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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한류스타 ‘나’라고 전해라!
-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수 이애란(예명·53)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말, 전국을 ‘전해라’ 열풍에 빠트린 죄(?)를 물어 방송사와 광고계가 그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떴다’하는 순간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 휴먼다큐멘터리,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접수했다. 25년 무명생활을 한방에 날려버린 ‘백세인생’ 이애란의 2016년 소망을 브라보가 만난 사람이 들어봤다. “요즘 들어서 인기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백세인생’ 가수 이애란씨의 하루는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스타급 대우다. SBS 아침방송 고정 리포터는 물론 인기 아이돌만 모신다는 MBC 설날 특집 ‘2016 아이돌스타 육상·풋살·양궁 선수권대회’에 초대돼 노래도 불렀다. 길거리, 식당 어디에서도 ‘어머, 이애란이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인기를 얻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터넷 팬카페는 매일 꾸준히 회원이 늘고 있다. 회원 수는 1월 현재 1428명이다. 그전에는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이 늘었어요. 한 분, 한 분 저와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입하세요. 요즘은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하죠.”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25년 세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이애란. 20대가 되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 KBS 일일드라마 주제가 공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 포함해서 3명이 마지막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낙점된 거죠. 그런데 어떤 상황인지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나가지 않고 곡만 드라마에 사용하더군요. 정작 제 목소리는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실망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노래가 아니면 안 했다. “그래도 노래할 곳은 꽤 있었어요. 풍물 장터 야시장이라고 겨울만 빼놓고 동네마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요. 야시장에서 초대해주시면 가서 노래를 불렀죠.” 당시 야시장마다 기본적으로 노래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수를 초대하면 그 사람 음정에 맞춰 연주해줬다. 뭐든지 생음악으로 불렀던 때다. 길고 긴 ‘백세인생’과의 인연 이애란이 노래 ‘백세인생’ 가락을 처음 접한 것은 1995년 한 국악학원에서다. 그때 녹음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었고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국악학원에 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장구랑 민요도 같이 가르치던 분이신데 선생님이 그 노래(지금의 백세인생)를 민요로 부르는 것을 귀동냥했어요. 저도 장구 치면서 흥얼거리곤 했어요. 한 달 넘도록 장구채 잡는 방법만 가르쳐서 그만뒀는데 노랫가락 하나는 익히고 나온 거죠.” 이애란은 이렇게 알게 된 노래를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서 관객들의 박수에 맞춰 불렀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시장거리에서 활동하던 품바 가수 명월이 알려달라기에 노래를 가르쳐줬다고. “그런데 품바라 그런지 왜곡이 많이 되더라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맞게 다 개사를 해버리잖아요. 2012년에 김종완 작곡가님을 만나 악보를 보고 알았죠. 우리가 왜곡해서 부르고 있었구나. 그 이후 가사 수정도 많이 하고 다시 처음부터 배운 거죠.” 힘든 시절 장구를 치면서 익혔던 노래가 인생을 바꿔주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2년 사촌 오빠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눴던 작곡가 김종완씨와의 인연도 기막히다. 알고 보니 그가 흥얼거렸던 ‘백세인생’의 원작자이자 데뷔곡이 될 뻔한 드라마 주제가 작사가였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곡가와 새롭게 노래 녹음을 하기 위해 5, 6개월여 피나는 연습을 했다. 새벽 2시건, 3시건 될 때까지 말이다. “2013년 드디어 노래 녹음을 했어요. 1995년 장구를 배울 때만 해도 ‘백세인생’의 원제목이 ‘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 였는데 2013년에는 ‘저세상이 부르면’으로 바꿨죠. 작년 2월 말 발표 때는 원래 100세까지만 있던 가사를 150세까지 늘려 다시 썼어요.” 제목도 ‘백세인생’으로 완전히 갈아 끼웠다. 고령화 사회, 장수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백세인생’이란 말이 저승에서 오라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렸다. “제목 안에 가사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백세인생’에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감정이 있습니다. 나 대신 네가 좀 내 마음을 좀 전해줄래? 하는 것도 있고, 또 덩실덩실 리듬도 있고, 우리가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15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는 욕심도 담긴 노래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아버지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바빠질수록 먼저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다른 매체에도 소개됐지만, 작년에 이애란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애란의 영원한 팬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소리가 애잔하게 깔린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좋아하셨어요. 작년 2월에 음반이 ‘백세인생’으로 나왔다고 하니 제목이 좋다고도 하셨어요. 좋아하시기만 했지 제가 방송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빨리 못 보여드린 게 가슴에 한이 남았다고 할까요? 맺혔다고 할까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가끔 아버지 팔을 베고 누워서 ‘백세인생’의 한 구절을 불러드리기도 했다.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재촉말라 전해라.” 달리 아픈 곳이 없어서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지방행사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노래하는 이애란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도전이 아름다운 거지 후퇴는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라며 항상 응원을 해주던 한 사람이다. 젊은이들의 유희 ‘전해라~ 짤방’, 인생역전 견인차 이애란의 인기는 젊은이의 기발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짤방이란 ‘잘림방지’의 준말로 내용에 상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말에 ‘백세인생’ 노래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눈여겨봤던 최준원씨가 소속사에 얘기한 거죠. 제 영상으로 짤방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도 되느냐고요.” 최씨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생이면서 이애란과 같은 소속사의 트로트 음악 작·편곡을 겸하고 있는 전문 작곡가다. 지금은 이애란씨와 이모, 조카 하는 사이라지만 짤방을 만들 당시에는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고. 소속사에서도 최씨의 얘기를 들으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작년 7월, 인터넷에 첫 번째로 유포된 짤방은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전해라’였다. 이애란의 감정 실린 표정과 ‘전해라’라는 궁서체 자막은 묘하게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 두는 젊은이들, 신선한 것을 찾아다니는 방송 작가,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마침내 세상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전해라~ ‘백세인생’이 됐다. 이애란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 결혼에 관해서 물어보려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애란씨. 살아생전 아버지도 묻지 않던 질문이다. 노래하다 보니까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노래를 벗 삼아 버텨온 삶이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다. 자상하고 정말 착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사람은 다 착하지만,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016년을 맞이하는 각오도 함께 물어봤다. “제 욕심이겠지만 트로트를 발판으로 한류 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람이고 욕심이죠. 작년은 여러분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6년도에는 보답을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드라마에 노래교실이 나올 때도 있는데 초대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한류스타를 예약해두고 있는 인기가수답게 이애란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정대로라면 아직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걸어가면서 틈틈이 이애란씨와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모습도 지켜봤다. 힘들만도 한데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선 팬들 하나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한 말씀 부탁했다. “무조건 힘내시고 파이팅하라 전해라~!” 100세 인생은 60세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꽃중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60세는 너무 어리다는 것. 이애란의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이니 모두 젊은 마음으로 100세 인생 살아가기 바란다고 전했다.
- 2016-02-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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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 人북] 경희대 전호근 교수, 시련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인생의 보물
- 청소년기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베토벤의 곡을 즐겨 들었다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전호근(田好根·54) 교수. 10년 전, 메이너드 솔로몬이 쓴 베토벤 평전 은 자연스레 그의 손에 들렸다. 처음 책을 접했을 당시에는 평전 글쓰기의 모범이라 생각할 만큼 저자의 분석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그때는 자료를 읽어내듯 눈으로 읽고 머리로 기억했는데, 그는 최근에 들어서야 같은 책을 마음으로 읽게 됐다. 지난해 여름,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오스트리아 빈에 다녀오고부터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베토벤의 생가와 묘소를 둘러본 그는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을 꺼내 들었다. 과거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감성적으로 느끼며 읽게 된 것. 그러자 베토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인간 베토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남긴 작품이 총 135곡이에요. 거의 모든 곡을 샅샅이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죠. 그렇게 익숙한 멜로디가 빈에 다녀오고 다시 이 책을 읽고 들으니 새롭게 들리는 거예요. 지식을 많이 알게 돼서 다르게 들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악에 접근하는 감수성의 차이가 작용했던 것 같아요. 베토벤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되면서 음악도 좀 더 깊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많은 사람이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주목하지만, 전 교수는 베토벤의 인간적 면모에 관심을 기울였다. 1802년에 남긴 베토벤의 유서는 철학을 전공하는 그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유서를 보면 베토벤처럼 절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조차도 인간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자신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끊임없이 강조하죠. 나 같은 철학자는 부당한 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 자기 수양은 제대로 됐는가 등으로 평가를 하는데 그런 까다로운 기준을 굳이 베토벤 같은 예술가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베토벤의 유서를 읽고 생각을 바꿨어요. 아, 모든 사람은 인격적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할 수 있구나. 아무리 권력과 부를 쌓아도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지 못하면 불행한 거구나. 그게 인간의 보편적 욕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베토벤은 서른두 살에 유서를 썼지만, 18세기 당시 평균수명이 30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중년이나 다름없다. 30세 무렵부터 귀가 먹기 시작했기에, 음악가로서 중년의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유서를 남긴 것이다. 전 교수는 위기를 지나 더욱 뛰어난 작품을 남긴 베토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책을 소개한 이유를 말했다. “중·장년이 되면 기회도 오지만 어려움도 많이 찾아오잖아요. 베토벤은 작곡가인데 귀가 먹어가니 심적으로도 힘들었고, 통증도 심각했죠. 그러한 시련을 오히려 자신의 창작력을 불태우는 원동력으로 삼거든요. 구애가 실패로 돌아가도 걸작으로 나오고, 귀가 먹어가는 고통이 있어도 그런 어려움이 뛰어난 작품으로 생산하죠. 그런 걸 보면 고난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베토벤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추천하게 됐어요.” 추운 계절의 소나무를 칭찬하는 까닭 전 교수는 공맹(孔孟)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하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인 35명의 철학을 담아낸 를 펴냈다. 그런 전 교수가 베토벤을 보면 떠오르는 한국의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단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라 답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뿐만 아니라 경학과 실학 등의 다양한 학문까지 아우르며 학예일치의 경지에 오른 추사, 절대적인 명성을 얻은 점 또한 베토벤과 유사했다. “베토벤이 몸에 병이 생기며 찾아온 내적 고통을 앓았다면, 추사는 역적으로 몰려 유배를 갔으니 외부에서 온 고난에 시달린 셈이죠. 베토벤이 고난을 이겨내고 위대한 곡들을 작곡했듯, 추사 역시 세한도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전 교수는 그들의 삶을 통해 시련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추사는 시련을 겪으며 우정을 얻게 됐죠. 유배를 가서 정치적 생명이 다하고 나니 가까웠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연이 끊기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라는 제자는 그를 이전과똑같이 대하고 더욱 살뜰히 챙기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만 그를 통해 우정과 이상적의 인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 이상적의 우정에 감동해 추사가 남긴 작품이 ‘세한도’이다. 그는 세한도에 공자의 말을 덧붙여 마음을 전하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 추운 계절이 오고 다른 나무들이 시든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나의 곤경 이전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삶이 평온하면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을 발견하기 힘들죠.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의 신뢰이기도 한데, 역경이 없으면 서로 간에 그런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소나무가 푸르렀음을 알게 해준 추운 계절처럼, 인간에게 고난의 시간은 깨달음을 주죠.” 앞만 보고 달려온 중년, 이제는 나를 바라볼 시간 흔히들 요즘 중·장년들을 말할 때,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만큼 열심히, 진취적으로 살았다는 의미가 있지만, 전 교수는 이제 자신을 바라봐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앞만 보고 달린다는 것은 성취, 다른 말로 욕망입니다. 돌아볼 줄 모른다는 거니까요. 그렇게 되면 자기 내면과 대화할 기회가 적은 거죠. 나이가 들고 어떠한 상실감을 느꼈을 때,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자각하면 자연히 겸손해지거든요. 잃어버린 게 많을수록 삶의 무게는 높아지고, 고통이 클수록 내면은 더 단단해지죠. 그러니 어느 순간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인 거예요. 자신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전 교수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돌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상을 지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했다. “젊어서든 나이가 들어서든 근본적인 철학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부터 철학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봐도 중요한 비중을 두고 기술되지 않은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죠. 권력이나 출세 등의 외압에도 끝까지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킨다고 하는 게 반드시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이상, 그 이상을 포기하거나 모독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는 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바꾸고 변절시키려고 외부에서 강요를 하겠지만 어떻게 지키는가가 자기 수양이죠. 결국 그런 신념이나 이상을 잘 지키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 2016-01-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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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초개(草芥) 그리고 말[馬]
- 이재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 )의 바이올린 독주회 맨 앞자리에 김영태 시인과 나란히 앉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를 들었다. 41개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의 선율은, 봄밤을 깊은 심연의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잠시 하늘을 보았다. 아련한 산사나무 꽃향기 사이로 멜로디의 여운이 눈물 되어 흘렀다. 긴 계단을 내려와 차도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부군을 사별한 안네의 망부곡 같았어요. 검은 의상은 상복일 테지요.” 스스로를 ‘풀먼지 같은 존재, 어눌한 말주변’에 빗대어 초개눌인(草芥訥人)이라 자호(自號)한 분이 김영태(1936~2007) 시인이다. 비교적 작은 키에 작은 손으로 평생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김환기 화백(1913~1974)의 훈도를 받았고, 재학 중 박남수 시인(1918~1994)의 추천을 거쳐 ‘사상계’잡지에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7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소묘집, 시론집, 산문집, 무용평론집 등 70여 권의 저작물은 가히 초인적인 문화 활동이란 말 이외에 더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일찍이 독일문화원에서의 첫 전시를 비롯해 7~8회 회화전도 열었으나 그림 수집의 인연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의 화풍은 독특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산 판화지에 철필과 몽당붓을 짙은 먹이나 검은빛 잉크에 찍어 윤곽의 선을 구획하고, 유화용 까칠한 붓으로 면을 마감하는데, 서예의 갈필(渴筆)같이 선묘(線描)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림의 기초 단계인 스케치 실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강철 같은 선(線)을 뽑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7년 이른 봄 초개 선생 댁에서 ‘토슈즈 끈을 매고 있는 헤르미아’를 만났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멘델스존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했고, 이를 무용으로 공연한 발레리나의 포즈를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물 흐르듯 먹의 농담이 한 송이 꽃으로 살아 있다. 드로잉(drawing)을 선인들은 화골(畵骨)이라 일컬었다. 그리기의 단단한 뼈대가 곧 선긋기에 있음을 강조함이다. 유화나 짙은 수채화 등은 물감을 덧칠하여 잘못 그린 선들을 감출 수 있으나, 연필, 목탄, 먹, 파스텔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게 매력이다. 초개 선생의 그림 속에는 일절 꾸밈이 없다. 색칠의 남용도 없다. 탄탄한 구성과 간결한 선들의 얽힘이 화면 가득 흐른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2)의 피아노곡을 즐겨 듣고, 모차르트 음반을 많이 소장하였다. 2007년 7월 운명하기 전까지 화랑가를 산책하고 음악회, 무용 공연장을 찾았다. 생전에 그가 즐겨 앉았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가열 123번 좌석은 그를 추모하는 예인들에 의해 ‘초개눌인 석’으로 명명 헌정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1978년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詩人選) 시리즈로 시집을 475권째 발간해 오고 있는데,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을 컷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 다. 이 컷은 2007년 김영태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는 김영태, 이제하 두 분이 그렸으나 이후는 이제하 선생이 혼자 그리고 있다. 컷을 그리기 전에 시집의 원고를 읽고, 시인들이 제공한 얼굴 사진을 보고 컷을 그리는데, 선이 잘 풀려 나올 때는 불과 몇 분 만에, 안 풀릴 때는 수주일이 걸린다는 말을 두 분에게서 들었다. 이제하(1937~ )는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평론가의 그 어느 장르에서도 건필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다. 자작곡의 노래에 기타반주로 음반도 취입한 바 있다. 홍익대 조소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으나 중도에 독창적인 창작의 길로 전환하였다. 경남 마산에서 고교시절인 1956년 ‘새벗’잡지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학도의 선망이 되었고,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고교 시절에는 김상옥(1920~2004), 김춘수(1922~2004), 김남조(1927~ ) 같은 시인들에게 국어수업을 받았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광화사’등의 소설로 이상문학상등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작된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에서 따온 마리안느 카페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창동에서 시작된 카페가, 대학로로 옮겨와 시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과 커피 와인 향 속에서 예술을 토론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성악가, 대중가수, 국악인들은 주저 없이 절창을 부르고 있다. 그의 문체는 회화적이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평가 받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시혼(詩魂)의 알레고리가 녹아 있다. 마리안느를 드나들며 몇 점의 그림을 수집하던 중, 2008년 인사동 전시회에서 ‘말과 소년’ 드로잉을 구입하였다. 파스텔로 단숨에 그린 원숙한 드로잉이다. 늠름한 말이 실내 어느 공간에 들어와 있고, 소년이 말을 다독이고 있다. 한 여인이 옆에 앉아 있다. 이제하는 ‘도시에서 태어나야 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 혹은 그 긴장하는 접점으로 말[馬]을 실내로 끌어들인 야생의 한 이미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하 그림 속의 말은 자연과 야성의 모티브가 된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으나 쉽게 동화되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을 오묘한 색상으로 표출하고 있다. 1998년에는 김영태, 이제하 2인 드로잉전이 열려 한자리에서 개성 강한 두 예술인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는 당나라 대시인 왕유의 시를 보고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였다. 김영태, 이제하 두 예술인의 문장 속에는 격조 높은 그림이 보이고, 그림 속에서는 시와 음악이 흐른다. 이들의 고양(高揚)된 예술세계는 우리의 혼탁한 일상을 정화시킨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 2016-01-1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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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의 문화공감] “실수로 발이 엉키면 그게 곧 탱고”
- 필자가 기억하는 첫 탱고는 마릴린 먼로가 주연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1959)’에서 여자로 변장한 잭 레먼이 코미디언 조 E. 브라운과 함께 입에 물고 있는 꽃을 바꾸어 물어가며 춤추던 불후의 명곡 ‘라 쿰파르시타’이다. 그 후 카테리나 발렌테가 부르는 ‘불의 키스(Kiss of Fire/El Choclo)’에 매료되어 여러 장의 탱고 판을 사서 듣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6·25 전에 들은 현인의 ‘추억의 꽃다발’(카네이션)과 ‘서울야곡’이 탱고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필자가 좋아하는 국내 가요 중에는 탱고 곡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 생겨났으나 다른 라틴음악과는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20세기 초에 ‘남미의 파리’로 불릴 만큼 유럽풍의 도시로 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이곳에는 유럽에서 엄청난 수의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지저분한 항구 지역 보카에는 이탈리아 출신이 주를 이루는 극빈층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다.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하다 전해진 ‘아바네라(Habanera)’라는 춤곡과 아르헨티나 민요 형식의 춤곡인 ‘밀롱가(Milonga: 탱고 춤을 추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함)’, 그리고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칸돔베(Candombe)’라는 음악이 더해졌고, 여기에 향수와 가난 고독에 찌든 이탈리아 출신 하층민들의 격정을 담아 탱고라는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탱고를 진일보시킨 사람이 ‘El Rey del Tango(탱고의 황제)’라고 불리는 가수이자 기타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 배우 등 다양한 활동을 한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이다. 그는 1890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인 어머니와 함께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로 이주하여 1895년 우루과이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듬해인 1896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다시 이주했고, 1923년에는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무대로 한창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1935년 45세 때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비행기 사고로 숨져 비극적인 영웅으로 회자되고 있다. 사망한 지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무덤에는 생화가 없는 날이 없으며 매일같이 수많은 참배객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한편 20세기 후반기의 탱고를 이야기할 때에는 아스토르 판탈레온 피아졸라(Astor Pantaleon Piazzolla)를 빼놓을 수 없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음악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인 그는 1921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열 살 때 반도네온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는 킨테토 누에보 탕고(Quinteto Nuevo Tango, 탱고 5중주단)를 결성해 누에보 탕고라 불리는 독창적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그의 고향에서 그는 “El Gran Astor” (위대한 아스토르)란 칭호를 듣는다. 특히 그의 음악은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선호하여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요요마 등이 즐겨 연주하고 있다. 한편 콘티넨털탱고는 아르헨티나탱고가 유럽에 들어와 사교댄스나 살롱뮤직에 적합한 세련된 형태로 정착한 것이다. 악단 편성도 자유롭고 보통 반도네온 대신 아코디언을 쓰고 있다. 탱고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이며 1910년대에는 상당한 붐을 일으켰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탱고음악이 많이 작곡되고 콘티넨털탱고의 스타일이 확립되어 많은 악단들이 활약하였다. 현재는 독일의 알프레트 하우제와 네덜란드의 말란도 악단이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유럽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도 탱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영화배우 루돌프 발렌티노(1895~1926)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913년 도미(渡美)한 뒤 ‘묵시록의 4기사(1921)’, ‘춘희’, ‘혈(血)과 사(砂)’ 등에 출연, 이국적인 풍모와 특수한 성적 매력으로 전 세계의 여성 팬에게 인기를 얻었다. 특히 탱고를 즐겨 추어 ‘발렌티노탱고’라는 이름을 남겼다. 그는 절세의 미남으로 무성 영화시대 초기의 최대 스타였으나 인기 절정일 때 급사하였다. 알 파치노가 열연한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에서는 ‘Por una cabeza(간발의 차이로)'라는 곡에 맞추어 탱고를 추는 장면이 명대사와 함께 관객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탱고는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 달리 단순하죠. 만약 실수를 해도 다시 추면 되니까. 실수를 해서 발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라오.” 가장 전통적인 스타일의 탱고를 잘 듣고 볼 수 있는 영화로는 스페인의 거장 사우라 감독의 ‘탱고’가 있다. 또 탱고를 사랑한 영국의 여성감독 샐리 포터는 ‘탱고 레슨’에서 정통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들을 소개하면서 직접 탱고를 배워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 출연한 한 전직 탱고댄서는 “탱고를 이해하려면 밑바닥 생활을 겪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필자는 1984년 11월,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렸던 세계 도로회의가 끝나고 귀국하는 길에 일행과 함께 아르헨티나, 페루 등 남미의 몇몇 나라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보카지역을 관광한 후 탱고 전용공연장에 가서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시대별로 변화해 온 탱고 춤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탱고 음악은 많이 들었지만 당시까지 탱고 춤 공연을 본 적이 없는 필자에게 그들의 현란한 몸놀림은 잊지 못할 놀라움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호드리게스가 부른 ‘검은 돛배(Barco Negro)’가 주제음악으로 사용된 후부터였다.
- 2016-01-0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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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의 문화공감] 눈과 귀가 즐거운 칸초네와 플라멩코
-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라는 영화는 필자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집사람과 대학교에 들어가 다시 데이트를 시작한 후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함께 본 영화이다. 1963년 6월 스카라 극장에서 상영한 이 영화에는 최고의 칸초네가수 도메니코 모두뇨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여러 곡의 칸초네를 불렀다. 그리고 미녀가수 미나가 주제가 ‘행복은 가득히(Il Cielo In Una Stanza)’라는 칸초네를 불렀는데, 그 후 C.C.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여배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주연하는 ‘가방을 든 여인’(1961)이라는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의 원제목은 ‘이스키아 섬의 약속’. 이탈리아 남부의 유명한 휴양지 이스키아 섬에서 촬영했다. ‘태양은 가득히’(1960)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를 통해 칸초네라는 음악을 알게 되었다. 샹송이 특별한 음악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노래’를 뜻하듯 칸초네 역시 이탈리아어로 그냥 노래라는 뜻이다. 그래서 팝송도 샹송도 이탈리아에 가면 다 칸초네가 되지만 우리는 이탈리아의 노래를 칸초네라고 부른다. 칸초네는 초기에는 주로 오 솔레미오, 산타루치아 등 나폴리 민요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나 ‘산레모 가요제’가 시작되면서 레코드회사나 악보출판사 등의 입김이 작용하여 많이 상업화되었다고 한다. 당시 유행하던 칸초네는 이 영화의 주인공 도메니코 모두뇨의 볼라레와 차오 차오 밤비나, 그리고 토니 달라라의 코메 프리마와 라 노비아, 질리올라 칭게티의 노노레타와 비, 마리사 산니아의 카사비앙카, 루치아노 타요리의 알·디·라 등 주로 산레모 가요제의 입상곡들이 많았다. 그 외에 알리다 켓리가 구슬픈 목소리로 부르는 ‘형사’라는 영화의 주제가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 그리고 밀바, 나다 등 여러 가수가 부른 물망초, 로마여 안녕(Arrivederci Roma), 마음은 집시, 검은 고양이 네로 등과 같은 곡들이 상당히 큰 히트를 했다. 베니스에 가서 곤돌라를 타고 곤돌리에(곤돌라의 사공)에게 노래를 청하면 이들 중 몇 곡은 들을 수 있었다. 스페인음악에 대한 사랑은 몇 장의 LP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아코디온 연주자 Charles Magnante의 Spanish Spectacular라는 판으로서 안달루시아, 라 쿰파르시타, 질투(Jalousie), 스페인 월츠, 에스파냐 카니 등은 팝송이나 샹송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필자에게 또 한 번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 구한 스탠리 블랙 악단의 ‘스페인’이라는 판 역시 듣기가 매우 좋았다. 그래서 좀 더 관심을 가지다 보니 스페인음악의 진수는 기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세고비아로, 바흐와 같은 작곡가들의 하프시코드 음악을 150곡 이상 기타곡으로 편곡하고, 빌라 로보스 등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기타곡을 작곡하도록 함으로써 레퍼토리를 늘려 기타를 연주회용 악기로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타레가의 알함브라궁전의 추억,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등 수많은 기타 명곡들이 필자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스페인음악 하면 또 플라멩코(Flamenco)를 빼놓을 수 없다. 플라멩코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심장이라고 하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애수가 담긴 전통 민요와 향토 무용, 그리고 플라멩코 기타 반주 세 가지가 어우러지는 이 지역 특유의 민속예술이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이 이를 소홀히 할 때 집시가 대신하여 전승과 발전에 힘썼기 때문에, 그 형식에는 집시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순수한 플라멩코는 캐스터네츠를 쓰지 않고 사파테아드(구두 소리), 팔마(손뼉 치는 소리), 피트(손가락 튕기는 소리)로 구성되며, 할레오(관중이 장단에 맞추어 지르는 소리, 우리의 추임새와 비슷함)도 섞여 열광적인 광경을 전개한다. 필자는 2002년 7월 29일 집사람과 함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후 약 한 달간 주로 유레일패스를 이용하여 스페인 여행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1992년 제25회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 우승을 했던 몬 주익 언덕의 경기장을 비롯하여 가우디가 설계하고 100년이 지나도록 건설 중인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 등을 관광했다. 다음에 도착한 도시가 그라나다였다. 음악으로만 듣던 알함브라궁전을 직접 방문하여 트레몰로로 연주되는 그 음악을 들으며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바로 황홀, 그 자체였다. 또 저녁때는 식사 후 알함브라궁전 서쪽의 계곡 건너편에 있는 집시촌 싸크로 몬테에 가서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본산지의 플라멩코를 감상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뒤이어 코르도바, 세비야를 두루 관광한 후 바다호스에 가서 필자가 주례를 섰고 현지에서 침구(鍼灸)학원을 하는 O씨 집에 묵으며 그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다음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의 집 등을 구경하고 아랑훼스에 가서 아담하지만 매우 아름다운 스페인왕의 여름별궁을 관광할 때에는 ‘아랑훼스협주곡’의 제2악장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왕궁, 미술관 등을 관람한 후 세계무용대회가 열리는 오렌세와 다음 대회 장소인 카나리아군도의 테네리페에 가서 나흘간에 걸쳐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과 무용을 관람한 것도 쉽게 가지기 어려운 즐거운 기회였다. 아직도 활동 중인 그 섬의 화산이 인상적이었고, 나체촌이 있는 해수욕장도 정말 아름다웠다.
- 2015-12-2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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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의 사회사②] 180여 년 전 처음 나온 하모니카, 구순의 나에겐 80년 친구
- 글 황경춘 전 외신기자클럽 회장 하모니카는 서민들에게도 친숙한 가장 대중적인 악기 중의 하나입니다. 가격이 적당하고, 배우기 쉽고, 그러면서도 오묘한 트레몰로(tremolo)음을 내어 음악 애호가를 매혹합니다. 게다가 100세 시대를 지향하는 요즘의 노인들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한때 침체했던 우리나라 하모니카 동호 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습니다. 하모니카의 기원과 확산 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하모니카가 언제 어떻게 발명되었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었으나, 현재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것은 1827년 독일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부시만(Christian Friedrich Ludwig Buschmann)이 하모니카의 원형을 발명했다는 설입니다. 베를린에 사는 오르간 직공의 아들이었던 부시만은 이보다 6년 전 16세일 때, ‘오라(AURA)’라는 오르간 조율용(調律用)으로 철제 리드(reed)를 붙인 퉁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모니카 발명의 단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모니카는 꾸준히 개발돼 현재 1500여 종의 모델이 있습니다. 가장 정교한 모델은 1200개 이상의 부품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수작업은 약 50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품 중 많은 부분이 이렇게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대량생산이 어렵다고 합니다. 하모니카에는 복음(複音), 단음(單音), 중음(重音)의 세 종류가 있으나 복음이 가장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부시만이 하모니카를 발명한 뒤 몇 차례의 모델 개발을 거쳐, 하모니카의 상업생산을 시작한 것은 독일의 호너(Hohner)사입니다. 전 세계로 판로를 확대한 호너사는 지금도 하모니카 생산의 중심에 있습니다. 1857년 창립된 호너사는 독일 남부의 소도시 트로싱엔(Trossingen)에 있는 군소 하모니카 공장을 흡수했습니다.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부품 제작의 분업화를 실시함에 따라 한때 지역 주민의 약 3분의 1이 하모니카 제작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창업자 마티아스 호너(Matthias Hohner)는 캐나다로 이민한 4촌 형을 통하여 6개의 하모니카를 1862년에 처음으로 북미대륙에 수출하였습니다. 이때 하모니카 한 대의 수출가격은 단 1달러였다고 합니다. 미국에 수출된 이후 번창 미국에 소개된 하모니카는 특히 흑인들이 즐겨 부르는 블루스, 재즈, 포크 뮤직 등의 연주에 좋은 반응을 얻어 크게 유행하고, 독특한 모델도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뉴저지주 유니온에 두 개의 하모니카 제조공장까지 설립되어 번창하였습니다. 이렇게 대중화된 미국의 하모니카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뜻하지 않은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하모니카의 리드에 필요한 특수 합금이 군수품 통제의 영향을 받게 된 데다 하모니카 제작에 긴요한 자재를 적국인 독일이 수출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모니카가 군인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자 미국 정부는 하모니카 제작에 필요한 특수 제강을 하모니카 공장에 계속 배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시라서 자재가 부족해지자 미국은 플라스틱 리드(plastic reed)를 발명하여 이를 하모니카에 사용하였습니다. 이 플라스틱 리드는 미묘한 음질의 차이는 있었지만, 미국 하모니카 산업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대중의 반응도 좋았다고 합니다. 미국 음악계에서 하모니카가 차지하는 위치는 미국 음악연맹이 1948년에 하모니카를 ‘합법적 악기’로 인정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엽에 하모니카 연주 음반은 극소수였고 주로 흑인을 위한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하모니카 연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백인을 위한 음반도 나오게 됐습니다. 당시 하모니카 연주자 래리 애들러(Larry Adler)가 처음으로 저명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을 위해 쓴 곡을 하모니카로 연주했습니다. 그때까지 하모니카는 역시 ‘완구 악기(toy instrumen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20년대 19세기 말엽에 이 하모니카가 일본에도 수입되었는데, 그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1896년 8월에 발간된 월간지에 ‘손풍금 독학’이라는 기사가 있고 하모니카 판매 광고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1902년에는 어느 완구 도매상이 독일 호너사의 불량품을 수입하여 완구로 팔아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제 하모니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0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통치가 시작된 후, 이 하모니카가 일본으로부터 흘러들어 1928년에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하모니카 밴드가 결성되고, 1935년에는 역시 평양에 YMCA 밴드가 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필자의 기억에 당시 라디오에서 가끔 하모니카 연주가 방송되었지만, 이것이 우리 동포의 연주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 온 우리 하모니카 활동이 광복 후인 1952년 고려하모니카연구단이 결성되고 1957년 대한하모니카협회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체신부 차관이었던 조응천 박사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 협회는 곧 문공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협회 외에도 한국하모니카연맹, 오케스트라 하모니카 교육센터, 한국하모니카아카데미 등 여러 단체와 수많은 동호회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페스티벌’을 유치하고, 올해 8월에도 ‘국제 하모니카 페스티벌(International Harmonica Festival)’을 주최하는 등 국제 교류도 활발합니다. 그리고 노인회나 의료기관의 환자 재활에도 하모니카 동호인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하모니카 제작사는 45년의 역사를 가진 미화악기사가 유일합니다. 이 회사는 2008년부터 자체 브랜드의 하모니카를 시장에 공급하고 있는데, 회사 측은 국내외에서 평판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브라질에도 하모니카 애호가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 생산은 독일, 일본 및 중국이 주요 생산국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생산에 노동력의 비중이 큰 만큼, 일본도 국내에서는 교육용으로만 생산하고 중국에서 주문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초등 4학년 때 털장갑 대신 산 악기 올해 92세인 저와 하모니카와의 인연은 열두 살이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됐습니다. 특별히 음악에 취미나 소양이 있는 어린이는 아니었으나 가끔 라디오에서 듣는 하모니카 연주가 어린 저를 홀렸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를 원한다고 사줄 가정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제게 털장갑을 사라고 30전을 주셨습니다. 제게는 큰돈이었는데 문득 이 돈으로 평소에 원했던 하모니카를 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학교가 끝난 뒤, 제가 찾은 곳은 장갑 가게가 아닌 악기점이었습니다. 지금 확실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장갑 살 돈으로 연습용 새 하모니카를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 한 갑이 5전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 장갑을 사오지 않은 저의 꼼수는 금방 탈이 났습니다. 인자하신 어머니는 크게 야단을 치기는 하셨지만, 하모니카를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간단한 동요나 아리랑 같은 쉬운 노래는 독학으로 하모니카로 불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으로 부모 밑을 떠나 진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객지의 외로움을 달랜 것이 이 하모니카였습니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진주 출신 가수 남인수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외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복수의 ‘타향살이’ 등 당시에 배웠던 곡들을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음악 소양이 없어 정식 악보는 읽지 못하는 처지지만 하모니카로는 동요, 유행가 등을 즐겨 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일제 하모니카는 광복의 혼란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1950년 미국공보원에 근무할 때 피난 수도 부산에서 미국인 동료에게 부탁해 구입한 일제 하모니카를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하모니카는 들숨과 뱉는 숨으로 소리를 내는 리드(reed)가 교대로 배열되어 있어 나이 많은 분이 연주하기에도 별 어려움이 없는 단순하고 편리한 악기입니다. 노인들의 폐활량을 증강시키는 데 효과가 크다고 하니 늦다고 생각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도전해볼 만한 간단한 악기입니다.
- 2015-10-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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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광복 70년을 빛낸 가수와 노래들 - 임진모 음악평론가
- 광복 70년의 역사에서 대중음악은 어떤 분야보다도 일반 대중의 정서와 우리 사회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반영하면서 문화의 선두에 서왔다. 한국 사회의 발전상을 축약하면서 우리의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알고 기억하는 가장 많은 스타들을 내놓은 곳이 대중가요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글 임진모 음악평론가 광복과 함께 대중음악은 산업적 덩치를 키운 것은 물론 서구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갖가지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예술적 성장과 성숙을 거듭했다. 대중음악은 광복 이후 70년의 역사 속에서 찬란히 꽃을 피운 것이다. 광복 이전에도 대중이 사랑한 음악은 있었다. 이난영, 남인수, 현인, 고복수 등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가수들은 애초 세련된 음악이었으나 갈수록 서민대중의 호흡과 동행한 음악으로 남은 것은 이후 성인가요로 불린 트로트였다. 조금은 저학력과 가난 혹은 단순한 재미로 연결되는 음악이지만 트로트는 꾸준하게 서민대중의 희로애락을 반영하면서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광복 이후에 트로트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출현하면서 다시금 힘찬 날갯짓을 했다. 1964년 발표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역사상 최초로 100만장에 준하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미자는 특히 1960-70년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한과 설움을 삼킨 여인들을 대변한 비가(悲歌)를 많이 부르면서 한국 최고의 여가수, 세기의 가수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우리 대중문화 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을 전개한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를 잇는 트로트의 별이었다. 전국을 삼킨 두 가수의 인기대결은 국민 전체가 둘로 나뉘어 설전을 벌일 만큼 살벌했다. ‘님과 함께’를 비롯한 조금은 밝은 톤의 노래를 한 남진이 경제성장 시기의 빛이었다면 ‘물레방아 도는데’와 같은 구슬픈 노래로 이농(離農)의 고통을 표현한 나훈아는 경제성장 시기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단은 그러나 남진과 나훈아가 겨뤘던 때를 트로트의 마지막 전성기로 규정한다. 그때까지 어떤 장르들보다도 드높은 위용을 자랑했으나 이후에는 시장의 헤게모니를 다른 스타일에 넘겨주게 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하춘화, 1980년대 주현미와 현철, 1990년대 태진아와 송대관, 그리고 2000년대 ‘어머나’의 장윤정으로 트로트계보는 쉼 없이 이어졌지만 위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1960년대 중반까지 독점적 위력을 행사한 트로트는 광복 후 전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문화가 물밀듯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외국의 영향을 받은 음악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용산 동두천 부평 대구 등 이른바 미8군 지역의 영내와 영외에는 우리 음악가들의 미군을 위한 공연활동이 러시를 이뤘고 이후 그들은 국내 무대에 진출해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꿨다. 트로트 일색이었던 음악계에 그들이 들여놓은 음악은 미국의 재즈와 팝에 기초한 소위 ‘스탠더드 팝’이란 것이었다. 아직도 용어가 불분명한 이 스타일의 음악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진 해에 히트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현미,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패티김, 정훈희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발라드를 잘 소화한 스탠더드 팝가수들은 미8군 출신답게 팝송도 자주 불렀으며 노래에 영어를 자주 썼다. 이 가운데 ‘하숙생’의 최희준과 ‘서울의 찬가’의 패티김이 특급스타였다. 서구음악인 스탠더드 팝은 기조와 성격에 있어서 트로트와 대치되는 음악이었지만 국내 방송의 ‘10대 가수가요제’와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트로트와 병치되면서 같은 ‘어덜트(adult) 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베이비붐 세대 이전의 전쟁세대라고 할 1930-40년대 생 인구의 음악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할까. ‘록’ 신중현과 ‘포크’ 김민기 미8군을 통해 국내 소개된 음악 중 1950년대 생 이후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는 청춘의 뜨거운 피를 담은 로큰롤, 즉 록으로(그때 말로는 ‘그룹사운드’) 궁합을 맞췄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청춘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키보이스’를 위시한 그룹사운드가 판을 쳤다. 하지만 역사는 국내 최초의 록밴드 ‘애드포’를 결성한 신중현을 ‘한국 록의 대부’로, ‘한국 대중음악의 총설계자’로 상찬하며 고평을 집중한다. 블루스와 싸이키델릭 등 서구의 음악문법을 창조적으로 가공해 우리식 록의 프레임을 주조해냈다는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스스로 ‘아름다운 강산’, ‘미인’과 같은 명곡을 부른 가수인 한편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박인수, 김정미 등에게 ‘커피 한 잔’, ‘임은 먼 곳에’, ‘미련’, ‘봄비’, ‘봄’ 등 요즘 기준에서도 빼어난 수준의 음악을 잇달아 써준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스타가수들을 언론은 ‘신중현사단’으로 일컬었다. 하지만 1975년 유신시대의 대마초와 금지곡 파동에 활동이 급정지된 그와 함께 한국의 록은 침체기로 접어든다. 록만이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사운드트랙인 포크도 독재통치의 철퇴를 맞는다. ‘청통맥’ 즉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표현된 베이비붐 세대들의 꿈과 도약, 아픔과 좌절을 창의적으로 그려낸 많은 포크송 가수들이 활동금지를 당하거나 은둔의 처지에 몰렸다.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서유석, 이장희, 김정호 등이 한국 포크의 기수들이었다. 이들 음악은 전쟁세대보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어필했다. 포크 가수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곡을 만들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하고 노래하며 이전의 악단과 전문 작곡가가 지배한 풍토에서 탈피, 소위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시대를 개척했다. 대부분 자기가 쓴 곡을 담은 LP를 최초로 출반한 김민기에 자극받아 동시대의 많은 가수들이 자작곡을 내놓은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김민기는 록의 신중현과 같은 인물이다. ‘아침이슬’ ‘백구’ 등 그가 작곡해준 곡을 불러 유명해진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음악의 자가발전을 이뤘다는 점에서 포크를 ‘한국 음악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정의하는 관계자들이 많다. 하지만 포크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서라 할 청춘스피릿이 당시 군사정부와 충돌하면서 대마초 파동이라는 암흑기를 초래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네 범주 가운데 어덜트 음악인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1980년대에 들어 정체상태를 맞은 반면 시련을 맞은 영(Young) 음악인 록은 1977년 대학가요제와 밴드 ‘산울림’의 등장으로 힘차게 재도약한다. 참신하고 재기에 넘치는 가사와 실험적인 곡 전개를 특징으로 한 산울림은 흑인음악인 펑크(funk)를 실험한 ‘사랑과 평화’와 함께 록의 기운을 되살렸다. 포크는 1970년대 중·후반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을 거친 뒤 시대를 고발하는 민중가요를 낳았고, 1990년대에는 김광석이 활약했지만 장르의 파괴력은 2000년대 들어서 현저히 후퇴했다. ‘가왕’ 조용필, ‘10대 대통령’ 서태지 1980년대의 특급 스타들인 조용필, 윤수일, 김수철, 구창모 등은 대부분 록의 세례를 받은 가수들이었고 실제로 상당수가 밴드를 거느리며 대중적 록의 위용을 뽐냈다. 밴드 송골매와 벗님들은 TV에서도 맹활약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훗날 ‘가왕’으로 통한 조용필의 것이었다. 그는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 발랄한 록으로 10대 오빠부대를 이끄는 동시에 ‘허공’ 등 트로트 성향의 노래도 불러 다세대를 망라한 국민가수의 면모를 과시했다. 또한 앨범마다 혁신을 불어넣어 단일 곡이 아닌 앨범 전체의 미학과 음악적 완성도가 중요해진 흐름을 견인했다. 아마도 베이비붐 세대와 1960년대 중반 생 이후의 포스트 베이비붐을 함께 묶는 유일한 가수가 조용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활약하던 1980년대는 가요계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때라서 이전 음악계에는 없던 갖가지 장르의 음악이 용암이 분출하듯 솟아올랐다. 김현식, 한영애, 들국화와 같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젊은이들이 찾았고 ‘봄여름가을겨울’과 김현철은 재즈를 실험했으며 ‘신촌블루스’처럼 블루스를 시도한 음악가도 나왔다. 이문세에 곡을 준 이영훈과 비운의 천재 유재하는 뽕짝 즉 트로트 느낌을 완전 배제한 팝 발라드의 꽃을 피웠다. 이 음악과 함께 고학력 여성들도 시장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됐지만 음악의 주도권은 하이틴으로 넘어가 나미, 김완선, 소방차 등 10대가 좋아하는 댄스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중심이 ‘10대’와 ‘댄스음악’이라는 트렌드를 정확히 간파해 시대를 가른 인물은 1992년 광풍을 야기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점프한 케이팝 새로운 음악인 랩을 가요에 접목한 서태지는 신세대인 X세대의 공격성을 노골화한 음악을 구사해 10대대통령 또는 문화대통령으로 불렸다. 그가 랩을 끌어들이고 잠시 후 김건모가 ‘레게’를 유행시키고 듀엣 ‘듀스’가 ‘힙합’을 퍼뜨리면서 1990년대 국내음악 판은 과거에는 홀대된 흑인음악으로 쏠려갔다. 한 사회학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흑인음악에 열광하는 것은 백인음악에 압도적으로 경도된 기성세대에 대한 은근한 반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태지가 은퇴를 선언한 1996년부터 음악계는 댄스와 비주얼을 내건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가수들이 판세를 장악했다. 동아시아에 한류 붐을 터뜨린 ‘에쵸티’(H.O.T.)를 시작으로 2세대라고 할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투애니원’ 등 아이돌 댄스음악은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대세를 몰이하며 장수하고 있다. ‘애들 음악은 5년을 못 간다!’는 속설을 깼을 뿐 아니라 ‘텔 미’의 걸 그룹 원더걸스가 등장한 2007년부터는 케이팝(K-Pop)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간 우리의 아이돌음악은 세계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문화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아이돌 댄스의 주류음악에 반발해 독립을 외친 인디음악이 소생하기도 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IMF 시절 넥타이부대의 찬가로 등장, 인디의 가능성을 알렸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요원했던 빌보드 차트에서 5주간 2위를 차지, 케이팝의 지평을 크게 올려놓았다. “케이팝 때문에 한국을 알았다”는 세계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각 세대와 계층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대중의식을 이끌어온 대중음악이 광복 70년 역사의 내공을 발휘하며 이제 내수시장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서 찬란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케이팝이란 깃발 아래 우리 역사의 사운드트랙은 시제를 미래로 맞추고 있다. △ 임진모 음악 평론가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후 경향신문과 내외경제신문기자를 거쳐 1991년부터 음악평론. 라디오 출연 등 전파. 인쇄매체에서 폭넓게 활동중이다.
- 2015-08-0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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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인터뷰] 가곡의 진수를 선물하다 - 더 클래식 500 정동기(鄭東麒·56) 본부장
- 안경을 쓴 모습이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만, 그 속에 보이는 정동기 본부장의 눈빛은 꽤나 깊이 있다. 40년 가곡 감상으로 다져진 남다른 감성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게다. 그가 운영하는 국내 최대 가곡 감상 사이트 이름도 ‘내 마음의 노래(www.krsong.com)’일 만큼 가곡은 이미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이제 가곡을 떼어 놓고는 그의 삶을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길 잡이 목련화는 /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백화점 스피커를 타고 가곡 ‘목련화’가 매장 구석구석을 수놓는다. 백화점 구경을 하러 온 한 고등학생 소년의 귀가 그 음악을 향한다. 소년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발걸음을 멈추고 그 곡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5분 남짓 노래의 최면에 흠뻑 빠져 있던 소년은 노래의 마침표가 찍히자 최면에서 깨어난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차비 500원을 꺼낸다. 차비를 모두 쓰면 집까지 걸어가야 하지만 음반을 구입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집으로 오는 길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가곡 ‘목련화’가 담긴 커다란 LP판. 그때 그의 나이 18세, 실버타운 ‘더 클래식 500’ 정동기 본부장의 가곡 음반 수집 인생의 시작이었다. ◇가곡 3000장 “장르를 불문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LP가 모두 3000장, CD가 3000~4000장 정도 됩니다. 그중 한국 가곡 LP가 500장, 한국 가곡 CD가 2500장 정도이고요. 가곡 음반만 3000장가량 되는 셈이죠. 제가 운영하는 가곡 감상 사이트 ‘내 마음의 노래(www.krsong.com)’에도 1만여 곡의 가곡이 올려져 있습니다.” 가곡 음반 수집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 씨. 요즘도 틈이 날 때마다 명동과 회현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가곡 음반을 탐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웬만한 한국 가곡 음반은 모두 가지고 있어 음반 시장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새로운 음반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그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사에서도 가곡 음원이 필요할 때 그에게 대여를 요청할 정도다. 그가 일명 ‘도너츠 판’이라고 불리는 10인치 LP판 다섯 개를 꺼내들었다. ‘방첩의 노래’, ‘저축의 노래’, ‘새마을 노래’, ‘고속도로의 노래’, ‘축구의 노래’라는 음반이었다. 그 제목부터 음반의 표지까지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 음반들은 시대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일종의 역사다. 정 씨는 가곡이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음반들도 그때마다 모았다고 했다. “예전에는 국가에서 하는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관련 홍보물을 음반으로 제작하기도 했죠. ‘저축의 노래’는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고속도로의 노래’는 경부고속도로 완공 기념으로 만들어진 음반입니다. 이 곡들은 가곡은 아니지만 가곡 작곡가들이 직접 곡을 만들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음반 ‘나그네의 노래’와 ‘길은 멀어도’의 기억 “잊고 있던 노래가 몇 년, 몇십 년이 흐른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20세 때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즐겨 듣던 가곡 ‘나그네의 노래(이호섭 곡)’라는 곡이 있었어요. 30대부터 그 음반을 찾으려고 수소문을 했는데도 찾기 힘들더군요. 그렇게 수소문한 것만 20여 년이었어요. 그런데 50대가 돼서 그 곡 작곡가의 아들이라는 분이 제가 아버지의 자료를 수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에게 연락을 해주어 그 음반을 우연히 얻게 된 적도 있습니다.” 정 씨가 가곡 음반을 수집한 세월만 해도 40년이 다 돼 간다. 수집 과정 중에서 그가 선택한 가장 소장 가치가 있는 LP는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이라는 곡이 들어 있는 영화 ‘길은 멀어도’ 10인치 음반이다. 그 음반을 구하기까지 나름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가곡 대중화 운동’을 펼치곤 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뜻을 모아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기도 했는데, 10여 년 전에는 그 연주회에 가곡의 거장 김동진 선생을 모셔 온 적이 있었다. 김 씨가 작곡한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이라는 곡을 직접 공연하기 위함이었다. 김 씨는 이곳에서 영화 ‘길은 멀어도’에 삽입된 적이 있는 이 곡을 직접 부르고 해석도 해줬는데, 이 곡과 영화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함께 설명했다고 한다. “원래 영화에서 주인공인 최무룡 씨와 김지미 씨가 이 노래를 불렀어야 했는데, 최무룡 씨가 노래를 잘 못해서 김 선생님께서 직접 노래를 하셨다고 해요. 그 당시 영화는 모두 더빙이었으니 아무도 몰랐던 거죠. 최무룡 씨 부분은 김동진 선생님이 하셨고, 김지미 씨 부분은 바리톤 김동규 씨의 어머니인 성악가 박옥련(현재 ‘박석련’으로 개명) 씨가 불렀다고 합니다. 행사 때마다 얘기를 해주셔서 인터넷 LP 사이트를 뒤져 어렵게 구해 가치가 있는 음반입니다.” ◇저녁에 어울리는 음악 정 씨는 정통 클래식과는 달리 가곡은 아침이나 저녁에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말한다. 가곡이 담고 있는 특유의 서정성이 하루 일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 활력과 평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한국 가곡의 80%는 한국인의 서정성을 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속에 가곡과 같은 서정을 갖고 있어야 그 삶이 편안하고 여유로워진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취미가 노후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근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는 가곡이야말로 신중년이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데 특효약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가곡을 합창해 보는 것은 음악적으로 자기표현능력을 키우면서도 서로 어우러지기 위한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고 설명한다. 그가 10년이 넘게 가곡 합창과 발표회의 고삐를 놓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가곡은 신중년의 동심을 불러일으키고, 동심은 곧 젊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는 미래는 지금까지 해온 열정의 연장선에 있다. 지금의 직장인 실버타운 ‘더 클래식 500’에서 클래식한 한국문화가 더해지고, 고급스럽게 재창조돼 신중년이 이런 것을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말이다. “오디오 감상실을 활용해 옛날 유료 음악감상실처럼 소장하고 있는 가곡 음반을 ‘더 클래식 500’ 회원들에게 들려 드리고 싶어요. 거기에 ‘음반으로 살펴보는 한국가곡사’ 등 더 클래식 500 특별전시회도 제가 가진 콘텐츠를 일터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클래식 500 학교법인 건국대학교가 설립한 도심 속의 미래형 복합문화주거공간 ‘더 클래식 500’은 세련되고 편안한 하우징 서비스와 고급스럽고 우아한 호텔 서비스를 제공한다. 더 클래식 500은 상위 1%를 위한 프라이빗 시니어 타운으로 소수만을 위한 하우징 서비스를 하고 있다. 프리미엄 레지던스 콘셉트의 호텔 ‘PENTAZ’ 는 오래 머물러도 내 집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맞춤 서비스를 진행한다.
- 2015-06-2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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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읽기] 응답하라 1960’, 소녀시대 ‘드림걸즈’
- 글 이유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교수 “드림걸즈가 당신의 꿈을 이뤄줄게.” 새봄에 드림걸즈라는 이름의 요정들이 나타나서 이렇게 속삭여 노래해 준다면 누구나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 받게 될 것이다. 뮤지컬 ‘드림걸즈(Dreamgirls)’는 그런 에너지가 넘치는 뮤지컬이다. 1960년대 미국 시카고의 시골뜨기 흑인 소녀 에피는 디나, 로렌과 그들의 작곡가인 남동생 C.C.와 함께 무작정 상경하듯 뉴욕으로 가 백업 코러스 가수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하고 매니저 커티스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의 아이도 갖게 되지만 성공만을 좇는 커티스는 리더 보컬인 에피 대신 외모가 뛰어난 디나를 리드 보컬로 세우고 결혼까지 한다. 상처 입은 에피는 ‘And I Am Telling You I′m Not Going’을 피를 토하듯 열창하며 팀을 떠나 홀로 딸을 키우며 재기하려 하지만 번번이 냉혹한 쇼비즈니스 세계와 커티스의 방해와 부딪히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음악으로 자신의 자아를 되찾는다. 커티스의 실체를 알게 된 디나는 에피를 위로하고 화해하며 ‘Listen’을 함께 노래하고 마지막 콘서트를 연다. 뮤지컬 ‘드림걸즈’는 1981년 12월 20일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첫 공연되어 1982년에 토니상 6개 부문, 드라마데스크 5개 부문에 그래미상까지 휩쓴 화제작이다. 2006년 뮤지컬 영화로도 제작돼 흥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9년 한·미 합작 글로벌 프로덕션으로 다시 제작되어 한국에서 재공연, 올해 또 재공연된다. ‘One Night Only’를 열창하는 뮤지컬 ‘드림걸즈’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인생의 봄, 청춘으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일정 2015.02.26.~05.25.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데이비드 스완 출연 차지연, 박혜나, 최현선, 윤공주, 박은미, 유지 등 제작 오디컴퍼니주식회사, 롯데엔터테인먼트
- 2015-06-0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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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나이듦에 대하여
- ‘근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시킨은 운문소설 에서 젊은 시절에 젊었던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늙은 시절에 늙은 사람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젊은 나이에 젊은 것이며 늙은 나이에 늙은 것인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이와 삶의 단계에 대해서는 공자의 말이 유명합니다. 공자는 40이 불혹(不惑), 50이 지천명(知天命), 60이 이순(耳順), 70이 종심(從心)이라고 했습니다. 마흔이 되면 판단이 흐려지는 일이 없게 되고, 쉰이 되면 천명을 알며, 예순이 되면 생각하는 게 원만해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일흔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사람들도 과연 그럴까요? 불혹이 아니라 다혹(多惑)이라고 해야 할 만큼 요즘의 마흔은 분별이 모자라고, 천명을 알기는커녕 천명의 존재 자체를 우습게 볼 만큼 요즘의 쉰은 여전히 역동적입니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사람들은 “마흔이 되면 매지근하고 쉰이 되면 쉬지근하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예순 일흔에 대해서는 그런 말도 없을 정도였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듯이 일흔을 넘기는 것은 대단한 장수로 치부돼왔습니다. 지금은 생활환경이 나아지고 의료와 복지의 발달로 인해 평균수명이 늘어나 원래 나이에서 20%를 깎은 게 실제 나이라는 말도 합니다. 40세는 청춘의 노년, 50세는 노년의 청춘이라고 말하는 장수시대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50이 불혹, 60이 지천명이라고 해야 할 판입니다. 나이의 Norm(표준)과 틀이 없어지는 세상입니다. 칠순을 넘기면 신선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 말한 분도 있습니다. 서른은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이립(而立)의 나이이지만 요즘 서른에 결혼하거나 취직해 삶의 기반을 닦는 젊은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전통적인 나이의 규범에 따라 삶과 세상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루소는 에서 10세에는 과자, 20세엔 연인, 30세엔 쾌락, 40세엔 야심, 50세엔 탐욕을 좇는 게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60세 이후엔 뭘 추구하나요? 벤저민 프랭클린은 에서 20세에 중요한 것은 의지, 30세에 중요한 것은 기지, 40세에 중요한 것은 판단이라고 했는데, 50세 이후에는 뭐가 중요할까요? 영국 시인 에드워드 영(1683~1765)은 “나이 마흔에도 바보인 사람은 정말 바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40, 50이 되도록 이름이 나지 않는 사람은 두려워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20세에 용모 수려하지 않고 30세에 건장하지 않고 40세에 부자가 안 되고 50세에 현명하지 않으면 평생 수려 건장 부자 현자가 될 수 없다”고 한 사람(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 )도 있습니다. 83세까지 장수하면서 다방면으로 큰 업적을 남긴 괴테는 “무언가 큰일을 성취하려 한다면 나이를 먹어도 청년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자꾸 초조해집니다. 귀한 생을 받아 이 세상에 왔으니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거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떠나고 싶은데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오래 살아야만 이름을 남기는 건 아닐 것입니다.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는 겨우 24세로 죽었지만 그의 작품은 탄생 200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천재들 중 요절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삶을 완성하고 갔습니다. 44세로 사망한 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20세에 취했고, 30세에 파멸했고, 40세에 죽었다.’고 노트에 썼습니다. 천재들은 예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릴케의 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은 일생을 두고 가능하면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후에 가서는 아마 10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인 것이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고 진보하는 존재일까요? 판단력이 여물면 상상력은 시들어갑니다.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충실을 뜻하는 춘화추실(春華秋實)이라는 말이 있지만 봄의 꽃과 가을의 열매를 동시에 즐길 수는 없습니다. 영화 에서는 라라의 약혼자이자 러시아혁명 주체인 스트렐리니코프가 악덕 변호사 코마로프스키에게 “인간은 연령으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코라로프스키가 나이가 들면 관대해진다고 대답하자 스트렐리니코프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해지는 것”이라고 면박을 줍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해지고 꽉 막힌 외고집 벽창호가 된다면 그런 나이와 삶은 많고 길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대개 좋은 것,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 합니다. 969세까지 살았다는 성경 속 인물 므두셀라의 이름에서 유래한 ‘므두셀라 증후군’은 지나간 일 중 좋았던 기억들만 남겨 청춘을 ‘좋았던 시절’로 치부해 버리는 성향을 뜻합니다. 아마추어 골퍼들은 자신의 가장 좋은 샷만 기억하거나 가장 좋았던 점수를 평소 실력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 착각과 교만을 경계하면서 겸손과 배려의 나이를 쌓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92세로 타계한 핀란드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는 83세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최근에야 지상에서 내가 존재하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정원의 나무는 아주 작았고,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제 나무는 내 머리 위에서 나부끼면서 ‘당신은 곧 떠나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수백 년을 더 머물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기 때에는 앞으로 넘어지지만 철이 들면 뒤로 넘어진다고 합니다. 앞으로 넘어졌다가 똑바로 섰다가 뒤로 넘어지는 게 사람의 일생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이는 남이 알려줘야 자기 나이를 알지만 노년에 이른 사람은 힘겹도록 스스로 자기 나이를 압니다. 설날이 들어 있는 2월은 나이와 늙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되도록이면 똑바로 서서 의미 있는 삶을 완성해 가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여성 시인 메이 스웬슨(May Swenson 1913~1989)의 ‘어떻게 늙을까’(How to be old)라는 시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젊기는 쉽지. 모두 젊어, 처음엔. 늙기는 쉽지 않아. 세월이 걸리지. 젊음은 주어지는 것, 늙음은 이루어지는 것, 늙기 위해선 세월에 섞을 마법을 만들어 내야 돼.’ 그 마법을 찾아야 합니다.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이사장
- 2015-02-16 0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