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60대 초반이고 옆집아낙은 초등학생을 두고 있는 40대 초반이다. 옆집아낙은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 전업주부다. 낮에는 아이들 학교 보내고는 시간여유가 많아 필자기 집에 없을 때는 우리 집에 와서 커피도 얻어 마시고 수다도 떨려고 놀러 자주 온다. 아내도 딸처럼 살갑게 구는 옆집 아낙을 좋아한다. 오늘만 해도 아내랑 같이 잡채를 만들어 먹은 모양이다. 잡채라는 것을 먹어만 봤지 실제 만들어 보기는 처음이란다. 좋은 요리방법을 배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사인사를 하고 갔다고 아내가 귀띔해준다.
이웃집과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아내와 옆집아낙의 나이가 스무 살이나 난다는 점이다. 옆집 아낙은 아내를 할머니라고 부른다. 초등학생인 아낙의 딸이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엄마인 아낙도 같이 할머니라고 부른다. 아마 언니동생으로 부르기는 너무 나이차이가 많고 선생님, 어머님 하기도 낮 간지러워 아이들이 부르는 호칭에 편승해서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아내는 할머니라는 호칭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나이로 치면 딸과 엄마사이 정도인데 할머니라고 부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렇다하여 딱히 마음에 두고 이렇게 불러달라고 할 뾰족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아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대고만 있다. 가끔씩 남편인 필자에게 ‘왜 할머니라고 부르는지 몰라’ 하고 불편한 속내를 필자에게나마 내비치면서 액땜하듯 우울한 감정을 날려버린다.
필자도 손자뻘 되는 초등학생정도의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귀엽고 기분이 좋지만 아들 또래의 다 큰 중년의 녀석들이 할아버지 또는 어르신이라고 호칭을 해오면 참 난감하기도 하고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번은 마라톤 동호회에서 40대 초반의 신입회원 한사람이 술자리에서 필자에게 예의를 갖춘다고 ‘어르신 제가 술 한 잔 따라 올리겠습니다.’라고 하며 술잔을 받으라고 권했다. ‘좋지’하고 받으려하는데 그 순간 오지랖 넓은 다른 회원이 ‘야 이놈아! 왕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무슨 어르신 어르신하면 형님이 부담스러워 어디 술맛 나겠나! 라고 끼어들었다. 지적당해서 기분 좋은 사람 없다. 신입회원이 무안을 당한 듯 얼굴이 붉어지고 필자도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여서 머쓱해 진적이 있다. 순간 마음속으로 ’젊은 친구들 하고 술자리를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요즘은 60이 넘은 엑티브 시니어들도 도처에서 흔히 만난다. 겉모습만 보고 ‘너 몇 살이야?’ 하다가는 거꾸로 빰 맞을지 모른다. 상대를 부르기는 불러야겠는데 적당한 호칭이 없어 아예 입을 닫아버리거나 호칭을 생략하고 ‘여기요’하면서 말을 하기도 한다. 서울시에서 65세 이상 노인들에 ‘어르신 교통카드’를 발급해 주는데 만약 이 호칭대로 역무원이 필자를 보고 ‘어르신’이라고 부른다면 당황할 것 같다. 갑자기 내가 무슨 신의 반열에 오른 것 같은 우쭐함보다 제사 밥을 받아야 할 귀신이 된 것처럼 우울함을 넘어 섬뜩 할 것 같다.
필자가 속해있는 각종 동호회에서 나이 차이가 많은 후배 회원들은 필자에게 ‘왕 형님.’ ‘왕 오빠‘라고 부르다가 좀 더 친숙해지면 형님, 오빠라고 편하게 한 단계 낮추어 부른다. 할아버지뻘의 나이차이라면 모를까 아버지뻘의 나이차이라면 ’큰형님, 큰언니‘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옆집 아낙도 아내를 ’큰언니‘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호칭은 무엇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이 좋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