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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님’을 섬기며 사는 홍일선 시인 “대지로부터 솟구치는 예민한 지점을 만납니다”
- ‘닭님에게 손수 밥을 만들어서 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흔히 우둔함의 대명사로 꼽는 닭을 ‘닭님’이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비범하다. 경기도 여주군 도리마을 외딴집에서 700여 마리의 닭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홍일선(洪一善·67) 시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1980년 여름호를 통해 등단해 , 등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인 홍 시인은 숲과 강, 그리고 생명들을 벗 삼아 자연이 전해주는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가 농촌으로 내려간 후 12년 동안 겪은 자연 속의 ‘거룩한’ 사연을 들어봤다. 1950년생, 올해로 67세. 농사일로 단련된 시인의 손가락은 거칠어 보였다. 어언 백발, 말간 피부, 서늘한 눈빛이 어우러진 순박한 농부이자 시인인 홍일선은 누구나 막연하게라도 상상해보는 귀농을 실천한 지 벌써 12년째다. 그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의 삶 속에서 대지로부터 은밀하게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공격’이 아닌 ‘공경’의 문학을 발견하고 있었다. ‘닭님’과 함께.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홍일선 시인의 ‘닭님들’ 홍일선 시인은 지금 여주군 점동면 도리마을 중근이봉 자락 3000평 대지에 있는 외딴 집에서 700여 마리의 닭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가 ‘닭님’이라고 부르는 이 닭들은 보통 닭이 아니다. 닭님들은 그와 그의 아내가 막걸리 효소, 돌가루, 미강, 발효제. 옥수수 가루, 된장, 간장, 콩비지, 고추씨, 깻묵, 풀씨 등 14가지를 합쳐 정성 들여 만든 ‘맛있는 밥’을 매일 5시에 먹는다. 그리고 집 앞마당과 2만 평의 숲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저녁때가 되면 비닐하우스 집으로 알아서 들어온다. 비닐하우스에는 따로 난방 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 700마리의 닭 중 10퍼센트는 오소리, 솔개, 너구리, 삵 같은 야생 짐승들이 가져간다고 한다. 한마디로 완전히 자연 그대로 닭을 키우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0마리 정도는 계속 유지된다. “왜 700마리냐 하면 닭님들이 저와 아내가 손수 만든 발효사료를 먹고 자라는데, 그걸 만들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거든요, 정말 바빠요, 700마리가 딱 이상적이에요. 우리 할아버지들이 다 했던 방식이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정도죠. 최시형 선생의 ‘경물(敬物)’의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에요.” 경물이란 모든 사물을 아끼고 공경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홍 시인은 경물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진정한 생명농업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닭님이 내 마음을 알아준다” 홍일선 시인은 처음 닭을 키우게 된 때를 2007년 5월 어느 날인가로 기억한다. 그의 지인인 동화를 쓰는 이상권 작가가 전국 여러 곳에서 토종닭을 사와 용인에서 키우던 시절이었다. “이상권 작가가 그러면서 굉장히 즐겁게 사는 걸 봤어요. 그러다 그가 직접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 다섯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죠. 조류독감이 터졌을 때였는데, 숨겨서 들어와야 했어요. 하지만 그랬는데도 기어코 이웃에서 신고를 하더군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섯 마리로 시작된 닭은 어느새 150여 마리로 불어났다. ‘사실 알을 안 낳아줘도 되는데 내 마음을 알아서 낳아주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러운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닭이 불어나며 함께했던 행복한 시절이 있었어요. 가난했지만 이게 온전한 삶이다 싶었죠. 그런데 갑자기 이명박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 거예요.” 어느 날 그 많던 닭들이 사라지다 홍일선 시인의 집 앞에는 ‘여강’이라고 불리는 남한강이 흐른다. 그는 강을 생각하면 우울하다. 그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괴물’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의 삶의 터전을 깡그리 부숴버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4대강 사업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울분의 원인이었다. “여기에는 나보다 먼저 살고 있었던 고라니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밤에는 고라니가, 낮에는 청둥오리와 같은 새들이 시를 썼어요. 그들이 내는 소리가 바로 시였죠. 달빛에 책을 읽고 강변에 앉아 묵상하는 일만으로도 황홀합디다.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러나 4대강 사업은 자연이 내는 시를 죽이면서 인간의 소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자연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2년 여 동안 새벽 다섯 시 반에 점호하듯이 어마어마하게 큰 포클레인과 덤프트럭 수십 대가 와서 밤 아홉 시 반, 열 시 반까지 계속 작업을 했죠. 집이 흔들릴 정도로 요란했습니다. 그때 고라니 시인이 사라졌죠. 청둥오리, 왜가리, 백로도 땅에 앉지 못하고 십 분을 넘게 하늘에서 선회하다가 저 끝에 겨우 앉더니 이내 떠나버렸어요. 여러 날 그러는 걸 봤어요.”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그가 기르던 닭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일이었다. “어느 날 그 많던 닭들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은 겁니다. 좌절했죠.” 생명의 경이로움에 머리 숙여지다 혼비백산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어딘가에서 삐약삐약 소리가 나는 겁니다. 아내는 환청이라고 했죠. 그러나 환청이 아니었습니다. 저 숲 쪽에서 어미 닭이 병아리 열다섯 마리를 데리고 온 겁니다.”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려면 37.5℃를 유지하며 20일을 품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 어미 닭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숲속에서 20일 동안 정성을 들여 알을 품고 부화시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닭이 열다섯 개의 알을 품으면 한날 한시에 부화되는 게 아니다. 사흘에서 닷새에 걸쳐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시간 동안 어미 닭은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새끼들을 품었을까.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다른 어미 닭이 또 열세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숲에서 나왔고, 나흘째 되는 날에는 어미 닭 두 마리가 여러 병아리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인은 닭에게 고마움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인간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자각하게 해줬다. “그때 저는 4대강을 피해 정선으로 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저 닭들은 그걸 견디며 살아냈던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라는 인간이 뭔가 싶었어요. 민중시를 쓰고 민족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닭을 ‘닭님’이라 부르겠다고 했어요. 박근혜씨를 닭이라고 부르는 건 말도 안 돼요. 닭이 어떤 동물인데.” 표절하려면 대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표절하라 새로운 마음으로 홍일선 시인은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그가 업으로 삼고 있는 문학에 대한 생각은 보다 광활해졌다. 문학을 대하는 지점이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 기술자는 있어도 시인은 없습니다. 문학은 대지로부터 나오는 울림에 대한 교감이에요.”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신경숙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표절한 사건과 그에 대처하는 창작과비평사의 태도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표절을 하려면 대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표절하세요. 어머니 같은 강이 들려주는 언어를 표절하라고요. 감자는 땅을 가르고 나옵니다. 이건희와 이재용이, 스티브 잡스가 그런 걸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감자가 땅을 가르고 나오는 그 울림을 누가 듣겠습니까? 이명박이 듣겠습니까, 박근혜가 듣겠습니까. 예술인들이 들어야죠.” 신이 부여한 질서, 농업 이제 홍일선 시인에게서 문학은 생명의 근원을 생각하는 예술로 환원된다. 그는 ‘신이 부여한 질서를 회복하자’고 말했다. 그 질서란 바로 농업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농사를 다 지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정신만큼은 농업 근본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농업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농업의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퀭한 눈으로 아들을 기다리는, 그 어머니를 발견하는 일 말입니다.” ‘대지라는 거대한 생명을 제대로 섬기는 일이 내가 하는 문학’이라고 밝히는 그는 문학이라는 틀을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닭을 닭님이라고 부르고 5덕(흙님, 숲님, 강님, 햇빛님, 곡식님)을 섬기며 더불어 사는 삶에서 시적 울림을 찾는 그에게 문학을 어떤 틀로 정의하는 것은 편협한 일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문학이란 살면서 실천되고 구현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문학에 무슨 고급이 있고 저급이 있을까요?” 공경은 거룩한 행복이다 아내, 아들과 함께 사는 홍일선 시인은 ‘여기에 온 게 참 좋다’고 거듭 피력했다. 그 말의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와서 정말 행복해요. 제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경하자는 겁니다. 그것은 농업과 대지에 대한 공경입니다.” 그가 말하는 공경이란 자연을 앎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공경이라는 말에는 쌀 한 톨이 어떤 경로로 입에 들어오는지 성찰하며 살자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쉽사리 놓쳐버리는 모든 작은 것들에 대한 배려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공경은 거룩한 행복이죠. 서울에 있었으면 저도 황폐한 사람이 됐을 겁니다. 그래서 공경을 알게 됐다는 게 저에게는 행운이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빛에서, 별빛에서, 들꽃에서, 장독대에서, 여울에서, 숲에서 솟구치는 울림들을 필요할 때마다 마중물로 사용한다. 그에게 이런 호사가 없다. 기우는 햇살을 받은 ‘닭님’의 벼슬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 2017-08-0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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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호 한길사 대표 '지적 정신의 오아시스, 서점으로 떠나는 여행'
- ‘출판장인’으로 불리며 40년 넘게 ‘책’의 내실을 다지고 외연을 확대해온 한길사 김언호(金彦鎬·72) 대표. 지난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에는 그가 세계 곳곳을 탐방하며 체감한 서점의 역량과 책의 존귀함이 담겨 있다. “서점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의 숲이며, 정신의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하는 그를 한길사의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만났다. 지난 4월 서울 중구 순화동에 문을 연 ‘순화동천(巡和洞天)’. 1970년대 한길사가 잠시 머물렀던 순화동의 인연과, 노장사상의 이상향을 뜻하는 ‘동천’의 의미가 담긴 공간이다. 김 대표는 서점, 카페, 박물관, 갤러리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곳 역시 새로운 독서운동을 펼치는 문화의 장이라고 표현했다. 한편으로는 서점이 사라져가는 우리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희망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 서려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시민들이 순화동천을 많이 찾고, 을 꼭 읽어보길 권했다. 한 사회의 정신을 담은 풍경 ‘서점’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을 처음 마주했을 때 사뭇 놀랐다. 먼저 백과사전을 능가하는 크기와 두께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스르륵 넘겨보았을 때 세계 서점의 모습을 담은 아름다운 사진에 매료됐다. ‘어느 작가가 찍었나?’ 하고 다시 책의 표지를 확인하니, ‘글·사진 김언호’라는 글자가 또렷했다. 단순히 기행을 위해 찍은 사진이라기엔 꽤 수준이 높아 그의 능력에 재차 감탄했다. “사진을 찍은 지 오래됐어요. 처음에 시작한 계기는 내가 가는 곳, 즉 책이 존재하는 풍경을 기록해두기 위해서였죠. 도서관, 서점, 누군가의 서재 이런 게 다 책이 있는 풍경이자, 우리 사회와 개인의 정신이 담긴 풍경이니까요.” 순화동천에는 한길사에서 출판한 도서 3만여 권이 있다. 한 권 한 권마다 그의 땀방울과 열정이 스민 듯했다. “책은 머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김 대표의 말처럼, 그는 예나 지금이나 혼신의 힘을 다해 책을 만든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 달라졌다. 지혜의 샘 역할을 했던 동네 책방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책을 쥐던 사람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껌딱지처럼 붙게 됐다. “중장년의 젊은 시절, 1980년대는 책의 시대였어요. 모든 젊은이가 책을 들고 다녔죠. 크고 두꺼운 책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 것인가 등을 고민하고 토론했죠. 그 당시 책의 정신은 위대했고, 그게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패스트푸드 같은 스마트폰에 빠져 쓸데없는 정보에 생각을 뺏기죠. 사람이 지식만 가지고는 안 돼요. 책을 통해 깊은 지혜를 얻어야 지혜로운 사회가 되고, 창조적인 발상이 가능해지죠.” 독서는 삶의 필요충분조건 은 600페이지가 넘지만, 사진과 글자가 크기 때문에 읽는 데 부담이 없었다. 종이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끝에서 감칠맛이 느껴지는 신선한 경험이랄까. 전자책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러나 스마트 기기의 발달로 전자책이 대중화되며, 현대인은 종이책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김 대표는 이러한 현상이 독서력과 사유의 시간을 줄게 만들었다며 우려했다. “과거 종이책을 많이 읽던 시절에는 깊은 사유가 가능했어요. 현재 우리 사회가 경계해야 할 문제는 사유의 천박성이에요. 스마트폰에 의존해 쓸데없는 정보를 과하게 섭취하고 있어요. 지식이라는 건 축적이 돼야 지혜가 되는데, 스마트폰이 주는 지식은 휘발적이거든요. 자꾸 짧은 글만 읽으려 하죠. 물론 스마트폰이 유용하지만, 필요조건에 불과하지 충분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종이책을 통한 독서는 삶의 필요충분조건이죠. 책을 읽지 않는다고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녜요.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언젠가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죠.”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어른의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또 그런 이들이 찾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서점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김 대표는 최근 지인들에게 그동안 읽었던 책들로 ‘사랑방서점’을 열어보자고 권유에 나섰다. “을 읽으면 서점에 가고 싶고, 또 자기 책방을 하나 차리고 싶어져요. 책을 보고 서점을 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생겼어요. 한 가지 염두에 둘 건, 들여놓는 책들이 특정한 주제의 신간이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학습지나 참고서 같은 걸 팔면 그건 가게죠. 서점 한 편을 카페 공간으로 만들면 토론이나 문화의 장으로 훌륭하게 활용할 수 있어요. 그런 작은 서점들이 늘어나면 새로운 차원의 문화운동이 될 수 있다고 봐요.” 김 대표는 서점을 내려는 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 순화동천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그렇기에 순화동천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굳은 의지를 보였다. “순화동천 같은 지적 사랑방은 하나만으론 부족해요. 동네마다 곳곳에 생겨나야죠. 번쩍거리는 네온사인만 있다고 해서 도시가 아닙니다.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는 책방, 그 옆에 자그마한 찻집 등 다양한 문화예술 시설이 공존해야죠. 그중에서도 서점은 한 사회의 정신을 유지해주는 실핏줄 같은 존재이자 지적 정신의 오아시스 같은 공간입니다.” 서점에서 사는 한 권의 아름다움 그는 책을 쓰고, 만드는 일만큼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애써 서점을 열더라도 책을 사가지 않는다면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책과 서점을 대하는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충북 괴산에 있는 한 서점은 들어가면 책 한 권을 꼭 사도록 의무화했대요. 그게 옳은 일 아닌가요? 서점의 책은 공공재입니다. 아무렇게나 만지고 훼손하면 팔 수 없는 헌책이 돼버려요. 내 물건이 아니잖아요. 그럼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런 문화가 안 돼 있죠. 서점에서 책 보고 화장실 간다고 따로 돈 받지 않잖아요. 그럼 그건 주인 부담인데, 책이며 물이며 휴지며 너무 함부로 쓰고 있어요. 책방을 하는 분들이 참 많이 속상해해요.” 김 대표는 줄곧 책을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책의 미학’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책은 더없이 귀한 존재다. 그런 자신의 마음처럼 우리 시민이 책을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길 바라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끊임없다. “책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중요해요. 형식이라는 건 결국 미학적인 거잖아요. 우리뿐만 아니라 누구든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책을 더 아름답게 만들려고 해야 해요. 책이 아름다워야 그 내용도 돋보이지만, 그래야 더 마음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한 권의 책을 독자의 가슴에 품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출판장인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 2017-08-0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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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퇴직 앞두고 있는 부부에게 필요한 은퇴자산
- 6개월 뒤면 강찬기(59세, 남)씨는 정년퇴직을 한다. 회사의 배려 덕에 퇴직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강씨이지만 아직 풀지 못한 미해결 과제 때문에 고민 중이다. 그의 고민거리는 다름 아닌 집안의 가계부다. 대부분의 남자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강씨 역시 생활비가 어떻게 쓰여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정년퇴직이 다가오자 주 수입원이 중단된 이후의 생활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강씨는 은퇴생활을 위한 개인 용돈과 아내가 원하는 생활비 모두를 해결하려면 퇴직 후에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부부가 식사를 하던 중 그는 아내에게 생활비 내역에 대해 물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내 김숙경(56세)씨는 대략의 생활비 규모만 얘기해줄 뿐 구체적인 내역은 복잡하다는 이유로 알려주지 않았다. 의외로 강경한 아내의 태도에 강씨는 당황스러웠다. 혼자 전전긍긍하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재무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부부의 필요 은퇴자금 계산 상담 의뢰는 강찬기씨가 했지만 상담이 시작될 때는 부부가 함께했다. 은퇴상담은 부부가 함께하면 더 도움이 된다는 상담사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상담의 첫 주제는 ‘은퇴 후 부부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얼마나 될까?’였다. 아내 김숙경씨는 현재 가치로 매월 350만원이면 본인 용돈을 포함해 가정의 생활수준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강씨는 본인이 원하는 은퇴생활을 하려면 매월 150만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또 퇴직 후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취미생활과 사회활동을 충분히 하기를 원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강씨는 강씨대로 각자 원하는 은퇴생활비의 규모를 알고 놀라워했다. 일단 부부가 원하는 매월 500만원(현재가치)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은퇴자금 규모를 계산해보기로 했다. 생활비에는 매년 3%의 물가상승률이 반영되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리고 투자 성향이 보수적인 부부의 성향을 고려해 현재 자산은 은행권을 중심으로 세후수익률 연 1.5%로 운영된다고 가정했다. 부부의 은퇴기간은 30년으로 예상했다. 부부가 원하는 은퇴생활을 하려면 약 22억400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결과에 강찬기씨 부부는 두 번째로 놀랐다. 은퇴를 대비해 준비된 자산 다행히 강찬기씨는 직장생활을 정년까지 한 덕분에 국민연금으로 매월 130만원 정도를 수령할 수 있다. 퇴직연금과 아내가 개인적으로 가입해둔 개인연금도 있어 매월 120만원의 연금 수령이 가능하다. 매월 250만원 정도의 연금소득을 고려해 필요한 은퇴자금을 다시 계산해보니 14억 정도의 자산이 더 필요했다. 은퇴준비자산을 계산할 때, 국민연금은 물가상승률이 반영되지만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은 물가상승률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현재 보유 중인 주택(10억)과 예금(2억)을 합해도 2억원이 부족한 금액이다.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두 자녀의 결혼자금(자녀 1인당 1억씩 예상)도 고려해야 한다. 몇 번의 계산 시뮬레이션을 더 거쳐 필요 자금 규모를 확인한 부부는 예상 지출내역을 세부적으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부부가 지출내역을 정리할 때 참고한 양식은 [표2]와 같다. 전화위복이 된 재무상담 부부가 함께 지출내역을 정리하는 동안 강찬기씨는 아내의 알뜰함에 놀라면서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김숙경씨 역시 한 직장에서 충실히 근무하며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 터전을 마련해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는 상담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준비된 자산으로 은퇴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월 400만원 정도의 생활비가 적당하다는 데 합의를 했다. 부부가 각각 50만원씩 양보해 아내는 자신의 용돈과 생활비를 포함해 300만원, 남편은 100만원의 용돈을 사용하기로 했다. 친척 경조사비나 외식비 등 가정의 공통 비용이라고 할 수 있는 항목들을 부부가 동시에 지출로 잡아놔 예산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부부는 지출내역들을 정리해보며 예산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했다. 그리고 사소한 다툼의 원인이었던 경조사비나 외식비 그리고 문화비 등의 예산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지출 기준과 규모를 합의함으로써 향후 다툼의 소지를 예방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자칫 부부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생활비 문제로 재무상담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고 전화회복의 기회도 되었다. 더불어 강찬기씨는 자신이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상담을 통해 부부는 역할과 스타일은 달랐지만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배우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두 사람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부는 새로운 30년을 더 잘 이해하며 살아가자는 취지에서 부부심리상담까지 받기로 했다. 총 10회로 구성된 부부상담의 예상비용은 150만원. 올해 계획 중이던 남편의 정년기념 여행비로 충당하기로 했다. 강찬기씨 부부는 정년퇴직 기념여행을 ‘내면 여행’으로 떠나기로 한 것이다.
- 2017-08-03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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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멀포비아의 분노, 아니 호소
- “무서운 것도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씨는 게가 무섭다고 합니다. 이시하라 신타로씨는 나방과 나비가 무섭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은 꽤나 시적인 무서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와 아주 닮은 어느 시인은 벌집이 무섭다고 합니다. 진정한 무서움은 영구적입니다. 그것은 무서움을 느끼는 인간의 일생을 초월한 것일 겁니다. 돈이 없는 것이, 적이 있는 것이, 불행해지는 것이 무섭다. 그러한 이유와 대상이 있는 공포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초월한 공포의 원형과 같은 것, 이유도 대상도 없이 그냥 불쑥 느껴지는 무서움을 문득 느끼는 적은 없습니까?”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朗)의 수필 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나는 세상에서 개가 제일 무섭다. 골목에서 개와 마주치면 모골이 송연하고 다리가 떨려 꼼짝할 수 없다.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치는 나를 보면 개들은 ‘나를 무서워하는 인간도 다 있네. 나의 본성을 보여줘 볼까?’ 하듯 침을 질질 흘리며 그르렁거리며 달려든다. 개 주인에게 "제발 개 좀 붙잡아주세요"라고 애원하면 "우리 개는 순해요. 절대 물지 않아요"라고 한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당신한테만 복종하겠죠. 그러나 평생 길러준 주인을 물어 죽인 개 뉴스 못 들으셨어요? 유기견들이 야생 개가 되어 등산객을 위협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어요. 늑대가 개 조상이라는 걸 몰라요?” 이렇게 대들고 싶지만 입이 얼어붙어 열리지 않는다. 자기보다 큰 개에 질질 끌려 다니며, 인간의 가장 고상한 행위인 산책이라는 걸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저러다 줄 놓치면 어쩌나" 싶다. 도사견이 그리 좋으면 도사견 사육장에 가서 살면 되지 사람이 밀집해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위협적인 동물을 끌고 다니다니 이해할 수 없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이나 마약탐지견 등은 어쩔 수 없지만 낯선 사람을 보면 짓고 무는 개, 예방주사도 맞히지 않은 개를 물고 빠는 인간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다. 개띠인 필자가 왜 이토록 개를 무서워할까. 어머니는 개를 길러본 적도 없고 개에게 물린 적도 없단다. 눈을 마주치지 마라, 무시해라 등등의 충고를 들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개만 보면 놀라 자지러지며 소리를 질러대고 진땀이 흐르고 부들부들 떨린다. 공포와 분노가 쌓여 어느 순간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애니멀포비아(Animalphobia)는 동물 공포증이다. 공포 때문에 동물을 가까이할 수 없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애니멀포비아들은 벌, 거미, 새, 뱀, 바퀴벌레 등 개인에 따라 무서워하는 것이 다르다. 애니멀포비아가 10명에 한두 명꼴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 공포증은 정신과 치료로는 나아질 수 없는 생태적 공포란다. 그렇다면 동물보호법 이전에 애니멀포비아보호법이 있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한국고양이보호협회 사이트에는 ‘애니멀포비아, 혐오자를 만났을 때 대처 방법’이 있다. 애니멀포비아의 고통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문구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이 너무 강경하게 굴면 녹음이나 촬영을 해서 112에 신고하란다. 인간이 동물을 겁주는 게 아니라 동물이 인간을 겁주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되었다. 필자는 하필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개를 무서워하는 바람에 생명을 경시하는 별종 취급을 당하고 있다. 정말 억울하다. 아무리 작은 개라도 마스크 씌우고 줄 묶어 다니라고 개 기르는 분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저희 개는 순하고 물지도 않아요.”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제발 애니멀포비아들이 겪는 심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헤아려주길 바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생각난다. "인간은 못될망정 짐승은 되지 말아야지." 필자는 목줄도 마스크도 하지 않은 개 주인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다. “애니멀포비아를 배려하지 않는 당신, 개만도 못한 짐승이오!”
- 2017-08-0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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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고도 이기는 법
- “남편을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딱 맞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여러분 스스로가 남편에게 맞추는 게 더 쉬워요.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조급함을 버려야 합니다.” 초청 신부님 강론이 있었다. 평일의 성당은 대부분 여자들로 채워졌고 열기가 가득했다. “신부님 말씀 듣고 용서하며 너그러워지려고 노력하는데 미사 끝나고 집에 가서 남편을 보면 열이 다시 뻗쳐 분심이 드는데 어찌해야 하나요?” “화내고 폭력적인 생각을 한 것이 걸려 고해성사까지 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다스려놓으면 남편이 또 뒤집어놓는데 어찌해야 할까요?” 얼마 동안 우문현답이 심심치 않게 오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싸움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섭섭해서 짜증을 부려보기도 했다. 이런 감정들 때문에 소비한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이제는 필자가 어떨 때 가장 열 받는지를 알 것도 같다. 이를테면 진정성이 무시되거나 이해받지 못할 때, 필자 마음에 대한 곡해, 또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아닌 대접을 받게 될 때 화가 난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인간 앞에서도 분노가 일어난다. 가족이 아닌 관계에서는 마음을 쉽게 정리할 수 있다. 가족은 싫어도 죽을 때까지 만나야 하지만 가족이 아닌 관계는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격을 무시당하거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신의가 없는 사람을 만날 때 분노한다. 화가 일어나는 지점은 거의 비슷하다. 젊은 시절, 모멸감과 함께 인간이 너무 무서웠던 경험이 있다. 그때는 아무도 없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도 많았지만 상처를 준 사람도 있었다. 요즘은 사람을 볼 때 한쪽 면만 보지 않는다. 선의와 악의를 함께 지니고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선의와 악의는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쓰인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늘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늘 나쁜 것도 아니다. 아무리 좋은 품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상대와 코드가 안 맞으면 불편하고 시끄러운 일들이 자주 생긴다. 또 상대의 마음을 자기 식대로 단정해버리며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주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성향이 나타난다. 갈등이 생기면 상대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흥분하면 아무 말이나 하게 되고 실수를 한다. 그러므로 화가 나면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대화를 하지 않는 게 좋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대결 구도로 가면 서로 상처만 입을 뿐이다. 아무리 나쁜 사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배려가 많은 사람이다. 고개를 끄떡여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마음이 가슴에 와 닿을 때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고도 이기는 법이다. “문제 삼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데 문제 삼으니 문제가 된다.” 조정래의 소설 에 나오는 구절이다. 깊이 공감한다.
- 2017-08-0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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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코같은 소리, 자중하세요”
- 얼마 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동료들은 은퇴 후 다시 다니는 직장이라 대부분 협력회사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근무자에 대한 차별이 있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못 되고 은퇴자로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자위(自慰)하면서 근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부 심정 홀아비가 알아준다는 말이 있듯이 동료들끼리 서로의 형편을 이해해주고 의지하면서 일하다 보니 마음 맞는 사람끼리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친목도 다지고 정보도 공유하면서 지내보자는 의미로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모임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회원이 “날씨도 더운데 퇴근길에 시원한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라며 단체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소위 번개를 친 것이다. 특별한 상황이 없다면 땀 흘려 일하고 퇴근길에 막걸리 한잔 하자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홉 명의 회원 중에 네 명이 모였다. 다른 회원들은 3교대 근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야간 근무나 오후 근무를 해야 했기에 참석할 수 없었다. 필자는 당일까지 작성 처리해야 할 기사가 있어 참석을 하지 못하고 귀가하자마자 저녁도 대충 먹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 자판과 씨름했다. 잠시 후 카톡 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궁금해서 슬며시 휴대폰을 열어보니 가관이었다. 막걸리 집에서 한상 가득 차려놓고 먹고 마시고 건배하는 장면 등을 실시간으로 찍어 올리면서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좋은 시간 되시라’는 댓글도 달아줬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노골적으로 미참석자들을 자극하는 멘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흥에 겨워 그러는 거겠지 하며 이해를 했다. 그러나 도를 넘어 유치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슬그머니 속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만난 사람끼리 기분 좋게 한잔 마시고 담소를 나누면 될 일이지 근무하느라 참석 못한 사람들을 계속 자극해서 뭐하겠다는 것인가? 그중 연장자인 한 회원도 한마디 한다. “오늘 번개에 못 온 놈들 약오르지? 약오르면 지금이라도 달려오면 돼!” 이게 할 소리인가? 더운 날씨에 힘들게 근무하는 회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행동이었다. 참으로 너무한다 싶어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특히 ‘요산요수(樂山樂水)’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는 더욱 참기가 힘들었다. ‘참으로 나잇값도 못하는 사람이네, 본인은 기분 좋아 지껄이는 말일지 몰라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 못한 회원들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지!’ 속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욕설이 가득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참고 내뱉은 한마디는 “개코같은 소리, 자중하세요”였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덮어버렸다. 카톡 들어오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더 이상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또 한 번의 카톡 소리가 들려와 확인해 보니 사과 멘트였다. 필자 역시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화가 나서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한마디. 시간이 지나니 좀 더 참을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너무 심한 말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 사전까지 뒤적여 ‘개코같은 소리’의 의미를 찾아봤다. (상태나 모양이) 하찮고 보잘것없다는 의미로 쓰이는 형용사였다. 필자가 회원들에게 던진 ‘개코같은 소리’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여러 가지였다. 어쨌든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속 말들을 그 한 문장에 함축시켜 일갈(一喝)해버림으로써 그날의 사건은 다행스럽게 일단락되었다.
- 2017-08-0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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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스몸비일까?
- 스몸비는 스마트폰(smartphone)과 좀비(zombie)를 합친 말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모습이 마치 서양의 ‘좀비’와 비슷하게 보인다 하여 ‘스몸비(smombie)’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누구나 길을 걸으면서 스마트폰 화면을 보다가 큰일 날 뻔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어느 날 전철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다가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전철을 타고 내릴 때 스몸비족들은 다른 사람들을 미처 보지 못한다. 자기만 타면 그만인 것처럼 전철에 올라탄 후 거기서 정지해버린다. 뒤이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한 발만 내딛어 밖으로 나간 후 그 자리에 서 있다. 뒷사람이 내릴 때 방해가 된다. 곧 스크린 도어가 닫히므로 결국 밀치게 된다. 같이 모여 얘기를 하거나 회의를 할 때도 스마트폰을 자주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대화가 관심 없거나 재미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소위 김이 샌다. 스마트폰 내용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리 긴급한 내용도 아니고 중요한 내용도 아니다. 나중에 봐도 충분하다. 스몸비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유 공간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하다.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 하차하는 사람이 먼저 내린 후 타야 하는데 승차하려는 사람이 먼저 밀고 들어가는 경우도 흔하다. 좁은 인도 위를 몇 명이 손잡고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바쁜 발길을 막는 광경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좁은 인도 위에 차를 주차하거나 인도에 서서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이 안중에 없는 경우도 많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다녀보면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을 잊었는지 우산까지 포함한 자신의 공간 크기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과 마주쳐 지나갈 때 우산을 치우지도 않아 다른 사람 얼굴에 빗물을 적시기도 한다. 스몸비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앞을 볼 수 없으니 그냥 돌진하거나 다른 사람의 진로를 막는다. 운전 중이라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스몸비들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스마트폰부터 만진다. 운전대를 잡으면 스마트폰은 잠시 잊고 있어야 한다. 차들의 빈번하게 다니는 골목길에서 조심하라고 하면 스몸비들은 차들이 알아서 비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운전자들도 보행자들이 알아서 차를 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행자나 운전자가 똑같이 스몸비라면 사고의 위험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걷는 중에 전화가 오면 일단 다른 사람들 통행에 지장이 없는 장소로 가서 통화를 하자. 모임 장소에서는 대화에 집중하자. 스마트폰 내용은 대부분 집에 가서 봐도 충분한 것들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스마트폰에서 좀 풀려나보자. 안 좋은 습관은 안 좋은 일로 이어질 수 있다.
- 2017-07-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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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그래” 한 말씀만 하소서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이자 야생화 사진작가인 박대문님께서 풀꽃들에게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계속되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단비를 가득 품은 바람 소리가 쏴 밀려옵니다. 주룩주룩 낙숫물 듣는 소리가 어느 고운 음악보다 감미롭게 들려옵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단비입니까? 어제 산에서 만났던 풀꽃, 그대! 참 안타까웠습니다. 오랜 가뭄에 시들시들 연명하듯 버티는 모습이 참으로 애잔했습니다. 게다가 가뭄 탓에 꽃망울과 새순 줄기에 온갖 물것들이 달라붙어 진을 빠는 통에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더군요. 힘겹게 열리는 꽃잎이 처량해 보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뿌려주지 못하고 진딧물 한 무더기 털어주지도 못했습니다. 가뭄과 물것에 시달려 제대로 피우지도 못한 풀꽃, 사람으로 치면 화장기 없는 병색 짙은 민낯에 카메라만 들이댔습니다. 아니 민낯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의 생식기에 확대경을 들이댄 것입니다. 목마른 갈증, 물것의 시달림을 번연히 보고서 도움도 못 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대의 은밀한 곳만 훑고 지나쳤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대에게 참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 지나고 이른 봄이 되면 발밑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풀꽃 하나에 넋을 잃고 홀딱 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나온 새순이나 꽃망울이지만 좀 더 크고 먼저 핀 꽃에만 카메라 앵글 들이대고 옆에 돋아나는 새싹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밟고 뭉개기 일쑤였습니다.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봄날과 초여름이면 작고 빈약한 꽃은 본체만체 제치고 화려하고 멋진 꽃에만 매달렸습니다. 꽃이 귀한 시기에는 발밑의 사소한 풀꽃도 애지중지하다가 여기저기 온갖 꽃이 한창일 때는 크고 화려한 것만 중시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차별하는 변덕을 부린 것입니다. 심지어 예쁜 꽃 곁에 뻗은 다른 줄기를 사진 화면에 잡티 된다며 제치고 꺾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역경 속에 생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데도 도움 주지 못하면서 아무런 배려도 없이 은밀한 치부를 사진 찍어 자랑스럽게 내놓고 공개했습니다. 태어난 생체로서 소명을 저버리지 않는 풀꽃, 그대!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선택의 기회도 없이 주어진 최악의 환경일지라도 생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온갖 주위 역경과 고난을 감수하며 새싹 틔어 꽃피우고 열매 맺어 씨앗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가든 경애하는 마음으로 눈 맞춰 인사하고 이름을 불러주며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꽃 사진 찍으면서 혹시나 새싹을 밟을까봐 삼각대도 거의 쓰지 않습니다. 특히 이른 봄에는. 또한 옆에 다른 풀과 가지가 끼어들어도 웬만하면 그대로 찍습니다. 그동안 관심 밖에 두고 낮춰 보며 함부로 하고 차별한 것 반성하고 뉘우칩니다. 너그러이 용서하고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지금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나도 그래’라고. -2017년 8월 모일, 풀지기 올림 말도 느낌도 통하지 않는 풀꽃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우연히 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라 하기에 생뚱맞게 용기를 냈습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무료한 일상을 메꾸기 위해 풀꽃에 관심을 두고 탐사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은 생활 중 대부분의 관심 사항이 풀꽃에 있어 카메라 들고 산과 들에 나가 풀꽃을 찾고 때로는 멀리 여행도 갑니다. 풀꽃 탐사활동을 하기 이전에는 풀과 나무를 주변에 그저 널브러져 있는,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는 사물로만 여겼습니다. 눈에 띄게 예쁘고 화려한 꽃을 피우면 화초, 아닌 것은 모두 잡초로만 여겼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이 고작해야 농작물과 채소 일부 그리고 과일 몇 종류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직장생활을 생각보다 일찍 그만두고 나서 무료한 일상과 나름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산·들·꽃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면 만날 수 있고 미소 짓는, 앙증맞게 고운 꽃이 마치 나를 반기는 듯 여겨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차차 풀꽃 이름을 하나둘 알아가면서 비로소 풀꽃과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져갔습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도 내가 관심이 없으면, 즉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상입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내용을 알아 의미를 두고 보았을 때, 비로소 나와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고 서로 의미 있는 상대가 됩니다. 이 세상에 이름 없는 풀꽃은 없습니다. ‘이름 없는 풀’이라며 잡초를 천덕꾸러기 취급하지만,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모를 뿐입니다. 풀꽃은 좋든 싫든 선택의 기회도 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싹을 틔워야 합니다. 선택 없이 태어난 우리 사람과도 같습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안고 끈질기게 참고 견디며 살아갑니다. 닥쳐오는 시련 모두를 벌거벗은 몸뚱이 하나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역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꽃피워 결실을 보아야 하는 생체로서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이제야 하나둘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말 못 하고 느낌 없고 귀하지 않다고 함부로 여기고 다루어왔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의 생명체 중 가장 막내가 인간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마치 지구 상 모든 생명체 가운데 으뜸이고 주인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태어난 것으로 치자면 현생 인류는 식물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의 탄생은 4만 년 남짓입니다. 고생대 석탄기의 양치식물은 차치하고 꽃이 있고 생식기관으로서 씨방이 있는 속씨식물이 탄생한 것만 해도 약 1억4000만 년 전인 중생대입니다. 감히 대비할 수 없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모두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멀리 해외에 나가서도 우리 땅에 자라는 같은 풀꽃을 만나면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다정스럽습니다. 외국에 있으면서도 고향 땅인 것처럼 푸근한 마음이 생깁니다. ‘오! 너도 여기에 있네.’ ‘천지만물이 나와 함께 존재하고 한 형제[天地與我 竝存, 萬物與我 爲一]’라는 장자(莊子)의 말이 더욱 실감 납니다. 이제까지의 저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한 말씀 올립니다. “풀꽃, 그대! 사랑합니다. 그대도 한 말씀만 하소서 ‘나도 그래’라고.” >>박대문 야생화 사진작가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 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다. 저서로 시집 . , 가 있다.
- 2017-07-2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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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손
- "야! 고추다! 고추!" 너무 좋아서 큰 소리로 이렇게 감탄사를 연발하신 아버지는 그 즉시 대문에 빠알간 고추와 길게 늘어뜨린 한지로 금줄을 매어놓으셨단다. 그 얘기를 하실 때마다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남동생이 대우그룹 사원으로 리비아로 가서 근무를 하게 됐을 때다. 딸 셋을 낳고 얻은 아들에게 엄청난 애착을 갖고 있던 엄마는 남동생을 배웅하고 나서 정신이 다 나가버렸다. 수원행 전철을 탄다고 탔는데 종착역에 가서 내려 보니 청량리역이더란다. 넋이 나가버린 엄마는 며칠 동안 초점 없는 눈동자에 갈피를 잡지 못하셨다. 여러 명의 딸들이 아들 하나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던 것이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더운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생이 안쓰러웠던 내가 편지를 쓰게 되었고 우연히 그 편지를 보게 된 현장 사무실의 소장님이 “혹시 누나가 서둔야학을 다녔느냐?”라고 묻더란다. 그분은 바로 서둔야학 김재우 선생님이었는데 필자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고 후배들의 선생님이었다. 그때부터 그분은 만리타향에서 외로워하던 동생을 세심하게 보살펴주셨는데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동생을 좀 더 일하기 편한 관리소장 전속 운전기사로 소개해주기도 하셨단다. 당신이 먼저 귀국하게 됐을 때는 동생을 염려해 사무실 사람들에게 잘 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사무실 직원들의 배려가 많았단다. 그리고 한 번 끈이 닿으니까 전임자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후임자에게까지 연결되었다. 너무 더워서 현장에서 계속 일했다면 건강상 1년을 버티기도 어려웠을 상황이었는데 동생이 3년 세월을 잘 근무하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분 덕분이었다. 엄마는 남동생 월급이 송금되어오면 “이게 어떤 돈이냐, 우리 아들이 그 더운 나라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이다” 하시며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은행에 저금했다. 그러고는 딸들이 번 돈과 엄마가 번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셨다. 엄마에게는 딸이 번 돈과 아들이 번 돈의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1983년 12월, 우리 가족의 오랜 숙원이었던 내 집 마련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긴 우리 집이었다. 외할머니가 맏딸의 궁색한 살림을 걱정하면 “장모님, 걱정 마십시오. 좀 있으면 장모님이 이 문으로 들어갈까 저 문으로 들어갈까 열두 대문 집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했던 아버지가 평생 못 이룬 꿈을 엄마와 자식들이 공동으로 이뤄낸 것이다. 남의 집 셋방살이, 그것도 제일 낡은 집으로만 이사를 다녔던 엄마를 커다랗고 산뜻한 양옥집에서 뵈니 부잣집 마나님같이 보였다. 천석꾼 부잣집 맏딸이었던 엄마는 더없이 만족해하셨다. 새집 기둥뿌리 하나는 김재우 선생님이 박아주신 셈이었다. 난생처음 갖게 된 우리 집은 그야말로 감격이었다. 우리 가족의 공동 은인인 그분께 우리 가족 모두는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둔야학이라는 사랑의 고리는 그 먼 나라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엄마, 엉엉, 엄마.” 1983년 2월 엄마의 회갑연에서였다. 잔칫상을 차려놓은 후 맏딸인 언니가 제안했다. “얘들아 우리 '어머니의 마음' 같이 부르자.” 선창을 하던 언니를 따라서 부르던 우리 다섯 형제들은 잠시 후 더 이상 부르지 못하고 엄마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그동안 형극의 길을 걸어오신 엄마의 삶이 너무도 가슴 아파서였다. 한바탕 울고 난 우리에게 엄마 또한 젖은 눈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죽으면 너희들 이 손 보고 꽤나 울 것이다.” 우리 앞에 내민 엄마의 손바닥은 갈퀴 같았고 손가락 마디는 있는 대로 다 불거져 있었다. 엄청난 일을 하느라 자연스럽게 닳아 없어졌던 엄마의 손톱은 그래서 일부러 깎을 필요가 없었고 양쪽 엄지손가락 지문도 지워져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애를 먹기도 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엄마의 손은 바로 엄마의 이력서였다.
- 2017-07-2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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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소비를 활용한 가족관계 회복 방법
-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할 때가 있다. 대학입학 때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걸”, 대학졸업을 할 때는 “스펙 좀 쌓아둘걸”, 결혼을 할 때는 “돈 좀 모아둘걸”, 직장을 다닐 때는 “좀 더 성공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3년에 출간된 의 저자 브로니 웨어는 10여 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던 중 문득 자신의 삶이 너무 단조롭고 무의미하다고 느껴 모든 생활을 접고 호주에서 호스피스 간병인으로 생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수많은 이가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는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는 그 경험으로 쓴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 5가지는 ① “내 뜻대로 살걸” ② “일 좀 덜 할걸” ③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걸” ④ “내 감정에 좀 더 충실할걸” ⑤ “도전하며 살걸”이다. 5070세대도 이런 후회를 해본 적 있을 것이다. 5070세대가 젊었을 때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이 있을까? 일에 치여 야근이 일상이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다 커버렸고, 아내와도 너무 멀어진 것 같다. 현역에 있을 때는 나름 네트워크가 탄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은퇴하고 나니 연락은커녕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도 많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서운함을 감출 수는 없다. 과거 직장생활할 때 눈치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속병만 키우던 시간들, 하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이 살아온 세대가 지금의 5070세대인 듯싶어 씁쓸하다. 지금까지 후회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달라지면 된다. 5070세대가 앞으로의 삶을 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돈·연금·봉사·기부 등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대상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가족관계 측면에서 가치 있는 노후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한 시간을 충전하라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1945~2013) 선생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25년간 월간 에 자전적 수필 ‘가족’을 연재했다. 가족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은 사후에 로 발간되었다. 그가 부인과 나눈 마지막 말은 “사랑해요”, “여보, 나도 사랑해”였다고 한다. 황혼이혼과 졸혼이 회자되는 세상이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최인호 선생이 세상에 던지고 간 마지막 선물이다.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글자를 딴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소홀하기 쉬운 ‘가족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달 고등학교 선후배 모임에 참석했을 때 퇴직한 한 선배가 해준 이야기다. 그동안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선배는 퇴직한 지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해 뜨기 전 눈뜨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해 뜨면 눈뜨고, 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됐다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고 격려하며 지원하던 아내도 이제는 은근히 불편해하는 눈치 같아서 걱정이란다. 선배가 조심스레 아내에게 “여보! 우리 여행이나 같이 다닐까?” 하자, 동네 스포츠센터 언니, 동생들과 함께 여행 가기로 했으니 혼자 가란다며 푸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퇴직 전에는 늘 가족과 함께 여행 가자고 하던 아내가 이제는 자기보다 더 바쁜 사람이 되었다며 걱정한다. TV나 신문에서 퇴직 후에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아내와 취미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 무시하고 지나친 게 지금의 서먹함으로 이어진 것 아닌지 후회가 된다고 했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5070세대가 배우자와 나누는 대화시간은 하루 1시간 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50대의 70%, 60대의 60%, 70대의 50%가 그 정도밖에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공무원 인생이모작 교육에서 만난 어느 수강생의 이야기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말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학원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이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아들이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졌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불러볼까 하다가 나올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하지만 자신이 거실에 있는 동안 나오지 않아 포기했단다. 부모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녀들과 서먹해진 걸까? 자녀교육을 시킬 때 무관심이 최고라는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으로 그동안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 건 아닌지, 흘러간 시간이 너무 아쉽다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5070세대는 특히 은퇴한 뒤에 배우자는 물론 자녀와의 관계에서 뜻밖의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가족들에게 휘둘리거나 조급해하면 가족 파탄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김치가 맛있어지려면 오랜 시간 익어야 하는 것처럼, 가족관계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숙고하다 보면 이 기다림의 시간도 잘 여물어갈 것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 늘리자 건강검진 후 “검진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앞으로 살 날이 9개월 정도 남으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당황스럽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것이다. 몇 년 전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라는 카피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광고가 있었다. ‘가족시간계산기’로 앞으로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주는 내용이었다.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자신의 나이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 잠자는 시간, TV 보는 시간, 스마트폰 보는 시간, 친구 만나는 시간, 혼자 보내는 시간 등을 빼보니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나왔다. 결과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9개월! 참고로 필자의 경우는 약 11개월이었다. ‘가족시간계산기’는 누구나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참고1]의 ②번 기대여명은 통계청 홈페이지를 방문해 연령별 기대여명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귀찮다면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인 82세에서 자신의 나이를 빼고 계산하면 된다. ‘가족시간계산기’를 작성하다 보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 점검해볼 수 있다. 가치소비를 통해 가족관계 강화해보자 ‘가족시간계산’을 통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어떤 배우자, 부모가 될 것인지 액션플랜(action plan)을 작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야말로 소통과 공감의 시간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 ‘배우자와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데이트하기’, ‘배우자와 마주앉아 한 시간 이상 대화하기’, ‘배우자 또는 자녀와 함께 여행하기‘ 등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해본다.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와 삶을 위한 징검다리를 하나씩 옮겨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몇십 년을 같이 살아왔어도 배우자와 자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왔다면 반성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가치 있는 소비와 실천으로 꽉 막힌 대화의 문을 열어보자. 처음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되더라도 인내심과 배려심을 갖고 접근하면 봄눈 녹듯 그동안의 소통 단절은 스르르 사라질 것이다. 필자도 당장 실천하겠다.
- 2017-07-25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