 향한 애착이 깊을수록 조부모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보다 한 번 더 봐주고 넘어가게 된다. “손주는 여전히 아기처럼 느껴지고, 혼내는 것보다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는 것이다. 이는 무책임함이 아니라 관계의 성격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반면 자녀 세대는 이 지점을 가장 견디기 어려워한다. 아이의 규칙이 흔들릴까 봐 불안하고, 훈육의 일관성이 무너진다고 느낀다. 이 과정에서 조부모가 부모의 훈육에 끼어들거나, 반대로 부모가 조부모의 훈육 방식을 즉각적으로 수정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이 상담가는 “아이 앞에서 서로의 훈육에 개입하는 순간, 부모로서의 권위는 물론 가족 내 역할 질서가 함께 흔들린다”고 지적한다.
이보연 상담가는 훈육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아이 앞에서는 한 목소리, 조율은 아이가 없는 자리에서”라고 밝혔다. 훈육이 끝난 뒤 아이가 없는 곳에서 부모와 조부모가 각자의 어려움과 바람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어디까지는 힘든지’ 이야기하지 않으면 훈육은 반복될수록 갈등의 원인이 된다. 조부모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관계를 해칠까 봐 침묵하고, 부모는 불안 속에서 요구를 누적시킨다.
이보연 상담가는 “합의되지 않은 돌봄은 시간이 갈수록 감정 비용만 키운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참을 수 있었던 일이 서운함으로 바뀌고, 결국 폭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갈등이 반복되는 가족일수록 ‘이미 정해진 역할’처럼 굳어진 구조가 존재한다.
“갈등을 줄이려면 훈육 방식을 논하기 전에 역할의 경계를 먼저 정리해야 해요. 조부모가 감당할 수 없는 훈육까지 기대하는 순간, 어떤 선택도 불만으로 남게 되죠. 황혼육아에서 필요한 것은 더 엄격한 기준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기 위한 훈육의 거리 조절과 소통의 순서랍니다.”
참는 쪽의 침묵, 부탁하는 쪽의 불안이 겹칠 때
황혼육아 갈등의 특징 중 하나는 감정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부모는 서운함을 표현하지 않고, 부모는 불편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 상태를 ‘조용한 불균형’이라고 표현했다.
조부모는 “괜히 말 꺼냈다 관계가 틀어질까 봐” 침묵을 선택한다. 특히 중장년 세대는 가족 갈등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참고 넘기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배워왔고, 아이가 걸린 문제에서는 자신의 불편함을 뒤로 미루는 데 익숙하다.
반면 자녀 세대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불안 속에 요청을 반복한다. 돌봄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대안이 없을수록 가장 안전한 선택지는 가족이다. 이 불안은 단순한 걱정에 그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청은 설명이 아니라 전제가 되고, 합의가 아닌 ‘당연한 기대’로 굳어진다. 그 과정에서 조부모가 감당하는 부담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침묵과 불안이 겹치면, 갈등은 특정 사건이 아니라 누적된 감정에서 터진다. 아이 앞에서의 말 한마디,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 사소한 지적이 방아쇠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작은 사건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 쌓인 불균형이 자리하고 있다.
“당사자들은 ‘왜 이렇게 싸우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상담을 하다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균열이 쌓여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갈등이 터지고 보면 대개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의 일들’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사건보다 구조를 봐야 해결의 실마리가 나옵니다.”

황혼육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대화의 기준
이보연 상담가가 제시하는 해법은 단순하다. 그러나 쉽지 않다. 바로 ‘경계를 확인하는 대화’다. 언제까지, 어떤 범위까지, 무엇은 하지 않는지를 말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이 대화는 갈등이 커지기 전에 필요하다. 감정이 쌓인 뒤에는 합의가 아니라 다툼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못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범위를 말하라”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매일은 어렵지만 주 3회는 가능하다’, ‘방학 돌봄은 힘들다’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호한 약속은 결국 오해를 낳고, 오해는 관계를 소진시킨다.
그는 특히 돌봄을 ‘호의’가 아닌 ‘일’로 인식하는 장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부모 돌봄을 용돈이나 감사의 표현으로만 처리하면 경계가 흐려지기 쉽다는 것이다.
“가능하면 월급 형태로 정리하고, 출퇴근 개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돌봄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는 금액의 많고 적음보다, 돌봄을 하나의 역할로 존중하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돌봄을 ‘고마움’의 언어로만 유지하지 않는 것이다. 감사 표현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구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보연 상담가는 “고마움만으로 유지되는 돌봄은 반드시 한계에 부딪힌다”며 “역할과 책임, 휴식이 함께 정리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는 소진된다”고 짚었다.
자녀 세대에게도 분명한 당부가 있다. 합의하지 않은 도움은 결국 관계의 빚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편리해 보일 수 있지만, 언젠가는 감정적 비용으로 돌아온다. 조정은 갈등이 생긴 뒤가 아니라, 아직 괜찮을 때 해야 한다.
입학 시즌을 앞둔 지금, 그는 황혼육아 가족에게 “아이를 위해 참는 것이 늘 최선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황혼육아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구조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 설계해야 할 하나의 생활 시스템이다.
도움말 이보연 깨알육아연구소 상담가아동 상담과 부모 교육 전문가이자, 숙명여대 교육과학대학원 영유아학과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30여 년간 아동 상담과 부모 교육 현장에서 배운 지식과 엄마로서 겪은 경험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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