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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곶감 빼 먹 듯하다
- 참 다행이다. 60살부터 국민연금을 매달 꼬박꼬박 받을 수 있어서 말이다. 연금수령액은 실생활에 충분하지 않아도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직장이나 일거리가 있어 일정한 소득이 발생하면 그 범위 안에서 쓰고 확실한 장래 수익이 예정되어 있으면 앞당겨 써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수익이 없거나 적을 때, 저축하여 둔 돈에서 쓴다면 그 쓰임새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생각 없이 쓰다 보면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오면서 종종 경험한 일이다. 근래에 ‘Downsizing’이란 말이 많이 회자한다. 기업체를 비롯한 조직에서나 인생 2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소득이 줄어든 상황에 맞게 쓰임새를 줄여야 함을 이른다. 돈을 벌지 못하거나 수입이 줄어든다면 맞춰 생활해야 한다. 모아둔 돈을 쓰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이 나기에 십상이다. 금리가 바닥인 요즘엔 더더욱 그렇다. 우리 속담에 “곶감 빼 먹듯 하다”란 말이 있다. 달콤하여 한둘 먹다 보면 앙상한 꼬지만 남게 된다. 소득이 없거나 적은 경우엔 수입 범위 안에서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 너무 옹색할 필요는 없어도 분수에 맞지 않은 지출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방법의 하나가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방법을 실천하는 일이다. 필자는 그런 일의 하나로 이발을 아주 저렴하게 할 수 있는 곳을 이용한다. 고향 청학동 마을 어르신들이 상투를 틀고 지내는 것처럼 이발하지 않고 길게 기르는 방법도 있겠다. 그렇게 사는 분들을 주변에서 보기도 하여 그런 방법으로 머리를 관리해볼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필자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처럼 손질하기로 했다. 일반 이발소를 다니다 안사람의 권유로 미장원을 이용해왔다. 지난해 봄부터 머리 깎는 장소를 바꿨다.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이발관이다. 이 근처엔 이발관이 눈에 띄게 많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지역임을 참작해선지 3,500원을 받다 지난 연말에 4,000원으로 올렸다. 머리를 감으면 500원이 추가된다. 그래도 싼 편이다. 이발 솜씨도 양호하다. 이발사는 중.장년층으로 가위질에 빈틈이 없고 손님들이 대부분 만족해한다. 머리를 깎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필자는 이 근처에서 모임을 하는 기회가 많아 이곳에 들릴 때 시간을 내어 머리를 깎게 되기에 시간과 이발료를 절약한다. 한가로운 시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지하철 우대로 교통비를 들이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지역이다. 시니어들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실버극장을 비롯한 볼거리, 값싸면서 질도 괜찮은 먹거리도 있어 나이 든 분들이 많이 모여든다. 소득에 맞게 지출하려는 시니어 경제생활의 일면을 본다. 은퇴하고 난 직후는 과거의 생활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현실에 맞는 자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질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는 것도 은퇴 후 지혜로운 경제생활이다.
- 2018-03-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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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의 노래하는 예술가, 버스커 한복희
- 작은 체구에 은빛 단발을 한 여자가 바람 부는 거리에 나타난다. 아직 조금은 쌀쌀한 날씨. 길 위에 선 여자는 뭔가 투덕거리더니 마이크를 집어 들고 청중 앞에 선다. 잔잔하게 선율이 흐르면 그녀의 인생이 담긴 목소리가 터져 안기다 마음속에 녹아든다. 바삐 가던 이의 속도가 느려지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귀 기울인다. 그녀의 마법에 하나, 둘 빠져들더니 멈춰서는 발걸음, 또 발걸음. 길 위의 예술가 한복희(韓福姬·58) 씨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 모두가 판타지 속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장소협조 보수동 정.[점] 저기 저 분 노래 되게 잘 불러요! 부산의 남포동 밤거리를 거닐던 어느 날. 사람들이 몰려든 곳을 향해 누군가 소리쳤다. 음악이 들리는 곳은 이미 인산인해. 길거리 공연을 많이 봐왔지만 노래 부르는 이가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는 건 드문 일이다. 그때 딱 스치는 사람이 바로 중년의 버스커(거리 예술가) 한복희 씨였다. 언젠가 SNS 영상을 통해 그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봤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부르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언젠가 우리 지면을 통해 꼭 소개하겠노라 사진까지 저장해놓았었다. 그런 그녀가 앞에 나타났으니 머뭇거릴 틈이 있겠는가. 노래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 한복희 씨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는 부산시 보수동 책방 골목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환하게 반겨 웃는 모습에 포근함이 느껴진다. 50대 끝자락. 그녀는 왜 부산 길거리 귀퉁이에서 노래를 부르게 됐을까. 대인공포증을 이기려고 대중 앞에 섰어요 누가 믿겠는가.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길거리는 콘서트 현장이 된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서서 그녀를 응원하는 팬 또한 상당수다. 대중 앞의 그녀가 사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니! “전문 버스커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본격적으로 노래하기 전까지는 섬유공예를 했어요. 광목 위에 매일 그림을 그리고 빨래하고 염색하고 다림질도 하고요. 그 세계에서 충분히 바쁘고 즐겁고 행복했어요. 누구를 만날 시간도 음악을 집중해서 들을 여유도 없었어요. 그 일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인간관계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자신이 꾸며놓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았다. 친구들도 그 안에 오게 해서 함께 놀았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어 새로운 삶이 열렸다. “지금은 돌아다니며 살고 있죠. 처음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어요. 내가 부산에 와 있는 건 예전이라면 상상 못할 일이죠.” 관객들 중에는 한복희 씨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공연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고 느끼면서도 남자에 대한 경계는 여전하다. 중년 남자들이 와서 악수라도 하자고 하면 정중히 거절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쭉 싱글인 것 같다고 멋쩍게 웃는다. “물론 정말 노래가 좋아서 다가오는 사람도 있지만 가끔은 술 냄새 나고 비릿한 냄새 풍기는 남성분이 있어요. 정성스럽게 노래를 불러드렸으면 됐지 뭘 손까지 잡아줘요.(웃음)” 영국 노처녀의 모습에서 본 희망 그녀에게 단비 같은 용기를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가수 수잔 보일(Susan Boyle, 1961~)이다. “그분이 저에게 절대적인 용기를 줬어요. 예술가처럼 보이지도 않고 시골에서 올라온 푸짐한 시골 노처녀가 뮤지컬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아이 드림드 어 드림(I dreamed a dream)’을 부르는데… 관객 모두의 입이 떡 벌어지잖아요. 내 안에 노래를 향한 불씨가 있는지 몰랐는데 수잔 보일을 보고 난 뒤에 힘이 났어요. 며칠 동안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고. 그 사람이 나오는 영상을 보는데 너무 떨리는 거야.” 한복희 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반인의 숨은 재능을 발굴하는 tvN ‘코리아 갓 탤런트(Korean got talent)’를 통해서였다. 생업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심하던 상황이었다. 그녀 나이 53세. 대단한 도전이 시작됐다. “섬유공예를 하면서 줄곧 써오던 염료 때문에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천식이 발병했어요. 이제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을 때 마침 그 프로그램이 생긴 거죠. 나는 정말 악보도 볼 줄 몰랐어요. 음악을 좋아하고 꾸준히 들은 것 말고는 뭐가 없었어요. 막연한 자신감이었어요.” 무대에 서서 에디트 피아프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를 부르는 순간 관객들은 환호했고, 심판단의 극찬이 뒤를 이었다. 몇 년 후 ‘아시아 갓 탤런트’에도 초청됐다. “‘코리아 갓 탤런트’가 끝나고 노래 연습도 안 하고 있을 때였는데 ‘아시아 갓 탤런트’가 노래를 향한 두 번째 불을 지펴줬어요. 역시 나는 노래를 할 때 굉장히 행복하구나, 건강 때문에 힘들 때였는데 노래는 굉장한 기쁨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줬어요. 불 속에 뛰어드는 마음이었어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 하다 죽자!” 한복희 씨는 인터뷰 내내 숨을 깊게 내쉬고 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노래하며 사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웃음이 넘치고 생기가 솟았다. 그녀에게 노래는 수많은 의미를 담은 보약이다. 서울 인사동에서 부산 남포동까지 길바닥에 누워 자는 한이 있어도 노래하는 삶을 택하겠노라 굳은 다짐을 했다. 언제 올지도, 내 앞에 설지도 모르는 관객을 만나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2015년 11월, 서울 인사동에 작은 스피커와 마이크를 들고 섰다. 당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보느라 추워진 날씨가 돼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때는 뭐 진짜 노숙자 같았어요. 노래를 부르고 싶은 절박함도 있었어요. 부랑자가 되더라도 나는 음악을 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었어요. 그래야만 내가 충격을 덜 받으니까요. 산발한 긴 백발에 군용 잠바를 입고 그렇게 나섰어요.” 개업(?) 첫날. 빛이 점점 잦아드는 오후 5시. 조그마한 박스 하나 놓고 준비한 노래를 불렀다. 삽시간에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며 수군대는 사람들. 정신없이 노래를 부르고 난 뒤 눈을 떴을 때! “비현실적이었어요. 꽃 선물에 돈은 물론이고요. 이렇게 계속된다면 달리 노래를 부르기 위해 직업을 찾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신호가 굉장히 좋았죠.” 알고 보니 인사동은 버스커들이 좋아하는 장소였다. 동창 모임이나 출판기념회 등을 하고 나온 중년들이 쉬이 지갑을 열어 팁 박스 두둑하게 돈을 넣는다. “인사동 거리에는 내 나잇대의 기억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서성입니다. 그러다 보니 팁도 후하고 앞에서 춤도 추고 그러죠.” 비현실적인 인사동 거리는 반할 만했지만 다른 블루오션을 찾기로 했다. 젊은 버스커들과 소위 자리 경쟁 같은 건 하기 싫었다. 인사동에서 이태원으로 대학로로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러다 2016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글로벌 스타가 되어 브로드웨이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고 싶어요. 제 목표죠. 그래서 가요보다 외국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외국 문화계 인사들이 많이 오잖아요. 그래서 갔어요. 기대를 했는데 태풍이 몰려와서 영화제가 거의 폐점 상태였어요. 제가 지방마다 팬이 좀 있는데 부산 팬이 며칠 동안 가이드를 해줬어요. 그때 찾은 곳이 바로 남포동입니다.” 부산 하면 꼭 남포동이 생각났다. 서울로 가기 전에 남포동에 좀 데려다 달라고 팬에게 부탁했다. “차에서 딱 내리자마자 느꼈어요. 남포동이 나를 환영하더라고요. 활짝 팔을 벌려서요. ‘어서 오세요’라고요.” 곧바로 노래를 한 곡 했더니 관객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비로소 부산 팬하고 축포를 터뜨렸다. “부산에서 재밌는 일이 많아요. 노래하는 친구들이 저한테 ‘너무 감동받았습니다. 우리는 가짭니다!’ 이러기도 하고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모두들 표현이 강렬했어요.” 자기 세상 속에 살던 엄지 공주 한복희 씨는 매력적인 남포동 기운에 이끌려 부산행을 결심했다. “부산 생활은 1년 좀 넘었어요. 친근하고요. 부모님 두 분 다 함경도 출신이세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던 지식인이셨고요. 제가 사는 보수동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대요. 우연이라기보다 DNA의 이끌림? 정서적으로 이물감이 없고 자연스러워요. 서울 생각 잘 안 나요.” 욕망과 집념으로 인생을 그려가다 “제가 그림을 그리고 천식이란 병을 얻게 되는 과정은 욕망이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표현의 차이겠지만 나는 뭘 하든지 욕망 강한 사람이에요. 노래를 하면서도 굉장히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져요. 반드시 정점에 올라야 하는 승부사 기질이 있는 거예요. 지나치게 올인하죠.” 강원도 원주에 작업실을 꾸며 2년여 섬유공예를 할 때 밥 먹는 시간을 잊어버릴 정도로 천과 색에 매료돼 있었다. 작은 결과물이라도 손에 쥐어지면 황홀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쉼 없이 몰두하던 어느 날 숨소리에 이상이 왔고 더 이상 염료들과 마주할 수 없게 됐다. 그때 빛처럼 다가온 것이 노래, 노래였다. “그림을 그릴 때도 프랑스 노래 좀 배워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파니핑크’에 삽입됐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이 노래가 극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러곤 나도 멋지고 강렬한 노래 한번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웃음) 너무 어렵더라고요.” 한복희 씨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에디트 피아프의 대표곡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사실 이 노래를 듣는 사람 대부분은 한복희 씨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다. “명절에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노래를 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지만 감동이 없잖아요. 제가 원어민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최대한 원어에 가깝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어는 정말 할 줄 몰라요.” 완벽하게 노래를 부르기 위해 천 번 이상 듣고 공부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일도 없다. 동영상 속 에디트 피아프 선생님(?)을 모시고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정열을 쏟아 얻어낸 결과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면서 공연이 다 끝나면 장비를 챙긴 후 내가 나한테 얘기해요. ‘오늘 노래 참 괜찮았다, 그렇지? 오늘 괜찮은데?’ 이런 기쁨, 자긍심이 생겼어요.” 인생의 아름다움은 비현실에 있다 최근 천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 한복희 씨. 그럼에 불구하고 노래만 부를 수 있다면 어디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물론 꿈은 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극장이 있으면 좋겠다. “나만의 공연장이 있으면 꼭 하고 싶은 것이 모노드라마예요. 내가 부르는 노래는 제가 성장하면서 알게 된 곡들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 이야기도 하고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한복희 씨. 좋아하는 공간을 만들어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좋은 음식도 만들어 먹고 싶단다. “내 삶의 가치는 행복에 있어요. 경제력은 자존감이 손상되지 않는 선만 지키면 될 거 같아요. 약간 비루하고 불편해도 상관없어요. 노래를 선택하면서 저는 그 대가를 지불했고 잘했다고 봐요.” 인생의 맛을 이제 알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진다고. 그래도 노래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녀는 순간순간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 2018-03-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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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왕자를 찾아 떠난 바오바브나무의 고향, ‘마다가스카르’
- 왜 여행하느냐에 대해서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정의와 이유가 있지만 아마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일상에 묻혀버린 꿈과 환상을 충전하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른이 된다는 건 시시해지는 것”이라고 일갈했듯이,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후회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고, 이럴 땐 다시 한 번 꿈을 충전하기 위해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떤 여행도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행이야말로 진정 젊음을 충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 아프리카와 인도 대륙 사이의 바다, 인도양에 유유히 떠 있는 섬 마다가스카르는 실제로 가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 이름만은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바로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와 보아뱀의 고장이며,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여행은 비행기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목적한 나라의 비행기를 타는 경우 여행 기분은 배가된다. 마다가스카르항공은 프랑스 것이라더니 모든 안내방송이 프랑스어가 먼저 나온다. 그다음이 영어, 그다음이 말라가시어(마다가스카르 공용어) 순이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여행의 인상은 바로 승무원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마다가스카르에는 18개에 이르는 다양한 부족이 살고 있고, 외모 또한 아시아인에서 아프리카인까지 다양하다. 그 이유는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2000년 전 인도네시아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살기 시작한 뒤 아랍의 상인들과 아프리카의 노예, 유럽의 제국주의가 밀려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는 80%의 국민이 농사를 짓는 농업 국가로, 국토의 많은 부분이 논이며, 우리처럼 하루 세끼 쌀밥을 먹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루 세끼 흰쌀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다가오면서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바오바브나무의 고향, 모론다바! 바오바브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쪽 끝에 있는 모론다바라는 도시로 가야 한다. 모론다바로 가는 비행기는 19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로, 손님의 숫자에 따라 제멋대로 항공시간을 변경해버리기도 해서 고객을 당황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탑승수속 땐 짐의 무게뿐만 아니라 승객의 몸무게도 잰다. 비행기가 워낙 작아 무게를 초과하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오지를 가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천천히, 천천히”와 “문제없다”는 말이다.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로는 “모라모라”, “짜마니노나”라 한다. 황당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들은 “모라모라”, “짜마니노나” 하며 활짝 웃는다. 오지 여행에서는 아무리 서둘러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니 느긋한 마음을 먹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마다가스카르의 최대 볼거리로 꼽히는 바오바브나무 군락지와 칭기국립공원의 입구 역할을 하는 모론다바는 ‘긴 해안’이라는 뜻으로 바닷가에 면해 있다. 수도 안타나나리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살갗을 태울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람도 개도 늘어져 있는 이곳에서는 휴양 모드의 유럽 여행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동네 소녀들은 그늘에 앉아 머리를 땋으며 놀기도 하고, 소년들은 타는 듯한 태양 볕에도 아랑곳없이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천 년의 지혜가 들려주는 말들 해안가를 벗어나 바오바브 애비뉴로 들어서자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드문드문 바오바브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바오바브나무 군락지! 그것은 목이 꺾어질 듯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도 장대했다. 1년에 고작 3mm씩 자라는 나무가 저만큼의 크기가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걸까. 정말이지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보고 간다 해도 마다가스카르 여행은 충분할 것 같다. 바오바브나무는 세계적으로 8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에 7종이 흩어져 있으며 나머지 1종은 호주에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의 비교를 불허한다. 속이 뻥 뚫릴 만큼 하늘을 향해 길쭉길쭉 늘씬늘씬 시원하게 뻗어 있다. 감탄사가 터지는 순간을 많이 만나는 일, 그것이 바로 행복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소혹성 B612를 온통 엉망으로 만드는 무서운 식물이 있다”며 바오바브나무를 안 좋게(?) 묘사하고 있지만, 난 천 년이나 되었다는 신비한 바오바브나무를 보면서 식물이야말로 신의 안장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바오바브나무를 바라보며 한없이 걷고 또 걷는데 저 멀리 보이는 바오바브나무에 뭔가 자그마한 것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벌레라기엔 좀 크다 싶은 그것을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아이였다. 아이는 바오바브나무와 인간을 대조해서 보여주려는 듯 나무에 딱 붙어 서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천 년이나 된 바오바브나무와 대조되는 작은 인간의 모습. 마치 “문명국가에서 온 너희들이 좀 산다고 오만해봤자 천 년 된 바오바브나무 앞에선 모두 다 ‘고작 요만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내게 나무처럼 살라고 말하는 듯했다. 현실이라는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딛고서도, 끝없이 천상을 향해 뻗어 나가라고….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러운 바오바브 두 번째 날엔 바오바브 애버뉴를 조금 벗어나 독특한 바오바브나무들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러브 바오바브(love baobab)’와 ‘성스러운 바오바브(holy baobab)’다. ‘러브 바오바브’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 달리 두 개의 줄기가 엉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혼여행객이나 연인이 많이 찾아와 사랑을 맹세한다고. ‘신성한 바오바브’는 성황당처럼 마을 입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고 마을 주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몹시 영험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가 소원을 빈다. 그렇게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런 바오바브를 거쳐 이윽고 다시 돌아온 ‘바오바브 애비뉴’. 역시 마다가스카르는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실컷 봐도 그만인 곳이었다. 마다가스카르에 온 지 며칠 안 되었지만 그래도 묘사할 게 몇 개 있었던 것 같다. 온종일 먹어도 좋을 것 같은 끝내주는 바게트 맛이라든지 수도 안타나나리보 재래시장의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 칭기국립공원의 찌를 듯한 암석들까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숙소를 향해 달리는 길. 군락에서 떨어져 혼자임을 즐기는 바오바브나무들이 양손을 펼쳐 바이바이를 한다. 하나하나 작별을 고하며 바오바브나무들에 이름을 붙여본다. 발레리나 바오바브나무, 고독한 바오바브나무, 체조하는 바오바브나무…. 천 개의 느낌표가 가슴에 와 박힌다. travel tip ★찾아가기인천에서 방콕까지 타이항공(5시간소요), 방콕- 마다가스카르까지는 마다가스카르 항공(9시간 소요). ★기본여행정보한달간 무비자국가로 오랫동안 프랑스식민지였던 관계로 현재까지도 불어가 널리 통용되며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가 공용어다. 화폐단위는 아리아리(Ariary)로, 1000원=2000아리아리 정도. 커피와 사탕수수, 쌀이 주농작물이다. ★지도 & 추천여행루트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시내관광, 재래시장, 유적지를 본후 국내선으로 모른다바로 이동해서 바오밥 군락지, 그랑칭기국립공원을 보는 것이 핵심코스. ★준비물오프로드에 가까운 비포장도로를 장시간 달리므로 앉아있기 편안한 차림을 하는게 좋으며, 오지마을을 지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필이나 공책, 천으로 된 가방, 의류, 풍선, 사탕 등 준비해가면 현지인들을 위한 소중한 나눔이 될 수 있다. ★여행경비350만원 내외
- 2018-03-0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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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보면 후회할 갤러리展, ‘빔 델보예’부터 ‘마르셀 뒤샹’까지…
- 바야흐로 봄이다. 산으로 들로 봄꽃 나들이도 좋지만, 풍성하게 마련된 전시도 즐길 겸 갤러리 나들이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올 한 해 눈여겨봐야 할 5가지 미술전시와 더불어 연간 일정을 함께 정리해봤다. ◇ 빔 델보예 개인전 장소 갤러리현대 일정 2월 27일~4월 8일 신개념주의(neo-conceptual) 예술작품들로 주목받는 벨기에 작가 빔 델보예의 국내 첫 전시다. 돼지 몸에 문신을 새긴 작품들을 선보이며 ‘돼지 문신’ 작가로도 불리는 그는 드로잉, 조각, 사진 등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며 독특한 소재로 구현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문양의 미학적 요소를 사물에 응용한 작품들과 일반적인 형태와 개념의 맥락을 비트는 작품 30여 점을 보여준다. 고딕 양식으로 레이저 커팅한 스틸, 손으로 조각한 타이어, 살라미 햄으로 구성한 대리석 문양의 바닥 사진 등 작가만의 유머러스한 작품세계와 전통적 요소가 맞물리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빔 델보예 (Wim Delvoye, 1965~) 박제된 돼지의 몸에 명품 브랜드의 로고를 그려 넣으며 경악과 흥미로움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세계로 유명해진 빔 델보예는 스위스 팅겔리 미술관(2017),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무담(2016),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2016), 파리 루브르 박물관(2012), 로댕 박물관(2012), 베니스 구겐하임 컬렉션(2009), 리옹 현대 미술관(2003), 파리 퐁피두 센터(2000)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베니스비엔날레, 시드니비엔날레, 상해비엔날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독창적인 예술관을 펼치고 있다. ◇ 정강자: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 장소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일정 5월 6일까지 한국 아방가르드 작가계의 선두주자이자 1970년대 대표 여성 작가인 정강자의 회고전이다. 정 작가는 개인전을 위해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쳤지만, 지난해 7월 위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하며 이번 전시는 그의 유고전이자 최초의 회고전이 됐다. 올해 1월 31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월 25일까지)과 천안(5월 6일까지)에서 동시에 개최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생을 기리고 그의 50여 년 화업을 미술사적, 사회적으로 균형 있게 재조명하는 데 주력한다. 작가의 최근작과 더불어 아카이브 자료를 배치해 자신의 삶을 여성상과 자연물, 기하학적 형태에 투영한 작품들을 아울러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정강자 (鄭江子, 1942~2017)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졸업 후 ‘키스미’(1967)처럼 파격적인 조형작업을 비롯해 ‘투명풍선과 누드’·‘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1970)과 같은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1960~70년대 당시 젊은 예술인들의 도전이 응집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신전(新展)’의 일원으로 한국 미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여러 경계와 틀로부터 해방되고자 했으나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작업에 대한 선정적인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다. ◇ 니키 드 생팔 개인전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일정 6월 30일~9월 25일 프랑스 여류 작가 니키 드 생팔의 작품 12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특별 전시다. 프랑스 파리 스트라빈스키 분수의 공공미술로 잘 알려진 그의 대담성과 순수함을 드러내는 입체조형물 및 회화, 판화 등으로 구성된다. 화려한 컬러와 독특한 구조가 돋보이는 그의 후기 입체작품들을 폭넓게 전시할 계획이다.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여성지 ‘보그’와 ‘엘르’, 사진 주간지 ‘라이프’의 사진 모델로도 등장했을 만큼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니키 드 생팔은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술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슈팅 페인팅’(1961) 등 그의 작품은 페미니즘 성향이 두드러지며 여성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 많은 편이다. 그가 만들어낸 뚱뚱한 여성 조각인 ‘니나’ 시리즈를 비롯해 여성의 몸을 과장해 표현한 작품에는 여성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분노와 고발 의식이 담겨 있다. ◇ 윤석남 개인전 장소 학고재갤러리 일정 9월 예정 2013년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I’m Not a Pine Tree)’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윤석남의 개인전이다. 홍콩 아트바젤(세계적인 미술품 아트페어) VIP 책자 전면에 소개되는 등 국내외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큐레이터들의 극찬을 받은 설치미술 ‘핑크룸’(1998)이 갤러리 한 층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화 기법을 통해 제작한 그의 신작 발표가 예고돼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윤석남 (尹錫男, 1939~)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세’(1919)의 극작가 겸 영화감독인 윤백남의 셋째 딸로 태어나 해방 이전까지 만주에서 살았다. 1954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6남매를 홀로 키우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는 줄곧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고 있다. 40대에 늦깎이 화가로 데뷔했지만 ‘어머니의 이야기’(1995), ‘부엌’(1996), ‘허난설헌’(2005) 등 꾸준히 작품을 내놓으며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 마르셀 뒤샹 전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일정 2018년 12월~2019년 4월 예정 국내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리는 마르셀 뒤샹의 전시다.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주요 작품 및 아카이브는 물론, 마르셀 뒤샹을 소재로 한 사진, 드로잉,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 1890~1976)를 비롯한 당대 작가들의 관련 작품까지 총 110여 점을 소개한다. 특히 변기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뒤샹의 대표작 ‘샘’(1917)을 이번 국내 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도쿄국립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립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순회전이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 프랑스 화가 자크 비용(Jacques Villon, 1875~1963)과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Raymond Duchamp-Villon, 1876~1918)의 동생으로 인상주의, 포비즘,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입체파의 균열된 형태, 사진과 영화의 스톱 모션 등 자연의 시공간에 관한 지배적 관념을 뒤엎는 아방가르드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2’(1912)는 당시 예술평론가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켰을 만큼 독특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여성으로 분장하고 찍은 사진 ‘로즈 세라비’(1921), ‘심지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1923) 등 파격적인 예술세계를 보였으며,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 손꼽힌다. ◇ 2018 상반기 전시 일정 3월 '이정진: 에코-바람으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월 8일~7월 1일 '예술가 (없는) 초상'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 3월 20일~5월 20일 김용익 개인전 ‘Endless Drawing’ 국제갤러리 3월 20일~4월 22일 '한국서예사특별전: 명재 윤증'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3월 29일~5월 20일 4월 이반 나바로 개인전 'THE MOON IN THE WATER’ 갤러리현대 4월 19일~5월 27일 5월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5월 3일~10월 14일 '강요배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5~6월 예정 6월 육근병 개인전 ‘생존은 역사다’(가제) 아트선재센터 6월 15일~8월 5일 ◇ 2018 하반기 전시 일정 7월 '박이소: 기록과 기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7~12월 예정 '조선민화걸작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7월 5일~8월 26일 '이창수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7월 예정 8월 '프란시스 알리스 개인전' 아트선재센터 8월 31일~11월 4일 9월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2018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9월 6일~11월 18일 11월 아키 사사모토 ‘항복점(Yield Point)’ 아트선재센터 11월 23일~2019년 1월 13일 '제국의 황혼, 근대의 여명: 근대전환기 궁중회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1월~2019년 2월 예정 12월 '한국현대미술대가: 한묵'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2월 4일~2019년 3월 10일
- 2018-03-0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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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페르시아의 양탄자다”
- 수원의 공군부대 110대대 라운지에서 근무한 지 몇 개월이 지나서 필자는 사표를 냈다. 공부하려고 백화점 일도 그만두었는데 근무가 끝난 다음에 시간을 갖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양에 차지를 않았다. 그래서 전적으로 공부에만 매달리기로 결심하고 과감하게 일을 포기했다. 그런 다음 새벽에 서둔야학에 가서 혼자서 공부를 했다. 연습림의 새벽 공기는 차다. 그리고 신선하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머리 또한 맑았다. 도서실에 있는 헌 참고서를 뒤적이며 공부를 했다. 어쩌면 공부가 그렇게도 재미있고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는지…. 몇 개월 동안 만져보지 못한 책, 그리고 공부에 대한 갈증이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기에 필자는 목마른 사슴 처럼 정신없이 마셨다. 지식이라는 단물을. 오랜만에 책을 잡는 기쁨이 칠년대한에 단비를 만난 듯한 기쁨이었고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감격이었다. 공부를 한참 하다가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는데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해서 그런지 그럴 때도 강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선생님들이 보시던 것을 혹은 당신 친구들에게 얻어다가 도서실에 마련해주신 각종 참고서가 무엇보다도 요긴하게 쓰였다. 참고서 하나 변변히 사볼 형편이 못 되었던 필자는 야학 도서실에 있는 참고서만을 의존해 공부를 한 것이다. 그즈음 야학 도서실에 있는 책 중에서 우연히 손에 쥐고 보게 된 것이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였다. 책을 보던 중 ‘인생은 페르시아의 양탄자다’라는 구절이 필자의 머릿속으로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필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별안간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내 나름대로의 무늬를 짜 가면 되는 것이다. 남이 뛰어간다고 초조해하지 말자. 나는 걸어가면 된다. 나는 나 나름대로의 삶의 형태가 있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다. 보다 잘 죽는 것이다. 임종의 침상에서 웃으며 죽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결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 생각하며. 웃자. 밝게 살자.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자. 감사하며 살자.’ 그렇게 필자 나이 열아홉 살, 그때부터 인생관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동안 남과 비교하며 좌절하고 열등감에 빠지곤 했던 자신이 우습게 생각이 됐다. 더 이상 초조하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이젠 웃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부터 웃으며 살 수 있었는데 이따금씩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항상 웃으면서 살아요?’ 그러면 그냥 웃었다. 필자의 웃음은 그냥 얻어진 웃음이 아니다. 10대의 혹독한 시련과 모진 아픔 속에서 얻어진 웃음이다. ‘인생은 페르시아의 양탄자다’라는 말의 뜻을 후에 분석해보니 그 당시 필자가 생각했던 의미가 아니었다. 필자는 각자 나름대로의 무늬, 즉 각자의 삶에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의미로 읽었는데, 페르시아의 양탄자 무늬가 아무 의미가 없듯이 인간의 삶도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지구상에 생겨난 그 많은 생물 가운데 하나인 인간에게 의미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인생의 허무’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필자가 단단히 오해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소화할 때 작가의 의도대로 이해를 하든 오해를 하든 그것이 문제 될 일은 없다고 본다. 무엇이든 얻는 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갈등과 의혹에 빠져 있던 필자가 길고 긴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살아가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될 때 기쁘다. 요즘에는 가르치는 데 필요해서 컴퓨터 관련 서적을 보다 보니 참 재미있다. 제자들에게 “어때 공부하기 재미있지?”라고 물으면 “아니요, 재미없어요. 지루해요”라고 대답한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그럴 때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건데요. 불행히도 여러분은 너무 좋은 부모님을 만나 배움에 굶주려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소중한 기쁨을 느껴 볼 새가 없는 거예요. 공자님도 말씀하셨죠. 인생삼락을. 삶에 있어서 공부하는 즐거움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에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기억력이 왕성한 여러분 나이에 하나라도 더 알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정말 필요해요.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추수할 것이 없어요. 그렇다면 인생의 봄을 보내고 있는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요즘 아이들은 배고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서러운 일인지 모른다. 특히 배움에 대한 굶주림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기가 싫어 몸을 뒤트는 제자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 시간에 청계천 평화시장 한 모퉁이에서는 그들 나이의 봉제공들이 불과 4~5평의 공간에서 먼지를 들이마시며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린다. 밤잠도 제대로 못 자며 중노동에 시달리는 소녀들이 있는 것이다. 교복이 입기 싫어 될 수 있으면 사복을 입으려 하는 제자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소원이었던 필자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다. 요즘 아이들은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 전에 미리미리 다 채워지니 아쉬울 것이 없다. 부족한 것 없는 아이들이 바라보는 삶과 어려운 항해를 마친 필자가 바라보는 삶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 2018-03-0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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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홍철, 4초의 승부를 위한 수천 번의 도약
-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우리나라 최초로 도마 종목에서 은메달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딴 신기술 여1, 여2를 개발해 한국 기계체조를 이끌어온 여홍철(呂洪哲·47). 그는 세상에 한국 기계체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체조를 안 했으면 조폭이 됐을지도 몰라요.” 1994년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3위,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도마 1위, 1996년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2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체조 도마 2위,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도마 1위 등 세계 무대에서 메달을 휩쓴 여홍철은 말한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을 가져다준 것은 ‘체조’였다고. 그의 체조 사랑은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야구가 좋아서 야구부에 지원했지만, 하필 그해에 야구부가 없어졌다. 마침 그때 눈에 띈 게 체조부였다. “초등학교 때 무협 영화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땐 날아다니고 재주 부리는 체조가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아 이건 내꺼다!’ 당장 체조부에 들어갔죠. 솔직하게 말하면 계속할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감독님이 찾아오셔서 ‘체조 계속하자, 운동하면 대학도 장학생으로 갈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다’면서 좋은 점만 얘기하시니깐… 거기에 완전히 혹해서 계속하게 된 거죠.(웃음)” 항상 따라다니던 부상 기계체조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금지된 기술이 있을 만큼 위험 종목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머리로 떨어지거나 잘못 착지할 경우 큰 부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여홍철 또한 부상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하필 국제대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사고는 태극마크를 단 그의 발목을 수차례 잡았다. 그는 그동안의 부상이 생각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선수촌에 들어갔는데 평행봉 연습을 하다가 손가락이 골절됐어요. 선수촌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짐 싸서 나왔죠. 아마 제가 단기간 퇴촌 기록 보유자일 거예요.(웃음)”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땐 경기 두 달을 앞두고 다쳐서 또다시 퇴촌했다. “철봉에 부딪쳐서 오른쪽 귀가 거의 떨어져나갔어요. 그때는 정말 아쉬웠죠. 어느 때보다 욕심이 났거든요.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목 부위가 찢어졌을 때예요. 당시 부분 마취가 불가능한 시절이라 마취도 안 하고 80바늘을 꿰맸는데 아직도 바늘이 살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생생해요.” 외상은 치료하면 되므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로 큰 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상, 바로 골수염이었다. 운동을 계속하면 팔을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그는 2년 6개월간의 공백기를 가졌다. 하늘이 그의 간절함을 알았던 걸까. 다행히 녹아내리던 뼈가 단단히 굳기 시작했고 여홍철은 고민할 여지도 없이 다시 체조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이런 시련들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다고 말한다. “솔직히 연습하다가 다치면 몇 개월 동안은 그 기술은 쳐다도 안 봐요. 아예 빼버리고 연습하죠. 사실 좀 겁났거든요.(웃음)” 메달 색을 바꾼 통한의 ‘세 발자국’ 운동선수라면 모두가 꿈꾸는 무대인 올림픽. 여홍철은 더 이상의 퇴촌은 없다고 다짐하며 선수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그에게는 첫 올림픽인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비록 결승엔 들지 못했지만 출전만으로도 큰 의미가 됐다. “그동안 부상을 워낙 많이 겪어서 그런지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행복했어요. 우선 관중 수부터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죠. 우리나라에서는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대회가 있어도 경기장이 텅 비어 있거든요. 많은 사람 앞에서 기술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그땐 메달을 따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실수하지 않고 보여주고 경기를 잘 마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했죠.” 그로부터 4년 뒤인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러시아의 알렉세이 네모프를 저지할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 선수로 꼽혔다. 더불어 한국체조 첫 금메달 유력 후보로도 거론됐다. 아니나 다를까, 도마 1차 시기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며 9.837점을 받았다. 이제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2차 시기를 앞둔 그의 모습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하얀 탄산마그네슘을 손에 묻히고 최고 속력으로 내달렸다. 힘차게 구름판을 밟고 그의 이름을 딴 신기술 ‘여2(두 손을 정면으로 짚고 공중에서 몸을 펴 두 바퀴 반을 비트는 동작)’를 선보였지만, 착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착지 불안으로 세 발을 뒷걸음질했죠. 내려오는데 순간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동안 힘들게 연습하고 훈련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아 4년을 더 기다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때의 개인적인 아쉬움은 말로 설명 못하죠.” 그가 착지 불안으로 휘청거리는 순간 경기장에 있던 관중들도 아쉽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경기 결과는 알렉세이 네모프와 0.031점 차이로 은메달. 그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연신 되뇌며 눈물을 보였다. 관중들도 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때의 실수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당시 1점은 1등에서 40등까지를 갈라놓을 수 있는 점수였어요. 만약 그때 세 발 뒷걸음이 아니라 뒹굴었다면 메달권에도 못 들어갔을 거예요. 저는 그나마 운 좋게 거기서 그쳤기 때문에 은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에게 가장 아쉬웠던 경기를 묻자 의외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꼽았다. “그 당시 제가 도마 세계 랭킹 1위였어요. 이번에는 꼭 금메달을 따겠다 다짐하고 출전했는데 웬걸 규칙이 바뀌었더라고요. 원래 두 번씩 기술을 펼쳐야 하는데 한 번만 하면 되는 거로요. 그건 다시 말하면 잘 못하는 선수라도 운 좋게 착지를 잘하면 결승에 올라가고, 실력이 좋아도 실수를 하게 되면 떨어트리겠다는 것이었어요. 바뀐 규칙으로 시드니올림픽 때 세계 랭킹 상위권 선수들이 거의 결승에 올라가지 못했어요. 대신 쉬운 기술로 착지에 성공한 하위권 선수들이 결승에 올라가는 바람에 논란이 많았죠. 결국, 이후엔 다시 원래대로 두 번 연기하는 거로 바뀌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아, 금메달은 신이 주는 선물이구나’ 하고요.” 체조는 상대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거나 불필요한 행동으로 도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혹시 체조도 안 보이는 공간에서 선수들끼리 기 싸움을 할까? “신경전이요?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어차피 개인마다 기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만 완벽하게 펼치고 오면 되거든요. 오히려 낯익은 선수들이 있으면 선수대기실에서 인사도 하고 서로 몸 장난도 하면서 긴장을 풀곤 했죠.” 여홍철은 체조는 상대와 하는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특히 수백 번, 수천 번씩 반복되는 훈련이야말로 가장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강조한다. “똑같은 기술을 연습할 때 그 지루함을 이겨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중간에 포기하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거고 이겨내면 내 기술이 되는 거고.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하려면 1~2년? 길게는 3~4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이 기간에 완벽히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한 가지 기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선 무한 반복이 필수였죠. 유연성 훈련은 어릴 때만 고통스러웠지 대표팀 되고 나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 물론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합니다.(웃음)” 우리나라 체조 역사상 전대미문의 영웅이었던 여홍철. 기술에서만큼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그는 비록 올림픽에선 금메달과 인연이 없었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여1, 여2 기술은 국제대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나이로 따지면 거의 끝 무렵까지 국가대표를 했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어요. 이젠 제 체조 DNA를 물려받아 체조선수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을 지지해주는 게 새로운 목표입니다.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큰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요.”
- 2018-03-0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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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순의 우제봉 씨,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위해 대학원 입학
- 꿈에 대한 열망 하나로 89세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을 또 입학하는 우제봉(禹濟鳳·89) 씨는 내친김에 박사까지 도전한다.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삶의 관록이 묻어난다. 1남 2녀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어머니로서의 삶을 완성한 그녀가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격동기를 지나온 여자의 삶과 그녀가 이루려 하는 꿈에 대해 들어봤다. “배움에는 때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또박또박 말한다. 89세.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수한 나이다. 우제봉 씨의 나이가 놀라운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을 향한 뜨거운 열의가 있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숙명여자대학교 원격대학원 실버비즈니스학과를 졸업하는 그녀는 우수논문상까지 탈 정도로, 젊은 사람들과의 공부 대결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열정과 결과를 보여줬다. 겸손하고 순종적인 여자 5년 전 우 씨는 남편을 먼저 보냈다. 그녀는 지금도 죄의식이 느껴진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남편이 떠난 것 같아 부끄럽다 말한다. 부끄러움이라고? 젊은 세대라면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죄의식을 느끼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대는 지금과는 다르다. 누구 하나 떠나보내면 다 그런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날카로운 자로 잰 듯 나누고 재단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섞이고 묶이던 예(禮)의 시대가 거기에 있었다. “시집살이할 적에도 잉꼬부부니 애처가니 공처가니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서로 참 사랑했죠. 남편은 절 존중해주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어요.” 우제봉 씨의 기억은 남편을 처음 만났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의 집안은 소위 있는 집안이었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취직을 원했지만 부모님은 가문의 망신이라고 만류하며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 시청 문화과에 이력서를 냈고 취직이 됐다. 그녀가 시청에서 근무하다 상사의 심부름으로 다방을 들렀을 때의 일이다. 친구 누나가 운영하는 그 다방에는 미래에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다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남편이 가장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대시를 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더니 남편이 그녀를 막아서더란다. 그리고 자신과 교제하자고 했다. 요즘 같으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일이었다. 그 시절엔 여자에게 구애할 때 무데뽀로 밀어붙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무시하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복학하기 전까지 만날 그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 우제봉 씨는 심부름을 갈 때마다 그를 만났다. 솔직히 그렇게 다짜고짜 행동하는 남편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승낙하면 만나보겠다고 쪽지를 써서 그에게 전달했다. 설마 부모님까지 동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다짜고짜 시작된 연애, 그리고 결혼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상식을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남편의 고모와 가족들이 우르르 와서 그녀를 만났다. 남편만큼이나 기질이 화끈한 집안이었다. 다음 날에는 아예 시아버지가 만나자며 찾아왔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사주를 봐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주부터 보고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갑작스러운 연애, 더구나 처음 하는 연애였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은 것은 그의 인상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이순재를 닮았다는 남편은 이번에는 다짜고짜 그녀의 집까지 따라와서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의외로 남편의 그런 행동을 친정에서는 좋게 봤다. 패기 있고 자신 있는 모습이라는 평가였다. 이 또한 요즘 같으면 무단 침입으로 걸릴 일이었다. 과연 그 시절의 낭만이란 드라마틱한 사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힘이었던 듯싶다. “제가 살던 시집이 정릉 기와집이었어요. 지금은 성북 구립 유치원이 됐어요. 거기서 남편과 70년을 살았죠.” 남편 이야기를 꺼내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소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성실하고 강인한 여자 “결혼하니 주위에서 쟤 뭣도 모르고 결혼했네, 사흘도 못 살고 달아날 거라고들 얘기했죠.” 그러나 작고 단아한 이미지이지만 그녀의 심지는 굳고 두터웠다. 스스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아니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견뎠던 것 같다. 집안일뿐만 아니라 시부모가 낳은 늦둥이인 시동생도 키워야 했다.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녀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그녀를 많이 챙겨줬다. 사실 우 씨는 쌀도 씻을 줄 몰랐다. 요리하는 법도 시집에 와서 배워야 했다. 여느 시부모라면 그런 모습에 혀를 차며 한심해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도 그녀가 마냥 예뻤던 듯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면 밤 열두 시까지 방에 앉지 못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어도 웃으면서 시집살이를 할 수 있었다. 우 씨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인성과 지성이 함께 어우러진 데서 나온 게 아닐까. 그녀는 자주 ‘내가 여기서 행동 잘못하면 타인에게 누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명문학교 출신에 덕망 있는 집안의 가풍이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강인한 태도야말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이제야 자신만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꿈, 패션디자이너 “내가 공부하기엔 진짜 고령이지.(웃음) 입학할 때도 시선들이 만만치 않았어. 방송국에서도 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남편을 여의고 평창동 예능교회 봉사활동을 할 때만 가끔씩 밖에 나오던 우 씨를 부추긴 것은 자식들이었다. 자식들은 “엄마 좋아하는 일은 공부잖아”, “엄마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가장 보기 좋다”며 어머니가 늦게라도 공부하기를 종용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하고 싶은 공부였을까?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꿈, 그것은 바로 패션디자이너였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부터 패션디자이너 꿈을 갖고 있었고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갈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가서 공부하는 것을 남편도 반대했고 시댁 식구들도 반대했다. “그때 시댁에선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어요. 우리 딸들은 학원도 못 다니고 대학교를 갔죠.” 너무나도 이루고 싶었던 꿈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여자. 경력 단절의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었다. 벽은 높았고 그녀는 오를 힘이 없었다. TV에서 앙드레 김을 볼 때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미련이 몰려오곤 했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은 필요 자신이 놓친 꿈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숙명여대에 전화를 했을 때 그날이 마침 신청 마감날이었다. 그것조차 어떤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졸업을 위해 논문까지 쓰는 단계로까지 흘러갔다. “학기 중에 교통사고도 나고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이 나이에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시험을 봐야겠다 싶어서 김숙응 교수님에게 말했더니 ‘아깝게 왜 시험을 보느냐, 논문을 써야지’ 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논문을 쓰면서 그녀는 계속 자신을 재촉했고 교수에게도 재촉했다. 빨리 졸업한 후 다른 것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후회들을 던져버리고 다시 출발선에 선 그녀에게 공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을 마땅히 써야 하는 당위성 같았다. 평창동 예능교회에 가서도 열심히 기도했다. 그녀는 패션을 본격적으로 배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노리는 분야는 실버를 위한 패션 사업.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이론이 필요했고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집에서 버리는 옷들을 리폼해 선물로 주던 사람이다. 이미 실전을 충분히 익히고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적 지식이었다. 그녀는 최근 이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으며 운좋게 합격을 했다. 90대 패션디자이너의 꿈 패션디자이너가 되면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옷을 만들어서 팔아야죠. 돈을 벌어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돈을 버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촉’을 믿고 패션디자인 길을 걸어갈 의지로 불타고 있다. 자신이 번 돈으로 남을 돕는 일의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이 필요해요. 젊은 사람들 것은 이미 많으니까요. 시니어가 젊은 사람 옷 입으면 안 어울리거든요. 나는 그런 옷을 사면 다 고쳐서 입어요. 입으면 제 몸에 안 맞으니까요.” 젊은 취향의 옷만 있지 시니어 몸의 특색을 살린 옷은 없다는 그녀의 진단은 정확하다. 90대 패션디자이너. 듣기만 해도 경이롭다. 어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게 아직 홍보가 덜 됐어요. 그래서 내가 마음이 급할 수밖에요.(웃음) 그래도 늦으면 늦는 대로, 내 스타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입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말이죠. 나이에 맞는 패션은 없잖아요.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시니어 옷이 아니라 몸매나 취향에 맞게 시니어가 좋아할 만한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야무진 꿈은 어떤 결실을 가져오게 될까?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현실로 만든 그녀이기에, 그 어떤 꿈보다도 젊게 빛나는 그녀의 꿈이 기대가 된다.
- 2018-03-0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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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길 때, 읽어볼 만한 새 책들
-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신간들을 소개한다. ◇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 아이라 바이오크 저ㆍ위즈덤하우스 40년간 응급의학과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종사해온 웰다잉 전문가 아이라 바이오크 교수의 에세이다.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을 온전히 치유하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령 오랜 독설, 외면, 실망으로 얼룩진 사이라 해도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 소중한 네 마디 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네 마디 말은 “사랑해”, “고마워”, “용서할게”, “용서해줘”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했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해 뼈저리게 후회하는 수많은 사람을 경험하며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할 말을 하자’라는 자세를 통해 소중한 사람들과 깊은 정을 나누길 희망한다. 아이라 바이오크는 꼭 죽음을 목전에 둔 이가 아닐지라도 평상시 다양한 상황에서 이 네 마디 말을 잘 활용해 건강한 인간관계와 정서적 안녕을 누릴 것을 조언한다. 누구든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용서, 감사, 사랑을 틈틈이 표현해야 한다는 것. 그는 책에서 네 마디 말을 서로에게 건넨 환자와 가족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소개한다. 가족의 불화, 개인의 비극, 이혼 등 어긋난 관계를 치유하고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데 필요한 삶의 지혜는 단순하지만 귀중한 네 마디 말이었음을 되새긴다. 이해인 수녀는 “매일의 인생 여정에서 이 네 마디를 꾸준히 말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행복이 바로 곁에 있음을 새롭게 깨우쳐준다”며 “당장 사랑을 시작하자고 우리를 재촉하는 이 책을 많은 이와 나누고 싶다”고 했다. ◇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김형석 저ㆍ김영사 100세를 앞둔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저서 중에서 그의 삶의 철학 전반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추렸다. 1부 ‘잃어감에 관하여’, 2부 ‘살아간다는 것’, 3부 ‘영원을 꿈꾸는 자의 사색’, 4부 ‘조금, 오래된 이야기’ 등으로 나눠 삶의 의미에 대해 폭넓게 아우른다. ◇ 죽을 때 추억하는 것 코리 테일러 저ㆍ스토리유 소설가 코일 테일러가 뇌종양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 쓴 회고록이다. 유년 시절과 가족에 대한 추억,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고찰 등을 문학적 사색을 담아 표현했다. 아울러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추억하게 될지 물으며 삶의 방향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저ㆍ청미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대표작이다. 부정과 고립,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죽음의 5단계’를 정의하며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반응, 시한부 환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소개하며 죽음과 죽어감의 의미를 이해하게 만든다. ◇ 인간가족 에드워드 스타이컨 저ㆍ알에이치코리아 1955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첫선을 보인 대규모 전시 ‘인간가족’ 전에 소개된 68개국 273명 사진작가의 흑백사진 작품 503점을 수록했다. 냉전시대에 지구촌 인간가족의 일상과 희로애락이 담긴 사진들 속에서 과거 6·25전쟁 당시 우리의 모습도 돌아볼 수 있다.
- 2018-02-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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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동안에 한 번은 꼭 해야 할 것들' 외 새로나온 책들
- # '살아있는 동안에 한 번은 꼭 해야 할 것들' (박창수 저·새론북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획하고 그 흔적을 남기는 것에 대한 의미와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자 겸 작가 출신으로 최근에는 ‘시니어와 인생 2막’에 관한 방송을 하고 있는 저자는 “자기 시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이끌어간다면 우리는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로 ‘버킷리스트’를 제시한다. 책 서두에는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버킷리스트가 나온다. ‘버킷리스트’라고 하면 대부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로 인식하지만, 저자는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하게 될 만큼 정말 하고 싶은 일, 가치 있는 일’이라 표현한다. 아울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중요한 것은 하루라도 더 먼저 도전하면 그만큼 얻게 될 만족과 보람도 크다고 강조한다. ‘우선순위를 정하라’, ‘매년 리스트를 갱신하라’ 등 저자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 여행, 공부, 취미, 봉사활동 등의 항목이 버킷리스트에 많은데, 그보다는 개성 넘치는 나만의 여행 계획이나 때론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것을 몇 가지 넣어보라 권한다. 단순히 버킷리스트라는 주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가치 있는 것을 위한 포기는 아름답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어른이 되자’ 등 삶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 리더의 언어병법(김성회 저·㈜북스톤) 리더가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 상황에 따른 ‘조언 요청의 법칙’, ‘옆구리 설득의 법칙’ 등 36가지 언어병법을 소개한다. 1부 ‘말발’은 일상 업무에 필요한 소통 리더십, 2부 ‘끗발’은 정서적 소통 리더십, 3부 ‘운발’은 인생의 운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적 소통에 대해 다룬다. # 젊은이가 돌아오는 마을(후지나미 다쿠미 저·황소자리) 지방 재생 연구자인 저자가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오래도록 지속 가능한 마을 생존법에 대해 다각도로 모색했다. 인구 유인책의 모순과 맹점, 젊은 이주자로부터 환영받는 전국 마을 생존모델 등을 제시하며 인구감소시대 마을이 나아갈 길과 현실적인 대책을 담았다. # 늙어감의 기술(마크 E. 윌리엄스 저·현암사) 우리 몸이 나이 드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노화를 이해하고 건강하게 늙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늙으면 창의력이 떨어진다’, ‘살을 빼면 장수한다’ 등 노화에 대한 편견 8가지를 언급하며 구체적인 노화 관리 방법과 현실적인 조언을 제시한다. # 게르트너 부부의 여행(지뷜레 펜트 저·클) 치매에 걸린 부인, 그런 아내를 혼자 남겨둘 수 없는 남편, 한 노부부의 마지막 여행기를 담은 사진집이다. 사진작가 지뷜레 펜트는 발트해를 배경으로 여느 때처럼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등 평범하고도 애틋한 부부의 일상을 아름답게 포착했다.
- 2018-02-1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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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
- 우연히 건강관련 ‘습관이 건강을 만든다’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건강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소개된 이 책은 암을 이겨낸 220명의 건강 비법을 소개한 EBS 윤영호 교수가 펴낸 서적이었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테마였기에 늦은 밤까지 책을 정독하기 시작하였다. 메모까지 하면서 며칠 밤, 낮을 읽어 정독을 끝냈을 때는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누군가에게도 꼭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야 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 ‘습관이 건강을 만든다’는 암을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은 220명의 지혜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아프지 않은 몸을 만드는 건강 비법을 소개한 책이다. 암 경험자와 가족이 회복 과정에서 직면하는 불안과 실질적인 문제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10가지 건강 수칙을 자세히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인 서울대병원 암통합케어센터 윤영호 교수는 암 재발은 물론 모든 질병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건강관리, 즉 건강습관을 익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립암센터와 서울대 의대에서 17년간 ‘건강과 삶의 질’을 집중 연구하며 밝혀낸 ‘내 몸 살리는 10대 수칙’은 서울대병원 암 경험자들의 건강 회복 프로그램에 적용되고 있다. 10대 수칙에 따라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정보를 가장한 광고나 근거 없는 민간요법에 혼동되기 쉬운 의학 정보를 바로잡고, 암 경험자와 그 가족이 실천할 수 있는 맞춤 건강법을 제시한다. 암 경험자가 왜 올바른 건강습관을 가져야 하는지 과학적 근거를 통해 알려주고, 자신의 질병과 치유 과정에 대한 정보, 두려움을 일으키는 요인들을 이해함으로써 더 건강한 삶의 동기를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암을 이겨내고 퇴원한 후 5년이 경과한 환자들에게 설문을 한 결과 220명에게서 답변이 왔다. 어떻게 암을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았는지에 대한 답변은 10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1. 긍정적인 마음 갖기 2, 적극적인 삶 살기 3. 규칙적으로 운동하기 4. 건강한 음식 바르게 먹기 5. 금연과 절주하기 6. 정기적으로 건강검진받기 7. 과로는 금물, 나에게 맞는 생활하기 8.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9. 사람들에게 마음 베풀기 10. 종교 생활하기 암에 걸려 투병중이거나 치유의 단계를 거치는 사람들, 그리고 암 경험자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일상의 불편함을 핑계로 불평불만을 쏟아내던 나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사례를 중심으로 간결하게 설명해 준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해 주었다.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아픈 몸을 다루듯이 마음 구석구석 살피며 관리해야 한다. 특히 스트레스는 암을 예방하는 건강한 습관들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요인일 뿐만 아니라 암 환자와 경험자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부정적인 생각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오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순환한다. 이는 삶 전체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공적인 적응’이란 질병이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역할이나 삶의 질서를 침범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감정적인 반응들을 조절하며 절망감이나 열등감, 죄책감 등을 이겨내는 것을 말한다. 암 경험자들의 지혜와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10가지 건강습관을 실천해보자. 오늘 실천하지 못했다고 해서 “나는 역시 안 돼” 라고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시도하자. 마음먹고 시작했다는 결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아라 법정스님은 “행복은 다음에 이뤄야 할 목표가 아니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행복은 우리가 도달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기웃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부탄 왕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800달러(2016년 기준), 평균수명 69세(2015년 UN), 성인 문맹률 47%, 영아 사망률 32%인 나라(UNICEF 2012 기준)다, ‘세계 행복보고서 2017’에 따르면 세계 순위 97위의 국가이지만, 국민 행복지수 1위의 나라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진 나라이다. 하루에 단 몇 시간이라도 투자한다면 건강은 분명 회복되고 질병이 걸리기 전보다 더 건강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암 경험자가 최선의 결과인 완치가 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건강습관에 집중하다 보면, 재발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최악의 상황을 피해서 최선의 결과를 희망할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은 인간다운 삶과 가치를 추구하는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 2018-02-14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