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서야 가족이 바로 선다!’ 진부해 보이는 것 같은 이 말 속에 5070세대의 자아가 녹아들어 있다. 진부하다고 아재 자아로 치부하면 안 된다. 말이 진부하다고 5070세대의 인생이 진부한 것은 절대 아니다.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 어느덧 20~30년이나 훌쩍 지났다. 쏜살같은 세월의 빠름에 총총하던 눈빛은 노안으로 시들고, 숯덩이 같았던 머리칼은 반백으로 눈부시다. 그 덕분인지 미약한 바람에도 쉬 꺾일 것 같았던 연한 연둣빛 새싹 가족이 짙푸른 이파리가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재목으로까지 자랐다. 이를 바라보는 5070세대의 마음속엔 뿌듯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다. 그 구멍으로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내면의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노라면 뿌듯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허함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 공허함과 함께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는가?’ 등의 질문이 솟구쳐 오른다. 이는 내면의 아이가 자신을 어루만져 달라는 메시지다. 5070세대가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행복한 노년을 일궈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애써 외면해왔던 내면의 아이와 잘 지내야 한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사주며 달래듯 나의 내면의 아이도 그렇게 달래야 한다. 어떻게 달랠 것인가? 내면의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된다. 일반적으로 명상을 많이 권하지만, 오롯이 자신을 위한 소비도 내면의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나 중심 소비’라고 해서 내가 원하는 물품을 맘껏 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소비는 내면의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파에 찌든 겉모습의 내가 원하는 소비일 가능성이 높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의 소비로는 내면의 아이를 달랠 수 없다. 오히려 공허함만 깊어질 뿐이다. ‘나 중심 소비’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삶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나 중심 소비’를 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았던 커다란 가치를 발견하고 큰 성취를 이룰 수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흔히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 청소년은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주변인이다. 이 때문에 정서적 동요가 심하다. 그 동요가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중년이라 불리는 5070세대 역시 주변인이다. 패트리샤 코헨이 <중년이라는 상품의 역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년은 “젊음에 집착하면서도 노년으로 흘러넘쳐 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중년 역시 질풍노도에 휘둘려 이리저리 떠돈다. 청소년의 질풍노도가 생물학적 특징에서 기인한다면 중년의 질풍노도는 다분히 사회적, 개인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청소년이 학업을 통해 질풍노도의 시기를 넘어가듯, 중년 역시 집중할 대상이 필요하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빈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다면 수만 가지 쓸데없는 잡초만 무성해진다. 이 땅을 유용하게 이용하려면 이것을 개간해서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어떤 문제에 전념하도록 제어하고 강제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흐리멍덩히 헤매게 된다.(중략) 마음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말처럼, 사방에 있다는 것은 아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중년이 정신적으로 집중할 것은 바로 잊고 있었거나 잃어버렸던 꿈을 되살리는 일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에서 중년의 꿈 찾기는 몽테뉴가 말하는 비옥한 땅을 개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년의 풍부한 사회적 경험은 그야말로 비옥한 땅이다. 이 땅에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어릴 적 꾸었던 꿈에 그동안 모아온 자산의 일부를 과감히 헐어 사용해야 한다. 자식에게 물려줄 돈이라며 아끼다간 중년의 기름진 경험에 잡초만 무성하게 된다.
자식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떳떳하지 못한 노년으로, 그야말로 꼰대로 늙어갈 뿐이다. ‘나 중심 소비’는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다. ‘나 중심 소비’는 잃어버린 꿈을 찾아준다.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자신에 대한 투자다
꿈을 찾기 힘들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삶을 윤택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재능은 타고 나는 법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내가 잘했던 일, 남으로부터 칭찬받았던 일이 분명 한두 개 정도씩은 있을 것이다. 이 일을 찾아내어 더 잘할 수 있도록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김경록 소장은 <1인 1기: 당신의 노후를 바꾸는 기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 우리는 퇴직 후 여명이 짧다 보니 별다른 생각 없이 지냈다. 하지만 이제는 3년을 투자하면 20년 이상을 써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전문성과 기술로 무장된 1인 1기는 고령화를 헤쳐갈 안전벨트가 된다.”
이런 점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자산을 사용하는 ‘나 중심 소비’는 자신에 대한 투자의 다른 말이다. 투자 성격의 ‘나 중심 소비’는 생활의 활력소이자 든든한 노후지킴이를 만들어준다. 정년 이후에도 일정한 현금흐름을 계속 창출해주므로 노후빈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식에게 민폐 끼칠 염려도 없다. 오히려 자식과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는 멋진 부모, 조부모로 대접받을 수 있다. 꽤 괜찮은 투자 방법이지 않은가?
소비를 지혜롭게 하면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믿음이 없이 그냥 내지르는 소비는 ‘나 중심 소비’의 허울을 뒤집어 쓴 세태 추종적 소비일 뿐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신뢰하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을 믿고 ‘나 중심 소비’에 도전하는 5070세대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밝힐 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희망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