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드디어 58년생 개띠들이 회갑을 맞이한다. 우리나라는 61세가 되면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특별히 생일잔치를 열었다. 요즘이야 식구들 모여 소박하게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지만 말이다. 회(回)나 환(還)은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이라는데, ‘자리로 돌아왔다’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어쨌든 회
손주 돌보기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중요 이슈로 떠오른 지 오래다. 자녀 내외가 맞벌이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어서다. 경제적 사정이 허락되면 아이 돌봄 전문인을 활용할 수 있지만, 대체로 친정이나 시댁의 부모가 그 일을 대신한다. 또한, 손주 돌봄 자체가 노후 삶에 보람을 주기도 해서다. 남의 손에 맡기느니 힘이 들어도 내리사랑을 베풀기 마련이다. 유아원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국립무용단의 춤사위가 펼쳐졌다.
‘향연’ 이것이 우리의 춤이다, 라는 제목으로 관객에게 보인 무대는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이다.
정중동이라는 말처럼 수십 명의 무희가 고요한 가운데 손짓하나 발걸음 하나까지도 어쩌면 그리도 똑같이 움직이는지 다음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 눈 한번 깜빡할 수 없었다.
한국무용을 보게 되니 옛 생각이 밀려왔다.
한 대학병원에서 안타까운 신생아 집단사고가 났다. 그 원인을 찾느라고 노력하지만 시간이 걸린다. 병원의 부주의에 따른 ‘집단감염’이 유력한 사고원인의 하나로 의심된다. 예전처럼 ‘인재’라는 뻔한 결론이 사고대책의 전부가 될 터이다. 요즘은 한파가 몰아치면서 감기가 크게 퍼졌다. 어린 학생들은 학교 다니기 어려워졌다. 인구가 밀집한 도회지에서 흔히 발생하는
얼마 전에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발언 중에 비정규직 급식 요원을 ‘밥 하는 아줌마’로 비하했다고, 매스컴의 공격을 받고 발언자가 당사자들인 급식요원 앞에서 공개 사과하고 곤욕을 치룬 일이 있었다.
옛날 우리 모두가 못 살던 시절, 서울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이면 거의 대부분 ‘밥하는 아줌마’인 가정부를 집에 두고 살았다. 다만 한 식구라도 먹는 입을 줄이
“학교는 왜 그만두셨어요?”
“8월에 미국에서 있었던 개기일식이 보고 싶어서요.”
정년퇴임 2년여를 앞두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전 부산과학고등학교 이경훈(李京勳·60) 선생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놀랍고 신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하산하듯 선생 자리에서 물러났단다. 은퇴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을 텐데 답변 한번 간단하다. 통쾌함도 몰려온다. 걱정
“친구란 내 대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다”라는 인디언 속담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느 날 교실에 들어선 필자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별안간 짝이 바뀌어 낯선 아이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아무 말도 없이 짝을 바꿔버린 담임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럴 수가!’ 황당하고 슬프고… 완전 멘붕 상태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던 개똥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조금 모자란 듯 보였지만 언제나 천진한 표정이었다. 일찌감치 도회지로 나온 필자는 이 친구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고향을 떠올렸고 살며시 피어나는 그리움에 몸살까지 왔다.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우연히 개똥이도 만났다. 그동안 고향을 지키며 살다 결혼도 했고 슬하에 딸아이도
1968년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 모임이 있다. 남녀공학인 대학에서 몇 명 되지않는 여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느라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당시만 해도 동숭동 문리대 교정에는 여학생 전용 화장실도 제대로 없었다. 지금은 대학로라 불리는 학창시절 동숭동을 떠올리면 유명한 학림다방이며, 중국집 진아춘, 세느강이라고 부르던 학교앞 개울이 마치 흑백영
뉴스를 보는데 새만금사업이 박차를 가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새만금은 원래 민간주도로 시작되었지만, 긴 시간이 지난 이번 문재인정부에서 공공주도로 진행하게 되어 관련 예산을 편성하고 내부개발이 진행될 것이며 새만금개발공사를 만들어 전담추진체계를 마련해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6월 필자는 새만금 노마드 축제에 다녀왔다.
그날 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