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와 친한 지인이 30여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했다. 마음씨 좋은 부인이 그간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했다면서 좋은 차 한 대 사서 여행을 다니자는 말을 꺼냈다. 기왕이면 우리도 BMW 한 대 사 가지고 신나게 다녀 보자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 녀석 왈, “아니, 아버지가 BMW 사서 뭐 하시게요? 그냥 작은 국산차 하나 사서 다니면 안 돼요?” “아니, 뭐라고라?~~~” 지인은 그때 생각만 하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참 내,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라면서 얼굴을 붉혔다.
요즘 자녀를 결혼시킨 부모들이 처음 겪는 갈등은 자녀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차종이라고 한다.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줘야지 하면서 주택 구입이나 전세 자금은 물론 결혼 비용까지도 보태줬다. 당장에 가진 돈이 없어서 무리해서 대출까지 받은 부모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혼부부가 대뜸 외제차를 사겠다는 것이다. 결혼 전에 타고 다니던 차를 계속 타도 될 것 같은데 차부터 근사(?)하게 바꾸겠다는 것이다. 아니 왜 하필이면 비싼 외제차냐고 물을라치면 연비 등을 생각하면 국산차보다 비싸지 않다면서 비교표를 들이민단다.
결론 ① 저네들은 외제차 타면서 부모에게는 무슨 외제차 타령이냐고 들이대는 요즘의 젊은 것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면 내 일로 다가올 수 있다.
결론 ② 아~~~! 결국은 자식도 내 품을 떠나고 나면 남이구나. 남은 것은 내 아내, 내 남편, 우리 둘밖에 없구나. 이제 둘이서 오순도순 사는 게 인생 최고의 목표구나. 그럼 뭘 해야지?
결론 ③ 자식놈들이 뭐라 하든, 주위에서 뭐라 하든 내 살 길 내가 찾아야겠다. 그래, 차제에 BMW나 2대 마련하자. 아니 BMW를 1대도 아니고 2대씩이나?
첫 번째 BMW는 눈치 챘겠지만 바로 ‘버스, 지하철, 걷기(Bus, Metro, Walk)’이다. 사람은 직립인간이 된 이후 걸어 다녀야 뇌가 살아 있다는 신호를 받는다고 한다. 먼 곳으로 여러 날 여행을 가거나 생필품을 많이 살 때는 차를 이용해야겠지만 웬만하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걸어 다니는 게 건강에도 좋다. 근교의 산이나 유적지는 물론 연극 또는 영화 등을 보러 다닐 때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니면 그 재미도 쏠쏠하다. 가다가 아무데서나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구경도 하면서 다닐 수 있다. 특히 지하철에다 기차를 포함시키면 전국구가 되어 방방곡곡을 유람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도시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려면 사전에 고민을 꽤 많이 해야 한다. 버스 번호가 세 자리를 넘어 네 자리까지 있어서 예전처럼 행선지가 머릿속에 선뜻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두 번 갈아타려면 스마트폰의 대중교통 앱을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탈 경우 출구를 제대로 찾아 나오지 않으면 다시 내려가거나 길을 건너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나름 요령과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만큼 생각도 하고 나름 전략을 짜게 만들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까지도 가져다 줄 것이다.
두 번째 BMW는 뭘까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필자가 만든 신조어이기 때문인데 별 거 아니다. 다름 아니라 ‘맥주, 막걸리, 와인(Beer, Makgeolli, Wine)’이다. 술을 안 마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술을 좀 하는 사람은 적절한 음주만큼 인생을 즐겁게 하는 윤활유도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냥 술이면 술이지 왜 하필 BMW냐고 물을 수도 있다. 사실 위스키나 고량주, 소주처럼 도수가 높은 증류주, 도수가 낮은 맥주와 막걸리, 와인과 같은 양조주에다 칵테일까지 곁들이면 정말 다양하게 마실 수 있는 게 술이다. 그중에 BMW를 고른 이유는 나이 들수록 주량도 줄어들므로 도수가 약한 술을 조금씩 즐기면서 마시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와인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점심에도 저녁에도 와인을 마신다. 하지만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으면서도 즐겁게들 식사를 한다. 술을 술술 마시면서 인생을 술술 풀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BMW, 즉 맥주와 막걸리, 와인을 조금씩 맛보기로 한다면 마시는 순서는? 필자가 몇 년 전 유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도 와인도 다 마셔 봐야겠다면서 무엇부터 먼저 마셔야 하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맥주부터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 알파벳 순(B → W)인 데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시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셔야 순하게 취한다는 주당(酒黨)들의 주도(酒道)는 어디나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BMW를 마시는 순서도 영어 알파벳 순서로 보나 도수 순서로 보나 B → M → W가 된다. 도수 또한 맥주가 4~5도, 막걸리가 6도, 와인이 11~14도 아닌가. 지하철을 오르내리기 싫다면서 버스타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에 맞춰 다니기에는 지하철이 최고라면서 지하철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버스건 지하철이건 편한 대로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BMW 중에서도 맥주나 막걸리, 와인 어느 한 가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것저것 다양하게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맥주와 막걸리, 와인도 메이커에 따라 조금씩 향과 맛이 다르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긴다면, 또 가끔씩 순서를 바꿔 마시면 그보다 좋은 재미가 있으랴.
요즘 다양한 국내 여행 패키지가 나와 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라도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출발 장소까지만 가면 그 다음엔 다 알아서 데리고 다닌다. 2박 3일이면 두어 번 정도는 자유 시간을 주면서 식사도 알아서 해결하도록 한다. 이때 그 지역의 막걸리 등 토속주를 맛볼 수 있다. BMW 2대를 가지면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이유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술잔 수를 세며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에 ~~~ 차갑고 매서운 바람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할 것인가? ~~~”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송강 정철 선생의 ‘장진주사(將進酒辭)’의 일부분이다. 아무리 약한 술이라고도 해도 한없이 마실 수야 없지만 ‘적중이지(適中而止)’, 즉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아는 주당이라면 그 아니 즐거울소냐. 에헤야디야,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누구나 깊은 잠을 원한다.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은 건강과도 연결되며 성격의 변화도 줄 수가 있다. 그 대처 방법으로 고심 끝에 침대를 바꾸었다. 결과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서로 달리 살아온 젊은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고, 한방 한 침대에서 영원토록 나란히 자는 일을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신혼의 시절에는 그렇다 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잠자는 습관이 다르면 짜증이 나고, 아침에 일어나면 개운치가 않아 부부싸움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남편의 잠자리 습관*
필자는 한자리에서 옆으로 누워 얌전하게 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포근하고 아늑하게 하얀색으로 꾸민 잠자리에서 다소곳이 자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에 남편은 이불을 돌돌 말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험한 잠을 잔다.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이불을 따로 덮기로 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남의 이불까지 끌어가서 감기가 들 지경이니 다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몽륜병 환자처럼 잠자리를 옮겨 다닌다.
남편은 몸에 열이 나서 한군데 얌전하게 고이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건만 한참을 자다 보면 옆에 남편이 없다. 잠결에 깜짝 놀라 일어나 돌아보면 거실 소파에서 천연 덕스럽게 자고 있는 것이다. 또 어느 날은 다른 빈방에서 푹 퍼져 자고 있다. 하룻밤에도 온갖 군데 이불을 끌고 다니며 잔다. 거기까지는 참을 수가 있다.
새벽녘, 다시 돌아와 필자가 곤하니 자고 있는 침대로 들어 와 꽝하고 옆에 누워대면, 침대가 순식간에 꿀렁거려 필자의 몸은 위로 펑 튀기면서 그만 잠에서 깨고 만다. 조금만 움직이는 소리에도 예민한 필자에게는 눈이 휘 동그래질 일이다. 보통 화가 나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 잠결에도 온갖 인상을 찡그리며 말싸움이 시작된다.
더구나 얼굴까지 맞대고 드렁드렁 코까지 골아대면 하마 코끼리가 따로 없고, 그때부터 필자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렇다고 필자가 베개 들고 다른 방으로 가기도 그렇다. 가만히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 얼굴 한대를 세게 때려본다. 제발, 얼굴 좀 돌리고 코 좀 골지 말라고 조용히 귀에 대고 말한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괴물소리가 멈춘다.
그나마 남은 미운 정이 각방을 쓰면 더 멀어질 것만 같아 아직은 각방을 안 쓴다.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하건만 도통 반복만 거듭되니 밉기만 한데, 어떤 방법이 없었다.
*침대를 바꾸던 날*
이런저런 생각 끝에 위대한 결론으로 침대를 바꾸기로 했다. 이것저것 고른 끝에 가장 큰 유럽형 킹사이즈에 가격이 만만치 않은 템퍼페딕 명품침구로 새 살림을 장만했다.
일단은 사이즈가 넓으니 거리감이 있어 아주 좋았다. 더구나 쿠션이 일반 침대와 다르니 옆자리의 움직임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잘 샀다는 생각으로 가운데를 남겨놓고 양쪽 사이드에서 선을 긋고 자기로 했다.
좋은 방법이었다. 운동장처럼 넓은 침대에서 그것도 적당히 단단해 꿀렁거리지 않으니 잠이 저절로 왔다. 역시 침대는 비싸고 좋은 것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 후로는 새로운 잠자리에 적응이 되어가며, 푹신하면서도 인체의 굴곡대로 쑥 들어가 편안하니 단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물론 사방 팔방으로 옮겨 다니는 남편의 고질병은 고칠 수가 없는 체질적인 문제였다. 그나마 새로 산 넓고 좋은 침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부부싸움은 적당히 체념을 하면서 줄어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웬만하면 참는 습관도 적당히 늘어갔다. 세월 속에 잠버릇도 조금씩 양보를 하며 변해가고 있었다.
부부는 억지로 라도 참고 살다 보니, 모든 것이 닮아가는 것 같았다.
남편! 남의 편이라 남편이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남편과 만나 사랑하고 그 결실로 결혼이라는 종착점에 도착,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 해도 영원히 남의 편이란 생각이 든다. 각기 다른 삶 속에서 몇 십 년을 살아온 개체들이 완벽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함께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다툼이 없다면 그것은 어쩌면 사랑의 결핍이 아닐까 싶다. 남편과 아내는 미움으로 질펀하게 얼룩진 과정에서 그 삶의 고통까지 오롯이 사랑과 함께하기에 부부라 하는가 보다.
필자 세대도 그렇지만 요즘도 결혼하면 누가 먼저 기선을 잡을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신혼 시절에는 남편이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목소리가 높았다. 한번은 퇴근하고 돌아오는 ‘어여쁜’ 남편을 위해 맛있는 볶음밥을 정성껏 준비해 놓았다. 남편은 얼굴이 환하게 변해 “웬일이냐”며 함께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잘 먹던 남편이 갑자기 자기 엄마가 해주던 볶음밥이 1000% 맛있었다고 신소리다. 당연히 필자는 기분 확 잡쳤고 듣다못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나도 질 수 없다’는 듯 남편은 목청 데시벨을 한껏 높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더니 그 맛난 볶음밥을 뒤집어엎었다. 그리고는 문을 꽝 닫으며 나가 버렸다. 필자는 무섭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다. 남편의 나쁜 버릇을 고쳐줘야 했지만 필자도 어린 새댁이라 벌벌 떨기만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어쩔 수 없이 혼자 남편 욕을 해대며 그 아수라장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런데 아무리 참아도 분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그 설움은 며칠 후 폭발했다. 남편이 집에 왔는데 얼굴 보기가 너무 역겨워 얼른 침실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엉엉 울어댄 것이다. 필자는 “오로지 당신 하나 믿고 결혼했는데 이렇게 사람 맘 멍들게 하면 어떻게 하냐”며 소리 내어 ‘엄마’를 불러댔다.
마음 약한 남편은 필자의 강경 반응에 기가 질렸는지 그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난리가 났다. 엄청나게 확산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서 끝내는 두 손 두 발 총동원해 싹싹 빌었다. 결국 첫 신혼부부 싸움은 필자의 100% 승리로 끝났다.
그 후로는 큰 다툼이 벌어지면 일단은 필자가 먼저 소리를 지르며 기선을 잡아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특별히 많은 필자가 펑펑 흐르는 눈물로 한 많은 하소연을 털어놓으면 남편은 “제발 울지 말라”며 끌어안고 달랬다.
물론 남편이 하는 귀여운 저항이 있긴 하다. 슬며시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항도 오래 못 간다. 바로 전화를 걸어온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며 푹 가라앉은 풀 죽은 목소리로 동정을 사려고 한다. 그러면 필자는 “됐어” 라고 당당하고 시크하게 대답해 보지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필자 또한 뒤틀렸던 마음이 사르르 누그러진다.
‘사람이 죽기도 하는데 또 어쩌겠는가’ 하면서 상처 난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래서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는가 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한평생을 살면서 어찌 조용하기만 하겠는가? 싸우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들어가는 것이다. 또 다투고 밖으로 나가 봐야 결국은 갈 곳 없어 집으로 향하는 삶이 결국은 인생을 채워가는 것만 같다. 남녀가 만나 부부라는 무촌이 되고, 그 촌수는 언제라도 돌아서면 남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식을 낳으면 상황은 다르다. 자식들이 삶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아내는 시골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서울서 다녔다. 사춘기이고 객지에서 외롭게 보내던 처지라 단짝처럼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다. 훗날 아내는 필자와 결혼하고 아내 친구는 은행원을 하다가 전직하여 건설회사 경리책임을 맡아보는 사람과 결혼했다.
아내 친구는 피아노를 잘 쳐서 필자 결혼식에 피아노 반주를 해주기도 했고 집에서 아이들 피아노 레슨도 했다. 남편이 술 먹고 오는 날에는 피아노로 유행가를 쳐서 노래 한 곡 뽑도록 하기도 했다. 그 집에서 피아노는 보물 1호라 할 만큼 애틋한 물건이었다.
신혼 초에는 필자, 아내, 아내 친구와 남편이 식사도 여러 번 했다. 아내 친구네가 지방에 건설공사 경리책임자로 나가 있을 때는 필자 부부가 놀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끼리 친한 것이니 남편끼리는 아내를 따라다닌 정도여서 사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는지도 모르고 아내들이 수다를 떠는 동안 조용히 옆에서 죽치고 앉아 술이나 마시는 정도였다.
그 당시 필자는 17평짜리 아파트 전세를 사는 형편이었고 아내 친구네는 분당에 아파트(평수는 기억이 안남)를 분양받아 살고 있었다. 겉으로 는 부유하게 보였으나 아파트 분양대금을 은행에서 융자받고 친척들한테 빌리기도 해서 빠듯하게 살아가는 형편이란 걸 나중에 짐작만 했다. 그 당시는 모두 집 살 때는 빚을 지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내 친구 남편이 다니던 건설회사가 부도가 났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되자 아파트를 팔고 단독주택 2층으로 전세를 들어가게 되었다. 아내 친구는 자기가 쓰던 피아노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니 필자보고 사 달라고 했다. 필자도 봉급을 재형저축에 들어 금전적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작은 아파트라 커다란 피아노를 둘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결국 피아노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필자 부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내 친구는 아내에게 커다란 실망과 배신감을 느꼈다.
그 후 아내 친구는 아내에게 모든 연락을 끊어버렸다. 전화해도 받지 않고 집에 찾아가니 “내가 널 찾을 때까지 오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풀어지겠지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 친구는 다시는 아내를 찾지 않고 있다. 너무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연락처도 모르고 백방으로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길이 없다. 필자 부부 결혼식 앨범을 넘기면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내 친구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아내 친구는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다. 이 사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허전하다.
필자는 아내 친구를 아내에게 찾아주고 싶다. 만약 찾게 된다면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피아노를 못 사준 것에 대해 진정으로 무릎 꿇고 사과하고 싶다.
‘이제 용서할 만큼 세월도 흐르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좁은 방에 피아노를 두면 잠자리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지 그 피아노에 당신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결혼식에서 말한다. '이 결혼을 통하여 이제 몸과 마음이 한 몸이니 머리카락이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싸우며 파뿌리가 되기도 한다. 부부는 한 몸이 되어 자식을 낳고 연대감을 가지며 가족을 보살피고 양육의 의무를 나눈다. 이러는 사이 사랑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한 몸 인줄 알고 일을 벌이면 알 듯 모르겠고 모르는 듯 알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겠는가.
결혼 초 시집에서 함께 살았다. 필자는 막내 며느리였고 근처에 시누 두 사람이 살았다. 필자는 남편과 7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시어머니는 늘 몸이 안 좋았다. 형제가 10명 이었다. 기본적으로 시부모님을 좋아했다. 시아버님의 근면한 모습과 시어머니의 후덕한 부분이 좋았다. 남편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했고 온화한 가정의 분위기를 만드시는 분에 안도했다.
그런데 신혼이었지만 남편은 함께 저녁을 먹기 힘들 정도로 귀가 시간이 늦었다. 필자는 종일 시부모님의 손님과 시누들의 접대로 쉴 새 없이 차를 타고 과일을 깎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가사 도우미도 있었지만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기야’ 소리에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지냈다. 손님이 많은 날은 방문객이 20여명 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귀가하자 오늘은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더니 엄마에게 가서 따지겠다고 했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필자가 원하는 것은 한 마디였다. “수고했구나.”
남편이 첫 월급을 가져오는 날이었다. 내미는 봉투가 뜯겨 있었다. 명세표를 보니 돈이 비었다. 순간 필자는 “혼자 벌은 것이니 혼자 쓰든지 다 채우라”고 했다. 미리 시부모 용돈과 자신이 쓸 것을 빼고 남은 금액이라 얼마 되지 않았다. 화를 내어 고쳐졌고 그 후 필자는 살림을 도맡아하기 시작했다. 제할 것도 필자가 했다.
남편은 회식이다 접대다 많은 출장으로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필자보다 먼저 귀가하면 벼락이 떨어졌다. 육아와 살림과 일을 하는 필자는 늘 종종거리며 다녔다. 동등한 관계를 원하면 대책 없이 하는 말이 있었다.“힘들면 하지 마.“ “남자랑 여자랑 같니?" 그리곤 슬며시 다리 안마를 해줄까 물어오곤 했다.
바꿀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날선 요구보다 포기를 익히게 된다. 부부싸움이 ‘칼로 물베기’라고 하는 이유는 처음 사랑했던 순간의 떨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참아낼 수 있으며 오히려 배려를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한다. 엄마들이 많은 세월 남편도 품고 자식도 품고 친척도 품고 품으며 살은 과정을 이제 나도 가는 것이다.
갑(여)은 을(남)을 중매로 만나 2011년 1월 3일 혼인하였다. 혼인생활 중 을은 갑과의 성관계를 극도로 꺼려왔다. 한 달에 겨우 2~3회 정도로 드물게 이루어지는 성생활에서도 제대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갑은 혼인 직후부터 임신을 원하였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을은 2011년 9월 24일 불임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을에 성기능 장애가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무정자증과 선천적인 성염색체 이상인 것으로 판명됐다. 이에 갑은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惡疾),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을을 상대로 혼인의 취소를 청구하였다. 갑의 청구는 인용될까.
A(남)와 B(여)는 1999년 5월 21일 혼인신고를 했다. 그 무렵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 1999년 7월경 A의 학업을 위해 함께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부부는 A의 유학생활 이래 한 차례도 성관계를 하지 못하였고, 7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성관계가 없었다.
그런 이유 등으로 불화를 겪던 남녀는 2007년 1월경부터 별거생활을 시작하였다. A는 B가 정당한 이유 없이 성관계를 거부하고 회피하였다는 이유로 이혼청구를 하였다. A의 이혼청구는 인용될까.
사례 1에 대하여 혼인의 취소 사유 중에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 기타 중대한 사유’의 예로서 성병, 불치의 정신병이 해당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례처럼 성염색체 이상, 무정자증으로 인한 불임의 문제가 있는 경우 대법원은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 기타 중대한 사유로 판단하고 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갑이 을을 상대로 한 혼인취소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례 2에 대하여 부부 사이에 성기능 장애가 있다고 하여 무조건 이혼사유가 되지는 않는다. 부부 사이에 합심하여 전문적인 치료와 조력을 받아 정상적인 성생활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 없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경우 ㉡성적 기능의 불완전으로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한 경우 ㉢부부 상호간 성적 욕구의 정상적인 충족을 저해하는 사실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이혼 사유가 된다.
위 사례 2의 경우 A가 B의 성관계 거부를 이유로 이혼을 청구한 것인데, A의 성기능 장애에도 불구하고 만일 B에게 위의 3가지 이유가 존재한다면 A의 이혼청구는 인용될 수 있다.
반대로 B가 A의 성기능 장애를 원인으로 이혼 청구하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 성기능 장애는 이혼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위 ㉠, ㉡, ㉢의 경우에는 이혼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심인성 음경발기부전증의 경우, 무정자증으로 생식 불능이고 성적 기능이 다소 원활하지 못한 경우, 일시적 성기능 장애, 부부 사이에 단기간 성적 접촉이 없는 경우, 임신 불능의 경우는 이혼 사유가 되지 않는다.
만일 A에게 성기능 장애가 있고 성적 불능에 이른 상태라면 B의 이혼 청구가 인용될 수 있겠다.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아주 오래된 부부는 아주 오래된 추억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가수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 노래의 가사를 읽어본다.
1절=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 우리가 느낀 실증은 이젠 없을 거야
2절=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을 하지 / 가끔씩은 서로의 눈 피해 다른 사람 만나기도 하고 자연스레 이별할 핑계를 찾으려 할 때도 있지 / 하물며 이미 아주 오래된 부부는 의무감으로 같은 집에 살기는 하지만
필자 부부도 그냥 오늘 하루도 평안하다는 핑계로 어제가 오늘 같더라도 안 좋은 별일만 없으면 감사한 일이지 하고 무덤덤하게 하루를 지내는 오래된 부부의 일상이었다. 많은 나이 든 부부처럼 일과를 묻는 것도 안 하고 설렘은 더욱 멀어진 지 오래. 사랑으로 시작한 인연이 정으로 살다가, 법으로 살다가, 그냥 의리로 살면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면서 의미 없이 사는 듯한 인생이 돼버렸다.
미니자서전을 작성해보려고 삶의 흔적으로 꺼내는 과정에서 생각도 꺼내고, 사진과 메모지도 꺼내는 과정에서 크레파스로 혹은 사인펜으로 삐 둘 빼둘 쓴 두 아이의 효도를 약속하는 귀여운 그림과 함께 쓴 편지가 보인다. 사랑하고 효도한다는 단어가 이어진다. 아이들 키울 때 힘들었을 텐데 이런 순간순간이 있어 힘든지 모르고 살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사진을 돌려보면서 감동한 날이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본 신혼 때 모습과 아이를 함께 키우던 우리의 젊은 모습을 만난 것이다.
큰아이를 임신하고 아이를 기다리는 임신 막달에 앨범을 미리 사놓고 맨 앞장에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면서 작성했던 내용을 보면서 눈물이 나고, 어린 두 아이를 그토록 많이 안아주고 좋아하신 이미 돌아가신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부부는 가슴이 먹먹해진 하루였다. 아이를 목말 태우면서 환하게 웃는 남편의 사진을 함께 보면서 ‘여보 이랬었네요. 멋진 인생이었어. 기운 냅시다. 파이팅’>을 입으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의미 있는 오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