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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민청 무대에 서다
- 필자가 활동하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창립 2주년 행사에서 댄스공연을 하기로 했었다. 필자가 이끌고 있는 댄스스쿨도 공연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일 년 전 도심권 50플러스센터 시절, 같은 무대에서 차차차로 공연을 한 적이 있어 이제는 그런 행사에는 당연히 댄스를 보여줘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 모양이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는 커플댄스이므로 제약이 많다. 우선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남녀 성비가 맞아야 커플을 만들 수 있다. 필자 전공인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는 적어도 호텔 그랜드볼룸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 하므로 서울 시청 태평홀 무대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그 정도 무대에 맞는 라틴댄스로 이번에는 자이브를 추기로 한 것이다. 체면이라는 것도 있었다. 수강생들을 무대에 올려 보내야지 선생이 직접 무대에 올라간다는 것은 보기에 안 좋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빠른 템포의 자이브 동작 열댓 개를 남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소화한다는 것부터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이나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니 기회 있을 때 하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이상 자이브를 가르쳤는데 적어도 공연에서 보여 줘야 단락이 마감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같이 춤을 출 파트너였다. 대상이 될 만한 사람들은 미리 사유를 들어 공연에 못 나간다고 빠졌다. 다행히 춤에 열정을 가진 한 수강생이 있어 공연 얘기를 했더니 일단 수락했다. 그러나 날짜가 다가오자 갈등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몇 차례 못하겠다고 포기 의사를 밝혔다. 춤을 추다가 순서를 까먹는 경우, 동작이 틀리는 경우, 관객 중에 우리보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와서 혹평을 할 경우, 춤 자체에 자신이 떨어져 남들 앞에 서기 이르다는 생각 등이 갈등을 촉발했을 것이다. 이윽고 디데이가 왔다. 좀 일찍 도착해서 무대를 점검해 보니 바닥이 카펫이었다. 마루에서 연습하다가 카펫에서 춤을 추려면 발이 미끄러지지 않아 춤추기가 어렵다. 특히 회전 동작이 많은 여자로서는 더 어렵다. 그러나 하기로 했으니 무대에 올랐다. 다행히 무난하게 잘 했다. 파트너가 몇 가지 동작이 틀렸으나 관객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파트너의 순발력 덕분에 안 보이는 것이다. 춤은 대부분 여성을 위한 것이다. 남자는 그 여성을 돋보이게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파트너는 외모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짧은 머리라 젊어 보이고 체형도 좋은 편이다. 끼도 넘쳐서 동작이 적극적이고 커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이 나게 만든다. 파트너는 어디선가 빨간 원피스 드레스를 준비해 왔다. 아직은 첫 무대이니 치마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왔지만, 춤이 익숙해지면 스스로 치마 길이가 짧은 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검정 드레스에 검은 색 모자를 썼다. 벗겨진 이마를 가리려면 모자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동영상을 보니 그런대로 잘 했다. 사진으로 본 드레스 모양과 콤비도 좋았다. 욕심 같아서는 좀 더 빠른 템포의 음악을 선곡했더라면 좀 더 박진감 있는 춤을 보여줬을 텐데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 2017-01-1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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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인물] 제로캠프 최불암 이사장
- “우리의 영혼은 빈곤합니다.” 한 아이가 허공을 향해 내뱉었다. 열 명이 겨우 설 수 있는 작은 무대. 그리고 그것보다 더 보잘것없는 객석과 몇 명 되지 않는 관객. 그러나 이 외침은 초로를 지난 대배우의 가슴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국민 배우’라 부를 수 있는 최불암(崔佛岩). 교실에 있어야 할 나이의 이 아이들은 쫓기듯 학교를 나와 이 대배우와 인연을 맺었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박규민 실장(스튜디오 봄) parkkyumin@gmail.com 그는 이 아이들을 ‘학교 밖 아이들’이라고 정의했다. 성인도 아닌, 그렇다고 학생도 아닌 불안정한 신분 위에 선 아이들. 몇 명이나 되겠나 싶지만, 교육부 자료를 찾아보니 2010년에서 2014년까지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누적 학생 수는 36만 명에 달한다. 2016년 초 진주시가 발표한 주민등록상 인구 수가 36만 명이었으니, 한 도시 전체 인구가 전국으로 흩어져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이 아이들에게 학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지원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제로캠프다. 제로캠프는 문화 중심지 홍대에서 청소년들이 문화예술을 통해 꿈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는 단체. “요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더욱 발전하면서 스승은 필요 없다고 선언해버리는 아이들이 있어요. 학교에서 잠만 자거나 아예 학교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이죠. 제로캠프는 그 아이들이 문화예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쉽지 않죠. 많은 아이들이 찾아오지만 그중 선별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사장 최불암’과 만난 날은 이렇게 찾아온 아이들이 10주 동안 노래와 춤, 연기, 영화 제작 등의 실무를 교육받고 그 결과를 객석의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객석 구석에서 그는 이사장으로, 스승으로 혹은 대선배로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TV에서 수십 년간 봐왔던 예의 따스한 눈빛으로 말이다. 왜 이렇게 학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걸까. 그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분석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잖아요. 욕망을 따르는 체제. 욕망에 얽혀 있는 사회에서 그 욕구를 제대로 해결 못한 채 살아가려 하니까, 자살률도 높고 아이들도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문화예술은 이런 욕구를 해소시키는 좋은 방안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위험 수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같이 해보자고 제안하고, 재능에 따라 교육을 지원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는 많은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데, 아이들 이름은 기본이고 어떤 아이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누구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다 꿰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더 해줄 수 없는 한계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여기서 10명 중 한두 명이라도 제대로(데뷔가) 되어야 하는데, 뽑히는 것이 쉽지 않아요. 소속사라도 있어야 기대라도 할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은 기특하죠. 예술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또 그 깨달음을 표현할 수 있는 창의적 수단을 갖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죠.” 그는 이 아이들의 무대를 어떻게 봤을까? 극중 연출가와 배우가 다투는 장면은 마치 ‘연출가 최불암’이 배우를 다그치다 참지 못해 직접 연기를 하게 된 에피소드를 보는 듯했다. 실제로 ‘청년 최불암’은 연극 연출가로 나섰다가 배우의 노인 연기가 마뜩치 않아 직접 배우로 데뷔하게 됐다.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완전히 구현했다고 평가해요. 가식이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기들의 마음을 읽어주길 바란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들 꿈이 소극장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아마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바로 이 극장에 모여 앉아 노래하고, 연습하며 자유롭게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어요. 자신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내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일종의 자기의 진상(眞相)을 내놓기 위한 절규일지도 모르겠어요.” 스승이자 대선배로, 그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한 아이는 무대에서 “배우란 남에게 보여주려고 있는 것”이라고 당차게 소리쳤는데, 혹시 눈앞의 스승에게 대선배에게 전한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우란 사회, 사람의 반향판이에요. 관객이 그 배우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순화시키는 거죠. 중국에서는 희곡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에서 연기자라고 불렀죠. 우리 조상들은 광대(廣大)라고도 했어요. 넓게 포용한다는, 지금으로 치면 매스미디어의 일종이라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임금에게 국민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잖아요. 그런 의미를 안고 성장하면 좋겠어요.” 자신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내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일종의 자기의 진상(眞相)을 내놓기 위한 절규일지도 모르겠어요.
- 2017-01-0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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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경북 예천군 풍양면 시골에 사는 전용숙씨 부부
- 글박원식 소설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귀촌을 하자고, 시골의 자연 속에서 노후의 안락을 삼삼하게 구가하자고, 흔히 남편 쪽에서 그런 제안을 먼저 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발칙한 발상이라 규탄당하기 십상이다. 아내에 의해서 말이다. 무릇 여자란 명민하게 머리를 쓰는 버릇이 있는 종족이다. 감관이 발달한 이 고등한 생물체는 도시의 아파트라는 쾌적한 온실과 결별하고 시골이라는 야생으로 이주하는 ‘거사’에 따라붙을 온갖 불편과 고생을 미리 훤히 내다본다. 일테면, 시골엔 손쉽게 쇼핑을 즐길 마트나 백화점이 없으며, 우아한 사교를 즐길 문화공간도 열악하고, 자칫 고독을 벗 삼아야 할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으며, 그 무엇보다 풀이나 해충에게 시달릴 일이 정말이지 몸서리치게 싫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대뜸 반기를 들 공산이 크다. 그럴 경우, 귀촌을 선창한 남편은 머리칼을 득득 쥐어뜯으며 부르짖는다. “아아, 괴롭고 괴롭도다. 마누라는 어쩌면 그토록 나와 취향과 이상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무슨 잔인한 운명의 농간이란 말이냐!” 소나기처럼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비감에 젖어 속으로 악을 쓰는 것이다. 이쯤에서 어떤 남편들은 자신의 불운을 타박하며 귀촌의 꿈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귀촌생활에의 도도한 로망과 세찬 영감에 사로잡힌 어떤 남편들의 경우엔, 불굴의 의지를 발동해 아내를 기차게 구워삶을 정교한 방책을 새삼 모색한다. 당나귀처럼 드센 고집으로 한사코 도리질을 하는 아내를 설득할 만한, 자못 그럴싸한 유인책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청사진을 개발할 경우, 그는 비로소 성공을 거둔다. 나는 지금 경북 예천 풍양면의 시골마을에 있는, 정진성(69)씨 내외가 사는 집 거실에 앉아 있다. 정씨의 귀촌은 순탄한 과정을 밟았다. 상당수의 귀촌 부부들이 난해하고도 예리한 충돌과 협상을 거쳐 어렵사리 귀촌에 이르지만, 그는 아내의 갈채와 자비에 힘입어 쾌조의 시발을 했다는 게 아닌가. 부부가 의기투합한 귀촌 서울에서 살았던 정씨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어느 날 아침,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이색적인 생각이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걸 알아차렸다. 서울을 냅다 걷어차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초저녁별처럼 영롱하게 들솟았던 것이다. 인파와 차량이 들끓고, 소음과 미세먼지가 난무하고, 계산과 꿍꿍이가 창궐하는 대도시, 그 머리 아픈 정글을 탈출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던 거다. 이 심상치 않은 기분은 점점 자라 확고한 신념으로 비약했다. 이후 그는 드디어 아내에게 귀촌을 제안했다. 아내 전용숙(64)씨의 반응은 뜻밖에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선선히 동의했으니까 말이다. 결과적으로 정진성씨는 귀촌을 둘러싼 아내와의 논쟁이나 힘겨루기를 일거에 면제받은 셈이다. 그렇게 단숨에 의기투합해서 부부가 시골에 내려온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 아내 전용숙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통은 여자들이 귀촌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시골로 가자는 남편의 제안이 차라리 고마웠어요. 남편이나 저나 서울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서울을 떠나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는 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게다가 제가 자연을, 그중에서도 꽃을 매우 좋아하는 취향이라서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지요. 귀촌을 하면 실컷 꽃을 가꾸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어요.” “꽃의 그 무엇을 매우 좋아하죠?” “음. 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이나 향기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비바람 같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피어난다는 게 참 좋아요. 크거나 작거나, 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모든 초목마다 제 나름의 역경을 이겨내고서야 꽃을 피우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남편께서 귀촌을 발상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울생활이 주는 피로감이 한계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남편은 토목 기술자로 평생 공사 현장에서 뛰었어요. 대림산업 부장으로 재직했던 1996년엔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능한 엔지니어로 토목 현장을 누빈 사람이었죠. IMF 직후엔 심각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자부심을 갖고 직분에 최선을 다했다고 봐요. 엔지니어에겐 정년이 없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이 가능하죠. 그러나 6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심신에 공히 무리가 오기 시작했어요. 특히나 비즈니스상의 술자리가 잦아 더 이상 일을 계속하다간 몸부터 무너질 거라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즈음 귀촌을 착상했는데, 다행히 남편의 고향에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10년째 비어 있는 집이 있어 결정과 실행이 빨랐어요. 그러고 보면 저희는 귀촌이자 귀향을 한 경우라 봐야겠죠.” “예수조차 고향에선 배척당했다고 해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부에게 쏠렸을 이웃들의 각별한 관심이 불편하진 않았나요?” “텃세랄까, 그런 거 말이죠? 처음 그런 문제에 염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워낙 인심 좋고, 반듯한 풍속이 정착된 시골이라서 오히려 과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매우 사교적인 성격이라 융화가 쉬었던 것 같아요. 남편은 현재 우리 마을의 노인회장이에요.” 전용숙씨 내외가 사는 집의 풍색은 소탈하다. 시부모님들이 살았던 당시의 구색을 가급적 그대로 놓아두거나 살려냈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약간의 손질과 약간의 단장을 했을 뿐이다. 인간이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듯이, 집이라는 사물 역시 결국은 자연으로 귀환하는 법이니 굳이 거창한 인위를 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햇볕이 물살처럼 찰랑이며 들이쳐 화단의 풀꽃들을 어루만지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마당이 있으니 이미 만족스럽고, 대기의 입자를 흔들며 불어오는 솔바람, 강바람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유리창이 있기에 더욱 흡족하다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녀가 시골살이 3년을 통해 배우거나 얻은 것 중에 최상의 것은 무욕(無慾)이 주는 마음의 평안이라지. 시골생활이 부여하는 절호의 기회들 집 뒤편으로는 제법 너른 텃밭이 딸려 있다. 12월의 텃밭은 철 지난 해변처럼 썰렁하지만 온기라 할 만한 기운이 여전히 감돈다. 서울에서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키워 자연과 땅에 대한 갈증을 간신히 채웠던 전씨에게 시골 텃밭은 숫제 낙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녀는 갖가지 작물을 심어 기른다. 풀을 뽑아내는 일이 고역스럽다기보다는 미안스러워 내심에서 우러나는 애도를 보낸다. 텃밭이니 가혹할 정도의 노동은 필요치 않다.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이 아니기에 소출에 욕심을 낼 까닭도 없다. 그럼에도 비지땀을 흘려 공을 들이는 건 작물들이 갓 태어난 손주나 노랑 병아리와 다를 바 없는 애틋한 생명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텃밭 농사를 서정적으로 즐긴다. 도시의 여자들이 찜질방에서 즐기듯이, 찻집에 둘러앉아 애먼 남편들의 흉을 푸짐하게 늘어놓으며 수다를 즐기듯이, 그녀는 텃밭에서 유유하게 노닌다. 텃밭보다 더 오래, 더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은 꽃밭에서 구현한다. 그녀는 해마다 30여 종의 화초를 가꾼다. 꽃철이면 울안에도 울밖에도 온통 꽃이다. 경북대 농대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그녀에게 꽃은 만고에 친애할 만한 동무다. 유심한 눈길로 꽃을 바라봐 꽃과 바람이, 꽃잎과 햇살이 어떻게 속삭이는지를 재빨리 간파한다. 폭풍에 찢긴 꽃대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 만개한 꽃들의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마음에 기쁨을 담뿍 담는다. 그렇기에 시골의 나날은 태반이 꽃날이렷다. 이런 자각을 할 때면, 그녀는 서둘러 일찌감치 귀촌을 하지 않은 것을 살짝 아쉬워한다. “서울에 살 때 실내원예연구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했어요. 실내조경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고요. 문화센터 원예 강좌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어요. 꽃을 즐기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거예요. 원예치료사 자격증도 있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원예치료 봉사활동도 했습니다. 일상 안에 꽃 사랑이 들어와 있을 경우, 한결 안정되고 조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 같아요.” “꽃을 너무 편애하는 건 아네요? 사람도 꽃 아닌가(웃음)?” “맞아요. 사람과 꽃이 다를 게 없다는 걸 시골에 살며 더 실감해요. 일부 도시 사람들은 요즘의 시골 인심도 도시와 다를 게 없다고 보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적어도 우리 마을에선 그래요. 뭐든 나누고 돕는 풍속이 여전하거든요. 귀촌한 뒤 원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죠? 그건 시골의 바탕에 깔린 나눔의 정서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라 봐요. 무조건 나누고 베풀어야 해요. 그런 처신이 손해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이득을 얻는 현명함이라는 걸 아셔야 해요.” “시골생활이란 이웃들과 나눌 줄 아는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절호의 기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제가 저 자신에게 바라는 인간상은 이웃에게 쓸모가 있는 인간, 바로 그런 것이에요. 나만을 중심에 놓는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고, 남들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면, 그건 참 잘 사는 인생이지 않겠어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평온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할 게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망둥이는 자주 길길이 날뛰어 소란 속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마음의 동향을 주시해서 단속할 수 있는 기회를 시시때때로 부여받을 수 있는 게 귀촌생활이라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사실 시골생활을 무난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의 스케일을 확대해야 한다. 마을 전체를 나의 집으로, 마을 사람 전부를 내 가족으로 바라보는 광폭의 마음, 그리고 소소한 풀꽃에까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까지 가세한다면 귀촌의 나날들은 안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시골에 살며 저는 많은 걸 얻었어요. 서울에 살 때엔 부부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지만 여기 내려온 뒤부터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렇다 해도 남편이라는 존재는 영원한 미스터리이지만, 남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포기할 건 딱 포기해버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서울에서 지출했던 생활비의 절반쯤이면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이점도 매력적이죠. 천성이 게으른 사람들에겐 오직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을 갖가지 노동도 운동이나 춤처럼 즐길 줄 아는 힘이 생겼고요,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어요. 남모를 애환? 숨기고 싶은 고민? 그런 게 전혀 없을 수 있겠어요? 인간이란 사실 굉장히 불안하고 모순적인 존재잖아요? 마음에 소용돌이가 칠 때면 강변을 산책해 속을 비워냅니다. 우리 마을의 멋진 강변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함께 걸어보실래요(웃음)?” 전씨 내외가 앞장서 강변으로 향한다. 첼로의 저음처럼 깊어가는 12월의 강변 오솔길. 강가에 늘어선, 잎 떨군 나무들엔 실존의 깊이가 있다. 군더더기를 다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모습으로 비쳐서. 사람이 어떻게 저 겨울 나목의 허심(虛心)을 온전히 닮을 수 있을까마는, 가급적 비우고 또 비우라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전용숙씨가 누리는 소박한 시골생활의 즐거운 지향도 비우기에 있다는 것이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1-0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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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 풍진세상 희망가를 부르는 소리꾼 장사익
- 장사익 소리판 대전 공연이 있던 날. 대전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인터뷰에 앞서 도리였다. 노래가 전부라는 사람, 장사익(張思翼·68). 작년 초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대결절 수술대에 올랐던 그는 8개월 뒤 불사조처럼 힘차게 일어섰다. 공연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나.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진 소리가 가슴을 뒤흔들었다. 음악 안에서 행복하다는 그가 살아 돌아와 부르는 노래.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대전 공연에서 만나고 수 주가 지난 뒤, 찻상을 사이에 두고 장사익과 마주앉았다. 종로구 평창동 그의 자택 너른 창 앞이었다. “다섯 잔은 해야 소통이 된대, 차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말을 건넸다. 인터뷰 때마다 치르는 장사익만의 통과의례이자 손님을 극진하게 맞이하는 인사법은 바로 차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수다스럽게 안부를 묻고, 지난 공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한창 담소가 무르익어갈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산 뒤쪽으로 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였다. “나 어렸을 적 살던 홍천 우리 집에는 동산이 있어서 오전 9시나 10시나 돼야 아침이 됐죠. 대신 뻘건 일몰은 수도 없이 봤어요. 나이 먹으니 거꾸로 됐어(웃음). 그게 바로 인생이라. 초창기 때 내가 되게 힘들었어요. 노을만 보는 인생이었어. 근데 지금은 해가 뜨는 걸 본단 말이야. 지금이랑 옛날이랑 완전 정반대죠. 내 인생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사는 것과 지는 해를 보고 사는 것과 어떤 게 더 힘이 있어?” 대한민국 중·장년층에서 장사익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공연 때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장사익 콘서트 티켓은 효도상품이 된 지 오래다. 1만7000명이나 되는 팬들과 여름과 겨울 꾸준히 팬 미팅을 진행하는 대형 가수이자 올해 예순여덟인 시니어 세대의 젊은 오빠(?) 장사익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1994년. 그의 나이 마흔다섯 되던 해다. 노을 드리우던 굴곡진 젊은 시절을 지나 밝게 떠오르는 인생을 40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맞이했다. 마흔다섯, 내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속이 뻥 뚫릴 만큼 유행가를 불러 젖히는 장사익. 소리꾼이 되기 전 그는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웃음기 없는 가장이었다. 15가지나 되는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동안 아련하게나마 위안이 됐던 것이 어렸을 적 동네 아저씨가 불던 태평소 소리였다. “세상에 그 어려운 밥벌이하느라 직장에서 얻어터지면서 살았어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 그걸 죽을힘을 다해 한번 해보자고 선택한 것이 태평소였어요. 아부지 장구 칠 때 옆에서 정말 태평소를 잘 불던 아저씨가 제 기억에 늘 있었거든요. 아무 욕심도 없고 별 볼일 없는 것에 내가 좋아서 목숨을 걸었어요.” 태평소를 손에 쥐면서 삶의 판이 바뀌어갔다. 노래하는 인생에 길을 내어준 것은 분명 태평소였다. “노래가 운명이었나봐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5년 동안 웅변 연습 삼아 목청을 풀었어요. 20대 초반에는 첫 직장 다니면서 대중가요도 3년 동안이나 제대로 배웠고요. 지금 부르는 유행가는 대부분 그때 알게 된 노래입니다. 군 3년 동안에는 문선대 가수로서 전라남도를 돌아다녔어요. 그땐 소리꾼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정말 신기하게 노래란 놈이 다가왔어요.” 그 운명의 끈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나게 해주었다. “1993년 1월 4일부터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끼어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어요. 임동창은 그때 김덕수 쪽에서 악보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요. 나는 이광수 쪽. 그러니까 사물놀이 전설의 라이벌 밑에 둘이 각자 있었던 거야. 공연할 때 뒤풀이에서 둘이 운명적으로 만난 거지. 나는 ‘저 피아노 치는 친구 잘하네’ 했고 임동창이도 ‘어! 저놈 노래 잘하네’ 한 거야. 내가 뒤풀이에서 조용필이야 조용필(웃음). 그때 임동창이가 ‘형, 그러면 한번 나가봐’ 그랬어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그의 인생 첫 콘서트가 계획됐다. 1994년 11월 6일, 7일 이틀에 걸쳐 열렸다. 벼락이 치는 소리만큼이나 강렬한 임동창의 피아노와 김기영의 북장단에 맞춰 ‘찔레꽃’을 비롯해, 20대 초 장사익이 낙원동 골목에서 배우고 흥얼거렸던 유행가를 관객 앞에서 불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0석 규모 공연장에 이틀 동안 800명의 관객이 찾아온 것이다. 장사익이 드디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셋이서 그냥 논 거야. 웃기는 거 아냐? 그때 내 나이가 마흔다섯이었어. 밤새도록 연습해가지고 딱 한 번만 하자 했어요. 첫날 공연 끝나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이게 행복이구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어요. 노래를 딱하고 그다음 날 일어났는데 너무 행복하고 좋은 거야. 그때부터 웃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주름살이 웃는 주름인 거예요. 하회탈마냥 웃잖아.” 노래 부르는 인생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 장사익은 공연 뒤풀이에 가서도 노래를 꼭 부른다. 긴 시간 공연에 쉴 만도 한데 그의 흥은 죽지 않는다. 함께 고생한 스태프와 팬만을 위한 무대가 뒤풀이 장소에서 더해진다. “제 인생에 신조가 있어요. 내가 속한 집단은 늘 행복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인상 쓰고 먹으면 독이 돼요. 아무리 허술한 음식이라도 즐겨 먹으면 약이 된단 말이에요. 일도 그래. 인생이 다 그런 거 같아요.” 근본 없는 세상, 희망가를 부르다 장사익의 대전 공연이 있던 작년 11월 2일은 온 나라가 대통령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떠들썩했다. 콘서트장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지만 무거운 돌덩이 하나쯤 가슴 한쪽에 안고 있지 않았을까. 장사익은 공연 중간 ‘근본 없는 세상이라 이런 일도 생긴 것’이라 말하고 ‘희망가’로 관객들을 위로하며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노래하는 놈이 목을 다쳐서 수술을 했단 말이지. 100m 달리기 선수가 달리다가 다리 부러진 거여. 그럼 어떻게 해요? 당장 앞이 안 보이잖아. 긍정적인 생각부터 해야지. 다행히 완벽하지는 않지만 목소리는 일단 찾았어요. 이렇게 노래하고 있을 때 행복하고 노래가 더 소중합니다. 우리나라도 똑같이 승승장구하다가 걸린 거예요. 정지.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는 거예요. 이건 아닌데. 가만히 보니까 폼도 잡고 있고, 객기도 부리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목을 다치니 뒤도 좀 돌아보고 내 모습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도 해보더군요. 이런 소중한 기회를 이번에 아프면서 알았어요. 이건 돈 주고도 못 사요. 그런데 딱 목에 신호가 와서 잠시 멈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반성하면서 곪고 터진 것들을 다 도려내야죠. 민주적으로 사정없이 혼내야죠.” 대규모 집회가 매주 집 주변에서 열리던 상황. 혹시 ‘희망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이 있다면 응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많이 했어요. 요즘에는 별로 얘기 않더라고(웃음). 나는 이렇게 같이 덩달아서 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지요. 제의가 있다면 늘 마음은 있습니다.” 인생, 3할대만 쳐도 성공하는 거예요 성대결절 수술 후 장사익은 8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절대안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병원에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목 또한 악기인지라 연습하고 가다듬어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 목 상태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음이라도 좀 내려 불러야 하련만 장사익 사전에 타협은 없다. “여기서 죽으면 관둬야 해(웃음).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하는 거여. 노래가 모두 다 좋을 수가 없어요. 특히 찔레꽃은 클라이맥스에서 톡 쏘는 느낌이 관객에게 전달돼야 하는데 그게 안됐을 때는 노래 전체가 살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늘 숙제하는 기분입니다.” 그는 노래가 잘될 때도 또 안될 때도 있다면서 인생을 야구의 타할에 비유했다. “요새 하는 생각인데요. 야구 상위 타자가 몇 타를 치는지 알아요? 3할 중반은 넘지만 4할은 못 넘어가요. 기가 막히죠. 백인천이 옛날에 4할을 치기도 했지만 말이죠. 국민 타자 이승엽도 10개 중 6~7개 정도는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못 치잖아요. 인생은 3할만 가도 성공하는 거예요. 세 번에 한 번. 그리고 두 번은 버려야 해. 욕심이야. 다 잘할 수 없어요. 그게 진리더라고요. 세 번에 한 번만 잘 쳐도 상위 타자로 들어가는 거야.” 그는 인생이 다 좋을 수는 없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가 오든 수용해야 한다고, 그게 세상살이라고 말한다. “2할대 타자도 준수하게 치는 거야. 3할도 하고 5할도 하려다가 모두 도둑놈 되는 거여(웃음).” 은퇴와 죽음이 맞닿을 나의 무대, 무대! 늦은 나이에 소리꾼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섰지만 그에게도 분명 생각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이 있을 것이다. 특히 성대수술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역시 그의 끝은 무대 위를 꿈꾼다.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조갑녀 선생님이라고 있어요. 이분은 마지막 춤을 내 무대에서 췄어요. 90에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나왔는데 딱 일어나서 1분을 췄어요. 그 어떤 춤보다도 기둥 하나가 춘 거여. 밀양 북춤의 대가 하보경 옹의 무대도 제 눈으로 봤습니다. 그분도 제자가 번쩍 들어서 무대에 올려놓았어요. 농악 장단이 들어가고 1분 있다가 손을 번쩍 드는데, 언제 저렇게 땅이 무너지는 춤을 또 볼 수 있을까. 다 벗어버려야 해요.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해요.” 장사익은 최근 유명을 달리한 노래하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캐나다·2016)과 차벨라 바르가스(멕시코·2012)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들의 노래를 ‘죽음을 코앞에 두고 부르는 노래’라고 표현한다. “이게 진짜 노래예요. 앞으로 나는 힘 좀 빼고 나이 먹는 것을 되게 기다리고 있어요. 남들은 나이 먹는 걸 두려워하잖아요. 나는 80에 90에 어떻게 노래를 부를까 궁금해요. 지금도 주름살이 골목길처럼 있는 놈이 더 늙어져서 지팡이 짚고 나와 비틀비틀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그런 꿈을 꾸고 있어요. 내가.” 일생에 좋은 노래 하나, 좋은 공연 하나, 안 했을 수도 있고 이미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장사익은 말한다. “진짜 저런 공연, 저런 노래, 그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인지도 몰라요.”
- 2017-01-0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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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방학 이야기] 긴 겨울방학은 우리들 세상이었다
-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최고의 카세트는 ‘GOLD STAR’라는 영문이 크게 찍힌 금성사 제품이었다. 삼성전자가 나오기 전이었고 성능도 좋은 편이어서 많은 사람이 애용했다. “한 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광고가 이 제품의 명성을 말해줄 만큼 신뢰도 또한 높았다. 1970년대에 필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이 카세트 한 대만 있으면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겨울방학은 참 길었다. 밤도 낮보다 길었다.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10여 명의 친구는 자주 어울려 긴 밤을 지새우곤 했다.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전축에 틀어놓고 밤새 부르고 흔들며 춤을 췄다. 노래도 배호의 ‘안개 낀 장춘단 공원’ 등 어른들의 유행가를 잘도 따라 불렀다. ‘킵 온 러닝’과 ‘프라우드 매리’, ‘뷰티풀 선데이’ 등 템포 빠른 음악에 맞춰 고고, 트위스트, 개다리춤을 닥치는 대로 추었고 다이아몬드 스텝까지 밟아대며 밤새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학창 시절 긴 겨울밤에 자주 이런 기회를 갖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학교 교실에 불을 따뜻하게 때주며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어줬기에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친하게 놀던 친구들이 어느 날인가 졸업을 앞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졸업하고 헤어지더라도 “20년 뒤에 다시 만나자!”라는 약속을 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날, 거짓말처럼 우린 다시 모였고 정식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은 지금까지 이어져 부부가 함께 만나고 있다.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당시 얘기들로 꽃을 피운다. 또 그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던 누님들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우리의 학창 시절 긴 겨울방학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 2017-01-0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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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브라보 기획] 시니어 세대, 우리의 소망은요~!
- 2017년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밝았다. 어수선하고 복잡했던 일들이 올해는 꼭 정리되고 치유됐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렇다면 우리 시니어 세대의 마음은 어떨까? 새해를 여는 시니어들의 마음도 한번 열어보았다. 취재협조 강남시니어플라자 은막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서임철(서대문구 홍은동·76) 저는 시니어 배우입니다. 서울노인영화제에 제가 출연한 작품이 출품된 적도 있어요. 연극부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데 활동이 좀 더 활기찼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단원이 열일곱 명인데 올해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각 지역 노인대학이나 단체를 방문해 공연 봉사를 하고 싶어요. 노인 연기자를 위해 정부 차원의 문화 관련 분야 지원이 늘었으면 해요. 제가 노후에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봐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연기생활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느낌입니다. 개인적인 소망은 영화 주인공을 꼭 한번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디션도 열심히 보고 있어요. 난타 여왕을 꿈꾼다! 윤상민(강남구 개포동·66) 작년 8월부터 난타를 시작했어요. 10월에는 재능기부 공연도 했고요. 아직 미흡하지만 열심히 배워서 전문 공연자만큼 난타를 잘하고 싶어요. 왕성하게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일어 공부도 시작했어요. 완벽하게 잘하고 싶어서 올해는 더 열중해서 공부를 해볼 생각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길 바랍니다. 2017년 나는 댄싱퀸 문혜경(강남구 청담동·69) 젊을 때는 운동도 많이 했는데 10년 정도 안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한 4~5년 전부터 많이 아팠어요. 혈압, 신장, 부정맥 이런 걸로요. 아프면서 버킷리스트를 한번 써야겠다 생각했죠. 그중에 무용을 좀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선 라인댄스를 배웠어요.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됐는데 너무 좋아요. 올해는 차밍댄스도 하고 고전무용에도 도전할 겁니다. 줌바댄스도 할 거예요. 신나는 음악에 다양한 스텝과 세련된 춤 동작이 멋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춤을 추면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 대상에 도전한다! 남궁유선 (강남구 방배동·69) 즐겁고 재밌게 사는 것이 소망 아닐까요? 더 늙기 전에 예쁜 모습을 남기고 싶어서 시니어 워킹을 배우고 있어요. 어렸을 때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어요. 사는 것에 급급했고 아이들 키우느라 나를 돌볼 시간이 없었어요. 다 끝났으니까 이제 열심히 나를 위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요. 제 꿈은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입상하면 좋겠어요. 올해 도전하려고 합니다. 딸? 결혼하면 안 되겠니? 구신자(관악구 삼성동·70) 제가 허리가 많이 아픈데 치료 꾸준히 받고 더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 딸이 올드미스예요. 마흔셋인데 시집을 안 가요. 시집 좀 갔으면 해요. 그런데 딸은 이대로가 좋다고 하네요. 굳이 등 떠밀고 싶지는 않아요.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면 말입니다. 제가 강남 시니어 모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2014년부터 TV, 신문, 잡지에 많이 나왔어요.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데 욕심이라면 일인자는 아니더라도 내 이름 석 자가 알려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글 쓰는 남자 기대해요! 송영섭 (경기도 용인시 영덕동·72) 우선 풍전등화 같은 우리나라가 빨리 안정을 되찾고 바람직한 지도자도 뽑고 평화통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통일의 여건을 만드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외교통일 분야에서 공직생활을 30여 년 했어요. 국제정치나 남북통일에 관한 책도 내고 논문도 많이 썼습니다. 올해는 수필 같은 부드러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동안 유머와 관련한 책을 두어 번 낸 적은 있어요. 또 제가 한국검도협회 고문으로 있는데, 기 수련에 관련한 책도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거 다 떠나서 순수한 삶의 철학이 담긴 수필을 쓰고 싶습니다. 화려한 외출은 이제부터다! 한명희(강남구 역삼동·62) 연극을 시작한 지는 몇 개월 안 됐어요. 그래도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전에는 주부였어요. 그러다가 환갑이 지나 나를 위해 산 적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울해하고 있을 때 친구가 연극을 권하더군요. 연극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완전 초보자인데 주연이셨던 분이 안 나오시면서 얼떨결에 주인공이 됐습니다. 지금 연기에 푹 빠져 있어요. 바람이 있다면 시인으로 등단을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비전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가족들이 제가 하는 활동을 인정해줬으면 해요. 우선 가족한테 칭찬을 듣고 싶어요. 제2인생에서 다시 청춘인데 제가 집에만 있으면 되겠어요?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보니 화려한 외출이었어요.첫 공연 때 가족을 초대할 겁니다. 장한 나를 보여주고 잘했다는 소리를 꼭 들을 거예요. 발길 닫는 대로 떠나는 해가 됐으면… 이주현(중랑구 중화동·72) 남편 병간호를 14년 동안 하면서 저도 허리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운동을 할 수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이 소리 지르고 두들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춤이랑 사물놀이를 배우고 있어요. 힐링도 되고 자세 교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사실 제가 자세가 좀 엉거주춤하거든요.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도 무용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면 자세를 다시 잡아요. 올해는 혼자 여행을 가고 싶어요. 남편을 챙겨야 했고 저도 아팠기 때문에 여행을 많이 못 다녔어요. 국내 여행도 많이 못해봤는데, 더 늦기 전에 제주 올레길을 걸어볼까 합니다. 혹시 여유가 생기면 유럽 여행도 꿈꿔 보려고요. 그러나 꿈으로 끝날 거 같아요. 허리가 아파서 비행기를 오래 못 타거든요.
- 2016-12-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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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규의 心冶데이트] 고독한 애주가 장은숙의 눈물, "70대가 되어도 최강 동안 소리를 듣고 싶다"
- 1957년생 장은숙은 1977년에 데뷔해 199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장은숙은 고독한 생활을 즐겼다. 고독했기에 행복했고 그래서 늙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녀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지만 고독했기에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것. 시집 한 번 안 간 그녀는 요즘도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이 편하고 재밌단다. 올해로 60세인 장은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최강 동안을 자랑하며 ‘함께 춤을 추어요’와 ‘당신의 첫사랑’ 등 여전히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몇 년 전 (KBS 1TV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무대에 오랜만에 나타난 장은숙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젊었을 때 보았던 장은숙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련되어졌고 농후한 맛까지 더해져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섹시해져서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나이가 60인데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강 동안(童顔)이었다. 그때 TV를 보면서 장은숙의 미모와 목소리에 푹 빠져 팬이 되어버렸다. 그 후 유튜브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와 마주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한량 이봉규는 정말 행운아다. 인터뷰를 마친 후 내가 내린 그녀의 최강 동안 비법은 고독이다. 그녀는 결혼한 적이 한 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봤다. “남들은 결혼을 세 번씩도 하는데 난 이게 뭐냐?”고 페인트 모션(feint motion)까지 쓴다. 그런 엉성한 페인트 모션에 넘어갈 한량 이봉규가 아닌 걸 금방 눈치 챘는지,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이 편하고 재밌다”고 자기 진단을 내린다.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과 살지 않는 바에야 혼자 사는 것이 편할 수 있다. 하기 싫은 것을 파트너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 그러다 보면 툭하면 싸우게 되고 스트레스는 가중된다. 그런 일상이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버리면 어느새 늙어버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런데 장은숙은 철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왔다. “싫은 사람은 아무리 비즈니스로 연결되어 있어도 만나지 않는다”는 고집불통적인 자기애(自己愛)가 최강 동안의 비법이 된 것이다. 고독하기에 자기만 사랑했고 그러다 보니 고독을 즐기는 선순환이 오늘의 장은숙을 만들었다. 물론 나름대로 젊어지려고 발버둥치는 노력도 병행했다. 15년째 경락 마사지를 받고 있고 운동은 늘 일상이다. 이런 노력도 결국 자기애의 일환이다. “70대가 되어도 최강 동안 소리를 듣고 싶다”는 그녀의 욕심은 무죄다. “더 이상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는 다 팽개치고 화장도 안 하고 산에 파묻혀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라. 얼마나 자기애가 강한지 알 수 있다. 아무리 고독을 즐기기로서니 나이 60인데 여태껏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봤다는 그녀의 말이 믿기 어려워 파고들었다. “가끔 섹스하고 싶은 충동이 없냐?”는 이봉규의 도발에 그녀는 “솔직히 운동하고 일하는데 열정을 쏟다 보면 피곤해서 그런 생각이 나질 않는다”고 답변한다. 그러나 오히려 섹스 생각이 나는 게 두려워 일부러 운동과 일로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운동과 일은 그녀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에너지 발산법이기에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나는 것이다. 그녀는 20대부터 요즘 유행하는 ‘혼술(혼자 마시는 술)’을 좋아했다. 지금도 집에서 혼술을 즐긴다. 어떨 때는 혼자 단골 바(bar)에서 새벽 두시까지 마신다. 언제부터인가 술 마시는 모임도 피곤해서 차단하고 혼자 마신다. “모임에 나가 말 상대하기도 피곤해서 싫고 차라리 편하게 집에서 마시는 것이 훨씬 즐겁다”는 그녀의 진단을 백퍼센트 이해한다. 한량인 나도 혼자 집에서 TV 보면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지금은 띠동갑 마누라와 신혼생활에 푹 빠져 집에서 음악 틀어놓고 제대로 막걸리를 즐기고 있지만). 고독을 즐기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을 밥 먹듯 하는 그녀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대화가 통하는 멋진 남자와 한잔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털어놓는다. 특히 공연이 끝나고 혼자 집에서 술 마시면 뭔가 허전함을 느낀단다. 오늘은 나와 ‘그루브’라는 라이브 카페에서 진토닉을 마시고 있다. 이미 1차로 주꾸미에 막걸리를 마신 후라서 취기가 슬슬 오르는지 “혼자 술 마시면 슬플 때도 있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남산에서 혼자 술 먹고 걸어서 집에 가는데 눈물이 났다”고 회상하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고독에 지칠 때도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피아노 반주에 장은숙이 노래를 뽑아댔다.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가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걸쭉한 허스키 보이스에 서구적인 마스크가 김정호의 노래를 지워버린다. 내친김에 앙코르, 삼코르, 사코르를 막 받는다. 토니베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카펜터스의 ‘This Masquerade’를 재즈풍으로 너무나도 멋지게 불러젖힌다. 그녀가 아직 독신으로 살고 있는 것은 몇 번의 찬스를 놓쳤던 이유도 작용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동생과 친척 동생까지 키우고 뒷바라지하느라 젊었을 때는 마음의 여유조차 누릴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함께 춤을 추어요’와 ‘당신의 첫사랑’ 등 잇따른 히트로 스타가 되었을 때는 바빠서 정신이 없었고, 37세 때부터 시작된 일본 생활은 엄격하고 혹독했기에 연애가 여의치 않았다. 매일 6시 반에 기상해서 학교에서 일본어 배우고 노래와 춤까지 연습하느라 마치 군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녀가 결정적으로 찬스를 놓친 것은 일본 가기 전에 잠깐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면서부터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에 또 다른 사랑을 찾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혹독한 일본에서의 연습생 시절, 한국에 있던 그 남자는 장은숙과 연락도 잘 안 되고 이상한 헛소문(“아쿠자에 잡혀갔다”)까지 돌자 그녀를 잊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달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 뒤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었지만 음양의 조화가 안 맞아 연애를 못했다. “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면 그가 도망가고, 나에게 달려드는 남자는 내가 싫고, 남자에게 애교도 부릴 줄 모르는 성격이라 연애가 잘 성사되지 않았다”고 애써 핑계를 댄다. 이토록 매력 있는 여성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애를 즐길 수 있었겠지만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장은숙은 고독한 생활을 즐겼다. 고독했기에 행복했고 그래서 늙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지만 무엇보다 고독했기에 오히려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녀는 1977년 동양방송(TBC)에서 주최한 대한민국 최초의 오디션프로그램인 에서 연말까지 승승장구한 끝에 우수상을 받고 데뷔했다. 이때 처음 받은 참가번호가 행운의 숫자인 ‘7번’이었는데 월말 결선에서도 7번을 받았고, 연말 결선에서도 7번을 받았다. 하늘이 그녀를 미리 점지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국악을 배운 그녀는 가끔 절에 들어가서 연습을 하곤 했다. 연말에 우수상을 타고 나서도 득음을 위해 화곡동에 있는 절에 들어가서 2년간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래서인지 끈적끈적한 허스키 보이스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1981년에는 코미디언 이주일과 이라는 영화의 주인공도 했다. 톱스타로서 승승장구하던 장은숙에게 해외 진출의 기회가 온 것은 1995년. 그녀는 일본 토라스레코드 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장수(Chang Suu)’라는 예명으로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계은숙이 일본에서 한참 활동한 후여서 같은 이름의 은숙이라는 본명 대신 일본 기획사에서 지어준 ‘장수’라는 예명을 사용했다(2009년부터는 본명 장은숙으로 다시 바꿨다). 그녀는 데뷔 첫해 일본 유선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고, 2000년 발표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방송 및 각종 차트에서 12주 이상 1위를 차지하며 총 25만 장의, 당시로서는 상당한 앨범 판매 기록도 세웠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표한 음반은 21장인데 이 중 14곡이나 유선방송(리퀘스트 차트) 1위에 올랐다. 지금은 2003년에 설립한 연예기획사 ‘오피스 장수’의 대표로서 후배 양성도 하고 있다. 요즘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바쁘게 생활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한국에서의 활동 비중을 점차 늘려나갈 예정이다. 나는 그녀의 노래 중 ‘당신의 첫사랑’을 가장 좋아한다. 예전에는 이 노래 가사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불렀는데 지금은 감정이 달라 다른 분위기로 노래한다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스무살 시절, 다섯 살 연상의 연대생 오빠와 신촌에서 막걸리 마시던 추억이 떠오른단다. 최강 동안이니만큼 이제는 다섯 살 이상 연하의 멋진 남자와 첫사랑 같은 싱그러운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 그런 날이 빨리 와서 ‘고독한 최강 동안’에서 ‘고독한’이라는 형용사를 빼고 다른 형용사가 붙기를 기대해본다.
- 2016-12-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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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면 가왕 경험기
- 2016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송년 모임에서 복면 가왕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180여명의 동문들이 모이는 큰 행사였다. 복면 가왕은 TV에서 재미있게 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행사 열흘 전 심한 독감으로 몸져누워 있는데 주최 측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복면 가왕 프로그램에 노래하는 사람으로 출연해달라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안 나오는 상태라서 거절할까 하다가 날짜가 열흘이나 남았으므로 일단 승낙했다. 큰 돈 들여 전문팀에게 의뢰하여 하는 행사인데 출연자가 너무 적어서 인원 보강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준비위원회의 한 사람으로서 도움이 되어야 했다. 노래는 조장혁의 ‘중독된 사랑’으로 하기로 했다. 빨리 감기가 나아서 목소리가 원 상태로 돌아가야 했다. 하루쯤은 그냥 버텼으나 완치를 앞당기려고 화이투벤 한 갑을 사서 복용했다. 목감기 전용으로 필자에게 잘 맞는 약이었다. 십년에 한 번 쯤 감기에 걸리는데 그때마다 화이투벤으로 치료했다. 약값이 여전히 2천원이었다. 화이투벤 한 갑은 10알로 이틀 분이었다. 그런데 차도는 있었으나 여전히 목 상태는 기침이 멎지 않았다. 목 상태를 봐서 쉬운 노래로 바꿀까도 생각해 봤으나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른 송년모임이 있었다. 감기를 핑계로 술을 안 마시려 했으나 겉보기에 멀쩡하니 구차스러웠다. 그래서 일단 적당량 마셨다. 혈액순환이 좋아져서 빨리 나을 수도 있고 안 되면 빨리 악화 시키는 것이 치료를 단축하는 방법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효과가 있긴 했다. 다음 날 아침 목이 부드럽게 풀린 느낌이었다. 드디어 무대에 서는 날이 왔다. 필자에게 베정된 복면은 은색 눈 가리개에 보라색 천으로 된 것이었다. 거기에 망토를 걸치는 것이었다. TV에서만 보던 복면을 써보니 필자 얼굴보다 작아 얼굴을 양 옆에서 조였다, 잠시 불편할 것이므로 그냥 하기로 했다. 필자 순서가 되자 신나는 음악이 나왔다. 중앙무대로 나가는데 저절로 춤이 춰졌다. 복면 가왕 프로그램은 원래 복면 쓴 출연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야 하는데 그 바람에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말았다. 노래하기 전에 그렇게 춤을 추면 숨이 가빠진다. 그러면 차분이 노래에 들어가기 어려워진다. 몇 년 전 노래자랑 무대에 나갔다가 똑 같은 경험을 하고는 절대 노래 부르기 전에는 춤을 추면 안 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대 뒤에서 필자 노래는 원 음정 F키에서 아래로 조정하여 C#으로 해 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노래는 이미 Eb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정해달라고 부탁할 처지도 아니라서 그냥 불렀다. 시간 관계상 모든 출연자들의 노래는 1절만 부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필자 노래는 1,2 절 구분이 애매하므로 다 하는 것으로 협의 되었었다.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고음부분인데 그전에 반주가 끊겼다. 노래가 끝나고 춤 솜씨를 제대로 발휘 못했다며 빠른 음악이 나왔다. 원래 정통 댄스스포츠 춤이라면 자신 있는데 무대가 작고 어울리지도 않아 막춤을 췄다. 발라드로 점잖은 체 했던 분위기를 춤으로 푼 셈이다. 송년회는 분위기가 점잖아서 좀처럼 분위기가 띄워지지 않는다. 그럴 때는 누군가 망가져 주면 일시에 분위기가 고조된다. 제 몫은 하고 내려 온 셈이다. 또 하나의 추억의 한 장면으로 기록 될 것이다.
- 2016-12-2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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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라랜드(LaLa Land)
- 음악과 춤 영화라고 해서 서둘러 개봉관을 찾았다. 이런 영화는 매니아 외에는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금방 종영되기 때문이다. 춤은 탭댄스 일부와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비에니즈 왈츠가 나왔다. 영화 ET에서 자전거를 타고 창공을 나르는 듯한 환상적인 배경이다. 정통 비에니즈 왈츠에서 약간 변형하여 두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 좋았다. 이 영화의 광고 포스터는 요란하다. 광기의 드러머를 소재로 했던 영화 ‘위플레쉬’를 만들었던 감독 데미언 채즐 작품이다. 제73회 베니스영화제 개막작, 여우주연상을 수상,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관객상 수상, 제52회 시카고국제영화제 개막작,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작 등으로 성가를 높였다. ‘올해 가장 황홀한 경험’, ‘넋을 잃게 황홀하다’, ‘가장 창의적인 영화’, ‘이 영화는 마법이다’ 등의 찬사를 받았다. 2017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주연상 등 주요부문의 수상도 예상된다는 것이다. 주연에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 역으로 라이언 고슬링, 배우 지망생 미아 역으로 엠마 스톤이 출연했다. 교통 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에서 짜증이 극에 달할 만한데, 차 안에 있던 젊은이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세바스찬과 미아도 나와서 LA 시내를 내려다보며 춤을 춘다. 라라랜드는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이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만난다. 황홀한 사랑과 함께 LA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장면이 넘어간다. 둘은 각자 분야에서 미완성의 상태에서 만나 각자의 무대를 만들어 간다. 순수한 희망이 있을 때이다. 세바스찬의 음악 세계에서 부딪히는 갈등, 미아의 오디션 탈락 등 인생의 험난한 고비를 겪는다. 포기할 수도 있으나 결국 포기하지 않고 열정으로 도전하여 성공한다는 얘기이다. 세바스찬의 재즈 피아노 연주 솜씨는 볼만하다. ‘위플레쉬’의 드럼만큼은 안 되어도 재즈 피아니스트의 매력을 물씬 풍긴다. 미국에서도 재즈의 유행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다. 유행에서 퇴색하면 퇴물이 되는 것이다. 업주의 취향과도 안 맞으면 해고 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재즈 카페를 열어 자리 잡는다. 몸뚱아리 하나로 승부해야 하는 배우 미아가 오디션을 보는 과정은 처절하다. 죽도록 연습해온 연기를 초반에 잘라버리는 무례함과 수모를 수없이 겪어야 했다. 애써 오디션 연기를 하는데 정작 심사 측 사람들은 잡담이나 하고 딴 짓을 한다. 이 계통 사람들이 원래 좀 그런 면은 있다. 일인극을 연습해서 무대를 빌렸는데 관객이 한 명도 안 왔다. 꿈을 포기할 만하다. 그러나 운명의 지푸라기가 나타난다. 사랑만 생각했다면 미아가 파리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연기 생활을 위해 장기간 떨어져 있어야 했다. 다 포기하고 둘이 아들 딸 낳고 알콩달콩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미래가 더 중요했다. 교통체증으로 지방도로로 빠져 남편과 들른 재즈 카페가 세바스찬이 희망처럼 얘기하던 상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 주인은 세바스찬이었다. 둘이 뜨거운 포옹이라도 했어야 했지만 둘 사이를 모르는 남편이 있었다. 멀리서 미소로 만남의 기쁨을 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 2016-12-16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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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줄이다
-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엄마 배속에서 탯줄을 달고 나온다. 탯줄은 아기의 생명줄이자 엄마와 이어지는 인연 줄이다. 부모와의 인연 줄에 따라 인생의 운명이 달라진다. 귀하디귀한 왕족으로 태어나면 호의호식하지만 무지렁이 줄을 잡고 태어나면 살아가기에 고달프다. 돈은 살아가는 밥줄인데 재벌그룹의 자식들은 몇 천억의 유산을 받지만 서민의 자식은 적자라는 붉은 줄 위에서 춤을 춰야 산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핀다거나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돈줄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외국에 원정출산도 미리 좋은 줄을 잡아주려는 힘 있는 부모의 빽 줄이다. 유아원 때부터 줄을 잘 서야 출세한다. 좋은 유아원이나 좋은 어린이집에 배정받아 다니려면 미리 그 동네에 가서 살아야한다. 집값이 비싼 이유 중 하나가 학군이고 학군은 다른 말로 줄 좋은 동네다. 아무리 좋은 줄 동네에 살아도 줄 보는 눈이 없으면 헛방이다. 좋은 줄을 잘 골라서 남들보다 빨리 앞줄에 서야 한다.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줄을 보는 눈이 있어야하고 실천하는 힘줄이 있어야 한다. 노숙자 공짜 밥줄도 늦게 가면 밥줄이 끊어지고 헛고생 줄서기다. 일찍부터 줄을 서야 한다. 동네 경노잔치에 12시부터 밥 주는데 10시부터 줄을 서야 얻어먹는다. 노래도 불러주고 밥값 내는 사람이 일장 연설을 한다.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필요도 없는 노인들에게 알량한 밥 준다고 지겹도록 줄을 세운다. 밥 준 사람은 함께 찍은 사진과 실적이 필요할 뿐이어서 사진을 찍은 후는 바쁘다는 핑계로 줄행랑을 친다. 생명줄이 곧 밥줄이니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하면 밥줄이 끊어진다. 좋은 줄을 잡았다고 성공을 자신해서도 안 된다. 성공 길을 가려면 줄의 본류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가끔씩 줄을 흔들어본다. 떨어지면 그냥 나락이다. 남들이 다 서있는 줄이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는 민주주의 줄이고 정답일 확률은 높다. 그러나 그 줄은 그냥 백성 줄이다. 줄은 굵다고 튼튼하고 좋은 것이 아니다. 짚으로 엮은 새끼줄은 굵기가 반에 반도 못한 나일론 줄한테 번번이 나동그라진다. 군에서도 길게 이어진 줄은 제대할 때까지 걸어 다녀야 하는 보병 줄이다. 알맞게 싹둑 잘라지는 줄이 특과병 줄이다. 특과병 줄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신으로부터 선택된 일부만 어찌 알고 용케 서있는 줄이다. 세상을 하직할 때는 세상의 인연 줄을 놓으면 끝이다. 천하 없는 장사도 돈 많은 재벌도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때가 되면 세상의 인연 줄을 놓아야한다. 링거 줄 주렁주렁 매달고 아등바등 버티어 봤자 조물주 눈에는 찰나를 더 버티려는 거미줄에 매달린 아침이슬에 불과하다. 생명줄을 놓아야 할 때는 웃으며 놓아야 웰다잉이다. 줄은 씨줄과 날줄이 있다. 이 두 줄이 합쳐져서 인생이라는 천이된다. 씨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줄이지만 날줄은 스스로 노력해서 지혜와 덕을 쌓고 주위 좋은 사람들과 연대해서 만드는 후천적 줄이다. 씨줄이 좀 연약해도 날줄이 튼튼하면 좋은 천을 만들 수 있다. 좋은 천은 추위를 막는 옷감도 되고 이불도 된다. 행복을 감싸는 보자기도 만들 수 있다. 남의 생각에 움직이는 끄나풀 줄이 되지 말고 소나 개의 목줄처럼 강한 자에 끌려 다니지도 말자. 병들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목숨 줄이 되고 좋은 소식 전해주는 전화 줄이 되고 어둠을 밝혀주는 전깃줄로 살자. 매일 아침이면 줄을 서서 전철을 타고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지만 줄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있는 특권이다. 줄이 곧 인생이다.
- 2016-12-06 1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