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이니 스포츠 댄스를 배운지 10년쯤 되었을 무렵이다. 당시만 해도 댄스에 대한 이미지도 아직 개선되지 않았었고, 스포츠댄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스포츠 댄스를 가르친다 하여 등록했으나 배우다 보니 스포츠 댄스가 아닌 포크댄스였다. 지터벅 같은 사교댄스를 가르치기도 했다. 3년쯤 지나자 그 강사 밑에서는 더 배
아이들이 어릴 때였다. 안방 한쪽에 ‘생각의 의자’라는 것이 있었다. 이유 없이 떼를 쓰거나, 자매끼리 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그 의자에 앉아 반성의 시간을 갖게 했다. 그럴 때면 왜 화가 났는지, 울어야 했는지 억울한 얘기도 들어주었지만, 이기적인 마음도 내려놓게 다독이며 두 손을 잡아주곤 했었다. 이제 그 아이들은 다 자라 기억이나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
눈을 떠보니 여린 햇살이 수줍게 인사를 한다. 어느새 베란다 너머로 선선한 바람이 고통스럽던 여름의 이별을 고한다. 오고 가는 계절, 또 보내려니 아쉬움도 곁든다.
또다시 찾아온 새 달의 첫날 아침이다. 엊그제까지도 그렇게 숨통을 조이더니 잘 참아온 덕에 겨우 살만하다. 참기 힘들었던 시간들만큼이나 새 아침에 햇살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창문을 활짝 열
도종환(都鍾煥·62)의 는 그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깊은 산 속 황토 집에 머물며 쓴 산문집이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그는 가슴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인으로 불렸지만, 10여 년이 흐른 지금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었다. 그동안 세상도 참 많이 변했고, 그를 향한 몇몇 대중의 눈길도 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들국화를 좋아하
칡은 시골 아이들의 주전부리였습니다. 동네 친구들 하고 삽과 괭이를 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칡넝쿨 중 크고 실한 놈을 골라 괭이로 그 주위를 파들어 갑니다. 옆에서 친구들이 칡넝쿨을 잡아 당겨주면 파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낮은 산이어서 큰 칡은 없고 아이들 팔뚝 굵기 정도입니다. 톱으로 5~10cm정도씩 잘라서 입으로 겉껍질을 찢어서 뱉어 버리고 속에
책을 3~4백 권을 지하실 네 벽 가득하게 정리해서 간직했었다. 네 식구가 서로 필요해서 읽거나 사들였던 책들일 것이었다. 어느 해 여름에 비가 엄청나게 오면서 압구정 우리 집 지하실에 물이 차면서 1층도... 수해를 입은 것이다. 물이 빠지면서 이리저리 엉망으로 물 먹은 책 표지들이 부풀어 올라온 것, 다 찢겨져 나간 것들에 넋을 잃고 물에 젖은 책들과
2011년 대전 유성구 금고동 ‘안정 나씨’ 종중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미라 4기가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안정 나씨’ 묘에서 출토된 미라 4기는 나신걸(1461~1524)과 부인 신창 맹씨(15세기 말~16세기 초), 그리고 나부와 부인, 용인 이씨가 각각 합장된 부부의 미라다. 이때, 무덤 안에 있던 조선시대 복식 150여점과 다
오늘은 모처럼 장롱 속을 뒤집어 정리하기로 했다. 잘 입지 않는 옷이 가득한 옷장은 한숨부터 나온다.
연례행사로 안 입는 옷을 추려내어 재활용 옷 수거함에 넣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입지 않지만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옷이 한 가득하다.
한복 넣어 둔 서랍을 열어보니 곱게 싼 보자기에 보관한 우리 아들 아기 때 입혔던 옷이 나왔다.
면으로 된 흰색 쌍방울표
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
추워지기 시작했다. 일본 애들은 반바지 차림으로 다닌다. 며칠간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긴 바지를 입고 등교하더니 우리도 그냥 반바지를 입고 다니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무릎이 빨갛게 되면서 추워 보이는 게 안쓰러워서, 저 애들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괜찮지만 너희들은 이제껏 긴바지였으니 그냥 그대로 다니면 안 되겠느냐 해도 아니란다. 바람의 아들은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