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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기질
- 백수는 옛말로는 한량, 지금 용어로는 프리랜서가 아닐까. 백수는 여유있게 산다. 경제적으로 반드시 풍부하지 않지만 정신적 자유를 만끽하고 산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 퇴계 이황, 이덕무, 이익, 김시습, 김삿갓 등이 대표적인 백수가 아닐까. 백수가 되는 동기와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공통적인 기질은 구속받고 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리라. 연암 박지원 선생은 과거에 일부러 붙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알려진다. 주위 기대에 떠밀려 과거 보러 가면 시험지를 안 내고 나오거나 문제에 대한 답 대신 관련없는 그림이나 낙서를 제출하였으니 낙방을 자초하였다고 보여진다. 어렵게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도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잘못되면 귀양가거나 사약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생명을 거는 위험한 곡예이었다.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보아 과거에 태어났으면 당연히 백수가 되었을 것이다. 백수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류를 즐기거나 저술활동을 하는 등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10여년 전에 자의반타의반으로 백수의 생활의 접어들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아니 즐기는 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자유를 즐긴다. 백수도 생활을 하여야 하니 아주 일을 안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양심과 철학에 거슬리지 않는 일이 주어지면 한다. 단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무턱대고 일을 선택하지는 않을 따름이다. 일이 주어지면 하고 일이 없으면 하고 싶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쉰다. 정기적인 직장인이나 사업가에 비해 극히 적은 수입밖에 벌지 못한다. 그래서 단순, 소박하게 사는 방법이 몸에 배었다. 차를 처분하고 채식위주로 식사하며 골프를 안 치는 등 단순한 삶을 산다. 마음이 편하니 물질적인 부족은 큰 문제가 아니다. 친구 중에 존경하는 백수가 있다. 15년 전에 대기업 임원을 과감히 그만 두고 백수로 산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려 수많은 페친을 유지한다. 일년에 몇 차례씩 페친들의 요청에 의해 전국유람을 다닌다. 상당한 글 솜씨와 풍성한 이야기거리를 지니고 있어 출판이나 강의 요청을 받아도 그럴 수준이 아니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글도 절대 유료로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닌다. 그래야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고 한다. 마음에 안 맞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한다. 그래 별명이 골통이다. 백수 사부로 모셔야 할 친구이다. 백수도 등급이 있는 셈이다. 도저히 넘겨 보지 못할 수준이다. 백수라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 결국 나이가 들면 다 백수로 돌아간다. 욕심내지 않고 현재의 백수 수준에서 소박하고 멋있게 살려고 한다.
- 2016-11-3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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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걸~걸~걸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선택하고 도전하라
-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자신이 성취한 일이나 행복했던 때를 많이 떠올린다면 말 그대로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부정하거나 공포 또는 분노, 후회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호주에서 오랫동안 호스피스 활동을 하던 한 작가 겸 작사가 브로니 웨어가 라는 책을 펴냈다.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무엇을 가장 후회할까? 가장 후회하는 일이 무엇인지 미리 알아두면 후회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첫 번째 후회는 ‘내 뜻대로 살걸~’이다. 삶이 다 끝나고 있음을 받아들이면서 뒤를 돌아다보면 그 많던 꿈들이 꿈으로만 남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는 것도 인정할 것이다. 월급쟁이이든 자영업자이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족을 위해 할 말 제대로 못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자책하기보다는 내가 이룬 꿈들에 대해 성취감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인생의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더 바라보자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남들이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위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늘 내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때로는 남의 기대나 남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살기 위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나이 들어 후회를 적게 한다. 두 번째 후회는 ‘일 좀 덜 할걸~’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게 되는 후회 중 하나다. 우리나라는 연간 근로시간이 2124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멕시코에 이어 가장 많다. 일 때문에 바쁘다고 가족을 등한시하다가 어느 날 돌아보니 부부 사이는 냉랭해져 있고 아이들은 성인이 다 되어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출세를 위해서는 성공한 삶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배우자, 자식으로서의 역할에는 빵점에 가까운 인생이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일에 인생의 전부를 걸 것이 아니라 마음과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 자신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을 챙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후회는 ‘내 감정에 더 솔직할걸~’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산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참고 인내하며 산 인생이 대부분일 것이다. 부부간의 평화, 가족의 평화, 직장 동료와의 평화, 인간관계의 평화를 위해 참고 또 참다가 어느 날 보니 늙고 병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이 보인다.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화병(火病)도 결국 지나치게 참아서 생기는 병일 것이다. 화병이 생기면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자신만 손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속내를 표현하면서 살아야 한다. 물론 상대에게 비수가 되는 말은 피해야 한다. 솔직하면서도 시기적절한 표현이 화를 줄여주고 스트레스도 낮춰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말도 않고 끙끙 앓으면서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것보다 속마음 터놓고 이야기함으로써 오해와 앙금을 푸는 것이 훨씬 미래지향적인 방법일 것이다. 네 번째 후회는 ‘친구들 좀 챙길걸~’이다. 나이 들면 마음 편히 연락할 친구가 줄어든다. 이는 누구나 체감하는 일이다. 몇 년 전에 학사, 석사, 박사보다 더 위에 있는 학위가 ‘밥사, 술사’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석사나 박사학위를 가진 친구보다 밥도 사고 술도 사는 친구가 훨씬 더 귀중하다는 말이다. 친구들과 계속 좋은 만남을 이어가려면, 글로 표현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아닥귀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아가리는 닥치고 귀는 여는 자세가 필요하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밥 산답시고, 술 산답시고 저 혼자서만 잘난 듯 떠들어대면 좋아할 친구가 아무도 없다. 대기업 고위 임원으로 지낼 때는 바쁘다면서 친구들 모임에 거의 나오지 않던 사람이 은퇴 후 갑자기 모임에 나타나면 친구들이 좋아할까? 또 현역으로 잘나갈 때도 술 한 잔 안 사더니 은퇴 후에도 계산할 때마다 구두끈 매는 친구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은퇴하고 나면 현역 때와는 달리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므로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밥사, 술사가 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밥사, 술사도 석사와 박사 이상으로 적잖은 노력과 돈이 필요한 것이다. 세칭 ‘마돈나(마지막에 돈 내고 나가는 사람)’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마돈나가 필생의 꿈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후회는 ‘도전하며 살걸~’이다. 원문은 ‘I wish that I had let myself be happier’로 직역하면 ‘나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할걸~’이다. 그런데 왜 ‘도전하며 살걸’로 의역(意譯)을 했을까? 저자의 부연 설명을 보면 이해가 간다. 저자는 행복은 선택이라면서 대다수 사람이 과거의 습관과 관행에 묶여 친숙하고 익숙한 삶을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주장한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만족하며 사는 것처럼 위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습관이나 관행, 친숙함에 젖어 만족하면서 살거나 또는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에 도전하면서 역동적으로 사는 삶이 내 인생을 훨씬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변화에 도전하면서 매사 내 뜻대로 사는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도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의 동력(動力)과 아드레날린이 주는 자극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하는 행복의 전류(電流)가 아닐까? 저자 브로니 웨어의 결론은 원문 그대로 소리 내어 읽을 만하다. 뭐, 어려운 단어도 별로 없다. “Life is a choice. It is YOUR life. Choose consciously, choose wisely, choose honestly. Choose happiness.” 번역도 간단하다. “인생은 선택이다. 바로 당신의 인생이 아닌가. 당신의 뜻대로 선택하고 현명하게 선택하고 정직하게 선택하라. 행복을 선택하라.” 맞는 말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므로 내가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행복한 인생으로 가는 길이다. 행복은 결국 내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현명하고 정직하게 선택한 길이라도 후회가 있기는 하겠지만 남의 뜻대로 사는 인생보다는 후회가 적을 것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6-11-2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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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도변경’된 삶을 통해 시작된 인생이모작 프로젝트
-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날 인생 1막에서 인생 2막으로의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용도변경’이라는 적극적인 자기 변신을 통해 활기찬 후반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용도변경’은 필자의 이름 ‘변용도’를 원용해 만든 단어다. 한자의 의미는 다르지만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도(用途)와 한글 표기는 같다. 필자는 이 단어로 가족을 위한 그동안의 헌신적 삶에서 자신을 위한 삶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또 생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두었던 꿈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47세의 조기퇴직, 금융위기 등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용도변경’된 삶을 통해 사진작가, 강사로 거듭나 현재는 인생이모작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손해보험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필자는 이후에도 보험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지금은 평생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스토리를 오늘 들려드리려고 한다. 47세에 용도 폐기되다 필자는 대학교 졸업 직전 고려화재해상보험에 입사해 20년을 다녔고 촉망받는 직장인이었다. 20년 전에는 임원으로서 부산·경남 본부장을 맡았고, 1977년 12월 말에 해임되었다. 회사에서 쓸모가 없는, 즉 용도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름에 빗대어 ‘용도폐기’되었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금융위기(IMF)까지 닥쳐 재취업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밥벌이를 위해 고육지책으로 창업을 해야 했다. 만화방으로 시작해 부대찌개 음식점까지 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여의 많고 적음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월 40만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 조경관리사로 취업해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회사 마당을 쓰는 마당쇠 역할도 했다. 일당을 벌으려 MBC 드라마 의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퇴직 후 10년간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고 용도변경된 삶을 살기로 하다 필자의 나이 57세 때 두 친구를 갑자기 잃었다. 모두 심장에 이상이 생겨 어느 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다. 퇴직 후 잡다한 일을 하며 보낸 10년을 되돌아보았다. 분명 열심히 살았으나 세월만 쏜살같이 지나가고 내로라할 만한 성취는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두 친구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 100세 장수시대에 어떻게 하면 보람 있는 후반 인생을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40, 50년이 될지도 모르는 노후의 긴 시간이었다. 필자와 같은 세대는 가족을 위해 하기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내 인생이면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사는 삶이었고, 타인을 위한 용도, 즉 타(他) 용도로 사는 삶이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주인공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자!” 필자는 먹고사느라 오래전에 접어둔 꿈을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은 꿈을 실현하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사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은퇴하면 언덕배기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 꿈과 유사한 사진으로 바꾸었다. 붓 대신 카메라를 든 인생 2막의 길이었다. 60세에 늦깎이 사진작가가 되다 필자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자연과 함께하며 감성을 키웠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채화를 자주 그렸던 기억이 있다. 사진은 직장에서 홍보 업무와 사보편찬 업무를 담당할 때 흥미를 키웠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60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사진을 배울 용기를 가졌던 것 같다. 2010년 7월, 필자는 고양시 무료사진 교실에 참여했다. 환경은 열악했다. 초보자 솜씨에 카메라 장비 또한 콤팩트 카메라가 전부였다. 함께 공부한 다른 수강생의 고가 카메라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현실과 형편을 인정하고 사진 실력 향상에만 몰입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 후부터 공인 사진작가 공모전에 도전했다. 공인 사진작가 인증을 받으려면 공모전에 출품해 입선이나 입상으로 일정 점수를 얻어야 했다. 이 목표를 이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 년에 스물여덟 번 응모해 절반을 낙선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멈추지 않고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2011년 9월에 드디어 인증을 받아 공인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진을 배운 지 3년째 되던 해 국전에 입선했고 부산일보가 주최한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작품 ‘닭장’이 좋은 심사평으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사진 부문에서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으로 뽑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러한 결과의 이면에는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가 큰 역할을 했다. 좋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게 배우는 것이라는 말은 옳은 말이었다. 40만장을 찍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2010년 7월부터 지금까지 6년 4개월을 매일같이 사진에 빠져 살았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는 무려 40만장에 이른다. 역산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200여 장을 찍어야 나오는 숫자다. 어느 날은 파파라치로 오인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에 도전해 좌절과 고난의 순간도 있었지만 몰입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24일에는 KBS 1TV 에 사진작가로 출연함으로써 삶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사)은퇴연금협회와 머니투데이 방송이 주최한 ‘The Senior 2016’에 사진 전시 초대를 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을 주제로 사진을 전시했다. 판매 목적이 아니었는데 작품 모두가 팔려나가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사진을 바탕으로 명강사에 도전장을 내밀다 카메라를 들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이 짧기만 하다. 이제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되었고 카메라는 필자의 또 다른 친구다. 100세 장수시대가 두렵지 않다. 은퇴 전의 직업과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뒤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결과가 됐다. 이후 필자는 사진을 바탕으로 또 다른 영역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통한 여가관리의 모범적 사례가 되면서 그 경험을 배우려는 퇴직 예정자와 은퇴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62세에 또 다른 분야인 강사 활동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여가설계, 변화관리 강사로 활동을 넓혀나갔다. 이제는 사진작가로서의 활동보다 강사로서의 활동이 더 많아져 기업체와 국가 산하 인력개발원, 대학교의 평생교육원, 사회종합복지관 등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KBS 1TV , SBS라디오 러브에프엠의 프로그램에 3년간 고정 출연, 토마토TV와 머니투데이 방송에서 특강, 한국직업방송 로 출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을 기회로 전환하는 ‘용도변경’의 삶이 성공의 핵심 필자는 사진작가, 강사로서 삶의 보람을 만끽하면서 평생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제2직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전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지만 과거를 내려놓고 현실을 인정하며 몸집 줄이기(다운사이징)로 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한 ‘용도변경’의 생활 방식이 성공의 핵심 역할을 해줬다. 뱀이 고통을 참으면서 허물을 벗어야 살아갈 수 있듯 환경 변화에 대한 꾸준한 자기 변신, 즉 용도변경을 통한 2차 성장은 인생 2막의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라 생각하고 실천한 결과다. 베풀고 나누면서 다 쓰고 가리라 필자의 오늘은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은혜로 이루어졌다. 이제 그 은혜에 보은할 할 때라 여긴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베풀고 나누는 사회공헌을 위해 또 다른 용도변경, 즉 ‘공(公)용도’를 인생의 최종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과정의 하나로 두 권의 책, 와 를 출간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가보지 않은 길도 많음을 느낀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꿈을 꾸며 도전을 멈추지 않으리라. 필자의 소소한 경험담이 같은 길을 가려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 2016-11-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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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일흔두 살, 바이크와 함께한 유라시아 횡단 '문광수씨 제2인생은 부릉부릉~ 멈추지 않는다'
- 수십 년에 걸친 오랜 회사 생활. 규율과 답답함으로 채워진 오랜 시간을 보낸 끝에 마침내 은퇴한 남자는 그동안 품었던 꿈과 모험을 즐기기 위해 과감한 도전을 시도한다. 소설과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꿈과 모험과 도전의 이야기가 예술작품의 소재로 끊임없이 사용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길 그토록 열망하지만 막상 실현시킨 사람들은 그만큼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문광수(文光洙·72)씨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래서 68세의 나이에 바이크 면허를 땄다. 그가 향한 곳은 유라시아. 일흔이 넘어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바이크 면허는 많이 떨어졌어요. 처음에는 배우다가 다리를 다쳐서 집에서 난리가 났고 일 년을 쉬어야 했죠. 몸이 나았을 때 아내 몰래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멀쩡한 양반이 별 약속도 없는 거 같은데 아침 일찍 어딘가로 가니까 아내가 수상하게 여겼어요. 그것도 한 번에 합격했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자꾸 떨어지니까(웃음).” 새한정보 대표이사로 은퇴한 후 문광수씨가 바이크 면허를 딴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바이크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서였다. 바이크 면허를 따기 위한 좌충우돌 “꿈은 이뤄지든 이뤄지지 않든 갖는 거니까. 면허 합격이 되자마자 바이크를 몰래 중고로 하나 샀어요. 집에는 가져가기가 뭐하니까 바이크 가게에 일 년간 보관하면서 연습할 때 썼죠. 그러고 보니 면허 취득부터 계산하면 바이크를 제대로 타는 데 한 삼 년 걸렸네요.” 마침내 바이크를 집으로 가져 오게 됐을 때 아내에게 들키는 게 두려웠다. 할 수 없이 옆 동에 세워놓고 경비에게 막걸리를 사주면서 잘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바이크를 집 근처에 갖다놓으니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주일 만에 들켰어요. 매일 사라졌다가 한 시간 있다가 들어오곤 하니까 아내가 의심한 거죠. 참 여자의 육감은 대단해.” 어느 날 바이크 덮개가 벗겨져 있었다. 누가 바이크를 건드렸나 해서 경비실 CCTV 영상을 확인해보니 그의 아내가 바이크 쪽으로 가까이 가더니 덮개를 탁 하고 벗겨내는 게 보였다. 별 수 없었다.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계획, 예약, 기약 없는 유라시아 횡단의 시작 문씨는 얼마 전 바이크로 유라시아 횡단을 마쳤다. 장장 3개월에 걸친 여행이었고, EBS에서 촬영을 마친 상태라고 했다(인터뷰를 한 시점에는 10월 17일 프로그램에서 4일간 방영 예정이라고 했다). “연습하고 훈련하고…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 예정이었는데, 처음 가보는 길이라서 계획이란 건 있을 수 없었고, 얼마만큼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 뭔가를 예약할 수도 없었고, 직접 가봐야 모든 걸 알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가 어떠한 계획도 없이 오로지 바이크에 의지해 유라시아를 횡단하겠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운 것은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 “바이크 자체가 자유니까, 아주 자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아무 계획 없이, 예약 없이, 기약 없이 홀로 유럽으로 떠나자는 거였죠.” 바이크 여행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스캠프는 있어야 했으므로 세이브칠드런에 있는 친구에게만 베이스캠프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고등학교 모임에서 그 얘기를 터뜨려버렸다. “처음에는 저 혼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나도 따라가면 안 되나’ 하면서 두 명의 동창이 적극 관심을 보였어요. 바이크 탈 줄 아냐고 물어봤지요. 탈 줄 모르면 못 간다 했죠. 그랬더니 당장 배우겠다더군요. 그 친구들은 2개월 만에 면허를 땄어요.” 여행 중에 닥쳤던 위기들 아무 계획 없이 떠난 바이크 여행. 당연히 아무 사건 없이 진행될 리 없었다. 한 열흘쯤 지났을까 친구 한 명이 어깨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친구를 비행기로 귀국시키고 남은 두 사람만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바이크가 고장이 났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문씨가 운영하는 블로그 이웃이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성분이었는데, 슬로베니아에 살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이분 남편이 슬로베니아 현지인이었는데 엔지니어였죠. 그분이 도와주셔서 바이크를 다시 탈 수 있게 됐어요.” 언어의 문제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 나라 말을 잘하면 좋겠죠. 안 그래도 걱정을 했는데, 여행을 시작하기 전 호주에서 한 부부를 만났어요. 그들도 바이크를 모는 부부였죠. 영어를 잘해서 부럽다고 했더니 ‘너는 한국말을 잘하지 않냐, 러시아에 가면 너나나나 말 안 통한다, 보디랭귀지가 최고다, 언어는 하다 보면 느는 거니 일단 가봐라’ 하면서 용기를 주더군요. 많은 위안이 됐습니다. 여행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은 한계가 있어요. 결국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어디서 왔니? 어디로 가니? 가족은 어떻게 되니?’ 그 정도예요. 질문들이 비슷비슷하니까 나중에는 제가 먼저 묻게 됐어요(웃음).” 바이크 여행은 자유와 낭만이다 문씨는 자신이 숨기는 게 없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성격이 인간적인 매력을 덜 느끼게 만든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여행지와 같은 낯선 장소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특별한 강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게 보통의 여행과 바이크 여행의 차이를 물어봤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안방 여행이라고 봐요. 그에 비하면 바이크 여행은 아웃도어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놓는다는 점에서 자연친화적이고, 그야말로 자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입니다. 제가 원래 체질이 좀 야생이어서 제 성향에 잘 맞는 거 같아요.” 그는 바이크 여행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저하지도 말라고 충고했다. 그의 신념은 ‘무작정 출발해라’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다 똑같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이크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저는 바이크 전문가는 아니지만 바이크를 타고 여행하면서 매스컴이 올바른 정보를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바이크만큼 훌륭한 스토리를 가질 수 있는 여행이 없어요. 유럽에서는 바이크 뒤에 부인을 태우고 다닙니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골길을 바이크를 타고 천천히 감상하는 일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바이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요. 낭만과 자유의 상징으로서 바이크의 좋은 점들을 알려줬으면 해요.” 이제 파미르 고원을 달려보고 싶다 문씨의 기질은 역시 야생이 맞는 것 같다. 바이크뿐만 아니라 암벽등반에서도 화려한 흔적을 남겼다. “저는 삼성에서 30년 동안 쉬지 않고 일만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정말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늘 가슴에 차 있었어요. 일곱 시까지 정확히 출근해야 하고 넥타이를 맨 정장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게 직장생활의 기본이죠. 그런 생활을 30년 가까이 했으니 얼마나 자유가 그리웠겠습니까. 은퇴 후 예순의 나이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대학 때 잠깐 해봤던 암벽등반이 생각나서 입문하게 됐죠. 암벽 전문가인 박준규 클라이머를 찾아가서 사사받았어요. 5년간 굉장히 열심히 했죠.” 설악산에는 암벽등반가를 위한 대표적인 바위가 두 개 있다. 바로 인수봉과 적벽이다. 그중 적벽에서 등반할 수 있는 루트 중 하나는 문광수씨가 개척한 길이다. 이름은 777. 2007년 7월 7일에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준규씨를 통해 국내 정상급 클라이머로 인정받은 그는 65세의 나이에 국내 최고의 전문 등산학교 익스트림라이더의 교장으로 초빙됐다. 바이크로 유라시아를 횡단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을 전적이다. “요즘은 중앙아시아가 매력적이에요. 특히 지구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가고 싶습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키스탄, 중국, 파키스탄이 맞닿는 곳이고 과거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곳이죠. 신라시대 때 혜초 스님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게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친구와 함께 뛰었으면 좋았을 텐데” “보통 사람들처럼 열심히 살아왔고 나름대로 잘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을 하고 보니 그리 잘살아온 것 같지 않더군요.” 문씨는 한국 최고의 대기업에서 임원 자리에까지 오른 비교적 괜찮은 삶을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적’인 삶이라고 평가해주는 인생이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풍경들을 경험하면서부터다. 오직 하나의 틀에만 맞춘 삶을 살다가 무한히 열려 있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경험하면서 그의 생각은 많이 달라진 듯했다. “여행하면서 나름대로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돼요. 밤에는 철저히 혼자잖아요.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가 자기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반성도 하게 되고… 제가 너무 건방진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에 그토록 정신없이 뛸 때, 친구의 손목도 잡고 함께 뛰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남은 여생은 정말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야 철이 드나 싶어요.”
- 2016-11-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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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길, 시니어가 알고 있으면 좋은 꿀팁
- 10월에서 11월은 한창 단풍여행이 이어진다. 광고에도 자주 등장하는 화담숲이나 아침고요수목원은 물론 여러 곳에 있는 허브랜드와 단풍이 좋은 산을 차를 대절해 단체로 여행가는 계절이다. 필자는 동네 통장이나 부녀회장은 물론 각종 모임에 단체 임원을 많이 맡아 일해본 경험이 있어 여행 꿀팁을 모아봤다. 나이 들어도 한껏 멋을 부린다고 치마를 입거나 구두를 신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여행길에서는 불편한 옷차림이다. 박물관 견학 등 편안하게 다녀오는 장소 외에는 운동화를 신는 게 좋다. 산에 갈 때도 등산화가 당연히 필요하지만 오래 걸을 때, 딱딱한 도시의 길을 걸을 때도 등산화가 발이 덜 아프다. 대형버스로 이동할 때 휴게소도 아닌데 아무데서나 차를 세워달라는 분들이 꼭 계셔서 서로가 난감할 때가 있다. 요실금 증세가 신경성이나 급박성으로 있는 분들은 여행 당일에는 가능한 한 물 종류를 드시지 않는 것이 좋다. 여행지에서는 식사를 한 끼 이상 함께하게 되는데 꼭 건배사가 이어진다. 그러나 분위기상 필요할 때만 건배사를 하는 게 좋다. 보기에는 인격적으로 생긴 분들이 가끔 여성 회원들이 나이가 있어 당연히 이해하겠지 하면서 아주 듣기 거북한 19금 건배사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얼굴이 찌푸려지는 일이다. 유난히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목소리가 너무 크고 시끄럽게 해서 함께 여행간 분들이나 맛집에서 눈총을 받는다. 같은 팀의 다른 자리에 계신 분들이나 다른 모임에서 오신 분들과 시비가 붙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렇게 안 좋은 일에 휘말려 함께 간 여행객들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 요즘은 친한 모임에서도 초상권 운운하면서 사진을 함부로 찍거나 영상을 찍는 것을 안 좋아한다. 사전양해도 없이 스마트폰으로 사람을 줌으로 당겨 무작위로 촬영모드에 들어가는 분들이 꽤 많다. 분위기상 그냥 넘겨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따지고 드는 다른 여행객 일행들을 만나면 같이 간 사람들이 아주 힘든 상황이 된다. 사전양해 없이 얼굴이나 영상을 막무가내로 찍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식사시간에 술을 주문해서 드실 때 폭음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놀러가셨다가 폭음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자녀들이 단체나 운영자에게 큰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 누군가 폭음할 경우에는 자제시켜야 한다. 이러한 책임은 함께 간 모든 분들에게 있다. 노래방으로 이동해 나들이를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 차례가 왔을 때 분위기를 위해 한 두곡 부르는 것이 좋다. 노래를 잘 못 부른다고 생각하는 분은 무난한 곡, 예를 들어 모두 잘 아는 ‘만남’이나 ‘개똥벌레’같이 함께 부르기 좋은 곡을 평소 알아두었다가 부르면 좋다. 노래방에서는 무조건 안 한다고 빼지도 말고, 남이 노래하는데 눈치도 없이 마이크 하나 더 있는 것 집어서 함께 부르지도 말아야 한다. 함께 부르기를 청할 때 외에는 잘 들어주고 호응해주는 것이 매너다. 또 상대방이 노래하는데 본인이 노래할 제목을 찾느라 책만 들여다보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이는 배려가 없는 행동이고, 누군가의 기억에 안 좋게 남는 행동이다. 부디 즐거운 여행을 할 때마다 매너 있는 행동으로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상대방 기억 속에 남기기 바란다.
- 2016-10-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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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인생 : 코이카 해외봉사단] 은퇴후 제2의 삶, 지구촌에서 봉사를
- 막연히 생각하는 은퇴 후 삶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고, 이왕이면 내 경험을 살리고 싶다. 여기에 남을 돕는 보람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런 기회는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세계인을 돕는 코이카가 그것. 세계에서 활약한 다양한 시니어를 만나, 코이카를 통해 어떻게 보람 있는 삶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한국국제협력단은 일반적으로 영문명의 약자인 코이카(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1년 4월 정부출연기관으로 설립된 코이카는, 우리 정부의 대외무상원조 전담기관 역할을 담당해 왔다. 미국 정부가 1961년 설립한 평화봉사단(Peace Corps)과 일본의 일본국제협력기구(日本國際協力機構, JICA)가 이와 유사한 기관으로 볼 수 있다. 정부가 미국의 평화봉사단을 모델로 1989년 설립한 한국청년봉사단이 코이카의 전신이다. 역할은 말 그대로 개발도상국 원조사업이다. 봉사단은 개발도상국 주민과 함께 생활하며, 우리의 경험과 기술을 전수함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코이카에서 운영하는 봉사단은 크게 3가지로, 마이스터 고등학교나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드림봉사단과 코이카 봉사단과 중장기 자문단이 있다. 드림봉사단을 제외하면, 자격조건에 ‘나이’라는 단어는 없다. 시니어 향한 문호 ‘활짝’ 열려 있어 하지만 구직난이 심해진 요즘 젊은이들이 취업을 대비하기 위한 ‘스펙 쌓기’용으로, 때로는 정부가 청년실업 문제 대책용으로 활용하면서 ‘청년들이 주인공인 사업’이란 색깔이 덧입혀졌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코이카는 시니어들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있고, 실제로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단원 중 시니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적지 않다. 2015년 12월 기준으로 전체 파견인원 1350명 중에서 50대 이상이 365명으로 27%를 차지한다. 적지 않은 수치다. 여기에 40대 113명을 더하면 중·장년층이 35%까지 증가한다. 70대도 5명이나 활동 중이다. 이에 대해 코이카 월드프렌즈 모집팀의 송희수 팀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은퇴 후의 삶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코이카에서는 이런 분들의 도전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사회에서 쌓았던 지식과 경험을 개발도상국을 위해 베풀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될 테니까요. 각국에서 요청하는 대부분의 자원도 이런 지식과 경험이 있는 인재들입니다.” 봉사단과 자문단 두 갈래 길 시니어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코이카 봉사단, 다른 하나는 코이카 자문단이다. 봉사단은 쉽게 말해 실질적인 기술전수의 성격이 짙다. 교육과 보건, 공공행정, 산업에너지, 농림수산 5개 분야에서 세부 직종을 모집해 현장에서 교육이나 이와 관련한 사업을 실시한다. 5개로 나눠진 분야가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산업에너지 분야는 자동차 정비나 용접, 전기 설비가 포함되어 있고, 농림수산에는 농업과 어업 인력을 모집한다. 대부분 특정 분야의 기술직이다. 최근 현대자동차에선 직원들의 퇴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코이카와 협력 방안이 논의되고 있을 정도다. 대부분 전문직종이기 때문에 전문성 없이는 활동이 불가능해, 외국어 능력보다는 모집직종에 대한 전문성을 우선시한다. 기술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이 중 만 50세 이상, 해당 직종 10년 이상 경력자는 시니어 단원으로 분류돼 배우자와 동반도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코이카 봉사단은 혼자 가는 것이 원칙이다. 봉사단의 임기는 2년이 기본. 현지에 파견되면 최대 3년까지 연장이 가능하고, 귀국 후 재지원도 할 수 있다. 재지원의 경우 횟수 제한은 없지만, 심사 과정에서 가산점이 없어 다른 지원자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 코이카 자문단은 봉사단과는 조금 다르다. 교육과 보건, 공공행정, 산업에너지, 농림수산이라는 5개 분야는 같지만, 정책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코이카 봉사단이 조직의 말단, 그러니까 각 도시의 읍면 단위에서 실무를 처리하는 역할이라면, 코이카 자문단은 각 국가의 정책 결정자들이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임기는 6개월에서 1년이다. 당연히 자격요건도 다르다. 해당 직종에서 10년 이상 실무 경력이 있고, 영어나 현지어로 강의나 보고서 작성이 가능해야 한다. 행정적인 업무가 대부분인 탓이다. 때문에 지원자들도 차이가 있다. 코이카 자문단의 경우 대학교수나 대기업 임원, 공공기관이나 정부부처의 고위공무원 출신들이 많다. 오세훈 前 서울시장이 시장직에서 물러나자마자 르완다와 페루에서 6개월씩 자문단으로 활동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봉사활동이라는 책임감 있어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경험자들은 코이카를 통해 다른 국가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에 단순히 노후에 시간을 보낸다는 개념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직업군인 출신으로 2013년부터 2년간 몽골에서 체육교육 활동과 지역개발 사업을 진행했던 류진현씨는 이렇게 조언한다. “노후의 삶을 계획하는 방안 중 하나로 코이카를 고려할 때는 봉사활동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해요. 국민의 세금으로 활동하는 것인 만큼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노후를 해외에서 즐긴다는 생각으로 도전한다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예산도 낭비될 수 있어요.” 실제로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모집을 담당하는 코이카 월드프렌즈 모집팀의 김혜원씨는 많은 지원자들을 만나다 보면 다양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코이카를 종교기관으로 착각하고 선교활동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이런 종교활동은 코이카에서 엄격하게 제한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또 이민의 개념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려는 경우도 있는데 불가합니다.” 코이카 측에서 원하는 인재상도 류진현씨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문지식과 현지 적응력, 봉사정신 이 3가지를 가진 인물이 코이카가 바라는 인재의 모습이다. 해외체류 위한 생활비, 거주비 등 지원 코이카 봉사단이나 자문단의 파견은 기본적으로 해당 국가에서 필요한 분야에 대해 한국 외교부로 요청이 들어오면, 코이카에서 원조 인원이나 범위를 결정해 파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언제 어느 국가에 수요가 발생할 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코이카 봉사단이 횟수를 정해 놓지 않고 수시로 모집하는 것도, 특별한 희망국가가 있다고 해도 그 바람이 이뤄지기 힘든 것도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자문단의 경우에는 1년에 두 차례 모집한다. 자세한 일정이나 모집분야, 자격을 알고 싶다면 홈페이지(kov.koica.go.kr)를 확인하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 경쟁률은 보통 3대1에서 5대1 수준. 그러나 봉사단에선 한국어 교육분야, 자문단에서 공공행정 중 경제분야는 10대1 이상을 기록하기도 한다. 농림수산 분야는 치열하지 않다. 이렇게 선발이 되면 한국과 현지에서 적응을 위한 별도의 교육을 받고, 전 세계 40여 개국으로 파견된다. 파견국은 주로 아시아 국가가 꾸준한 수요를 보였으나 최근에는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봉사단원이 받는 금전적 지원은 얼마나 될까? 일단 많은 금액은 아니다. 코이카 봉사단의 경우 현지 생활비, 주거비 등이 지원되는데 각 국가의 물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실무자들의 설명으로는 시니어 단원들에게 대략 한화로 월 150만~200만원이 지원된다고 한다. 여기에 2년간의 활동을 마치면 귀국하면 국내 정착지원금을 지원하는데, 월 50만원씩 총 1200만원이 지급된다. 봉사단의 시니어 단원은 일반 단원에 비해 생활비는 2배, 주거비는 1.5배 더 받고 있다. 코이카 자문단의 경우에는 별도의 정착지원금이 없다. 대신 현지 정착비, 생활비 명목으로 월 4000달러 정도가 지급된다. 인생의 후반기 돌아보는 기회 아무래도 해외생활에서 걱정하는 부분은 건강과 안전이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는 코이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현지에서 활동을 해야 할 단원들이기 때문에 건강관리 부분은 가장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 건강검진이나 의료비, 의료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안전도 마찬가지다. 최근 테러 위협이 증가하는 국가들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되는 나라들은 아예 지원 대상 국가에서 제외하고 있다. 또한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코디네이터를 통해 단원들 안전관리를 위한 보호·철수 계획을 수립해 놓고 비상시를 대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파견되는 국가는 기초적인 안전은 보장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코이카의 전신인 한국청년봉사단부터 각종 자문역할로 인연을 맺고 많은 봉사단을 만나 온 이태주 한성대 교수는 유의해야 할 점과 코이카 활동이 갖는 장점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특히 시니어들은 정신적인 건강관리도 중요해요. 한국 남성들, 시니어들은 혼자 서기 힘든 존재인 경우가 많아요. 그랬던 사람들이 현지에선 밥 먹는 거, 양말 빠는 것까지 혼자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겪는 고독이나 정신적인 건강을 주의해야 해요. 하지만 시니어들이 그 난관을 딛고 다녀오면 다른 인생이 열리는 경우가 많아요. 뒤늦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고, 시각도 열리고 유연해져요. 국가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고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려는 시니어들을 보면 되레 제가 감동 받기도 해요.”
- 2016-09-26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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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란법 논쟁, 사슬 끊기가 먼저다
-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 법)은 28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왕창 망했다는 상인들의 아우성이 있는가하면, 특수를 노리는 ‘란파라치’ 양성학원 이야기도 추석 밥상머리의 인기 메뉴였다.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이야기였다. ◇본말이 전도된 김영란법 논쟁 김영란법은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청탁 및 금품 등의 수수를 금지하여 공정한 직무수행을 보장하고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정된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나도록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가 시행을 코앞에 둔 추석 전에야 ‘접대’문제로 논쟁에 불이 붙었다. 3.5.10제에 이르러서 논란의 정점을 찍었다. “한도액이 낮으니 올려야 한다.”고 당연히 접대 받아야 되는 것처럼 주장하였다. 몇 천 원짜리 대중음식점을 이용하는 서민이나 대다수 선량한 공직자도 주위에 많다. 청렴사회를 구현하는 방안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는 이런 논쟁에 가슴이 아프다. 접대를 하여야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누구는 투덜대며 몸조심을 다짐할 테고, 대박의 꿈에 부푼 누군가는 법 시행을 고대할 것이다. 올 추석 백화점 매출은 “건강식품·생활필수품 등 실속형 중저가 상품 판매가 크게 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5만 원 이하 선물 주기 예행연습을 하는 셈이다. 그간 외쳐대던 사법·검찰개혁·특권 내려놓기 이야기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먹이 사슬의 구조 모피아로부터 시작한 관피아·해피아 등은 모두를 옥죄고 있는 먹이사슬의 전형이다. 전·현직이 뒤엉켜있고 혈연·지연·학연 사슬은 우리사회의 가장 큰 폐해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3.5.10제를 국민 앞에 제시하면서 고위 공직자, 사회지도층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수십·수백억 먹이사슬에 묶이고 있다. 국가자격증 자동부여제도를 개선할 때가 되었다. 공무원으로 일정기간 근무 후 퇴직하면 법무사, 세무사, 관세사 등 국가자격증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제도가 있다. 퇴직 후 취업을 일부 제한하고 있으나 ‘자격사 개업’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사회에서는 50초반에 은퇴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그럼에도 고위공무원은 정년퇴직 후에도 공기업으로, 다시 사기업으로 자리가 이어진다. 공공기관 임원은 자회사로, 다시 협력업체로 생명을 이어간다. 토박이도 퇴직하는 그 나이에 ‘물 위의 기름’이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낙하산 타고 무엇을 하겠는가? ◇먹이 사슬부터 끊어라 퇴직 즉시 공무원에 대한 국가자격사 자동부여제도를 시정하여야 한다. 쟈격을 부여하더라도 퇴직 후 상당기간 경과 후에 하여야 한다. 대신 공무원선발을 암기식 시험에만 의존하지 말고, 일정한 경력소유 자격사 중에서 다수를 채용할 필요가 있다. 공직재직기간에는 당연히 자격이 정지되고, 퇴직 후 상당기간이 지나야 자격을 회복하도록 하여야 한다. 퇴직 후 일정기간 취업·개업제한은 근무처, 담당업무를 구별할 필요 없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김영란법이 공직자 등의 의식을 개혁하고 국가를 한 단계 도약시킬 좋은 기회라고 흔히 말한다. 이 법이 국가를 확 개조하는데 일익을 다하기 바란다.
- 2016-09-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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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 2016-08-1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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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문주현 MDM 회장의 돈의 철학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놓은 것, 사회를 위한 나눔으로 거듭나야”
- “어느 언론사 기자가 문주장학재단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내가 환갑이 되기 전에 기금 200억 원 달성이 목표라고 마음대로 쓴 거야. 그래서 당신 때문에 200억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랬지. 그래서 달성해 버렸어(웃음).” 국내 디벨로퍼(부동산개발 업체) 1세대의 대표주자인 문주현(文州鉉·58) MDM 한국자산신탁 회장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비범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문 회장은 자신의 회사와 함께 문주장학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재단은 어느새 회사 자본금보다 더 큰 규모가 됐다. 이제 남부럽지 않은 경력과 성취를 이루게 된 그가 어째서 그토록 사회 환원을 추구하는 걸까? 문 회장이 갖고 있는 돈과 사회, 그리고 시니어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을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준호 기자 jhlee@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만 하는 ‘노예’처럼 살았던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독하게 가난했다. 후배 집에 얹혀살면서 생활비를 벌어 겨우겨우 필요한 돈만 메꿨던 생활. 2015년 매출액 4193억원을 기록한 MDM의 회장이자 한국자산신탁 회장을 겸하고 있는 국내 디벨로퍼 1세대 성공 신화의 주인공 문주현 회장의 20대 시절 얘기다. 가난한 사람이 돈의 소중함을 안다 “그러던 시절, 대학교 3학년 때 모 독지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게 되면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그의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현재 200억 원가량의 기금으로 운용되는 문주장학재단을 갖고 있다. 2014년 기금 100억 원을 달성한 후 불과 2년 만에 그 두 배를 달성한 것이다. 재단은 2002년부터 초·중·고·대학생 17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1년에 장학재단을 세우니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일을 안 하려나 보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만족이잖아요? 내가 약속한 거고 신세를 졌는데, 해야지.” 문주장학재단의 수혜 대상자는 무조건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 선정된다. 그 외 특별한 선정 기준은 없다. 요즘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공부도 더 잘하는 세상이다. 문 회장은 가난한 이들은 돈을 소중하게 쓴다는 신념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세상에 증명한 사실이다. “장학 대상자는 웬만하면 바꾸지 말라고 해요. 다만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면 바꾸라고 하죠. 돈까지 대주는데 공부를 안 하는 건 기본이 안 된 거니까.” 돈이란 내 것이 아니다 문 회장은 장학재단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할 뿐이라는 말이었다. “장학재단을 하다 보니 나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개를 안 해주고 좋은 일을 한다고 소개해줘요(웃음). 아 세상이 이렇구나 싶었죠. 물론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회사보다 자본금이 더 큰 장학재단을 갖고 있어서 그렇겠죠.” 문 회장의 사회를 향한 지원에는 장학재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의 모교에 씨름부를 만들고 공공버스도 운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전국 우승도 다수 경험하는 강한 씨름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마련된 서울책방이 다시 문을 여는 데는 문 회장이 쾌척한 1억원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여자바둑대회에는 2억원을 내놨다. 모교인 경희대학교에도 매년 1억원 이상을 기부한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무엇인가? 내 것인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사회로부터 얻은 거고,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관리하라고 맡긴 겁니다. 이걸 갖고 자기 거라고 유세를 떠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이 내게 관리하라고 온 것은 일정 부분을 사회에 내놔야 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이 사회의 양극화가 해소될 방법이 없고 시장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문 회장의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러한 진실을 우회해서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가 유독 젊은이들에게 기부의 타깃을 맞춘 것도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것은 자기 탓이 아닙니다. 대신 정신이 올바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예술계 쪽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아직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방향에서 검토하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보니 문화예술계 쪽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 있고 자질 있는 사람을 골라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상문학상’처럼 공모를 통해 권위가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아직 밑그림을 정확하게는 안 그렸지만 오페라, 소설, 악기 쪽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재생, 사회를 위한 또 하나의 인생 목적 최근 문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도심재생 사업이다. 그에게 시기가 괜찮은지를 물어보자 확신처럼 ‘해야 할 시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시재생을 지금까지는 자기 지역, 구역 별로 민간에서 했는데 민간이 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앞으로의 세계는 도시가 국가 브랜드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도쿄, 뉴욕 등등을 봐요. 관광할 때 그 나라를 왜 가느냐는 겁니다. 관광은 자연관광과 도시관광으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자연관광이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도시관광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도시 관광 국가로 만들려면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 거주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공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신도시를 마구, 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출산, 저성장기가 도래했다. 더 이상 신도시는 안 만들어질 것이라고 문 회장은 진단했다. 그렇다면 오래된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도시재생이 중요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문 회장은 발 벗고 뛰는 적극적인 ‘전도사’였다. “공청회나 세미나를 하자,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을 토론해보자. 하다못해 광화문, 테헤란로 등등으로 나눠 섹터 별로라도 하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민간과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도시 부동산은 대개 개인 소유라.” 문 회장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관광을 대개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로 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서 보는 게, 결국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지어 놓은 걸 보는 거예요.” 실로 예리한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개발과 보존은 공존해야 합니다. 북촌이나 서촌 같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지역은 보존해야죠. 다만 재개발해야 하는 곳은 과감하게, 제대로 개발해야 합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성공하면서 흔히 강남스타일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막상 강남을 가면 갈 데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밤이 되면 거리는 죽고 뒷골목만 살아난다. 문 회장의 주장대로 도로 옆에 문화공간을 배치하여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진짜 ‘강남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건설회사는 도면대로 짓고, 도면이 없으면 한 삽을 못 떠요.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죠. 반면 디벨로퍼는 지휘자고 소프트웨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상상력을 실현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종합부동산 금융그룹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버타운, 도시와 함께 하는 공간이 되어야 “나이 들어 은퇴하면 인생에 낙이 없어요. 즐거움, 기쁨, 재미가 없어지죠. 젊었을 때는 뭐든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손주에게 끌리는 거겠죠. 나도 늦둥이가 있어요. 지금 제주도에 있는데 ‘네가 아빠 희망이지’라고 말하곤 해요. 손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시니어이자 부동산 전문가로서 문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마음도 꿰뚫고 있었다. “실버일수록 도심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전철, 공원, 병원 옆으로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손주들을 못 보기 때문이에요. 실버가 되면 외롭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전철역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예요. 어느 성공한 시니어가 하는 말이,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맡기고, 장을 보러 간다든지 하면 손주와 함께 있는 게 그렇게 즐겁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지방에 있으니 전화만 하고 안 와서 섭섭하다는 겁니다.” 문 회장은 실버타운을 짓는다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기능적인 구분을 꼽았다. 몸이 불편하여 간병인 등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친구들과 취미 생활 등을 할 수 있는 시니어 타운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두 영역을 합친다 해도 중간에 병원을 두어 병원을 중심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둘 다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공통된 조건이다. “실버타운은 구성원의 특성상 죽음과 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젊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도시와 섞여 살아야 해요. 구분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장은 굉장히 성장할 것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산다 문 회장은 올해로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그에게도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있을까? “사실 후회를 좀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내 청춘이 가버렸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연애를 잘 해봤겠어요? 당구도 못 치지.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삶 자체가 옆을 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아내가 저에게 ‘음악을 알아?’, ‘그림을 알아?’ 하고 물어요. 그럼 저는 ‘몰라’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저는 솔직한 얘기로 너무 안 해본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아요. 내 업무와 내가 하는 부분만 알지. 그래서 요즘은 정말 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비행기로 6시간 이내로 끊어서 가려고 해요. 좀 더 많은 여행을 하는 것, 그게 제 인생을 위한 중요한 일이겠네요.” 문 회장은 아내가 자신을 보며 종종 불쌍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일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그는 일이 없으면 공허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문 회장은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부분을 일로 채우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그게 쉽게 안 돼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비빔밥이에요. 비벼서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그리고 비생산적인 데에는 투자를 안 하려고 해요. 와이프는 왜 남은 도와주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냐고 타박합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는 일이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넘어 입사한 나산에서의 승승장구, IMF 한파로 인한 퇴직, 퇴직 후 MDM 설립과 한국자산신탁 회장이 되기까지. 고난과 성공을 오가며 쉼 없이 살았던 그가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겠다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하든지간에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 참여자들이 만족하느냐, 소비자가 만족하느냐, 사회가 만족하느냐가 기준이었죠. 그래서 저는 디벨로퍼의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다고 했을 때, 이걸 짓다가 멈춰 서버리면 사회적 악이 돼요. 금융사, 시공사, 협력업체, 분양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흉물이 되잖아요. 그만큼 디벨로퍼란 정> 문주현 MDM 회장 1958년 전남 장흥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8년 대입 검정고시를 보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1983년, 27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졸업했다. 1987년 나산실업에 입사, 부동산개발 사업에 발을 들였고, 7번의 특진을 통해 최연소 임원이 됐다. 하지만 나산그룹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부도를 맞았다. 그는 재취업을 고민하다가 1998년 분양대행 업체인 MDM을 만들었다. 2007년 첫 시행사업에 나서기 전까지 ‘분당 코오롱 트리폴리스’, ‘분당 파크뷰’, ‘목동 현대 하이페리온’ 등 굵직한 주상복합 건물의 분양대행을 도맡았다. 2001년 재단법인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 출연금을 200억원까지 늘렸다.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으며 2012년 한국자산캐피탈을 창립했다. 2013년부터 서울시탁구협회 회장, 2014년부터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 2015년부터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 2016-08-1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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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2막 강의 내용 수정
- 이번 부산 중장년 취업 아카데미 과정에서 ‘인생 2막’ 강의를 하면서 강의안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지금까지 써 먹었던 강의 내용은 우리은행 고급관리자 용이었기 때문에 이번처럼 블루칼라 수강자들에게는 안 맞는 내용이 많았다. 은행 퇴직자들은 최소한 아파트 한 채는 있고 연금도 나오고 저축액도 꽤 되는 편이지만, 블루칼라들은 모아둔 재산도 변변치 않고 당장 수입을 만들어야할 처지들이었다. 연금도 아직 나이가 덜 되어 못 타거나 자격이 안 되어 연금을 아예 못 타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너무 돈돈 하지 마라”, “여유 있게 여가 생활을 즐기라”는 내용이 먹혀들 리 없었다. 우리은행 퇴직 예정자들도 5년 전에는 당장 수입이 끊긴다는 것에 초조한 눈빛이었으나 그간 사회적 학습효과 덕분인지 이젠 많이 여유로워 보였다. “초조해봤자 별 뾰족한 묘안도 없고 사실 모아둔 재산이면 밥은 굶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수강자의 대부분인 블루칼라들은 5년 전 은행 퇴직예정자들처럼 당장 수입이 없다는 사실에 초조한 빛이 보였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으니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어렵다고 했다. 맞는 얘기이다. 한두 번 얻어먹었다면 이쪽에서도 한 번은 사야 하는데 마냥 얻어먹을 수만은 없다. 당당히 아내에게 용돈을 달라고 권했다. 평생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다 준 사람이므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했다. 스스로 기가 죽어 그런 말을 못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했다. 먹는데 들어가는 돈은 사실 돌아가면서 돈을 내거나 나눠서 내면 그리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안주 하나 놓고 소주나 막걸리 먹어봐야 일인당 1만원 꼴이다. 그래도 집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 없는 서러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집은 사둔 것이다. 그렇다면 주택연금을 신청하라고 했다. 집을 담보로 어느 정도의 돈을 매달 받게 되면 용돈 걱정은 크게 덜 수 있는 것이다. 집은 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자식들에게 상속해줘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식들도 장성하면 제 밥벌이는 하게 되고 상속이 없어도 잘 살아간다. 자신이 노력해서 장만한 집이니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했다. 앞으로는 집값도 떨어질 것이고 사회적 연금도 선진국처럼 늘어나면 최소한 밥은 안 굶는다는 위안도 필요한 것 같다. 일단 아침에 집을 나서라고 했다. 구민회관 교양 강좌를 나가든, 자기 계발 프로그램에 나가든 무료 강좌가 많고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정보도 얻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전문가가 되어 제2의 직업이 되기도 한다. 현역 때 벌던 수입에 비해 퇴직 후 버는 돈이 너무 약소하다며 취업을 꺼리는 사람들도 많다. 1억 원을 은행에 넣으면 일 년 이자가 200만 원 정도인데 한 달로 나누면 20만원이 안된다. 본인이 월 100만원 수입을 원한다면 은행에 5억 원 이상을 둬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직 후 수입에서 한 달에 50만원을 준다고 해도 과거와 같은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현역 때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장래를 위해 저축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회사에서도 돈을 꽤 준 것이다. 이제 그때와는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업체 임원 출신이지만 음식점 서빙을 하는 사람이나, 경찰 공무원으로 있다가 퇴직하고 건물이나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사람들의 예도 필요할 것 같다. 실패담도 중요하다. 강사들은 수강생들 앞에서 제 잘난 자랑이나 늘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면 강의 효과도 떨어지고 거리감만 생긴다. 우선 내가 전세로 살다가 자칫 전세금을 날릴 뻔 했다는 실화를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전세라니까 일단 비슷한 처지로 볼 것이다. 등기 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내가 계약한 집 주인이 소유권 이전 원인 무효 소송에서 져서 세입자들이 전부 쫓겨날 뻔 했던 얘기이다. 승소 요구 금액이 3억 원이라는 것을 알고 세입자들이 전세를 자가로 매입하고 그 차액으로 3억원을 맞춰 줘서 일이 잘 해결된 경우이다. 임원으로 모신다 해서 취업 했더니 인감도장으로 멋대로 장난해서 낭패를 보게 한 사례도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세무서에서 올바른 판단을 해서 해결되기는 했으나 약자는 어디서 어떻게 이용당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신이 실직자가 되었다고 아내가 돌변했다며 원망하는 경우도 많은 모양이다. 물론 원인 중 하나이겠지만, 마침 갱년기 호르몬 변화가 오면서 생기는 현상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겠다. 인생 이모작 강의는 적당히 시간만 때우려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수강생들에게 경험을 전수해주고 정보를 제공해줘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강의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잡아 살려 나가게 한다면 큰 보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2016-08-11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