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만이라는 5월의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물놀이장은 여름철 같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어릴 적에는 집 앞 논에서 물놀이하고, 밭에서는 수박·참외·오이를 따먹으면서 놀았다. 배가 고프면 냅다 집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평상에 앉으신 할아버님은 새참을 막 드시는 때가 많았다. “어서 오너라. 너는 먹을 복이 참 많구나!” 허허 웃으시면서 먼저 손자의 입안을 가득 채워주곤 하셨다. 거의 매일이 평온하게 지나갔다.
어느 날 이웃마을로 놀러가서 물레방아를 처음 보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물을 차고 도는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집에 온 후로도 멋있는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생감에 구멍을 뚫어 막대기를 꽂고 조개껍질을 붙여 장난감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다락 논 물꼬를 터서 물레방아 돌리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관개시설이나 양수기가 없었던 그 시절의 천수답에는 비가 오면 논두렁을 높이 쌓아 모가 완전히 잠기도록 물을 가득 채웠다.
“누가 물을 빼갔느냐?“ 순찰 도시던 할아버님의 불호령이 들렸다. ”누군가 크게 혼나는 모양이구나!“ 나름 해석은 자유였으나 문제가 나에게 있다는 사실은 조금 후에야 깨달았다. 다락 논 한 배미의 물이 다 빠지고 없었다.
“너로구나!” 한 마디 하시고 모른 척 지나가셨다. 엄청 잘못하였음을 직감하고 할아버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뭔가 꾸지람을 들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로 한 번도 말씀이 없으셨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까이 사는 아들·딸 가족과 식사하는 때가 종종 있다. 초등학생 쌍둥이 손녀·손자와 바로 아래 외손자의 떠드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이 귀에 붙는다.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은 손대지 않고 잘 먹지 않는 것은 내가 재고 처리한다. 자식에게도 하지 않았던 버릇이다.
이 대목에서 할아버님의 내리사랑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하였다. 제 부모 이야기는 잘 듣는데 할아버지 말은 도통 농담으로 치부해버린다는 사실도 알았다. 할아버지와 손주는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