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폭염이 이어지고 있으니 일단 더위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말이다. 집 안에서 에어컨 바람 쐬는 것도 좋지만 전국 각 지역의 더위를 잊게 해주는 축제에서 가는 세월을 즐겨보면 어떨까? 더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핫(?)한 여름을 책임질 전국 방방곡곡의 축제를 찾아봤다.
연재순서 ① 축제? 먹고 즐기자! ② 개운하게 한잔 촤악! 마시자 ③ 시원하게 솨악! 물놀이
사진 제공 각 지자체
개운하게 한잔 촤악! 마시자
한여름 살얼음 낀 잔에 따라 마시는 맥주 한 잔이면 독일의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가 부럽지 않다. 더위가 시작되는 6월부터 늦더위가 남아 있는 9월, 10월까지도 맥주 축제가 이어진다. 성인들에게 가볍게 한 잔 마시고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맥주의 장점. 푸드트럭은 물론 버스킹 공연과 신나는 한판 놀이장이 되는 곳이 바로 맥주 축제 현장이다. 게다가 몇 년 사이 수제 맥주 제조는 물론 다양한 세계 맥주가 유입되면서 오로지 취하기 위해 마시던 맥주가 맛과 향을 즐기는 문화의 주인공이 됐다. 6월 말에서 8월 사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질러 제주도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한 맥주 축제를 소개한다. 단, 더운 날의 과음은 금물이라는 걸 잊지 마시라!
비어페스트 광주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기간에 맞춰 문화수도 광주의 랜드마크인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비어페스트 광주 마셔BREWER’가 열린다. 전라도 방언 ‘~브러’를 사용해 진한 사투리의 가락을 축제에 녹였다. 마셔브러, 즐겨브러, 놀아브러! 시원한 맥주와 신나는 음악이 함께하는 맥주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외 다양한 맥주를 마실 수 있고 푸드트럭존과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매할 수 있는 플리마켓존이 운영된다.
기간 7월 11~20일 장소 전남 광주 서구 상무누리로 김대중컨벤션센터 야외광장
비어고을 광주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하는 광주의 맥주 축제 ‘비어고을 광주’는 ‘술 한 잔이 주는 진심, 진심들이 모여 만드는 축제’라는 주제로 1913 송정역 시장 근처에서 개최된다. 소맥 제조 최고의 경지를 보여줄 주인공을 뽑는 소맥 제조 자격시험, 시장에서 준비된 안주 중 최고의 안주 찾기 대회인 안주대첩, 음주와 관련한 3행시 실력을 증명해줄 음주 인재 찾기인 ‘비어고을 신춘문예’ 등이 펼쳐진다. 광주 지역 청년들이 침체된 상권을 살려보겠다는 일환으로 시작돼 맥주를 즐길 줄 아는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기간 6월 28~29일 장소 전남 광주시 광산구 1913 송정역 시장 일대
제주 짠 페스티벌
제주 최대 맥주 축제인 ‘짠 페스티벌’이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서귀포시 성산읍 플레이스 캠프 제주에서 진행된다. ‘짠’은 술잔을 마주칠 때 하는 소리다. 올해 3회째를 맞은 ‘짠 페스티벌’은 매회 50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축제로 제주도민과 제주 여행객들의 필수 여름 코스로 불린다. 올해는 제주를 대표하는 맥주와 약 50여 종의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맥주 빨리 마시기, 맥주 많이 마시기, 맥믈리에, 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도 축제 참가자들을 맞이할 예정이다. ‘짠 페스티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플레이스 캠프 제주 공식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확인하면 된다.
기간 7월 26~28일 장소 제주 서귀포시 플레이스 캠프 제주
대구 치맥페스티벌
치맥의 인기 덕에 매년 열리는 페스티벌이 있으니 바로 대구 치맥페스티벌이다. 대구와 아프리카의 합성어인 ‘대프리카’로 불릴 만큼 폭염이 심한 대구. 긴 세월의 오명을 씻어내고 여름을 즐기는 도시로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수중 아이스 카페, 아이스 테이블 등 이색적인 공간을 즐길 수 있다. 축제의 인기에 힘입어 축제 종료시간을 기존보다 연장해서 운영한다고. 축제 마스코트를 활용한 손선풍기와 캐릭터 모자, 꼬꼬머리띠 등 20여 종의 기념품이 준비되어 있다.
기간 7월 17~21일 장소 경북 대구시 달서구 두류공원 일원
주말 저녁,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저 배우가 엄청 즐기고 있구나! 한참 나이 어린 배역에게 ‘아버지’나 ‘오빠’를 연발했다. 심심하면 욕설에 머리채를 끄잡는데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명희야, 원혁이 번호 땄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106부작의 마지막 대사도 그녀 몫이었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에서 무던하게 녹아 있던 그녀. 이번만은 달랐다. 지난 3월 종영한 KBS2 주말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귀여운(?) 치매 환자 박금병 역으로 사랑받은 배우 정재순(鄭在順·72)을 두고 하는 소리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그녀를 마주보는 순간 멈칫했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가 나른하면서도 우아하게 무대로 걸어오는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면서 명희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박병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는 배우 정재순. 캐릭터 변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남다른 연기를 보여줬던 ‘하나뿐인 내편’이 그녀 인생에 있어 대단한 도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배역과 관련해 얘기를 들었을 때 극중에서 치매가 그렇게 큰 소재는 아니었어요. 그냥 약간 병세가 있다 하는 정도였죠. 그동안 치매 앓는 역은 안 해봤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이 나이 먹어서 한 번쯤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모르겠다! 해보자! 그랬던 거죠.”
새 드라마를 시작하면 늘 하던 대로 마음먹었을 뿐인데 시청자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치매 증상이 심해져 극중 손주며느리 도란(유이 역)을 친구 ‘명희’로, 그의 아버지(최수종 역)를 ‘강기사 오빠’로 부르면 부를수록, 며느리(차화연 역)와 둘째 손주며느리(윤진이 역)에게 욕을 하면 할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제가 극중에서 욕할 때 사람들이 참 찰지다고 그러대요? 제가 나쁜 년, 첩년 하고 말할 때요. 저도 상상 못했고 작가님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야기 전개를 하다 보니 여건이 잘 맞아떨어진 거죠. 그런데 자꾸 촬영 분량이 많아지더라고요.(웃음)”
말 그대로 배우 정재순의 재발견이었다. 올해로 데뷔 51년 차. 지적이고 차가운 이미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목과도 같은 중견배우였다. 긴 세월 각인되어온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해냈으니 박금병이 더욱 사랑받았던 것은 아닐까. 정재순은 딴생각 안 하고 배역을 즐겼다고 했다.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치매 환자라는 배역 설정 때문에 오만 가지를 다 해봤거든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도 해보고요. 배우로서도 찾기 힘든 캐릭터였어요. 카타르시스도 느꼈고요. 특히 머리끄덩이를 있는 대로 낚아채잖아요.(웃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요령이 생기더군요. 치매 증세가 나올 때 특히 나쁜 사람들에게 바른 소리도 마음껏 하고 말이죠.”
극중 박금병의 인기는 인터넷을 치면 확인된다. 정재순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드라마에서 착장한 귀걸이며 사용한 안경테, 옷 등의 브랜드를 알 수 있을 정도.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젊은 시절을 주로 기억하는 치매이다 보니 빨간 립스틱에 화려한 색감의 옷도 입고, 짧은 점퍼에 토끼 머리띠는 물론 시니어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미니크로스백도 수차례 바꿔 멨다.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후배 연기자들에게 애교 부리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나뿐인 내편’에 출연하면서 귀엽다, 예쁘다는 말을 평생 들어도 차고 넘칠 만큼 들었어요. 귀엽대요. 제가요. 저는 원래 재미없는 사람인데요.(웃음)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순간순간 다른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내 삶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렇다고 그녀가 박금병 같은 강한 캐릭터 연기를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KBS1 드라마 ‘하늘만큼 땅만큼’에서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새엄마 역할을 했고, SBS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에서는 배우 송승환과 연상연하 부부로 연기한 적 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 중 박금병이 인기나 화제성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녀는 최근 드라마와 캐릭터의 인기에 힘입어 KBS2 예능 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살면서 처음 나가봤어요. 우리 집안에 예능 PD가 있는데 출연 제의가 와도 안 나간다고 했거든요. 매니저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나갔네요. 유재석 씨가 능력자더라고요.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 앉혀놓고 잘 이끌더군요. 그날 ‘해피투게더’가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하더라고요.”
데뷔 51년 차, 나를 돌아보다
스타 탄생 비화에 종종 등장하는 스토리. 정재순도 친구 따라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얼떨결에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TBC
8기 공채 탤런트로 합격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미술대학교 지원도 못하게 했는데 탤런트를 하겠다니, 부모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지원군이 정재순 옆에 있었다. “저는 그때 대학 재수를 하면서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대가 심해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제 남편의 부모님이 제가 탤런트 된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밀어줬다기보다는 ‘괜찮다’ 이 정도요? 그때 시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시댁에서 바람날 여자는 안방에 앉혀놔도 막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힘과 용기를 내 방송사에 갔는데 세상에 아유…. 막상 닥쳐보니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끼도 없더라고요.”
간단히 말해 얼굴이 예뻐서 합격한 케이스였다.
“괜찮은 여자 탤런트가 들어왔다고 방송사에 소문은 났는데 연기를 시켜도 뭘 할 줄도 모르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였거든요. 야외 촬영은 너무 싫었어요. 스튜디오 촬영은 얼마든지 했고요. 사람들이 와서 지켜보고 있으면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박금병이 같은 역할도 하고. 약간 뻔뻔해졌다고나 할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연기자는 생각도 안 해본 직업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뭘 잘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는 것 같아요. 그냥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면서 방송사를 다니던 시절도 있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흐른 거죠. 51년 동안 인정받을 만한 작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너무 아쉬워요. 이번에 ‘하나뿐인 내편’은 기억에 남겠죠.”
기다림이 만들어 준 또 다른 이름 화가
남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많은 것보다 오랜 시간 기복 없이 꾸준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온 것 자체가 더 대단한 결과가 아닐까?
“그렇죠.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연기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선택받는 직업이잖아요. 매년 꾸준하게 몇 작품씩 들어와야 하는데 들쭉날쭉했어요. 그래서 그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아왔지만 부모님 반대로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물감을 사 모으기도 했다.
“집에서 혼자 수채화를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은사를 찾아가서 배웠는데 체계적으로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책도 찾아보고 공부도 하면서 미술공모전이 있으면 열심히 작품을 냈습니다. 미술계 유명한 공모전에는 거의 다 출품했던 것 같아요. 1991년에 첫 개인전을 할 때까지 응모했죠.”
그녀의 첫 개인전은 당대 히트작이었던 MBC 주말연속극 ‘배반의 장미’의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
“극중에서 제 배역은 속 썩이는 남편을 둔 재벌가 며느리였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캐릭터였는데 ‘배반의 장미’를 집필하신 김수현 선생님이 제가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극이 끝날 때쯤, 전시회가 있다는 걸 아시고 전시회 신(scene)을 만들어주셨어요. 그 드라마에 나왔던 전시회 장면은 제 개인전 모습이었어요. 정말 감사했죠. 어느 연기자가 그런 배려를 받을 수 있겠어요.”
화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느새 그녀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자로서의 삶과 화가로서의 삶은 그 성격이 판이했다.
“저는 연기와 그림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림은 혼자서 작업해도 되지만 드라마는 40~50명이 같이 어우러져서 일하잖아요. 1996년도에 네 번째 전시회를 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어요. 그때 한꺼번에 세 작품을 소화하는 중에 전시 스케줄까지 잡혔었거든요. 그 뒤 5년간은 드라마에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다시 개인전을 연건 12년 만이었죠.”
요즘은 그림 활동을 안 하다시피 하니 화가 정재순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색하다. 그래도 마음이 힘들던 시절에 자신을 위로해줬던 것은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시니어도 시간이 많다고 무료하게 지낼 게 아니라 취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도 주변 사람을 위해서도 좋더라고요. 드라마를 하면서 힘든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 힘든 세월 동안 그림이 있었으니까 많이 위로를 받은 거죠. 그리고 또 드라마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도 보여드리고 있잖아요.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림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있지만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자꾸 소홀해지는 것을 느낀다. 긴장감도 떨어지고 말이다.
“옛날같이 체력이 안 따라줘요. 예전에는 드라마와 그림을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쉽지 않아요. 저는 비구상화를 그려요. 마음이 캔버스에 드러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담아낼지 고민이 없으면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뭘 그릴까 계속해서 고민을 해도 작품이 나올까 말까예요. 누구도 함께할 수 없죠.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건 굉장히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거예요.”
박금병이 때문에 김장도 못했다
한참을 드라마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슬쩍 흘러갔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고. 나긋하게 깔리던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작년 말에 박금병이 역 하느라고 처음으로 김장을 못했어요. 살면서 거른 적이 없거든요. 매년 수산시장에서 젓갈이며 생선이며 사서 온 정성을 다해 담갔는데,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 별미인데 참 아쉽네. 이번에 대사도 많고 스케줄도 빡빡했거든요. 그런데 김장을 안 하니까 여기저기서 주셔서 김치가 되게 많아요. 그래도 박금병이도 잘되고 드라마도 잘돼서 좋습니다.”
인터뷰 초반에는 몰랐는데 살림이며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에게서 발랄한 목소리의 박금병이 느껴졌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으니 다시 정재순으로 돌아올 시간. 가발을 벗고 단장을 했는데 영 어색하다며 머리를 매만진다.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할머니 역할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엄마였다가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되는 역은 많았는데. 거기다가 치매 환자 연기까지 했잖아요.”
매일이 새로운 연기자
제대로 연기했다는 만족감을 준 배역을 묻자 주저 없이 “이거. 박금병!”이라고 대답하는 정재순.
“저는 연기자를 그냥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자로서 다른 삶을 연기할 때 충실하게 살려내려고 노력했어요. 직업 정신으로요.(웃음) 부족함도 많고 잘 모르니까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새로웠던 거죠. 연기자로서의 욕심을 좀 부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우선 성격 강한 박금병이랑 헤어졌으니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주어진 역할은 뭐든지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원칙이니까 또 열심히 해야겠죠.”
앞으로 배우로서 바람이 있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100세 시대잖아요. 시니어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치매 연기 같은 거 말고. 힘과 용기와 아름다움과 즐거운 취미활동 같은 것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화가로서 시간이 허락되면 내년쯤 전시회를 가져볼까 해요. 전시회 열면 초대할게요.”
인터뷰를 마치고 정재순이 곧바로 향한 곳은 ‘하나뿐인 내편’의 종방연 현장이었다. 플래시 세례 속을 ‘강기사 오빠’인 최수종 팔짱을 끼고 걷는 정재순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데뷔 51년 만에 인생 배역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힘, 주어진 일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었다.
휴일 오전, 전철 1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간다. 한산한 전철 안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인천역 앞에 있는 화려한 패루를 통과하면, 1800년대 말 인천 개항 시절의 풍경이 펼쳐지는 상상 말이다. 실제로 패루 너머에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곳에 새겨진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나도 모르게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걷기 코스
전철 1호선 인천역▶ 제1패루▶ 차이나타운▶ 선린문(제3패루)▶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 중구생활사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 신포시장▶ 답동성당▶ 애관극장▶ 싸리재 카페▶ 전철 1호선 동인천역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된 화교 마을
1883년 인천 개항 후 청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독일인, 영국인들이 앞다퉈 제물포(지금의 인천항)로 몰려왔다. 항구 일대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 호텔, 은행과 같은 서양식 근대건축물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철도, 시외전화, 화폐, 구두, 등대, 담배 성냥, 축구, 야구 등 해외 문물도 물밀듯 들어왔다. 이 시절의 흔적이 제물포와 가까웠던 지금의 인천시 중구에 오롯이 남았다. 그 자취를 찾으며 질풍노도 같았던 인천의 근대사를 돌아본다.
출발지인 인천역부터 특별하다. 인천역은 1899년에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다. 인천역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우마차나 수로로는 반나절 이상 걸릴 길을 열차로 한 시간 만에 갔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겠다.
인천역 광장 맞은편에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에서 기증한 패루가 화려한 단청을 뽐내며 서 있다. 패루 사이로 차이나타운의 ‘T’자형 대로가 보인다. 차이나타운 골목마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대규모 중식당과 중국 간식 상점,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이때 정착한 화교들이 중국요리점을 열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자장면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화춘’의 우희광 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3년에 문을 닫은 공화춘은 30년 뒤인 2012년에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옛날 공화춘의 인기는 신승반점, 만다복, 연경, 중화원 등이 잇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요리 외에 화덕 호떡인 옹기병과 월병, 홍두병, 공갈빵 같은 중국 전통 간식도 재미 삼아 먹어볼 만하다.
뜨거운 옹기병을 뜯어 먹으며, 차이나타운 중간 지점에 있는 선린문(제3패루)으로 향한다. 3개의 계단을 지나 마지막 계단 위에 우뚝 세워진 선린문은 차이나타운 최고의 포토존이다. 선린문을 통과해 다시 계단을 조금 오르면 자유공원 입구와 만난다. 왼쪽 길에 초한지 벽화 골목이 있고, 오른쪽 길은 자유공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천 근대사 이야기
자유공원은 1888년 응봉산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공원 초입에 있는 석정루에 올라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를 조망하고, 한미수교 100주년(1982년)을 기리는 기념탑과 한국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둘러본 뒤, 제물포구락부로 이동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과 이어진 계단 중간에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제물포에 거주했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하얗게 회칠한 외벽과 고풍스러운 홀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도 거리가 가깝다. 이 계단은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신포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계단 상단의 공자상도 중국 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졌다.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땅따먹기하듯 갈라놓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가다 보면, 일본 적산가옥과 일본제1은행, 구 일본18은행과 같은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개항장 거리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다. 거리 입구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나무 전봇대가 세워진 골목길과 문방구, 백항아리집(선술집), 극장, 다방, 의상실, 이발소 등 추억을 부르는 풍경이 마냥 반갑다.
전시관 옆 개항박물관은 옛 일본제1은행을 개조한 것이다. 1883년에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로서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우표와 우편물, 우체통, 전보와 전화기, 경인선 기관차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은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가사키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 은행 지점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개항장 일대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건축물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연결했던 싸리재 고갯길
개항장 거리를 지나 먹거리 성지인 신포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포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시장 골목 끝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과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만날 수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20년대부터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복합상영관이 주름 잡는 이 시대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설은 여느 극장과 비슷하고, 상영작도 같다.
흐뭇한 마음으로 애관극장을 구경하고,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싸리재를 걷는다. 옛날에 이 길에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한 거리가 되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한약방, 약국, 양화점, 포목점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을 자랑했다고. 옛날 양복점과 병원 건물과 기록 사진만이 싸리재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싸리재의 아날로그 정취가 돋보인다. 그 중심에 ‘싸리재’ 카페가 있다. 지은 지 90년 된 목조 카페에서 노부부가 커피를 내린다. 카페 안쪽에는 노부부의 100년 된 한옥 살림집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부는 수집한 축음기로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준다. 마침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흘러나와 한껏 흥에 젖는다. 바리스타인 박차영 대표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하니 자신이 개발한 ‘커피봉봉’과 ‘싸리재’를 권한다. 모든 커피를 모카포트로 내려준다. 쌉싸래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연유, 촉촉한 생크림의 조화가 감미롭다. 싸리재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싸리재 카페에서 동인천역은 멀지 않다. 전철을 타기 전에 송현동 순대 골목이나 화평동 냉면 거리, 동인천 삼치 거리에서 요기를 해도 좋겠다.
주변 명소 & 맛집
신승반점과 명월옥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했으나 우희광 씨의 자손들이 공화춘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곳. 신승반점의 인기 메뉴는 돼지고기와 채소를 갈아 춘장과 볶은 유니자장면이다. 달지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자장 소스와 부들부들한 면발이 입맛을 당긴다. 흰 자장면이 궁금하다면 만다복(032-773-3838)을, 맛있는 짬뽕을 먹고 싶다면 복림원(032-773-8778)을 추천한다. 한식은 신포시장 가는 길목에 있는 백반식당, 명월집이 잘한다. 196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7000원짜리 백반에 밑반찬만 열 가지. 여기에 곤로 위에서 푹 끓인 돼지김치찌개와 누룽지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신승반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매일 11:00~21:00
명월옥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41, 07:30~19:30(일요일 휴무)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골목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테마가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서로37번길 22(연중무휴)
짜장면박물관
1908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중식당, 공화춘의 내부를 개조해 2012년에 개관했다. 전시물을 통해 화교와 자장면의 탄생기, 전성기, 자장라면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졸업식이나 운동회 날에 부모님과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공화춘 건물은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해 중국식으로 지었으며,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09:00~18:00(월요일 휴관)
걷기 Tip
❶ 차이나타운은 골목이 많으므로 인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갈 곳을 미리 표시해두는 게 좋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코스에 넣는다면, 맨 먼저 들르자.
❷ 신포시장까지만 걷는다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전철을 타면 된다.
❸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중부생활사전시관, 근대건축전시관, 한중기념관 등 5개 전시관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통합관람권 어른 3400원.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입장료 무료.
“Bravo, Your Life! 당신의 인생을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들어보세요! 연극이 처음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열린 마음과 도전의식만 있으면 됩니다.”
평소에 연기, 연극에 관심이 있던 시니어라면 주목해보자. 예술의전당은 주한영국문화원과 공동으로 시니어를 위한 연극 워크숍 ‘드라마 같은 내 인생’을 3월 2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최한다.
이번 워크숍은 주한영국문화원이 추진 중인 ‘창의적 나이 듦(Creative Aging)’ 프로젝트의 하나로 영국 맨체스터의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 시니어 극단의 책임자이자 연출가인 앤드류 베리(Andrew Barry)의 지도로 진행된다.
'드라마 같은 내 인생'은 60세 이상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며, 참가자는 개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고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창조하여 연극적 요소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가비는 3만 원이며 20명 소수 인원으로 진행된다. 예술의전당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로맨틱 엘레강스’. 내 옷차림 콘셉트다. 나는 ‘패션’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한다. 새 옷을 입는 날은 가슴이 설레 밥을 못 먹을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옷을 입을 때 수수하고 편한 것을 추구한다. 나는 절대 아니다. 좀 불편해도 예쁘고 멋진 의상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옷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장난 아니게 많다. 남보다 튀려고 작심하고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의상에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가 다르니 다른 사람과 차별이 될 수밖에 없는 게 내 옷차림이다.
“너도 제발 남들처럼 수수하게 입고 다녀라.”
결혼 전, 출근할 때마다 내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엄마는 잔소리를 늘어놓으셨다. 결혼 후에는 남편이 그랬다. 너무 튀는 옷을 입고 다닌다며 타박하듯 말해 티격태격하는 날이 많았다.
1988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평택여고 교무실을 들어서는데 동료 교사들이 미디 기장의 타이트한 옥색 원피스를 입은 나를 보고 일제히 박수를 쳤다.
케이프 디자인의 어깨에 앞면에는 같은 색의 커다란 오간자 실크 리본이 달려 있는 옷이었다. 옷감은 모직 개버딘. 고급스런 느낌에 피부에 닿는 감촉이 포근했다. 우아한 아이보리색 진주목걸이를 매치하고 같은 색 계열 아이보리 톤의 진주귀걸이도 달았다. 하얀 레이스 장갑은 신의 한 수였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동료 교사들은 내 옷을 보며 봄을 상상한 걸까? 예상외의 반응에 부끄러웠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옷을 사놓고 빨리 입어보고 싶어 며칠을 안달했다. 아무래도 봄까지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다. 2월 중순 무렵이었고, 속옷으로 슬립 하나만 입었던 터라 그날의 쌀쌀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옷을 입는 행위도 일종의 예술로 생각한다. 옷을 예쁘게 입는 데 목숨 건 내게 그 정도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가기 며칠 전, 평택 번화가를 지나다가 J브랜드 매장 쇼윈도 마네킹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너무 마음에 드는 옷이 내 눈에 띈 것이다. 좋은 옷은 색감, 질감, 디자인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마네킹이 입은 원피스가 그 조건들을 다 갖췄다는 판단이 서자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너무 젊은 애들 스타일 아닐까? 나한테 과연 저 옷이 어울릴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쉽게 구매결정을 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 옷이 다른 사람에게 팔릴까봐 이삼일에 한 번씩 가서 확인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고, 갖고 싶은 물건은 반드시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다. ‘패션은 도전’이다. 결국 며칠 만에 용기를 내어 매장에 들어가 그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일단 입어보고 어울리지 않으면 포기하면 됐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그 옷은 마치 손님이 맞춘 옷처럼 딱 맞네요.”
매장 직원과 그곳에 온 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사이즈는 55였는데 내 몸에 맞춘 듯 잘 맞았다. 어디 하나 손댈 곳이 없었다. 그 옷을 사 입은 후 한국 사람들은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옥색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참 많이도 들었다.
잘 맞는 옷은 그 사람의 캐릭터가 된다. 옥색 원피스를 입고 교무실 앞 복도를 걷는데 남자 영어 선생님이 한마디 툭 던지며 지나갔다.
“그녀는 내게로 나비처럼 날아왔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품성도 좋은 그가 반대 방향으로 스쳐 지나가던 나를 보고는 싱글벙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가 그리도 좋았던 걸까? 완벽한 패션을 추구하는 나는 어지간한 옷들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눈에 들어온 옷은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든다. 구입 후에는 아끼고 또 아껴가며 입는다. 옥색 원피스도 10년 이상을 나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나를 가장 빛나게 해주고, 숨이 막힐 만큼 좋았던 옷은 내 평생 그 원피스뿐이다.
몇 년 전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한 젊은 여성이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평택여고 나왔어요. 학교 다닐 때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 옷 구경하곤 했어요.”
직접 가르치지도 않은 학생이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궁금해서 수시로 교무실에 가서 몰래 훔쳐봤다는 고백이었다. 하긴, 평택여고에서 내 별명은 ‘공주 선생님’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긴 역사가 고이 간직된, 천년고도 에든버러. 대영제국이 된 지 300년이 흘렀어도 근원은 스코틀랜드일 뿐이다. 남자들은 킬트 줄무늬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는 백파이프 연주가 흐른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성과 풍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가와 귀족들, 월터 스콧,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로버트 번스 등 세기의 작가들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빛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서리서리 스며 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 중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일까? 아니면 약간 구릉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때문일까? 에든버러 겨울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다. 어쩌면 버스정류장 앞쪽에 우뚝 서 있는 스코틀랜드 대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기념탑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스콧의 유언에 따라 시커먼 사암석으로 만든 뾰족한 탑. 61m 높이의 기념탑은 왠지 기괴하고 음산하다. 이 탑을 만들 때, 잉글랜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국에서 제일 높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보다 5m 더 높이 올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2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지만 포기하고 스콧 기념탑 아래 프린세스 정원의 국립 갤러리, 로열아카데미를 찾는다. 모두 무료 입장이다. 관광객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 미술관에 걸린 수준 높은 명화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소 짓는다.
에든버러의 국교는 장로교
에든버러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프린스 스트리트를 경계로 북쪽의 올드 타운과 남쪽의 뉴타운으로 구분된다. 구시가지는 15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조성된 주택, 상업지구. 1985년, 유네스코는 신·구시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선도, 마음도 구시가지에 다 빼앗긴다. 무조건 ‘고성(古城)’을 기점으로 걷는다. 고성까지 걸어가는 길목에서 화폐 박물관, 뉴대학을 만난다. 대학 건물은 해묵은 향기를 뿜어낸다. 토마스 찰머스(1780~1847) 목사의 동상이 있는 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구가 있던 곳. 16세기경, 이곳은 매우 중요했다. 1560년, 스코틀랜드가 국교로 지정한 장로교를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격전지,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은 오래전 활동을 중단한 화산 꼭대기(133m)에 있다. 성 뒤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데 3면이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딱 봐도 요새로 최적이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동쪽이 출입구. 이 성은 현재 영국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근위병이 성을 지키고 있다. 한겨울에도 킬트를 입은 채 맨살을 보여주는 근위병은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에 무심하다. 에든버러 성은 6세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018년부터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의 건물들은 16~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이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성주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 성은 이긴 자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끝으로 결국 잉글랜드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내에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초기의 건축물인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이 있는데 대부분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탄 무늬 제품의 천국 도시
에든버러의 백미는 구시가지 거리 로열마일이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1.6km 남짓의 도로. 과거 왕가에서 쓰던 전용 도로로서 길이가
1마일이나 되어 ‘로열마일’로 불린다. 왕족들만 다닐 수 있는 로열마일 때문에 서민들은 좁은 클로즈 골목을 이용해야 했다. 대로 옆으로 무수한 클로즈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즈는 한국의 피맛골 거리와 엇비슷하다. 로열마일 양쪽으로는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기념품 숍, 식당, 호텔 등도 무수히 이어진다. 로열마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즈다. 18세기, 낮에는 저명한 인사로 지내고 밤에는 도둑으로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1741~1788)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골목이다. 론마켓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낮에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다. 1781년에는 시의 조합장(deaco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는 강도짓과 도둑질을 했고 도박꾼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 돈을 많이 써댔다. 1786년에는 시립은행의 열쇠를 복사해 800파운드를 훔쳤다. 또 부유한 집안에 일하러 다니면서 열쇠를 따로 복제했다. 주변 상인들도 도둑질에 끌어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교활함과 뻔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성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브로디의 이중적인 캐릭터에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영감을 얻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그의 집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 동상과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로열마일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과거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청동 말과 동상으로 만들어진 버클루 공작의 기념비, 애덤 스미스의 동상과 성 자일스 성당 등이 몰려 있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1723~1790) 동상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 동상 앞에 있는 성 자일스 성당(1495년 건립)의 노르만 양식의 탑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성당 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18세기 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옆 리얼 마리 킹 클로즈는 ‘귀신 나오는 골목’으로 관광 트렌드가 되었다. 이 광장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콕번 스트리트를 앞두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흉상이 있다. 흄은 에든버러 근교인 나인웰스에서 태어났지만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다니는 등 인연이 깊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흄은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이 살던 홀리루드 하우스
흄 흉상을 지나면서 길은 한가해진다. 길 끝에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이 있다. 홀리루드 하우스는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이었다. 1498년, 제임스 4세의 명에 따라 궁전으로 다시 지었고 1530년대에는 제임스 5세가 자신과 왕비인 기즈의 메리를 위해 탑을 덧붙였다. 1560년대에는 이들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살았다. 메리는 1565년, 이 수도원에서 사촌 단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단리가 살해되자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살해 용의자 보스웰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궁전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 6세는 에든버러에 머물 때는 홀리루드 하우스를 이용했으나 1603년,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로 이 궁전은 왕가의 방문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2002년에는 왕실이 소장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퀸스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주인의 무덤 지킨 충견, 보비
에든버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비의 동상이다. 존 그레이의 양치기 개 보비. 존은 보비와 여행을 하던 중 병으로 객사했다. 존의 시신은 보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당시 두 살이었던 보비는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간 매일 밤 존의 무덤을 지켰다. 보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고, 에든버러의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보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보비가 집 없는 개로 오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사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비는 개로서는 유일하게 에든버러 시 명예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죽은 뒤에는 특별허가를 받아 존 옆에 묻혔다. 보비의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1965~)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가 있다. 이혼 후 에든버러에 정착한 그녀는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기로 결정한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Travel Data
항공편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인천→영국 런던행 직항편을 이용해 히드로공항까지 약 11~12시간 소요.
교통 런던 빅토리아 코치 역에서 에든버러까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여 회 기차가 운행된다.
시차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음식 ‘하기스(Haggis)’가 유명하다.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 곡물과 섞은 것을 양의 위장에 채워 삶은 음식. 스코틀랜드의 전통 요리로서 매시포테이토와 순무를 곁들여 먹는다.
주류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스카치위스키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장 일반적이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종류다.
숙박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된다. 고급 호텔은 2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평균 8만~10만 원대에서 이용 가능하다.
화폐 파운드
여행 포인트 시간 여유를 갖고 북부 고지대에 있는 ‘하일랜드(Highland)’ 지역을 연계하면 좋다. 에든버러 시내 여행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가까이 자리한 알과 핵 소극장으로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극단 모시는 사람들)’ 공연관람을 위해 향했다. 이 작품의 작가인 김정숙 연극 연출가의 초대로 브라보마이라이프 매거진 동년 기자들과 함께 했다. 아담한 무대에는 깨끗하게 포장된 옷들이 가득 걸려 있고 무대 좌우엔 수선과 다림질을 하는 코너로 꾸며졌다. 우측에 설치된 커다랗고 낡은 옛날식 세탁기가 눈에 들어온다.
실내 전등이 꺼진 암흑의 소극장에 침묵이 잠시 흐른다. 침묵을 깨는 남녀 신음을 시작으로 무대 조명이 들어오며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의 막이 올랐다. 1, 2층 전 좌석을 메운 관람객의 숨소리가 멈춰졌다. 무대에는 여러 가지 피켓을 든 환자들의 항의와 함께 세탁소 주인 강태국(조준형 분)과 여주인 장민숙(문상희 분)의 하소연 섞인 이야기가 개그 못지않은 대사로 펼쳐진다. 극 중 내내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을 웃음바다에 빠지게 하면서 잔잔한 감동과 현실을 풍자하는 대사로 관중을 몰입하게 했다. 세탁철학을 지닌 주인장은 무명 배우에게 옷을 무료로 빌려주는 정이 넘치는 이웃 아저씨다. 남편에게 서운함도 있으나 남편과 아들을 사랑하는 여주인 민숙, 사고뭉치 배달꾼 소팔 등 늘 세탁소는 왁자지껄하다.
30년째 대를 이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아시스세탁소와 주인 강태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큰 재산을 가진 이웃 안 씨 할머니가 임종에 앞서 마지막으로 남긴 ‘세탁’이란 말을 듣고서 세탁소에 맡겨진 빨래 속에 재산을 숨겨 놓았다고 믿는 안 씨네 가족이 세탁소를 찾아오며 극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안 씨 큰아들은 재산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발견한 재산의 50%를 보상금으로 내건다. 주인장 강태국을 제외한 극 중 인물 모두는 그 재산을 찾기 위해 어느 날 야심한 밤에 동물로 둔갑하여 세탁소를 습격한다. 세탁소는 아수라장이 된다. 이를 지켜본 강 씨는 더러워진 빨래를 세탁하듯 오염된 인간의 마음을 세탁하기 위해 이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깨끗이 세탁된 이들은 하얀 옷을 입고 등장하고 가 씨가 빨랫줄에 널어 말리며 극은 막을 내린다. 1시간 반이 언제 지나갔는지 싶었다. 넉살 좋은 배우들의 연기에 웃다가 극 내용에 눈물을 찔끔 짜기도 했다. 가슴이 훈훈해지기도 했다. 특히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의 설정이 연극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세탁소에서 빨래를 세탁하듯 물질만능주의로 동물처럼 변한 인간을 커다란 세탁기에 넣고 세탁을 한 후 하얀 옷으로 갈아입힌 사람다운 인간을 빨랫줄에 널어 말리며 현대인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이 극의 대미를 장식했다.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은 권호성 연출로 12월 30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알과 핵에서 공연된다. 2003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된 이래 수많은 공연이 이루어졌고 동아연극상 희곡상, 연극협회 우수연극상 등을 수상하며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작품이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일상적 삶의 현실을 바탕으로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구성과 풍자로써 우리에게 시종일관 웃음을 주면서 잔잔한 감동 그리고 희망의 따사한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도 연극 무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또 보아도 좋은 연극으로 기억에 남았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됐다. 그 주인공은 코미디언 이홍렬. 대한민국 대표 코미디언 중 한 명인 그는 유튜브에 자신의 채널인 이홍렬TV를 직접 만들어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평생 입으로 살아온 노장 이홍렬(64)은 커피를 마시면서부터 인터뷰, 메이크업, 그리고 표지 촬영을 할 때까지 시종일관 떠들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의 올드보이 이홍렬에게 입이 살아 있는 그날까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들어봤다.
방송가에서 쌓은 그의 업적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할까. 나이나 경력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소위 ‘올드보이’인 그는 새로운 무대로 가장 젊은 매체를 선택했고 이 도전은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어느새 구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하는 ‘이홍렬TV’의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이홍렬을 만나자마자 물 만난 탈출구 유튜브 얘기부터 꺼냈다.
“이제 SNS를 거부하면 대화가 단절되는 세상이 됐어요. 부부도 마주앉은 상태에서 사진을 보내고 공유하기도 하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제가 기계에 능해서라기보다는 이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거예요. 너무 즐겁고 재밌어요.”
이제 이홍렬TV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과거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던 코미디언 이홍렬은 자신이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걸 SNS 시대에 맞춘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디지털을 잘 받아들여서 쓰면 삶의 윤활유가 된다며 디지털 예찬론을 폈다.
“예를 들어 부자지간, 모자지간, 모녀지간, 부녀지간이 싸웠다고 해봐요. 예전 같으면 아침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둘이 화해하려면 다시 보게 되는 시간까지 일단 기다려야 했죠. 그때까지 두 사람 다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런데 문자로 ‘아빠가 미안했다’고 하면서 이모티콘을 사용해보세요. 딸도 같이 답해줄 거예요. 디지털을 잘 받아들이면 이렇게 금방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어요.”
사실 SNS는 젊은 세대의 주된 소통 수단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그 자체로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내가 사기엔 아까운데 남에게 선물 주기엔 좋은 게 이모티콘이에요. 그래서 이모티콘은 조금 친해지려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쏴요. 상대가 그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덕분에 전 이모티콘 부자예요’ 하는 말도 듣고.”
이홍렬은 시니어 세대가 디지털을 받아들이면 가질 수 있는 장점으로 디지털만 아는 주니어들에게 디지털로 접근해 아날로그 감성을 전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제기차기를 모르고 물수제비도 몰라요. 그걸 알려주면 너무 신나합니다. 디지털로 공유하고 아날로그적 공감으로 이끌어내면 더 큰 울림이 있거든요.”
‘고양이가 일인칭이 된다면?’
현재 이홍렬TV는 반려묘인 러시안 블루 고양이 풀벌이와의 추억과 강화에서의 일상을 다룬 두 개의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3년에 처음 계정을 만들어두고 그냥 놔뒀어요. 그런데 2년 전에 우리 고양이를 보는데, 털이 하얗게 쌓인 거예요. 털이 왜 저렇게 쌓였지? 하고 생각해보니 얘가 열다섯 살이에요.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쟤가 만약 일인칭이 된다면 할 얘기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평소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는 게 취미였던 터라 그동안 얘에 대한 동영상을 많이 찍었어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갖고 제주도에 가서 2박 3일 동안 유튜브에 올릴 에피소드 40편을 정리했어요.”
이홍렬은 툭하면 동영상을 찍는다. 재미있어서다. 그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온 30년 동안의 모습을 담은 아날로그 사진과 VHS를 모두 디지털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료들은 이홍렬TV의 자원이 되고 있다.
“유튜브가 올 시대를 준비했느냐? 아니에요. 다만 이것들이 다 짐이었거든. 보관이 힘들었어요. 사실 기록물을 정리하면 보물이고, 정리 안 하면 쓰레기죠. 그래서 다 정리한 거죠. 1테라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에 두 아들 기록, 사진, 동영상을 다 넣었어요.”
재미와 감동을 풀어주자
고양이 풀벌이는 올해 4월에 눈물이 나고 붓고 해서 진단을 하니 구강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여든네 살의 나이.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첫 번째는 턱을 잘라내는 것, 두 번째는 방사선 치료, 세 번째는 가족이 호스피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홍렬은 세 번째를 선택했다. 고양이가 아프면 마취주사를 놔주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마시게끔 도와줬다. 얼른 안락사를 시키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그리고 마침내 갈 때가 되었고, 풀벌이는 그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기록한 풀벌이와의 추억들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다.
“풀벌이를 키운 것과 아이들 키운 것을 맞물려서 보여주는 형식이에요. 저 말고 다른 누가 편집을 못해요. 찾는 걸 저밖에 모르니. 죽을 지경이죠. 5분짜리 동영상 만들려면 대여섯 시간이 걸려요. 심하게 본 건 백 번도 봤고.”
이홍렬TV의 목표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감동이라도 보여주자, 안 찾아오면 어떠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무도 안 봐도 괜찮다, 풀벌이와의 추억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얘기하고 싶었어요. 사실 유튜브는 독하거든. 타이틀 독한 거 쓰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솔직히 그런 걸 쓰라면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말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걸 하자. 늘 그럴 순 없어도, 재미가 없다 해도 메시지는 갖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입담 좋은 노장 개그맨이 유튜버로
유튜브가 독하다는 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수많은 자극적인 제목과 캡처 사진이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려고 그야말로 ‘난리를 치는’ 느낌이다. 실제 상당수의 인기 채널을 보면 먹방이라며 산더미 같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든지, 시시때때로 괴성을 지른다든지, 자극적인 춤과 억측과 욕설들을 쏟아내는 등 종종 기괴하고 무의미한 서커스를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날것’을 찾는 사람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날것’을 찾는 것은 유튜브뿐만이 아니다. 요즘 공중파 방송들도 비슷하다. 소위 말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연예인의 가족을 구경하는 관찰형 예능이 그 증거다.
“요즘은 방송국에서 관찰 예능 기안을 올리지 않으면 통과가 안 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걸 하면 당사자들은 힘들어져요. 집에 설치한 카메라 50대는 언젠가는 떠나게 되거든요. 그런 예능을 하게 되면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짚어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출연자들은 집 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경험을 하게 돼요. 재밌게 하려면 여자는 잔소리하게 만들고 남자는 무식해 보여야 하니까요. 그게 페이크(Fake) 다큐거든요. 진실 반 거짓 반으로 된.”
그래서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튜브에는 가족에게 허락받은 자료만 올린다. 요즘 올리는 자료는 아이들은 열 살까지, 아내는 옛날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정도다.
얼마 안 남은 시간, 사랑하자
이홍렬에게 디지털은 가족을 기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제가 스물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란 존재를 알게 된 때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20여 년밖에 같이 못 지낸 거예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할 날도 그렇게 주구장창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나이로 보면 앞으로 15년만 살아도 여든 살이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다.
“내일이라도 제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다 나와요. 정말 사랑 많이 베풀어야 하고 집사람에게 잘해야 하죠. 누굴 위해서? 바로 나를 위해서예요.”
디지털로 남게 된 어머니 목소리
이홍렬은 군대 있을 때 받은 어머니의 편지 다섯 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철자법도 안 맞고 글자도 삐뚤빼뚤 썼다. 그러나 그 편지에선 소리가 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를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카세트테이프로 대화를 녹음했어요. 어머니는 대화 중에 ‘꿋꿋하게 살아야 해. 내가 너희들에게 빚 남긴 건 없으니까’라고 말해요. 지금은 그걸 CD로 구워서 내 동생 하나, 누나 하나, 나 하나 갖고 있어요.”
그는 대학교에서 이벤트 연출학과 겸임교수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어머니와 인터뷰를 하라는 과제를 내줬다. 너무나 반응이 좋았다. 그의 과제가 없었으면 어머니와의 추억이 없었을 뻔했다며 정말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게 다큐멘터리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강의를 할 때면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하라고 조언한다. 마침 디지털이 그것을 도울 수 있다. 다들 카메라는 의식해도 핸드폰은 의식하지 않으니, 살짝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어머니와 대화를 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쉬워요”
“유튜브가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 딱 맞아요. 아이디어 발산할 데가 없었거든요.”
사실 이홍렬 나이가 되면 방송에서의 자리가 달라진다. 골든아워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으레 ‘요새 왜 안 나오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 말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연예인이라면 백 퍼센트 듣게 되는 말’이라고 한다. 특히 나이 든 연예인은 ‘송해 선생님도 아직 저렇게 하시는데 왜 안 보이느냐’라는 말도 듣는다.
“그렇게 묻는 분들은 제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죠. 좋아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에겐 가슴 아픈 말이에요. 처음에는 견뎌요, 뭘 좀 해요, 어쩌구저쩌구하죠.(웃음)”
사실 그의 요즘 스케줄을 보면 놀랄 정도로 바쁘다. CJ헬로TV에서 일주일에 다섯 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강의와 공연, 기부 행사까지 빼곡하게 잡혀 있다. 한 달 평균 10회 정도 강의를 한다.
“나눔이란 것이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멈추는 게 어려워져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1998년부터 홍보대사를 해왔는데 20년째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 일을 많이 하게 되었죠.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제가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이곳에서 활동한 제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하게 해놓고 가고 싶은 꿈.(웃음)”
2005년부터 나눔 콘서트 ‘이홍렬의 락락(樂樂) 페스티벌’은 올해로 14회. 2007년부터는 기부 강의 프로그램 ‘이홍렬의 펀펀 도네이션’을 펼치고 있다. 특히 강의는 이홍렬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현재 128회, 모두 기부 강의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인 그는 2012년 부산 해운대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는 국토종단을 통해 모은 모금액으로 자전거를 마련해 남수단공화국에 전달했다. 자전거를 받은 남수단공화국의 한 아이가 “자전거를 줄 정도면 키가 클 줄 알았어요. 당신은 키가 작지만 마음이 크군요. 당신을 잊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잊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말은 이홍렬을 에티오피아로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제가 강의를 하니까 후배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와요. 에티오피아 아동 한 명을 후원해주면 답례 없이 주례를 봐주겠노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결혼한 부부가 28쌍이나 된다. 이홍렬은 에티오피아가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6307명을 파병했는데 그중 121명이 전사했으며 536명이 부상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목표가 또 추가됐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121쌍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536명의 후원자를 발굴하는 거예요.”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어느새 9300명에 달했다. ‘열심히 하면 뒤에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그의 지론을 뒷받침해주는 숫자다.
“이제 만 명 넘으면 감사인사를 올려야지. 유튜버 선배들이 2년은 되어야 뭐 하나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구력을 쌓다 보면 댓글에 감동하고, 사람을 웃기고 울리거든요. 그런 걸 보면 힘들어도 그렇게 가자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점점 거칠어지는 인터넷 방송 조류를 역행하는 ‘따뜻한’ 실험을 하는 중이다. 이홍렬이어서 가능한 이 실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독하고 무시무시한 것만이 아닌, 따뜻한 희망이 서려 있다는 걸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희소하고 과감한 도전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가 디지털로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의 따뜻한 세계가 독한 세상의 대안으로 자리 잡는 날을 상상해본다.
“난 요즘 활동도 안 하는데… 왜 저를 인터뷰를 하시나요?” 50대 후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외모와 수줍은 표정 그리고 말투. 그녀의 글과 방송에서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상상을 초월했다. 4차원적이지만 차분하고 내공이 느껴졌다. 밝고 예쁜 표정 뒤에는 그녀만의 강한 카리스마도 엿보였다. 그러면서 연약해서 바람만 불면 무너질 것도 같다. 아니다! 어지간한 바람으로는 상대가 안 될 것 같다. 너무나도 약해 보여서 그녀를 보호해주려다가도 한량 이봉규마저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서정희의 크고 맑은 눈은 세상의 어둠을 다 품을 것같이 해탈한 느낌을 준다. 마치 이 세상은 시시해서 저 별에서 온 여인 같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고 종잡을 수도 없는 묘한 마력의 여인이다. 어두운 시절을 겪고 난 뒤에 오는 작은 평화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 원래 욕심이 없고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천성 때문에 그런 느낌을 주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자신도 지난 과거를 회상해보면 ‘고립무원’이 떠오른단다. 어린 나이에 세상 밖에서 남들과 같이 살았더라면 오늘 서정희의 마력은 발견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녀의 엄청난 재능이 발견되거나 개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녀는 고립무원의 골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몰입할 것을 찾기 위해 기도하면서 혼자서 뭐든 해야만 했다. 살림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꽃꽂이도 하고, 바느질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고립무원의 시간들이 오늘의 서정희의 마력과 내공을 만들어준 듯하다. 이렇듯 서정희는 뒤늦게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사랑은 다시 못할 것 같다”는 그녀의 한탄스런 말에 이봉규가 “충분하다. 나도 몇 년 전에 늦게 재혼해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당신도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전했다.
그녀, 이제 자유를 알았다
서세원과는 그 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서로 연락도 안 한다고 한다. 그는 딸과도 만난 적이 없다. 아이들도 엄마가 혼자 살기를 원했다. “애들은 내 편이다. 서세원 씨도 잘 살면 좋겠다. 지금은 불편한 마음도 없다.” 그녀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알았다. 자신을 알아가는 게 신기하고 감사하다며 “지금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연발한다. “모든 시간을 나만을 위해 쓸 수 있어서 좋다. 내 삶을 추적해보면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이혼을 하고서야 비로소 내게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면서 “그동안 순응하며 순종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본분이라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전부 극복한 편안한 얼굴이다.
“지금은 내가 중심이다. 스스로 대견하고 기특하다. 여자이고 왜소해서 내 안에 강함이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요즘에야 느낀다.”
서정희의 충만한 표정은 오라(Aura)가 되어 그녀를 감싼다. 그래서일까? 글 쓰는 솜씨도 대단하다.
나는 ‘필’이 중요하다
느닷없이 그녀에게 ‘이봉규tv’(유튜브 방송)에서 영상 에세이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원래 내성적이라 혼자 조용히 있을 때 행복해하는 일상을 영상으로 표현하면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사람들이 요즘 이구동성으로 “느리게 살자!” 하면서도 바쁘게 난리치며 산다. 서정희는 진정으로 느리게 살고 있다. 그 모습을 이봉규가 영상에 담고 싶은 거다.
서정희는 “낮 12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느리게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낮 12시까지 새벽기도, 글쓰기, 인테리어, 도면 그리기 등 시간을 쪼개 할 일을 전부 끝내고 오후에는 철저하게 느림의 삶을 실천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핸드폰에 메모해놨다가 새벽기도 갔다 와서 정리하며 글을 쓴다.
“사람들이 외적인 것만 보려 한다. 나는 내적인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글쓰기를 좋아한다.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 책을 낼 때는 원고 수정 없이 나만의 문체로 남기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고집도 있다. 서정희는 필(feel)을 중요시한다. 그녀는 최근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곡을 쓸 때 많은 것을 버리면서 시작했다. 나도 글을 쓸 때나 인테리어를 할 때 내 안에 저장해놓은 것들을 버리면서 시작한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평소 음악과 책을 가까이 하고 사물과 건축물을 탐미하고 그런 것들을 많이 담아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랫동안 나만의 성안에 있었다. 세상의 고정관념이 불편했다. 나만의 스타일대로 옷을 입고, 생각하고, 활동하면 사람들이 내게 개량한복을 입으라고 요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서 다소 흥분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예를 들어 내가 발레를 하면 ‘그 나이에 무슨 발레?’ 하면서 시비를 걸어온다”고 억울해한다. 그녀는 남들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다.
나만의 감정, 글로 표현하고 싶다
혼자 살아가는 게 편해졌다. 자신이 남들과 다른 점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다. 첩첩 갇혀 있던 소녀가 이제 어른이 되어 자유를 찾은 것이다. 상당히 철학적이고 내공이 깊어 보이는 그녀는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영화 노트가 따로 있다. 영화를 보고 줄거리, 평점, 배우 호감도뿐만 아니라 “두 번 봐야 한다. 세 번은 봐야 한다” 등 서정희식으로 메모를 한다. ‘요리 노트’도 있다. 어린아이 같은 표현을 할 때가 많다. 즉석에서 표현하는 어린아이같이 그 즉시 떠오르는 표현들을 간직하려 글로 남긴다.
“어설프지만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녀의 글은 훌륭하다. 아이처럼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성악도 배우고 있다. 이봉규가 놀라서 “성악도 배워요?”라는 질문에 “꼭 자질이 있는 사람만 배워야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기는 좋아하면 뭐든지 한단다. 서정희의 자기 탐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4차원적 마력의 소유자 서정희를 한 차원 낮은 이봉규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봉규 특유의 짓궂은 질문에 “혼자 있는 게 주님의 뜻인가보다 하고 혼자 살기에 주력하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자라고는 애들 아빠밖에 없었다”고 믿기 힘든 고백을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말도 안 돼!”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서정희는 양면성이 있다. 이슬만 먹을 것 같은데 뭐든지 잘 먹는다. “평생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욕먹을 것 같다”고 깔깔대며 웃는다.
털털하게 아무거나 잘 먹고 한 번 먹으면 거하게 먹는 스타일이라니 점점 종잡을 수가 없다. 조용한 스타일 같은데 수다스럽게 재잘재잘 말도 잘한다. 뜬금없이 이 주제 저 주제로 갈아타기도 한다. 그런 점은 내 아내와 비슷하다. 나는 소프라노인 아내에게 서정희를 무료로 레슨해 달라고 즉석에서 요청했다.
서정희는 관심 없는 것은 아예 무시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산다. 세상을 대하는 체감온도는 낮다. 누구나 재미있어 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별로 관심 없어 하는 것들을 좋아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사람들과 같이 영화를 보면 그녀 혼자 울곤 한다. 그러면 같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장면에서 울음이 나왔나?” 하며 의아해한다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독특하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훗날 내 가족만이라도 소녀 엄마로 기억하고 내 캐릭터대로 인정해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이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농구스타 박찬숙은 필자보다 한 학년 아래였기 때문에 그녀의 성장기를 통째로 외우고 있다. 박찬숙은 고1 때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한 대한민국 최고의 농구스타였다. 특히 1984년 LA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농구 사상 전무후무한 은메달을 획득했을 때의 쾌거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당시 천하무적 미국이 상대 팀이었기 때문에 결승전에 오르는 순간 이미 금메달을 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후 농구 대표팀이 세계 무대에서 빛을 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은 간신히 세계 무대에 나간다고 해도 거의 꼴찌 수준이다. 박찬숙을 필두로 한 당시 한국 여자농구를 세계 언론들은 “예술이다”라고 극찬했다. 미국이나 유럽 선수들의 키는 대부분 2m에 가깝거나 그보다 훌쩍 넘는 선수가 많았기에 키 작은 한국 대표팀의 빠르고 조직적인 예술 농구에 세계가 반한 것이다. 박찬숙의 키는 188cm로 한국 선수 중에서는 큰 키였지만 서구 센터들과 비교하면 한 뼘 정도 작았다. 그러나 언제나 유연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상대 팀을 무력화해버렸다.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외모 덕분에 당시 남학생들에게 배우 임예진과 쌍벽을 이루는 스타였다고 한량 이봉규가 치켜세우자 숭의여고 동창인 탤런트 김미숙도 있었다고 말을 거든다. 숭의여고는 예나 지금이나 농구의 명문이다. 지금도 우승을 한다며 모교 자랑도 잊지 않는다.
박찬숙은 필자 여동생과 행당여중 6개월 동창이었기 때문에 더욱 잘 기억하고 있다. 여동생은 중학교 입학 때 “박찬숙이 우리 학교에 들어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후 박찬숙은 농구를 위해 숭의여고로 전학했다. 축구에 차범근, 복싱에 홍수환, 프로레슬링에 김일 선수와 비견되는 역대급 농구스타가 박찬숙이다.
큰 키 때문에 외출을 싫어했다
비슷한 나이로 함께 이 시대를 살아온 이봉규가 슈퍼스타를 만나기 위해 WKBL Korea 3대3 국제농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고양 스타필드를 찾았다. 3대3 농구는 한국에선 이제 시작이지만 서구에선 인기종목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길거리 농구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박찬숙을 인터뷰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찾아갔지만, 3대3 농구 경기에 홀려버려 한참을 구경하느라 박찬숙과의 인터뷰는 나중이었다. 공격과 수비가 쉴 틈 없이 바뀌기 때문에 박진감이 넘쳤고, 남자 농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미가 덜하다는 편견이 깨져버릴 만큼 격렬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아차!” 하고는 박찬숙을 찾기 시작했다. 본부석에서 하얀색 운동복을 입고 앉아 있는 그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큰 키도 큰 키이지만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배어나오는 포즈로 앉아 있는 박찬숙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그런데 현역 시절에는 얼마나 눈에 띄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요즘 한창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서장훈이 방송에서 “큰 키 때문에 사람들 눈에 잘 띄었다. 그 시선이 괴로워 외출도 꺼렸다”고 푸념한 적이 있다.
박찬숙을 마주해보니 서장훈 말이 실감이 났다. 174cm인 이봉규가 188cm의 박찬숙의 옆에 서니까 느티나무에 매미가 붙어 있는 느낌이어서 몹시 위축되었다. 그녀에게 잽싸게 의자에 앉기를 권하고는 내가 먼저 주저앉아버렸다. 앉아 있으니까 조금 안정이 되었다. 큰 키로 압도하는 분위기가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명랑하고 예쁜 꽃중년 여성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위축된 나를 배려해서 편안하고 밝게 미소를 지으면서 너스레까지 떨어주었다.
알고 보면 프리티 우먼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와는 달리 깜찍하고 귀여운 캐릭터의 여인이었다. “현역 시절에는 팬들이 어마어마하게 찾아왔는데 이제는 팬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최근에는 야구나 축구에 비해 여자 농구는 인기가 없다. 평생 농구인으로 살아왔기에 예전의 농구에 대한 팬들의 인기를 되찾는 데 본인이 할 일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갈 계획이라는 것. “농구가 이렇다!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길거리 농구가 활성화되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주먹을 불끈 쥔다. 박찬숙은 엘리트 선수로 발탁되어 자신은 좋든 말든 죽기 살기로 농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시대에는 농구를 좋아하면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대중화되어야 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3대3 길거리 농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좋아서 취미로 하는 것이 생활체육이라는 얘기다.
예전에는 엘리트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키우고 ‘죽기 살기’식으로 훈련을 시켜 경기장에 내보냈지만, 지금은 즐기는 스포츠를 해야 한다는 것. 생활체육에 대한 그녀의 사명감이 커 보였다. 그러면서 엘리트 선수인 박지수 선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한다.
예전의 박찬숙처럼 박지수 선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한국 여자농구의 대들보이자 10년을 이끌어갈 재목이란 찬사를 받아왔다. 198cm의 장신이면서 몸놀림도 좋아서 2018년 미국 프로농구 WNBA에서 활동하고 있다.
박찬숙은 고등학생 때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너무 받아 싫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과분한 대접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박지수가 예전의 저나 남자 선수들처럼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기자들 볼 때마다 얘기한다”면서 내게도 거듭 당부를 한다. 농구 발전에 대한 생각뿐이다.
당시 박찬숙은 세계적인 미녀 스타로 인기 절정이었다. 농구선수 중에서 제일 미녀를 뽑는 미스월드바스켓(7회 세계선수권대회)에 뽑힐 정도였다. 얼굴도 예쁘고 농구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더욱 혼련에 집중했다는 그녀는 너무 힘들어서 눈물로 일기를 썼던 그 시절을 잠깐 회상한다. 눈물이 하도 흘러내려 일기를 쓸 수 없었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재혼은 싫지만 남자 친구 하나 있으면 좋겠다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피부가 곱다, 열 살은 어려 보인다”면서 몸매와 미모 관리에 관해 물었더니, 숨쉬기운동 하는 것 외에 별로 하는 것이 없다고 재치 있게 받아친다. 그 틈에 어느새 동행한 내 아내와 살빼기와 피부 관리에 관해 수다를 늘어놓는다. 박찬숙은 운동할 때보다 5kg 이상 쪘다고 불만이지만, 은퇴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 선수 버금가는 몸매와 열 살 이상 어려 보이는 피부를 소유하고 있다. 아마도 긍정적인 마인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연예계에 종사하는 아들과 딸에 관해 물었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키 크고 운동 잘하는 남자 만나서 다섯 명쯤 낳았으면 그중에 최소한 두 명 정도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며 농담한다. “당시 인기가 너무 많아서 데이트 신청이나 프러포즈를 많이 받았을 텐데?”라고 떠봤더니 “운동선수 중매도 많이 들어왔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어떤 선수? 누구냐?”고 집요하게 물어봤지만, “그건 비밀!”이라고 한다. 아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사람이라서 그러는 듯싶다. 궁금했지만 그녀만의 추억을 훼방하고 싶지 않아 넘어갔다.
남편과 사별하고 단 한 번도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하길래, 대뜸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줄 테니까 재혼 생각이 있나?” 하고 물었더니 “재혼은 하기 싫고 그냥 남자 친구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주위에 편안한 아저씨는 많은데 전혀 느낌이 없다면서 소개를 하려면 본인보다 키가 크면 절대 안 되고 편안하고 대화하기 좋은 남자로 해달라고 한다. 그러고는 연하도 괜찮다는 말을 슬쩍 끼워넣는다. 자신이 키가 커서 어지간한 한국 남자들은 주눅이 든다고 말하기에 “외국 사람은 어때?” 하고 도발했더니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박찬숙은 큰 키만큼 시원시원했다. 한량 이봉규와 왠지 느낌이 통하고 코드가 맞아 보여 조만간 술자리를 갖기로 의기투합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고민이 깊어진다. 박찬숙과 어울리는 남자가 누구일까? 예쁘고 순진하고 명랑한 박찬숙. 60세에도 멋진 남자 친구를 만나 제3의 인생 행복하게 살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