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런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 군인 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학창 시절에는 군인들이 엄청나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무조건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여고 시절 같은 반 급우들의 위문편지의 첫 제목은 똑같이 ‘군인 아저씨 보셔요’였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셔요’였다. 한 장이라도 써야 했기에 글이 안 써지는 아이들은 위와 같이 한 줄만 달랑 써놓고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곤 했다.
필자는 후다닥 쓰는 데 선수였다. 친구가 그러고 있으면 뭘 고민하냐면서 대신 써주기도 했다. 필자에게 오빠가 세 명이나 있어서 그런지 오빠에게 말하듯 편하게 쓱쓱 써내려갔다.
그런데 대필해준 편지의 답장은 오는데 필자에게는 잘 안 왔다. 뭐지? 하며 약간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성경애~ 군인 아저씨에게서 답장 왔다” 하는 것이 아닌가.
편지를 보낸 군인의 이름은 공영구(009)였다. 아주 재밌는 이름이었다. 우리는 고3 어느 날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주로 대학 이야기, 군대 이야기,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공부 이야기를 했다. 사실 지금도 필자는 그 군인 아저씨 편지를 갖고 있다. 필자는 쪽지 하나까지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어서 편지는 물론 생일카드, 오랫동안 작성한 일기 등을 오래 간직하고 있다. 군인 아저씨의 글씨가 디자인 글씨처럼 특이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당시 필자는 사춘기의 예민한 여고생이었는데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께서 퇴직하시고 사업하다가 잘못돼 집안 형편이 안 좋았다. 대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다 보니 학교 독서실에서 공부는 해도 막연한 상황이었다. 부모님, 특히 엄마에게는 아주 못되게 굴던 시절이었다. 마음이 온통 대학 진학에 있었던 그때 군인 아저씨의 편지는 참 많은 위로가 됐다. 문학적인 소질이 느껴지는 글들도 많았다. 군인들은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라 편지 쓸 때 자연스럽게 낭만적인 감정이 되나 할 정도였다.
마음의 여유가 좀 더 있었다면 편지를 더 주고받고 한 번쯤은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필자 상황이 너무 안 좋아져서 졸업 후 바로 대학을 못 가는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래저래 속상한 마음에 연락을 끊어버렸는데 아쉬움이 남아 있다.
“40년 전 여고 시절, 편지로 제게 위로를 해주시던 공영구 군인 아저씨, 그 순수했던 시절과 마음이 가끔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