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설계의 핵심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는 제안이 미국에서 나왔다. 지금까지는 ‘은퇴 후 돈이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를 계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로는 ‘내가 원하는 삶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돈과 주변의 지원체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설계사 대상 고령자 돌봄·생애말기 설계 플랫폼 기업 비퀘스트(bQuest)는 지난 13일 '은퇴설계는 망가졌다(Retirement Planning Is Broken)'는 제목의 백서를 공개하고 기존 은퇴설계 방식이 장수시대의 노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비퀘스트는 기존 은퇴설계가 투자수익률과 물가상승률, 인출률, 세금 등을 계산해 자산이 일정 연령까지 유지될 가능성을 추정하는 데는 정교해졌지만, 실제 노후생활에서 발생하는 변화에는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자산 지키기에 치우친 은퇴설계, 한계 가져
백서는 이 문제가 지금 특히 중요해진 배경으로 인구구조 변화를 든다. 2030년이면 미국 베이비부머 세대 전원, 약 7300만 명이 65세 이상이 되고 미국인 5명 중 1명이 은퇴 연령에 들어선다. 재무설계 업계가 수십 년간 자산을 모으고 지키는 일에는 정교해졌지만, 정작 그 세대가 모은 자산을 '쓰며 사는' 국면을 돕는 준비는 부족하다고 백서는 지적한다.
백서가 지적한 첫 번째 문제는 '돈을 너무 적게 쓰는 노후'다. 자산이 부족해질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은퇴자가 여행이나 가족 지원, 기부 등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돈을 써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백서에 참여한 러스 힐 전 할버트 하그로브 최고경영자는 일부 은퇴자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은퇴할 때보다 더 많은 자산을 남긴 채 생을 마치는 현상을 '소비의 역설'이라고 설명했다. 자산 고갈을 막기 위한 계획이 오히려 자산을 활용해 삶을 누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다.
두 번째는 의료와 장기요양이다. 의료·돌봄 비용은 식비나 주거비처럼 매달 일정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재가돌봄이나 주택 개조, 고령자 주거시설, 치매 돌봄 또는 24시간 지원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배우자나 자녀가 돌봄을 맡으면서 일을 줄이거나 직장을 떠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백서는 이 같은 비용이 발생 시점을 예측하기 어렵고 규모도 커질 수 있음에도 상당수 은퇴설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예상 지출 항목으로 처리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백서는 기존 은퇴설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개념으로 '장수설계'를 제시했다. 기존 은퇴설계가 "돈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가"를 묻는다면 장수설계는 "더 긴 인생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 자산과 지원체계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를 묻는다. 투자설계에서 재무설계, 상속설계와 세무설계로 영역이 확장돼 온 것처럼 고령화 시대에는 금융설계의 범위가 다시 확대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금융자산뿐 아니라 어디에서 노후를 보낼 것인지, 돌봄이 필요할 때 누가 도울 것인지, 배우자가 먼저 돌봄을 필요로 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의 판단능력이 떨어졌을 때 누가 대신 결정할 것인지 등이 포함된다. 가족이 본인의 의사를 알고 있는지, 법률적·실무적 준비는 돼 있는지, 자녀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도 은퇴 전에 함께 검토해야 할 변수다. 백서는 돌봄과 주거, 가족의 준비 상태, 인지기능 저하 위험, 법적 준비와 유산을 재무계획 밖에서 발생하는 돌발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에 포함해야 할 요소로 본다.
연금·자산만으로 부족… 주거·돌봄·가족까지 준비해야
이 같은 시각은 노후 준비를 하고 있는 국내 중장년층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은퇴자금 목표액을 정하고 연금과 금융자산을 마련하는 것만으로 노후설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노후에 살고 싶은 장소와 주거형태, 건강이 나빠졌을 때 이용할 돌봄서비스, 가족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 의사결정을 대신할 사람 등을 미리 정해야 실제 생활과 자산계획이 연결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얼마를 남길 것인가'와 함께 '얼마를 써도 되는가'를 설계하는 일이다. 의료·돌봄 등 큰 위험에 대비할 자원을 확보한 뒤 남은 자산은 건강할 때 여행이나 취미, 가족과의 경험 등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백서의 문제의식이다. 자산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 성공적인 은퇴의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 필요한 위험에 대비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생활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 은퇴설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응하는 체계도 필요하다. 백서는 이를 '돌봄 연계'라고 설명한다. 장수설계가 위기가 생기기 전에 위험을 파악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돌봄 연계는 치매 진단이나 퇴원, 배우자의 건강 악화처럼 실제 변화가 발생했을 때 필요한 의료·돌봄·주거·법률 전문가와 가족을 연결하고 다음 행동을 결정하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백서는 성공적인 은퇴설계의 기준을 단순히 ‘자산이 생애 말까지 남아 있는가’에 둘 것이 아니라, 그 자산을 활용해 원하는 주거와 돌봄, 가족관계와 생활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관점은 “내 돈이 충분히 오래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내 자산과 주변 사람, 지원체계가 앞으로 남은 모든 시간 동안 내가 원하는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의 전환으로 요약된다. 장수시대의 은퇴설계가 자산을 ‘지키는 기술’에서 삶을 ‘지속하는 설계’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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