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재·빛, 보이지 않으면 위험하다

입력 2026-03-04 06:00

[어디서 살고 싶은가] 이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AI 생성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

노인의 낙상 사고는 병원이나 외부가 아니라 대부분 집 안에서 일어난다. 문턱 하나, 미끄러운 바닥, 어두운 조명처럼 사소해 보이는 설계 요소들이 노년기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된다. 문제는 단순한 안전사고에 그치지 않는다. 한 번의 낙상은 이동을 제한하고, 외출을 줄이며, 결국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존엄과 자립을 무너뜨린다.

도서 ‘나이 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를 통해 노년 주거의 방향을 꾸준히 제시해온 김경인 경관디자인 공유 대표는 “노년기의 집은 돌봄을 받는 공간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상적인 주거 환경에서 발생하는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생활 방식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익숙한 공간에서 계속 살아가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를 실현하려면, 주거 설계 자체를 노년의 몸과 감각에 맞게 다시 설계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노인의 사고는 왜 ‘집’에서 가장 많이 일어날까

노년기의 주거 문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안전’이다. 하지만 김경인 대표는 여기에 존엄과 자립을 추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나이 들수록 가장 무서운 건 다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며 “집에서의 작은 불편이 쌓이면 결국 삶 전체의 주도권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년기 사고의 상당수는 외부가 아니라 집 안에서 발생한다. 욕실, 문턱, 복도, 조명 등 젊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요소들이 나이가 들면서 갑자기 ‘위험 요소’로 돌변한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집이 늙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데 집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낙상을 전 세계 노인의 손상 사망 원인 중 두 번째로 큰 요인으로 지목하며 “65세 이상 고령층에서 낙상은 가장 흔한 손상 원인이며, 대부분 일상 공간에서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역시 65세 이상 고령자 낙상의 상당 부분이 가정 내에서 발생한다고 밝히고 있다. 국내에서도 질병관리청 보도에 따르면 노인 손상 사고 중 낙상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문제는 이런 낙상은 단순한 사고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번의 낙상은 이동 능력을 떨어뜨려 결국 방 한 칸에 머무는 생활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자립이 서서히 무너진다. 그래서 노년 주거에서는 사고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선택권을 지키기 위해 설계가 중요하다.

김경인 대표의 도서 ‘나이 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가 던지는 질문 역시 여기에 있다. 노년의 집은 ‘돌봄을 받는 장소’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 바로 에이징 인 플레이스, ‘익숙한 곳에서 나이 들기’다.


낙상을 부르는 문턱·단차·동선

(도서 '나이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
(도서 '나이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

노인 낙상 사고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 원인을 따라가 보면 대부분 설계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표적인 것이 문턱과 단차다.

“문턱은 젊은 사람에게는 경계일 뿐이지만, 노인에게는 장애물입니다. 시야가 낮아지고 발을 드는 높이가 달라지면, 문턱은 보이지 않는 함정이 됩니다.”

특히 집 안 동선이 문제다. 화장실로 가는 길, 침대에서 거실로 나오는 길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 오가는 공간이 가장 위험하다. 이 동선에 단차가 있거나, 바닥 마감이 미끄럽거나, 조명이 어두우면 사고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기존 주택을 리모델링할 경우 우선순위를 정해 바꾸라고 김 대표는 조언했다. 첫째는 문턱 제거, 둘째는 욕실과 침실 주변 안전 보강, 셋째는 야간 조명이다. “이 세 가지만 제대로 바꿔도 집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된다”고 확신했다.

전원주택이나 단독주택의 경우는 더 조심해야 한다. 자연 친화적인 환경이 장점이지만, 외부 계단이나 경사진 진입로, 고르지 않은 마당은 노년기에 치명적인 위험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후를 대비해 지은 집이 오히려 요양시설 입소를 앞당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빛도 설계, 색은 정보

(도서 '나이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
(도서 '나이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

김경인 대표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부분은 색채와 소재, 그리고 빛이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문제가 아니라 감각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노년기에는 색을 구분하는 능력과 명암 대비 인식이 떨어져 바닥과 벽의 경계가 흐릿하면 공간 인지가 어려워지고, 이는 곧 넘어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색은 장식이 아니라 정보다. ‘여기까지가 바닥이고, 여기부터가 벽이다’를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노년 주거에서는 통일감보다 구분감이 중요하다. 바닥과 벽, 문과 손잡이, 계단의 시작과 끝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지나치게 유행을 따른 톤온톤 인테리어는 오히려 위험하다.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김 대표는 책과 인터뷰에서 차갑고 단단한 소재는 불쾌감을 유발하고 심리적인 긴장감을 높일 수 있는 반면, 목재나 천처럼 촉감이 부드럽고 따뜻한 소재는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고 전했다. 이는 미끄럼 방지뿐 아니라 심리적 안정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경건축학과 바이오필릭 디자인 연구에서는 목재 등 자연 소재를 실내 공간에 활용할 때 심박수와 심박 변이도 안정,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감소 등 스트레스 완화와 관련된 생리적 변화가 나타난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채광도 빼놓을 수 없다. 햇빛은 노년기 우울감을 줄이고 생활 리듬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과도한 직사광선이나 눈부심은 오히려 사고 위험을 높이기 때문에 창의 크기, 위치, 빛을 조절하는 장치까지 포함해 빛 역시 설계의 일부로 다뤄야 한다.

또한 야간 낙상이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나므로 조명 설계도 중요하다. 잠에서 깨어 화장실로 이동하는 짧은 거리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갑자기 밝은 천장등은 눈부심을 유발하고 시야 적응을 방해한다. 대신 벽 하단이나 바닥 가까이에 설치하는 풋라이트(간접 바닥 조명)는 이동 경로를 부드럽게 밝혀준다. 김 대표는 “빛의 위치도 설계 요소”라고 단언했다. 밝기보다 방향과 높이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유니버설 디자인, 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익숙한 곳에서 나이 들기’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유니버설 디자인이다. 이는 특정 연령층을 위한 특수 설계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불편하지 않은 환경을 만드는 원칙이다.

문턱이 없는 집은 노인뿐 아니라 아이와 휠체어 사용자, 짐을 든 사람 모두에게 편하다. 미끄럽지 않은 바닥, 잘 보이는 색 대비, 충분한 조명도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노인을 기준으로 한 설계는 모두에게 좋은 집이 된다.

김 대표는 노년 주거를 “‘마지막 단계의 공간’으로 보지 말라”며 “집은 돌봄의 대상이 되기 전에 삶의 무대여야 한다. 스스로 밥을 해 먹고, 창밖을 보고, 누군가를 맞이할 수 있어야 존엄이 지켜진다”고 거듭 강조했다.

고령사회에서 주거는 부동산의 문제에서 나아가 우리는 집에서 더 오래, 더 안전하게, 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설계의 문제다. ‘나이 들어도 이 집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설계는 이제 분명한 답을 요구받고 있다.


▲그래픽=이은숙 기자ㆍAI생성
▲그래픽=이은숙 기자ㆍAI생성



도움말 김경인 신경건축학자, ‘경관디자인 공유’ 대표

신경건축학을 기반으로 노인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공간 디자인을 위해 노력하는 전문가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서울시 강동구 도시경관 총괄기획가를 역임하며 초고령사회를 위한 공간 혁신에 기여했다. 현재는 ‘경관디자인 공유’를 운영하며, 나이 들어도 편안하고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 디자인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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