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고독사 사망자는 50·60 세대, 특히 남성이 많다고 한다. 100세 시대에 50·60 세대는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의 고독사가 잇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와 예방법에 대해 알아봤다.
서울기술연구원 최수범 연구위원은 지난 20일 서울시청에서 서울싱크탱크협의회(SeTTA) 주최로 열린 ‘빅데이터 기반 고독사 예방’ 정책세미나에서 ‘고독사 실태조사 자료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고독사로 정식 분류된 사례는 2020년 51건에서 2021년 76건으로 늘었다. 이 기간 고독사로 분류된 사망자 127명을 분석한 결과 사망자 10명 중 8명(76.4%)은 남성 1인 가구였다.
연령대는 60대가 31.5%(40명)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50대 26.8%(34명), 70대 18.1%(23명), 40대 13.4%(17명)로 이었다.
전체 고독사 사망자 중 생계·의료·주거 등 기초생활수급자는 80.3%(102명)로 집계됐다. 나머지 19.7%(25명)는 비수급자로 확인됐다. 비수급 사망자 중 60.0%(15명)는 관리(상담) 이력조차 없던 것으로 나타났다.
중장년 남성의 고독사 위험은 서울시복지재단 조사에서도 확인됐다. 서울시복지재단 송인주 선임연구위원은 세미나에서 ‘서울시 고독사 위험 현황 분석’을 발표했다. 송 연구위원은 2020년 기준 서울시 고독사 위험자 사망 건수를 978건으로 분석했고, ‘무직인 50~60대 남성’을 고독사 고위험군이라고 분석했다.
연령별로는 60대가 29.1%(265건)로 가장 많았고 50대 19.3%, 70대 19% 순이었다. 성별로 보면 남성이 644명으로 65.8%를 차지했고, 여성은 334명으로 34.2%였다. 무엇보다 서울시 고독사 사망자 가운데 95.4%인 933명이 무직 상태였다. 또한, 일용근로자가 18명, 자활 근로자가 13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송 연구위원은 “무직인 50~60대인 남성은 강제 퇴거나 열악한 노동 환경, 급격한 은퇴를 겪은 뒤 일상이 급격하게 몰락하면서 고독사 위험군으로 이어졌다”라고 진단했다. 더불어 고독사를 한 978명 가운데 61.3%인 599명이 돌봄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것으로 조사됐다.
최수범 연구위원은 “현재 지원으로는 고독사를 예방하기 어렵고, 위험군 선별에도 어려움이 있다”라며 “위험군을 조기 발견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인 조사에서 데이터 기반의 위험군 발굴 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서울시는 올해 고독사 위험 2천 가구에 고독사 예방을 위한 스마트플러그 기기를 업그레이드해줄 계획이다. 아울러 스마트 플러그를 멀티탭 형태로 제작해 낡은 멀티탭을 교체해주거나 전기요금 보조를 통해 스마트플러그 보급 확대를 모색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대표 유품관리사인 김석중 키퍼스코리아 대표는 확대되고 있는 고독사 문제를 어떻게 볼까. 먼저 그는 한 70대 남성의 고독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김 대표는 "교사로 일하셨던 분인데 자녀들한테 굉장히 완고한 태도를 보이셨다. 뭐든지 자기 혼자 일을 해결하려고 하셨다"라고 말했다.
이어 “돌아가시고 나서 정리를 하는데 침대 밑에서 가방이 나왔다. 속옷, 양말, 홑이불 같은 것들을 싸놓으셨더라. 요양병원에 가게 되면 들고 가시려고 준비를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칠판에 약을 먹은 날을 기록해뒀고, 방송 프로그램에서 나온 내용을 메모해둔 것도 있었다. 3년 전에 쓴 것들로 보이고 가방도 그때 싸신 것 같았다. 치매 증상이 그때부터 있었다는 사실도 추정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치매 방지를 위해 혼자서 부단히도 노력하신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혼자 해결하시려고 하다 보니 안 좋은 결과를 맞았다고 생각한다”면서 “고인분이 돌아가시고 자녀분들이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자녀분들이 다가가려고 해도 고인께서 마음의 문을 안 열어주셨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김석중 교수는 “전형적인 고독사의 모습”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김 교수는 “무연고 고독사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가족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통이 안 되어서 고독사를 맞는 경우가 많다. 실제 고독사의 본질 문제는 가족 간의 사이 약화다. 가족과 소통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자세는 굉장히 위험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가족들이 있는 데도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석중 교수는 “혼자 사는 50·60 세대들을 보면 이혼도 있고, 갑작스럽게 은퇴를 한다거나 자영업을 하다가 경기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패배주의가 생겨서 가족들과 떨어져서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특히 50·60 세대 남성의 고독사가 많은 이유에 대해 김 교수는 “식사를 제대로 못 챙겨 먹어 영양 불균형이 오면서 건강이 악화되는 것 같다”라고 짚었다.
이에 따라 김석중 교수는 고독사 예방법에 대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심신 건강 유지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두 개의 선이 서로 의지하며 맞닿은 형태인 사람 인(人)은 책과 또 다른 책을 잇는 징검다리와 같은 모양새다. 역사만화가 박시백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기록과 독자를 생생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와 함께하는 북人북은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등 누구도 선뜻 이뤄내지 못했던 역사의 대장정을 펴낸 사람의 자신감과 묵직한 철학을 담았다.
“브라보 독자를 위한 역사책 추천이라, 전부 제 책으로 해도 되나요?”
역사만화가가 품은 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다. 농담 반, 진담 반일 테지만 그럴 법도 하다. 500년, 총 2077책. 차례로 쌓아 올리면 아파트 12층 높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을 독파하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스무 권을 연재하는 데 꼬박 13년이 걸렸다. 밑그림부터 펜 작업, 채색 등 모든 공정을 혼자 작업하며 각 인물의 기질과 분위기를 최대한 구현했다. ‘실록’을 기반으로 한 사실 고증과 명쾌한 박 화백만의 역사적 시각 덕일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03년 첫 권 ‘개국’ 출간 후 바로 그해 대한민국 만화대상 장관상을 받았다. 이뿐이랴. 현재까지 판매 부수 350만 부를 기록하는 성과를 이뤘다.
완독의 힘이 만든 그의 역사
초등학생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형이 사온 갱지를 슬쩍 가져와 장편 만화책을 통째로 따라 그릴 정도였다. 특히 1970년대 유행한 만화 ‘바벨2세’, ‘주먹대장’, ‘요철발명왕’ 등에 푹 빠졌었다. 늘 ‘나는 언젠가 만화를 그릴 거다’라고 다짐했던 그는 1990년대 후반, 신문사에 만평을 연재한다. “일간지에서 시사만화를 그릴 때 재밌기도 했지만 스트레스가 컸어요. 반응이 즉각적이었거든요. 퇴근할 때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때부터 시작이었어요. 신문사 직원들이 ‘어우, 박 화백! 오늘 재미있더라’ 하면 좋아요. 그런데 아무 말도 없거나 ‘오늘 그건 무슨 얘기야?’라고 하면 ‘아, 망했다’ 싶은 거죠.”
이런저런 고민에 잠겨 있던 어느 날, 드라마를 보다 문득 조선 역사를 만화로 제작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된다. 조선 전기 정치 갈등을 그린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에서 수양대군(세조)의 계유정난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세종의 손자이자 그의 조카인 단종을 비롯해 수많은 신하들을 살해했는데도 말이다. 문제의식을 느끼고 바로잡으려 해도 아는 바가 없다 보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후 신문사 도서실을 들락거리며 관련 도서를 찾아 읽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책 내용은 대부분 야사와 정사가 뒤섞여 있었다. 조선사에 흥미가 생겼고, 제대로 된 역사서의 필요성을 느껴 4년 넘게 그려오던 만평 연재를 그만뒀다.
그때까지 실록의 한 페이지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단지 지식이나 정보를 가공하는 만화 작업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자리했다. 아마 날카로운 만화가의 촉으로 조선사의 흥미진진함을 감지해냈으리라.
“우선 국역 ‘조선왕조실록’ CD를 구해 하루 12시간씩 공부했어요. ‘실록’도 역사 기록물이니 담당 사관의 시각이 개입되고 곡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미워하는 당파 쪽의 발언이라 해도 있는 그대로 기록했더라고요. 후손이 당시의 사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죠. 다만 편년체(연대순으로 기록한 역사 서술 방식)로 그날그날 있었던 일이 중구난방으로 적혀 있어 엄청나게 정리했어요. 필기 노트만 120권 정도 돼요. 그걸 다시 보면서 연표를 그리고, 간략하게 한 권짜리 요약본을 만들기를 반복했죠. 핵심은 ‘노가다’예요.”
공인된 맥락에 맞춘 강약 조절
그는 책 내용을 구성할 때 무엇보다도 정사에 기초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한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미있고 참고가 된다”며 애독했던 책 가운데 하나로 박 화백의 저서를 꼽았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바로잡아주기도 하고, 적절히 개입해 해설도 곁들인다. 예컨대 황희 정승의 경우, ‘실록’에는 속물이며 권력 지향적이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 식의 두루뭉술함과는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신격화된 모습만 남아 있는 게 의아하다는 설명이다. 또 세종 시절을 으레 태평성대라 여기고 박 화백 역시 그를 ‘하늘이 내린 인물’로 평가하지만, 세종의 화폐 개혁은 가난한 조선 민중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한 정책이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35년’, ‘친일파열전’을 포함해 최근 출간한 ‘박시백의 고려사’도 마찬가지다. 문종 때 완성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한줄 한줄 들여다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사실들을 캐내 바르게 전달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이웃 나라를 넘어 지구 반대편까지 알려지게 됐어요. 코리아(Korea)가 고려에서 비롯한 것만 봐도 그렇죠. 하지만 고려 역사를 기록한 사료가 조선에 비해 많이 부실해요. 세월을 견디지 못해 소실되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때때로 전후 사정을 조사하고 살을 붙일 때도 있어요.”
박 화백은 수많은 역사적 인물 중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정도전을 꼽는다. 살면서 이상을 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설계자로 알려진 정도전은 고려 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매섭게 움직인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던 때 이미 그의 나이 마흔이 넘었죠. 그 당시 마흔은 지금과 다르잖아요. 인생의 정점을 훨씬 지난 나이일 수도 있는데 마치 20대 청년과 같은 기세로 고려라는 틀을 부수려 했고, 결국은 성공했어요. 무모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추진력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가히 긴 시간이다. 어쩌면 현재보다 과거에 더욱 집중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책의 흐름을 따라 호흡해준 독자야말로 그가 이 마라톤을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열심히 했는데 반응이 없었다면 벌써 다른 일을 찾아봤을 것 같아요. 원고를 넘길 때마다 ‘이번엔 별로인 것 같다’면서 불안했지만 독자 덕에 여기까지 왔어요. 저를 이 직업으로 먹고살 수 있게 해준 셈이에요. 굉장히 감사하죠. 근대사든 현대사든 앞으로 다뤄보고 싶은 시대가 많지만 일단 오래 만화를 그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변화무쌍한 일상은 아니다. ‘이동식 급식소’ 관리하던 시절에야 차에 사료 한가득 챙겨 몇 시간씩 순회를 돌았다. 운영을 그만둔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 집 앞 식당에 빈 밥그릇 채워놓고, 피크타임 비껴갈 즈음 손님들 노는 모습을 뷰파인더에 담으면 그만이다. 미리 보정해둔 사진과 재치 있는 문구를 곁들여 SNS에 올려두고, 사진 정리를 하거나 원고 작업을 한다. 이용한 작가의 일상에 ‘대단한 변화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변화무쌍한 고양이를 제외한다면.
장소 협조 고양이책방 ‘책보냥’
이용한 작가는 16년 차 ‘캣대디’(고양이와 아빠의 합성어로,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이자 명실상부한 고양이 작가다. 2009년에 낸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를 시작으로 ‘명랑하라 고양이’, ‘나쁜 고양이는 없다’ 시리즈와 지난해 출간한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까지 총 11권의 고양이 책을 냈다. ‘나쁜 고양이는 없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고양이 춤’의 제작과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사라져가는 오지 마을들을 찾아서’, ‘물고기 여인숙’, ‘사라져가는 풍경들’ 등 문화기행서를 내고 있다.
세 번째 고양이 책의 성공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국내 세 번째 고양이 책이다. 사진부터 글 내용까지 전부 고양이로 가득한 ‘고양이 책’은 당시 출판 시장에 거의 전무했다. 이제는 해외 번역본까지 포함해 한 해에만 고양이 책이 몇 백 권씩 쏟아지지만, 2009년 한국에 등장한 이용한 작가의 고양이 책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여태껏 낸 고양이 책에 고양이 다이어리, 고양이 일력 등을 합하면 이 작가가 책 형태로 엮어낸 고양이 이야기만 헤아려도 셀 수 없다. 특별히 아끼는 책을 꼽기도 힘들다. 다만 첫 고양이 책인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와 신간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 더 많다.
“책을 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국내에서 출판된 세 번째 고양이 책이자, 최초의 성공 사례라고나 할까요. 고양이 책만 열 권 넘게 냈지만 아직도 첫 번째 책 판매 부수를 넘어선 책이 없어요. 책보다는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으로 고양이 동영상을 보는 시대가 됐잖아요. 지금은 워낙 고양이 책이 많아지기도 했고요. 앞으로도 실물 책을 낼 생각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도 100% 공존은 없다, 그러나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는 출간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책이다. ‘고양이 식당’ 운영 경력 16년 차, 그를 거쳐간 수많은 고양이 손님들의 이야기를 꾹꾹 모아 담았기 때문이다. 현재 운영하지 않는 이동식 급식소는 제외하고, 1호점 고양이 식당인 ‘구름이네 고양이 식당’, 꾸준히 사료 후원을 해오고 있는 2~3호점 단골손님들이 주인공이다.
책에는 그의 ‘반쯤’ 마당 고양이 ‘아쿠’와 ‘아톰’이 등장한다. 이 작가의 집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세 살배기 두 형제는 최근 그와 함께 거처를 옮겼다. 지난한 원고 작업 중에도 세 살배기 고양이와의 첫 만남부터 함께 살게 되기까지 있었던 일을 정리할 때는 행복했단다. 다 커버린 아이들의 어릴 적을 추억하는,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면 쓰기 힘들었던 부분도 있다. 고양이 식당 2호점 ‘목련식당’의 할머니 이야기다. 만취한 채 ‘고양이를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윽박지르는 경찰, 고양이 키우지 말라고 협박하는 마을 이장. 늘그막에 길고양이를 돌보며 삶의 낙을 얻곤 했지만 이웃 등쌀에 못 이겨 결국 할머니와 목련식당은 산속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요즘도 사료 후원 겸 사진 촬영 겸 주기적으로 2호점을 찾고 있지만, 쫓겨나듯 이사하던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시골에서 고양이 밥 주며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굉장히 낭만적이라고 말해요. 현실을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죠. 시골에서 고양이는 상추보다 못한 생명 취급을 받아요. 밭을 파놓고 농작물을 건드린다고 욕하고, 집 앞마당에 철마다 쥐약을 놓죠. 고양이 식당에 찾아오던 고양이들이 어느 때부턴가 자꾸 다치고 죽는 일이 있었어요. ‘나 때문에 고양이들이 피해를 입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2~3년 정도 밥 주는 일을 멈춘 적도 있었죠.”
해마다 이웃집 마당에 놓이는 쥐약을 보고도 모른 체해야 한다. 어제까지도 고양이 식당을 찾아오던 단골손님이 차갑게 굳어 쓰러진 모습을 마주하는 일도 종종 겪어야 한다. 시골 캣대디 생활은 그런 식이다. 개보다 고양이를 고깝게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한 데다, 시골에서 발생하는 고양이 학대는 도시와는 달리 주목조차 받지 못한 채 묻혀버린다. 고양이를 모함하는 이웃들에게 맞서보기도 했지만 ‘위아래도 없는 천하의 몹쓸 놈’ 소리만 들었단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면 밭을 망치는 고양이가 늘어난다. 고양이가 쓰레기봉투를 헤집어 길거리를 더럽힌다. 고양이에 대한 단단한 오해를 풀 의향이 없어 보이는 이웃들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대신 그는 회유책을 택했다. 뇌물에 가까운 선물을 가져다주며 대화를 시도하는 것.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고양이를 득달같이 쫓아내던 할머니네 텃밭에는 어느덧 촘촘한 그물이 쳐졌다. 언제 누가 낳은 것인지도 모르는 집 앞 도랑의 꾸물거리는 새끼 고양이 여섯 마리를 챙겨도 된다는 암묵적인 허락도 받아냈다. ‘고양이에 미친 놈’ 취급받은 지 6년 만에 찾아온 변화였다.
고양이 친화적이라 ‘고양이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터키나 모로코에도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제 것을 나누며 공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길고양이 학대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요즘이지만, 그는 하던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그게 길고양이와 사람이 공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양이 아빠 노릇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수많은 작은 곳의 수많은 작은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작은 일들을 하고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어요. 수많은 캣맘과 캣대디, 애묘인들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는 동네 고양이를 포획해 TNR(길고양이 중성화) 사업 지정 병원에 데려다놓고, 누군가는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SNS에 올려서 고양이의 귀여움을 널리 알리고, 또 누군가는 감명받은 고양이 게시물을 주변에 공유하는 거죠. 이 모든 일이 계속되다 보면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고양이와의 공존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 믿음의 기저에는 그 스스로가 인식의 급격한 변화를 겪었던 경험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열렬한 고양이 예찬론자지만, 고양이라는 존재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의 그는 고양이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옥외 식당에서 식사할 때 발치를 맴돌던 길고양이를 쫓아낸 적도 있다. 고양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몰라서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2007년의 늦가을 어느 저녁, 아내 덕분에 발견한 고양이 일가족에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버려진 소파 위에 누운 어미 고양이가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은 강렬한 충격 그 자체였다. ‘머릿속에서 고장 난 필름처럼 무한 반복되던’ 장면을 곱씹던 그는 먹다 남은 음식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일 년 후에는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집 마당에 고양이 식당을 차리기 위해.
고양이 작가로 활동한 지 10년이 훌쩍 넘어가니 새삼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초등학생 때 작가님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벌써 어른이 되었다’는 독자들의 메시지를 받을 때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진을 통해 대단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첫 번째 책 서문에 썼듯, ‘고양이에게 신뢰받지 않고는 신뢰할 만한 고양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길고양이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나누면 세상은 더 귀여워진다
운이 좋으면 카메라를 들이대자마자 재밌는 장면을 포착하지만, 대부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래도 사람처럼 턱을 쓸어내리는 듯한 재밌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에는 ‘포토샵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 진짜 고양이가 맞느냐’며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진다. 그중에서도 유독 반응이 좋은 사진들이 있다. 예를 들면 눈이 내려 소복이 쌓인 길 위에서 총각무를 먹는 고양이 가족의 사진이 그렇다.
“12년 전 한겨울 오후였어요. 어미 턱시도 고양이(등이 검고 가슴이 흰 고양이)와 새끼 두 마리가 배가 고팠는지 누군가 먹다 버린 총각무를 나눠 먹고 있더라고요. 무도 작은 데다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새끼들은 어미를 밀어내고 그걸 다투듯 나눠 먹는 모습이 어찌나 짠하고 안쓰러웠는지 몰라요. 사진만 빠르게 촬영하고 차에 남은 사료를 챙겨줬죠.”
촬영할 때 느끼는 감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기 때문일까. ‘작가님 덕분에 캣맘, 캣대디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뒤숭숭한 소식도 자주 들려오지만, 16년 전보다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유해졌음을 몸소 느끼는 요즘이다.
가장 많이 변화한 지역은 제주도다. 과거에는 어업 종사 인구가 많은 섬 특성상 ‘고양이가 생선을 훔쳐간다’는 이유로 인식이 좋지 못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가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최근 여행차 방문한 제주도는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최근에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웬만한 카페나 식당 앞에는 고양이 밥그릇 물그릇이 있고, 고양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우호적으로 바뀌었더라고요. 특히 제주도 남쪽에 있는 가파도는 섬 곳곳에 고양이 급식소를 지어두고 사료를 챙겨주고 있었어요. 일본의 고양이섬을 연상케 할 정도였는데, 작기는 해도 섬 하나가 통째로 바뀐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그는 사람과 고양이가 함께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모로코의 공원에서는 보잘것없는 빵이나마 고양이와 나누는 걸인의 모습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 먹는 음식을 고양이에게 준다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가 생각하는 가치는 제 것을 나눈다는 데에 있다. 어려운 시절에도 된장국에 남은 밥을 말아 길고양이들에게 내주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이용한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가졌으니 우리가 가진 걸 고양이에게 조금만 나눠줘도 이 세상은 훨씬 아름답고 귀여워질 것”이라고.
“사람을 알고 싶었어요.” 사람이 궁금했던 소극적인 이공계생은 삼성전자 최초로 ‘세일즈엔지니어’가 되었고,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에 한 획을 그었다. 24개월 약정과 단말 보조금, 통신요금 납부 시스템, 해지 방어 시스템 등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동통신사의 모든 정책의 뿌리를 만든 사람, 이문호(65) 머큐리 사장의 이야기다.
“직장생활을 하든, 사업을 하든 사람을 아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는 생각이었죠.”
이공계 전공으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이 사장은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하고 영업과 마케팅 직무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리고 삼성전자에 입사해 신입사원은 영업사원으로 발령을 내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최초의 이공계생 영업사원이 됐다. 얼마나 극적이었던지, 당시 삼성전자에서 받은 발령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그렇게 10년을 삼성전자 대리점 마케팅 영업을 했다. 그는 영업이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이 제품 사세요’가 아니라 내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거예요. 자기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상대 주관적, 시장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하죠. 상대는 왜 이걸 필요로 할까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해요. 대화할 때는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준비를 많이 하면 진정성이 나와요. 인격적으로 상대를 존경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만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느냐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차별화’예요.”
공짜폰의 효시 ‘삐삐’
서울이동통신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중소기업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삼성전자를 떠났다. 지금이야 공짜폰이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이전에는 공짜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 사장은 서울이동통신에서 통신 보조금의 효시가 된 마케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삐삐를 쓰던 시절에는 모토로라가 브랜드로서 압도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었다. 이때 이 사장은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삐삐 신제품을 공짜로 판매하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삼성전자에는 100만 대를 팔겠다고 약속하면서 기계 가격을 낮춰달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었는지 묻자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100만 대를 팔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질 방법을 찾았다는 게 핵심입니다. 새로 나온 삐삐를 공짜로 소비자에게 풀었을 때, 우리 회사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거죠.”
성공적으로 삐삐 판매의 물꼬를 튼 이 사장은 이동통신사 KTF의 전신인 한국통신프리텔에서 또 한 번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거치며 삐삐라는 신규 사업에서 성공을 이루었듯, 이번에는 공기업에서 PCS(개인휴대통신)라는 신규 사업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한국통신프리텔에 들어간 이 사장은 ‘24개월 약정할인’, ‘단말 보조금’, ‘인터넷 패키지 정책’ 등 소비자의 휴대폰 구매 부담은 줄이면서 휴대폰 제조사의 판매도 늘릴 수 있는 정책들을 만들었다. 1999년 이동통신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했던 요금제와 단말기 패키지는 KTF의 쇼킹스폰서로 업그레이드됐고, 이제는 모든 이동통신사의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제도지만, 당시만 해도 ‘말도 안 된다’고 모두가 반대했던 일이다.
“설득의 바탕은 신뢰예요. 신뢰는 평소에 쌓아둬야 하는 거고요. 상대가 나를 믿게 하려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 성실해야죠. 첫째로 자신이 뱉은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못 했을 때는 피드백을 주어야 해요. 두 번째는 진심으로 상대를 대해야 하고요. 세 번째는 그 사람의 가려운 부분을 찾아내 해결책을 제시해주어야 해요. 그러니까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게 뭘까 알아챌 수 있어야겠죠? 경청은 집중력인 것 같아요. 지나가는 식으로 던진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거죠.”
시장을 읽는 점쟁이
KTF에서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던 이 사장은 KTF를 나와 통신 장비 및 광케이블 전문 업체 머큐리의 수장이 되었다. 당시 머큐리는 구조조정을 해야 할 정도로 위기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이 사장은 무선 공유기인 AP를 머큐리의 성장 동력으로 점찍고 시장 안착에 성공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통신사 와이파이 공유기를 생각하면 된다. 이후에는 ‘기가 와이파이’라는 신기술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선진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무작정 해외에 있는 협력사들을 찾아가 함께 일하자고 설득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허풍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했지만, 함께 해보니 그의 아이디어가 다 맞아떨어지는 걸 보고 협력사들은 이 사장에게 ‘포춘텔러’(Fortune Teller, 점쟁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어떤 관점으로 시장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성공해낸 걸까.
“저도 돌아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네요.(웃음) 제가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어디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요. 다만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현실적인 방법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거기서 자그마한 아이디어가 나온 거고요.”
아주 사소한 아이디어라도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노트에 적어둔다. 그리고 매일 아침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아이디어를 복기할 때 “오래 끌면 안 된다”고 했다. 하루를 넘기지 않는 게 핵심이다. 기존에 없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던 건 다른 사람의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가려운 지점을 긁어주려면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는 그의 영업 지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머큐리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가정용 신기술 와이파이 802.11ax(와이파이6)는 지나가는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은 이 사장의 제안으로 탄생했다.
이렇게 컴퓨터, 삐삐, PCS, CDMA, 휴대전화, AP 등 국내 통신 산업에서 약 40년 동안 정보통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2월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끝없는 증명이 이뤄낸 도전의 아이콘
이 사장을 가리켜 사람들은 ‘고생을 사서 한다’고 했다. 삼성전자에서 마케팅 본부에 발령을 받았을 때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지방으로 자원해서 떠났다. 서울이동통신에서 국내 최초로 30대에 임원직을 달아놓고 한국통신프리텔에 갈 때는 직급과 급여를 낮춰 이동했다. 1999년 한국통신프리텔은 성공적으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공기업에서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대로 승승장구하면 될 것 같았던 그는 돌연 머큐리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위기에 빠져 있던 머큐리는 어엿한 상장 기업이 됐다. “인생은 나 자신을 끝없이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직하게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였다. 그야말로 도전의 아이콘이다. 이 사장은 새로운 도전은 막연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직장의 복리후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으로 둬야 할 것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내가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라면 소위 승부를 건다고 할까요? 기존에 하던 일이 싫증 나서가 아니라, 그냥 이거 한번 해볼까가 아니라 ‘이거 하나만큼은 내가 전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죠. 삼성전자에서 10년 동안 대리점 관리를 하면서 이것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해서, 새로 시작하는 삐삐 회사 서울이동통신으로 옮겨 대리점 관리에 새롭게 도전할 수 있었던 거예요. 현실에서 회사를 옮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도 며칠 밤낮을 고민했는지 몰라요. 내가 잘하는, 혹은 잘하고 싶은 직무를 맡아 성취감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곳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내야 하는 일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을지 궁금했다. 이 사장은 부담감을 책임감으로 받아들였다.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했다. 내 의지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든 받아들였다.
“과정은 어설펐지만 결과가 좋았다면 운이 따른 거고,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안 좋다면 격려받을 일이죠. 모르는 건 모른다, 실수한 건 실수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 사장은 현업에 있으면서 또 하나의 도전을 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성과를 이룬 내용을 담아 ‘영혼 있는 도전’이라는 책을 쓴 것. 일과 글쓰기를 병행한다는 건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장을 보려고 노력했던 이 사장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시어머님 간병을 번갈아 할 수 없으니까 정말 애가 타고, 일주일 넘게 혼자 맡아 하시는 형님께는 너무 죄송해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 60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던 지난 3월 중순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시어머니가 입원한 B씨. 큰동서와 번갈아 간병을 할 요량으로 PCR 검사를 하려는데 본인이 코로나19 확진 후 격리 해제한 지 2주가 지나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가족까지 급박하게 대처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고통과 역할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어떤 가족은 자녀가 시간을 내어 찾아와도 요양원에 격리된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례식에 조문도 받을 수 없었다. 방역 단계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예약한 결혼식장과 날짜는 번번이 바뀌고 연기되다가 예비 신랑 신부와 그 가족은 끝내 갈등 속에 파투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가족, 친구, 동료, 이웃과 사회를 갈라놓았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방역지침은 심리적 거리마저 소원하게 해 인간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온 것이 사실이다.
마스크의 역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강제했던 실외 마스크 착용이 5월 2일부터 해제되었다. 혹시나 하고 청계천으로 산책 나선 날.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마스크 벗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그리고 다음 날 외출할 때도 거리나 공원, 버스정류장, 지하철 등에서 마스크와 함께했다. 지난 2년 남짓 마스크에 길들여져, 규제가 이제는 생활의 도구가 된 것일까.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겨준 불편함과 제한이 안전과 건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준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2020년 첫 발병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을 휩쓴 코로나19라는 역병(疫病)이 어느 정도 감당할 수준이 되면서, 그동안 단절되고 막혔던 부분을 어떻게 복구하고 대처해나갈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가족의 재발견
2021년 영국 통계청이 발표한 연령대별 행복도 조사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코로나19 기간 중 SNS를 활용한 노년층의 행복도가 젊은 세대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접 대면하는 활동이 왕성했던 청년층은 행복도가 떨어진 것과 달리 비대면이더라도 가족과 유대를 잃지 않았던 노년층은 행복도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자신이 가진 인맥 안에서 깊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열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가 2020년 조사를 바탕으로 발간한 ‘대한민국 행복지도 2021-코로나19 특집호’에서도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더욱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노년층이 젊은 세대보다 감정을 잘 다스리고 삶의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도 행복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 밝혀졌다.
인간관계에서 폭은 줄이되 깊이에 초점을 맞추면서 가족 간 대화가 늘어 사이가 더 좋아졌다는 사례도 많이 발견된다. 예전 같으면 퇴직한 아버지나, 취업 준비하는 자녀나 밖으로 돌기 바빠 ‘빈 둥지 증후군’인 어머니의 마음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부모 역시 MZ세대 자식이 얼마나 따로국밥 불통인지 화병이 났을 텐데, 코로나19 덕분에 온 가족이 서로를 지켜보고 관찰할 시간이 생기면서 ‘많이 힘들지?’ 물어봐 줄 수 있게 되었으니 한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자기를 들여다보고 주변을 살펴볼 특별한 시간을 주었다. 또 일상에서 찾는 소소한 행복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접촉 아니어도 언제나 접속 중
긴 코로나19 터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점점 비대면 문화에 익숙해지고 있다. SNS나 메신저, 원격 화상회의 장치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폭넓게 때로는 깊숙한 이야기까지 자유롭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영유아부터 청장년 대상 활동뿐 아니라 시니어 관련 교육, 봉사, 인지치료 등에도 비대면 화상 방식이 선호되는 추세다. 변화에 앞질러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는 곳도 눈에 띈다. 인천을 지역 기반으로 치매 예방 및 인지 교육을 펼치는 한국시니어교육센터의 경우, 예전처럼 요양원이나 주간보호센터로 직접 찾아가는 대신 매주 일정한 시간에 원격 화상강의 방식을 이용해 어르신들을 만나 소통하고 있다. 비대면 화상 프로그램 시행 초기에는 방역과 안전을 내세웠지만, 2년 남짓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면서 장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방역 기준이 완화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소통을 병행할 수 있으니 그 효과와 만족도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상의 소중함과 연결 : ‘딥 콘택트’(Deep Contact)
코로나19 이전 우리는 잘 차려입고 꾸미고 시간을 들여 어딘가로 이동해서 누군가를 만나 사교와 업무를 수행해왔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대면 대화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는지 돌이켜보자. 그런데 코로나19를 겪으며 대부분의 만남이 비대면, 재택(혹은 특정 장소가 아닌 카페나 대중교통 등)으로 바뀌면서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인간관계에서 고립과 단절을 가져와 고통으로 다가왔던 사람들도 어느덧 방역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여기저기 걸쳐놓고 집중하지 못했던 관계는 과감히 정리하고 자신에게 소중한 관계에 깊이 몰입하는 ‘딥 콘택트’의 시대가 주목받는 까닭이다.
자본주의의 서사는 부를 통한 욕망의 충족을 축으로 한다. 그러나 돈만으로 욕망과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던가. 의식주의 흐뭇한 향유에서 나아가 내면의 허기까지 채우고서야 삶이 즐거워진다. 이 점에서 미술은, 또는 미술관은 꽤 쓸모 있는 방편이다. 그러나 흔히 미술관을 따분한 장소로 여긴다. 문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쉽고 만만해 보이는 미술관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여기에선 미술과 일상의 간극이 좁아진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은 생활밀착형 미술관이다. 가볍게 커피 한잔 마시러 갔다가 예술을 덤으로 포식할 수 있는 곳이니까.
화이트블럭은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에 있다. 헤이리는 문화예술마을이다. 세상의 관습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버릇이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뭉쳐 조성한 이색 마을로 파주의 대표적 문화 브랜드다. 이곳의 길들은 구불구불 연신 휘어진다. 속도와 직진을 숭상하는 풍속에 한 방 먹이는 형국이다. 바닥재로 쓰인 도로의 벽돌 틈새로 돋아난 풀들은 이 공동체 마을 주민들이 생태 환경 유지에도 신경을 썼음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건물들은 저마다 다른 형상과 개성으로 도드라진다. 이 역시 의도된 구성이다. 모든 도시에 만연한 구조의 획일성에 반기를 든 셈이다.
헤이리는 볼 것 많고, 즐길 것 많으며, 느낄 것 많은 문화예술지구다. 미술관, 박물관, 작가들의 작업실, 공연장, 서점, 아트숍, 카페,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다. ‘상업 거리로 변질됐다’고 읽는 눈들도 있지만 사람들 북적이는 곳의 상행위야 필연이며, 그 행태는 어디서나 요란한 법이다. 미감을 돋우는 디자인을 입힌 건물들에 들어앉은 영업집들이 그다지 거슬릴 게 없더라는 얘기다. 사실 헤이리의 명물은 건축물인데 몇 가지 수칙에 따라 조성됐다. 건물 높이는 3층 이하로, 건축 재료는 콘크리트와 목재와 철 등으로 제한했다. 외부 도색도 배제 사항이었다. 이를 고려하면 화이트블럭은 다소 일탈을 감행해 지어진 집이다. 헤이리의 개성 넘치는 건물 대부분이 노출콘크리트 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이 미술관은 유리를 주조로 외부를 마감한 게 아닌가.
화이트블럭은 2011년에 개관했다. 사각형 박스 형상의 지상 3층 건물 외관은 매우 수려해 돋보인다. 외벽 일부엔 하얀 알루미늄 하니컴 판넬을 붙였지만 대부분 커튼월 유리창으로 치장해 유려하다. 벽이되 투명 벽이니 내부가 밖으로 훤히 드러난다. 건물 안에 배치된 사물의 모습과 앉았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향이 내비친다. 통째 외부로 열린 집이다. 내부와 외부가 소통하는 개방적 공간이다. 이런 소통을 사람에 적용하면? 숨긴 속셈으로서가 아니라 탁 터놓은 마음과 마음의 교류? 무릇 밖으로 환하게 열린 모든 것들은 당당해서 아름답다.
초록나무들 무성한 실외 공간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낭만적인 카페 풍경이 좍 펼쳐진다. 하늘과 수목이 들이치는 통유리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은 이 순간 평온하리라. 가슴 기슭에 슬픔을 지녔거나 기쁨을 가졌거나, 향기로운 차 앞에서는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곳이 미술관 카페임을 알게 해주는 조형물이 놓인 실내는 세련미가 넘쳐 감성을 일깨운다. 온통 하얀 칠을 입힌 내벽과 기둥으로 이미 밝은 공간이지만, 바깥에서 범람처럼 들이치는 빛의 행렬로 더 밝다. 그러라고 유리 커튼월로 외벽을 채웠다. 자연 채광의 볼륨과 묘미를, 시시각각 달라지는 광량에 따라 변하는 공간의 생기를 만끽할 수 있는 거다.
화이트블럭은 미국건축가협회(AIA)가 주관하는 ‘건축디자인상’을 받은 바 있다. 설계자는 건축가 박진희와 홍존. 그렇다면 설립자는? 기업인 출신의 예술 애호가 이수문(화이트블럭 대표)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국내 사립미술관치고 적자에 허덕이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투자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까 이수문 대표는 무모한 도전임을 뻔히 알면서 미술관을 설립한 셈이다. 아마도 미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열광이 그를 추동한 것 같다. 번듯하게 키워낸 회사를 인생 황혼기에 정리해 마련한 자금으로 화이트블럭을 꾸렸으며, 요즘은 화이트블럭보다 한결 규모가 큰 대형 미술관을 천안에 조성하고 있다. 그는 화이트블럭을 추진하며 설계자에게 ‘멋을 추구하기보다 재미와 편리를 담은 건물’을 지어달라 했다. ‘화가들이 전시회를 하고 싶어 할 미술관’을 주문하기도.
전시실은 2, 3층에 있다. 현재 이종무 화백(1916~2003)의 ‘산에서 산산이’전이 펼쳐지고 있다. 이종무라는 이름이 생소한 이들도 많겠다. 이는 작품성은 빼어났으나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드러내길 꺼려한 이종무의 처신에서 기인한 현상일 수 있다. 그는 올곧은 수준에서 나아가 ‘꼬장꼬장하고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명망을 쟁취하기 위한 화단 일각의 아귀다툼에도 초연했으니, 그가 관심을 가진 건 다만 작품의 됨됨이 그 자체였을 테다. 이렇게 되면 진심으로 알아주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의 작품이 성찰과 관조의 수단이었음에 경의를 느낀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이처럼 개결한 풍모로 일관한 이종무의 만년 작품 다수를 내걸었다. 온통 산을 주제로 한 풍경화들이다. 말 없는 말로 생의 비의(秘義)를 전하는 산. 희로애락으로 점철되는 인생 레이스의 막다른 골목 끝에 우뚝 서서 사람을 보듬어주는 산. 이종무는 화구를 챙겨 들고 무시로 산을 찾았다. 산의 음성을 듣거나 산을 닮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한평생에 걸쳐 모은 생각들을 산의 뜻에 견주어 캔버스에 풀어놓았으리라. 덤덤하나 깊고, 군더더기 없으나 겹겹의 상념을 자아내는 그의 작품을 두고 미술평론가 이경모는 이렇게 썼다.
‘시점의 다양화, 색과 빛의 우아한 조화, 구상성과 추상성의 융합, 현실 공간과 이상 공간의 어울림은 매우 실험적인 접근 방식이며, 이건 이종무 그림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화이트블럭은 초록나무들 무성한 실외 공간까지 거느려 한결 호감을 준다. 건물의 인공미와 정원의 자연미를 연결해 조화로운 풍경을 빚어낸 미술관이다. 노랑꽃창포와 희거나 붉은 수련이 흐드러진 연못, 그리고 저 너머의 푸른 숲까지. 눈으로 쓸어 담을 수 있는 자연이 숱하다. 다시 말해 예술과 자연을 반죽해 순수하고 담백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미술관이다. 작다고 깔보지 마소! 화이트블럭이 하는 말이 그렇다.
“여자가 어떻게 군대를 갑니까?”
노기에 찬 여학생의 질문에 창구 직원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는 그저 운수 나쁜 날이었으리라. 회사의 신입사원 입사원서를 접수하는 날. 당연히 남자들만 지원받고 있는데, 다짜고짜 여자가 찾아오다니. 결국 이날의 항의는 무위로 끝났지만, 그녀는 그 불공정의 억울함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평생의 연료가 된다.
이복실 세계여성이사협회 회장은 당시 기업들이 남자 지원자만 받기 위해 내건 조건은 ‘군필’이었다고 설명했다.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될 때까지 악습은 계속됐죠. 여성들이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채’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나마 결혼하면 퇴직하겠다는 조건이 붙은 서약서를 써야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 시대였어요.”
무작정 선택한 공무원의 길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여학생들은 선택할 수 있는 진로가 다양하지 않았다. 금융권이나 교직 정도가 선호되는 직업이었고, 아예 취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80학번이었던 이 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공무원의 길에 도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꼭 경제적 능력을 갖고 싶었어요.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남성에게 종속적이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직업은 반드시 있어야 했어요.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여성이 다양한 직업을 선택하기 어려웠죠. 제 전공이 도시행정학이다 보니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모두 행정고시 공부를 하는 분위기였어요. 동기가 함께 공부하자고 권해서 자연스레 저도 시작하게 됐죠. 1학년 때 행시에 합격한 3학년 선배를 우러러본 적이 있는데, 자연스레 롤모델로 삼은 것 같아요.”
그녀는 당시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털어놓으며 웃었다. 선배에게 물어보니 ‘기안’을 잘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와 “그 기안이란 게 뭐냐”고 되물었던 기억도 있다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미지의 세계였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덤벼든 것은 아니다. 선택의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시험에 떨어지면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상황 인식은 그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남학생들은 자신감이 넘쳤죠. 따르고 배울 롤모델도 많았고, 떨어지더라도 취직할 곳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절박했어요. 그래서 붙고 나서도 ‘공무원이 되었다’는 성취감보다는 ‘직업을 가졌구나’란 기쁨이 더 컸을 정도니까요.”
기업에 찾아가 부당함을 항의했던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여성으로는 네 번째다.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선구자라는 뜻은 반대로 해석하면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처음 출발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였어요. 그곳에서 10년을 일했죠. 당시엔 부처들 중에서도 굉장히 관료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어요. 여성 사무관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의 능력을 알아주는 부처로 가자고 과감한 선택을 했죠. 그래도 다행인 점은 공무원 조직은 기본적으로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뤄지는 곳이에요.”
그녀가 선택한 곳은 정무장관 제2실. 제6공화국 출범과 함께 새로 설치된 기관으로 사회 문화에 관한 업무들, 그중에서도 여성과 아동, 청소년, 노인 문제 등과 관련한 정책 건의, 연구 개발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 선택은 이후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성 정책이라는 큰 사회적 책무와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무장관실은 10년 후인 1998년 대한민국 여성특별위원회로 개편되었고, 3년 후인 2001년 여성부로 개편된다. 지금의 여성가족부 전신이다.
“제가 느꼈던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개선해야겠다는 의욕이 컸죠. 당시만 해도 정시 퇴근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재택근무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육아휴직이란 단어조차 없었죠. 산후휴가제도가 있었지만 60일에 불과했어요. 보육 시설이나 어린이집은 꿈도 못 꾸고요. 그러다 보니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요. 다른 사람의 조력 없이는 직장을 다니지 못하는 거죠. 엄마와 직업인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병행하는 것이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직장이나 사회 혹은 국가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생각은 유연근무제나 직장 보육시설 지원 등 일·가정 양립 지원제도 개선 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특히 어린이집의 양적·질적 확대에 대한 정책은 공직 생활의 뿌듯한 성과 중 하나다.
“현직에 있을 때 보육정책국장을 2년 6개월 역임했어요. 여성들이 안심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맘 편히 맡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엄마 입장에선 아이들이 하루 종일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또 프로그램이 어린이집마다 제각각이면 그것도 엄마 입장에선 신경 쓰이죠. 그래서 표준보육과정을 만들어 어느 어린이집을 가도 아이들이 같은 보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또 어린이집의 통합 관리가 가능한 보육행정 전산망도 구축하고요. 보육교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확충했죠. 제 스스로가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개선하고 정책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보람 있었어요.”
여성은 눈에 띄어야 살아
이 회장은 2013년 3월 여성가족부 차관에 오른다. 임명직인 장관을 제외하고, 공무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커리어에 발을 딛은 것이다. 이후 조윤선 장관이 정무수석으로 옮겨가면서 한 달간 장관직무대행까지 했다.
“차관으로 발탁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죠. 당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여성 관련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었어요. 하지만 차관급 후보에 오를 만한 여성 고위 공무원이 많지 않았던 시기이고, 선발을 하려고 해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니까요. 다행히 각 부처에서 일 잘하는 유능한 여성을 발탁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차관에 오를 수 있었죠.”
남성 중심의 사회, 그것도 폐쇄적인 조직이라고 평가받는 정부 조직 안에서 그녀는 늘 개척자여야 했다. 따르고 배울 만한 롤모델도 없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 같아요. 승진할 수 있을까, 저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사무관일 때는 서기관이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나면 과장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식이었죠. 당시엔 여성이 극소수였고, 우리에겐 기회가 안 주어지는 것이 당연했으니까요. 차관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그만큼 힘들었던 세월이지만, 열심히 하면 날 알아봐 주는 상사들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회장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부당함이나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있을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태도다. 남들과 같은 방식이나 같은 정도의 노력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소수자가 인정받으려면 일반 다수자의 2배, 3배의 일을 해야 합니다. 똑같이 일하면 절대 인정 못 받아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해요. 소수자의 운명 같은 것이죠.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일하고, 벌여놓은 일을 반드시 책임지는 식으로 일했어요. 회의 석상에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했고요. 소수자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아요. 물론 그런 태도와 함께 성과도 인정받아야 하고요. 소수자의 숙명에 맞서 살았죠.”
바뀐 신분도 열정 막지 못해
공직 생활을 마무리한 후 이 회장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남들처럼 느긋하게 여행을 하거나 취미생활에 몰입할 법도 한데, 한가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무원 생활할 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데 매료된 상태라고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글쓰기에도 집중해서 다양한 매체에 글을 연재하거나, 그간의 경험을 정리한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등을 집필했다. 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의 자서전에도 참여했다.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글솜씨를 인정받아 대필작가가 아닌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퇴직을 앞둔 후배들에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요. 퇴직 후 그 다음 날부터 일하라고 말하죠. 커리어를 중단하지 말고 이전과 똑같이 일하라고 당부합니다. 몇 달 쉬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익숙해지거든요. 퇴직 후의 인생을 만드는 것은 현직 시절의 삶인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여성 정책에 대한 경험이나 양성평등에 대한 노력 등 당시의 가치관과 철학이 지금의 삶까지 영향을 주고 있어요. 세계여성이사협회도 마찬가지죠.”
세계여성이사협회는 전 세계 60개국 80여 지부에서 8500여 개 기업의 이사로 활동하는 3700여 명의 여성 이사로 구성된 비영리 단체이며, 한국 지부는 2016년 9월에 창립됐다. 창립 당시에는 회원이 40여 명에 불과했다. 동의하는 여성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 이 모임의 가입 조건인 상장기업이나 공기업의 등기이사 등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여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업의 이사회에 여성이 참여하는 국내 비율이 3%가 안 됐어요. 일본도 9% 정도 되고 유럽 국가들은 30~40%나 되는데 우리는 매우 낮았죠. 그래서 우리도 법 개정을 추진했어요. 다양한 법 중에서도 자본시장법을 개정해서 여성의 비율 의무화를 시도했죠.”
그래서 은퇴 후 다시 국회를 찾았다. 사실 이 회장에게 국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니다. 국회는 여성 공무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과장 때는 국정감사 자리에서 다리를 꼬았다는 이유로, 나중에는 옷차림이 화려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수시로 호출당하기도 예사였다. 다행히 그 경험은 법 개정의 돌파구가 됐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설득해 상장사 여성 이사 할당제 도입에 관한 법안을 발의할 수 있었다.
“세계 기업들 사이에선 ESG 경영, 즉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핵심 요소로 꼽아야 한다는 흐름이 있어요. 여성 이사 할당제는 이 지배구조의 다양성과 연관이 있죠. 글로벌 기업들은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기업에는 투자조차 안 해요. 우리 기업들도 변해야 하는 시점이고, 저희의 노력이 우리 기업들의 체질 개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해요.”
세계여성이사협회의 주도로 개정된 자본시장법은 올 8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자산총액 2조 원이 넘는 기업은 특정 성별로만 이사회를 구성할 수 없게 된다. 즉 최소한 1명 이상의 여성을 임원으로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NGO라는 민간인 자격으로 선봉장에 서서 공무원 못지않게 사회를 바꾸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껴요. 물론 이제 시작이죠. 상장기업 외에 공공기관의 이사회에도 여성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확대되면 공공기관 역시 여성 임원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여성에 대한 제한이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시너지가 생길 거예요.”
●Exhibition
◇민속이란 삶이다
일정 7월 5일까지 장소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은 민속의 가치와 의미를 폭넓게 살펴보는 특별전 ‘민속이란 삶이다’를 7월 5일까지 연다. 전시는 민속과 관련된 유물과 아카이브 자료 600여 점을 통해 민속이 근현대에 어떻게 학문으로 자리 잡고 영역을 확장해나갔는지 돌아본다.
전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아키비스트(기록물 관리 전문가)이자 민속학자 송석하(1904~1948)가 정리한 일제강점기 민속 현지조사 원본 사진카드 486장이 공개됐다. 약 90년 전 북청사자놀음과 봉산탈춤 등을 조사하고 카드별로 명칭과 지역, 날짜를 기록했다. 전시실에 설치된 키오스크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추억의 물건들도 민속의 이름으로 등장해 눈길을 끈다.
1970~80년대 혹은 1980~90년대 삶의 모습이 ‘뉴트로’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그 시기의 민속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됐다. 필름카메라,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워크맨’, 286 컴퓨터, 3.5인치 디스켓 등이다. 온라인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민속 물품도 전시되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통해 한국을 모자의 나라로 각인시킨 갓, 미국 아마존에서 대박 신화를 쓴 영주 호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달고나 등을 만날 수 있다.
◇조미수교와 태극기
일정 7월 7일까지 장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조미수교와 태극기’ 특별전을 통해 1882년 작성된 최초의 태극기 도안을 공개했다. 최초의 태극기 도안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7년 미국 의회도서관 슈펠트 문서에서 찾은 것으로, ‘슈펠트 태극기’로 불린다. 원본은 도서관에 있고, 이 교수가 촬영한 사진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전시에서는 1882년과 1899년에 미국 해군부가 발간한 책 ‘해양국가의 깃발’과 그 안에 실린 태극기 도안도 공개됐다. 특히 1882년 최초의 태극기 도안과 그해 나온 ‘해양국가의 깃발’ 속 태극기가 매우 흡사해 화제를 모았다.
●Book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이어령·열림원)
지난 2월 별세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가장 사적인 고백이 담긴 산문집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가 새롭게 출간됐다. 2010년 초판 출간 이후 12년 만이다. 개정판에는 개신교 신앙 고백에 관한 인터뷰를 담은 ‘나는 피조물이었다’가 빠졌다. 1~4부 모두 이어령의 산문으로만 채워졌다. ‘나는 피조물이었다’는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에 담겨 출간될 예정이다.
책에는 이어령 문학의 ‘우물물’이 되어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메멘토 모리’의 배경이 되는 여섯 살 소년 이어령의 고향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1부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이어령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책’, ‘나들이’, ‘뒤주’, ‘금계랍’, ‘귤’, ‘바다’라는 여섯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다. 2부 ‘이마를 짚는 손’, 3부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에서는 이어령의 사색적이고 섬세한 필치를 느낄 수 있다. 특히 4부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는 이어령의 문학이 어떠한 과정으로 완성돼왔는지 엿볼 수 있다. 이어령은 어머니부터 외갓집, 고향, 그리고 문학론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감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묵은 글들” 속 또렷하게 남아 있는 향수를 전한다. 특히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지며 공감을 이끈다.
◇생존자들(캐서린 길디너·라이프앤페이지)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25년간 심리치료를 하며 만난 내담자들 가운데 특별한 네 사람을 소개한다.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저자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치유받는데, 그 과정이 감동을 준다.
◇민낯들(오찬호·북트리거)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열두 가지 사건을 담은 책이다. 故 변희수 하사, 故 설리(본명 최진리) 등의 문제적 죽음을 응시하고, 코로나19 팬데믹과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낙태죄 폐지 등을 되짚으며 한국 사회의 민낯을 폭로한다.
◇독일은 왜 잘하는가(존 캠프너·열린책들)
자존심 센 영국인이 독일을 극찬하는 책이다. 저자는 뼈아픈 과거에서 배운 교훈, 품위 있는 민주주의와 공동체 의식, 문화를 존중하고 시민의 안전한 생활을 책임지려는 리더십 등 전후 75년간 현대 독일의 놀라운 변화를 분석한다.
●Stage
◇웃는 남자
일정 6월 10일 ~ 8월 22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프랭크 와일드혼
출연 박효신, 박은태, 박강현, 민영기, 양준모, 신영숙, 김소향, 이수빈, 김승대, 최성원 등
뮤지컬 ‘웃는 남자’는 EMK뮤지컬컴퍼니가 제작한 두 번째 창작 뮤지컬로 세계적인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18년 월드프리미어와 2020년 재연에 이르기까지,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수작으로 호평받았다.
‘웃는 남자’는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끔찍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순수한 인물인 그윈플렌의 여정을 통해 사회 정의와 인간성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 가치에 대해 깊이 있게 조명한다.
지울 수 없는 웃는 얼굴을 가진 채 유랑극단에서 광대 노릇을 하는 관능적인 젊은 청년 그윈플렌 역에는 배우 박효신, 박은태, 박강현이 출연한다. 박효신은 2018년 이후 4년 만의 귀환이다. 박은태는 뉴 캐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박강현은 2018년 초연, 2020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 시즌까지 함께하게 됐다. 또한 우르수스 역에는 민영기와 양준모, 조시아나 역에는 신영숙과 김소향이 각각 캐스팅돼 기대감을 더한다.
◇번지점프를 하다
일정 6월 22일 ~ 8월 21일
장소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심설인
출연 이창용, 조성윤, 레오, 최연우, 이정화, 고은영, 정재환, 렌 등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병헌·이은주 주연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2012년 초연돼 2018년까지 세 시즌을 거쳤다. 아름다운 스토리와 서정적인 음악으로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극은 국어 교사 서인우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오간다. 국문과 대학생 인우는 당돌한 미대생 태희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지만 안타까운 이별을 맞이한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태희를 간직하고 살던 인우 앞에 그녀와 같은 버릇, 같은 행동을 하는 남학생 현빈이 나타나면서 인우는 혼란에 빠진다.
◇마타하리
일정 5월 28일 ~ 8월 15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권은아
출연 옥주현, 솔라, 김성식, 이홍기, 이창섭, 윤소호, 최민철, 김바울 등
뮤지컬 ‘마타하리’가 5년 만에 돌아온다.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이중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총살당한 아름다운 무희 마타하리(본명 마그레타 G. 젤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2016년 초연과 2017년 재연에 참여한 옥주현이 마타하리 역으로 다시 관객과 만난다. 이와 함께 마마무 솔라가 뮤지컬 무대에 새로운 도전장을 던질 예정이다. 또한 마타하리의 유일한 사랑인 아르망 역은 김성식, 이홍기, 이창섭, 윤소호가 연기한다.
※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나금융 씨는 은행은 물론 증권회사, 보험회사에서 운영하는 금융상품에 가입해 예‧적금 등의 이자소득과 주식에서 발생하는 배당소득이 연간 2천만 원을 초과했다. 금융소득금액을 다른 사업소득 등과 합산해 금융소득 종합과세로 과세가 되었는데,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국민들이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국세청이 ‘세금절약 가이드’ 책자를 발간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중소사업자‧근로자‧영세납세자가 알아야 할 절세 방법을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사례 중심으로 소개한 점이 특징이다.
또한 그간 3종으로 발간하던 세금안내 책자를 한 권의 단행본으로 통합됐다. 구독자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이번에 발간한 ‘세금절약 가이드’ 책자는 중소사업자‧근로자를 위한 세금, 영세납세자를 위한 복지세정과 납세자 보호 제도로 구성됐다. △시작, 운영, 폐업 등 사업 단계별 중소사업자의 신고 및 의무사항 △연말정산 시 문의가 많은 소득‧세액공제 △납세자에게 도움이 되는 세정지원 및 권리보호 제도 등 다양한 세금 정보를 수록했다.
아울러 ‘납세자가 자주 묻는 상담사례 TOP 10’을 지난해 국세상담센터를 통해 접수된 사례를 바탕으로 부가가치세, 종합소득세, 원천세, 연말정산 등 세목별로 정리했다. 문답 형식의 사례에 도표와 그림을 추가해 납세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사례로 보는 세금 절약 가이드’는 매입과 소득, 원천 관련 사례를 나눠 각각의 가상 사례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해 국민들의 쉬운 이해를 도왔다.
‘세금절약 가이드’ 책자는 전 국민이 무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전자책자(e-book)로 제작해 국세청 홈페이지에 게재돼있다. 국세청 홈페이지의 ‘국세정책/제도’-‘통합자료실’-‘국세청 발간책자’-‘세금안내 책자’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실물 책자는 지난달 31일부터 전국 주요 대형서점 및 온라인에서 유료로 판매되고 있다.
국세청 측은 “앞으로도 납세자 이해를 돕기 위한 다양한 세금 안내 책자를 지속적으로 개발해 제공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책 읽는 서울광장’의 방문객 수가 개방 한 달 만에 2만 명을 돌파했다. ‘책 읽는 서울광장’은 시청 앞 서울광장에 조성된 개방형 도서관이다. 서울도서관이나 광장 내 이동형 서가에 비치된 책을 빌려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방문객 수는 개장 첫 금요일인 4월 29일 1127명에서 이달 14일 토요일 3200명으로 약 2.8배 증가했다.
책 읽는 서울광장이 운영되는 매주 금요일, 토요일 광장 동쪽과 서쪽에서는 거리공연과 동화구연, 북 토크 등의 문화예술 행사가 함께 진행된다. 특히 거리공연 ‘구석구석 라이브’는 클래식, 성악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를 마련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광장을 찾은 시민들은 신진 미술인의 작품을 관람할 수도 있다. 광장에 전시되는 30~40점의 작품은 서울시가 지난 2020년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을 지원하기 위해 구매한 것들이다. 시는 작품 옆에 QR코드를 새겨 넣어 시민들이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시 관계자는 “지난 한 달간 책 읽는 서울광장에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서울시민들의 빛나는 시민의식이었다”며 “운영 동안 총 3000권의 도서 중 단 1%만이 분실됐다”고 말했다.
이어 “매트, 휴대전화 충전기 등 무상으로 대여하는 비품들이 전부 회수됐고, 행사가 끝난 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가져갔다”며 “시민들이 행사 종료 후 각자 사용했던 빈백, 도서를 스스로 정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쾌적한 독서 문화 환경을 빛냈다”고 덧붙였다.
6월부터 책 읽는 서울광장에서는 ▲조각 작품 전시 ▲‘서울 문학 광장’ 행사 ▲우리 동네 지역 책방이 참여하는 ‘움직이는 책방’ 프로그램이 추가로 운영된다. 책 읽는 서울광장은 10월 29일까지 매주 금·토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영된다. 7~8월은 무더위와 장마를 피해 잠시 쉬었다가 9월에 다시 광장에서 시민들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