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8

영영

입력 2026-07-18 06:00

[‘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 행복상]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푹푹.

빗물을 머금은 산길이 자꾸만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겨우 한 발짝 빠져나오면 다음 한 발짝은 더 무거워졌다. 젖 먹던 힘까지 내야 하거늘 젖을 먹던 기억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금니와 입술을 번갈아 고쳐 깨물며 바동거렸지만 점차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쯧쯧. 저럴까비 가스나는 상여꾼 못 한다 했거늘….”

“그러니께 상놈의 집도 아니고 소복 입은 여자가 어디 상여를 들어! 상여를!”

“에구머니. 저러다 우리 숙모 묏자리까지 가시지도 못하겄네!”

무명천을 돌돌 말아 쥔 나의 손엔 피조차 통하지 않았거늘 그들의 핀잔은 생생히 내 귀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리 힘들 줄 몰랐다며 대꾸를 할 수도, 그렇다고 내 탓이오 하며 울 수는 더 없는 노릇이었다. 20년 만에 나타나 상주임을 자처하던 사촌 오라버니에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얻어낸 자리였다.

상여는 기우뚱거렸고 상여의 꼭두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갔다면 모를까, 어떤 연유로라도 할매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할매!’, ‘울 할매!’, ‘내 할매….’

가슴속으로 수백 번, 수천 번 그녀를 부르짖으며 온몸을 곧추세웠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일꾼이 말끔히 닦아놓은 흙 속에 할매를 누이고서야 나는 쓰러졌다.

벌벌벌 떨리는 사지를 부여잡으며 한 삽의 흙과 한 잔의 술을 겨우 떠놓았다.br>


꼽추, 곱사등이.

태어나 처음으로 깨우친 단어들이었다.

할매의 왜소한 몸보다 키가 크던 할매의 등은 그녀의 이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니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어도 그녀의 곱사등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나의 별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꼽추할매의 손녀, 괴물할매 손주, 뭐 그쯤 됐던 것 같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등처럼 기구했다. 술꾼 남편을 심장마비로 보내고 과부가 됐고, 큰아들을 교통사고로 보낸 자식을 앞세운 어미가 됐다.

남은 유일한 피붙이였던 막내아들은 불현듯 어느 날 갓난쟁이 손녀 하나를 남겨둔 채 사라졌다. 그러니 어찌 그녀의 손녀가 철이 더디 날 수 있었을까.

유치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집에서 동화책을 읽으며 조용히 놀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설거지며 방 청소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가 파하면 밭에 나가 고추도 따고 닭장의 닭들에게 모이도 주었다. 고구마를 찌든 국수를 삶아내든 해서 할매가 계신 논으로 새참을 이고 나르기도 했다.

그런 나를 모두가 칭찬해주셨지만 할매만은 염려스러워하셨다.

“주야! 니는 아즉 얼라다. 그니까 뭘 할라고 하지 말거래이. 학교 파하면 친구들과 놀러 댕기고 할매가 쪼메라도 주는 돈으로 떡볶이도 사 먹고 하면 된데이. 무시든 다 때가 있는 벱이다. 니는 얼라니까 놀고 핵교 공부만 따라가면 된데이. 알긌나?”

마을에서 가장 일찍 말문이 텄고 걸음마도 제일 빨랐다던 나. 반찬 투정 따위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며 할매의 은행 일까지도 너끈히 잘 돕던, 애어른이란 말이 꼭 칭찬만은 아니라는 것도 너무나 일찍 깨우쳤던 나.

그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버려진 나만의 생존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려주는 이 없으니 스스로 터득해야만 했던….

“느그 할매가 니를 어찌 키운주 아노? 등이 굽어 니를 업지를 못하니께 니 갓난쟁이 때는 포대기에 싸서 니를 몸 앞으로 안고 다니다가 낸중에는 니가 커서 그것도 안 되니께 고무 대야에 니를 넣고 끌고 댕겼다 아니가? 대야에 구멍을 뚫어 줄을 이어 갖고는 손으로 입으로 질질 끌고 댕겼데이. 그래 갖고 농사짓고 살림 살고 다 했다 아니가? 니는 니 할매한티 참말로 효도해야 한데이! 지 속으로 낳은 자슥도 그리는 못 키운데이. 하모. 하모!”

나를 볼 때마다 이어지던 동네 할머님들의 당부에 기억의 말미에 존재하는 시절을 떠올려보고는 했다. 할매의 고생스런 삶을 더듬을 순 없었지만 고무 대야의 나쁘지 않던 촉감만은 또렷했다. 마당 장독대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빨간 고무 대야는 나의 포대기이자 유모차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우등생이었다. 공부를 잘해야만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야만 할머니를 호강시켜줄 수 있으니 나는 잠자는 것도 잊은 채 공부했다. 하지만 조금씩 성적은 떨어졌고 명문대에 진학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럴 바엔 돈을 하루라도 빨리 벌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주위의 만류에도 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3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전교생 중에서도 가장 먼저 취업을 했다.

나의 희망은 할매의 편안함 그뿐이었으니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목표를 향해 대학교에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배 아파하는 대신 조금의 돈이나마 따박따박 찍혀가는 통장을 들여다보았다.

야근이며 특근 닥치는 대로 일하는 동안 내 몸은 축났지만 통장엔 살이 차올랐다.

이제는 진짜 꿈을 이룰 순간이었다.

읍내의 정형외과 몇 군데를 수소문해보고 이장님을 찾아뵈었다.

“니가 느그 할매 수술을 시켜준다고? 근디 돈이 밸로 안 든다고 하란 말이제? 그런 그짓말은 을매든지 할 수 있데이. 느그 할매가 손녀 복은 있나 보데이. 쇠뿔도 당긴 김에 뺀다고 퍼뜩 집에 가제이.”

이장님을 뒤따라가는 내내 내 심장은 쿵쿵 방망이질 쳤다.

부디, 제발 할매가 이장님의 청만은 들어주시기를.

이장님은 방 안으로 들어가셨고, 나는 문지방에 살금 걸터앉아 두 분의 대화를 엿들었다.

“음, 리에서 새로 하는 일이 있는디. 음… 아픈 할매들을 고쳐준다 아닙니꺼. 의사 선생님들도 도와준다 카고 나라에서 음… 음… 지원금인가 뭐신가도 쪼매 나온다니께 병원비 얼마 안 들지 싶네예. 우야튼 지랑 병원 한번 가보십시데이.”

다소 어색했던 이장님의 연기를 다행히 할매는 정말로 받아들이신 것 같았다.

“이장님요! 이 나이에 뭐 할라꼬요? 다른 얼라들은 어매들이 할매들이 다 업어 키우는데 우리 주야는 어매도 없고 할매가 업어주지도 못하니 그기 너무 딱해 내도 병원 가봤다 아닙니꺼. 울 주야 업을 수 있을 맨치로 등이 쭉 피진다 카몬 쌩빚을 내서라도 핐을 깁니더. 쪼매는 피져도 얼라를 업는 건 안 된다 카대요. 내 몸뚱이 땜시 우리 주야를 못 업어 키운 게 여즉도 한이 된다 안 카요.”

이장님은 그래도 수술을 해 조금이나마 편히 사시는 게 좋지 않겠냐며 할매를 설득했지만 할매는 완강하셨다.

“수술하다 내 죽으면 저 아는 고아가 되뿐다 아닙니꺼? 할매 고생 들 시키겄다고 저 어린 게 공장에서 미싱 돌리며 저리 퍽퍽하게 사는디 저거 짝이라도 지어주고 죽어야 할 거 아닙니꺼? 고마 내는 됐고. 혹시 다리가 기어 들어간 거는 고칠 수 있는가 한번 물어봐 주소. 냄들마냥 업빠 한번 못 해주고 키웠는디 가스나 다리가 안짝으로 휘어뿟다 아입니꺼? 저거 시집가기 전에는 꼭 고쳐줘야 할 낀디….”

더 이상은 참을 요량이 없어 방문을 열고 들어가 할매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내가 밖에 있는 것을 몰랐던 할매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가시나가 도둑괭이마냥 그걸 듣고 있었나? 와 우노? 우지 마라…” 하시고는 당신도 이내 내 품에서 우셨다.

같이 눈시울을 붉히시던 이장님은 헛기침을 하시며 나가셨고, 남루한 방 안엔 언제나처럼 할매와 나 단둘만 남았다.

“할매는 괜찮데이. 꼽추라서 귀 따가운 날은 많았지만서도 사는 데는 별문제는 없었데이. 내는 니가 더 안됐는기라. 내는 그래도 울 엄니가 울 아부지가 업어준 기억이 난다 아이가. 죽을 때가 돼서 그른지 자꾸만 생각이 난다 아이가…. 그른데 니는 누가 한 번도 업어준 적도 없다 아이가….”

다시금 눈물을 떨구시는 할매를 꼭 끌어안았다. 할매의 등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는 눈물을 한참 토해내며 결심했다. 당신의 굽고 굽은 등이 아닌 손녀의 조금 휜 다리를 더 안타까워하시던 울 할매를 위해 기를 쓰고 더 열심히 살아가겠노라고.

공장에선 성실함을 인정받아 월급도 직급도 올랐다. 반장 후보에 올라도 부러 포기할 만큼 가난했던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울 할매와 나. 두 식구의 먹성, 입성 정도는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았다. 가끔씩은 여행도 다닐 수 있었고, 할매의 틀니도 해드릴 수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사진을 흔들며, 새로 한 틀니를 입까지 크게 벌리시며 동네 할머니들에게 자랑하시던 할매는 어린아이마냥 즐거워 보이셨다.

일을 하며 야간 대학에 진학했고, 나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착한 남자를 만나 할매 앞에 인사시켰다.

결혼을 앞두고 할매가 오매불망 바라던 다리 수술을 하던 날.

할매는 수술이 아주 잘 되었다는 남편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고 했다.

“이 스방! 내는 이제 죽어도 원이 없는 기라~” 하시며.


결혼을 하고 얼마 후엔 아이도 낳았다. 드디어 나에게도 남들처럼 가정이란 울타리가 생김에 감사해하며 이렇게 할매를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내 꿈도 이뤄진 것은 아닐까 착각했었다.

손녀의 해산구완을 위해 시골에서 올라오신 할매는 한시도 쉴 틈이 없으셨다.

불편한 몸으로도 내내 증손자를 안고 계시는 것이, 증손자가 이뻐서만이 아닌 당신의 손녀를 한숨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 한술이라도 더 먹이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요람과 유모차를 보며 세상 참말로 좋아졌다고 하시던 할매에게 나는 빨간 고무 대야가 더 좋았다고 결국엔 말하지 못했다.

미역국과 돼지족발을 번갈아 끓여내시느라 하루 종일 가스레인지 앞을 서성이던 할매.

핏덩이 손녀를 한 아이의 엄마로 길러낸 할매의 등은 점점 더 굽어 낫 같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뼈마디를 칼로 찌르는 것 같고, 누군가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 같다는 할매의 통증은 굽은 등 때문에 더욱 심해진 상태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허나 곱사등이 할매에게 손녀는 자신의 등보다 더한 삶의 무게였음을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야 알음했다.

그녀의 젊음을, 그녀의 눈물을, 그녀의 아픔을 내가 앗아 먹고 자랐음을 완벽하게 깨달아버렸을 때서야 그녀의 등은 더 이상 굽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이 살아 숨 쉬는 것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할매는 초기 치매 진단을 받은 후 스스로 요양병원을 알아보셨다고 했다. 병원과 입원 날짜까지 정해놓고서야 손녀에게 당신의 상태를 말씀하시던 할매. “안 된다고! 손녀가 이리 버젓이 있는데 할매가 왜 시설에 가냐고! 내가 모실 거라고! 나랑 같이 살자고!” 손녀의 울부짖음에도 할매는 단호하셨다.

“내가 니한테 짐 될 바에는 죽는 기 낫다. 내 살고 싶데이. 할매가 살고 싶어서 병원에 가는 기다. 그러니께 우지 마라….”

할머니는 치매로 10년 넘게 요양병원 생활을 하셨다.

나는 자주 병원을 찾았다. 어느 날엔 어린 여자아이가, 어느 계절엔 중년의 아줌마가, 또 가끔은 나의 할매가 그곳에 있었다. 할매의 굽은 등이 아니었다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할매는 낯설어갔다. 소리를 지르고 때리고 던지고, 그러다 끝내는 둘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할매는 더 이상 우리 할매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 할매였다. 점점 기억을 놓아가는 할매를,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는 할매를 업고 가끔 산책을 했다. 할매를 업고 있으면 그 옛날처럼 할매에게 안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할매의 가슴은 늘 나의 등보다 따뜻했다.


호상이라 했다.

구순을 넘긴 고령의 연세에 자신보다 더 아끼던 손녀를 보고 눈을 감으셨으니 다들 그만하면 되었다 했다.

그 누구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곱사등이 구순 할매의 장례식.

손녀가 우는 게 제일 싫다던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라 나도 끝끝내 눈물을 참아냈다.

다만 업어 키우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할매의 말은 틀렸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당신에게 업혀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업혀본 적조차 없다는 내가, 당신이 아니었다면 어찌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당신이 나를 업어주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따스한 체온과 따뜻한 감사를 배우며 살아올 수 있었을까. 당신께 업혀 있지 않았더라면 버림받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먼저 느껴야만 했던 가시밭길 같았던 모진 세월을 어찌 헤쳐나올 수 있었을까.

당신의 굽은 등이 없었다면 내 어찌.

그러니 한 없이 편히 가시라, 나는 할매께 마지막 절을 올리며 읊조렸다.


덜 늙은 나의 할매가 살아가기 위해 나물을 캐던, 더할 나위 없이 어렸던 내가 고무 대야에서 놀던 동네 뒷산까지.

나무 상자 속에서 쉬고 계실 할매를 나의 두 다리로 모시고 올라가는 길.

할매와 나. 우리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울 할매에게 업혀 살아갈 것이고, 나의 할매는 내 품에서 영영 죽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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