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을 재정립하는 시기에 만나면 좋을 다섯 권의 시집을 소개한다. 상황과 사정이 달라 다소 난해하다고, 반대로 오래도록 곱씹고 싶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약한 마음으로 골라낸 문장들을 통해 내면의 공명을 느끼고 세계를 확장해보는 건 어떨까?
슬픔이 택배로 왔다-정호승(창비)시인이 보기에 인생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모닥불’).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증오에 휩싸이고, 그로 인한 번민에 사로잡혀 항상 괴롭다. 시인이 찾은 답은 ‘비움’. 그는 “빈 의자는 비어 있기 때문에 의자”(‘빈 의자’)고, “빈집은 빈집이므로 아름답다”(‘빈집’)고 말한다. 원래 우리 마음은 비어 있으므로 본연의 상태를 유지해야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다는 뜻이겠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으므로”(‘독배’) 삶의 고통과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겠”(‘발버둥’)노라 다짐해보자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신달자(민음사)스무 살에 등단한 후 쉼 없이 시를 써온 신달자 시인이 팔순에 생을 반추한 회상록이자, 자기 몸을 마주하며 밝힌 깊은 고백.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에서 섬세하면서도 통렬한 어조로 나이 든 몸의 고통을 그려낸다. 노화에서 비롯된 찌르는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시인의 하루는 몸을 어르고 달래는 일로 채워진다. 얼음과 숯불 사이를 오가며 먹을 것을 만들어내는 ‘전쟁과 평화가 있는 부엌’은 원숙하고도 고통스러운 노년의 삶에 대한 비유다. “육신이 정신을 앞지르는 나이에 이른” 그는 젊은 날처럼 “내 것인데 내 말을 잘 안 듣는 육신”을 미워하기보다 앓는 몸을 보듬는다.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김경미(민음사)중년은 “고독이라도 얻어야 한다는/ 구름의 귀띔”이 인생의 비기처럼 들리는 시기일까. 고독이 쉬울 수야 없겠지만 “나의 운동은/ 하루에 한두 번씩은 꼭 어두워지기”라고 말하자, 쉽지 않은 고독의 시간이 스스로와 약속한 운동시간을 지키는 일처럼 성실하게 임해야 하는 일상적 생활의 시간으로 변한다. 이번 시집에 이르러 ‘중년’에 따르는 외로움의 감각은 더 구체적이고 예리하면서도 한결 느긋해졌다. 보편적이지 않은 그들 각자의 고독과 외로움이 독창적 생의 요소가 되는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독의 쓰임을 알게 된 사람은 화가 나는 순간 “나이나 반말이나 뿔과 엉덩이 말고/ 간격을 쓰는 것”이 제일 좋은 접근법이자 구분법임을 안다. 시인의 귀띔이 인생의 비기처럼 들린다.
지금 여기가 맨 앞-이문재(문학동네)남의 일을 자기 일로 기억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이문재 시인은 ‘타고났다’고 김종철 문학평론가는 얘기했다. 부단한 자기 집중을 통해 자기를 비우고, 비워진 마음으로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이문재 시인에겐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한층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모두 85편의 시가 실린 ‘지금 여기가 맨 앞’은 4부로 나뉘어 있다. 시집의 해설을 쓴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각 부의 키워드를 봄, 중년성, 사랑/죽음, 시공간의 사회학으로 포착하기도 했다.
의자-이정록(문학과지성사)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한 이정록 시인. 그의 시는 지친 세상을 어루만지는 의미심장한 삶의 증거들과 따스한 웃음이 가득하면서, 눈길 닿는 모든 대상에서 삶의 지혜를 이끌어내고 현재의 삶에 결여된 따뜻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세계를 지향한다. 이에 더해 상처 입은 것들에 대한 애정과, 일상에 지친 모든 이에게 아픔을 내려놓고 쉴 자리를 마련하려는 유난한 마음을 곳곳에서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