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 하면 화엄사(華嚴寺)가 떠오르는 것은 필자가 근 반세기 전 찾아갔던 기억에서 비롯한다. 당시 천년고찰 화엄사를 감싸듯 둘러싼 뒷산이 폭설 속에서 온통 은백색의 아름다운 나라를 펼쳤었다. 그 하얀 세상에서 거대 각황전(覺皇殿)이 당당하게 우뚝 서 있었던 모습을 생각하면 언제든 아름답게 다가온다. 웅장한 목조 건물, 그리고 ‘단청(丹靑)하지 않은 無’의 아름다움이 주변 은백색 세계와 어울린 자태에 특히 매료되었었다. 아주 별난 아름다움의 세계를 본 것이다.
오래전 화엄사에 갔다가 경내 안쪽에 자리한 구층암(九層庵)을 보면서 별 감흥 없이 그냥 지나갔었다. 그런데 문득 ‘그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 한걸음에 구층암, 바로 먼 옛날 무심히 그냥 스쳐 지나고 만 그곳을 찾아갔다.
화엄사 소속 요사채(寮舍砦)인 구층암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히는가 싶을 정도로 큰 감동이 몰려왔다. 요사채 건물을 떠받치는 두 기둥을 200년 수령(樹齡)의 모과나무를 거의 손대지 않은 통나무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을 본다. 건물에 쓰이는 목재는 으레 톱이나 도끼 또는 대패로 다듬어지기 마련인데, 구층암의 기둥으로 서 있는 목재는 나무 본연의 모습인 투박한 자태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사진].
임진왜란 때 소실된 요사채를 1897~1899년 새로 지으면서 앞마당에 있던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썼다고 한다. 즉 서구의 현대미술이 추구한 ‘틀에서 벗어나기 사상’이 활발하게 요동치던 시대와 맥을 같이한다는 사실이 예사스럽지 않다. 같은 동양 문화권에 있다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오직 이 조선 땅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 예술의 넋[魂]을 홀연히 보이는 건축예술의 한 예작(藝作)을 본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러면서 수년 전 “한국은 실로 아방가르드 예술 정신의 나라”라고 극찬하던 전 주한 독일대사 한스 울리히 자이트 박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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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