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탁, 블루오션을 넘어 넥스트에이징 인프라로

입력 2026-03-09 10:29 수정 2026-03-09 10:30

초고령사회의 재무 자기결정권, 시스템이 받쳐줘야 한다

(어도비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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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치매 시대, '치매머니'가 경제의 뇌관이 된다

한국은 이미 초고령사회다. 2050년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40%를 넘어선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숫자가 있다. 65세 이상 치매 환자가 보유한 자산, 이른바 '치매머니'가 2023년 기준 약 170조 원이다. GDP의 7%다. 2050년에는 488조 원으로 3배 가까이 불어날 전망이다.

이 자산 대부분은 부동산과 금융자산에 묶여 있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면 관리도, 처분도, 상속도 멈춘다. '죽은 돈'이 된다. 노인 한 명의 재산 문제가 가족 전체를 법정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현실이 됐다. 노인학대 사건 상당수가 재산 분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1인 가구는 이미 전체의 36.1%다. 자녀도, 돌봐 줄 가족도 없는 노인이 급증하고 있다. 이들이 스스로 노후 재산을 지키고 의미 있게 남길 방법이 필요하다. 신탁이 주목받는 이유다.

신탁은 '상품'이 아니라 '재무 자기결정권'의 장치다

신탁법 제1조는 명확하다. 위탁자가 재산을 수탁자에게 이전하고, 수탁자는 이를 수익자 또는 특정 목적을 위해 관리·처분하는 법률관계다. 핵심은 '내가 정한 방식대로' 재산이 관리된다는 점이다. 치매가 와도, 내가 떠난 뒤에도.

유언대용신탁은 사망 후 배우자에게, 그다음 자녀에게 재산을 순차 이전하도록 설계할 수 있다. 장애 자녀에게는 생활비와 의료비만 지급하는 조건도 달 수 있다. 반려동물 신탁도 미국, 일본, 영국에서는 일반화돼 있다. 레오나 헴슬리는 반려견에게 1,200만 달러를, 칼 라거펠트는 반려묘를 위해 120만 파운드 상당의 신탁을 남겼다.

신탁은 단순한 금융 상품이 아니다. 삶의 마무리를 설계하는 도구다. 재산관리 계획이자 돌봄 대비책이며, 갈등 예방 장치이고, 사회 환원의 통로다. 시장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시니어 비즈니스 블루오션, 그러나 현실은 '파편화'다

신탁이 블루오션이라고 수 년째 외쳐왔다. 그러나 현실은 가능성에 한참 못 미친다. 신탁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법률, 금융, 복지, 의료, 기술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각 분야는 여전히 저마다의 언어에 갇혀 있다. 금융기관은 상품을 팔고, 법무법인은 계약서를 쓰고, 복지사는 돌봄을 연결하지만 서로 이어지기 어렵다.

제도의 한계도 분명하다. 대부분의 치매 신탁은 예·적금 등 현금성 자산 위주다. 주택담보대출이 설정된 부동산은 신탁에 편입하기 어렵다. 부동산, 연금, 보험금이 신탁 밖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부자들의 상속 도구'라는 인식도 여전하다. 복잡한 구조와 비용이 중산층의 접근을 막는다.

유류분 문제도 현실적 리스크다. 유류분 제도의 합헌성 논란과 법 개정 흐름 속에서, 신탁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적 정교화가 과제로 남아 있다.

통합적 접근과 넥스트에이징 인프라 구축이 답이다

신탁이 초고령사회의 진정한 인프라가 되려면 '상품'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통합 서비스 체계다. 법률, 세무, 복지, 의료, 자산관리가 하나의 창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의 언어로 움직이는 한 시니어는 어디서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른다. 신탁 전문 플랫폼, 어드바이저 자격 제도, 공공-민간 협력 거점이 필요하다.

둘째, 제도의 포용 범위 확장이다. 부동산, 연금, 보험금, 디지털 자산까지 신탁에 편입할 수 있도록 법과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알고리즘을 활용한 'AI 신탁관리인' 개념이 검토되고 있다.

셋째, 재무 리터러시 교육이다. 신탁아카데미 같은 체계적 교육이 필요하다. 신탁은 부자만의 선택이 아니다. 인지가 온전할 때 스스로 삶을 설계하는 모든 이의 권리다. 중산층도, 1인 가구도, 무자녀 세대도 접근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유산은 갈등의 씨앗이 아니라 사회의 기반이 될 수 있다

베이비붐 세대가 축적한 거대한 자산이 다음 세대로 이동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 부의 흐름이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따라 가족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사회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 기부신탁, 공익신탁, ESG 신탁은 이미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탁은 재산에 관한 마지막 자기결정권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떠난 뒤에도 내 뜻대로.' 이 원칙이 제도로 뒷받침되고, 전문가로 구현되고, 사회 인프라로 정착할 때 초고령사회는 위기가 아닌 설계 가능한 미래가 된다. 법과 금융과 복지가 하나의 언어로 말하는 넥스트에이징 인프라, 지금 시작해야 한다.

▲책 '현명한 사람은 왜 신탁을 선택할까' 표지.
▲책 '현명한 사람은 왜 신탁을 선택할까' 표지.

필자 소개

최학희는 시니어라이프비즈니스 대표이자 시니어 비즈니스 연구자다.

26년간 고령화 사회의 비즈니스·정책 이슈를 연구했으며 '시니어트렌드' 시리즈, '시니어 레거시'를 저술했다. 신간 '현명한 사람은 왜 신탁을 선택할까(2026)'는 AI와 전문가그룹의 협업으로 법률·금융·복지·의료를 아우른 신탁 입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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