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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군주 이성계의 기백을 느껴지는 전주 경기전
-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햇살 좋은 봄날, 전주한옥마을에 사람들이 그득하다.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답다. 지난 한 해에 찾아온 관광객이 자그마치 1500만여 명이었다니 말 다했다. 한나절의 눈요기와 입요기만으로도 전주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오는 이들이 많다. 한때 상혼에 치우쳤다는 핀잔도 들었다. 그러나 문화공간과 체험 프로그램이 늘어 균형이 잡혔다. 바야흐로 문화 요소를 결여한 관광지는 찬밥 신세로 추락하기 쉬운 시대다. 사실 전주한옥마을엔 전주의 역사와 문화가 달걀노른자처럼 박혀 있다. 겉은 상업의 성황으로 요란하지만, 속엔 역사 유산의 광량이 깃들어 찬연하다. 경기전(慶基殿)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봉안한 공간이다.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1410년에 지었다. 천하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그린 어진은 단순한 추모의 수단이 아니었다. 임금 그 자체로 간주됐다. 어진이 있는 곳엔 임금이 머문 것과 맞먹는 수준의 위상이 부여됐다. 왕실의 영속을 기원하는 성역이었다. 따라서 경기전의 규모부터 웅장하다. 우람한 나무들과 대밭이 있는 정원은 운동장처럼 널찍하다. 경기전의 핵심은 공간 중앙부에 조성된 정전(正殿) 구역이다. 홍살문으로 들어가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을 통과하자 본전인 정전에 닿는다. 경기전은 한마디로 왕실 사당이다. 태조의 넋을 기리는 제례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정전으로 이어지는 외삼문과 내삼문을 혼령이 드나드는 문, 즉 신문(神門)이라 불렀다. 이 문들엔 기둥으로 분할한 세 개의 통로가 있다. 중앙에 있는 통로는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혼령이 출입하는 신도(神道)니까. 바깥쪽 두 통로는 인도(人道)로 쓰였다. 예교(禮敎)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시대의 종묘에 적용된 법식이 이렇게 엄격했다. 통로 끝엔 정전이 있고, 정전 한가운데 감실을 만들어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감실 안엔 부용향을 담은 향 주머니를 넣어 냄새와 습기와 해충을 잡았다. 화재를 막아주는 벽사(辟邪) 용도로 설치한 두 가지 장치도 위트가 있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지붕 아래 붉은 풍판에 조각한 상서로운 동물, 거북 두 마리. 다른 하나는 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6개의 무쇠솥인데, 이건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 ‘드므’라 부른다. 지붕을 타고 내려온 화마(火魔)가 솥을 채운 물에 비친 자신의 살벌한 모습에 놀라 스스로 달아나게끔 설치한 구조물이라 하니 재미있다. 뭐니 뭐니 해도 관심 가는 건 태조 어진이다. 세조 때의 문신 신숙주가 쓴 ‘영모록’에 따르면 태조 어진은 무려 26점이나 됐다. 말을 탄 초상도 있었단다. 그러나 현존하는 건 경기전에 남은 어진이 유일하다. 이 어진은 원래부터 경기전에 있었던 원본이 오래되어 낡고 해지자 1872년에 원본 그대로 베껴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우뚝한 화가 8명이 합작해 그렸다. 이렇게 부활한 태조 어진의 진본은 현재 경기전 후원의 어진박물관에 소장됐고, 정전엔 복제본을 봉안했다. 망가진 원본은 항아리에 담아 정전 뒤편에 묻었다지. 조선의 왕들은 하나같이 하늘에 맞먹을 지존으로 섬김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을 세운 태조를 능가할 만한 공경의 대상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태조의 어진 봉안처만 해도 여러 곳이었다. 서울 문소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경주 집경전, 전주 경기전 등에 각각 어진을 두었다. 그런데 오직 전주의 어진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전주를 ‘조선의 발원지’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주는 전주 이씨 이성계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조선의 뿌리가 전주에 박혀 있다는 얘기, 이거 빈말이 아니다. 어진에 드러나는 태조의 모습을 볼까. 그의 실제 키가 180cm에 달했다던가. 초상을 척 봐도 기골이 장대하다. 청색 곤룡포를 입고 바위처럼 묵직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한 틀거지에 포스가 넘친다. 혁명 군주다운 도도한 기상을 테마로 삼아 초상을 그린 것 같다. 곤룡포와 용상엔 용틀임하는 금빛 용들을 연쇄적으로 집어넣어 군왕의 위엄을 돋우었다. 능란하게 휘저은 붓놀림의 자취도 볼 만하다. 색조를 달리한 배색으로 얼굴에 음영을 넣어 살짝 입체감을 살렸다. 오른쪽 눈썹 위에 묘사한 사마귀는 이 어진이 리얼리티에 충실한 그림임을 알게 한다. 풍남문에 걸렸던 순교자들의 머리 경기전 건너편엔 ‘호남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라는 전동성당이 있다. 경기전 답사를 마친 사람들의 발길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전동성당으로 이어진다. 저만치서 바라보이는 돔 부위만으로도 아름다워 자력에 끌린 양 성당 정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성당과 마주하기에 이르면 이젠 심취하게 마련이다. 전동성당의 완벽한 건축미에 반해서. 성당의 고고한 내면성이 느껴져서. 건축가 김광현에 따르면 전동성당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 성당이나 독일 뒤렌에 있는 성 안나 성당보다 ‘훨씬 영성적’이다.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나로서는 감히 영성까지 운운하기 어렵지만, 유려한 건축미에 서린 깊고 따뜻하고 순수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전동성당의 외벽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배합해 쌓았다. 1908년에 착공, 23년에 걸친 공사로 완성했으니 100여 년 세월이 내려앉은 건물이다. 그러나 세련된 건축 메커니즘과 정교한 디자인이 빼어나 고색을 느끼긴 어렵다. 이 성당이 야기하는 미감은 정면 중앙에 높이 솟은 종탑부와 양쪽 계단 탑의 돔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성당 내부도 화려하고 장엄하다. 궁륭형 천장의 곡선이 흘러내린 아래편 좌우에 펼쳐진 감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머니의 체온처럼 따사롭다. 성당을 떠받친 기둥 행렬, 수평 또는 수직으로 펼쳐진 벽돌 벽들, 신비감과 안락감을 풍기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도 빼어나다. 전동성당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순교의 피와 얼이 배어 있는 터에 세운 성소라는 데 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유박해 때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 전동성당 코앞엔 풍남문이 있다. 전주의 역사성을 웅변하는 성문으로 반월형 옹성(甕城)이다. 원래 전주성엔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지만 풍남문만 남았다. 전주성은 고려 말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주도해 지었다. 그는 전주성에서 우거진 축성 솜씨로 숭례문(남대문)을 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동성당과 풍남문은 불행한 역사를 공유했다. 효수를 당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머리가 풍남문에 걸렸던 게 아닌가. 한편 순교 터에 전동성당을 지을 때엔 풍남문의 허물어진 성벽 돌들이 성당의 주춧돌로 쓰였다. 굳센 신앙은 세상의 잔인함에 패하지 않는 법. 순교자들의 영혼은 성벽 돌에 얹혀 마침내 전동성당을 이루었다. 성당 사방으로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햇살이 쏟아진다. 천지가 유독 환하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 일찍부터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이 있었다 “전주시는 흔히 말하는 대로 ‘맛과 멋의 고장’이다. 고유한 음식 문화와 예술의 발달로 형성된 멋을 빼놓고 전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맛과 멋’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과거의 경제적 여유에 그 근원이 있다. 전주는 농산물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농업지대였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먹거리 풍부한 곡창지대였던 데에서 전주의 문화와 정서가 토착화됐다는 뜻이다. 전주는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에 의해 ‘음식 창의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통으로 이어진 문화와 예술의 파워 역시 타 도시를 능가한다. 나 원장의 얘기는 전주 사람들의 ‘포용력’에 관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쪽으로 이어진다. 그는 원광대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전주 사람들은 외지인을 격의 없이 품는다. 예부터 ‘더불어 함께’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풍토가 여실했다. 이는 전주만이 아니라 호남권의 보편적 경향이었다. 가령 고창읍성을 축조할 때 전라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힘을 보탰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 거기에서 나온 포용력. 이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전통사회에선 양반들의 지배 문화가 횡행했다. 호남권의 서민 문화는 어떠했다고 보나? “전라도에선 서민 문화가 발달했다. 예컨대 호남엔 농부들이 일하다가 모여 쉬는 모정(茅亭)이 매우 흔했다. 이는 사대부들이 즐긴 누각 문화가 발달했던 영남권과 다른 양상이다. 임진왜란에 뛰어들어 나라를 지켜낸 서민 출신 의병이 유독 많은 곳도 호남이다. 일찍이 발동한 서민 문화가 민중의식의 싹을 틔웠고, 그게 동학혁명 같은 민권운동으로, 나아가 민주의식으로 발화했다. 전주 특유의 ‘포용력’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세상은 이기적인 경쟁과 과욕이 만연해 삭막하다. 전주라고 예외일까? “현대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힘에 좌우되며 돌아간다. 전주엔 좌절감에 가까운 정치적 소외감이라는 게 있다. 넉넉한 전통적 정서와 자긍심이 흔들릴 정도로. 그래서 문화의 힘, 문화원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우리 문화원은 지역의 뿌리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쓸모 있는 책자들을 다수 발간했다. 전통문화를 현대적 매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콘텐츠 발굴에도 나서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실로 많다. 한옥마을의 역사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면? “항일의식의 발현으로 한옥마을이 형성된 배경을 알면 좋겠다. 일제강점기 때 전주엔 일본인이 대거 유입돼 집을 짓고 살았다. 전주가 통째 일본인 땅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전주의 뜻있는 부자들이 나서서 한옥 다수를 지으며 대응했다. 이렇듯 전주를 지키자는 민의의 힘으로 형성된 게 한옥마을이다.” 경기전 내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4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전주사고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을 모면하고 유일하게 실록을 보존한 사고다. 전주의 선비와 머슴들이 필사적으로 실록을 지켜낸 덕분이었다. 나 원장은 이 역시 전주의 빛나는 역사 대목으로 꼽았다.
- 2024-04-1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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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지 쌓인 사료의 한 줄, 박시백의 손끝으로 피워내다
- 두 개의 선이 서로 의지하며 맞닿은 형태인 사람 인(人)은 책과 또 다른 책을 잇는 징검다리와 같은 모양새다. 역사만화가 박시백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기록과 독자를 생생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와 함께하는 북人북은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등 누구도 선뜻 이뤄내지 못했던 역사의 대장정을 펴낸 사람의 자신감과 묵직한 철학을 담았다. “브라보 독자를 위한 역사책 추천이라, 전부 제 책으로 해도 되나요?” 역사만화가가 품은 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다. 농담 반, 진담 반일 테지만 그럴 법도 하다. 500년, 총 2077책. 차례로 쌓아 올리면 아파트 12층 높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을 독파하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스무 권을 연재하는 데 꼬박 13년이 걸렸다. 밑그림부터 펜 작업, 채색 등 모든 공정을 혼자 작업하며 각 인물의 기질과 분위기를 최대한 구현했다. ‘실록’을 기반으로 한 사실 고증과 명쾌한 박 화백만의 역사적 시각 덕일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03년 첫 권 ‘개국’ 출간 후 바로 그해 대한민국 만화대상 장관상을 받았다. 이뿐이랴. 현재까지 판매 부수 350만 부를 기록하는 성과를 이뤘다. 완독의 힘이 만든 그의 역사 초등학생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형이 사온 갱지를 슬쩍 가져와 장편 만화책을 통째로 따라 그릴 정도였다. 특히 1970년대 유행한 만화 ‘바벨2세’, ‘주먹대장’, ‘요철발명왕’ 등에 푹 빠졌었다. 늘 ‘나는 언젠가 만화를 그릴 거다’라고 다짐했던 그는 1990년대 후반, 신문사에 만평을 연재한다. “일간지에서 시사만화를 그릴 때 재밌기도 했지만 스트레스가 컸어요. 반응이 즉각적이었거든요. 퇴근할 때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때부터 시작이었어요. 신문사 직원들이 ‘어우, 박 화백! 오늘 재미있더라’ 하면 좋아요. 그런데 아무 말도 없거나 ‘오늘 그건 무슨 얘기야?’라고 하면 ‘아, 망했다’ 싶은 거죠.” 이런저런 고민에 잠겨 있던 어느 날, 드라마를 보다 문득 조선 역사를 만화로 제작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된다. 조선 전기 정치 갈등을 그린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에서 수양대군(세조)의 계유정난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세종의 손자이자 그의 조카인 단종을 비롯해 수많은 신하들을 살해했는데도 말이다. 문제의식을 느끼고 바로잡으려 해도 아는 바가 없다 보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후 신문사 도서실을 들락거리며 관련 도서를 찾아 읽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책 내용은 대부분 야사와 정사가 뒤섞여 있었다. 조선사에 흥미가 생겼고, 제대로 된 역사서의 필요성을 느껴 4년 넘게 그려오던 만평 연재를 그만뒀다. 그때까지 실록의 한 페이지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단지 지식이나 정보를 가공하는 만화 작업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자리했다. 아마 날카로운 만화가의 촉으로 조선사의 흥미진진함을 감지해냈으리라. “우선 국역 ‘조선왕조실록’ CD를 구해 하루 12시간씩 공부했어요. ‘실록’도 역사 기록물이니 담당 사관의 시각이 개입되고 곡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미워하는 당파 쪽의 발언이라 해도 있는 그대로 기록했더라고요. 후손이 당시의 사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죠. 다만 편년체(연대순으로 기록한 역사 서술 방식)로 그날그날 있었던 일이 중구난방으로 적혀 있어 엄청나게 정리했어요. 필기 노트만 120권 정도 돼요. 그걸 다시 보면서 연표를 그리고, 간략하게 한 권짜리 요약본을 만들기를 반복했죠. 핵심은 ‘노가다’예요.” 공인된 맥락에 맞춘 강약 조절 그는 책 내용을 구성할 때 무엇보다도 정사에 기초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한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미있고 참고가 된다”며 애독했던 책 가운데 하나로 박 화백의 저서를 꼽았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바로잡아주기도 하고, 적절히 개입해 해설도 곁들인다. 예컨대 황희 정승의 경우, ‘실록’에는 속물이며 권력 지향적이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 식의 두루뭉술함과는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신격화된 모습만 남아 있는 게 의아하다는 설명이다. 또 세종 시절을 으레 태평성대라 여기고 박 화백 역시 그를 ‘하늘이 내린 인물’로 평가하지만, 세종의 화폐 개혁은 가난한 조선 민중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한 정책이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35년’, ‘친일파열전’을 포함해 최근 출간한 ‘박시백의 고려사’도 마찬가지다. 문종 때 완성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한줄 한줄 들여다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사실들을 캐내 바르게 전달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이웃 나라를 넘어 지구 반대편까지 알려지게 됐어요. 코리아(Korea)가 고려에서 비롯한 것만 봐도 그렇죠. 하지만 고려 역사를 기록한 사료가 조선에 비해 많이 부실해요. 세월을 견디지 못해 소실되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때때로 전후 사정을 조사하고 살을 붙일 때도 있어요.” 박 화백은 수많은 역사적 인물 중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정도전을 꼽는다. 살면서 이상을 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설계자로 알려진 정도전은 고려 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매섭게 움직인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던 때 이미 그의 나이 마흔이 넘었죠. 그 당시 마흔은 지금과 다르잖아요. 인생의 정점을 훨씬 지난 나이일 수도 있는데 마치 20대 청년과 같은 기세로 고려라는 틀을 부수려 했고, 결국은 성공했어요. 무모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추진력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가히 긴 시간이다. 어쩌면 현재보다 과거에 더욱 집중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책의 흐름을 따라 호흡해준 독자야말로 그가 이 마라톤을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열심히 했는데 반응이 없었다면 벌써 다른 일을 찾아봤을 것 같아요. 원고를 넘길 때마다 ‘이번엔 별로인 것 같다’면서 불안했지만 독자 덕에 여기까지 왔어요. 저를 이 직업으로 먹고살 수 있게 해준 셈이에요. 굉장히 감사하죠. 근대사든 현대사든 앞으로 다뤄보고 싶은 시대가 많지만 일단 오래 만화를 그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 2022-06-2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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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X 강릉선 타고 가을 여행, 가 볼 만한 곳은?
- 가을이라 해도 날씨는 여전히 온화하다. 강릉으로 떠나며 날씨를 검색해보았더니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환절기의 쌀쌀함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아 머플러랑 니트를 주섬주섬 더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언제나 따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곳은 언제나 따스하게 날 맞는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은 강릉. 명주동 거리, 강릉의 ‘핫플레이스’이라고 했다. 명주(溟州)는 신라 시대에 강릉을 이르던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1500년 전의 고도 명주는 예부터 문화·행정의 중심지이던 곳인데 강릉 시청이 옮겨가면서 한물간 구도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구도심 귀퉁이 마을인 명주동 일대가 요즘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찾아가고 싶은 원도심으로 변신했다. 가을볕 아래 명주동 문화마을 천천히 걷기 강릉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에서 시작해 그 주변 동네와 골목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릴 적 추억도 소환하고, 숨겨진 예쁜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가 걷는 내내 이어지는 풍경. 드라마 시대극을 연상케 하는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미 명주. 시나미는 ‘천천히’ 또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말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뉴트로 강릉의 모습이 보인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골목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벽돌담 모퉁이를 돌면 유년의 뜰에서 늘 보았던 백일홍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씩 뿌리내린 채 꽃을 피워 올린 소박한 식물들이 예쁘다.골목 여행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배려다. 저절로 따스함을 얻는다. 낡은 담벼락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바른 글씨체로 세 줄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에 켜켜이 스며 있는 옛이야기를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간다. 쭉 걷다 보면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건물들이 간간이 눈길을 끈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봉봉 방앗간’ 건물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집이다. 근처의 작은 공연장, 박물관, 예술마당, 프리마켓 등의 문화공간에 슬슬 가을 분위기가 덧입혀지는 중이다. 골목길을 걷다 잠깐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가게 앞에 의자를 놓은 인심이 더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 의자에 한 번씩 앉아 사진을 담는 여행자들 덕분에 아예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찾아가 보고 싶은 ‘인싸들의 강릉 여행지’가 되었고, 곳곳에 젊음의 생기발랄한 에너지도 풍겨난다.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 단장한 소박한 점포들,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여행자와 연결해주고 쇠락한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신구(新舊)가 공존하는 원도심 거리답게 옛집을 개조한 카페 ‘오월’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가 뒷짐 지고 걸어가시던 골목길 풍경 또한 가을볕에 아련하다. 정겨운 가을날이다. 강릉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실 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타박타박 걸었던 명주동 골목 나들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명주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건너편 강릉 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이다. 강릉 임영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대청이 있는데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은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했던 집경전(集慶殿) 터다. 해설사님의 해박하고 구수한 해설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누구나 원하면 미리 신청해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아 곳곳에 우뚝 선 고목이 되어버린 은행나무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다 언덕 위에 펼쳐진 예술 세계 이제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예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는 전시 공간에서 감성을 충전할 때다. 묵은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시간이다. 강릉의 괘방산 자락을 배경으로 등명마을에 자리 잡은 ‘하슬라 아트월드’.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아트월드다. 조각가 부부가 힘을 모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는 고구려 때 부르던 강릉의 옛 지명이다. 현대 미술관, 아비지 갤러리, 터널 설치미술, 체험학습실,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관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터널을 통과하고 고래 뱃속 터널을 지나 지하 계단, 그리고 피노키오 전시관과 마리오네트 전시관까지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야외 조각공원은 예술 정원으로 3만3000평의 드넓은 자연 속에 있다. 어딜 돌아보아도 산과 바다. 이처럼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어딜지. 이어지는 스카이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자연을 만끽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로스팅한 산야초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문화예술 공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트월드 안에 호텔도 있다. 설화 속의 월화거리 즐기기 강릉을 떠나기 전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에도 잠깐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강릉역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시장통엔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아이스크림호떡과 치즈호떡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들이 즐비하다. 마늘빵과 닭강정 역시 인기여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모습이다. 군것질을 하며 시장 구경을 즐기다 보면 여행은 더욱 흐뭇하다. 중앙시장을 지나 KTX를 타러 가는 길목에 월화거리로 가는 화살표가 있다.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교동의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폐철도 부지에 조성된 공원 시설이다. KTX 강릉선 개통으로 강릉 도심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옛 지상 철길은 유휴지로 남게 됐다. 강릉시는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이 공간을 공원화한 것이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월화 풍물시장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졌다. 메밀전병이나 감자떡 등 강원도 토속음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간식거리로 옛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월화정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 화랑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경주로 돌아간 무월에게서 연락이 없고 연화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처한다. 이에 연화는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혼인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 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의 메신저가 잉어라니. 무월과 연화의 이름에서 따온 월화정이 있는 이곳을 월화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걷는 내내 눈길을 끄는 갖가지 구조물이나 꽃 조형물들이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노선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장과 월화거리를 지나며 강릉역이 저편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에 서울 강릉 간 KTX가 개통되면서 114분 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어 강릉 당일 여행이 쉬워졌다. 강릉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도착이다. 일상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하루쯤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강릉이 있다.
- 2021-11-1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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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창업’으로 인생 2막을 ‘창업’하다
- 큰 꿈을 품고 신사업에 뛰어든 청년, 혹은 인생 삼모작을 시작한 중년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 무대에 줄줄이 등장한다. 정도전부터 이성계, 이방원까지. 알고 보니 ‘나라를 열다’는 사전적 의미의 ‘창업’이다.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이야기를 다룬 퓨전사극 ‘창업’은 배우 서범석이 공연 제작사 ‘광나는 사람들’을 차리고, 연출과 제작을 총괄한 첫 뮤지컬이다. 그에게 이번 공연이야말로 새로운 도전이자 창업인 셈.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 배우에서 프로듀서로 출사표를 던진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뮤지컬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있었어요. 30대 후반쯤부터 내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죠. 그런데 그동안은 배우 생활을 하느라 바빠서 꿈을 펼칠 기회가 없었어요. 그러다 작년에 코로나19로 강제 휴식을 하게 되면서 열정을 쏟아부을 곳이 사라진 거예요. 지금이 찬스다 싶어서 작가 형에게 포부를 말했죠. ‘형, 대본 좀 써주세요. 저 조선 왕조 이야기로 뮤지컬 다섯 개 만들고 싶습니다’라고요. Q. 왜 조선 왕조 이야기인가? 저는 우리 것이 신기할 정도로 좋아요. 우리 말과 글, 소리, 악기가 마음을 움직이죠. 춤을 배울 때도 발레나 재즈댄스보다는 한국무용이 제일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공연계에 외국 작품의 비중이 큰 게 아쉬워요. 셰익스피어를 시리즈물로 만들려는 사람은 많아도 한국적 소재를 꾸준히 다루려는 사람은 드물죠. 그렇다면 내가 한번 시리즈로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조선 건국 이야기가 그 시작이고요. Q. 장르를 퓨전사극으로 택한 이유는? 대하드라마 같은 스케일을 갖출 수 없다면, 적어도 식상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극 어투를 최대한 빼고 요즘 말로 바꿨어요. ‘야 정몽주, 네가 잘났다고 생각해?’ 이런 식으로요. 대사 곳곳에 요즘 이슈도 반영했어요. 정도전이 날씨를 물어보면 정몽주가 ‘미세먼지 매우 나쁨’이라고 대답해요. 작품을 본 친한 형님은 ‘이성계가 이렇게 웃겨도 되는 거냐?’ 하시더라고요. 사극에서 흔히 본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대다수 관객분들은 그런 포인트에 재미를 느끼신 것 같아요. 연령 불문 좋아하시더라고요. Q. 제작에 어려움을 느꼈던 순간은? 출연하는 배우들이 거의 신인이에요. 신인을 발굴해서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게 제 또 다른 목표였거든요. 아주 무모했죠.(웃음) 주변에서도 뜯어말렸어요. ‘신인이 뭘 할 수 있겠냐’는 반응이었죠. 그런데 이 친구들, 연기 못 한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모든 시간을 연습에 쏟아 가창력, 연기력이 일취월장했어요. 문제는 인지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찾아주시는 분이 많지 않다는 거죠. 보석 같은 친구들이 많은데, 빈 객석을 볼 때면 마음이 좀 아프더라고요. Q. 작품을 보고 느꼈으면 하는 바는? ‘창업’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갖고 이를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인물이에요. 그들을 보면서 ‘나는 과연 저들만큼 뚜렷한 신념을 갖고 살고 있는가?’ ‘나의 확신이 욕심이 되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가?’ 하는 고민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사라는 게 그렇잖아요. 과거의 인물로 오늘의 나를 돌아보는 역할을 해주니까요. 사실 작품을 통해 우리 역사에 작은 흥미를 갖게 되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Q. 첫 연출작, 어떻게 기억될 것 같나? 제가 지금 나라를 창업한 이성계의 마음과 똑같은 것 같아요. 이성계의 노래 중에 ‘누구의 손을 잡고, 누구의 손을 놓고, 하나의 뜻을 가질 수는 없는가’라며 고뇌하는 가사가 있어요. 그 가사처럼 프로덕션을 이끌면서 매번 선택과 갈등의 순간이 이어졌어요.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추구하는 색깔을 잃지 않고 만들어낸 작품인 만큼, 새 뮤지컬의 탄생을 알리는 진정한 ‘창업’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뮤지컬 '창업' 일정 7월 18일까지 장소 예그린씨어터 연출 서범석 출연 서범석, 박종찬, 김재한, 박상돈, 안유진, 장대성 등
- 2021-07-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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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솔길 하나 마음에 들여놓고 살자
- 산중의 봄은 더뎌 아직 볼 꽃이 없다. 골을 타고 내달리는 바람에 억새가 휜다. 그렇잖아도 겨울 칼바람에 이미 꺾인 억새의 허리, 다시 꺾인다. 길섶엔 간혹 올라온 애쑥. 저 어린 것, 작달막하나 딱 바라진 기세가 보통 당찬 게 아니다. 겨울을 견디어 불쑥 솟았으니 잎잎이 열락(悅樂)으로 설렐 게다. 상주시가 ‘호국의 길’이라 이름 붙인 둘레길이다. 때 묻지 않은 산과 강의 흥겨운 어우러짐을 볼 수 있다. 황희 정승의 위패를 모신 옥동서원(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을 기점으로 삼는다. 강을 따르는 평평한 오솔길이라 걷기에 좋다. 여덟 개의 여울목이 있어 구수천 팔탄(龜水川 八灘)이라 부른다. 크거나 깊은 물줄기는 아니다. 그러나 유장한 맛을 풍긴다. 가파른 벼랑을 끼고 굽이쳐서다. 강을 따라 오솔길이 솔솔 풀려나간다. 묵은 정으로 찾아든 길도 아니건만 구면처럼 정겹다. 눈이 시릴 듯 시원한 건, 보이느니 절반은 산이요 절반은 강, 수려한 풍치에 안구가 씻겨서일 게다. 이런 데가 드물다. 둘레길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많은 요즘과 달라 예전엔 거의 무인지경 오지였다. 산과 강이 농밀하게 어울려 허전한 구석이 없다. 좋구나! 탄성이 절로 나온다. 햇살을 튕기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 잎을 아직 매달지 못한 채로도 생기를 머금어 완벽한 나무들. 저만이 간직한 비밀에 겨워 스멀거리는 숲. 바위벼랑 모서리를 거머쥔 소나무들의 곡예. 누가 각본을 썼을까, 풍경의 공연엔 흠결이 없다. 도시에는 없는 무대다. 연중무휴로 돌아가는 이 극장에는 입장료가 없다. 자연이 인간을 상대로 뭔가 챙기는 일이 있던가. 은근히 바라는 게 있던가. 사람만 과욕을 부린다. 그러고도 채워지지 않아 시달린다. 시달리는 사람은 그러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자연이 슬며시 보듬어주기에. 슬며시 보듬어주는 자연의 손길. 자연 속에서 흐뭇해 고마움을 느끼는 건, 그 무상의 자비가 우리를 방문할 때이기도 하다. 오솔길은 융단처럼 폭신하다, 아니 따뜻하다. 따뜻해서 혼자 걸어도 둘이라 느끼게 한다. 오솔길이 일어서서 동행하는 기분을 야기하니 말이다. 귀찮지 않은 둘. 순수한 어깨동무. 열광이나 환호가 아니라 말 없는 신뢰를 보내오는. 그래서겠지,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것처럼 삶이 얼얼할 때면 오솔길을 찾아가는 건. 찾아가는 오솔길보다 좋은 건 내 마음 안에 오솔길 하나 들여놓는 일일 테다. 오솔길이 있는 마음이라면 문지방이 없어 무정한 처신도 없을 것이다. 느려도 멀리 가는 오솔길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안달복달이 없어 세상의 과속에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후미진 산중에도 사람이 산다. 저만치에 인가가 보인다. 농가 두어 가구가 밤농사와 표고버섯 재배로 살아가는 것 같다. 고립무원까지는 아니라도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 왜 없으랴. 불편은 또 얼마나 많으랴. 그러나 지옥 구덩이에 던져놔도 적응하는 게 사람이다. 살면서 얻어지는 야생의 기질로 거뜬히 자립하고 소박한 대로 자족하는 게 산사람이다. 꽃 중에도 야생화의 향기가 더 진하지 않던가. 강을 따라 더 내려간다. 구수천 풍경이 여기에서 절정에 오르는가. 산은 높아 이제 봉우리를 볼 수 없다. 산그늘이 강을 뒤덮었다. 비죽비죽 날 선 바위벼랑들은 감히 범접 못할 위용으로 장쾌하다. 좁혀진 산곡의 폭으로 물살도 거칠어졌다. 아름다워 빼어나다기보다 등등한 기세로 뛰어나다. 이곳에서 강을 버리고 산길을 따라 모롱이를 돌면 저승골이다. 저승골? 이름이 왜 이런가. 저승골에 기억할 만한 역사가 서려 있다. 고려를 유린한 몽고군이 상주산성을 공격했다가 이 골짜기에서 패퇴했던 것. 상주의 민간인 유격대에게.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또렷한 승전 역사로, 상주의 향토사가들은 저승골에서 몽고군들이 숱하게 죽었다고 논증하고 있다. 육군본부가 간행한 ‘고려 전쟁사’도 상주산성 항쟁을 ‘대승첩’으로 기록했다. 옛사람들의 의열과 기개에 숙연해진다. 전쟁이 터지면 산하도 전장으로 화한다. 시대의 울분이 극에 달하면 산하도 죽음을 목도한다. 멀리 갈 거 없다. 구수천변 아찔한 벼랑에서 몸을 던진 옛사람이 있다. ‘정조실록’이 기린 이름,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 그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무너지자 거문고를 타 호곡(號哭)한 뒤 세상을 버렸다. 이를 애사(哀史)라고만 할 수 있겠나. 열사(烈士)의 죽음엔 비애가 없다. 절의(節義)란 실로 호방한 정조(情操)이지 않겠는가.
- 2020-03-3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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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앎을 내려놓아라! 이놈들아, 앎이 곧 장애이니라!
- 쌀가마니를 공깃돌처럼 다루고, 바윗덩이로 공차기를 했다는 기인. 축지법과 경공법으로 허공을 날다시피 한 무림 고수. 탄허 스님이 삼배(三拜)를 올렸다는 도인. 원혜상인이라고, 전설적 고수의 이름을 들어보셨는가? 162세 장생을 누렸다는 그의 기적이 믿어지는가? 뻥이라고? 증인이 있었다. 원혜상인의 수제자 박대양(2017년 작고). 그는 타오르는 존경심으로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술회했다. 박대양의 무공 역시 초절정 판타지 수준이었다지. 구름을 끌어당겨 마음먹은 대로 부렸다는 게 아닌가. 박대양은 전통무예 집단 기천문(氣天門)의 초대 문주(門主)였다. 현재의 기천문은 2대 문주 박사규(70)가 이끈다. 문주란 문파의 주인이니, 최고 지도자이자 최강 실력자다. 외양을 볼까? 단단한 몸피에 걸친 개량한복은 희어 눈부시다. 머리칼과 수염 역시 세월의 채색으로 허옇다. 전체적으로 허연 작풍이라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도인 티를 느낄 수 없는 형용이다. 그렇다고 티 나는 게 없는 게 아니다. 눈매와 눈길에 공력이 서려 있다. 유난히 순하고 환하고 따뜻한 눈빛이지 않은가. 풍경을 바라보듯 가만히 바라보자니 심지어 동안이다. 도가 익으면 어린애 얼굴이 된다. 나는 그게 도인 티라 믿는다. 예로부터 신선이나 도인은 늙어 어린애가 된다 했다. ‘무(無)’를 공부하는 게 도 수련이기에 내공이 붙으면 내부에 아무것도 없게 된다. 세상에 올 때 붙이고 나왔던 천진이나 순진을 다시 내 것으로 삼게 되는 거다. 해서, 도인 영감님들이 모이면 소꿉놀이하는 어린애처럼 놀았다. 낄낄거리며 장난을 즐겼다. 티베트의 어떤 도인은 숨넘어가기 직전, 옷 안에 폭죽을 잔뜩 둘둘 말아 숨겨두었다. 화장 장작불이 붙자마자 폭죽이 사방으로 신나게 터졌고, 제자들은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터뜨렸다지. 박 문주의 동안과 눈빛에도 장난기가 설핏 비친다. 그나저나, 기천문은 뭐하는 사람들의 모임인가. 불철주야 무예를 닦고, 기필코 도를 얻어 어디에 용하게 쓰자는 건가. 박 문주의 얘길 들어봐야겠다. “기천이란 한마디로 몸을 단련해 지혜를 얻는 수행입니다. 몸으로, 몸짓으로 행하는 ‘반야심경’이자 ‘천부경’이라 할까. 유불선(儒佛禪)을 초월하는 공부라 해도 좋고. 우리 사부 박대양 진인의 전언에 따르면, ‘우주 밖에서 우주를 보는 눈을 얻는 공부’인 게고.” “불가의 참선이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천은 몸이라는 그릇 속에 고도의 정신을 담아내는 수행이라는 얘긴가요?” “육신은 별것 아니라고,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을 닦으라고 선가(禪家)에선 가르치지만, 기천은 몸을 중시합니다. 몸이 어긋나면 마음도 덩달아 망가지는 게 아니던가. 활명(活命)이라, 존재의 기본인 몸의 생명력을 북돋워 도로 나아가는 게 기천의 지향이지요.” “쉽게 말해, 몸으로 닦는 도(道)?” “바로 그거! 그렇다면 기천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우리는 저 위대한 단군 할아버지를 기천의 시조로 봅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권법, 고구려의 선맥(仙脈)으로 간주되는 조의선인(早衣仙人), 신라의 화랑도, 풍류도, 또는 현묘지도, 이 모든 고대의 수련법이 기천과 통하는 거라. 이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를 백그라운드로 삼고 있고요.” 단돈 10만 원 쥐고 입산하다 박 문주에 따르면, 이 나라의 하늘엔 영기와 서기가 구름처럼 흐른다. 단군의 정신을 상속한 과거의 도인들, 역대 조사들, 혹은 영명한 조상들이 죽었으되 영영 시들지 않는 정기로 살아 움직인다는 거다. 기천은 그 상서로운 에너지를 몸 단련으로 내 안에 확 끌어당기는 수련이다. 박 문주는 진도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왔다. 한때 부를 누리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도매상을 해 동종 업자들의 선망을 살 만큼 표나게 이루고 모았다. 돈을 쓸 시간조차 없이 들어오는 돈을 세는 데에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다 IMF 때 와르르 무너졌다. 기천을 만난 건 사업을 하기 이전인 20대 때부터였다. 소싯적부터 태권도, 합기도, 복싱을 야무지게 배워 ‘맞짱’을 뜨면 누구나 고꾸라졌다. 나로다! 나랑 붙을 자, 게 없느냐! 그리 악악 외치며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다닌 시절이었다. 마침내 임자를 만났으니 그가 바로 박대양. 박대양이 서울 약수동에서 선무 도장을 운영할 때였다. 박사규는 이 박대양을 찾아가 한판 붙자 청했다. 박대양은 딱 한 수만 쓰겠다며 대결에 응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결판이 났다. 제대로 힘 한번 써볼 겨를 없이 박사규가 허무하게 나가떨어진 것. ‘아이고, 사부로 모시겠소이다!’ 박사규는 냉큼 무릎을 꿇고 제자 되기를 청원했다. 그 기이한 인연은 발화해 박사규를 기천의 심해로 데려갔다. 박사규는 남대문에서 사업하던 시절에도 기천을 정신의 지주로 삼고 살았다. 사랑으로 섬기고 자랑으로 닦았다. 그러다가 절호의 찬스가 왔으니 사업 부도가 바로 그것. 그는 처자를 서울에 남기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수중엔 단돈 10만 원뿐이었다지. “알몸 하나로 이 산에 들어왔어요. 굴러 떨어지고서야 치고 오르는 법. 고행이 있고서야 길을 보는 법. 사업을 망해먹은 건 오히려 행운이었다고요. 하하핫!”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죠? 벼랑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으라는 게송!” “치열하지 않고서도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있던가? 묵언 3년, 육합(六合, 내공을 연마하는 수련) 고행 3년, 총 6년의 담금질 과정을 거치자 사부께서 비로소 기천의 정수를 귀띔하더라고. 원효의 ‘대승신기론’,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유마경’을 읽으라 하시며. 과연 그 안에 진리가 있었어요. 기천이 우주의 생성 원리까지를 깨닫게 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는 걸, 미래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행법이라는 걸 관념으로가 아니고 온몸으로 느꼈어요.” “입산하지 않고서는 도 공부가 어려운 거예요? 뒤에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홀연히 입산하셨나? 나 하나 좋아라고 닦는 게 도가 아닐 텐데.” “예컨대 바다의 녹조를 가라앉힐 수 있는 건 무엇이던가? 태풍이 아니던가? 태풍이 바다를 한바탕 뒤집어야 본색을 되찾는 게 아니던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탁류처럼 뒤엉긴 삶을, 욕망을, 일체를 버리는 강단으로 한바탕 뒤집어엎어야 정화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계룡산은 예로부터 민족의 성산이자 수련의 장이었으니 마음이 흘러갈 수밖에. 태조 이성계도 이 산 국사봉에서 수련을 했어요.” 세상으로 향했던 눈을 감고, 입을 닥치고, 오직 계룡산을 스승 삼아 정진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게 도.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한 소식 환하게 한 도인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몸 낮추기에 능하다. 겸양은 기천이 중시하는 덕목이다. “남들은 도사라고들 하지만 정진에 끝이 있을까. 그저 수행자일 따름이지요. 명산엔 자고로 항상 지킴이가 있었어요. 그 면면한 전통을 잇는 지킴이, 옛 도인들이 갔던 길을 등불 하나 들고 현대인들에게 안내하는 심부름꾼, 그걸 본분으로 삼고 삽니다. 세상과 남에게 누가 되지는 말자, 죄짓지 말고, 매 맞을 짓 말자, 그걸 항상 숙제로 여기며.” “선하고 깨끗한 삶은 평범한 모든 이들도 미덕으로 압니다. 수행자라면 뭔가 더 진전된 정신으로 거침없이 사는 분들 아닐까? 심중에 바위가 들어앉아 뭐에 휘둘리는 바 없이 자유자재한 존재이지 않을까? 죄짓지 않는 생활 관습은 기본일 테고요.” “앎을 내려놓아라! 이놈아, 앎이 곧 장애이니라! 제자들에게 자주 일갈하는 소리가 그겁니다. 도란 특별한 게 아네요. 알량한 앎에 갇히지 않고, 무릇 모든 평범하고 단순한 것에 진리가 있다는 걸 깨닫는 게 도라서.” “눈이 있으나 없는 것과 같으니 단순한 진리를 무슨 수로 볼 수 있을까. 생활이란 삼엄한 것이라 먹고살기 위해 전전긍긍을 일삼다 파장을 보는 게 인생이기도 하죠.” “그게 뭐지? 사람이 세상에 나온 이유, 그게 뭐지? 수행자는 그걸 생각하는 자라. 세 가지 사명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첫째, 전생에서 닦지 못한 걸 이생에서 한번 시원하게 닦으라는 사명, 둘째는 광구천하(匡救天下)라,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빛을 보태라는 사명, 셋째는 포덕천하(布德天下)라, 널리 덕을 베풀라는 사명! 기천문은 이 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수행 집단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늘 고요히 반성부터 합니다. 사명을 다할 만치 정진하는가, 그런 자성(自省)을.” 투철하게 깨달아 세상과 사람들의 빚이 되겠다! 요약하자면 그렇다. 현란할 것 없는 언설이다. 토 달 것 없이 공감되는 선의다. 그러나 말이다, 도라는 메뉴를 파는 사이비 도사가 횡행하는 세상이다. 누구나 입으로는 선의를 떠든다. 흔히들 시늉으로 설레어 세상에 협찬하는 척한다. 도와 속(俗)의 경계가 자명한 현세를 넌지시 묵시함인가. 45년을 닦은 수행자 입에서 ‘자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건 예사롭지 않다. 먹고 사는 정경엔 섭섭할 게 없다 배운 게 있으면 돌려줘야 계산이 맞다. 얻은 게 많으면 나눠야 한다. 그렇다면 박 문주는 무엇을 나누나? 이루어지는 것 없는 이 탁한 세상에 무엇을 실천으로 보태나? ‘어이, 사람들이여, 기천문에 오소! 여기에 세상을 건널 수 있는 뗏목이 있으니!’ 그는 그리 외치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천 행법을 알리는 일에 주력해왔다. 제자 양성에 공을 들였다. 그게 그가 세상에 가담하는 방식이다. 그걸 비즈니스로 여긴다면 아마도 협량이겠지. 박 문주의 먹고사는 정경엔 이미 섭섭할 게 없다. 하찮은 물욕을 하찮게 여기는 근기가 없다면 무늬만의 수행자이겠지. “기천 수련만 유일한 길인가? 그건 아니라. 기천문이 오직 구도자들의 전당인가? 그것도 아니라. 흔히들 달라이 라마에게서 정신을 구하고, 라즈니시를 애호하지만, 우리 민족의 전통 행법 안에 우리에게 맞는 수련 방법과 정신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 그게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이롭게 쓰여야 한다는 것. 제겐 그 사실들을 널리 알려야 할 소명이 있는 겁니다. 과욕을 부릴 일은 아니고요.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을 벌여놓은 것 같기도 하고.” 2003년 개천절, 남북한 인사들과 해외동포들이 평양 단군릉 앞에 모여 행사를 가졌다. 박사규는 당시 기천무(舞)를 공연해 갈채를 받았다. 기천 행법은 무예이자 춤이다. 기천의 예술적 성격을 직감한 많은 무용가가 박 문주에게 배우기도 했다. 김매자, 육완순, 이숙재 같은 무용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기천의 정신과 춤사위를 수용했다. 인간의 능력이란 개발하면 상상 불허의 초경지에 이른다. 이쯤에서 궁금하지 아니한가? 박 문주가 보유한 그 뭔가 기똥찬 초능력이. 별 시답지 않는 걸 묻는다는 투로 정수리를 득득 긁으며 그가 예화를 들려준다. 내용은 이렇다. 그는 굳이 몸을 이동하지 않고서도 갈 곳을 가는 모양이다. 한번은 산에서 수련하던 제자들 앞에 박 문주가 턱 나타나 독려를 하더란다. 그러나 박 문주는 그 시간, 산 아래 거처에 머물렀을 뿐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게 스승의 심영(心影)이었음을 알고 경악했다. 아아, 스승께서 ‘심영’을 자유롭게 구사하시는구나! “호흡을 멈추고 외공을 써 뜻한 장소에 심영을 보내는 일은 우스울 지경으로, 옛 도인들은 갖가지 초능력을 행했을 거라 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거든. 하지만 수행자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아야 해요. 평범 속에 도가 있다는 자각, 세상에 가급적 많은 수행자가 출현하길 바라는 기원, 그런 게 더 본분에 가깝습니다.” “산에 앉아 모호한 관념이나 낡은 정신주의에 안주한 채 도통했다 자부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것 같아요. 진정한 선지식은 차라리 진흙탕 속세에 있는 게 아닐까?” “과거와 달리 요즘은 산에 도인이 없습니다. 지지고 볶는 저자거리에, 질퍽질퍽한 세속에 차라리 도인이 많아요. 일테면, 피땀 흘려 번 재산을 사회에 쾌척하는 사람들, 또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그들이 도인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밭두렁 잡초를 뽑으며 어느 할머니가 하는 말씀, 야야, 미안하다 풀들아, 여기는 너희들이 살 자리가 아니구나! 그 할머니의 내공 역시 도에 가깝다 봅니다.” “자연을 내 안에 들여놓아 매사 자연스럽게 사는 이라면 그 또한 고수죠. 스승 중에 큰 스승은 자연이고.” 어려운 문자를 쓴 게 없다. 나를 내세우는 폼도 없다. 시종일관 시원한 솔바람으로 방 안을 채운 사람. 도 타령도 이쯤이면 절창이다.
- 2019-08-1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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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00년 답사 ⑥ 위화도 회군
- 아버지를 도와 99년 만에 쌍성총관부를 되찾으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청년 장수 이성계는 30년 남짓 전쟁터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며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승승장구한다. 그동안 고려는 저물어가는 원나라의 국내 사정을 잘 아는 공민왕이 즉위해 반원(反元)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부인 노국공주의 죽음 후 정신병적 모습을 보이며 남색(男色)과 관음(觀婬) 등 변태적인 행동까지 일삼다가, 신돈에게 맡긴 개혁정치가 실패하고 공민왕까지 시해당한 후 신돈의 여종 반야의 소생인 우왕(禑王)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는 등 혼란스러웠다. 이때 중국은 원나라를 대신해 명나라가 들어섰는데 일방적으로 공민왕이 되찾은 쌍성총관부 지역, 즉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니 당연히 자기들이 차지해야 한다며 군사와 벼슬아치를 파견해 철령위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에 고려 조정은 대책회의를 거듭해 문하시중 최영 장군의 주장을 채택, 요동을 정벌하기로 하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리는 한편, 수문하시중 이성계에게도 의견을 물어오니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역설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성계는 지나친 반대에 따른 불이익이 걱정되어 그러면 요동정벌의 시기를 식량이 풍부한 가을로 늦추자고 수정 건의했지만 최영의 주장으로 출병이 강행되어 1388년 5월, 5만 대군의 요동정벌군이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북쪽으로 향하게 된다. 정벌군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장인은 내 곁을 지켜달라는 우왕의 간청에 서경(평양)에 남아 전쟁을 독려하는 가운데 정벌군은 압록강의 위화도에 도착했지만 강물이 불어나 진군을 못하고 이런저런 질병에 병사들이 시달리게 되자 다시 한 번 군사를 돌려달라는 회군을 건의한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속히 요동으로 진군하기만을 재촉하니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과 숙의 끝에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한 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으로 1388년 5월 22일의 일이다. 정벌군이 회군해 남하한다는 소식을 접한 우왕과 최영은 급히 진압군을 수습해 막아내고자 했으나 역부족으로 패배한다. 이후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이 즉위했으며 최영은 유배되었다가 그해 말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된다. 뿐만 아니라 창왕도 1년 반 만에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과 창왕 모두 살해된다. 위화도 회군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온건 개혁파로 상징되는 정몽주를 살해하고 공양왕을 폐위시켜 유배 보내 죽인 후 이성계가 새로운 고려 국왕에 오른다(1392년 7월 17일). 이듬해 2월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역성혁명을 완성한다. 이렇듯 고려 말 혼란기에 변방 세력인 이성계는 중앙 훈구세력인 최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후 온건 개혁을 주장하는 정몽주마저 살해하고 우왕과 창왕은 가짜이니 진짜를 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假入眞) 명분으로 옹립한 공양왕마저 퇴위시킨 뒤 조선을 개국한다. 개국 후 이성계 일파는 왕 씨들을 한곳에 모아 섬을 하나 내주어 편히 살게 해주겠다고 한 뒤 모조리 수장(水葬)해버린다. 살아남은 왕 씨들은 성을 옥(玉) 씨, 전(田, 全) 씨 등으로 바꾸거나 모친의 성으로 바꿔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는 즉위 후에는 왕건을 위한 사당을 지어주는 등 고려 유민들에게 유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최영 장군에게는 무민(武愍) 시호를 내려주고 정몽주는 천하제일의 충신으로 받들어 올렸고, 공양왕은 군(君)에서 왕(王)으로 추봉하고 왕릉을 조성하는 등 민심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 2019-01-3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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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예천 용문면 금당실 소나무 숲
- 금당실 소나무 숲은 인공림이다. 저 옛날, 마을 사람들이 일부러 꾸민 숲이다. 파란도 재앙도 많은 세사(世事). 거센 홍수가 때로 마을을 휩쓸었을 게다. 차가운 북풍이 봉창을 후려치는 세한(歲寒)을 견디기 힘들었을 게다. 해서, 소나무를 즐비하게 심었다. 그 소나무들 쑥쑥 자라 백 살 혹은 이백 살의 나이를 자셨으니 고명한 노구들이다. 늙어 오히려 굳센 솔들이 떼 지어 동거하니 그지없이 푸르러 둥두렷한 숲이다. 물살아, 바람아, 썩 물렀거라! 숲은 그렇게 소리 없는 소리를 내며 마을을 외호해왔다. 비보(裨補)의 목적도 있었겠지. 비보란 지기(地氣)가 센 곳은 눌러주고, 허한 곳은 채워주는 풍수지리의 방책. 숲을 조성하거나 돌탑을 쌓거나 선돌을 세워 기세의 조화를 꾀했다. 조화로운 지세가 사람의 삶을 북돋울 거라 믿어서였다. 그러한들 수시로 찾아드는 삶의 애환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까마는, 비보를 통해 자연의 가호와 힘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궁리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심정마저 실려 갸륵하다. 인디언들은 자연을 어버이라 부르며 진심을 다해 섬겼다지. 금당실 솔숲도 마을 사람들에겐 모성의 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람들이 숲에 안겨 피한 게 단지 물난리뿐이었겠는가. 억누르기 힘든 슬픔과 그리움과 아픔마저 솔숲에서 헹구었겠지. 죄지은 것 없이 억울하게 소박맞은 아낙은 이 숲에서 소나무를 부둥켜안고 사무치게 울었을 것이다. 뼈가 빠지도록 고생해 지은 한 해 농사를 망친 가난한 가장은, 술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꺼이꺼이 울어 간신히 울분을 털어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솔숲을 거닐며 저 헌걸찬 소나무처럼 잘 자라달라고 당부했을 것이며, 어떤 이는 밤의 솔숲으로 들이치는 별빛을 바라보며 일기장에 쓸 감흥을 건져 올렸을 것이다. 숲은 이렇게 깊은 위안을 준다. 삶을 일깨워 세상의 홍진을 견딜 용기를 준다. 숲 바깥엔 찬바람이 아우성을 친다. 잔뜩 웅크릴 수밖에 없는 한겨울이다. 그러나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온기가 훅 끼쳐온다. 석주처럼 우람한 지체를 허공으로 벋은 소나무들이 뿜는 훈기와 향에 추위를 잊는다. 말갈기처럼 성성한 침엽의 빛과, 일체를 보듬은 신성한 침묵에 그저 동화된다. 모든 풍경이 유정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아무 일 없는 채로 즐거워진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난 시간이니 솔숲의 마술이 완연하다. 금당실 마을 안통으로 접어들자 사방팔방, 미로처럼 펼쳐지는 돌담길이 객을 맞이해준다. 솔숲을 에두른 이 마을은 알아보는 눈들이 많은 동리. 일찍이 ‘정감록’은 이곳을 유난한 길지로 쳤다.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았던 거다. 조선의 걸출한 예언가 남사고는 한강을 닮은 장강이 없는 걸 빼고는 한양과 맞먹을 지세라 논했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 터전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는 풍설도 전해진다. 돌담장을 두른 고가와 고택, 서원과 사당의 수효와 격조로 금당실의 유서 깊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대부들도 많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지? 하지만 터가 상서로워 사람도 덩달아 출세한다는 믿음은 실사구시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의 소산이 아닐까? 터가, 땅이, 자연의 영혼이 사람을 차별할 리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무는 우리의 형제이고, 참새도 고라니도 모두 우리와 같은 부족이다. 발길은 다시 솔숲으로 끌린다. 숲의 외부엔 센 바람에 뒤엉겨 허공으로 나부끼는 눈 알갱이들. 냉랭한 저 눈보라. 그러나 내부는 다사로워 설렌다. 온기에 찬 숲의 서정에 겨워서. 숲의 정령이 스멀거리는 것만 같은 환(幻)으로. 탐방 Tip 볼 것도 머물 곳도 많다. 금당실 솔숲은 마을 숲의 전형이며, 금당실 마을은 돌담길과 고건축의 전시장이다. 주로 복원된 구조물들이지만, 오래된 마을의 유서와 미학과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인근에 초간정, 초간종택, 병암정 등 명소가 많다.
- 2019-01-0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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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백년 답사 ⑤
- 젊은 청년 장수 이성계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은 큰 형이 갑자기 병사(病死)하자 조카 대신 형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때마침 반원(反元) 정책을 펼치던 공민왕을 만나 쌍성총관부를 되찾기 위한 전투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를 성사시킴으로써 고려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가 1356년(공민왕 5)으로 무려 99년 만에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은 것이다. 이자춘은 그 공로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고 저택을 하사 받아 개경(開京)에 머물렀다. 이후 동북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영흥(永興)으로 돌아갔으나 4년 뒤 병사(病死)한다. 이성계는 1335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춘이 고려에 협력하여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공을 세울 때에 약관 20세의 청년 장수로 함께 참전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고려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아버지 이자춘의 벼슬을 물려받은 이성계는 동북면 지역의 실세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1361년 10월에 독로강 만호 박의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온 홍건적의 침략에 공민왕이 개경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수하의 사병을 동원, 수도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선두로 입성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원나라에서 여진족 나하추에게 수만의 군사를 주어 이를 되찾게 하였는다. 이들과 맞선 고려군이 패배하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대적케 하였다. 이성계는 나하추 주력부대를 격멸, 격퇴시킴으로써 저물어가는 고려국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30여 년 넘게 전쟁터를 누비며 승승장구하는 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364년 반원 정책을 밀어붙이며 기황후의 오빠 기철 등 부원(附元) 세력을 제거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새 왕으로 임명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쳐들어온 원나라 군사들을 최영 장군과 합동으로 물리친 이성계를 이제 고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고려말 당시 경상도, 전라도 등 남쪽으로는 왜구가 공공연히 침략하여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북으로는 여진족들이 심심찮게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성계는 남으로 달려가 왜구를 물리치고 북으로 올라가 여진을 격퇴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특히 1380년 5월에 침략한 왜구들은 500척이 넘는 대선단으로 쳐들어왔으니 결코 도적떼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포(鎭浦:지금의 군산) 부근에 배를 묶어놓고 상륙한 왜구들은 근처의 전라, 충청은 물론 멀리 경상도 내륙까지 약탈, 방화, 살육을 일삼았다. 정부에서는 진압군을 내려보내니 이때 최무선의 화약과 화통을 이용하여 적의 배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조정에서 보낸 진압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9월에 이르러 남원 운봉과 인월 지역에 주둔하면서 곧 북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을 격파한 것이 이성계이다. 이키섬 출신 소년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포함한 왜구들은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니 이 전투를 황산(荒山) 대첩이라 부른다. 이 황산대첩을 기념하여 1577년(선조 10)에 황산대첩비를 운봉에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후 파편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일제는 강점기간 중 조선 팔도에 세워진 일본 관련 승전비나 석물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 관련 비석과 김시민 장군 관련 비석 등을 비밀리에 파괴하는 등 역사를 숨기려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곳 황산대첩비 파괴도 그 일환으로 저질러진 만행이다. 이렇게 고려말 크게 이름을 떨친 청년장수 이성계는 나하추를 물리친 1362년에는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가 밀직부사에 제수되었다.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화찬성사가 되었다.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오르게 되며 마침내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이루게 된다.
- 2018-12-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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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백년 답사
- ‘덕을 베풀고 의로써 행했다’ 하여 이성계가 목조(穆祖)로 추존한 4대조 이안사(李安社).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기면서 부모의 묘도 이장해 모셨다. 부친 양무장군의 묘가 준경묘(濬慶墓), 모친의 묘가 영경묘(永慶墓)이다. 이곳은 5대손 안에 군왕이 나온다는 왕조 창건 전설이 시작된 곳이다. 한 도승이 개토제(開土祭)때 소 백(百牛)마리를 잡아 올리라고 일러준 것으나 흰소(白牛)로 대신해 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오백년이 됐다거나, 준경묘 사방 다섯 봉우리의 수명이 각각 1백 년이라 도합 조선왕조 수명이 오백년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어렵사리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겨갔지만 악연의 뿌리는 모질고 질겼다. 전주에서 충돌했던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해 온다하여 짐을 꾸려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 덕원(德源)으로 1236년(고려 고종 23))의 일이다. 몽고군의 침략이 수차례 이어지던 때로 고려는 목조대왕을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서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쌍성(雙城: 永興 · 和州) 바로 남쪽인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그 당시 함경도는 원나라의 속령이었다. 원나라가 이안사에게 여러 차례 항복을 요구하니 세(勢) 부족의 현실을 감안하여 수하의 족벌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후 경흥(慶興) 바로 아래 원나라 점령하의 여진(女眞) 땅인 오동(斡東)까지 북상하여 구역 내 수천호(首千戶)를 다스리는 원나라 관직 다루카치(達魯花赤)를 겸하게 된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별세하였다. 경흥(慶興) 남쪽에 장사 지냈다가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으로 이장했다. 이른바 덕릉(德陵)이다. 목조대왕 이안사의 후계는 4남 행리(行里)로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았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함께 나아갔다가 충렬왕을 만났을 때 선친 때의 이주가 배반이 아니라 위험을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아뢰고 의심을 벗었다고 한다. 이후 원나라의 이민족 배척과 여진족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바 그들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하여 오동(斡東)에서 덕원(德源)으로 돌아와 쌍성 지역을 계속 관할하고 지내다 승하했다. 태조 이성계은 익왕(翼王)이라 칭했고 태종 때에 익조(翼祖)로 추존하니 능은 지릉(智陵)이다. 부인 정숙왕후 최 씨의 능은 숙릉(淑陵)으로 남편과 떨어져 모셨다. 최 씨의 상여가 출발하여 지릉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 고개에 이르자 상여가 갑자기 저절로 부서져 더 갈 수가 없어 근처에 장례를 모신 탓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지릉과 숙릉의 사진이나 자료가 없다. 익조 이행리의 후계 역시 4남 춘(春)으로 부친의 벼슬을 이어받았다. 관할지역에 대농장을 유지하며 풍부한 재력으로 사병 2천 명을 관리할 수 있었다. 개경으로 올라가 충숙왕으로부터 하사품도 받아오는 등 왕실과의 관계도 유지하며 지내다가 돌아가니 각각 의릉(義陵)과 순릉(純陵)에 모셨다. 이렇게 고조부 이안사로부터 증조부 이행리를 거쳐 조부 이춘까지 벼슬을 세습하며 영흥, 함흥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조부 이춘의 후계는 장자 자흥에게 이어졌으나 두 달만에 되돌아 갔다. 그 아들 교주(咬住)는 나이가 어려 계모의 흉계를 물리치고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이 임시로 이어받았다. 조카 교주가 성장함에 따라 관직을 돌려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고려 공민왕 때로 반원(反元) 정책에 따라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기로 했다. 공민왕과 이자춘이 협약해 1356년,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했다. 큰 공을 세운 이자춘은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 벼슬을 하사 받는 등 고려국 중앙에 등장했다. 개경으로 올라온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와 함께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했다. 승승장구함과 아울러 벼슬이 높아지게 되는데 천호(千戶) 관직에서 만호(萬戶) 관직으로 높아져 함경도로 떠난 그해 승하하여 함흥에 장사 지내니 환조대왕의 정릉(定陵)이다. 이렇게 이성계의 4대 선조 왕릉은 모두 북한의 함경남도 를 모셔져 있다. 2기는 쌍릉으로 함께, 2기는 각각 모시다 보니 여섯 지역에 나뉘어져 있는데 현재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다. 세계유산에도 포함되지 않은 채 말이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답사꾼들이 찾아가볼 날을 기대해본다.
- 2018-11-26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