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유복하게 오래 사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오래 산다고 축복이 아니라 축복이 되려면 질병이 없고 부자는 아니더라도 가난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온 몸에 링거 병 주렁주렁 매달고 병원의 침상에 누워있거나 독거노인이 되어 지하단칸방에서 외로워 몸부림친다면 장수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장수가 가족을 힘들게 하고 자신에게도 고통일 것입니다.
죽어야 될 때는 죽어야 합니다. 의사인 유태우 박사의 강의 중에 곤충이나 야생동물은 비만도 없고 노화도 없고 죽을 때 쉽게 죽는다고 합니다.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조용히 치료를 하다가 죽어야 될 때는 죽는다고 합니다. 오직 사람과 사람이 기르는 애완동물만이 비만에 걸리고 노화로 고통 받고 죽을 때도 쉽게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칠 수 있는 병을 고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의미 없는 수명연장을 계속하는 것도 더 큰 문제입니다.
생명은 하늘이 주신 것이고 그것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면 안 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만 건전한 의식이 있을 때 무의미한 생명연장에 대한 포기각서를 미리 써두면 환자가 되어 의식이 없을 때 이를 존중한다는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만 봐도 인간에게는 수명이라는 것이 있고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죽어야 할 때는 죽는 것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운명이고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전체의 줄거리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유난히 한 대목에서 전율처럼 잊히지 않는 줄거리가 있습니다. 어느 소설가의 단편 글을 읽으면서 인간의 덧없는 욕심을 봤습니다. 글의 내용은 이렀습니다. 소설가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게 되었습니다. 소설가는 그 고양이를 자식처럼 사랑을 주고 키워왔기에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아이가 세상을 뜨기 직전, 먹는 걸 거부하더군요. 죽을 걸 알고 있으니 조용히 굶어죽겠다는 겁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강제급식이라는 걸 시작했습니다. 거부하는 아이를 꽁꽁 싸매 꼼작도 못하게 하고 주사기로 묽은 죽과 약을 억지로 입으로 투여하는 겁니다. 아이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버티고, 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울며, 제발 먹어, 나를 위해서라도 먹어줘, 그랬습니다. 그때, 그 한숨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고양이가 한숨을 쉬더군요. 모든 걸 다 내려놓은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더라고요. 제발 그만해. 사람의 말로 말할 수 있었다면 아이의 말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죽어야 할 때가 된 동물을 단지 사람의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욕심 때문에 살리려고 합니다. 자랑하듯 수십 만 원의 치료비를 들이고 지극정성을 다 하지만 무의미한 생명연장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동물사랑이라는 허영심 때문에 오히려 애완동물은 학대를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는 건강증진과 예방의학과 치료의 세 박자 중 돈이 되는 치료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합니다. 치료는 많은 돈이 듭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담보로 돈을 벌고 나중에 병이 후회하면서 번 돈으로 건강을 살려고 하지만 더 질 나쁜 건강만 살 뿐입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고 예방에 조심하면서 즐겁게 여생을 보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웃으며 떠나는 것이 장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