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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건만 AnF' 이건만 대표, 인생 2막에 펼친 한글 패션 디자인 ‘제1장’
- 이번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을 맞는 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글을 인식하며 지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매일같이 한글을 떠올리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이가 있다. 세계 최초로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건만 에이엔에프(LEE GEON MAAN AnF)’의 이건만(李健滿·54) 대표다. 읽고 쓰기 쉬운 우리 한글이지만,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글이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는 그의 다부진 말투에는 남다른 사명감이 스며 있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유학 생활을 하며 샘솟았던 애국심이 심지 역할을 했다. “해외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일본어로 된 책은 많고 한국어로 된 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면 한국에 나와 우리 책을 사서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죠. 또, 외국 작가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것을 고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문화를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죠.” 다양한 한국 전통 문양들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중국 문명의 영향 때문에 차별화하기가 어려웠다.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나 사상 등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맺혔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점에 ‘한글’이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티스트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던 그였다. 그러나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 결국 심지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친구가 어느 날 ‘너 1야드에 실이 몇 개 들어가고 넥타이가 몇 개 나오는지 알아?’라고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했죠. 미국에서 공부할 땐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특히 유럽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디자이너가 어떤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한국 섬유 시장은 OEM형태로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도 가르쳐야 했던 거예요. 내가 공부하고 온 걸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소용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겐 ‘21세기엔 디자이너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가 온다. 너희들의 몸값이 달라지고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 말을 들은 의대, 공대 다니던 학생들이 전과를 한 거예요. 덜컥 책임감이 생기고 겁이 나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은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들은 그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는 직급이 올라가도 차장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디자인만 해서는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인데, 멀쩡한 전공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느냐, 내 이야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증명해 내기 위해 그는 교수직을 뒤로하고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만든 것이 지금의 ‘이건만’ 브랜드다. 한글과 패션, 트래디션과 트렌드를 접목하다 2000년,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도 그랬고 현재까지 가장 힘든 점은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파벳처럼 나열문자가 아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입체문자인 한글을 제품에 효과적으로 입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한글이 언어이기 때문에 디자인 요소가 아닌 글자로 읽힌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죠. 한글의 형태적 분석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이 가진 의미에 대해 공부했어요. ‘한글이 대체 우리에게 뭐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런 고민을 디자인에 담으려고 했죠. 디자이너들도 고충이 있죠. 지금까지 디자인한 작업물만 3000개가 넘는데 또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니까요. 우린 다른 곳처럼 카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업체도 없으니 오히려 더 힘들죠.” 그렇다고 그들만 한글 디자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단기적인 작업에 그쳤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만큼 한글을 패션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설명했다. “한글과 패션, 한마디로 트래디션(tradition)과 트렌드(trend)라 할 수 있죠. 어찌 보면 그 두 가지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한글 디자인으로 패션이 아닌 자개함 같은 소품을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저 인사동에서 사는 관광 상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이라면 그런 기념품을 더욱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카프, 넥타이, 핸드백 제품을 디자인하게 됐어요.” 차별화된 전략 덕분에 이건만 브랜드의 제품은 국내외 인사와 패션 마니아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건만 한글 넥타이는 청와대·정부부처·공공기관의 귀빈 의전용 명품으로 납품됐고, 한국 브랜드 최초로 일본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우여곡절도 많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이만하면 성공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에게 ‘성공’이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마 실패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무척 많을 거예요. 아무래도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그만큼 금전적으로 손해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걸 수업료라고 해요. 수업료 굉장히 많이 냈습니다(웃음). 그런데 성공의 기준이 뭐냐. 성공과 출세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출세는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아직 출세는 못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대학에 관련 커리큘럼이 생기고, 많은 유통라인에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점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에 제가 작은 역할을 했다고 봐요. 돈 벌고 유명해지는 출세보다는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 출세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바로 낫씽(nothing)이지만, 성공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역사에 남고 하나의 장르를 열고 패러다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성공입니다.” 디자이너 경영자가 이어갈 ‘이건만 에이엔에프’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점은 ‘이건만 에이엔에프’만의 경영방침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열정을 발휘하는 이 대표는 경력자보다는 신진 디자이너 채용을 우선시하고, 매출의 20%가량을 디자인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목표로 삼은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 월급의 2배를 주는 회사’였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회사와 후배들을 향한 애정으로 에너지가 가득한 그에게도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이가 드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한다고. 열심히 운동하며 자기 관리에 힘쓰면서도 디자이너들의 역량 강화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는 이 대표다. “요샌 나이 드는 게 무섭더라고요. 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는 거 아냐?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쥐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외만 봐도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가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죠. 코코 샤넬이 죽었다고 그 브랜드가 힘을 잃은 것은 아니잖아요. 브랜드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를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우리 직원들에게도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 마케팅, 유통, 소비자 심리 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제 욕심에 그런 거지만, 아마 다들 엄청 피곤할 거예요. 그래도 우리 브랜드를 물려줄 인재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죠.” 그는 한글이 담긴 디자인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또 더 많은 이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힘들고 더디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일이 힘들수록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요.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돈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이 얼마든지 있겠죠. 명예를 위해서? 그럼 대학교수로 남아 있었겠죠. 브랜드를 하나 육성하려면 굉장히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해요. 애초에 요행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르지 않죠. 남들보다 큰 솥을 만들었기 때문에 밥은 늦게 짓더라도 그만큼 더 많이 지으면 되잖아요. 이미 이만큼 달려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요. 끝도 보이지 않지만 그 시작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버렸죠.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돌아가나요? 일단 달리고 보는 거죠.” 인생 2막, 얻는 게 없어도 일단 달리고 본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어쩐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10여 년, 한글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시 후회하는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아마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하고,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가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후회는 안 해요. 그 삶은 지금이라도 다 벗어던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건 후회해요.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유학까지.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겠다 싶어요.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고 사업을 잘하고 세상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러한 후회 역시 이만큼 살아봐서 알게 된 것이라고. 그는 공부하던 30대 중반까지를 인생 1막, 그 이후로부터 현재의 삶을 인생 2막이라고 설명했다. “인생 1막은 어느 정도 계획대로 됐어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점수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그것에 만족할 수 있거든요. 근데 인생 2막은 노력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공부는 정량이 있고 그 조건에 맞추면 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머리 굴리고 있거든요. 변수가 생기죠. 내비게이션이 안 막히는 길을 알려 주면 그대로 가나요? 머리 써서 다른 길로 가는데 또 막히잖아요. 그러니 게임이 안 되죠. 근데 아직은 다 내 것만 같아서 욕심도 내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달릴 수 있는 것 같아요. 2막까지는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없더라도 일단 해보려고요.” 그는 노력하는 만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인생 3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얼마만큼을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1000년 정도 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인생의 룰을 깨닫게 되는 거죠. 아마 인생 3막은 그런 룰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해요.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구분하는 시기인 거죠. 그러면 자연히 무리한 계획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게 욕심을 덜고 농부의 마음으로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끝으로, 그에게 인생 3막은 언제쯤 오리라 예상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철들면 죽는다잖아요. 아마 저도 그냥 이렇게 살다가 눈 감는 순간에 ‘아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한마디 하고 깨닫지 않을까요?”
- 2016-10-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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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섬’에 갇힌 공무원들
- 정부 부처들이 세종으로 옮겨간 지 5년이 지났다. 행정 능률 저하, 시간과 국고 낭비 등의 비효율성은 예상한 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세종섬’에 갇혀 있는 공무원들의 문제가 제기되더니 급기야는 정치권에서 행정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세종시, 정부를 반으로 쪼갠 기형적 도시 ‘세종시의 저주’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세종특별자치시는 기형적으로 탄생했다. 정부의 최고 수뇌부와 일터는 서울에 남겨둔 채, 몸통만 허허벌판 세종으로 갔다. 공무원들은 국회의 잦은 호출에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청사 세종시 이전 후 아직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공무원들은 가족들과 함께 내려가 거주하는 경우가 많지만 장년층 공무원들은 혼자 내려가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세종시로 내려간 후 이직을 고려하는 공무원들이 늘고 있다고 하니 탈(脫)관료 흐름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목요일만 되면 주말을 서울에서 지내려는 공무원들로 세종청사 전체가 파장 분위기가 된다는 현지 소식도 전해진다. '육지의 섬'이 되어버린 세종시의 괴이한 풍경이다. 국무회의 주재와 장관 집무는 세종시에서 정부 부처의 업무 효율성을 위해 이제는 대통령이 세종시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장관의 직접보고를 받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무릎을 맞대고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으면 무엇보다 국민과의 소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장관의 집무는 원칙적으로 세종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각 부처 공무원들을 제대로 지휘하고 사기를 북돋울 수 있다. 물론 청와대와 국회가 서울에 있는 상황에서 세종시에만 눌러앉아 있을 수 없는 입장도 이해는 되지만 공무원들의 기강해이를 탓하기 전에 장관부터 세종시에 상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최근 ‘성과급제’ 문제로 노동현장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공무원도 능력만 있으면 대기업보다 더 많은 연봉과 파격적인 승진 기회를 보장해 사기를 올려줘야 한다. 그러면 유능한 인재의 보신주의 행태가 사라질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공무원 숫자를 줄이면서 처우는 개선해 소수 정예화 방안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누구나 살고 싶은 명품도시로 이제 와서 정부청사의 세종시 이전을 뒤집을 수는 없다. 세종시 이전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려면 주저앉아 있는 공무원들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는 대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장·차관은 서울에, 간부들은 길 위에, 실무자는 세종청사에 떨어져 있는 비효율적인 행정 시스템부터 수정해야 한다. 정부 부처와 국회와의 업무도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처럼 국회의 시도 때도 없는 호출에 공무원들이 서울을 오가느라 업무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1급 이상의 정무직 외에는 국회 호출을 엄격하게 금해야 한다. 업무 방식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뜯어고쳐야 한다. 우선 산더미 같은 서류를 없애고 전자문서 유통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세종시에는 도시 기반 인프라도 태부족하다. 장년층 공무원들이 주말부부로, 젊은 공무원들이 불안을 느끼면서 거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따라서 유수대학, 종합병원을 서둘러 유치하고 놀이공원, 극장 등 문화시설을 확충해서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 2016-10-0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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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사람 PART3] 마지막까지 남는 책은 무엇일까? '책의 발견과 발명'
- 한기호 출판평론가 발견으로서의 기획 이후의 출판 프랑스문학 전공자인 가시마 시게루(鹿島茂)의 ( 2016년 3월 임시증간호)에 라 퐁텐의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책이 출간된 루이 14세 시대(17세기)에도 너그러운 후원자와 그렇지 않은 후원자가 있었다. 라 퐁텐의 에는 루이 14세나 다른 왕족, 귀족을 비판하는 부분이 꽤 많다. 이런 책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직접 비판하지 않고 동물에 빗대어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우화다. 도 원래 그런 것이었는데, 라 퐁텐이 손을 봐서 훨씬 더 신랄하게 위선자를 비판하는 바람에 많은 인기를 끌고, 지금도 살아남아 독자의 손을 타고 있다. 2006년의 한국 출판시장에서도 우화는 상한가를 쳤다. 그때 우화는 이솝이나 라 퐁텐의 우화가 아니었다. 이른바 ‘성공우화’였다. 호아킴 데 포사다의 를 비롯해 한상복의 (위즈덤하우스), 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의 등이 상한가를 쳤다. 성공우화의 인기 시발점이 스펜서 존슨의 (진명출판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금 출판시장이 요동을 친 계기가 된 것은 스마트폰의 등장일 것이다. 필자는 2004년부터 “휴대전화(이제는 스마트폰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는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것은 매체(미디어), 상점, 판매채널, 만남의 공간 등 인간의 행위를 이끄는 기점”이라고 말해 왔다. 스마트폰으로 결제 기능마저 가능해지자 웹툰과 웹소설 시장이 급격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이 추구하는 텍스트는 완전히 달라져야만 한다. 21세기에는 ‘무엇’(What)을 어떻게 연결해 제대로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정보는 다른 정보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정보를 서로 비교하면 차이(변별)가 생긴다. ‘차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텍스트가 아니면 종이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종이책은 그래픽 디자인에 힘입어 그런 능력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발명으로서의 책 그렇다. 이제 책은 달라져야 한다. 그것을 ‘발명’으로서의 책이라 부르면 어떨까. 새로운 장르라도 좋고, 새로운 텍스트라도 좋다. 가령 ‘본 디지털’로 생산해 가장 성공한 사례인 ‘휴대전화소설’(우리는 웹소설이라 부른다)만 해도 일본의 출판기획자인 우에무라 야시오(植村八潮)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휴대전화소설은 ‘뺄셈’이다. 표현도 줄이고, 그림도 빼고, 글자 수도 줄여서 멋지게 ‘본 디지털’로 성공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로운 책을 발명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세계사)은 또 어떤가. 1996년에 출간된 박영규의 (웅진지식하우스)은 드라마 의 인기에 힘입어 판매에 불이 붙었고, 결국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필자는 (교보문고)에서 이렇게 썼다. “을 한 권으로 축약해 역사서로는 드물게 130만 권이나 팔린 은 비록 대학에서 독일어와 철학을 전공하고 전문 글쓰기를 위한 10여 년의 노력을 거친 전문 집필가의 책이기는 하지만 역사학자가 쓴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비전공자의 대중적 역사 쓰기라는 점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 하지만 이 책은 대중의 역사인식 눈높이와는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이후 비전공자들이 쓴 대중 역사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비전문가 신인이 일을 낸 대표적 사례다.” 딱 20년 만에 다시 나온 은 차례부터가 재미있다. 저자는 조선 27대 왕에게 모두 ‘OOO 호랑이’라는 저마다의 닉네임을 붙여 줬다. 태조는 ‘이빨 빠진 호랑이’, 정종은 ‘무늬만 호랑이’, 태종은 ‘진짜 호랑이’, 세종은 ‘위대한 호랑이’, 문종은 ‘피곤한 호랑이’, 단종은 ‘어린 호랑이’, 세조는 ‘무서운 호랑이’. 그러나 호랑이가 되지 못하고 고양이에 머무른 두 왕이 있다. ‘도망간 고양이’ 선조와 ‘나라 뺏긴 고양이’ 순종이다. 강연 현장을 담은 글이라 너무 잘 읽힌다. 삽화도 재미있다. 가시마 시게루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시집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지요. 자기 표출의 시로 환원되는 형태나 그런 것을 포함한 형태만이 활자미디어로서 살아남을 겁니다. ‘자연스러운 문체를 대할 때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기뻐한다. 한 작가를 만나리라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한 인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한 말입니다. ‘그 책을 읽으며 저자가 아닌 인간을 만나는 책’이 자기 표출형 책입니다. 책 내용은 모두 잊어버려도 그 사람과 내가 서로 공감했다고 느낀 기억만은 남습니다. 그러면 같은 저자의 다른 책도 사고 싶어집니다. 반면 저자밖에 만나지 못한 책은 같은 저자의 책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책에 독자가 붙는다는 건 그런 겁니다. 정보 외에 무언가 자기 표출이 있는 책은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지시 표출 형으로 보이는 산문에서도 언어의 배치, 치환, 문체 등으로 자기표출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독자는 돈을 들여서라도 다음 책을 읽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표현의 원점입니다. 인터넷사회의 정보 속에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거기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게 출판의 가까운 미래에 대한 제 예상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건 시집 정도겠지요. 그렇게 내리막길을 걸어도 출판이 완전히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집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자기 표출형 책은 정보가 아니어서 설령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고 해도 하나의 물건으로서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자기 표출 미디어의 특징입니다.” 무섭다. 정말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책은 무엇일까. 가시마 시게루는 “고서의 가격이 비싼 이유는 책에 작품성이라는 가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출판도 인터넷사회 이후에는 개인출판처럼 일종의 창조행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은 부수로도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 속에도 이제 책을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하늘 아래 없는 새로운 것을 ‘발명’해야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단언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새로움이란 결국 생각의 차이다. 그 차이를 찾아내는 최상의 방법은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러니 책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1982년 출판계에 편집자로 입문해 15년 동안 일하다 19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했다. 출판전문지 격주간 를 창간해 올해로 18년째 발간해 오고 있다. 2010년 한국 최초의 민간 도서관 잡지인 월간 을 창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읽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 , , , , 등 저서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
- 2016-10-0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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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수술 중 대장암 발견된 중년 여성과 산부인과 전문의의 라뽀
- 흔히 삶이 단련되는 과정을 사람은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고 표현한다. 평범하게 쓰이는 이 표현이 어떤 때에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건강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곳저곳이 아픈데, 더 대범하고, 굳건한 태도를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도 그렇게 견뎌나갈 수 있는 것은 아픈 것을 낫게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의사라는 존재 덕분이 아닐까. 우리가 ‘라뽀’라고 부르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소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강동경희대학교병원에서 만난 기경도(奇炅度·43) 교수와 이은주(李銀珠·48)씨의 만남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지난 5월 6일 강동경희대학교병원의 한 수술실. 산부인과 기경도 교수는 자궁근종 수술을 집도하고 있었다. 자궁근종은 말 그대로 자궁 근육에 생긴 종양을 말하는데, 가임기 여성의 20~30%가 겪을 정도로 흔한 병이다. 기경도 교수에게도 그랬다. 1년에 300회 이상 수술을 집도하는 그에게, 자궁근종 수술은 출근을 위해 매일하는 운전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복강경 자궁적출술을 위해 수술 화면을 뱃속의 이곳저곳에 비추고 있을 때였다. 기 교수는 좋지 않은 기분이 느껴졌다. 자궁근종 때문은 아니었다. 비록 환자 이은주씨의 근종 크기가 6cm 정도로 복강경 수술로 해결하기에는 큰 크기인 것은 분명했지만,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자궁 뒷 쪽의 대장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장이 부어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기 교수는 바로 수술을 멈추고 소화기외과의 동료 교수를 호출했다. 숙련된 전문의에게 직접 확인하게 하고 싶었다. 정상적으로 수술을 마치고 별도의 검진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환자가 겪을 불편함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기 교수의 의견이 틀렸다면 동료 교수에게 핀잔을 들을 수 있고, 이런 일들이 쌓이면 평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수술실에서 발견된 대장암 헐레벌떡 뛰어 온 전문의의 눈에 대장 내부에 자리잡은 대장암이 발견됐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상황을 기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확한 진단은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야 알겠지만 수술에 경험이 많은 의사는 수술현장에서 이상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원래 수술을 하려 했던 장기 이외의 곳에서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을 눈으로 발견하는 거죠. 이 경우 본 수술 이외에 추가적인 조직검사 또는 수술을 시행하게 됩니다. 심각한 질환의 경우 시간이 지체되면 안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타과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어요. 덕분에 수술실에서 대장암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은주씨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일단은 의심된다 했죠.” 이은주씨는 갑작스런 암 판정에 놀라고 당황했지만 이렇게 수술실에서 암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일종의 호사(豪奢)였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했다.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제 얘기를 듣더니, 기 교수님이 제 생명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어요. 처음엔 수술하다 다른 병을 발견하는 것이 의사라면 모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평소에 보살펴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말이죠.” 이런 이은주씨의 얘기에 기 교수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부끄럽지만 스스로 수술이 적성에 맞는 천생 외과의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수술 중 이런 경우에도 대비할 수 있게 전공이 아닌 타 분야에 대해서 간접경험이라도 많이 쌓으려고 합니다. 저야 매일 수많은 환자를 만나면서 수술을 일상처럼 하고 있지만, 환자 입장에선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일이니까 함부로 대할 수 없죠. 산부인과 전문의인 제 입장에선 취재 섭외요청이 왔을 때 치료 후 출산한 ‘아름다운 환자’를 소개할 수도 있었지만, 은주씨를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에요. 환자들의 투병 뒤에는 이렇게 노력하는 많은 의료진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기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익숙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은주씨’라는 호칭. 기 교수는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한 명의 인격체로 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환자의 질환이나 예후를 기억하기도 좋고요. 일단 제가 치료를 했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서요. 주말에도 회진을 도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라고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이은주씨가 한마디 거든다. 회진시간에 환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의사가 기 교수라는 것. 환자들이 이런 저런 ‘우문’을 솔직하게 던져도, 매번 ‘현답’을 지치지 않고 내어준다고. 지겨워하는 일도 없고, 환자끼리 하는 잡담에도 슬쩍 끼어들어 해답을 알려주기 일쑤라고 했다. 이씨는 “대장암 수술을 위해서는 비슷한 환자들이 있는 다른 층으로 병실을 옮겨야 했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 사정했어요. 기 교수님이 계신 산부인과 병동에 남고 싶었거든요.” 평범한 삶 속에 들어온, 암 이은주씨가 자신에게 자궁근종이 있다는 것을 안 지는 10년 전 일. 종교재단의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한 이씨에게 병원을 다니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산부인과에서 진단 받는 일 역시 부끄럽지 않았다. 점검을 위해 계속 정기 검진을 받아왔다. 그러다 지난해 11월부터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11월에 4cm 정도 크기였던 종양은 5개월만에 6cm로 자랐고, 바로 수술을 결정했다. 건강은 잘 지켜왔다 생각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암 선고는 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암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억울했어요. 이 나이에. 현모양처라고 자부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암이라니. 꼬박 하루를 울었어요. 그렇게 눈물을 쏟고 나니, 걱정도 쏟아졌는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기 교수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하고. 그래서 용기를 내기로 했어요.” 용기를 내어 병마와 맞서기로 했지만, 그녀에게도, 가족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막내딸이였다. 가장 힘들어했던 막내지만 가장 힘이 됐던 것도 막내였다고 이씨는 이야기했다. 각자의 일 때문에 늘 곁을 지키지 못 하는 가운데, 대학생인 막내가 늘 곁을 지키며 그녀를 도왔다고. 물론 다른 가족들도 힘을 내는 데 도움이 됐던 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을 정도였다. 요양보호사로 일해 온 덕에 병원 생활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요양보호사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려 보호가 필요한 고령의 환자들을 돕는 일이 주 업무인데, 그 일을 하던 사람이 병원에 왔으니 이름만 바뀐 일터였던 셈이다. “어르신들 낙상 방지나 간호를 위해 간호조무사 수준의 교육을 받거든요. 병원에 있다가도 서투른 간호사들을 보면 참견하고 싶어 몸이 들썩들썩 했어요. 실제로 어르신들을 도울 상황이 되면 직접 나서기도 했고요.” 5월 6일 자궁근종 수술에서 대장암이 발견되고 기 교수는 이은주씨가 바로 암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전준비를 해놓았지만, 정작 수술은 보름이 지난 후 이뤄졌다. 부신피질(신장 위의 호르몬 분비 조직)이 문제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장암 수술이 이뤄진 것은 5월 23일이었다. 산 넘어 산 그렇게 대장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이은주씨의 삶은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다. 가족들도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에 조금씩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다녔던 요양원에 병가 신청서를 사직서로 바꿔 놓아야 했지만, 직장이야 다시 찾으면 될 일이였다. 그러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위암이었다. 암조직이 크지 않았지만, 위치가 나빴다. 종양이 암의 머리 부분에 자리 잡고 있어 일부 절제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위 전체를 절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장암 때는 딱 하루 울고 툭툭 털어 버릴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며칠이 걸렸어요. 저도 저지만, 남편도 무척 힘들어했어요.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전우회 활동도 열심일 정도의 씩씩한 남자에요. 그런데 위암 소식을 듣더니 하루는 술에 취해 들어와선 절 안고 펑펑 울더라고요. 제게 미안하다면서. 그렇게 서로를 위로했던 것이 평소의 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 힘이 된 것 같아요.” 이은주씨는 아직 위 절제 수술을 하진 않은 상태다. 아직 암을 안고 있는 것이다. 대장암의 항암치료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씨의 상태에 따라 수술 일정이 결정된다. 지금 예정으로는 12월쯤 수술할 계획이다. 두 달 정도 휴가를 내서 잠깐 병원에 머무를 예정이었던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난 셈이 됐다. 지금 병원 의료진은 그녀가 완전히 치료를 마무리 하는 데 5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보람있는 삶 지속하고 파” 시련이 그녀를 강하게 할 것이라는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녀는 씩씩하다.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려고 하고 있어요. 징징대서 뭐하겠어요. 선생님들도 긍정적인 마인드가 치료에 도움된다고 하시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고요. 아직 젊으니까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이은주씨의 희망사항 중 하나는 병이 나아 체력을 회복하게 되면, 예전처럼 남편과 함께 남을 돕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장애인 특수학교 행정직 직원으로 해병대 전우회나 소방의용대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단다. 매년 정기적으로 산소통을 등에 메고 한강에 잠수해 수중정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경찰이 요청하면 수중 수색작업을 지원하기도 한다고.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아내들도 모여 단체로 음식을 하거나 별도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그런 보람있는 활동들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대학생인 아들과 딸이 잘 자라 주는 것도 희망 중 하나다. “어릴 때 고지식하게 키워서 남편과 저를 ‘아빠,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에요. 남들 눈에는 딱딱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바르게 키우고 싶었어요. 그 희망을 들었는지 둘 다 올곧게 자라 줬어요. 딸은 남을 돕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였는지 특수교육학과를 다니고 있어요.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교편을 잡게 되요.” 인터뷰는 예상보다 훨씬 늦게 마무리가 됐다. 이씨는 현재 치료 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검진이 있기도 했지만, 그간 만났던 의사들, 암 환자들의 조언을 ‘은주씨’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기자가 말이 많아졌다. 물론 나쁜 치료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솔직하고 당당하면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은주씨’와 이야기 나누다 보니, 단지 그녀가 더 빨리 일상으로 복귀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쾌유를 기원한다.
- 2016-10-04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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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여행 갈 때 뭐 입고 가지?
- 얼마 전 한 여행사에서 유럽 단체 여행객에게 ‘등산복은 피해 주세요’ 라는 문자를 보내서 큰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기사를 보고 여행사가 왜 여행자의 복장까지 제한하는지 의아 했다. 관광객 개인적 취향까지 여행사에서 간섭하는 것은 지나친 관섭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자의 대상이 대충 필자와 비슷한 세대의 유럽관광객이라고 하니 연대감에 살짝 발끈하기까지 했다. 여행 갈 때 편리성, 간편성 등 기능적 면에서 등산복만 한 옷이 있을까? 특히 금방 비가 왔다 그쳤다 를 반복하는 유럽의 변덕스런 날씨에 방수, 방풍, 투습 기능이 있는 고어텍스 등산 재킷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적절한 여행 차림새 일지도 모른다고 격하게 자기변호를 했었다. 새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져서 기사의 달린 댓글을 모두 읽어 보았다. 댓글을 단 대부분의 사람이 젊은이들로 어머니 아버지 제발 등산복 좀 입지 말아요, 성당이나 왕궁 등이 산이냐 왜 등산복을 입는가? 예의가 아니다. 우리나라 아줌마 아저씨들 만나면 너무 창피하다고 까지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젊은이들의 생각을 엿보며 씁쓸하면서 5년 전에 이집트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카이로를 제외한 도시는 나일 강을 따라 크루즈를 한 적이 있다. 초호화 크루즈가 아니라 도시 간 이동수단 정도의 소박한 크루즈였다. 이용자 중 동양인은 필자와 친구 그리고 서너 명의 일본인 뿐 이고 대부분이 유럽의 시니어 들이었다. 낮 시간에는 볼륨 감 넘치는 유럽의 시니어 들은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수영을 하거나 선탠을 즐기곤 하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모두 리셉션 장에 모였을 때 예상치 못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유럽 시니어 들은 모두 화려한 성장으로 갈아입고 내려온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짧은 바지에 티셔츠 차림인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냥 한 끼 식사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우아하게 차려입고 만찬을 즐겼다. 구두 색깔 까지 완벽하게 맞춰 입고 온 유럽 시니어 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해외여행 갈 때 등산복이 좋으면 등산복 입자. 현지인이 비웃으면 비웃으라. 해라. 그리고 당당하게 말하라. ‘우리나라에서 등산복은 등산할 때만 입지 않고 평상복 여행복으로 다 입는다’ 라고. 다행히 요즘은 등산복이 기능성은 살리고 디자인도 멋진 일상복과 등산복의 경계가 모호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아웃도어 브랜드 들이 등산복을 좀 변형한 여행복도 많이 내놓고 있다. 그러니 여행갈 때 편한 등산복이 좋으면 당당하게 취향대로 입고 가자.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다면 예쁜 원피스나, 멋진 나비넥타이에 정장 재킷 정도는 한 벌씩 만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 낮에 관광할 때는 편하게 등산복 입고 저녁에 근사한 레스토랑에 갈 때, 미술관이나 성당 갈 때 한번 정도는 멋지게 차려 입고 간다면 더 근사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이나 현지인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나의 멋진 여행을 위해서 T. P. O(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여행복을 준비하여 적절하게 즐길 수 있다면 여행의 추억에 더 근사하게 남을 것이다.
- 2016-09-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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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사람 PART1] 책에서, 그리고 책 읽기에서 놓여나기
-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mute93@daum.net ‘책의 역사에 대한 현학적인 진술’은 삼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형편에서 보면 책은 아무 데나 있습니다. 너한테도 있고 나한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은 낯설지 않습니다. 지천으로 아주 흔한 것이 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대체로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벼운 발언입니다. 하지만 드물지 않은 것이 책이라는 뜻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책의 품격이 다른 사물들보다 당연히 높게 평가되어야 할 까닭이 별로 없다는 뜻에서도 그러합니다. 필요하면 찾고, 더 이상 간직할 까닭이 없게 되면 언제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책입니다. 아무튼 아무 데나 있고 아주 많은 것이 책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책이 없으면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일컫는 대학 도서관에서 ‘철 지난 책’들을 버리는 ‘작업’을 본 일이 있습니다.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파기’되는 책들을 보면서 “책이 많았구나. 아니 정말 많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찍이 책에 관해 익힌 것들은 이렇게 묘사하는 ‘풍경’과는 전혀 다릅니다. 책은 귀한 것, 드물게 귀한 것, 아주 귀한 것이라는 거의 ‘절대적인 선언’이 책과 관련하여 하나의 풍경을 이룹니다. 책에 관한 이러한 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아득한 때부터 그래 왔습니다. 이 주장만큼은 변하지 않는 이른바 ‘규범적 당위’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 당위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성숙을 기해야 합니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잘못 안 것을 고치게 되고,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상상하게 되면 삶이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지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책에 대한 규범적 당위는 ‘독서의 필연성’을 절대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책-풍경은 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책은 책이되 모든 책이 책은 아니다’라는 데서부터 그 당위는 심한 소용돌이를 짓습니다. 읽어야 할 책과 읽어서는 안 될 책들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판단 준거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실천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힘’이 행세를 합니다. 금서목록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필독도서목록도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목록은 힘의 바뀜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을 읽고 이런 감동을 경험하지 못한다면’이라든지 ‘여기 기술된 분노에 공감하지 않는다면’이라든지 하는 규범조차 그 힘은 당위로 요구합니다. 책읽기는 때로 힘에의 ‘예속’과 다르지 않다는 묘사를 하게 합니다. 이런 ‘커다란 풍경’ 아니고도 자디잔 모습들에 대한 묘사도 곁들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쓰여 있나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을 저자가 썼을까를 알기 위해 행간을 읽어야 그것이 책을 읽는 것이다”하는 ‘잔 말씀’에는 아직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꼼꼼하게 읽어야’라든지 ‘듬성듬성 읽어도’라든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만’이라든지 ‘흥미조차 없어도 읽어 마땅한 것이라면’이라든지 ‘재미가 있는 것을 읽어야’라든지 ‘무릇 쉽고 단순해야 그것이 좋은 것’이라든지 ‘삼매경에 이르지 못하면’이라든지 하는 데 이르면 이어 겸손하기가 꽤 어려워집니다. 그러다 ‘새벽독서를 하는 것이’라든지 ‘여행 가방에 책 몇 권 넣는 것이야말로’라든지 ‘한 달에 도서 구매비가 얼마는 되어야’라든지 ‘국민 1인당 독서가 연간 몇 권도 안 되는 우리는’ 하는 데 닿으면 ‘폭발하는 질식’을 묘사할 수도 있게 될지 모르는 풍경이 그려집니다. 뿐만 아니라 ‘책을 위한 책 간직하기’에서 비롯하여 ‘책을 위한 책 읽기’에 이르는 책-풍경조차 묘사할 수 있습니다. 책을 기리는 책에 대한 당위적 규범은 마침내 ‘책-종교’를 낳고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아득한 때부터 이렇듯 책-종교의 신도로 책을 만나고 읽고 간직해 왔습니다. 종교인들이 경전을 모시듯 그렇게 책을 모셔 온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흔히 아주 못된 전제라고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책은 지천입니다. 책이 아니고도 책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다양해졌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책을 안 읽어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고,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책 없으면 더 쉽고 편하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조차 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책을 다 버릴 필요도 없고, 책을 가볍게 볼 까닭도 없습니다. 여전히 책은 책다움을 지니고 지금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하지만 책-종교의 신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 삶을 위해 아무런 ‘적합성’을 갖지 못합니다. 허황한 환상을 좇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사람들은 ‘책으로부터 벗어나 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스스로 책이나 책 읽기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마구 말씀드린다면 이 일에 누구의 어떤 조언도 거절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내 책과 책 읽기의 태도에 책임 주체가 되어 기존의 책-문화에서 놓여나기를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책을 집어 읽기 시작하면 됩니다. 읽으면 알게 되고, 읽으면 스스로 책과 책 읽음의 주인이 됩니다. 이보다 더 쉬울 수가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한 책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단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터득한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책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이를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거창한 주제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기를 아울러 다짐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책 없이도 살 수 있는 책 많은 세상’인데 조금만 겸손해도 그것이 훌륭한 미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정진홍(鄭鎭弘) 서울대 명예교수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국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명지대. 서울대. 한림대. 이화여대 교수.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역임.
- 2016-09-2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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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
- 추석 전날이다 가족이 있는 제주도 도민이라면 이런 날은 제사준비다 음식 장만이다 집 떠난 가족들이 올 것이니 그 준비다 하여 바쁠 것을 예상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조용하리라 생각하고 이 날을 택하여 목욕탕을 이용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목욕탕이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많다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보였다. 자식들에게 잘 보이려는 어르신들 미용일거다. 추석이 가까워 오면 시골의 미용실은 엄마들 파마하는 손님으로 언제나 성시를 이루곤 했다 필자와는 좀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몸 겨누기도 힘 드는 연세가 지긋이 드신 분이 스르르 탕의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엇~ 하면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 옆의 중년의 부인이 얼른 할머니를 안았다 워낙 부축한 중년여인의 동작이 재빨라 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봉사가 몸에 배였는지 할머니를 잘 가누어 잠시 쉬게 했다. 쉰 후에는 우유도 드리고 전신 맛사지를 하여 정신이 금방 드셨다. 그리고는 친절한 부인은 할머니를 깨끗하게 씻겨 드렸다 다른 친절한 부인도 거들어 머리를 감겨 드리고……. 사고 뒤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필자가 목욕을 마치고 옷장이 있는 방으로 나오니 그 할머니도 나오셨는데 옷장을 찾을 수 없는지 우왕좌왕했다. 옷장의 키도 잃어버렸고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난감한 사태다. 누군가 먼저 탕에서 나와 준비가 된 아주머니 한 분이 친절하게 집전화 번호를 묻고 집이 어니냐고 물어보아도 아는 것은 전무……. 다행이라면 춥지 않은 기온이다. 목욕탕의 손님들 중 친절한 마음씨의 손님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할머니를 도우려는 동안 카운터의 주인을 대표하는 사람은 남의 불 보듯 구경만 한다. 친절한 손님이 탕에 까지 들어가 목욕하고 있는 사람 중에 이 할머니를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큰소리로 도움을 구한다. 할머니에게는 목욕탕에 달린 미용실에서 가운을 얻어다가 입혀드리고 난리 통이 한동안 지속되었건만 여전히 주인 쪽에서는 아무 조치가 없다. 아직은 제주도 특유의 인정사회가 완전히 메말라 버리지 않았다 추리력이 있는 사람들이 머리 합하여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할머니 옷은 찾았다 옷을 입고 나니 그 때 들어온 손님이 할머니 집이 어디라고 일러준다.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은 손님들의 손에서 종결이다. 단순한 이웃의 일일까? 필자는 이런 상황을 이번까지 세 번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세 번 모두 상황의 마무리가 주인의 손이 아닌 손님들의 협동이란 것이다. 그 가게에서 일어난 사고인데 1차 해결의 책임자가 가게주인이니 가게 주인이 부재라면 주인을 대행할 종업원이어야 한다. 책임의 주체는 남의 일처럼 소극적인 협조정도이고 할머니를 직접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들은 같은 손님이다. 가게 측에서는 도와준 손님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도 없다 이웃에서 일어 난 불상사이니 이웃끼리 도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인가? 대중목욕탕에는 노약자에 대한 어떤 경고문도 없고 제한도 없다 뜨거운 찜질방에는 경고문이 붙었으나 일반 탕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경고문도 없고 사고 후의 처리도 오로지 손님들의 호의로만 이루어지는 사고대처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이 태도가 미풍양속이라고 안일하게만 생각 할 수 있는 것인가.
- 2016-09-1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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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내가 보낸 편지
- 지구촌이란 말은 지역적이고 구분되는 모든 것이 일원화 되어가고 있다고 시사한다. 교통 통신 정보의 속도는 너와 나를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이미 오래 된 이야기다. 그런 말에 힘입은 탓인지 우리는 미국이민에 대하여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 우리가 미국이민에 대한 안일한 생각을 하게 한 것은 우리민족의 성격에도 기인한다. 금의환향에 대한 강박감으로 그 곳에서 버티기가 가능만하면 이미 고국에서는 대성한 사람으로 소문이 퍼졌다, 미국 이민하여 실패한 경우를 보기도 듣기도 힘들었으니 미국이민에의 꿈은 한 순간에라도 터질 만큼 팽창되어 있었다. 내가 이민한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조금씩 이민사회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70년대의 대거이민군 중에서는 예상치 못한 악재에 부딪힌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필자는 80년대가 시작하는 시간에 이민했다 알찬이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바보 같은 자신감도 있었건만 내가 가진 정보도 장님 코끼리 만지기란 것은 현지에서 깨달았다. 필자가 가진 정보 중 유효한 것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던 직업의 귀천이나 호불호를 따지지 않고 달러를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다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건 제일 알맹이 정보이긴 하다. 미국 땅 밟고 동서남북 구분도 하기 전에 세탁소를 매입 할 수 있었던 것까지는 현장감 있는 정보의 혜택이라 말 할 수 있겠으나 일에는 텅텅 멍텅구리이니 그 고생도 쉽게 넘길 수 있는 고생은 아니다. 눈물 찔끔 콧물 찔끔 흘리며 익히는 기능인데 필자에게는 천만다행이고 미국이민의 최고의 매력인 고객들이 수더분하여 필자의 어수룩한 기술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다. 한국인 손님은 무섭다 필자는 가게에 한국 손님이 오면 제일 무섭다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솜씨를 잘 안다 자기들이 잘 할 수 있으니까 타인에게도 잘 한 일을 응당 기대한다. 필자는 미국손님으로부터 불평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한국 손님으로부터는 모두에게서 불평을 들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었다 향수를 달랠 수도 있고 편지 쓰는 시간을 즐길 수도 있다 내 글을 품에 안은 것 같은 따스함도 느낀다. 간곡히 부탁한 말은, 일에 대하여 불평하지마라. 세탁비 깎지 마라. 이용하는 영세 상인들에게 관대해라. 영세 상인들이 베푸는 특별 서비스를 알뜰히 사용하지마라. 그들에게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 고혈이다. 이런 내용들이다. 그 곳 생활의 신산함을 에둘러 표현했음이다. 지금은 제주도에 앉아서 백만이 된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걱정한다. 외국인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산업체를 가진 친척에게 그들을 위한 추석선물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 2016-09-1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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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취미가 직업이 된 사진작가 박찬원의 꿈, “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것이 목표다”
- “팔다리는 물론 얼굴에까지 뜨듯한 오줌이 그대로 튀어요. 얼굴은 똥, 오줌 범벅이 돼도 ‘똥은 흙, 오줌은 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이때가 사진 찍기 가장 좋은 때거든요.” 7개월 동안 돼지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박찬원(朴贊元·72) 사진작가가 겪은 일이다. 그는 돼지만 사진을 찍어서 ‘사진작가는 미친놈이다, 아니면 내가 전생에 돼지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단다. 확실한 것은, 그가 사진에 미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제2 인생의 즐거움과 사진예술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들어본다. 글 사진 김영순 기자 kys0701@ 이제는 사진작가라고 불러야 한다. 과거에는 사장, 한때는 교수라고 불렸던 이다. 바로 박찬원 사진작가의 이야기다.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대표, 삼성그룹 부사장을 지내면서 전 세계로 뻗은 거대한 재벌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로 일했고, 코리아나화장품 사장을 끝으로 기업에서 은퇴한 후에는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교육자로서의 삶도 겪어 봤다. 그러나 40년을 직장인으로 산 그가 인생 후반전에 도착한 곳은 사진이라는 예술이었다. 그는 지난 6, 7월에 걸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이포’와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두 번의 ‘돼지’ 테마 전시회를 마친 뒤였다. 지난 8월에는 12일간 종로구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숨 젖 잠’이라는 초대전도 열었다. “원래 초대전을 여는 걸 사진 배우기 시작한 10년째인 2018년에 계획했는데 기회가 일찍 왔어요. 문래동에 위치한 대안공간 이포가 원래 실험적인 젊은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인데 내 작품을 보고 좋다고 해서 열게 됐죠.” ‘예술은 돈이다’라고 이야기한 피카소의 말이 생각났다. 박 작가한테 전시 작품에 ‘빨간딱지’ 가 붙어 있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전문 사진가라면 작품이 판매되어야 하죠. 처음 판매되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2011년 코엑스 CEO 특별전으로 기성 작가들과 호주에서 사진전을 열었을 때에요.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구매한 그분께 정말 감사했고 부담도 느꼈어요. 아마추어는 전시만 하면 되지만 프로는 팔려야 하죠. 작가와의 친분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좋아야 사는 거잖아요. 나중에 누가 샀는지 알아보지 말 걸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작품이 팔리고 보니 진짜 작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웃음)” 작가는 작품이 판매될 때 비로소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누드 사진을 계기로 사진예술에 눈 뜨다 박 작가와 사진과의 인연은 올해로 8년째다. 2008년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강연을 듣다가 미술과 사진을 배우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술과 사진 둘 다 지금도 꾸준히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본업’은 사진이다. “처음부터 사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사진작가 조세현 선생이 가르쳤는데 하루에 인물, 풍경, 누드, 종합으로 테마 하나씩을 세 시간에 걸쳐 네 번 찍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세 번째 날인 누드 사진을 찍은 날, 내가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썼던 카메라들이 모두 삼성 카메라였는데, 조세현 작가가 제 걸 보더니 ‘이건 카메라 광고로 써도 손색이 없겠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진이 누드의 실루엣만 찍은 건데, 저는 마케팅 쪽을 했기 때문에 보는 눈은 좀 있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곳에 가서 엎드려서 찍었는데 성공적이었던 거죠. 그때 ‘야, 이거 할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박 작가는 이때 때로는 초보도 프로 못지않은 명작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인생 자체가 작품 같은 박찬원 박 작가는 코리아나화장품에서 은퇴하고 성균관대에 석좌교수로 초빙되어 마케팅을 강의하게 됐다. 그런데 하다 보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젊은 박사들은 경력을 위해서 강의를 맡는 게 중요한데 나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 내가 할 자리가 아니구나’ 싶어서 한 3년 하고 나서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2010년에 상명대 예술디자인 대학원에 멋모르고 지원했죠. 그러면서 고생 엄청 했어요.” 사진을 배우러 들어갔는데, 정작 대학원에선 사진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은 이미 대학교에서 배웠다고 생각하고 예술가가 되는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초보였던 그로서는 많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훈련 덕분에 예술,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고 말한다. 인생 후반기의 보람을 느끼는 힘,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 쓰는 언어, 노는 물도 달라졌다. 그리고 그간 고생한 것이 아까워 졸업하자마자 라는 책도 썼다. 이제 박 작가의 목표는 영원한 현역이다. “사진작가를 업으로 가는 건 정해졌습니다. 제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게 목표예요.” 작품의 진정성을 추구하기 위한 100일 촬영 박 작가는 하나의 주제에 100일 촬영을 목표로 작업하는 순수 사진가로 ‘생명의 의미’를 담았다. 현재 작품 세계의 주요 테마는 ‘돼지’와 ‘염전’이다. 얼마 전에 쟁쟁한 기성 작가들과 함께 전시했던 테마도 ‘돼지’를 소재로 한 ‘꿀 젖 잠’이라는 제목이었다. 각각 ‘꿀’은 돼지가 내는 소리, ‘젖’은 돼지의 젖, ‘잠’은 돼지의 영혼을 사진으로 잡아내고자 한 시도다. ‘돼지’ 테마는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촬영할 수 있는 곳을 섭외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겨우 섭외한 양돈장에서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매주 2박3일씩을 현장에서 먹고 자며 촬영했다. “똥 냄새 엄청나죠. 지금도 자동차 트렁크를 열면 그 냄새가 날 정도예요. 젖 사진을 찍을 때는 얼굴에 똥이 다 묻어요. 그리고 돼지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긴장해서 오줌을 싸고요. 그런데 돼지가 오줌을 싸면 움직이지 않아서,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어요. 상황이 이런데 막상 사진을 찍을 때면 냄새가 안 납니다. 의식을 못하는 거죠.” 100일 촬영하기를 한다고 했을 때, 2주에 한 번 간다고 하면 2년이 걸리고 1주에 한 번 가면 1년이 걸리는 긴 시간이다. 당연히 사진 촬영 때문에 다른 모임은 일절 참석할 수 없게 된다. 얼마나 사진에 올인하여 새로운 즐거움을 갖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막상 셔터를 누르는 시간은 얼마 안 걸려요. 나머지는 다 생각하는 시간이죠. 그 시간이 주제가 구체화되는 지점입니다.” 3년 동안 염전 사진을 찍었다 소금밭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염전 안에는 삶과 죽음이 모두 담겨 있더라고요. 처음으로 빛을 느낀 곳이기도 합니다. 바닷물이 노구(老軀)를 끌고 찾아와 햇볕에 몸을 맡기면 육신은 소금으로 남아 생명의 물질이 되고, 영혼은 수증기가 돼 다른 세상으로 날아갑니다.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는 공간이죠. 나비, 하루살이, 거미 등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어요. 눈을 뜨고 마음을 여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듯했어요.” 박 작가에게 염전은 성지와도 같다. 처음으로 사진다운 사진을 찍었고 많은 고민을, 많은 생각을 했던 곳이다. 날것 그대로, ‘생명’을 사진에 담는다 어디를 가나 그는 연장자다. 전문작가도 사진을 정리할 나이 65세에 사진을 시작했다. 아랫사람보다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나이가 많다고 대접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체력의 한계, 감각의 한계가 핸디캡이 될까 봐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다. 최근 사진들은 리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런 기술적인 부분까지 직접 다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박 작가는 리터치(보정)를 잘 못하고,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어쩌면 그러니 제 작품을 어설프지만 인정해 주는 것일 수도 있어요. 리터치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보면 다 알거든요.” 가공이 거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사진. 그래서인지 박 작가의 사진에는 유난히 담백한 맛이 있다. 그것은 다큐로서의 시선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게 그냥 찍는 게 아니고 사람과 사귀어야 하고 동물하고도 사귀어야 하고 그런 것들을 해야만 개념도 잡히는 거죠.” 박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궁극적인 지점은 ‘생명’이다. 다음 테마는 비밀이지만 역시 그가 추구하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미 결정됐다고 하며 10월 부터 착수한다. “작품 사진이 좋을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간결했다. “즐기면서 찍을 때 좋은 사진이 나오고, 힘을 빼고 작업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진리예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우리 집사람은 수채화를 그려요. 그러니 호흡이 딱 맞아요. 저도 처음에 대학원을 갈 적에 그림으로 가느냐 사진으로 가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그림은 앉아서 하니까 건강에 도움이 안 될 것처럼 보였어요. 반면 사진은 움직이면서 찍으니까 활동적이어서 그쪽을 선택한 것도 있죠. 지금은 더 건강해진 느낌이에요.”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뭔가를 새롭게 하려고 해도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있다. 그래서 감히 못하는 경우 많다. 그러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의외로 나이든 예술가들이 자기 명성만 가지고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반면 젊은 친구들은 장래가 두려워서 방향을 잘 못 잡고 몰입을 잘 못하죠. 난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됐고 다른 일이 없으니까 필요한 건 용기였죠.(웃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박 작가 혼자 히죽 웃는다. 제2 인생도 용감한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영원한 현역을 다짐하다 그는 나이를 먹어서 가져야 할 것은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걸 재차 강조했다. 자신도 주변에 추천은 많이 해줬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를 못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하는데 취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나이 들어 자기 자신의 역량이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관점도 거기에 있었다. “호기심, 그리고 노력인 거 같아요. 그림도 사진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재능 없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제가 찍는 정도의 사진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시도를 안 하는 거라고 봅니다.” 다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때가 언제인지 물어 봤다.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예상한 그대로였다. “바로 지금이지! 즐거워!”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 박찬원 작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2018년은 사진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예요. 10년간 사진 공부를 하고, 10년간 사진가로 활동하겠다는 계획을 잡았어요. 우리 나이 65세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75세에 나만의 작품으로 데뷔전을 하고 85세에 마지막 사진전과 사진 책을 발간할 작정입니다.”
- 2016-09-0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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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많은 책 정리하는 나만의 방법] 그래도 버리기
- ‘버리는 것’이 정리의 처음과 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 중에 책을 버리기는 더 힘들다. 책을 정리하다보면 선물을 받은 책 중에 단 한 페이지도 읽지 않은 책도 있다. 그런 책은 아까워서 못 버리고 몇 번 읽었던 책은 그 유익함 때문에 다음에 또 읽게 될 것 같아 못 버린다. 당장 내가 필요 없다고 해도 언젠가 아이들에게 필요할 것 같은 책들도 많다. 그러니 버리려고 바닥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서가에 집어놓곤 한다. 언젠가 정리수납 전문가 양성 과정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정리전문가 교육과정 중에 주택 인테리어에 대한 강의였다. 수강생은 주로 중년 여성들이었는데 열기가 대단했다. 자격증을 취득한 후 의뢰인 집이나 사무실에 가서 옷이나, 책, 가구 등을 전문적으로 정리해주는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 열기를 보면서 현대인들이 얼마나 정리를 힘들어 하는지, 그리고 정리할 것이 많은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들이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 일을 할 때 예상되는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물건이니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는 괴로움일 것이다. ◇ 위험한 소신 가장 버리기 좋은 기회는 이사 할 때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 살 고 있는 아파트에서 20년 째 살고 있다. 아내는 우리 아파트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원주민 중에 우리가족도 포함된다고 놀린다. 이사를 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아내의 도무지 버리려 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정리가 안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때 보던 만화책 한 질을 버린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만화책이 희귀본이라면서 다시 찾아오라고 난리를 쳤다. 그러나 이미 분리수거는 끝난 터라 도로 찾지 못했고 몇 날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나 버리는 것이 정리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대형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아내가 해외여행을 갔을 때였다. 그동안 늘 꽉 차 있는 냉장고를 정리 해 버린 것이다. 냉장고 부분에 있는 반찬 일부를 제외하고 냉동고에 들어있는 모든 얼어있는 것을 다 버렸다. 얼어 있어서 고기 덩어리 같기도 하고 해산물 같기도 했지만 구별하지 않고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아 다 버렸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 붙어있는 성에를 말끔히 제거하고 닦았다. 며칠 후에 닥칠 폭풍이 걱정되긴 했지만 텅 빈 냉장고를 보니 속이 후련했다. 빈 냉장고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쓴 돈 봉투 하나를 넣었다. ‘새로 채울 것!’ 아내가 집에 돌아 온 이후의 사태에 대해서는 지금 다시 떠 올리기 싫다. 그러나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정리의 방법이라는 것을 큰 대가를 치르면서 재차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 그래도 버리기 그런 일이 있은 후 작전을 좀 바꾸었다. 냉장고처럼 표시가 나는 경우는 별 수 없지만 만화책의 경우에서 보듯이 버리고 나서 뭘 버렸다고 고백을 한 것이 실수였다. 그냥 조금씩 버리면 눈치를 챌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요새는 출근하면서 몇 권을 들고 나오던가 아내가 일어나기 전 새벽시간에 분리수거하면서 버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아차리고 뭐가 없어졌다고 필자를 추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하면서 딴 소리로 일관하면 된다. 그러다가 걸리면 죽는다. 그렇다고 해도 버리는 것만이 정리하는 방법이라는 확고한 소신으로 오늘도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 2016-09-07 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