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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蓮, 큰 가시연꽃 빅토리아
- 날씨가 더워지면서 연꽃이 피어나는 연못가에는 꽃구경하러 모여드는 사람들로 발걸음이 잦다. 서울 근교에도 연못이 여러 군데 있는데 시흥의 관곡지나 양평의 세미원 등의 연못에 연꽃이 한창이어서 무더위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백련과 홍련의 아름다움이 무르익고 차츰 꽃이 지는 듯하면 그 연못 속에서 또 다른 꽃을 기대하게 된다. 빅토리아 연꽃. 꽃과 잎에 가시가 있고 꽃술에도 가시가 있어서 큰 가시연꽃이라고도 불린다. 브라질의 아마존강(江) 유역이 원산지인 수생식물인데 영국의 식물학자 존 린들리가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여 학명을 Victoria regia로 명명했다고 한다. 밤에만 피어나는 꽃 빅토리아를 필자도 몇 번 보았다. 그동안 여러 곳의 연못을 다니며 진흙 속에서 피어났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한 연꽃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렇지만 빅토리아 여왕을 눈 앞에서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우리가 흔히 보던 연꽃과는 달리 연꽃 중에서 가장 큰 잎으로 쟁반처럼 물 위에 떠 있는데 그 넓이가 어린아이가 앉아도 될 만큼 크고 단단하다. 그러나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도도한 꽃. 이 꽃이 한 번 피려면 첫날엔 하얗게, 이어서 분홍색으로, 그리고 좀 더 짙어지며 왕관 모양으로 변화하며 달빛을 받아 더욱 향기롭고 탐스럽게 피어난다. 그리고는 밤이 지나고 나면 물속으로 잠겨버리며 장렬하게 그 모습이 사라진다. 이틀간의 짧은 시간 동안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나 화려한 대관식을 하고 생을 마감하는 모습으로 부귀영화도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어두운 밤의 연못가엔 사람들이 초저녁부터 모여든다. 그리고 낮부터 자리를 잡아놓고 빅토리아를 알현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삼각대를 세운 후 진을 치고 있는 광경도 볼 수 있다. 강력한 모기를 퇴치해 가며 그 연못가에서 들려오던 셔터 소리와 불빛이 예민한 빅토리아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조차 든다. 다른 식물과는 조금 다르게 빅토리아 연꽃이 피어나는 동안 우리 인간들과 감정교류를 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어두운 밤 연못가의 사람들도 배려를 하면서 바라본다. 한 식물의 신비로운 삶과 퇴장을 지켜보며 마치 한 여름밤의 꿈을 보는 듯하다. 부처님의 뜻을 담은 진리의 꽃이란 생각과 함께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는 계절이다. 게다가 빅토리아 연까지.
- 2017-07-18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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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내쫓아 버리지....
- 우리 집의 식사 담당은 다른 보통 집과 달리 남편이다. 이유는 필자가 10여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맞벌이로 직장을 다니던 필자가 10여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 필자가 쓰러지던 그 때는 지금처럼 TV 건강 프로그램도 많지 않아서 건강 상식이 풍부하지 않았고, 뇌졸중이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의 왼쪽이 힘이 없고 불편한 상태이다. 주부인 필자가 쓰러지자 우리 가정 생활은 즉시 여러 가지로 비상 사태가 되었다. 세끼 식사는 물론 각종 세금 납부나 은행 문제 처리에 대하여, 남편이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남편의 정년 퇴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러졌는데, 대학 4학년 때 서울의 mbc 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사해 중간에 PD로 전환해서 평생을 일했던 남편은 퇴직하자 마자 필자 대신 집안 일을 책임져야 하는 전업 주부로 직업을 바꾸어야만 했다. 발병 이후로 우리 집엔 하루 세 시간씩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밑반찬도 해주시고 여러가지 집안 일도 도와 주신다. 신앙심이 매우 깊은 아줌마는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걸 커다란 기쁨으로 여긴다고 한다. 도울 수 있는 체력이 있는 것이 고맙고, 또 남을 도울 수 있으니 기쁘다고 한다. 며칠 전 도우미 아줌마가 못 오는 일요일 아침, 일찍 잠을 깬 남편이 어묵탕을 준비 했나 보다. 어묵 반찬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필자는 아침이라 입 맛이 없어서 맛있게 먹어지지 않는데 남편은 나의 입만 바라보며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물론 자기의 요리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서인 걸 안다. 이성으로는 모처럼 남편이 애 쓰고 준비한 음식이니 맛있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대답은 ‘그냥 오뎅 맛이네요’로 나오고 말았다. 자기 요리 칭찬을 잔뜩 기대한 남편이 나의 대답을 듣더니 그 동안 쌓였던 나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으며 본격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입만 기관장 급이라고 하면서…. 그 날 하루 내내 우리는 기분이 상해서 세 끼를 침묵 속에서 어렵게 식사를 해야 했다. 화가 많이 난 남편에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월요일에 도우미 아줌마가 일찍 오셨는데, 오자마자 남편은 아줌마한테 찰싹 붙어서 어제 자기가 한 요리에 대한 신퉁치 못했던 반응을 보고하면서 필자의 배려 없음을 불평한다. 이야기를 듣던 아줌마가 “언니를 (필자보다 10년 쯤 어린 아줌마는 날 언니라고 부른다) 그냥, 내 쫒아 버리시지 그러셨어요” 하며 100% 남편 편을 들어 준다. 물론 필자를 위한 작전인 걸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안다. 남편이 어디로 내쫓을까요? 하고 묻다가 웃음 바가지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아줌마의 지혜로 우리 집 부부 싸움은 쉽게 끝이 났다. 7년 가까이 우리 집안 일을 돕고 있는 아줌마는 우리 부부의 다툼을 조정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우리 동네 교회의 장로 일을 맡고 있는데 그녀 자신도 물론 독실한 신앙인이다. 평소에도 아줌마는 우리 집의 소소한 부부 싸움의 전문 조정관이다. 많은 퇴직 부부가 그렇겠지만 별 일 없으면 하루 종일 집에서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우리 부부는 아들의 표현대로 ‘잘 놀다가도’ 말다툼을 자주 한다. 주로 말이 주는 상처로 다툼을 하는데 한번은 나더러 마약쟁이처럼 커피를 마셔댄다고 해서 며칠 동안 말을 안하고 지낸 적도 있었다. 물론 몸이 약한 필자를 위해서 커피를 줄이라고 하는 말인 줄 다 알지만 같은 말이라도 마약쟁이가 뭐란 말인가? 결국 남편의 사과로 다툼은 끝이 나고 말았는데 그 후로 남편이 말을 조심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보인다. 결국 나이들수록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었다. 우리 부부의 이런 말다툼이 있을 때마다 외부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현재의 우리 상태에서 아줌마의 조정은 필수적이다. 아줌마는 적절하게 양 쪽의 편을 들어주어서 우리의 다툼을 끝나게 한다. 그녀의 그런 모든 능력은 그녀의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다는 걸 우리 부부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 2017-07-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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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연예인, 예능 프로그램 통해 화려하게 부활!
- 70세의 중견 배우 윤여정이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바로 젊은 연예인과 신세대 스타들의 전쟁터로 변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예능 프로그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윤여정은 인도네시아 발리 인근 섬에서 작은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으로 담아낸 tvN 에서 사장 겸 요리사로 나섰다. 윤여정은 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꼰대 짓을 하지 않는 바람직한 어른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청자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상승한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맹활약하고 있다. 에서 특유의 소탈함과 함께 현명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81세의 신구 역시 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젊은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KBS 에 출연해 기상천외한 입담을 과시하며 장·노년 연예인 예능 스타 붐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의 여배우, 81세의 원로 남자 연기자. 한국 대중문화와 연예계에서 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은커녕 비중 있는 조연 맡기도 힘들다. 가족이 밥 먹는 장면에만 출연하는 ‘식탁용 배우’로의 전락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견 연예인들의 의미 있는 반란과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반란과 도전의 진원지는 바로 젊은 연예인의 전유물이자 10~30대 젊은 시청자들이 주로 시청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중장년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끼, 면모를 보여주고 친근감을 배가시키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한 이미지의 확장과 인기 상승을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중장년 연예인의 재스타화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중장년 연예인의 재발견 창구로 부상시킨 것은 바로 2013년 방송된 tvN 다. 황혼의 해외 배낭여행 포맷으로 진행된 는 파격적으로 노년(老年) 예능을 표방하며 당시 78세였던 이순재, 77세 신구, 73세 박근형, 69세 백일섭을 출연시켰다. 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우려를 했다. 중장년 예능 프로그램이 전무한데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촬영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원로 연기자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씨의 모습을 보면서 성공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에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의외의 재미있는 모습을 드러낸데다 연륜이 주는 현명함까지 전달돼 할배 신드롬이 일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장·노년 출연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의 성공 이후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중장년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연예인들과 함께 고정 멤버로 출연하는 중장년 연예인도 많아졌다. 결혼을 졸업했다는 고백으로 우리 사회에 ‘졸혼(卒婚)’을 화두로 던지며 공론화했던 백일섭(73)과 이혼 이후 혼자 살며 다양한 취미생활과 여행을 하며 활기차게 장년의 삶을 사는 김용건(71)은 각각 KBS 과 MBC 를 통해 살림살이에서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은 혼자 사는 장·노년 사람들의 생활 트렌드를 이끌 뿐만 아니라 유익한 삶의 정보까지 제공해 사랑을 받고 있다. 김국진(52), 강수지(50) 등이 출연하는 SBS 과 김건모(50)가 나오는 SBS 는 중년 연예인의 이미지 확장과 인기 부활 예능 프로그램 역할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중년 연예인들이 여행을 하거나 미션, 놀이를 하면서 싱글 중년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태와 인식을 보여주는 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로맨틱한 김국진의 모습, 소탈한 김완선의 이미지 등을 엿보면서 많은 사람이 중년 연예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 출연을 통해 천진무구한 모습과 충격적인 행태를 보인 김건모에게 대중은 더욱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순재·윤여정, 백일섭·신구·김용건·이한위·김구라를 비롯한 중년 및 장·노년 연예인들이 이미지를 확장하고 새로운 모습과 끼를 선보이며 예능 스타 반열에 오르고 있다. 김용건은 “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부분을 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이 드라마나 영화의 캐릭터 확장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며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년, 장·노년 연예인의 재발견과 인기 부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젊은 시청자들에게 중장년, 노년층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하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노년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인 나영석 PD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장·노년 연예인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 시청자들이 이들 세대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고 이해의 범위도 넓어져 세대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드라마와 영화를 할 때는 중장년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와 등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10~30대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사인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 2017-07-1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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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중장년 연예인, 예능 프로그램 통해 화려하게 부활!
- 70세의 중견 배우 윤여정이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바로 젊은 연예인과 신세대 스타들의 전쟁터로 변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예능 프로그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윤여정은 인도네시아 발리 인근 섬에서 작은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으로 담아낸 tvN 에서 사장 겸 요리사로 나섰다. 윤여정은 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꼰대 짓을 하지 않는 바람직한 어른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청자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상승한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맹활약하고 있다. 에서 특유의 소탈함과 함께 현명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81세의 신구 역시 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젊은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KBS 에 출연해 기상천외한 입담을 과시하며 장·노년 연예인 예능 스타 붐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의 여배우, 81세의 원로 남자 연기자. 한국 대중문화와 연예계에서 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은커녕 비중 있는 조연 맡기도 힘들다. 가족이 밥 먹는 장면에만 출연하는 ‘식탁용 배우’로의 전락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견 연예인들의 의미 있는 반란과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반란과 도전의 진원지는 바로 젊은 연예인의 전유물이자 10~30대 젊은 시청자들이 주로 시청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중장년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끼, 면모를 보여주고 친근감을 배가시키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한 이미지의 확장과 인기 상승을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중장년 연예인의 재스타화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중장년 연예인의 재발견 창구로 부상시킨 것은 바로 2013년 방송된 tvN 다. 황혼의 해외 배낭여행 포맷으로 진행된 는 파격적으로 노년(老年) 예능을 표방하며 당시 78세였던 이순재, 77세 신구, 73세 박근형, 69세 백일섭을 출연시켰다. 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우려를 했다. 중장년 예능 프로그램이 전무한데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촬영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원로 연기자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씨의 모습을 보면서 성공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에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의외의 재미있는 모습을 드러낸데다 연륜이 주는 현명함까지 전달돼 할배 신드롬이 일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장·노년 출연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의 성공 이후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중장년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연예인들과 함께 고정 멤버로 출연하는 중장년 연예인도 많아졌다. 결혼을 졸업했다는 고백으로 우리 사회에 ‘졸혼(卒婚)’을 화두로 던지며 공론화했던 백일섭(73)과 이혼 이후 혼자 살며 다양한 취미생활과 여행을 하며 활기차게 장년의 삶을 사는 김용건(71)은 각각 KBS 과 MBC 를 통해 살림살이에서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은 혼자 사는 장·노년 사람들의 생활 트렌드를 이끌 뿐만 아니라 유익한 삶의 정보까지 제공해 사랑을 받고 있다. 김국진(52), 강수지(50) 등이 출연하는 SBS 과 김건모(50)가 나오는 SBS 는 중년 연예인의 이미지 확장과 인기 부활 예능 프로그램 역할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중년 연예인들이 여행을 하거나 미션, 놀이를 하면서 싱글 중년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태와 인식을 보여주는 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로맨틱한 김국진의 모습, 소탈한 김완선의 이미지 등을 엿보면서 많은 사람이 중년 연예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 출연을 통해 천진무구한 모습과 충격적인 행태를 보인 김건모에게 대중은 더욱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순재·윤여정, 백일섭·신구·김용건·이한위·김구라를 비롯한 중년 및 장·노년 연예인들이 이미지를 확장하고 새로운 모습과 끼를 선보이며 예능 스타 반열에 오르고 있다. 김용건은 “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부분을 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이 드라마나 영화의 캐릭터 확장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며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년, 장·노년 연예인의 재발견과 인기 부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젊은 시청자들에게 중장년, 노년층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하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노년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인 나영석 PD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장·노년 연예인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 시청자들이 이들 세대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고 이해의 범위도 넓어져 세대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드라마와 영화를 할 때는 중장년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와 등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10~30대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사인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 2017-07-1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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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만 참을걸!
- “대리님! 제가 잘 살펴보지 않은 점은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하다 보니 빠뜨리는 것도 생기네요. 이번 일을 거울삼아 따로 놓지 말고 묶어놔야겠어요.” 어느 날 필자는 큰 목소리로 사무실이 떠나가라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생체리듬이 순탄치 못한 갱년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뇌 용량이 부족해져서일까. 대리님의 농담 어린 “짜증나~” “짜증나~”라는 혼잣말이 영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우아한 목소리로 점잖게 설명 좀 하려 했건만 필자도 모르게 어느새 커져버린 목소리가 이미 저만큼 날아가 있었다. 그러고는 순간 난감해진 직원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창밖만 내다보았다. ‘으이구 주책이야, 쪼금만 참을걸!’ “잘못하셨다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죄송합니다.” 분명 대리님도 일처리 방식이라든가 아쉬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혼자 한 말이었는데 필자가 서둘러 ‘내 책임인가?’ 하며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고 평가해버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일을 하다 보면 싫은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짜증 내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생떼를 쓰는 사람들한테는 소용이 없을 때가 있다. 아무리 이해를 시키려 해도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힘든 삶이 저 사람의 말투까지 바꿔놓은 것일까?’ 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그런데 필자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투 하나 바꾸면 대화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힘든 일이 생기면 가슴과 머리가 따로 돌아가는 일이 허다하다. 어쩔 수 없는 교양의 부족함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이 들수록 얼굴의 쌍꺼풀, 주름살 걱정보다 정서적 역량 강화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필자의 말투 분석에 들어갔다. 분명 잘 설명해야겠다고 시작한 말이 화가 난 사람이 하는 말투처럼 되어버렸다. 필자의 큰 목소리 때문에 사무실 분위기도 안 좋아졌고 상사 대하는 필자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퇴근할 때까지 적막이 흘렀고 퇴근시간, 가벼운 인사를 하며 슬쩍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말을 할 때는 항상 생각하며 해야 한다. 자신이 잘했든 잘못했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이런 말을 들으면 상대는 어떤 기분일까?’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한다면 서로가 불편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말투 하나 바꿈으로써 피어나는 웃음꽃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피바이러스를 전달한다. 다음날, 열심히 일하던 대리님이 “아휴, 배고파요. 오후 내내 엄청 많은 일을 했네요. 배가 고픈데 뭐 먹을 거 없나요?” 하며 두리번거리며 인생의 청량제를 찾기에 서랍 속에 있던 화해의 비스킷과 청포도사탕을 잽싸게 드렸다.
- 2017-07-1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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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
-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 월요일 수업에 들어간 나는 제자들에게 45도로 고개를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평소에 “학생들에게 교사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교재다”라고 강조해왔다. 옷차림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해야 직성이 풀렸던 필자인데 이 노릇을 어쩌랴? 교재인 얼굴을 심각하게 손상시켰으니 교사로서 참으로 체통이 안 서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덧붙여서 말했다. “다 나을 때까지 내 얼굴 정면으로 쳐다보는 애는 배신자다.” “교장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며칠 쉬시지 왜 벌써 나왔어요.” 걱정할 것 같아 인사차 교장실에 들른 필자 얼굴을 교장선생님은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대형사고를 쳐놓고서 무슨 염치로 결근을 하랴! 미안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더 열심히 수업을 했다. 2005년 3월 5일 토요일. 그날은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첫 번째로 시행되는 놀토였다. 전 교직원들은 첫 놀토를 기념할 겸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안성 서운산으로 등산을 갔다. 산 정상에 올라서자 넓적한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20대 후반의 남자 체육선생님이 이쪽 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가볍게 몸을 날리며 건너뛰었다. 순간 ‘나도 한번 뛰어볼까?’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필자는 벌써 바위를 건너뛰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에요?” “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 발이 미끄러지며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필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깨어난 후에도 계속 헛소리를 하는 통에 동료 교사들은 상태가 꽤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필자는 ‘내가 이러면 우리 애들은 어떡하지? 이렇게 정신이 없으면 수업은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걱정을 했다. 20대 젊은 남자 선생님이, 그것도 날렵한 체육선생님이 바위를 건너뛴다고, 50대 중반의 여자가 주제파악도 못하고 따라하다가 완전 대형사고를 친 거다. 딸에게 필자의 별명은 럭비공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 사고를 쳤으니 동료 교사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날의 사고 때문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어 점심 한 그릇씩 겨우 먹고 헤어졌단다. “물의를 일으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모처럼의 나들이를 제가 망쳐놔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사과하는 필자의 모습을 보며 한 선생님은 혀를 내둘렀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예의를 차릴 수 있냐고,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못할 거라고. 바위를 건너뛰었던 체육선생님은 놀라서 자신의 손수건으로 지혈을 시켰고 다른 남자 선생님과 부축을 해줘서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곧 119구급차가 도착했고 필자는 평택 굳모닝병원으로 실려가 정수리 부분을 다섯 바늘이나 꿰매고, 바위에 무참하게 갈려나간 얼굴을 치료받은 후 겨우 귀가할 수 있었다. 지금도 고마운 분은 정보처리과 부장님이었다. 필자의 직속상관이었던 그분은 당신이 사는 14층 아파트로 달려가 손수 키우던 알로에를 가져오셨다. 심각했던 얼굴의 상처가 깨끗이 아문 것은 순전히 그 덕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날 아파트 엘리베이터까지 고장 나 14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고 하니 지금도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이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 세월이 지나보면 늘 누군가의 정성과 배려 속에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 2017-07-1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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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상희 헤어팝’ 이상희 원장
-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 2017-07-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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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들어도 여전히 미숙한 인간관계
- 지인이 잘못했을 때 그것을 알려줘 고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 과거 한 박물관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쉬는 날을 동료들과 의논해서 결정했는데, 동료 중 한 분은 63세였고 직업이 강사였다.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나가야 한다 해서 강의하는 날을 쉬라고 배려해줬다. 그다음 72세인 분에게 편한 날짜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자가 쉬는 날을 골라 정했다. 이분들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동안 모임도 함께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날짜를 양보해도 뿌듯하고 좋았다. 그런데 며칠 후, 72세인 분이 쉬는 날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다른 날짜를 이리저리 검토해보았지만 마땅한 날짜가 없었다. 그러자 63세인 분에게 강의 날짜를 바꿀 수 없냐고 물었다. 당연히 바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분은 동료가 강의하러 가는 바로 그날 쉬고 싶어 했다. 그리고 뜻대로 안 되자 그때부터 불만을 갖더니 한 사람 강의 때문에 자신이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러 갈 때도, 전시관에서 근무 중일 때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휴일로 선택한 날짜가 되면 꼬박꼬박 챙겨 쉬었다. 한 달 내내 그분의 불평을 듣다 보니 은근히 화가 났다. 도대체 연세가 몇인가. 포용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힘들죠?” 하면서 동생 같은 동료들을 챙겨주셔야 할 입장 아닌가! 그러나 나이도 한참 많은 분이 그런 말씀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필자가 쉬는 날짜 정할 때 배려해주고 양보해줬어도 고맙다는 말씀은 전혀 없었다. 참다못해 하루는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전시관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언성을 높이더니 “난 그런 사람 아녜요! 맘대로 생각해요!” 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른 데로 가버렸다. 필자는 순간 당황했다. 자존심을 크게 다쳤나보다 하고 그분을 따라가면서 “제 말 좀 끝까지 더 들어보시라”고 했다. 하지만 “시끄러! 말하지 말아요! 난 들을 필요 없어!” 하며 화를 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시회 끝나는 날까지 필자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나이가 72세나 되신 분이 어쩜 저렇게 여유가 없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자가 말할 때마다 바로 투명인간 만들어버리는 그분을 보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꾹꾹 참아가며 아침 출근인사와 퇴근인사를 깎듯이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투명인간’ 대접을 받고 있다. 으이구 주책이야! 속으로만 생각할걸! 그런 말을 왜 해서는! 세 치 혀 간수 못해 지인도 잃고 마음에 큰 상처만 남겼으니 필자의 잘못이 크고 후회막심이다. 그래도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절대 충고하지 말자! 그것이 지혜라면 지혜일 수 있다. 때로는 상대에게 상처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 앞으로는 누가 잘못을 해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2017-07-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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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에서 만난 사람] 꿈의 은퇴촌, 캘리포니아 라구나우즈 빌리지를 가다
- 미국은 세계에서 실버타운이 가장 발달한 나라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독립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독립적인 가족문화 때문일 것이다. 은퇴 후 자식에게 의존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시니어들의 의식도 한몫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이미 실버타운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이름난 대규모 은퇴 단지만 3000여 곳, 이 중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작은 해안도시에 있는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한인들에게는 꿈의 은퇴촌으로 불린다. 365일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 입맛대로 골라 즐길 수 있는 클럽활동,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년 친구들, 무엇보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다. 서로를 ‘아름다운 동행자’라 부르는 이곳,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한인들을 만나봤다. 미스터&미세스 손 “입구를 잘못 들어왔네요. 거기서 기다려요. 미스터 손한테 나가보라고 할게요~” 은퇴촌이라고 만만히 봤다간 낭패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총면적은 2100ac(약 250만 평). 라구나우즈 시(市)의 90%를 차지한다. 여의도 전체보다도 크다. 알려준 9번 출입구를 못 찾아 8번 출입구로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9’에서 ‘8’이 멀어봤자 얼마나 멀겠냐 했지만 결국 길을 잃었고 기어이 80세의 주인장을 마중 나오게 만들고 말았다. 나무 그늘 밑에 자동차를 대놓고 5분 정도 기다리자 언덕 위에서 골프카트 한 대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왔다. 흐트러진 흰머리를 단정히 하며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노신사. 미스터 손이었다. GPS를 손에 들고도 길을 잃은 젊은이(?)에게 위로의 말도 잊지 않는다. “여기가 원래 넓어서 찾기가 좀 힘들어요. 하하하.” 손기용(80), 손종숙(75) 부부. 빌리지에서 이들은 미스터&미세스 손으로 불린다.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와 정반대 쪽에 있는 오하이오에서 40년 넘게 소아과 의사, 병리과 의사로 각각 일하다 은퇴를 했고 6년 전 캘리포니아로 이주,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주민이 됐다. “오래 살았던 오하이오가 익숙하긴 했지만 겨울이 추웠어요. 따뜻한 플로리다로 갈까, 아들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갈까 고민하던 중에 집이 덜컥 팔려버린 거예요. 어디로든 떠나야 했죠. 일단 아들 집과 가까운 이곳 라구나우즈 빌리지에서 월세로 살면서 천천히 결정해보자 했는데, 두 달 만에 집을 샀습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찾던 파라다이스였어요!”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2300ft2(약 65평)의 크기로 거실과 주방, 그리고 두 개의 침실과 화장실이 있는 예쁜 단층집이다. 2011년 당시 80만 달러에 구입했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에는 손씨 부부가 살고 있는 단독주택 외에도 콘도와 아파트가 있는데 한인들이 선호하는 어바인이나 플러턴에 비해 주택 가격은 다소 낮은 편이라고. 캘리포니아의 화창한 날씨는 부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여름엔 더워도 습도가 낮아 상쾌했고 겨울엔 눈이 내리지 않아 운전하기가 좋았다. 10분이면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라구나 해변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가 있었다. 인근 플러턴과 어바인에는 한국 식당과 상점이 넘쳐나니 한국 음식이 그리울 틈도 없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여유 넘치는 빌리지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한마디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골프, 수영은 물론이고 젊은 시절부터 취미였던 사교댄스도 더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였죠. 빌리지에는 200개가 넘는 클럽(동호회)이 있어요. 원하면 어떤 클럽이든 가입할 수 있고 직접 만들 수도 있어요. 여기서는 심심할 일이 없어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서로 얼굴도 못 보는걸요. 젊은 시절보다 더 바쁘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합니다.” 남편은 독서와 골프를 즐기고 아내는 하이킹과 합창을 좋아한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부부는 각자 활동하는 클럽이 다르지만 이것만큼은 꼭 같이하자고 정해놓은 세 가지가 있다. 손을 잡고 거니는 저녁 산책, 같은 침대 쓰기, 그리고 벌써 20년을 함께해온 볼륨댄스가 그것이다. 빌리지 안에서 손씨 부부는 춤꾼으로 유명하다. 경력 20년의 수준급 솜씨다. 특히 아내 손종숙씨는 전국 경연에도 참가할 만큼 프로급 댄서다. 어느 해 연말파티에서 백인들도 울고 갈 정도로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부부의 모습을 보고 이웃에 사는 한인 부부들이 배움을 자청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세스 손의 댄스교실은 현재 40명이 넘는 학생들이 늦은 춤바람으로 열공 중이다. 부부는 라구나우즈에 들어오기를 두고두고 잘한 일이라 여긴다. 아내에 비해 조금은 소극적인 성격인 손기용씨는 이곳에서 동년 친구들과 격 없이 어울리며 사는 재미를 알게 됐다고 한다. 평생 쓰고 싶어도 못 썼던 모국어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저녁은 주로 아내가, 아침은 내가 준비합니다.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매일 아침 볼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요. 우리는 현재 생활에 아주 만족해요. 둘이 있어서 좋고 친구가 많아서 즐겁습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즐거움이지요. 아내와 나는 이곳이 마지막 종착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해야지요. 스트레스가 건강에 제일 안 좋다는데 여긴 그럴 일이 없어요. 이곳에 살고 있는 최고령 한인은 90이 넘은 분이에요. 10년은 문제없겠지요? 하하하.” 라우나우즈의 이장님, 한인회 김일홍 회장 라구나우즈 빌리지에 한인회가 만들어진 것은 지난 1998년. 당시 회원은 30명 정도였다. 타향살이 이민자들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형님 동생이 되었고 주말이면 다 같이 한집에 모여 바비큐를 먹고 친목을 다졌다. 이후 7명의 한인 회장이 배출되었고 그동안 빌리지의 한인은 700여 가구 1200여 명으로 늘었다. 옛날처럼 오손도손한 분위기는 없어졌지만 한인의 위상은 커졌다. 현재 8대 한인 회장을 맡고 있는 김일홍(79)씨는 초기 한인회가 한인들 간의 친목을 다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커뮤니티 내 타 인종과의 화합과 클럽활동을 통한 자기계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5년간 이곳에 한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요. 이대로 가면 빌리지의 한인 비율이 전체의 10%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그만큼 커뮤니티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면 좋겠습니다. 매년 빌리지 내에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초청해 기념식과 만찬을 열고 있는데 참으로 뿌듯합니다. 4년 전 만든 한국어 클래스도 아주 인기가 좋아요. 얼마 전에는 아리랑 코리안 문화축제를 열었는데 주민들의 호응이 대단했어요.” 라구나우즈 빌리지에는 동호회 활동을 위한 대규모 연회장인 클럽하우스가 10여 개 있다. 소규모 모임을 위한 크고 작은 미팅룸은 예약만 하면 10~20달러(1만~2만원) 선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한인들이 주축이 된 클럽도 20여 개나 된다. 김일홍 회장은 클럽활동을 단순한 여가생활에서 더 발전시키려 애쓰고 있다. “목표를 정하고 도전해보자는 거죠. 그 예로 글사랑모임 클럽에서는 2014년부터 라는 수필집을 발간하고 있어요. 회원들의 필력뿐 아니라 편집이나 사진 실력이 매년 발전하는 것을 보며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김일홍 회장은 라구나우즈에서 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한인회 관련 일은 물론이고 동호회 활동, 관리사무소나 빌리지 내 시설 사용 등 민원 업무도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앞서 만난 손기용씨는 김 회장을 알뜰살뜰한 마을 이장님 같다고 했다. 빌리지 안에서 운전하며 가다가도 아는 얼굴을 만나면 꼭 차를 세우고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다. 짬을 내어 아프거나 홀로된 노인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도 살펴야 맘이 편하다. 때로는 라구나우즈 빌리지 가이드가 되어 투어 서비스도 한다. 미국 전역에서 톱 10에 속하는 명성에, 한인이 많이 살다 보니 은퇴자라면 한 번쯤 꿈꾸어보는 라구나우즈 빌리지. 입주 문의는 늘 이어진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주택 종류에 따라 3만6000달러(약 3600만원)에서 4만2000달러(약 4200만원)가량의 연수입이 있어야 한다. 일정 금액의 자산도 증명되어야 한다. 월 관리비는 650달러로 골프장, 수영장, 헬스클럽, 클럽하우스 등 빌리지의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시설관리, 조경, 가스, 수도, 케이블TV 등이 모두 포함된 금액이다. 김 회장은 빌리지 입주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지만 미리미리 은퇴 계획을 세운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조언한다. “재력이 은퇴생활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죠. 100세 시대에 은퇴하고 20년, 3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인들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경향이 있죠. 지나친 헌신으로 은퇴 후 자신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봅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솔직히 우리 나이가 되면 자식보다 배우자, 친구가 더 소중합니다.” 김 회장은 건강과 재력 외에 성공적인 은퇴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은퇴 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시간을 어떻게 쓸지 몰라 난감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평소 좋아하는 운동이나 취미를 준비해놓는 것도 중요해요. 라구나우즈가 최고의 은퇴촌으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죠. 이곳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다들 바빠요(웃음).”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많은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웃들의 소소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포토그래퍼 박성원 작가, 성악가의 꿈을 라구나우즈에서 이루고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소피아 최 회장, 춤을 사랑하는 동호인들을 모아 7년째 고전무용 춤방을 열고 있는 김영옥씨,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 좋더냐’ 훈남 이수일로 변신한 연극반 채한경씨,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에서 이제는 라구나우즈 미술선생님이 된 이상락씨, 그리고 여전히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배려하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미스터&미세스 손까지…. 라구나우즈 빌리지가 꿈의 은퇴촌으로 불리는 이유는 기막힌 골프코스와 수영장, 럭셔리한 클럽하우스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에는 여전히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라구나우즈 빌리지가 아름다운 이유다.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라구나우즈 시 안에 있는 은퇴 마을이다. 현재 1만2736세대, 3만6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빌리지 안에는 5개의 수영장과 36홀의 골프코스, 테니스코트, 도서관, 극장, 우체국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있다. 라구나우즈에 입주하려면 조합(HOA – Home Owner’s Association)에 가입해야 하는데 크게 협동조합(Co-Op)과 상호조합(Mutual)으로 나눠져 있다. 협동조합의 경우는 조합이 소유주로서 입주자는 집이 아닌 조합회원권(Stock Certificate)을 구입하면 된다. 상호조합의 경우는 콘도 내부 수리와 관리를 소유주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 상호조합과 협동조합의 가장 큰 차이는 구입한 집을 임대해줄 때다. 협동조합의 경우는 1년 동안 6개월 이상 임대를 줄 수 없다. 상호조합은 임대에 대한 제약이 없다. 따라서 투자를 위한 임대 목적으로 은퇴촌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는 상호조합 콘도를 구입하는 것이 유리하다. 라구나우즈에 입주하려면 배우자 중 한 사람이 반드시 55세 이상이어야 하며, 집값은 일시불로 지불해야 한다. -------------------------------- 라구나우즈 빌리지 웹 사이트 lagunawoodsvillage.com 한인회 웹사이트 lagunawoodskac.com
- 2017-07-0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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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님과 기사님?
-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는 무척 조심스럽다. 진정성을 헤아리기보다는 얄팍한 호기심으로 남의 집 창문 들여다보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그러나 야학 시절 우리 가족을 가장 살뜰히 사랑해주셨기에 지금도 필자에게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는,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의미가 담긴 청춘의 빛깔 고운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려본다. “얘 네가 뭐 잘난 게 있다고 J선생님께 그렇게 쌀쌀맞게 굴었니?” “선생님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니? 그것도 모르고….” 요즘 만나는 야학 동급생들은 우연히 화제에 오른 J선생님 얘기를 하다가 필자를 무차별 공격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오만한 동물인가. 상대방이 조금만 잘해주면 자기 분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하지 않는가. 라는 책 제목처럼 필자도 연애감정의 알파와 오메가를 10대인 야학 시절에 이미 다 터득했다. 순수한 선생님으로서 보여준 사랑이었는지, 약간은 감정이 있는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당시 필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J선생님께 차갑게 굴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를 J선생님께 두고두고 죄송할 따름이다. 가난 때문에 다니게 된 야학교였지만 필자는 그 시절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선을 만났고 그 감동은 단지 추억으로만 그치지 않고 살아오는 동안 필자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힘이 돼줬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시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모든 것에 우선한 아름다움이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영혼이다. 그 자체가 큰 감동이라서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야학 시절 그런 분들을 알았기에 이후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좋으신 분들을 한두 분도 아니고 몇십 분을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가. 달빛이 교교한 어느 10월의 밤이었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길섶 댑싸리에 내려앉은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도 달콤 상큼했다. 그날은 야학 수업이 끝난 뒤 J선생님이 필자를 집까지 데려다주시는 길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지만 당시 서울대 농대생들은 날이 선선해지면 감색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가슴에는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새겨진 배지를 달았다. 다들 어려운 때라서 사복 입을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도 많았겠지만 들어가기 힘든 서울대 교복이었으므로 상당한 애착 내지는 긍지도 있었을 듯싶다. 우리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J선생님은 교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시더니 필자에게 내미셨다. “애란아 이거 내가 쓰던 건데 너 가져라.” “싫어요.” 그 시절 겨우 연필 아니면 볼펜 정도나 쓸 수 있었던 필자로서는 쉽게 갖기 힘든 필기구였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그러지 말고 받아라.” “싫어요.” “제발 받아라.” 싫다는데 계속 받으라고 하자 짜증이 나버린 필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싫다니까요.” 몇 번 그렇게 거절하자 J선생님은 그만 땅바닥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그 만년필을 두 손으로 바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만년필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던 교교한 달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맙소사!’ 순간 필자는 너무 당황스럽고 황송해서 얼른 두 손으로 만년필을 받았다.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는데 제자인 필자가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선생님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온 뒤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 만년필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달빛이 노니는 마루 끝에 앉아서 선생님의 모습을 자꾸 생각하는 밤이었다. ‘아!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황홀한 밤이었어!’ 그 후 필자는 두고두고 그날 밤 그 장면을 떠올리며 황홀해했다. 17세 때였고 어느덧 3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날 그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달빛이 찬란히 빛나던 아름다운 젊은 날의 내 소중한 추억이여!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자존심만 시퍼렇게 돋아 있는 제자의 속내를 최대한 배려해주신 J선생님. 현실 속에서는 비록 비참한 신분일망정 상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고고한 공주였던 필자의 정신세계를 잘 알고 계셨기에 그날 기꺼이 최초의 기사님(?)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이런 일은 결코 흔치 않으며, 필자만큼 환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많은 추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주인공은 단연 J선생님이다. 이 로맨틱한 멋진 기사님(?)을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 2017-06-27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