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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비극을 노래하다,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
-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지만, 한낮엔 매우 따스한 봄기운이 도는 요즘. 화창한 일요일 오후, 멋진 오페라 한 편을 감상하러 예술의전당으로 가는 발걸음은 매우 즐겁다. 공연은 언제든 기분을 좋게 만든다. 뮤지컬도 좋고 오페라도 멋지다. 뮤지컬은 화려하고 경쾌한 무대가 기대되지만, 오페라는 어쩐지 클래식하고 웅장해 조금은 무겁고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이전에도 몇 편 감상한 적이 있어 친근한 생각이 드는데 이번에 본 작품은 ‘가면무도회’다. 한국 오페라 70주년을 맞아 2018 제9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개막작품으로 총 4회 중 마지막 날 공연을 관람했다. ‘가면무도회’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 암살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어쩜 인생은 이렇게도 바른길로만 가지 못하고 애틋하게 얽히고설키는 건지, 애절한 내용에 가슴이 아팠다. ‘가면무도회’는 3막으로 인터미션을 포함해 170분 동안 펼쳐졌는데 배우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감동이 매우 컸다. 평소 노래를 좋아해 자주 부르지만 서너 곡만 해도 숨이 가쁘고 힘이 드는데, 긴 시간을 쉬지도 않고 열창하며 연기하는 성악가들을 보면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 좌석이 무대 정면에서 일곱째 줄인 VIP석으로 배우들의 움직임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어 자막을 봐야만 했는데 너무 높은 천장에 자막판이 있어 내용 보랴 무대 연기 보랴, 공연을 감상하기에 조금 힘들었다. 자막에 눈길이 자연스럽게 가도록 배려했던 다른 오리지널 공연과 비교해 너무 높은 곳에 설치한 자막판은 개선되어야 할 사항이라 생각한다. ‘가면무도회’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이 주제이다. 하필이면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보스턴의 총독 리카르도는 그가 가장 신임하는 비서관이자 친구인 레나토의 아내 아멜리아를 남몰래 사랑하게 되면서 고뇌에 빠진다. 리카르도는 백성을 현혹하고 있는 흑인 여자 점쟁이 올리카를 처형해야 한다는 판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시종 오스카의 변호를 확인하기 위해 어부로 변장하고 그녀의 집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아멜리아가 리카르도 자신을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고백하는 말을 엿듣게 되고 자신 또한 가슴속에 간직했던 그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노래한다. 한편 점쟁이 올리카는 리카르도에게 지금부터 처음 악수하는 사람에게 살해당할 거라고 예언하고 그때 마침 뒤늦게 도착한 레나토가 총독을 음해하려는 음모로부터 무사함을 기뻐하는 악수를 청한다. 충성을 맹세한 레나토였기에 그에게 죽임을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레나토는 결국 총독과 아내와의 관계를 알게 되고 배신감에 복수를 결심한다. 리카르도는 레나토를 진급시켜 아멜리아와 함께 고향으로 떠나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알 리 없어 마지막 가면무도회에서 레나토는 예정대로 그를 찌르고 만다. 죽음의 앞에서 리카르도는 아멜리아의 결백을 증명하며 동시에 레나토를 용서한다고 말함으로써 백성에 대한 총독으로서의 마지막 사랑을 베풀며 숨을 거둔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연주되는 곡과 노래로 안타까움이 고조되며 마음이 아팠다. 왜 인생은 엇나간 사랑을 하게 해서 이런 비극을 초래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극적인 사랑이 있어야 밋밋하지 않은 재미있는 인생 이야기도 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 주인공의 순수한 사랑에 마음 졸이며 감상한 비극 오페라 ‘가면무도회’였다.
- 2018-05-1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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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관람했다. 오랜 시간 공연되어왔을 텐데도 오늘 공연에도 큰 객석이 꽉 차는 성황을 이루었다. 어린이 관객도 꽤 많은 건 아마 어린 빌리 엘리어트의 유명세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빌리 엘리어트를 뮤지컬로 보게 되었을 때 영화로 먼저 이 작품을 만났던 필자는 어떻게 영화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고 연출했을지 매우 기대되었다. 영화로 봤을 때 정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뮤지컬 본토에서 우리나라 소년 빌리 엘리어트를 발탁하려는 오디션 담당자가 내한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소년들이 오디션에 참가해 피나는 연습을 하며 재능을 심사받았고, 그 과정이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다. 오디션 과정은 매우 까다로웠다. 현재는 적합해 보이는 지망생이지만 앞으로의 변성기 등을 고려할 때 재능이 출중해 보이는 아이가 오디션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슬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오늘의 주인공이 그 소년 중 하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체구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상당했다. 멋진 아이는 뮤지컬 내내 날아다녔다. 영화로 이미 잘 아는 내용이라 그만큼의 기대를 하고 관람을 했다. 대작 뮤지컬답게 웅장한 사운드와 배우들의 우렁찬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는 연극이 시작되었다. 캐스팅을 모르고 왔는데 아버지로 김갑수 씨가 나왔고 할머니 역을 박정자 씨가 맡아 매우 반가웠다.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어수선한 영국의 한 작은 마을 탄광촌 이야기다. 탄광촌의 광부들은 정부를 상대로 파업을 하며 그들의 권리를 지키려 했다. 주인공 빌리는 몇 년 전 엄마를 잃고 광부인 아버지와 형 그리고 할머니와 사는 11세 소년이다. 과거에 권투선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투를 강요한다. 그러나 어린 빌리는 권투보다는 발레에 관심이 많다. 빌리의 재능을 알아본 발레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빌리는 발레리나의 꿈을 꾸는데 이를 안 아버지가 심한 꾸지람을 한다. 아버지는 강한 사나이로 크려면 권투가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발레 선생님은 빌리를 런던 왕립발레학교에 보내고 싶어 오디션을 추천한다. 그리고 비용이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발레 연습을 하고 있는 빌리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아들만큼은 이 가난한 탄광 마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오디션을 허락한다. 그리고 빌리는 마을 사람들이 마련해준 돈을 들고 런던으로 간다. 뮤지컬에서는 옷걸이에 걸린 옷들의 댄스 등 볼 만한 장면이 많았다. 탭댄스의 경쾌한 리듬도 관객의 마음을 들썩이게 했다. 필자는 감동의 눈물을 쏟게 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다렸다. 영화는 탄광촌에서 영국 최고의 왕립발레단에 들어가 크게 성장한 빌리가 어려운 살림에도 빌리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뒷받침했던 아버지와 형을 공연에 초대한다. 공연장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들과 신사들이 가득했다. 허름한 모습의 아버지와 형은 머뭇거리며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무대 뒤에서 아버지와 형을 발견한 빌리는 음악 ‘백조의 호수’에 맞춰 무대로 날아오르며 비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호흡이 멈춰질 정도로 멋진 광경이었다. 비리비리했던 어린 시절의 빌리는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노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아버지와 형에게 보답하는 마음이 전해지는 그 장면에서 필자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딱 그 장면을 기대했는데 뮤지컬에서는 그냥 왕립학교로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좀 아쉬웠다. 하지만 매우 경쾌한 장면이 많아 재미있게 관람했다. 어린 빌리를 연기한 아이는 정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멋진 배우가 될 것으로 기대되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 2018-04-2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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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층층나무동시모임’
- 4월호 // 어린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층층나무동시모임’ [라이프@] 스승을 모시고 한 달에 딱 한 번 숙제 검사를 한다. 어린아이 마음 담은 어여쁜 말과 말을 잇는다. 내 아기, 내 시 시가 소복소복 마음에 와 안긴다 귀한 시간이 쌓인다. 동시 작가를 만나고 나니 손가락이 꼼지락 운율을 따라 움직인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이지만 말이다. 동시를 쓰는 작가들이 모여 공부하는 ‘층층나무동시모임’을 찾아갔다. 모임 구성원은 동시집을 적게는 두 권에서 많게는 열 권 이상을 낸 베테랑들.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개인 인터뷰를 해도 부족할 아동문학 대표 작가 집단이 바로 ‘층층나무동시모임’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프로 중에서도 프로죠. 그냥 작가들이 아니에요. 잘나가는 작가죠.(웃음)” 층층나무동시모임에서 스승으로 모시는 선생님을 봐도 현실적이지 않다. 한국 아동문학계의 거목 중에서도 거목인 신현득 시인이 바로 숙제 검사(?)를 해주는 선생님이다. 전문 작가들이 모인 자리라 그런지 진지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각자 시를 읽고 나면 동시를 연마다 끊어 읽으며 날카로운 평이 이어진다. 제자 사랑의 결실이 층층나무동시모임 층층나무동시모임이 결성(?)된 것은 13년 전쯤. 신현득 시인과 인연이 있는 제자 4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은사 포함해서 10명이다. 13년 동안 은사 한 분에 제자 9명인 것을 보면 그들의 눈높이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30대에서 80대까지 한자리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좋은 생각을 나누는 귀중한 공부방 모임이다. 그런데 등단한 동시 작가로 인정받은 이들이 왜 이렇게 모이는지 의문이다. 설용수 시인은 작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갇히지 않기 위해서 모임을 택했다고 말한다. “내가 내 작품을 확실하게 못 볼 때가 있어요. 등단이라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의미이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에 은사님을 모시는 거잖아요. 우리의 의견이 엇갈릴 때 조정을 해주시거나 핵심을 딱 잡아주세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모이기 때문에 일종의 부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글을 쓴다고 했다. 베테랑 작가들도 사람이기에 게으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일종의 기능 하나를 삶에 추가한 것이라고. 그렇다면 왜 동시일까? 이들을 동시의 세계에서 살게 만든 원동력이 뭔지 궁금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이들을 유심히 살피는 고운 마음씨가 힘이다. 손자와 손녀가, 내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모습이 이들을 동시 속에 살게 했다. 아이들은 동시의 주체가 됐고 멋진 독자로 성장했다. 전직 초등학교 선생이자 최고령 작가인 박예자 시인도 손자들에게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전부 다 시로 보였어요. 제가 쓴 ‘아가는 시예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손자의 성장 과정을 따라가면서 시를 썼어요. 쓰다 보니까 동생이 태어나잖아요. 형이 동생을 질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심이 생기고요.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을 유아시로 써냈습니다. 박예자 시인과 마흔 살이나 차이 나는 최연소자 신정아 시인도 세 아들 얘기를 꺼냈다. “제가 2012년도 등단했는데 그전부터 단국대학교에서 신현득 교수님의 아동문학 강의를 들었어요. 그때 제 아들이 세 살쯤 됐을 땐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동시가 하나둘 써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아무래도 소재 거리를 많이 주죠. 지금은 초등학생인데 독자이기도 하고요.” 아이의 심상 느낄 줄 아는 재능의 소산 동시는 잃어버린 동심을 찾아주는 글이다. 나이를 떠나 어린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리고 싶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동시 아닐까. 세상에 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가 있지만 다들 한마음으로 동시를 쓰는 게 아니니 말이다. 층층나무동시모임에서 만난 작가들 모두 동심의 소중함을 알고 낮은 자세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사실 동인들 모두가 너무 걸출해서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현역 동시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유희윤 시인과 김금래 시인, 경희대 간호팀장 신분으로 꾸준하게 동시 작가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는 한상순 시인도 층층나무동시모임을 자라게 하는 나뭇잎사귀다. 개인 활동은 물론이고 동인지에 관한 생각도 잊지 않고 있다는 층층나무동시모임. 모두가 건강하게 오랫동안 건필하시기를 부탁드린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8-04-1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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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장혜진, 남자로 다시 태어나 야성적인 목소리의 가수가 되고픈 천생 가수
- TV조선 프로그램 ‘강적들’에서 나와 같이 방송했던 이준석이 독립야구연맹 총재로 취임하던 날 행사장에서 가수 장혜진과 마주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전광석화처럼 “조만간 인터뷰합시다!” 하고 대시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보며 그녀의 노래에 심취했던 한량 이봉규가 동물적으로 반응했던 것. 우물쭈물하는 장혜진을 보더니 내 옆에 있던 김성경 아나운서가 “인터뷰 해, 언니~ 나도 했어!”라고 거들어주는 바람에 운 좋게 다시 만났다. 장혜진은 인터뷰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노래에만 빠져 있을 뿐 모르는 사람과는 말 섞기를 불편해하고 어색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점을 금세 간파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량 이봉규 특유의 느물느물 전법으로 그녀를 밀어붙였다면 인터뷰는 무미건조(無味乾燥)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공손한 자세로 노래에 관한 얘기부터 꺼냈다. 다행히 대화가 술술 풀렸다. 장혜진은 겉으로는 야리야리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강한 자기 철학을 가진,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첫 모습을 봤을 때 상당히 까칠할 것 같고 깍쟁이처럼 보였는데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허당’이면서 따뜻한 여인의 성정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캐릭터가 중첩되는 여인이었다. 그런 성격이 오늘날의 장혜진을 대가수로 만든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완벽하게 감정을 이입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그녀에게 다중적인 성격이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장혜진이 열창했던 곡 ‘술이야’를 들었을 때 한량 이봉규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가 매일 술에 젖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순정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사의 마지막 소절 “정말 영영 이제 우리 둘은 남이야 저물어가는 오늘도 난 술이야~”를 들을 때마다 1년에 360일 술을 마시는 주당 이봉규는 영락없이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장혜진의 주량은 맥주 한 잔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술이야’를 부르면서 그런 표정과 목소리를 내뿜을 수 있나?”라고 따져 물었더니, “그만큼 힘들고 괴로워서 술에 맨날 젖어서 산다고 감정 이입했다”고 말하면서 몰입이 안 되면 노래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술은 체질적으로 안 맞아 마실 줄 모르지만 술에 취한 사람의 감정처럼 몰입할 수는 있다는 장혜진의 설명이 알듯 모를 듯했다. 체조 선수가 가수가 된 사연 그녀의 이력이 의외로 다채로웠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다. 원래는 체조 선수였지만 부상을 당해 선수생활을 접고, MBC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때 유명 가수들의 백코러스를 담당했는데 좀 더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서 부단한 노력을 했다. 당시 이수만이 경영하던 종로3가의 ‘SM 카페’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차 한 잔 시켜놓고 해외 유명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를 분석했다. 동작 하나하나, 의상, 조명, 창법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느라 온종일 뮤직 카페에 있어도 즐거웠다. 본인이 직접 동대문시장에서 옷감을 구입해서 의상디자인까지 하면서 “어떡하면 여성 코러스로서 가장 섹시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 그때부터 천생 가수의 기질이 나타났던 셈이다. 그 시절 그녀의 오랜 친구였던 강승호가 그룹 ‘소방차’의 막내 매니저로 일할 때 방송국에서 예능 PD에게 발로 차이고 꾸지람을 듣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장혜진은 강승호에게 “이렇게 막내 매니저로 살지 말고, 네가 제작자로 나서라. 일단 내가 너의 가수가 돼줄 테니 그다음부터는 나를 발판 삼아 인기 있는 가수들을 많이 키워내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들은 강승호는 일주일 만에 아시아레코드에서 계약을 따내고 신곡을 들고 장혜진을 찾아와 녹음하자고 들이댔다. 이 앨범에 바로 1991년 장혜진을 가요계에 데뷔시킨 ‘꿈속에선 언제나’라는 타이틀곡이 들어 있다. 그녀의 조언대로 강승호는 장혜진을 1호 가수로 내세워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운영을 시작해 김종서, 박상민, 박완규, 캔 등의 실력파 가수들을 발굴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강승호가 한술 더 떠 장혜진에게 결혼하자며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강승호의 집념에 그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다. 남편 강승호는 전형적인 0형 혈액형 성격으로 다혈질이고 저돌적이다. 장혜진을 데뷔시킬 때도 그랬고 결혼을 승낙받을 때도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결혼을 망설이던 장혜진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거 갖지 말고 친구처럼 이 사람과 살아봐도 괜찮겠다. 남자 뭐 별거 있어?”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 앨범 작업을 같이 하다 보니 편해지기도 해서 28세 때 강승호의 끈질긴 청혼을 받아들이고 면사포를 썼다. 권태기,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른다 인터뷰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장혜진도 이봉규를 경계하는 마음이 슬쩍 느슨해진 듯 보였다. 그 틈을 타 “결혼생활 26년이 되었으면 그동안 권태기도 많았겠다. 그리고 나이도 갱년기를 겪을 시기니까 힘들 때도 있을 것 같다”고 찔러봤다. 그녀는 담담하게 “권태기나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예민한 성격이 아니고,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하고 반문한다. 내친김에 “부부싸움하면 누가 이기나?” 하고 물고 늘어졌다. “남편이 이긴다. 나는 눈물부터 나와서… 울면 지는 것”이라고 곧바로 받아치는 것으로 봐서 이들 부부관계의 권력 서열이 대충 짐작됐다. 결혼생활 만족도를 점수로 물었더니 “80점”이라고 답한다. 곧바로 가수생활 만족도를 물었더니 “100점이 넘는다”고 대답하면서 표정이 확 바뀐다.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직업으로 삼아 평생 노래와 함께 살고 있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장혜진의 해석, 천생 가수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봉규도 평소에 가수가 최고 직업이라고 생각해왔고 “다시 태어나면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빤한 답변이 예상되지만 똑같은 질문을 장혜진에게 했더니 “다시 태어나면 야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자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록 밴드를 좋아하는데 특히 마이클 볼튼이나 레드 제플린처럼 야생의 목소리를 선호해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 그래서일까? 장혜진의 목소리에서도 뭔가 끈적끈적하고 야생성이 느껴진다. 1996년 이후 성대결절로 공백기를 거치면서 고음을 자제하고 중저음 위주의 창법을 쓰고 있지만 그녀가 야생의 목소리를 좋아해 그쪽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혜진은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한 타고난 가수이기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노력파다. 하루 종일 노래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팝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실용음악과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버클리음대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녀는 또 자신이 고집하는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장르의 가수들과 함께 앨범 작업을 하는 등 가수로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평소 장혜진의 음악을 생각하면 파격적이라 할 만큼의 도전이었다. 그녀가 대학 시절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기에 “노래 부르면서 ‘봉춤’ 같은 것을 시도하면 어떨까?” 하고 다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해봤더니 장혜진은 의외로 반기면서 “핑크가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리본으로 공연을 했는데 참 부러웠다”고 본인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럴 만한 곡을 못 만나서 자신의 전공을 노래에 살릴 수 없었다는 것. 체조 전공자로서 단련된 신체 덕분일까. 장혜진은 암벽등반을 즐긴다. 밧줄을 타고 내려올 때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는다니 놀랍다.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까지 보인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캐릭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꿈은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 노래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삶의 철학을 엿본 한량 이봉규는 육십 평생을 돌아본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장혜진과 인터뷰하는 동안 많이 배웠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좋아하는 직업에 감사해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몰입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쳐본다. 땡큐! 장혜진!
- 2018-03-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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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기증
- 사람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나 명승고적지를 가면 가파른 바위에 이름을 페인트로 쓰거나 심하게는 큰 바위에 이름이나 글자를 파서 새긴다. ‘000을 사랑해!’, ‘우리사랑 영원히’ 라는 글이다. 이런 글자를 본 애인이 감동해주길 바란다.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는 용감하고 멋있는 사람으로 알아주길 바란다. 여러 사람들에게 이름을 공개해 변하지 않을 대못을 박고 싶은 심정에서 한 행동임은 알 것 같다. 하지만 방문객의 대부분이 얼마나 사랑했으면 또는 얼마나 사랑이 변치말기를 기원했으면 바위에 이름까지 새길까!,하고 부러워하고 축하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문화재를 훼손했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자칫하면 자연 훼손 범으로 법정에 서야 한다. 우리 아이의 출생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첫 돌날 찾아준 하객들에게 아이이름을 새긴 작은 선물을 돌린다. 부모님의 회갑 날에도 수건에 부모님 이름을 인쇄해서 나누어 준다. 기업체를 방문해도 간단한 물건에 회사이름을 새긴 방문기념 선물을 주는 곳도 많다. 크게는 대통령이름이 새겨진 시계선물도 있다. 모두가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사랑의 자물쇠라 하여 사랑하는 연인들이 사랑의 마음을 담은 후 자물쇠로 잠그고 다시는 열수 없도록 열쇠를 멀리 던져버리는 퍼포먼스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멋있게 표현하고 싶고 그 사랑을 영원히 변치말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강서둘래길’에서 이런 멋진 모습을 봤다. 강서둘래길은 전철5호선 개화산역이 있는 개화산둘레가 주 무대다 총연장이 11.4km로 대략 3시간이 소요되는 걷기 좋은 길이다. 지역주민은 물로 멀리서도 이름을 듣고 찾아온다. 중간지점에 봉화정(烽火庭)이라는 쉼터인 정자가 있는데 거기서 아름다운 기증을 한 멋진 시계를 봤다. 잠시 정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똑딱이는 시계소리가 들린다. 눈을 들어 위를 보니 결혼부부의 사진이 박힌 시계가 걸려있다. 초침이 똑딱똑딱하고 가고 있고 시간이 정확하게 맞는다. 걸어만 놓고 내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관리가 잘되고 있는 모습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전자시계이니 몇 달에 한 번씩 건전지를 교체해야 한다. 시간도 오차가 있으니 아주 가끔은 시간조정도 해야 정확한 시간이 제공된다. 시계가 잘 관리되는 것으로 보아 기증자는 가끔씩 올라와서 먼지도 털어내고 시간도 맞추고 건전지도 교체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웃고 있는 사진이 시계의 시간 품질보증서와 같다. 젊은 부부의 결혼식 사진을 보면서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며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결혼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야지 하는 다짐도 한다. 기증자는 하루에 한사람이라도 자신들의 신혼사진을 보고 파경의 문턱까지 간 부부가 화해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普施)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혼을 기념하는 벽시계를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에 걸어 놓을 마음씀씀이가 아름답다. 시계관리를 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더 깊어질 것이다. 작은 기증이지만 아이디어도 멋지고 참 실용적이다. 이런 작은 기증들이 세상을 더욱 살맛나게 한다. 기증문화 기부문화가 들불 번지듯 퍼져나가게 이른 미담은 널리 알려야 한다.
- 2018-03-1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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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리처드 3세’
-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도 건국부터 왕조가 바뀌는 동안의 역사 이야기를 필자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게 배웠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아니면 왕권을 지키려고 암투와 배신, 음모 등 많은 술수가 동원되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따스한 겨울 어느 날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영국의 역사 한 부분인 리처드 3세 이야기를 다룬 연극을 보았다. 영국의 역사도 이야기책을 읽는 것처럼 매우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많다. 동화인 줄 알고 있던 내용도 실은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리처드 3세에서는 그가 악인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때가 튜더왕가 시대였으며 튜더왕가의 첫 번째 국왕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집권한 인물이니 성공한 세력에 의해 역사는 다르게 전해 내려올 수도 있었겠다. 15세기 영국은 빨간 장미 랭커스터가와 흰 장미 요크 가로 나뉘어 갈등과 분열이 있었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요크 가의 장자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른다. 요크 가는 왕이 된 에드워드와 둘째 조지, 그리고 셋째 아들 리처드가 있다. 그중 셋째인 리처드는 유머와 총명한 식견을 가진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곱사등이라는 신체적인 불구로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결핍과 콤플렉스 속에서 성장한 그는 비틀린 욕망이 커지고 빼앗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탐하기 시작한다. 연극을 보기 전부터 캐스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영화배우 황정민이 불구의 몸인 리처드를 맡았는데 신들린 것처럼 열정적인 연기가 놀랍다는 평을 들었다. 첫째인 에드워드 4세 역시 연기파 배우 정웅인이 맡았고 왕비에 개성 매력파인 김여진이 열연을 펼쳤다. 출연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진지하고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고 일곱, 여덟 살 정도의 황태자 역할을 한 어린 소년 두 명의 연기도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다. (멋진 연기를 펼친 리처드3세 역의 배우 황정민) 배우 황정민은 소름 끼칠 정도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시종일관 굽은 허리와 움츠린 다리, 뒤틀린 손목으로 권모술수를 펼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왕위에 오를 생각으로 자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사람들을 암살하는데 동정이나 연민은 없었고 화려한 언변과 꾀를 이용했다. 병석에 있는 큰형 에드워드를 꼬드겨 둘째 형이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루머로 이간질해 런던탑에 가두게 한다. 그러면서 둘째 형에게는 자신이 돕겠다는 말로 안심을 시키고 형을 원망하게 만들어 버리는 술수를 썼다. 결국, 첩자를 시켜 왕의 명령이라는 거짓말로 둘째 형을 암살한다. 둘째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에 괴로운 큰형은 마음의 병으로 사망에 이른다. 이렇게 손쉽게 형들을 없앤 리처드는 주변의 인재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왕비와 대립하게 된다. 피도 눈물도 없었는지 결국 어린 황태자인 조카 두 명도 런던탑에 가두었다가 암살자를 보내 죽이고 만다. 그때 어린아이들의 연기가 어찌나 가슴 아픈지 눈물이 났는데 다행스럽게도 두 조카를 죽이는 장면은 암살자가 입고 있던 큰 망토를 펼쳐 두 아이를 덮는 것으로 연출되었다. 정적을 죽이는 장면은 무대에서의 모션 후 큰 화면을 통해 관객에 보이는 형식을 써서 더욱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셰익스피어가 탄생시킨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인이라는 평을 듣는다는 리처드 3세 이야기, 소문대로 리처드 3세를 연기한 황정민 배우의 매력에 흠뻑 빠져볼 수 있는 기회로 정말 잘 연출된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 2018-03-1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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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역의 변화, 그리고 추억
- 예전 서부역은 서울역 쪽에서는 직접 연결되지 않아 염천교 구두 거리를 지나 코너를 돌아야만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서부역은 일영 등 교외 방면으로 가는 열차를 타는 곳이었다. 대학교 때 일영의 딸기밭이나 교외로 놀러갈 때 서부역 앞에서 모였다. 당시의 기억으로 서부역은 앞쪽의 서울역에 비해 좀 초라하고 우중충한 느낌이었다. 우리 학교가 청파동이어서 돈암동에 살던 필자는 당시 미도파 앞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통학했는데 염천교를 지나 서부역 앞을 지나가는 코스였다. 그래서 눈에 익었지만, 항상 환한 서울역에 비해 서부역은 어둡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라는 중림동 약현 성당에 갈 일이 생겼다. 약속 장소가 서부역 앞이었다. 필자는 “아휴, 염천교 쪽으로 좀 많이 걸어가야겠네” 하고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친구가 서울역 옆쪽으로 걸으면 서부역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해줬다. 알려준 대로 가 보니 정말 염천교를 돌아가지 않아도 편하게 서부역에 갈 수 있었다. 눈앞의 서부역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그 위용에 놀랐다. 지난날의 초라함은 없고 멋진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초라하긴 했지만 예전의 서부역은 필자에게 애틋한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동안 놀고 지냈다. 27세가 되자 딸만 셋을 둔 어머니는 시집 못 가는 딸에 대해 노심초사 걱정이 많았다. 요즘 세상에야 딸이 서른이 넘어도 걱정하는 부모가 별로 없다. 그러나 필자 때만 해도 27세이면 노처녀였고 그런 딸을 바라보는 부모님은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다. 급기야 필자는 어머니의 성화로 수많은 선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필자 눈에 콩깍지를 씌운 한 남자가 다가왔다.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선본 다른 남자는 부모님이 마음에 쏙 들어 하셨다. 필자가 고집을 부리자 어머니는 필자가 좋아한 남자를 집으로 데려오라 하시더니 모욕적인 질문을 마구 하셨다. 주로 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남자를 실망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어깨를 떨구며 집을 나가는 그를 따라 울면서 무작정 따라나섰다. 모욕적인 말에도 그는 아마 어머님이 자기가 맘에 안 들어서 일부러 그러셨을 거라며 오히려 필자를 위로했다. 그날 같이 간 곳이 서부역이었다. 그 사람은 필자를 데리고 서부역에서 교외선을 탔다. 목적지도 없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서부역으로 오는 동안 그의 어깨에 기대 울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서부역은 슬프고 애틋한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다. 결국, 필자는 부모님이 좋다는 사람과 결혼해 무난히 살아왔다. 생각해 보면 필자에게 서부역은 젊은 날의 상처와 사랑이 깃든 추억의 장소다. 그런데 지금은 서부역 근처를 지나도 아무 감흥이 없다. 한동안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울컥하고 아렸던 필자의 감성은 과연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 2018-03-0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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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댄스 경기 대회를 돌아보며
- 살아 온 날 중에 댄스스포츠 경기대회에 출전한 일들은 하나하나 귀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수백만 명의 댄스 스포츠 동호인 중에 정식 댄스 스포츠 대회에 선수로 참가해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러므로 그런 면에서는 행운아인 셈이다. 처음 댄스 대회에 출전한 것은 댄스에 입문한지 10년이 지난 2000년대 초 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동덕여대 총장 배 대회에 라틴 포메이션으로 출전했다. 필자 외에 여러 커플이 한 팀으로 출전했다. 주차장에서 연습을 하는데 필자의 옷소매 단추가 파트너의 가발에 걸려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필자가 팔이 짧아 소매 단추가 걸린 것이니 팔을 크고 높게 돌리라는 주의를 받았다. 막상 본 대회에서는 우리 팀 중 가장 키가 큰 커플이 같은 사고를 냈다. 소매 단추가 와이프의 가발에 걸리자 가발을 뽑아 내동이친 사람 때문에 꼴찌를 했다. 퇴근 후 모여 밤늦게 까지 연습을 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니 맥이 풀렸다. 올림픽공원에서 500여명이 모여 하루 종일 벌어진 자이브 페스티벌에서는 뜻밖에도 필자가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유력한 우승 후보가 결승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필자가 어부지리로 덕을 봤다. 그날 모인 여러 사람들 중에 단 한 커플 챔피언을 가리는 경쟁이어서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다음 해에도 이어서 계속 챔피언 자리에 오르자 축하 보다는 질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 모던댄스로 전향했다. 시각장애인을 가르쳐 왈츠 단 종목으로 같이 출전했는데 첫 대회는 동상에 그쳤다. 그러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후 종목을 늘려 모던 5종목까지 할 수 있게 되고 성적도 좋았다. 그러나 파트너가 고령으로 은퇴하는 바람에 다시 다른 파트너와 시작해야 했다. 2015년은 필자 댄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해였다. 새로 젊은 장애인 파트너를 만나 가르쳤는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협회에서도 장애인 대회만 뛰기에는 아까우니 일반인 대회까지 해보라고 했다. 청주대회는 새벽 4시에 만나 하루 종일 대회에 출전하고 서울에 와서 허기를 달래니 다음 날 새벽 4시였다. 여수 대회에서는 오전 장애인 대회에 이어 오후 일반인 대회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까지 출전했는데 3부문 모두 결승에 올라 우승, 우승, 준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모던 5종목으로 출전했으니 대단한 체력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파트너가 밤에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멋진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KTX를 타고 상경한 것이 아쉽긴 했다. 그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 무대에도 서 봤으나 그게 끝이었다. 코앞의 전국체전에서는 다시 새 파트너와 나갔으나 무관으로 돌아 와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남한산성 배 대회 등에 출전하여 트로피를 들었다. 장애인들을 인솔하고 참가한 대구 대회에서는 대회가 끝나고 산중의 정화여상에서 부랴부랴 짐을 꾸려 터미널로 가야하는데 택시는 안 잡히고 시간이 촉박했다. 지나가던 봉고 차를 세워 모두 태우고 가까스로 버스 시간에 맞췄던 일이 잊을 수 없는 무용담이다. 전국의 여러 도시를 돌며 젊은 선수들과 같이 움직이는 일도 즐거운 일이었다. 시간이 나서 같이 바닷가를 거닐던 추억, 저녁에 같이 어울리던 추억, 같은 방을 쓴 룸메이트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제주대회 때는 당일 경기도 댄스파티 날짜와 겹쳐 댄스파티 참가는 포기했었다. 그러나 주최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부랴부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다시 택시를 타고 파티에 정시에 참석한 일화도 흐뭇한 추억이다. 댄스 대회 시작은 장애인과 같이 했으나 그 덕분에 일반인 파트너와도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울산 대회에 KTX를 타고 당일 아침에 갔을 때는 모던 5종목 타임 테이블이 오전으로 변경되어 출전도 못하고 나머지 종목으로 출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용인대회에서는 오전 예선에 착오로 출전하지도 못했으나, 주최 측의 배려로 결승에 추가로 참가하여 트로피를 건졌다. 대회마다 음악을 트는 순서가 달라 엉뚱한 위치에 서 있다가 당황한 적도 있다. 전국체전에 4번이나 나가 3번 메달을 딴 것도 귀중한 추억이다. 평창 올림픽 폐회식을 보며 대구에서 벌어진 당시 전국 체전 입장식이 떠올랐다. 젊은 선수들과 어울려 스타디움의 수많은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지금도 댄스 대회장에 가서 쿵쾅거리는 음악을 들으면 몸이 들썩인다. 플로어를 지날 때면 연미복을 입고 경기를 뛰던 생각이 나서 흥분하게 만든다. 아직 선수 은퇴선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선수로 플로어를 누빌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집에 있는 몇 개의 찬란한 트로피와 메달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 2018-03-0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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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위기 쫌 타는 사람과 주책바가지
- # 장면 1. 지난주, 파리에 있는 딸네 집에 다녀왔다. 사위가 출근한 후 다섯 살짜리 손녀는 장난감 전자피아노를 연주하며 필자에게 춤을 추라고 졸랐다. 그래서 음악에 맞춰 그동안 몰래 문화센터에서 배운 룸바를 신나게 추고 있는데, 주방에서 돌아온 딸이 그 장면을 봤다. “어? 아빠가 이제 춤을 추실 줄 아네!” 하면서 대학 시절 스윙을 추었던 딸이 필자에게 달려들었다. 둘이서 춤을 추다가 흥이 난 부녀는, 유튜브에 연결해 쇼스타코비치 2번에 맞춰 왈츠까지 췄다. 평소 ‘백설공주’라는 만화영화에서 왕자와 공주의 춤을 즐겨보는 손녀는, 우리의 왈츠가 신기한지 계속 추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 흘러간 후, 사위와 손자들이 직장과 학교에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후, 갑자기 손녀가 “하비, 엄마랑 또 춤춰봐!” 했다. 사위 앞에서 춤을 추다니 그건 아니었다. “아냐! 하비는 너랑 있을 때만 춤추는 거야.” 그러자 손녀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당황한 필자는 “엇, 울지 마. 하비가 춤추면 되잖아!” 그렇게 시집보낸 지 10년 동안 그 흔한 노래방 한 번 같이 안 갔던 사위 앞에서, 방정맞은 자이브와 왈츠까지 추게 되었다. 이왕 망가진 거 더 망가지기로 했다. 딸과 잔디밭으로 나가 차차차까지 췄다. 사위는 필자가 춤추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그동안 외국생활에 지쳐 했던 딸이 활짝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래서 이 모습을 또 보고 싶으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우리들끼리의 비밀로 하자는 약속을 받았지만, 귀국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약간 불안하다. # 장면 2. 신입생 환영회 때의 일이다. 그해 면접 과정과 뒷조사(?)를 통해 알아본 결과, ROTC 오락부장 출신으로 유명했던 신임교수가 같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나이트클럽을 빌려 행사를 진행했는데 3학년 홍보부장이 사회를 봤다. 그런데 그 녀석이 다른 학번들에 비해 말주변이 없어서 분위기가 점점 식어갔다. 참다못한 필자가, 학과장의 사명감을 핑계로 무대에 뛰어올라 마이크를 빼앗았다. 고교 시절 응원단장 경력이 있었던 필자는, 술김에 신나게 사회를 보며 학년별 게임을 유도했다. 그런데 그때 돌발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함께 참석한 신임교수가 무대로 갑자기 뛰어오르더니 필자 마이크를 빼앗았다. “분위기가 지루하니까 지금부터 개인 장기대회를 연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인다!” 그는 각종 성대모사와 개다리 춤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거기에 자극받은 필자는 그동안 학생들에게 절대 안 보였던, 그야말로 망가지는 각종 개인기를 선보였다. 그해의 신입생 환영회는 교수들의 장기 경연대회장이 되어버렸다! 그 후 홈커밍데이가 되면 졸업생들이 한마디씩 했다. 엄숙한 주례사를 하시는 교수님을 보다가도 그 장면이 생각나면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온다고…. # 장면 3. 사돈 부부와 테니스를 쳤다. 사돈끼리의 경기는 항상 긴장감이 감돈다. 이겨도 적당히 이겨야 한다. 접대 고스톱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훈련 과정에서 형성된 운동신경과 동물적 본능에 의한 반사신경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필자의 강한 스매시를 안사돈이 발리로, 그것도 너무나 멋지게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트에 떨어진 공을 주워 서비스권을 가진 안사돈에게 건네주며 “사람이 아니무니다~”라고 외쳤다. 그 시절, 개그콘서트의 박성호가 갸루상 역할을 하며 유행시킨 말이었다. 사람이 받아칠 정도가 아닌, 그야말로 너무 멋진 발리라고 칭찬한 뜻이었다. 그런데 개콘을 안 보는 안사돈은 가슴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필자의 딸에게 심각하게 그 뜻을 물어봐, 해명을 하느라 애를 먹었단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나 통하는 유행어를 아무한테나 쓴다고, 딸한테 한마디 들었다. 그러나 오늘도 필자는, 젊은이들의 유행어를 ‘고르곤 졸라’ 쓰며 낄낄거리고 ‘개 웃기며’ 산다! 젊은 시절에는 ‘분위기 좀 탈 줄 안다’고 표현되던 것들이 나이 들어서는 어느새 ‘주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정작 우리 인생의 진한 추억들은, 이제 거기에 더 깊이 새겨진다.
- 2018-03-0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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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학자 노명우, 심정으로 들여다본 ‘그저 그런’ 사람들의 인생사
- 모든 부모가 처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상상하지 못할 뿐, 그들에게도 감수성 예민한 10대 사춘기, 호기롭고 꿈 많던 20대 시절이 있었다. 노명우(盧明愚·52)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그런 부모의 삶을 대신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원고를 완성하기 전 2015년과 2016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이어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부모를 잃는다는 건 ‘응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응석’을 비워내기 위해 잠시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호칭을 유예하고, ‘자연인 노병욱’과 ‘자연인 김완숙’의 삶을 ‘인생극장’에 담았다. 노명우 교수는 ‘인생극장’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통해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동시대 평범한 이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3년에 걸쳐 탄생한 이 책의 집필은 본래 대학생들에게 과거 대중영화를 매개로 한국 사회의 형성 과정을 이야기할 목적에서 ‘영상사회학’ 강의를 개설한 것이 계기가 됐다. 노 교수의 아이디어를 눈여겨본 ‘세상물정의 사회학’(노명우 저·사계절출판사)의 편집자가 이 강의를 캠퍼스 울타리를 넘어 세상 밖으로 꺼냈고, 고전영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세상물정극장’을 만들었다. 일종의 확장된 거실처럼 작은 극장엔 많은 사람이 모여 영화를 보며 울고 웃었고, 그 자리엔 늘 노 교수의 어머니가 관객으로 함께했다. “세상물정극장이 열리는 날이 어머니에겐 일주일에 하루뿐인 소중한 외출 시간이었어요. 당시 아버지가 치매를 심하게 앓으셔서 어머니가 돌보고 계셨거든요. 그때 아버지의 삶과 고전영화를 연결해 ‘인생극장’의 초고를 쓰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죠. 그러고 7개월 후엔 어머니가 시한부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저도 어머니도 충격이 꽤 컸어요.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나는 어머니가 하루를 살더라도 열흘처럼 느끼게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삶을 대신 써드리는 것이더라고요. 그렇게 책의 주인공을 더블캐스팅으로 바꾸게 됐습니다.” ‘아버지이기도 했던’ 한 남자의 인생 어머니 생전 책을 완성하려 했지만, 간호를 병행하며 원고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책이 나오면 아들과 함께 출판기념회이든 강연회이든 다니고 싶다던 어머니의 바람은 안타깝게도 이뤄드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남짓 만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시면서 반년 정도는 원고를 한 자도 못 썼어요.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감정이 솟구치고 한이 생겨서 키보드 끌어안고 울고…. 또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인생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죠. 한 사람의 삶을 쓰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떤 가치평가라는 게 들어가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과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에 주저하던 시간이 길었어요.” 마음을 잡고 글을 쓰려 해도 부모의 삶을 객관화해 바라보기는 어려웠다.태어날 때부터 내 아버지, 어머니였던 그들의 삶을 회고할 때마다 어떠한 한계에 부딪히는 답답함이 생기곤 했다. 그러던 그에게 돌파구처럼 한 단어가 떠올랐다.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나 제가 가진 정보만으로 인생을 써내기엔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러다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세상을 살다 간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생각을 전환하니 비로소 보이는 삶의 궤적들이 있더라고요. 그때 떠오른 단어가 ‘심정’이었어요. 아버지는 결혼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설을까? 엄마를 사랑했을까? 첫아이를 낳았을 땐 어땠을까? 그런 심정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죠.”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수록 노 교수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누구보다 평범했던, 그래서 그 스스로 ‘그저 그런’이라 표현할 정도로 보편적인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야말로 그 시대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역사였다. “아주 부자이거나 엘리트라서 시대가 주는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님의 이야기 속에 동시대인들이 공감하는 놀라운 삶의 공통분모가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들의 삶이 얼마만큼 우리 시대에 기록되고 전달되나 고민해보니 아들로서의 의무감을 넘어 사회학자로서의 책임감까지 생기더라고요.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이들의 삶을 남겨야겠다고 강하게 느꼈어요. 그때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은 오늘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니까요.” 유예된 사춘기,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다 젊은 시절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려 노 교수는 직접 추억의 장소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청년기를 간접 경험하기 위해 만주 선양, 일본 나고야를 순회했고, 어머니의 사춘기를 엿보고자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일대를 ‘소녀’의 심정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엄마의 흔적을 따라서 창신동 꼭대기에서 출발해 효제초등학교까지 걸어갔어요. ‘나는 가난한 집에서 구박받는 한 소녀다’라고 감정이입을 하고 그 길에 서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모습이 허깨비처럼 나타나기 시작했죠. 당시 산동네에서 내려오면 고래 등처럼 으리으리해 보였을 이화장, 조금 지나면 눈에 들어오는 경성제국대학, 그 거리를 오가는 예쁜 여대생과 멋진 신여성들을 보며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저들과 같은 삶을 살겠지’ 라는 희망을 안고 학교에 가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끊어진 삶의 조각들을 이어갈 수 있었죠.” 소녀였던 어머니도 세월이 흘러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노 교수는 6·25전쟁이라는 사건과 겹쳐 볼 때 어머니는 ‘증발된 사춘기’를 보냈으리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 역시 사춘기를 겪었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너무나 다른 경험을 했어요. 특히 어머니는 전쟁통에 사춘기를 보내셔야 했죠. 원래 사춘기는 자기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도 ‘사춘기’라는 핑계로 본인도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고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그런 감정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전쟁을 겪으며 뭐든 꾹꾹 눌러 담고 숨기는 데 선수가 되어버리신 거죠. 유예된 사춘기를 보내셨다고 생각해요. 그 영향으로 어머니 또래 분들은 평생 하고 싶은 것, 필요한 것을 드러내지 않고 사셨고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파고들수록 절절히 전해지는 심정은 노 교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해 마음이 ‘아리다’고 표현했다. 두 단어가 주는 차이는 ‘부모의 부재’를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장례를 치를 때만 해도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다 마치고 집에 오니 슬픔이 확 밀려오더라고요. 힘든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엄마가 딱 ‘고생했네 우리 아들’이라고 하는 게 익숙한 경험인데,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허전함이 컸어요. 칼국수를 먹다가도 느닷없이 엄마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리고…. 슬프고 힘든 건 남에게 설명이 돼요. 그런데 아린 감정은 말로 설명하려면 너무나 길고 복잡해서 표현이 안 되죠. 그전까지는 슬픔을 제어할 수 있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짜 성인은 부모를 잃고 나서 찾아오는 아린 감정을 느끼고, 그것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까지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부모님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 그는 아린 마음을 ‘인생극장’을 쓰면서 달랬다. 노 교수는 책을 엮는 동안이 극복의 과정이었고,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듯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내면의 성숙을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전에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내가 이걸 성공했을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참 좋아하시겠다’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어요.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슬픈 일보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더 마음이 아려요. 뭔가를 해냈을 때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네’라는 환청까지 들리는데, 실제 전할 대상은 없잖아요. 그러면 앞으로 내 삶의 동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전까지는 부모의 칭찬을 기대하며 힘을 얻었다면, 요즘은 내 부모처럼 글로 전하지 못하는 삶을 산 이들과 이후 세대의 가교역할을 해내는 것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고 있어요. 그렇게 사회학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 2018-03-07 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