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신기한 일이다. 블루베리 농장이 있는 당산마을(세종시 연기면 연기리)에는 비밀이 없다. 아침나절 오다가다 한두 마디 나눈 이야기는 오후가 되면 온 동네 모르는 사람이 없다. 모두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서 그런가 보다. 하기야, 코로나19 당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마실 다니던 발길이 끊기자 “6.25전쟁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섭다”고 했던 분들이다.
당산마을에 내려오자마자 자주 들었던 이야기는 ‘돈’을 둘러싸고 전개된 극적인 사연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원래 월산리에서 동족 부락을 이루며 살던 분들인데, 세종시 개발이 확정되면서 국가로부터 토지 보상을 받고 이주해 왔다. 집마다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제법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하는데, 바로 그 보상금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희비쌍곡선이 교차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전교 1, 2등을 다투거나’, ‘수재(秀才) 소리를 귀에 달고 살던’ 자식을 둔 분들은, 일찍이 논밭 팔아 자식들 공부시켰기 때문에 보상받을 땅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단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기 마련인 세상, 이웃들이 저마다 보상금 챙기는 와중에 ‘땡전 한 푼 못 챙긴 분’들은 화병으로 드러눕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한다. 반면 ‘꼴등을 도맡아 했던 자식’, ‘가출을 밥 먹듯 했던 자식’, ‘당최 공부엔 뜻이 없던 자식’, ‘엉덩이에 뿔 난 채 술·담배나 일찍 배운 자식’, 그런 자식을 둔 집안은 땅이 고스란히 남아 배부를 만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돈 냄새는 천리 밖에서도 난다’는 말처럼 부모님 곳간에 보상금이 쌓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자식들이 하나둘 찾아와 한밑천만 도와달라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그만 딱한 사정의 주인공이 된 분들이 여럿이란다. 당신들 살 집 한 채라도 남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그 많던 보상금 한 달 만에 모조리 날린 분’도 있다니, 어찌됐든 보상금으로 집 한 채 마련하고 남은 돈으로 땅 잡아놓은 분들만 가산 유지에 성공했다고 한다.

돈은 뭐 가방끈으로 버남?
가장 드라마틱했던 자식 농사의 반전 드라마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녀 산신령이란 별명을 얻은 동네 어르신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아들만 둘 둔 1947년생 돼지띠 동갑내기인 고향 친구가 있는데, 첫째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양쪽 어깨에 콘크리트 바른 듯 우쭐대곤 했단다. 아버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첫째는 명문 카이스트에 보란 듯이 합격했다. 졸업 후엔 대기업에 취직까지 했는데, 직장 생활보다는 자기 사업을 해보고 싶다 했단다.
첫째 아들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무조건 믿어왔던 아버지는 가족, 동창, 친지,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며 사업 자금을 끌어모아 큰아들 사업 밑천을 댔단다. 물론 대박을 꿈꾸면서. 하지만 6개월도 안 돼 쪽박을 차는 바람에 동창들로부터 절연(絶緣)당하고, 부인과는 이혼 직전까지 가고,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심정 하소연할 곳도 없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라 했단다.
한데 이 친구의 자식 농사에 기막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형만 한 아우 없다 해서 그랬는지 공부와 담쌓은 채 부모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둘째 아들.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녀석이 “아버지, 저 대학 안 가는 대신 한 학기 등록금 제게 주십시오. 10년 후에 10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 하며 무릎 꿇고 애원하더란다.
한 학기 대학 등록금을 손에 쥔 둘째 놈은 그 길로 필리핀으로 갔다고 한다. 원래 밑바닥에서 굴러먹던 놈이니 걱정도 크게 안 했지만 기대도 별로 없었는데, 간간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오던 녀석은 정말 10년 만에 약속을 지키러 나타났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빌려주신 돈에 대한 이자”라면서,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멋진 외제 승용차(벤츠 S300인가 뭔가)를 덤으로 가져왔단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 그르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는 산신령 할아버지, 효도는 성적순이 아닌 모양이라고 했다.
확실히 돈 버는 능력과 가방끈 길이는 별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지난번 관정 파는 기술로 돈 좀 벌었다는 분 이야기를 했는데, 농사지으면서 만난 분 중엔 자신의 몸으로 터득한 기술로 넉넉한 생활을 하는 분이 여럿 있었다. 컨테이너 위로 지붕을 올릴 때 만난 기술자는 자신을 내장 목수라 소개했다. 나이는 당시 67세. 용인에 친구 여섯 명이 함께 살 집도 지어두었고 노후 준비도 말끔하게 끝났는데, 자신의 뒤를 이어 일할 젊은이를 못 구해 아직도 현장에 남아 있다고 했다. 일당이 웬만한 남자의 2.5배나 되는데, 이 알짜배기 기술을 배울 생각조차 안 하는 젊은이들이 원망스럽단다.
우리 농장에 방조망 공사를 해준 기술자는 4명의 외국인 노동자와 팀을 이뤄 전국을 다니며 작업하는데, 특히 봄이면 지나가던 고양이라도 불러다 일 시키고 싶을 만큼 바쁘다고 했다. “이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인데 배우려는 한국 놈이 눈을 씻고 찾아도 없어. 외국인들에게 유출되는가 싶어 마음이 안 좋다”고 했다. “몸 움직이는 만큼 돈이 들어오는 정직한 일인데, 일자리 없다고 엄살떠는 놈들 보면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하신다.

사내 못지않은 여장부들
마을에서 10여 분 걸어가는 곳에 행복도시(행정중심복합도시) 6-5 생활권 공사가 한창이던 시절, 공사판이 벌어지는 곳에서 함바집(건설 현장 식당의 일본어 표현)을 차려 돈을 쓸어 담았다는 여사장을 만났다. 안 가본 건설 현장이 없다는 여사장이 마을에 식당을 차리고 간판을 내걸었다. 이름도 거창한 ‘백억뷔페’! 처음 문 열었을 때는 1인분에 단돈 5000원이었다.
이곳에선 얼굴을 두어 번만 마주치면 어디서 온 뉘신지 통성명하고 곧바로 단골손님이 되곤 한다. 백억뷔페도 두 번째 찾아간 날부터 단골이 되었는데, 여사장 인심이 얼마나 후하던지 아침에 담근 겉절이라며 한 보시기 싸주고, 누룽지가 알맞게 눌었다며 커다란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주고, 뒷밭에서 딴 상추에 가지에 토마토를 한 보따리씩 안겨주곤 했다.
엄청 부지런한 데다 체력도 무척 강해 보이는 여사장은 하루 장사를 위해 매일 새벽 4시부터 준비를 시작하는데, 200명분 차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 ‘밥장사 해서 이문을 남기려면 싼값에 신선한 식재료 구하는 것이 일등 노하우’인지라, 채소 일부는 친정어머니가 직접 밭에서 기른 것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수입산을 쓴다고 했다. 메뉴는 밥과 국 그리고 묵은지에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기본으로 하고, 반찬 10여 가지를 매 끼니 바꿔 차리는데 머릿속에 최소 100가지 넘는 메뉴가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건설 현장 인부들이 한차례 다녀간 후 손님이 뜸해진 시간이면 백억뷔페에서 그녀가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에 귀가 솔깃해지곤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복스런 얼굴의 여사장. “남자들 속을 무진장 애타게 하는 스타일”이라는 그녀는 “여자 나이는 비밀”이라며 끝내 밝히지 않았다. 당시는 세 번째 남편과 동거 중이었는데, 그는 당산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남자에 관해서는 도가 텄다는 여사장이 철저히 고수하는 원칙이 하나 있는데, 남자 만나 정들어 함께 살게 되더라도 혼인신고는 절대 안 한다고 했다. 대신 결혼식만큼은 세 번 모두 드레스 입고 제대로 격식 갖추어 올렸다고 했다. 친정어머니께서 “우리 딸년 시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은 혼인신고 안 하고 자식새끼 안 퍼질러놓은 것”이라 했다고 하니 모전여전인 듯하다.
세 번째 남편 이야기를 들은 지 1년쯤 지나, 여사장은 읍내에서 주류(酒類) 중간도매상을 한다는 남자와 네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백억뷔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는 어딘가로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백억뷔페 여사장님 못지않게 서울 촌사람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준 또 한 명의 여사장이 있다. 블루베리 농장에 점적관수 시설을 할 때 안면을 튼 점순 사장님이 그 주인공이다. 점순 사장님네 농자재점은 당산마을에서 차로 5분 거리의 번암사거리 목 좋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물탱크부터 온갖 굵기의 고무관, 색깔과 재료도 다양한 호스, 이름 외우기도 벅찰 만큼 다채로운 종류의 부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점순 사장님이 직접 10톤짜리 물탱크를 트럭에 싣고 와서 농장에 부려놓던 그날부터, 나는 점순 사장님의 찐팬이 됐다. 서울 촌사람 눈에 농자재에 관한 한 만능 박사였던 그이 일솜씨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경이로웠다. ‘여자라고 못 할 일이 어디 있어’ 머릿속으로만 맴돌던 생각인데, ‘웬만한 남자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일솜씨가 빼어난 여자’를 눈앞에서 보니 감동이 밀려올 정도였다.
점순 사장님은 그 많은 정보를 어떻게 입력해놓았는지 척하면 척, 요술램프에서 나온 지니처럼 도움을 요청하면 즉시 해결해줬다. 10년 가까이 신세를 톡톡히 졌는데, 갑자기 농자재점이 문을 닫게 됐다. 세종시에서 청주공항으로 이어지는 도로 확장공사 때문에 사장님네 터가 수용됐기 때문이다. 사장님네는 500평(약 1652㎡) 넘는 규모에다 번암사거리에서 청주 방향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었기에, ‘보상액이 엄청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농자재점이 머지않아 문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날, 점순 사장님은 마침 한산한 틈을 타 “커피믹스나 한잔하고 가시라”며 붙잡더니 솔솔 자신의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남편과는 사별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를 떠나보낸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됐으니 남편 간 지도 세월이 꽤 흘렀다며 쓸쓸히 웃음지었다.
한데 점순 사장님 남편이 “인물 하나는 끝내주는 남자”였단다. 선보러 간 자리에서 남편을 처음 본 순간, ‘이 남자 나 혼자 차지하기는 글렀구먼’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 말이다. ‘이렇게 잘난 남자 혼자 차지하려는 건 과한 욕심이지’ 싶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 후 남편은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많은 여자의 남편 노릇’을 했더란다.
결혼 후에도 농자재점 운영은 오롯이 점순 사장님 몫이었는데, 단골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조치원 돈을 긁어모으는구먼. 그 돈 죽기 전에 워찌 다 쓰고 가려나” 놀릴 만큼 잘 굴러간 덕분에, 돈 버는 재미 하나로 족하다 생각하며 살아냈다고 했다. 남편 재미는 어차피 내 몫이 아니었으니 서운할 것도 서러울 일도 없었다고도 했다.
남편 죽고 혼자되니 꼭 한 가지 불편한 일이 생겼단다. ‘이놈 저놈 와서 집적대는 통’에 귀찮고 성가시기가 여름날 모기보다 더했단다. 10톤짜리 물탱크쯤은 가볍게 부리는 천하장사에, 아무리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무안하지 않게 흔쾌히 가르쳐주던 점순 사장님. 호탕한 웃음을 뒤로하고 홀연히 떠난 후 당산마을 그 누구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
초보 농사꾼 시절 이웃 아줌마들이 슬그머니 다가와선 “언니는 농장에서 얼마 받고 일하는겨?” 귓속말로 묻곤 했다. 지금도 동네 비밀 이야기를 엿듣는 호사를 누리는 건, 교수 냄새 안 풍기고 아줌마들 만나면 무조건 90도로 인사한 덕분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