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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지갑 분실로 느낀 세상의 따뜻함
-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은 대부분 잃어버린 물건을 아깝게 생각하고 지금의 것보다 예전의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을 내가 직접 겪고 보니, 위 속담이 더욱 실감 나게 느껴진다. 주로 지하철로 출ㆍ퇴근하는 필자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5호선 전철을 이용해 퇴근하고 있었다. 여의도역에서 환승해 전철 안에서 잠시 스마트폰을 본 후 느낌이 이상해 윗주머니에 손을 댔더니 지갑이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소매치기를 당했나“ 등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지갑을 어떻게든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늦은 밤임에도 아들에게 전화했다. “00카드 분실신고는 1588-0000번으로 아빠가 직접 신고하시고 혹여 찾을 수도 있으니 지하철분실신고센터는 네이버에서 확인 후 연락하고, 기타 행정적인 사항은 아마도 내일 아침에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해요”라는 아들 답변이 돌아왔다. 필자는 아들 말대로 네이버를 검색해 지하철분실신고센터가 있는 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내려 카드 분실신고를 마쳤다. 그리곤 마음을 추리고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지갑이나 잃어버릴 정도로 나이가 들었나. 만일 소매치기에게 당한 거라면 그 정도로 내가 어수룩해 보이나.’ 집에 도착해서도 내가 아끼고 아끼던 소중한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자괴감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눈을 붙일 수가 있었다. 이튿날 무거운 몸으로 잠을 깨 아내와 아침을 먹는데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혹시 어제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에 다녀가신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전화기로 흘러나왔다. “네, 제가 어제저녁에 그곳에 가서 공부하고 왔어요. 지갑을 잃어버렸는데…“라며 말끝을 흐리자, ”네, 제가 지갑을 주워서 가지고 있어요.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서 청소 일 하는 사람인데, 오늘 아침 청소하려고 교실에 들어갔더니 의자 밑에 밤색 지갑이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잘 보관하고 있으니 안심하시고 있다가 찾아가세요“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에 필자는 십 년 체증이 풀리듯 마음이 평온을 되찾았다.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로 향하는 동안 필자의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우선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를 먼저 하고 지갑에 들어 있던 돈 일부를 감사 표시로 드려야지”라는 기분 좋은 상상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와 약속한 4층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4층 현관에 아주머니가 서 계셨는데 필자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아주머니께서는 “지갑 안을 살펴보니 명함이 있어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연락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후, 감사의 표시로 현금을 조금 드리자, 아주머니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극구 사양하셨다. 그래서 인근 영등포시장으로 가서 화장품과 사탕, 그리고 과자를 사서 드렸다. 아주머니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참 따스하구나”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2016-04-2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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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혜걸 비온뒤 칼럼] C형 간염, 당신도 위험할 수 있다
-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동네의원에서 수액 주사를 맞았던 환자들에게 C형 간염이 집단 발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숫자만 67명입니다. 주사기를 돌려쓴 것이 결정적 원인입니다. 원장과 원장부인도 감염됐고, 원장은 거동이 불편한 뇌병변장애인이란 소식도 들려옵니다. 면허갱신 등 의사 재교육 필요성이 대두되고 미필적 고의에 대한 형사처벌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장에 대한 정신감정도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혹은 인격장애 수준의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비상식적인 의료행위를 수년 동안 버젓이 자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이 다수의 선량한 동네의원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당한 환자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입니다. 알다시피 C형 간염은 죽을 수 있는 병입니다. 치료제가 있다 하나 완치가 쉽지 않고 만성 간염과 간 병변, 간암으로 악화합니다. 불행한 소식은 갈수록 환자가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C형 간염 신규환자가 2002년 1927명에서 2010년 5630명으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B형 간염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2012년을 기점으로 C형 간염이 앞지르고 있습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지역적 편차입니다. 2015년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 기모란 교수팀이 건강보험공단 유병률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국적으로 광역단체로는 부산, 기초단체로는 전남 진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전국 평균보다 부산은 2배, 진도는 5배나 높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해마다 수천 명씩 누군가 몹시 황당하고 억울한 과정을 통해 C형 간염에 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고리는 단연 혈액입니다. C형 간염은 술잔이나 키스, 가벼운 성생활 등 일상적 접촉으론 거의 옮기지 않습니다. 타액이나 정액보다 혈액을 통해 주로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로든 다른 사람의 혈액이 나의 혈액과 섞이는 상황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것은 에이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지 사례별로 알아봅니다. 주사기 주사기는 그냥 한 번 찔리기만 해도 걸릴 수 있습니다. 감염자를 찌른 주사기에 의료인이 사고로 찔린 경우 대략 1~3%에서 감염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의 양입니다. 감염자의 혈액이 많이 들어갈수록 확률이 증가합니다. 단순히 바늘에 찔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처럼 수액을 통해 역류한 피가 섞여 들어갈 경우 확률이 수십 배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번 경우는 예외지만 주사기는 대부분 병원 밖에서의 사용이 문제입니다. 마약 등 약물 중독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 부산에서 C형 간염 환자가 많은 것도 국제 항구란 지역의 특성상 마약 사용자 비율이 높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사기는 일회용을 써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B형 간염 환자가 국민병이라 불릴 정도로 창궐했던 이유도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전염병 단체 접종을 하던 과정에서 지금처럼 일회용이 아닌 주사기로 수백 명을 찔렀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침과 문신 침을 맞거나 피어싱 혹은 문신을 새길 때 반드시 바늘 등 시술 도구가 제대로 소독된 것이지 확인해야 합니다. 까다롭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환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부분 일회용을 쓰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다른 사람을 찔렀던 도구를 나에게 찌르려 하는 경우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전남 진도에서 C형 간염이 전국 평균 5배나 많았다는 사실은 이들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허술하게 침과 문신 시술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문신의 경우 도구만 소독해선 안 됩니다. 바르는 문신용 염색약에 바이러스가 묻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바늘이나 침 등 도구를 일회용이나 소독된 것으로 사용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염색약도 일회용으로 조금씩 덜어서 사용하는 게 옳습니다. 이 부분은 보건당국이 좀 더 철저하게 감독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면도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대부분 안전합니다. 그런데 간혹 실수로 피부에 생채기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가 아주 위험합니다. 피부에 스며든 혈액이 면도날에 묻게 되는데 만일 이를 제대로 소독하지 않고 다음 손님에게 면도하다 또 생채기가 나면 감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달아 실수로 생채기를 낸다는 게 확률적으로 드물지만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느 경우든 이발소의 면도기도 다른 손님에게 사용하기 전 철저하게 소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접촉 일상적 성접촉은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는 배우자 중 한 명이 C형 간염이라도 다른 배우자가 콘돔을 써야 한다고 권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접촉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얌전한 성접촉은 괜찮습니다. 에이즈와 달리 정액이나 질액으로 옮길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그리고 다소 격렬한 성접촉 시 성기 점막의 상처를 통해 혈액이 묻어나올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실제 캐나다 보건성의 조사결과 20년 이상 부부생활을 할 경우 2.5%의 확률로 배우자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가능하면 콘돔을 착용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섹스 파트너가 많다거나 항문성교 등 비전형적 성행위를 즐기는 경우 감염 확률이 급증합니다. 이 경우 콘돔 착용은 필수입니다. 특히 여성이 생리 중인 경우 성접촉은 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안전합니다. 칫솔과 손톱깎이 감염자가 사용하는 칫솔과 손톱깎이를 같이 사용하면 안됩니다. 특히 잇몸 질환으로 구강 출혈이 있는 경우라면 칫솔로 인한 감염 확률이 급증합니다. 손톱깎이의 경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톱을 깎는 과정에서 생긴 피부의 상처를 통해 소량의 혈액이 묻어날 수 있습니다. C형 간염의 잠복기는 6주에서 9주로 보고 있습니다. 대개 C형 간염은 초기 증상이 없어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에게 피로와 입맛 떨어짐, 구역과 구토, 근육통과 미열, 소변 색깔이 진해지거나 피부와 눈이 노랗게 변하는 황달이 생긴다면 바로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C형 간염 진단이 내려지면 나에게 6주에서 9주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따져보기 바랍니다. 증세가 늦게 나타나 진단이 뒤늦게 내려질 수도 있으므로 수개월 전까지 기억을 더듬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주사기가 되었건 침이나 문신이 되었건 어떤 경로를 통해 나에게 다른 사람의 혈액이 섞여 들어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적절한 배상 등 개인적 억울함을 풀 수 있고 무자격이든 비양심이든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C형 간염을 확산시키는 주범들을 색출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016-04-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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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시간 속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라
-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건넌방에서는 아버지가 계신다./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중략)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하략)“ 신경림(80)의 시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충북 충주 태생인 그는 이 시에서 아무리 옮겨 살아도 어릴 적의 이 그림이 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가고 딴 세상을 헤매다가도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시는 “사랑방과 건넌방과 헛간과 안방을 오가면서/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면서/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로 끝납니다. 사람은 살면서 집을 얼마나 옮기는 것일까? 알고 보면 순전히 자의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집을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경림처럼 자신이 살았던 집의 주소를 이렇게 줄줄이 댈 수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기호와 지향에 맞춰 집을 옮길 수 있다면 좋겠지요. 더욱이 노년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스스로 집을 짓거나 고쳐서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집은 개인과 그 가족에게 하나의 우주입니다. 우주는 집 宇, 집 宙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뜻은 같다 해도 宇는 상하사방이라는 공간, 宙는 고금왕래라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공간 속의 집만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은 시간 속에도 집을 짓습니다. 대장부 사해위가(大丈夫 四海爲家), 대장부는 천하를 자기 집으로 삼는다는 것은 공간 속의 집에 관한 말입니다. 맹자가 대장부를 논하는 글의 맨 앞에 나오는 “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居天下之廣居]라는 말도 공간 속의 집을 말합니다. 정정당당하고 구차스러움이 없는 인격을 천하의 넓은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학문과 기예 등에서 일가(一家)를 이룬다는 것은 시간 속의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아주 뛰어나 본받을 만한 사람을 뜻하는 대방가(大方家)나 전문가라는 말에도 시간 속의 집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 천지자연과 시간 속에서 하나의 나그네입니다. ‘하이쿠의 성인[俳聖]’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시에 “해와 달은 영원한 과객이고 오가는 세월 또한 나그네”라는 게 있습니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영원한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이백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와 아주 흡사합니다. 바쇼에게는 자연도 시간도 과객이고 인간은 나그네였습니다. 삶은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의 길이며 집이란 그 방랑의 편의와 일정한 휴식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었습니다. 바쇼는 방랑 속에서 만난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삶의 의미를 추출함으로써 불후의 시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바쇼처럼 살 수 있는 자유인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안락하고 편한 집을 정처(定處)로 마련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방위와 향을 보고, 산의 남쪽 물의 북쪽, 이른바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양지를 고르려고 애를 씁니다. 산남수북을 양(陽)이라 하고 그 반대인 산북수남을 음(陰)이라고 구분하면서 길지를 찾곤 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물자리부터 보라”거나 “집이 망하면 지관 탓만 한다”거나 “훌륭한 집을 나쁜 땅에 세우는 자는 스스로를 감옥에 맡기는 자다”라는 각국의 속담과 격언은 다 입지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 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을 찾는 것은 집을 지을 때나 묘 자리를 고를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지형과 지세를 살펴 땅을 골랐습니다. 집을 짓거나 살 때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기준은 이웃입니다.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百萬買宅 千萬買隣]는 말이 있습니다. 의 권학편에는 “군자는 사는 곳은 반드시 좋은 환경을 고르고 교유하는 사람은 반드시 학덕이 있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居必擇鄕 遊必就士]는 말이 나옵니다. 둘 다 이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명언입니다. 요즘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집을 짓고 모여 사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아동문학가 강지인의 시 ‘집’이 그런 집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비바람 막아주는 지붕,/지붕을 받치고 있는 네 벽,/네 벽을 잡아주는 땅,/그렇게 모여서 집이 됩니다.//따로 떨어지지 않고/서로 마주 보고 감싸 안아/한 집이 됩니다./아늑한 집이 됩니다.” 이웃에 대한 생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큰 집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의염치와 청빈을 중시하던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큰 집은 죽음을 부르고 작은 집은 복을 부른다”고 합니다. 큰 집을 뜻하는 옥(屋)은 尸(주검 시)와 至(이를 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은 집을 뜻하는 사(舍)는 人(사람 인)과 吉(길할 길)로 구성돼 있으니 단순한 말장난이나 문자 풀이 같지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선비 김정국(金正國)이 이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시인 조지훈의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고루거각이든 용슬소옥이든 본디 일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떠메고 다닐 수 없는 것이매 집 이름도 특칭 고유명사가 아닐 수 없으나 나의 방우산장은 일정한 장소, 건물 하나에만 명명한 것이 아니고 보니 내 몸을 담아 그 안에서 잠자고 일하며 먹고 생각하는 터전은 다 방우산장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용슬소옥(容膝小屋)이란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만한 작은 집을 말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는데, 모든 사물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면 시간 속에 오래 남습니다.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집이 크거나 작은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글 ‘집’을 인용합니다. “집이란 크다고만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만 불편한 것도 아니다. 집에는 질서가 깃들여야 한다. (중략) 집이란 지나치게 빈틈없이 꾸며졌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키 어려운 것, 설령 제한된 비좁은 공간일망정 터진 곳이 있어야 하며 또한 막힌 곳이 있어야 한다. 집이란 패각(貝殼)과도 같아 완벽해야 하나 그 속에서는 생명이 울려야 한다. 마치 그 속에 바다의 물소리가 울리듯이.” 이제 다시 꽃 피는 봄입니다. 계절의 어김없는 순환을 보며 집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합니다. 꽃이 가득한 집이 그립고, 시간 속에 오래가는 자신만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 2016-04-12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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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민의 웰빙 골프] 골프 스윙은 창조하는 것이다
- 지난 오십여년 동안 골프를 배우고, 스윙 원리를 연구하고, 또 가르쳐 온 경험에서 깨달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 골프의 샷은 모두 창조적이라는 점이다. 그 많은 샷을 연습했어도 골프 샷은 반복할 수 없고 실행되지도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이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지금 샷을 하는 이 순간과 플레이하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샷은 자신에게 오직 이번 한 번의 기회뿐이다” 라는 말은 골퍼라면 누구나 쉽게 들어 왔고 다른 골퍼에게도 해주었던 말이다. 하지만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샷 하기 전, 항상 이미지를 새겨라 최선의 샷을 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샷을 창조해야 하는데 클럽을 쥔 손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샷을 반복할 수 있거나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샷을 실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실제로 이를 달성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항상 같은 샷의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할수록 샷의 결과는 좋아지지 않고 골프 수준도 낮아진다. 아무리 연습 스윙을 잘하더라도 실제 샷을 구사했을 때 연습 스윙처럼 좋은 스윙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복하려고, 자동화되도록 스윙 연습을 하기보다는 항상 샷을 할 때마다 상황에 맞는 샷을 구상하고 실행할 때 마음과 몸이 일체화되어 활성화되는 능력이 더해져 골프 수준을 높일 수 있게 된다. 샷을 준비하고 창조적인 샷을 구사하려 의도해, 특히 오른쪽 두뇌가 활발하게 활동할수록 골프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아무런 생각없이 샷을 하게 되면 오히려 골프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준비된 골퍼라면 샷을 하기 전에 항상 이미지를 마음에 새기고 샷을 실행해야 한다. 반대로 샷에 대한 이미지가 없다면 실행할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연 창조적인 샷을 어떻게 구사할 수 있나? 창조적인 골프 샷은 골퍼가 샷을 하기 전에 또는 샷을 하는 도중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만들 수 있다. 샷을 결정하기 전, 스스로에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원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단순히 페어웨이 중앙이나, 그린, 아니면 홀에 공을 넣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거리, 방향, 위치까지도 세세하게 떠올려야 한다. 특히 공 뒤에 서서 일정하게 호흡하며 표적을 보면서 자신이 의도하는 목표를 구체화할 때 창조적인 샷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어서 표적에 대한 몸과 클럽의 겨냥을 시작한다. 이때 운동 수행에 대한 각성(arousal) 수준과 강도는 반드시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 샷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호흡이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샷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샷을 마칠 때까지 수준이 같아야만 한다. 목표에 공이 떨어지지 않아도 실망 마라 어드레스를 준비하는 과정이 일관되어야 창조적인 스윙과 샷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더욱 창조적일수록 향상된 골프 수준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심리적 준비 과정은 또한 마음속으로 표적을 보는 것과 날아가는 공이 표적에 떨어지는 것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포함한다. 마음속으로 표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창조적인 스윙을 하기 전에 반드시 그려내야 하는 이미지이고, 이러한 과정은 골퍼에게 자신감을 높여주며 강력한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날아간 공이 표적에 떨어지는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의미는 샷을 하는 과정에서 공을 컨트롤하려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자신이 설계한 창조적 스윙과 샷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느낌에 따라서, 임팩트하는 순간 손으로 전달되는 타구감으로 스윙과 샷을 조작하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공이 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기보다는 다음 기회에 창조적인 스윙과 샷을 구사하려는 노력을 하기 때문에 골프가 우리에게 더욱 흥미를 불러온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모든 샷이 어디로 날아가는지를 알고 있다면 아마 골프가 재미 없어질지도 모른다. 창조적인 샷을 위한 준비과정을 다시 요약하면 규칙적으로 호흡하기, 표적과 날아가는 공이 표적에 떨어지는 이미지 그리기, 표적을 보며 방향 설정하기, 풀 스윙으로 거리에 적합한 연습 스윙하기, 표적에 대한 클럽과 자세 겨냥 점검 재점검하기, 그립 다시 쥐기, 올바른 스탠스 취하기, 심리적 압박감 느끼기, 항상 같은 순서로 준비하기 등이 일관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골프 샷의 구성요인은 클럽 움직임의 시작과 끝, 두 가지를 꼽는다. 골프 기술의 습득 방법과 실행을 운동학습이론서인 (Proctor & Dutta, 1995)에서 제시한 일반적인 운동 기술 습득 과정에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복잡한 동작이 요구되는 과제를 수행하려면 더 큰 프로그래밍 시간이 요구된다. 골프 스윙 동작 자체가 복잡하고 정교하므로 이를 정확하게 수행하려면 공 뒤에서 표적을 보며 준비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운동 프로그램은 항상 공 뒤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2. 움직임은 단순히 인체의 각 관절의 협응이 아니라 공간과의 협응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움직임은 마음, 뇌와 신체가 의도할 때 시작되며 각 관절의 운동 범위와 근육의 수축과 이완 비틀림은 이에 수반될 뿐이다. 클럽을 스윙할 때 동원되는 각 관절들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움직이는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에 유연하게 연결된다. 흔히 타이밍으로 표현되는 말이다. 클럽 핸들의 움직임을 주목해보면 공간에서 바람직한 경로를 따라 이동할 때 공을 향한 또한 표적을 향한 효율적인 클럽헤드의 경로와 스윙 플랜을 구사할 수 있다. 만약 균형을 취하고 있으며 표적을 향한 피니시 자세를 한다면 스윙에 동원된 각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운동한 것으로 보면 된다. 3. 움직임의 오류는 물리적으로 파워를 만들려고 하기 전에 찾아낼 수 있다. 운동 수행중이라도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자기교정(self-correction)이 가능하다. 스윙하는 중에 몸의 균형을 잃거나 임팩트하는 순간 클럽페이스 스윗 스팟에 공이 맞지 않아 스윙을 다하지 않거나 그립 쥔 손을 풀었어도 날아가는 공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4. 야구 배팅을 보면 스윙을 시작하기 전 초기 동작에서 다양한 동작을 볼 수 있다. 배트의 각도, 스윙을 시작하는 위치, 핸들의 위치가 선수마다 달라도 임팩트 순간은 거의 같다. 골프 스윙도 마찬가지다. 골퍼마다 다양한 스윙 방법과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임팩트 순간은 같다. 하지만 골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요인은 시작이다. 클럽을 공 뒤에서 표적 반대 방향으로 가져갈 때 처음 10cm를 중요한 구간으로 강조한다. 만약 이 구간이 바르지 않았다고 느껴지면 스윙하는 중에 스스로 교정하게 된다. 5. 골프 클럽을 쥔 두 손이 스윙을 시작할 때 같이 움직이지 않고 따로 움직여도 스윙을 마쳤을 때 즉, 피니시했을 때에는 두 손이 함께 움직인 것을 볼 수 있다. >>글 박영민 전 고려대 교수 국내 골프칼럼니스트 1세대. 고렫대와 한국체육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방송해설은 물론 일간지, 스포츠지 등에 많은 칼럼을 연재했다. '골프의 이론과 실제', '골프'(체육고등학교 교재)등 저서도 다수.
- 2016-03-3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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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온뒤 칼럼] 발암물질에 대한 세 가지 오해
-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소시지와 햄 등 가공육을 발암물질(carcinogen)로 지정하면서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소시지와 햄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당장 암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많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세계보건기구의 발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발암물질에 대해 알아봅니다. 발암물질이란 말 그대로 암을 일으키는 물질입니다. 세계보건기구는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산하기관인 국제암연구소(IARC)를 통해 발암물질을 지정합니다. 크게 3가지 그룹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1군(Group 1) 발암물질입니다. 사람에게 확실히 암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있는 물질입니다. 여기엔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발암물질이 포함됩니다. 현재 118가지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담배와 방사선, 라돈과 석면가루, 벤젠 등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위장 속에 사는 세균인 헬리코박터와 간염바이러스, 햇볕과 공기 오염, 소금에 절인 생선 등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술과 경구피임약, 폐경기 때 처방되는 에스트로겐 호르몬도 1군 발암물질입니다. 이번에 소시지와 햄 등 가공육이 추가됐습니다. 1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술입니다. 사람들이 술은 암과 크게 관련이 없다고 믿지만 사실 가장 과소평가된 발암물질입니다. 대부분 암에 술은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담배와 함께 우리 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광범위하면서 강력하게 암을 일으키는 게 술이란 점을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두 번째, 2군 A(Group 2A) 발암물질입니다. 흔히 발암 추정물질(probable carcinogen)로 불립니다. 동물에선 증거가 충분하나 사람에겐 부족한 경우입니다. 75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교대근무와 고온에서 기름으로 튀기는 요리입니다. 이번에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 붉은색 살코기가 추가됐습니다. 발암물질에 교대근무와 같은 생활양식이 포함된 것이 재미있습니다. 실제 교대근무는 호르몬 균형의 파괴로 유방암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건강을 위해 교대근무는 가능한 한 줄이고 꼭 해야 한다면 시계 방향으로 그러니까 ‘오전 → 오후 → 야간’으로 근무하는 게 좋습니다. ‘오전 → 야간 → 오후’의 시계방향 반대로 교대 근무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2군 B(Group 2B) 발암물질입니다. 흔히 발암 가능 물질(possible carcinogen)로 불립니다. 인간에게 제한적 증거(limited evidence)가 있고 동물에서도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less than sufficient) 경우를 말합니다. 모두 288가지가 있는데 여기엔 놀랍게도 커피와 김치(pickled vegetables in Asia), 코코넛 오일, 스마트폰의 전자파와 자기장이 포함됩니다. 커피가 방광암을 일으키고, 미미한 수준이지만 전자파가 뇌종양과 백혈병과 관련이 있다는 보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종 발암물질을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의 느낌은 어떠하신가요? 복잡한 화학물질뿐 아니라 뜻밖에 발암물질이 아닌 듯한데 발암물질인 것들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발암물질과 관련해 세 가지 오해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발암물질=암 발생’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아닙니다. 발암물질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물질에 노출된 사람과 노출되지 않은 사람이 나이와 직업, 성별 등 다른 요인이 동일하다 가정할 때 암에 더 많이 걸리거나 혹은 더 일찍 발생하면 그것이 바로 발암물질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발암물질은 확률의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절대 100%가 아닙니다. 즉 A란 물질에 노출됐을 때 암 발생확률이 1%만 올라가도 혹은 1년만 일찍 발생해도 발암물질로 지정된다는 뜻입니다. 담배를 피운다고 모두 암에 걸리진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헬리코박터란 세균을 살펴볼까요? 헬리코박터는 1급 발암물질입니다. 세균이 위장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위암에 걸릴 확률이 4배 정도 높습니다. 여기서 4배란 확률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국가암정보센터가 공개한 우리나라 위암 발생률(10만 명당 41.4명) 자료를 토대로 풀어보면 헬리코박터 비감염자는 해마다 대략 인구 1만 명당 1명꼴로 위암이 생기지만 감염자는 1만 명당 4명이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각 1명과 4명이니 발생률은 4배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4배란 400% 차이입니다. 작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 비율입니다. 절대적 숫자로 살펴볼까요? 헬리코박터에 감염됐다 하더라도 1만 명 가운데 4명의 위암 환자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거꾸로 9996명은 괜찮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위암은 발생했다 하더라도 일찍 발견해 치료하면 대부분 완치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발암물질이란 무시무시한 용어로 무장한 헬리코박터에 대해 너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발암물질은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일 뿐 노출이 곧 암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두 번째 오해는 양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발암물질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해물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물에 청산가리를 섞어 마신다면 죽을까요? 반대로 맹물만 마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청산가리를 섞으면 죽고 맹물을 마시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대답한다면 틀릴 수 있습니다. 양에 관한 문제를 따져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산가리를 섞지만 1pg, 그러니까 10조 분의 1g만 섞는다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청산가리가 치명적인 독극물이지만 분자 수준의 극미량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부분의 유해물질에 기준치를 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섭취량과 이해득실에 따라 판단해야 요즘 같은 공해환경시대에 유해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식품을 기대하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오해하진 마십시오. 환경오염을 내버려두자는 뜻이 아닙니다. 환경보전을 위해 노력하되 기준치에 훨씬 못 미치는 유해물질에까지 강박적으로 건강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는 뜻입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맹물만 마셔도 죽을 수 있습니다. 양의 문제입니다. 아무런 미네랄이 섞이지 않은 맹물만 수십 리터를 마신다면 치명적인 저나트륨혈증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발암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햄과 소시지 같은 가공육을 매일 50g 이상 섭취 시 직장암 발생률이 18% 증가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루 평균 가공육 섭취량은 2013년 국민 영양조사결과 6.0g에 불과합니다. 세계보건기구는 붉은색 살코기를 매일 100g 섭취 시 암 발생률이 17% 증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평균 62g의 고기만을 먹고 있습니다. 가공육이든 붉은색 살코기든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가공육이나 붉은색 살코기가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적게 먹는 경우 암 발생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발암물질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발암물질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해득실을 따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1군 발암물질 가운데 사이클로스포린(cyclosporine)이란 약이 있습니다. 장기이식 후 거부반응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면역 억제제입니다. 이 약을 오래 쓰면 암 발생률을 높이므로 발암물질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약을 쓰지 않으면 수술 후 단 며칠 만에 이식 거부반응으로 숨질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시행하는 CT와 PET 등 방사선 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1군 발암물질인 방사선을 이용합니다. 검진 목적으로 이들 검사를 자주 받아선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내가 증세가 나타날 때 어떤 질병인지 알기 위해서 혹은 수술 후 재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이들 검사를 받는 게 좋습니다. 전체적으로 그게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햄과 소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면 적게 먹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정말 햄이나 소시지를 좋아한다면 조금 드시는 것도 무방합니다. 현실적으로 그것 때문에 암에 걸릴 확률은 매우 낮을뿐더러 본질적으로 우리 인생이 단순히 암에 안 걸리고 오래 살기 위한 경기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 2016-03-2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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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장수식유(藏修息遊), 쉬고 노는 게 다 공부다
- 사서오경 중 하나인 의 학기(學記)편은 배우고 익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옥은 쪼고 닦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리를 모르게 된다”는 말이 여기에 나옵니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성어와도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학기의 여섯 번째 문단이 제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학기에 나오는 대학이 오늘날의 대학교와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큰 배움, 제대로 된 공부라는 뜻일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대학의 교육은 철에 따라 바른 학업이 있다. 즉 봄 가을에 예악(禮樂)을 가르치고 여름 겨울에 시서(詩書)를 가르친다. 물러가서 쉴 때에도 반드시 배움을 함께 해야 한다. 한가하게 쉴 때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소리가 아름답게 될 수 없고, 여러 방면으로 넓게 배우지 않으면 시를 잘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갖가지 예복을 입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예절을 잘 행할 수 없는 것이니 그 예능이 흥겹지 않으면 배움이 결코 즐겁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말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배운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藏焉] 익히고 실천하며[修焉] 물러가 쉬면서 학예를 익히고[息焉] 놀면서 견문을 넓힌다.[游焉]” 이른바 장수식유(藏修息遊)입니다. 부분적으로 다르게 해석한 글도 있지만, 장수식유는 공부의 네 가지 양태나 방식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학제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정해진 학기나 제도교육 내에서의 공부란 장과 수에 직결된 일인 것 같습니다. 주어진 교재로 공부하고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해결하는 공부이지요. 학생들은 이를 통해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고, 다음 진도와 윗 단계에 적응해 갑니다. 그러나 제도교육에서 졸업했거나 삶을 바꾸어 새로운 공부를 하는 사람들, 시니어들의 공부는 그 뒤의 두 가지, 식과 유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학생 시절의 공부란 학위 취득이나 입학 취직 등 ‘지식의 증명’을 위한 성적 향상이 그 목표입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교육(敎育)은 가르치는 것과 심신을 기르는 것을 뭉뚱그린 말인데, 우리는 지금 가르치고 배우는 것만 중시하고 심신을 기르는 일은 뒷전으로 젖혀둔 채 돌아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과 저것을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보거나 하나에 충실하면 다른 하나는 버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적 지상, 서열 중심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불행하고 힘든 일입니다. 제도교육의 틀과 둘레 안에서 ‘성적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시니어들의 공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더욱이 자기실현 욕구가 크고, 지나온 삶과 배움에 대한 반성과 개선 의지가 강한 데다 새로운 기능과 교양 습득을 희망하는 신중년세대에게는 공부의 의미가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사상 어떤 세대보다 더 이 세대는 그 나이에 아직도 젊고, 그 나이에 여전히 공부를 하고 싶어 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의 첫 말씀이 시니어들의 즐거움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시니어들의 공부란 예전의 자신이나 예전 세대의 시니어들과 달리 놀면서 쉬면서 하는 공부, 즉 유(遊)와 식(息)의 공부요 잘 놀고 잘 쉬기 위해서 하는 공부, ‘눈뜬 공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차이와 구별을 잘 알아야 공부에 성공할 수 있고 새로운 공부를 통해 삶의 보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니어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꼭 그래야 좋은 것도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지식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으로 얻어지지만 지혜는 하루하루 덜어내는 것에서 얻어진다고 합니다. 시니어들에게는 즐기면서 쉬면서 하는 공부, 덜어내는 걸 배우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어떤 공부든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해(大海)를 향하는 물처럼 날마다 꾸준해야 합니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쓴 의 학행(學行) 대목에는 “모든 냇물은 바다를 배워 바다에 이르고, 구릉은 산을 배우지만 산에 이르지 못한다.”[百川學海而至於海 丘陵學山不至於山]는 말이 있습니다. 구릉은 왜 산이 되지 못할까? 움직이고 이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도 그렇게 쉬지 않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런데 시니어 공부의 가장 큰 특징은 남과 공유하는 공부, 배워서 남에게도 주는 공부라는 점입니다. 후배나 제자를 가르치든 동료들과의 사교와 교류에서든 시니어의 공부는 남과 함께 더불어 즐기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이 ‘내 삶의 가락’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제처럼 젊음이 만개한 이화의 교정에서 내가 배운 가장 커다란 진리의 하나는 배우는 것은 자유에 속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무거운 의무에 속한다는 진리다.” 그분은 교육자였으니 이렇게 직설적으로 엄중하게 말했겠지만 교육자가 아닌 누구라도 선배세대는 후배를 이끌고 가르치는 데 소홀하면 안 됩니다. 남을 가르치고 뭔가 일러주는 것은 실상 자기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후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세네카는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했습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입니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자기 학업의 반을 차지한다는 ‘효학반(斅學半)’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예기에는 “배운 연후에야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야 어려움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학문의 어려움을 알면 힘써 공부하게 되고 가르치다 보면 학문의 어려움을 알게 돼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후배세대에 대한 시니어들의 교육은 주입이나 설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경험을 제시하고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는 게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특히 평소 교육직에 종사해온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1919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브룩스 애덤스(1838~1918)는 “퇴직한 교육자처럼 지루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신이 지루한 게 아니라 남들에게 지루한 사람이 된다는 경고인데,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는 “배우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받아서 시니어들은 “잘 배우기 위해서 살고, 잘 살기 위해서 배운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삶의 경험과 지식의 절대량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의미와 질적 수준, 품질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스승에게서 배우는 곳이다. 스승이 있은 뒤라야 학교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다산 정약용이 에서 한 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스승은 우리 삶의 도처에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학교에 가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학교가 멀지 않고 학창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학교에 갑니다.
- 2016-03-08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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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이문재 시인, "중·장년들이여! 행복한 미래를 위해 고민하라"
- 이문재(李文宰·57) 시인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2014년 을 펴내며 이런 말을 썼다.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시를 나 혹은 너라고 바꿔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그러다 보니 지금 여기 내가 맨 앞이었다.’ 지금 여기 맨 앞에 선 그는 를 통해 실천하는 지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평소 자본주의 시대의 생태계와 소비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 일간지에 실린 짧은 서평을 보고 를 읽게 됐다. 책의 저자인 하랄트 벨처(독일 사회심리학자)라는 인물은 낯설었지만, 내용은 익숙하리만큼 그의 시집과 같은 맥락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해 많은 책을 읽었는데, 새로운 미래에 관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제가 갖고 있던 에콜로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됐고, 특히 자본주의를 소비사회의 틀로 분석한 것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쓰는 칼럼들도 어떻게 소비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죠.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을 건드려 주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을 확대해줘서 처음부터 끝까지 메모를 해가며 읽었습니다.” 하랄트 벨처는 미래를 되찾으려면 효율성과 소비, 성장에 기초한 삶에 대해 저항하고 삶의 기준을 행복과 지속가능성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스스로 생각하기, 스스로 행동하기’를 통한 실천적 저항을 제안한다. 이 교수 역시 이러한 제안에 동의하며, 무엇보다 우리 시대 중·장년의 각성과 의미 있는 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기성세대가 좋은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후손들의 미래는 없는 거잖아요.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후기 산업사회, 절정을 달리고 있는 자본주의가 누리고 있는 풍요가 미래세대의 것을 일방적으로 수탈한 셈이라고 생각해요. 지구의 자원은 미래세대와 공유하고, 남겨줘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함부로 소비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중·장년세대가 뼈아픈 각성을 해야 해요. 는 그런 이들에게 우리가 누리는 물질과 풍요는 어디서 왔는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미래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행복 책에는 가치가 실천을 이끌어내는 시대를 지나, 실천이 가치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실천해야 하는 것과 그들이 궁극적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을 한 리서치를 통해 설명할 수 있죠. 경희대학교 학생 1만4000명이 참여한 ‘미래대학리포트’를 살펴보면 ‘현재와 50년 후 미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1순위가 모두 ‘행복’이에요.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죠. 우리 아이들이 느끼고 있을 불행에 대해 기성세대들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행복한 미래를 위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흔히들 청년세대에게 "너희는 왜 꿈이 없느냐. 도전하지 않느냐"고 꾸짖지만, 이 교수는 그러한 행동은 가혹하다고 말한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너는 왜 비타민을 먹지 않느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굶어가는 사람에게는 물을 먼저 마시게 하고, 조금씩 먹여가며 기운을 차리게 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저항 역시 청년 세대를 질타하는 것이 아닌, 기성세대의 행동이 솔선수범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기성세대와 행복한 미래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청년세대의 실천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청년들로 하여금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말하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요. 내가 안드로이드를 안 쓰고 애플을 쓰면 쟤들하고 다르다. 폭스바겐을 타지 않고 아우디를 타면 다르다. 어느 지역에 사는 것, 어떤 옷을 입는 것 모든 것이 소비를 통해서 신분, 계층, 삶의 질이 구분되고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소비하는 것에 대한 반성, 성찰 그리고 올바른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런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바깥에서 덜 소비하면서 살아도 얼마든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줘야죠.” 에세이 쓰면 삶의 의미를 발견 할 수 있어 그는 생태와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몇몇 사람의 운동이나 캠페인 정도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누구나 예외일 수는 없다. 중금속, 방사능, 초미세 먼지 등 이미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환경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그는 결국 정치라고 말한다. “이때의 정치는 여의도 정치, 청와대 정치 이런 게 아닙니다. 자기 정치를 의미하죠. 책의 서두에 실린 ‘성공적인 저항을 위한 12가지 지침’ 중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정치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정치적 주체로 나서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정치의 주체는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법칙을 만들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이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정치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책임을 지되, 그것을 표현해야 해요. 표현하지 않으면 타인과 만날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과정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죠.” 의 부제는 ‘스스로 생각하라’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의 본보기가 될 만한 다양한 사례들을 담았다. 이 교수가 실천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시를 쓰는 거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서 어떻게 시를 쓰겠어요. 또,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자주 걸어 다니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글쓰기 강연을 하고 있어요. 서울시와 함께하는 서울시민대학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위한 글쓰기’라는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특히 은퇴 전후 중·장년층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국가와 사회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도 안 되고요.” ‘자기 성찰과 재탄생’이라고도 불리는 이 강좌를 통해 수강생들은 10편의 짧은 에세이를 쓰게 된다. 5편은 과거 삶에 대해, 3편은 현재, 나머지 2편은 미래에 관해 쓰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담아낸 10편의 에세이를 묶어 놓으면 한 권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다. “특히 중년 남성분들의 경우 공통적인 반응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등을 쓰라고 하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기업 임원 은퇴자든, 교수든, 공무원이든 살아오면서 그런 순간을 떠올려본 적이 없다며,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노라 말하죠. 글쓰기 과정을 통해 스스로 인생의 기승전결을 구성하다 보면 삶의 의미가 만들어져요. 누구나 그 안에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회가 그것을 못 돌아보게 했던 거죠.” 중·장년 수강생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대부분이 미래에는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환원하고 봉사하며 살겠다고 쓴다는 것. 이 교수는 그런 이들이 같은 책을 읽으면 남다른 깨우침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돼요. 이를 통해 그동안 의미 있게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미래 세대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되죠. 누구나 그럴 수 있을 텐데, 그걸 알게 해주는 촉매제나 불씨가 없이 살아왔을 뿐이에요. 책에는 3~5퍼센트 법칙이 나옵니다. 각 분야의 3~5퍼센트가 다른 생각을 가지면 사회가 변한다는 거죠. 저는 우리 기성세대의 3~5퍼센트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미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만들어가길 희망하고 있어요.”
- 2016-02-1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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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온뒤 칼럼] 체온 1도 내려가면 면역력이 30퍼센트 떨어진다?
- 체온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체온이 1도 낮아지면 면역력이 30퍼센트 떨어진다고 한다. 암세포는 35도에서 가장 증식을 활발하게 한다고 한다. 결론은 체열을 통상적인 정상온도 36도보다 높은 37도가량 유지해야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체온면역설이다. 요즘 신문과 방송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일본에서 유래했다. 일본 의사 사이토 마사시가 쓴 란 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10년 출간 이래 일본에서 80만권이나 팔렸다고 한다. 사이토 마사시는 일본인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종양내과 전문의다. 그는 이 책에서 체온이 1도 내려가면 면역력이 30퍼센트 떨어지고 반대로 1도 올라가면 500~600퍼센트 올라간다고 강조한다. 이론적 토대는 일본의 면역학자 아보 도루박사가 제시했다. 일본 니가타대 의대에서 면역학을 가르치는 그는 체온저하가 교감신경을 활성화하고 이것 때문에 백혈구 가운데 림프구가 감소하면서 면역이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2004년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을 통해서다. 우리나라에선 한의학을 중심으로 체온면역이론이 중시되고 있다. 2015년 12월 14일자 한 신문에 따르면 메르스 유행 시 환자들의 체온이 신기하게도 36.5도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의사의 고백이 나온다. 처음에는 체온계 고장을 의심했지만 체온계는 정상이었고 환자들의 체온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폐암을 앓다 완치된 환자의 사례도 나온다. 진단 시 체온이 35.8도였지만 수술과 생활습관으로 완치되어 11년째인 요즘 37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르스나 폐암이 체온저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한다. 과연 체온과 면역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정말 체온이 떨어지면 질병에 걸리고 체온을 높이면 건강에 도움을 줄까? 나는 체온면역설이 몇 가지 관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들이 말하는 체온의 정의가 모호하다. 알다시피 체온의 종류는 다양하다. 구강체온, 직장체온, 피부체온까지 측정 부위에 따라 다르다. 생리학 교과서를 보면 직장체온은 대단히 안정적이다. 나체로 건조한 공기에 노출될 때 11.7도에서 54.5도까지 0.6도 안팎으로 일정한 체온을 유지한다. 구강과 직장에선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극심한 추위에선 35.6도까지 떨어지고 극렬하게 운동할 땐 40도까지 오를 수 있다. 피부체온은 가장 변동 폭이 크다. 보통 적외선 카메라로 측정하는데 외계온도에 따라 10도 이상 춤을 춘다. 추운 겨울에 재면 내려가고 더운 여름에 재면 올라간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피부체온이 대개 구강과 직장보다 낮게 나온다는 것이다. 피부체온은 실온에서 잴 때 보통 33도이며 구강체온은 36도, 직장체온은 37도를 보인다. 기사에 말하는 메르스 환자의 체온을 어떤 방식으로 쟀는지 궁금하다. 당연히 동일한 환경에서 측정해야 한다. 그러나 기사에선 누가 몇 명을 대상으로 어떻게 측정했는지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피부체온이라면 당연히 낮게 나올 수 밖에 없다. 둘째 면역의 정의가 모호하다. 면역은 대단히 어려운 주제다. 아직까지 면역을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검사는 없다. 백혈구 숫자나 아드레날린 수치 등 몇 가지 작은 지표 하나를 갖고 면역이 올라갔다 혹은 내려갔다 단정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면역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이토 마사시의 책을 구석구석 읽어보았지만 어디에도 면역이 어떤 방법으로 측정한 것인지 설명이 없다. 대단히 단순하게 서술되어 있다. 14페이지에 “체온이 1도만 내려가도 면역력은 30퍼센트나 떨어진다”라고 나와 있다. 앞뒤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20퍼센트도 아니고 40퍼센트도 아니고 하필 30퍼센트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15페이지엔 “반대로 체온이 1도 올라가면 면역력은 무려 500~600퍼센트 올라간다”고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 설명이 없다. 숫자에 대한 설명은 물론 왜 그러한지 기전에 대한 설명도 없다. 나의 말이 곧 진리니까 그대로 믿으라는 것처럼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보 도루 박사의 책에선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는 백혈구 안에 림프구와 과립구 숫자의 비율로 설명했다. 체온이 내려가면 교감신경이 흥분하면서 림프구의 비율이 줄고 그래서 면역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면역=림프구 비율’로 바라보는 단순함에 놀랐지만 그래도 약간이라도 그럴 듯한 설명을 해준 게 어딘가 싶다. 마찬가지로 그의 책 어디에서도 30퍼센트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답답하다. 셋째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경우다. 설령 그들의 주장이 백번 옳아 체온이 떨어지면 면역이 떨어진다고 해도 체온저하가 정말 면역저하의 원인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단순히 통계적 연관성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 질병이 있거나 몸이 안 좋으면 체온이 떨어질 수 있다. 체온저하는 몸이 안 좋거나 질병이 있어서 나타난 하나의 결과일 뿐인데 겉으로 보기에 몸이 좋지 않게 된 혹은 면역이 떨어진 원인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내놓는 대책이다. 체온을 올리기 위해 운동해서 근육을 키우라고 말한다. 여기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이 면역을 포함한 우리 건강에 도움될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설명하는 과정이 틀렸다. 엉뚱하게 체온을 끌어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체온은 대뇌 깊숙이 위치한 시상하부가 관장한다.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게 정상이다.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인간은 항온동물임을 기억해야한다. 체온은 올라가는 것도 내려가는 것도 둘다 바람직하지 않다. 서적뿐 아니라 이와 관련한 국내언론의 보도도 문제가 많다. 메르스 환자가 체온이 낮았다는 기사는 어이가 없다. 어떤 연구기관에서 어떤 방법으로 몇 명을 대상으로 측정했더니 결과가 어떠했다는 기본적인 팩트도 나와 있지 않다. 그냥 ‘익명의 누가 그러더라’라고만 기술하고 있다. 폐암 환자 완치사례에 대한 기사도 단지 한 사람의 케이스만으로 전체 폐암으로 일반화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암세포가 35도에서 가장 잘 자란다는 이야기도 금시초문이다. 전 세계 유력 학술잡지의 논문들을 모조리 뒤져도 그런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 해도 시험관 실험에서의 결과일 뿐이다. 암환자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의 몸에서 35도란 체온은 추운 환경에 오래 노출되어 저체온증이 시작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다. 체온면역설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본 건강서적의 무분별한 수용이 불러온 해프닝의 하나다. 사람들은 운동하고 금연하라는 뻔한 이야기에 식상하다. 그러다보니 이색적인 주장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가끔 이를 부추기는 전문가들이 있다. 박사나 의사, 대학교수 가운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근거주의에 입각해야 하며 근거가 없다면 의학적 개연성에서만이라도 보편타당하게 납득되는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언론도 건강 관련 보도에서 흥미 위주에서 벗어나 신중하고 객관적일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 2016-02-1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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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선물은 받아서 남에게 주는 것이다
- 정필례 선생님은 예뻤습니다.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했던 정 선생님은 학교 행사 때면 도맡아 풍금을 치곤 했습니다. 정 선생님은 1958년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의 첫 담임교사였습니다. 약간 탁한 듯한 목소리,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왔지만 남들보다 크고 둥근 얼굴, 운동장에서 풍금을 치러 나갈 때 조금은 멋쩍어하던 표정, 바람에 하늘거리던 개나리색 원피스가 생각납니다. 1학년을 마칠 무렵, 고교 생물교사였던 아버지가 당신의 저서 을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시골 초등학교 교사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이지만 한 학년 동안 아이를 가르쳐준 데 대한 사은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것도 뭔가 더 있었는데 내 기억에는 그 이상한 책만 남아 있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신문지로 싼 물건을 주셨습니다. 소중하게 집에 들고 가다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호호 손을 불어가며 풀어보니 연필 지우개 공책 등 학용품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정필례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2학년으로 올라간 직후 담임이 되신 우문자 선생님과 정 선생님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학생 인수인계를 한 셈인데, 정 선생님은 “애가 수가 좁아”라고 말했고, 우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계단 밑에 서 있던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정 선생님의 눈길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가 좁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괜히 아무에게도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혼자 궁금해 하다가 어떻게 해선지 수줍다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2013년 3월에 쓴 제 글을 축약한 것입니다. 선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억 속의 창고를 뒤지니 이 일이 맨 먼저 떠오릅니다. 정필례 선생님, 지금 어디 계시나요? 그때 20대 초반이었다면 이미 팔순이 넘은 나이인데 살아 계신지 어떤지 궁금합니다. 선생님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이용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전혀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도 있지만 아마도 기억 속의 선생님을 온전히 그대로 보전하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이나 선물까지 받으면 일생의 아름다운 추억이자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정필례 선생님은 이름도 참 소박하고 수수합니다. 필례 길녀 탄실이 언년이...이런 우리나라 고유한 이름을 생각하게 하는 정겨운 이름입니다. 정 선생님을 생각하면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때의 악몽과 대비됩니다. 그때 만난 담임교사는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유독 저를 못 살게 괴롭혔습니다. 남들 앞에서 일부러 본보기로 혼내고, 걸핏하면 아버지의 초등학교 때와 나를 비교하곤 해서 학교에 가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뒤 무슨 선물을 받았던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서울에 가 있는 고종사촌 누나로부터 받은 크리스마스카드가 생각납니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었나? 반짝반짝 은가루가 빛나고 사슴이 끄는 썰매와 산타할아버지 그림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동화책이고 꿈의 나라였습니다. 그 뒤 자라면서 많은 연하장을 받았지만 그때의 감동과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서예 선생님으로부터 환갑 기념으로 대형 벼루를 선물 받은 일이 있습니다. 몸소 디자인한 벼루에 뛰어난 전각 솜씨로 ‘硯田無荒 筆耕有年(연전무황 필경유년)’, 벼루밭에 흉년이 없고 붓농사가 늘 풍년이기를 바란다는 글을 새겨주어 저를 감동케 했습니다. 선물이라는 게 뭔가? 한자를 풀이하면 膳은 반찬을 말하는 것이니 본뜻은 ‘잘 갖추어진 요리’라고 합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고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문 시대에 잘 갖추어진 요리는 최상의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설이지만 이 명절에 사람들이 보내는 선물에는 역시 먹을거리가 가장 많습니다. 함께 먹고 어울려 나누어 먹는 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사회를 따뜻하고 훈훈하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선물이 사람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고(잠언 18:16), 폭넓게 친구를 사귀게 하며(잠언 19:6), 맹렬한 분노도 멈추게 한다고 돼 있습니다(잠언 21:14). 이런 선물에는 나름대로 일정한 조건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에는 조건이 없다고 말하지요.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선물이나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선물에도 조건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에게는 자신의 분신인 자식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고, 스승에게는 자신을 뛰어넘을 제자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어서 그런 걸까요? 사랑은 내리사랑만이 더 진하고 선물도 내리사랑만이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일까요? 스승도 선물을 받기는 합니다. 동양에서는 처음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속수는 열 조각의 마른 고기를 묶은 것으로, 예물 가운데 가장 약소한 것입니다. 공자는 모든 가르침이 예(禮)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고,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국내에서 어렵게 대학에 다니다가 몇 백 달러인지 아주 적은 돈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 가 고학을 한 끝에 지휘자로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많은 미국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준 장학금이나 대학 알선, 아르바이트 자리 주선 등 모두가 잊을 수 없는 선의이며 감동적인 선물이었답니다. 그래서 고마운 분들에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고 했을 때 “Pass it on”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나에게서 받은 것을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걸로 갚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패스 온’을 실천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패스 온’을 우리말로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패스 온’의 정신이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장학금을 받고 학업을 마친 학생들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내고 재단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도 바로 ‘패스 온’의 선물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받기만 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생각하면 반성부터 하게 됩니다. 자식들에게도 제대로 된 선물을 해본 적이 없고 가끔 책이나 사주었는데, 언제부턴지 책 선물이란 그다지 감동적이지 못한 일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설 명절이 가깝고 학생들의 한 학년이 끝나가는 졸업과 종업의 시기입니다. 선물을 주제로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점검해볼 시기이기도 합니다. 오고가는 선물 속에서 주고받는 정과 마음이 겨울을 따뜻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2016-02-0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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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자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최근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한 동영상이 있습니다. 독일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에데카(Edeka)의 광고입니다. 이 광고에서 매년 혼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던 아버지는 자신의 거짓 부고를 자식들에게 보냅니다. 충격과 슬픔 속에 모여든 자식들 앞에 펼쳐진 것은 장례식이 아니라 성탄절 만찬 테이블이었습니다. 놀라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너희 모두를 불러 모을 수 있었겠니?”라고 말합니다. 친구가 보내준 이 동영상을 본 60대 후반의 여성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눌리듯 아픈 그 순간들을 그들이 어찌 알리오? 묻어두고, 그리곤 눌러 놓고 흐르는 눈물 못 흐르게 하늘을 쳐다보는 그 아픔을 알 리가 없지요. 한 겹은 그들을 향한 그리움, 한 겹은 저 아이가 저런 아이였나 하는 낯섦, 한 겹은 흥건한 서러움... 그 여러 겹 사이사이는 저 아이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십사는 기도로 가득 차고, 나는 괜찮으니 저 아이만 늘 괜찮게 해주십사고 비는 마음. 저 아이의 가슴을 옥토로 만드사 그곳에 말씀의 씨 떨어뜨려 주소서. 한평생 주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시경 개풍(凱風)에 “슬하에 일곱 형제가 있지만/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구경에는 “열 아들을 양육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아버지 한 분마저 봉양하지 않는 열 아들도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알고 보니 비슷한 말이 여러 나라 속담에 나옵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서양이 같고, 옛과 지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어려서 양팔의 짐, 자라서는 마음의 짐”, 이건 영국 속담입니다. “어린 자식은 어머니의 얼을 밟고, 큰 자식은 어머니의 마음을 밟는다”, 이건 독일 속담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무자식 상팔자”라는 게 있습니다. 아들과 딸을 일컫는 자식의 息자는 참 절묘합니다. 쉬다, 숨 쉬다, 생존하다, 번식하다, 자라다, 키우다 이런 뜻 외에 그치다, 그만두다, 중지하다, 망하다라는 뜻이 있으니 인간의 일생을 담고 있는 게 바로 이 글자입니다. 태어나서 자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늙어서 죽게 되는 과정이 息, 한 글자에 다 새겨져 있습니다. 인생이란 부모를 만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살다가 부모와 이별하고, 그러는 동안 스스로 부모가 되어 자식들이 부모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이 세상을 떠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를 골라 태어날 수 없듯이 자식도 골라 낳는 게 아니지만, 나는 부모의 분신이며 자식은 나의 분신입니다. 분신이 된 인연을 보살피고 갚아야 합니다. 시경에 “아버지 없으면 누굴 믿으며 어머니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랴”[無父何怙 無母何恃]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모는 자식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부모은중경에는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메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메고 살갗이 닳아 뼈가 드러나고 다시 골수가 보이게 되도록 수미산을 수천 번 돌더라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이며 자식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도 자신을 염려하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나와 다름없는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어버이는 제 자식을 가르치기 어려우니 남들과 바꿔 가르친다[易子敎之]는 게 동양의 옛 가르침이었고, 공자도 아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버이는, 특히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나이는 가슴속에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폐족(廢族)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식에게 할 법한 말입니다. 제갈량의 계자서(戒子書)는 천고의 명문입니다. 제갈량은 “군자는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른다”는 말부터 합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말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게 할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나아갈 수 없다”[非淡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고 강조합니다. 바빠서 아들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던 제갈량은 편지 한 통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는 “나이는 시간과 함께 내달리고 뜻은 세월과 함께 사라진다”며 정진과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아들을 위한 기도서’는 용맹과 겸손 온유 소박함 유머를 주시기를 주님께 빌면서 “그리하여 주시면 그의 아비인 저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맥아더의 기도도 행동이나 일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를 알려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은 어버이의 분신이지만 어버이의 것은 아닙니다. 대장 부리바는 적국의 여인에게 마음을 뺏겨 조국을 배반한 아들을 총으로 쏴 죽입니다. “네 생명을 내가 주었으니 내가 거둔다”고 했지만, 부모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준 것은 생명이지만 그 뒤에 줄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지혜를 말보다는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는 대로 받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게 적거나 없더라도 자식에게는 많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보다 나은 자식을 만드는 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이제 삶이 더 이상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시니어세대에게는 아쉬움과 후회가 많습니다.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 아들을 아는 데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지만 자식에 대해 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자랄 때 무슨 대화와 접촉을 해왔던가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살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저절로 좋은 영향을 주고 교육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모습 아닙니까?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아쉬움이 많은 세월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제는 그런 마음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식을 기를 때의 아쉬운 마음을 내 자식이 그의 자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극복의 대상이며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과 같은 대화 단절과 갈등의 시대에는 무엇보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바탕부터 새로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아들이 이에 응해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아들세대의 땅으로 건너뛰어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낡은 세대, 지는 세대라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옳게 가르치는 자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6-01-21 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