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설이 다소 늦은 편이다. 입춘 지나서 오니 말이다. 섣달하고도 그믐날 새벽에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생일상을 한 번도 못 받고 자랐다. 엄마·이모·언니 모두 설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기에, 장남도 장손도 아닌 어린 계집아이 생일은 관심 밖이었을 게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설 명절이 간소해지고 친척들 왕래도 잦아들면서 거꾸로 내 생일상이 점차 번듯해져 갔으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둘이 또는 홀로 사는 농촌 어르신들
이곳 당산마을의 설 풍경도 “예전 같지 않다”며 이구동성으로 혀를 끌끌 차는 동네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자니, 뜬금없이 30대 중반 컴컴한 영화관에서 본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제목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Como agua para chocolate)’. 1992년 멕시코의 알폰소 아라우 감독이 같은 제목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1993년 개봉했다. 워낙 오래전이라 자세한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가슴 아픈 이야기의 주인공은 티타라는 이름의 아리따운 아가씨. 그녀는 연인 페드로를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지만, 그와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막내딸은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채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멕시코의 오랜 전통 때문이다.
연인 페드로가 자신을 대신해 두 살 위 언니와 결혼식을 올리던 날, 그녀는 하객들을 위해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든다. 하객들은 티타가 만든 결혼 피로연 음식을 먹으며 펑펑 눈물을 흘린다. 티타에겐 음식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객들이 초콜릿 듬뿍 묻힌 케이크를 한입씩 베어 물 때마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장면은 코믹하기도 했지만, 티타의 절절한 슬픔이 오롯이 묻어나와 가슴 한쪽이 아리던 기억이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당시로선 막내딸에게 부모 부양을 책임지라고 했던 멕시코의 기이한 전통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농촌의 오늘은 10년 후 우리의 모습’이라 했던가. 30여 가구 중 2가구만 빼곤 노부부만 남거나 노인 홀로 사는 당산마을의 스산한 풍경을 보자니, 멕시코의 전통이 나름의 고육지책이었으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26년, 설다운 풍경은 사라졌다
당산마을은 임(任)씨 성을 가진 분들이 모여 사는 동족 부락이다. 행복도시(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가 개발되기 전 월산리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분들이 이곳 연기리 당산마을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남편들 간에는 사촌·육촌·팔촌으로 엮여 있고, 부인들은 시누·올케 사이도 여럿이다. 처음 당산마을에 자리 잡고 면사무소(지금은 행정복지센터로 이름이 바뀐)에 갔을 때, 한쪽 벽에 걸려 있던 역대 면장님 사진 아래 성씨가 모조리 임 씨인 걸 보며 웃음 짓던 기억이 난다.
이곳 분들도 세월 탓인지, 세태 탓인지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신다. “그땐 참말로 재미지게 살었구먼. 설은 최고 명절이었쥬. 집마다 김 펄펄 나는 흰 떡가래 뽑아선 그거 간장에 참기름 살짝 치고 찍어 먹으면 별미가 따로 없었쥬. 나중에 떡 꾸득꾸득해지면 떡국떡 썰 때 손모감지가 아팠지만서두. 설빔 차려입고 동네방네 세배 다녔잖유. 그땐 어르신들 죄다(모두) 대접받고 살았는디, 지금은 며느리 얼굴 보기도 힘들고 손주 인사받기도 손꼽을 정도여. 좋은 세월 다 간 겨.”
당산마을 내려온 지 어느새 15년이 지나는 동안 설다운 풍경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나마 북적북적 사람 사는 냄새 솔솔 피우는 집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집에 사는 옛 월산리 이장님 댁과 전 씨 할아버지네 두 곳뿐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이장님 댁 며느리가 시집온 첫날부터 모시고 산 시어머니는 올해 95살이 되셨다. 동네에서 제일 연장자인 어르신은 허리가 90도로 꺾이셨지만, 지금도 ‘밭농사의 달인’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신다. 아들만 둘 두셨는데, 큰아들이 2녀 1남, 작은 아들이 1녀 1남을 낳아 손자·손녀가 번화하다. 제일 큰 증손녀의 대학 합격 소식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중이다.

이장님 댁 앞마당이 늘 북적대는 건 이유가 있다. 이장님의 첫째 딸이 할머니와 엄마 문안드린다고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친정 왕래가 잦은 덕분이다. “아빠(이장님)가 손자·손녀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분인 줄 정말 몰랐어요. 나 어릴 때는 제대로 안아주지도 않으셨다는데…. 틈만 나면 손자·손녀 트랙터나 오토바이에 태우고 동네 한 바퀴는 기본이고요, 무엇이든 제일 크고 실한 열매는 손주들 차지예요. 세뱃돈도 두둑하게 챙겨주시고요. 대보름날 쥐불놀이도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린답니다.”
다른 이유는 월산리 시절 마을 분 다수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개종한 덕이기도 하다. 그곳에 있던 교회도 함께 이주했는데 ‘월산리침례교회’ 명패를 지금도 그대로 달고 있다. 일상 대화 도중에도 “모든 건 하나님 은혜요 은총이요 축복”이란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신심 깊은 분들을 중심으로, 이장님 댁 마당에선 교회 김장 담그기 행사가 열리기도 하고, 독거노인 돕기 바자회(?)가 펼쳐지는가 하면, 교회 내 청년 모임이나 여성 권사 모임 등 각종 모임이 이어지기도 한다. 올해도 월산리침례교회 교인들이 이장님 댁 앞마당에 모여 뜨끈한 설 떡국을 나눌 것이다.
물론 종교로 인한 갈등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이장님 댁 바로 아래엔 팔촌 형님이 살고 있는데, 종교 문제로 두 집 사이가 소원해졌단다. 팔촌 형님의 어머님이 제법 이름난 무당이었는데,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을 시름시름 앓았단다. 한데 그 병이 교회에 발길을 끊자마자 씻은 듯 낫는 바람에, 두 집 사이가 서먹해지면서 왕래가 거의 끊겼다는 거다.

당차고 대견한 베트남 며느리
당산마을의 유일한 ‘한베(한국-베트남) 가족’ 트린이네도 부모와 아들, 며느리, 손주 3대가 함께 산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며느리 트린 엄마는 나의 절친(?)이다. 다문화가족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친해졌다. 트린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 소나무밭을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꼬마 트린이가 올해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간다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트린 엄마에게 어느 날 “왜 딸 이름을 트린이라 지었어요?” 물었다. 딸이 평생토록 엄마의 고향인 베트남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베트남식 이름을 지어주었노라 했다. “트린이 학교 들어가면 친구들이 놀릴 텐데 어쩌려고 그래요?” 다시 물었다. 이번엔 트린 엄마가 정색하고 “아줌마, 그건 놀리는 아이들이 문제예요” 하는 바람에 얼굴이 뜨거웠던 기억도 생생하다.
트린 할머니를 통해 베트남 며느리를 보게 된 사연을 들었다. “스물다섯에 큰 교통사고를 당한 후 시름시름 앓는 통에 장가보낼 나이를 놓치고 말았던 하나뿐인 아들, 이러다 총각 귀신 만들게 생겼네. 어찌하누” 끌탕하고 있자니, 당신 딸들이 외국인 며느리도 괜찮으니 적극 구해보자고 하더란다. 그래서 부랴부랴 베트남 신붓감과 선을 보게 했는데, 시집온 지 3년쯤 지나 며느리가 고백하더란다. “트린 아빠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서, 베트남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기야 트린 아빠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다소 병약해 보이긴 하지만, 젊은 시절 탤런트 강석우를 연상시킬 만큼 잘생겼다. 멋진 한국 남자를 보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을 트린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트린 엄마·아빠는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닌다. 오토바이를 즐겨 타는 트린 엄마가 뒷자리에 남편을 태우고 신나게 달리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애정 표현에 인색한 당산마을 어른들이 처음엔 남사스럽다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지만, 지금은 보기 좋다며 부럽다고 하신다. 아들이 변변한 직장을 못 찾는 통에 며느리 눈치가 보인 트린 할머니가 허구한 날 아들을 닦달했더니, 트린 엄마가 “어머니, 남편과 아이들은 제가 돈 벌어서 먹여 살릴 테니, 남편 구박하지 말아주세요” 하더란다. 솔직히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저녁에 가족들 모두 동네 중국집 데리고 가서 짜장면에 탕수육을 배불리 먹였다고 하신다.
트린네 바로 옆집엔 서른 갓 지나 남편과 사별한 후 평생 아들 하나 보고 살아온 분이 살고 계신다. 작년에 아들 장가보내며 분가시키고는 목 놓아 울었다는 소식이 온 동네에 퍼졌다. 한국 며느리는 소식도 없는데 베트남 며느리 자랑이 늘어지는 트린 할머니를 보자니 내 마음마저 싱숭생숭해진다.
세종시 개발이 시작된 이후 당산마을엔 원룸이 우후죽순 들어섰고, 조선족을 필두로 베트남, 몽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필리핀, 네팔 곳곳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블루베리 농장 주위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말이 종종 들려온 지도 오래됐다. 변화를 꺼리며 전통을 고수하려 하는 농촌부터 다문화의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했음은 일면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이들 덕분에 당산마을 사람들은 중국식 만두에, 베트남식 오리지널 쌀국수, 몽골의 말고기 요리, 네팔식 구운 빵까지, 생전 처음 맛보는 다채로운 음식을 앞에 놓고 각국의 명절을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올해 설에도 떠나온 고국의 설 명절을 알뜰살뜰 지키며 고향 못 가는 서러움을 달래는 이웃이 여럿 있을 것이다. 찾아오는 가족 없이 홀로 사는 당산마을 어르신들의 처지를 서로 위로하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