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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는 현재를 위해 존재한다
- 우리에게 익숙하던 20세기가 가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낯선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하나둘 깨져나가는 경험을 하며 당혹감을 느낀다. 집값은 늘 올라가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부터 내려가기 시작하고 은행 이자가 애들 껌값으로 전락했다. 콩나물 교실이 당연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아이가 없어 폐교되는 학교가 속출한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변화보다 더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것은 믿었던 가치 체계가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이솝우화를 진리로 믿었다. 개미와 베짱이 중에서 개미가 진리이고 베짱이는 부도덕한 게으름뱅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서 개미들은 삶의 방향을 잃고 말았다. 믿었던 미래가 허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면에 베짱이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어떤 인터넷 편지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어느 사이좋은 부부가 정년 은퇴 후의 여유로운 전원생활과 여행을 꿈꾸며 현재 자신들의 삶을 한없이 인색하게 살기로 작정했다. 현재보다 노후 대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한 노후를 맞을 수 없었다. 남편은 정년을 2년 앞두고 폐암으로 죽었고 아내는 그 충격으로 우울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시집간 딸이 혼자 사는 어머니 집에 들러 청소하던 중 벽장 속에서 종이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두 부부의 전원생활에 대한 계획과 여행안내 책자가 들어 있었다. 딸은 차마 그것들을 치울 수 없었다. 부모님의 이루지 못한 꿈과 노후 계획들이 가득 차 있어서 감히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거웠기 때문이었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신파적 내용으로 여겨지겠지만,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현실이고 맹목이다. 우리 세대는 오로지 미래만을 보고 현실의 고난을 견뎌왔다. 그러나 그 파랑새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그런 허망한 미래를 위해 희생한 애꿎은 ‘현재’는 어찌할 것인가. 말하자면 지금 우리 세대의 좌절과 분노는 이런 바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은 인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성장시대’에 나타난 기이한 신기루일 뿐이다. 영원히 성장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기대에 속아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말이다. 사실 인간의 계획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그동안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계획한 대로 진행된 일이 얼마나 되던가. 계획이란 결국 충실한 현재의 누적일 뿐이다. 미래 언저리에 도달한 우리가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남루하다고 또다시 미래를 꿈꾸며 지금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영화 를 보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여자를 놓칠 것만 같은 제시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한다. “저와 함께 비엔나에서 내리지 않을래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이다. 현명할 것을, 포도주는 그만 익혀 따르고. 짧은 인생, 미래에 대한 기대는 줄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우릴 시기하며 흐른다네. 현재를 잡게 Carpe Diem, 내일을 믿지 말고. - 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기원전 65~8, 로마의 시인)
- 2017-04-1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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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서도 잘해요’
- 필자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데 결혼 11주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때 친정어머니께서는 필자의 집, 친정집, 병원을 매일같이 오가셨다.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은 전기 압력밥솥으로도 밥을 할 줄 몰랐고, 세탁기는 더더욱 사용할 줄 몰랐다. 그래서 친정어머니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딸의 집 식사와 빨래와 청소를 하시면서 한 달간 아주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퇴원 후 남편과 아들에게 집안일을 조금씩 가르쳤다. 다행히 두 아들은 재활용 분리수거와 청소, 식사 준비를 조금씩 스스로 하게 됐고 남편은 아주 어쩌다 건조된 세탁물 정리와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계속 연습을 시키고 습관을 들인 결과인지 결혼한 두 아들은 현재 재활용 분리수거나 식사 준비 등 직장을 다니면서도 며느리를 많이 도와주면서 재밌게 살고 있다. 재활용이나 주방일을 도움받을 때마다 필자는 아들들에게 “미래의 며느리가 어머니가 정말 잘못 가르쳐서 제가 힘들다구요”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그 말이 효과를 본 것 같다. 자녀를 모두 분가시키거나 결혼시킨 후 단출하게 사는 시니어 부부의 경우 그렇게 살다가 누가 먼저 세상을 뜰지 모르기 때문에 집안일은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일상적인 일조차 전혀 적응이 안 된 분이 혼자 남겨질 경우 정말 힘들다고 한다. 이는 남자이든 여자이든 다 마찬가지다. 여자가 혼자되면 남자보다 적응을 잘하고 산다는 얘기도 있지만 예외도 있다. 잉꼬부부였던 지인이 몇 년 전 사별을 했다. 사업가였던 남편은 정말 자상해서 살아 있을 때 아내가 힘들어할까봐 재활용 분리수거는 물론 장도 같이 보러 다니고 장본 물건들을 차에 싣고 날라주고 했다. 또 어쩌다 아내 없이 혼자 식사를 하게 되더라도 설거지는 물론 행주까지 깨끗하게 빨아 탁탁 털어 잘 마르도록 정리해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자상했던 남편이 암 진단 받고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나니 재활용 분리수거할 때도 남편 생각이 나서 힘들고 장보는 날에도 힘들게 물건을 들고 오다 보면 짐 무게만큼 마음의 상처도 컸다고 한다. 며칠 전 70대 중반의 형님들과 점심식사를 같이하기로 했는데, 항상 약속 장소에 먼저 와 계시던 분이 늦게 나타나셨다. 웬일인가 여쭈어보니 세끼 식사를 꼬박 챙겨 드시는 남편을 위해 점심을 챙겨드리고 나오느라 늦으셨다는 것이었다. 나이 들고 보니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프로그램 제목이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식사도 혼자 할 줄 알아야 장수시대가 더 이상 재앙이 되지 않는다. 함께 어울리는 관계도 중요하지만 혼자서 시간을 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 여럿이 모여 건배사 날리면서 시끌벅적한 모임도 좋지만 혼자서 술도 차도 밥도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시니어뿐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혼자서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훈련하는 대한민국 가정과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 2017-04-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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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열 번 할 것 같은 영원한 철부지 소녀, 배우 이상아
- 그녀는 철없고 순진하다. 세 번의 이혼과 파산 등 여배우로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을 견디며 살았는데 고생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10대에 이미 화려한 스타로 누릴 대로 누리다가 편안하게 그대로 곱게 중년이 되어버린 여자처럼 보인다. 40대가 되면 누구나 얼굴이 책임지고 살아온 인생을 투영한다고 말하는데 이상아의 얼굴은 반칙이다. 노란색을 아주 좋아한다는 그녀와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박규민 CF 여왕이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 스타 이상아도 별수 없게 그저 그런 아줌마가 되어버렸겠지 하며 큰 기대를 안 한 채 그녀를 만나러 일산의 MBC 드라마세트장으로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방영하고 있는 MBC 드라마 에서 이상아는 50대 사모님 역으로 나오고 TV조선의 에서는 사춘기 딸과 전쟁을 벌이는 철부지 엄마의 이미지로 비춰지기에 천하의 이상아도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가 없겠지 지레 판단하고 덤덤하게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의 섣부른 상상은 1초도 안 돼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먹만큼 작은 얼굴은 설탕처럼 하얗고 거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망울은 보석처럼 빛이 나서 한량 이봉규도 어쩔 수 없이 덜컹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고 말았다. 참고로 나는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한량으로 자부하기에 이상아처럼 전형적인 예쁜 얼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공효진, 박소담, 김고은처럼 독특한 매력이 있는 얼굴을 좋아한다. 굳이 따지자면 내 아내도 전형적인 예쁜 얼굴이 아닌 묘한 매력이 있는 외모의 소유자다. 그런 미적 가치관을 가진 이봉규도 이상아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한순간에 송두리째 흔들렸다. 불행했던 결혼생활 사람들이 왜 이상아가 예쁘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이 아마 美의 보편적인 상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상아는 세 번의 이혼, 파산, 술장사까지 해야만 했던, 여배우로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을 견디며 살았는데 찌든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아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TV 화면이나 사진을 보면 늙어진 모습이 그대로 나와서 거짓말을 못합니다”라는 그녀의 평가가 희한하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TV로 볼 때는 그녀가 이토록 밝고 예쁜지 몰랐다. 그녀가 세 번째 이혼 이후 공황장애를 앓았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어두운 모습을 상상했는데 오늘 만난 이상아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세 번째 이혼을 발표할 때 16시간 동안이나 포털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최순실을 이겼잖아요!”라며 깔깔대고 웃는다. 최순실 사태가 터졌을 때인데도 이상아의 세 번째 이혼 소식은 온 국민의 화제였다. 최순실 뉴스를 이긴 것이 대단하다고 이상아 본인 입으로 자랑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젠 아픔을 충분히 극복했고 이혼하길 잘했다는 자평일지도. 하여간 이상아는 철없고 순진하다. 독설가의 이미지가 강한 이봉규를 만나기로 해서일까? 그녀의 표정이 처음에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아마 저 인간이 나의 불행한 과거 얘기를 독하게 물고 뜯으려 하겠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30분 정도 흐른 뒤부터 철없고 순진한 이상아는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세 번의 이혼 얘기는 물론이고 아팠던 과거사를 아주 자연스럽게 술술 풀어내놓았다. 그녀는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두 자매를 부양해야 했던 삶이 버거워 현실도피 차원에서 했던 첫 결혼에 실패했고 이후 두 번의 이혼을 더 겪으면서 공황장애에 빠진 것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다. 심지어 딸과도 자주 싸울 정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방송활동을 다시 활발하게 하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 연애는 생각도 못한 채 고독한 생활은 연장선상에 있다. 또 다른 사랑, 아직 버겁다 한번은 점을 봤는데 “결혼을 열 번도 더 한다”는 말에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 점쟁이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 남자 만나기가 겁이 나기도 하지만, 딸 때문에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엄마와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딸은 엄마에게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 엄마를 뺐길 것 같아 불안해한다는 것. 하지만 엄마가 세 번이나 이혼한 경력에는 더 이상 상처를 안 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짝을 만나면 또다시 외톨이가 될까봐 겁을 내는 딸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뜻 연애 상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은 이해하면서도 이 정도에서 물러날 이봉규가 아니라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00세 시대에 아직 창창한데 이렇게 아름다울 때 빨리 평생 동반자를 만나야 한다고 하나마나한 빤한 조언을 하면서 “소개팅 시켜줄 테니 어떤 남자가 좋은지 말해보라”고 미끼를 던졌더니 철없고 순진한 이상아는 금방 문다. “나는 전형적인 B형 여자인데 B형 남자가 잘 맞는다. 불꽃 튀게 싸워도 빨리 풀어지고 뒤끝이 없어서 좋다”고 포문을 열더니 한술 더 떠서 “이제는 연하의 남자가 좋다”고 털어놓는다. 미끼를 금방 물 정도로 다루기가 정말 쉬운 순진한 여자다. 순진하기에 그동안 남자들에게 많이 당했을 것 같다. 그래서 이혼도 세 번이나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봄 직하다. 열두 살 띠동갑 연하의 아내와 행복한 재혼생활을 즐기는 이봉규가 목소리를 높여 또 충고했다. “나처럼 나이 많은 남자와 살면 내 마누라처럼 행복해진다”고 윽박질렀다. 그랬더니 그녀는 “탤런트 길용우씨도 비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친구 소개시켜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길용우 선배는 나보다 무려 열일곱 살이나 많은데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니”라며 질색을 했다. 내친김에 더 집요하게 물었다. “연하의 남자라면 연예인 중에 어떤 스타일의 남자가 좋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배우 강하늘이 젊은 사람들 중에 가장 매력적”이라면서 “야비한 역할도 어울리고 청순한 이미지도 있는 다중 인격적인 매력이 있다”고 답한다. 잽싸게 강하늘의 나이를 검색한 뒤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알려주니까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세 번이나 이혼하고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이상아는 영원히 철부지 소녀로 늙을 것 같다. 그런 점이 그녀의 매력 포인트다. 그래서 아직도 이토록 예쁜 얼굴을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부지라서 나이를 먹지 않고 어려 보여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다고 한다. 선후배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연예계에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대선배인 이상아를 어려워하지 않아서 서운할 때도 많단다. 털털하고 철없는 이상아도 참고 참다가 어떨 때는 학번이나 나이를 들먹이며 교통정리를 한 적도 있다. 어려 보이고 철이 없어서 사회생활에서 손해 보는 경우도 많은데 딸과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라서 단점으로 작용한다. 딸에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다가도 갑자기 싸우고 또 속상해하면서 펑펑 울기도 한다. 딸은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한번은 방송 에서 딸 서진이가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었으면 더 잘됐을 거 같았다”고 충격 고백을 했다. 이상아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태어난 걸로도 감사한 줄 알아라. 그냥 ‘아빠가 그 아빠가 아니었으면’이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냐”라고 말하면서 울었다. 그 방송에서 이상아와 딸의 관계에 대해 역술가에게 물었더니 “둘이 절대 안 맞는다. 창과 방패다. 누군가 하나는 패턴을 바꿔야 한다”며 “모녀가 계속 충돌하는 이유는, 이상아 입에서 칼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 부분이 이상아의 복을 차버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역술가는 딸 서진의 사주에 대해서도 독하게 평가했다. “엄마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남자 부분이 겹친다. 세상 어떤 남자가 와도 만족을 못한다”는 직설적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진은 “미래의 내 남편 직업은 무엇이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역술가의 평가와 달리 인생 육십을 산 한량 이봉규가 볼 때는 철부지 엄마와 당돌한 딸은 궁합이 잘 맞는다. 그렇기에 티격태격 싸우면서 같이 울고 웃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 아닐까? 딸은 커가면서 엄마 이상아의 아픔까지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나는 자존감이 없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상아의 자조적인 자기진단이다. 내성적이면서도 철없고 순진한 여인 이상아가 지금까지는 남자 복이 없었지만, 세 번의 이혼을 통해 충분히 예방주사를 맞았기에 앞으로 아름답고 예쁘지만 약하고 철없는 이 여인을 완전히 감싸줄 푸근하고 강한 남자가 곧 나타나서 그녀의 남은 빚을 갚아주는 대신 행복을 차용하는 날이 100세까지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녀는 노란색을 아주 좋아한다. 노란색과 인연도 깊다. 탤런트 면접시험 때도, 첫 CF(마요네즈 광고) 때도 노란색이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상아의 집은 노란색 벽지로 덮였다. 노란색은 희망, 기분 좋음, 즐거움, 행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연예인의 특성과 아주 잘 맞는다. 이제부터 하는 일과 사랑 찾기 게임에서도 노란색의 의미가 잘 발휘될 것으로 믿는다.
- 2017-03-3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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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어지고, 놓치고, 다치는 일 계속 일어난다면 '중증근무력증' 의심해야
- 야채를 썰다 놓친 부엌칼이 발등 근처에 떨어져 크게 놀라거나, 매일같이 오르던 계단이 어느 날부터 유독 높아 보이거나, 맛있는 깍두기가 제대로 씹히지 않는 날이 있다. 누구나 일상 속에서 개의치 않고 넘길 수 있는 일들이다. 체력이 좀 떨어졌거나, 며칠 쉬지 못해 그러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바로 중증근무력증이다. 안석원(安錫源·42) 중앙대학교병원 신경과 교수와 함께 중증근무력증에 대해 알아봤다. 중증근무력증은 많은 사람에게 병명조차 생소한 병이다. 게다가 병명에 중증이란 단어까지 붙어 있어 막연한 공포감까지 든다. 실제로 중증근무력증은 국가에서 지정한 희귀난치성질환 중 하나로 국민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국내에서 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7000명 전후로 알려져 있지만, 의료계에서는 훨씬 더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유 없이 힘이 빠지는 병 중증근무력증의 대표적 증상은 몸의 힘이 빠지는 것이다. 근육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원하는 대로 몸을 쓸 수 없게 된다. 범위는 모든 근육에 해당된다. 팔다리에서부터 안구 근육까지, 인간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근육에서 이러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부위는 숨 쉬는 것을 조절하는 호흡근이다. 호흡근에서 중증근무력증이 발병했을 때,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고 만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억만장자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도 중증근무력증으로 인한 폐렴이 사망 원인이었다. 안석원 교수는 초기에는 증상을 제대로 인지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모든 근육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대부분 사소한 증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걷다가 주저앉게 되거나 음식을 씹기 어렵게 되죠. 대화에 곤란을 겪기도 해요. 말이 어눌해지면서 목소리까지 변하죠. 저작근에 문제가 생기면 딱딱한 음식을 씹기 힘들어지고 삼키는 것도 어려워져요. 그런데 휴식을 취하면 증상이 완화되는 경우가 많아 단순한 피로로 여기기 십상입니다. 특히 중장년층은 나이가 들어 그런 것 아닌가 하며 쉽게 넘길 수 있죠.” 중증근무력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경우가 가장 흔하다. 안구형 중증근무력증과 전신 중증근무력증이 그것. 안구형 중증근무력증은 눈 근육에 이상이 생겨, 눈꺼풀이 처지는 안검하수증과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복시 증상이 나타난다. 복시는 안구를 움직이는 눈 근육에 이상이 생겨 안구 한쪽이 힘없이 처지면서, 양쪽 안구가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지 못해 일어나는 시차 때문에 나타난다. 복시가 심해지면 운전은 물론 계단 오르는 일도 어려워져 대부분의 일상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전신 중증근무력증은 전신의 모든 근육이 질환의 영향을 받는 상태를 말한다. 처음엔 사소한 증상부터 시작되지만 몸을 쓸 수 없는 증상은 점차 확대돼 대부분의 경우 6개월에서 1년 정도면 전신으로 확대된다. 이 밖에 중증근무력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신생아가 일시적으로 같은 병을 겪게 되는 일과성 신생아 중증근무력증과, 유아기에 많이 나타나는 선천성 근무력증도 있다. 근육 아닌 면역체계 이상이 원인 발병은 기본적으로 여성이 더 많은 편이라고 한다. 40세 이하 젊은 여성들의 발병이 많은 편이고 노화가 시작되면서부터는 50세 이상의 남성에게서 더 많이 발병한다. 이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여성의 경우 갱년기가 지나면 여성호르몬 분비가 감소하지만, 남성의 경우에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중증근무력증은 아직 그 원인이 정확히 파악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가면역체계의 이상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안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신경과 근육이 만나는 곳에 신경근육접합부라는 부위가 있습니다. 뇌에서 근육을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면 이곳을 통해 신호가 전달돼 근육이 실제로 움직이게 되죠. 이 신경근육접합부에서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아세틸콜린이라는 화학물질을 분비하는데, 아세틸콜린을 받아들이는 근육의 수용체에 자가항체가 결합해 아세틸콜린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에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면역이상으로 인해 생성된 항체가 근육 움직임을 방해해서 생기는 질환이라고 볼 수 있죠.” 또 일부 중증근무력증 환자의 경우 흉선에 종양이 생기거나 비대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가슴샘이라고도 불리는 흉선의 이상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다행히 중증이라는 흉악한 이름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정확히 진단만 되면 치료는 어렵지 않다는 것이 안 교수의 설명이다. “이 병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치사율이 매우 높았어요. 90% 정도의 환자는 사망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약제와 치료법이 개발되면서 환자를 정상적인 몸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일단 이 질환을 앓기 시작하면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하는 불편함은 있을 수 있지만 평범한 생활을 하는 데는 문제없어요”라고 말했다. 치료는 어렵지 않다고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중증근무력증에는 완치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증상이 사라져도 병 자체가 없어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중증근무력증이라는 질환은 증세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고, 치료 후 수년간 증세를 보이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나기도 해요. 그래서 신경과 전문의들은 중증근무력증에 대해서는 완치라는 단어 대신 관해(寬解)라는 표현을 써요. 일시적이건, 영속적이건 증상이 감소한 상태를 말하죠. 때문에 약을 끊을 정도까지 상태가 호전되더라도 정기적으로 진단을 받아야 해요. 언제 어떻게 증상이 다시 나타날지 예상할 수 없으니까요.” 의료계에서 이 병의 환자 수가 집계되는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병을 안고 있지만 증상이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져 멀쩡한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운동은 독 중증근무력증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진단 자체가 까다롭다는 데 있다. 당뇨병이나 고혈압과 같이 특정 수치로만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교수는 의사의 진찰 소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중증근무력증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수치만으로는 부족해요. 의사가 환자를 직접 만나 다양한 반응을 확인해봐야 해요. 혈액검사를 통해 항체농도를 측정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죠. 폐활량 검사나 근력 테스트도 실시해요. 몸의 각 근육이 모두 다 정상적으로 움직이는지도 확인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치료는 항콜린에스터레이스라는 이름의 약을 투여하는 것이다. 가슴샘에 이상이 있는 경우에는 절제를 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스테로이드나 면역억제제, 혈장분리교환술과 같은 면역요법이 활용되기도 한다. 치료는 의학적으로 어렵지 않은 편이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괴롭다. 환자를 괴롭히는 첫 번째 요인은 부작용이다. 약에 따라 속이 쓰리거나 소화가 안 되고, 체중이 늘고, 탈모, 간수치 상승과 같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면역체계와 관련한 약들이다 보니 독할 수밖에 없다. 또 매일매일 빼먹지 않고 먹어야 하는 것도 환자에겐 부담스럽다. 안 교수는 “하루 정도 실수로 빼먹어도 부담이 적은 혈압약이나 당뇨약과는 성격이 달라요. 투약이 중단되면 빠르게 상태가 악화돼요. 심지어 약을 챙기지 않고 해외출장을 갔다 사망한 사례도 있었으니까요.” 만약 중증근무력증을 일종의 체력저하로 판단해 운동으로 이겨내려고 하면 더 큰 독이 된다. 정상적인 근육들까지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골프 스윙을 할 때 클럽을 자주 놓치거나, 식사 중 젓가락을 놓치는 증상 등 몸에 이상 증세가 느껴지고 갑작스런 근력저하가 나타날 때는 이 병을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특히 언어구사에 문제가 생기거나 눈 한쪽이 처지는 등 주변에서 증세를 알아볼 정도가 되면 서둘러 신경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을 찾아가 봐야 한다.
- 2017-03-2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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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풍이 가능한 관계가 좋다
- “엄마, 이 오빠 알아? 이 오빠 엄마가 엄마 안다던데?” 교회에 다녀온 딸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얘, 민철이 아니야?” “맞지? 맞지? 오빠랑 얘기하다 우리가 옛날 살던 동네 얘기가 나왔는데 자기네도 거기 살았다고….” 민철이 엄마와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다. 아랫목에 배를 깔고 팝송을 함께 듣고, 디제이가 있는 빵집에 들락날락했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친구가 결혼해서 외국으로 떠났다가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 친구 소식을 딸을 통해 듣게 되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당장 연락을 하고 단짝 시절로 돌아갔다. 여의도에 사는 친구네 집은 잘 꾸며져 있었다. 현대적인 가구와 중국풍의 믹스매치가 세련돼 보였다. 거기다가 유럽이나 미국에 갈 때마다 사온 소품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필자는 친구의 세련된 감성과 친구가 만나는 품격 있는 사람들에 매료됐다. 친구와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부터 바빠졌다. 함께 가는 곳도 많아지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친구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물건을 내보였다. 필자가 전에 살던 생활 방식과는 전혀 달랐지만 고맙고 즐거웠다. 어느 날 친구가 집 앞으로 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감기가 심하게 걸려 나갈 수 없다고 하니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찾아왔다. 친구는 부스스한 필자의 모습을 보더니 “차 타고 드라이브 좀 하면 나아질 거야”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 친구를 거절하는 게 힘들었던 필자는 조금씩 친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필자가 홍콩 여행을 가게 됐다. 심천에서 수년을 살았고 홍콩을 밥 먹듯 드나들었던 친구는 최신 가이드북과 옥토퍼스카드(선불카드)를 챙겨주며 자기가 홍콩 맛집을 정리해서 주겠노라 했다. 필자는 친구의 말을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고 조용히 홍콩엘 다녀왔다. 문제는 홍콩 여행을 다녀온 후에 터졌다. 적극적인 성격의 친구는 이모저모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별일도 아닌데 뭐”라고 말한 필자의 대답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장문의 문자로 서운한 감정을 그대로 전해왔다. 필자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지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가까워지면서 생활에 활기도 생기고 재밌는 일도 많았지만 끌려다니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필자만의 여행을 하고 싶었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 후 누가 잘못한 것도 없이 서로 상처를 받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오히려 친구를 안 만나니 홀가분했다. 그동안 손에서 놓았던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편안함을 되찾았다. 소노 이야코의 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집 주변을 둘러싼 나뭇잎과 가지를 손질했다. 통풍이 나쁘면 집이 썩고 그 집에 사는 사람도 병에 걸린다고 믿으셨다. 그 믿음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깊이 뒤엉킬수록 서로 성가스러워진다. 살다 보면 나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은 나오게 마련이다. 이를 피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과 관계가 힘들고 어려울 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관계를 통풍하는 일 그것이 삶을 행복으로 이끌고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현명하게 관계를 끊는 일은 아직도 고민거리다. 페이스북에서 ‘알 수도 있는 친구’에 그 친구 이름이 뜨면 아직도 깜짝 놀라니 말이다.
- 2017-03-2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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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절함을 노래한 시, 두 번째
-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는 심원(沈園)이란 명소가 있다. 중국 남송시대 때 부자였던 심씨 소유의 아름답고도 거대한 정원인데, 이 정원 입구에는 계란 모양의 둥근 바위가 둘로 쪼개져 있는 조형물이 서 있다. 가서 살펴보면 ‘단운(斷雲)’이란 행서체 글자가 한 자씩 새겨져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로 부부간의 정을 뜻하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끊어버린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곳은 바로 중국 남송시대의 유명한 애국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애절한 사랑의 일화가 서려 있다. 육유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성장한 당완(唐婉)이라는 이종사촌 동생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소꿉친구로 지내다가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규수로 성장하자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육유의 나이 20세 때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육유가 과거시험에 자꾸 낙방하자 며느리 탓이라 여기게 된다. 자식도 못 낳고,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이런 상황들이 모두 며느리를 잘못 들여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급기야 둘을 강제로 떼놓는다. 모친의 성화에 시달리다 못한 육유는 이혼을 가장하고 인근에 당완을 숨기고는 몰래 만나는 행각을 이어가지만 곧 들통이 나고, 결국 모친이 정해준 왕씨 성의 여인과 재혼을 한다. 어쩔 수 없게 된 당완도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조사정이라는 사람에게 개가(改嫁)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데, 육유가 27세 되던 봄이었다. 육유는 심원에 놀러왔다가, 같은 날 봄나들이를 온 당완을 만나게 된다. 당완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본 남편 조사정은 사정을 물었고, 당완이 사실대로 말하자 조사정은 대인의 풍모를 보이며 술과 안주를 준비한 뒤 육유를 초대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그러나 서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육유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 비통한 마음을 담아 이 라는 시를 벽에 써두고 떠난다. 이듬해 이 정원에 다시 놀러온 당완은 이 시를 보고 같은 제목의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일 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완의 죽음을 알게 된 육유는 큰 상처를 지닌 채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심원을 찾아와 당완을 그리는 시를 지었는데, 그중 유명한 작품이 75세 되던 해 지은 라는 시다. 城上斜陽畵角哀(성상사양화각애) 성곽에 노을이 지니 들리는 뿔피리소리 애절한데, 沈園非復舊池臺(심원비복구지대) 심원은 옛날의 연못과 누대로 돌아갈 수 없구나. 傷心橋下春波綠(상심교하춘파록) 서로 마음 아파했던 그 다리 아래 봄의 물결은 푸른데, 曾是驚鴻照影來(증시경홍조영래) 그때 놀란 기러기 같던 그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스치네. 夢斷香消四十年(몽단향소사십년) 꿈도 없어지고 향도 사라진 40년… 沈園柳老不吹綿(심원유로불취면) 심원의 버들도 늙어 버들 솜도 날리지 않는구나. 比身行作稽山土(차신행작계산토) 이 몸도 곧 죽어 회계산(會稽山) 흙이 되겠지만, 猶弔遺蹤一泫然(유조유종일현연) 그녀의 남은 옛 자취 찾으면서 한없이 눈물 흘리노라.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 2017-03-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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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지성인 윤석화, 돌꽃처럼
- 마치 부드럽게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그 강은 사람들이 쉬이 찾지 않는 산속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길을 내어 고고히 흘러가는 강이다. 한 시간 동안 윤석화와 인터뷰를 끝내고 든 느낌이다. 42년간 활동한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배우로서, 그리고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늦깎이 엄마로서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그런 엄격함이 빚은 솔직한 결론들을 청명한 울림으로 던져줬다. 배우와 모성에 대해 그리고 고난을 감히 축복이라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윤석화는 인터뷰하는 동안 쑥스럽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리고 아직 사진 찍히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의외다.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인을 꼽으라면 항상 첫 손가락에 들어갈 그녀가 사진에 익숙하지 않다니? “연극배우란 것이 늘 배역에 대해 면밀히 연구한 후 제 마음속에서 새로이 만들고, 조금씩 조금씩 표현하는 연습을 통해 저한테 그 인물을 오게 하는 거죠. 저는 그런, 어찌 보면 미련한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 제가 처음부터 꿈이 모델이었다거나 어찌어찌하다 모델이 됐다면 이렇게 쑥스러울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미련한 작업에 익숙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게 굉장히 부끄러워요. 그리고 나이가 드니(웃음), 아주 쑥스러워요 정말.”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소녀 미련한 작업에 익숙한 사람, 윤석화의 어린 시절 꿈은 다름 아닌 ‘현모양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꿈도 어느 정도 이룬 그녀는 연극인으로서 살아온 지 올해 42년. 불꽃같은 ‘돌꽃’ 윤석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물론 저에겐 소망이 있죠. ‘무대에서 참 아름다운 배우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속일지 몰라도 저 자신은 속이기 힘들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작품을 선택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왔어요. 연극인으로서 살아온 삶을 생각해보면, 늘 똑같아요. 어떤 때는 제가 참 괜찮은 배우 같고, 어떤 때는 이렇게 해도 되나 싶고.” 그녀의 토로에는 살아온 시간에서 증명되는 모종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여전히 현장에서 뛰는 배우임을 깨닫게 해줬다. 그녀는 ‘속도야 달라지겠지만 은퇴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배우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나 좋을 수는 없고 언제나 나쁘지도 않고.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아직도 배우 윤석화에게 하고 싶은 역할이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이제는 한계가 있는 것도 인정을 해야겠죠. 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대해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에요. 후배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저의 식지 않은 열정을 얘기하죠. 예전에는 어떤 작품을 꿈꾸게 되면, 예를 들어 열 작품을 꿈꾸면 최소한 다섯은 현실로 이뤄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자신감이 예전 같지 않아요.”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배우가 가진 고민은 허심탄회하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와 그 한계를 순순히 인정했다. “연극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졌지만 연극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예전에 비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환경과 싸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죠. 십 년 전만 해도 작품을 할 때 ‘거침없이 하이킥’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도들이 조금 겁도 나고 두렵고…. 나이가 드니 계획을 세우면 젊었을 때는 이삼 일 정도면 실행했는데 지금은 일주일이 되어야 움직이는 것 같아요(웃음). 이러다 혹시라도 직무유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죠. 제가 생각하는 최선에 이르지 못했을 때 다음 스텝에 많은 걸림돌이 될 테고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삶의 가치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윤석화는 맺고 끊음이 분명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때때로 삶에 대한 깔끔한 태도는 나이가 주는 지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나이가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 지혜가 발휘되는 거겠지요. 내 앞의 현실을 수용해야지, ‘이래도 할 수 있어’라고 우기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추해보일 수도 있고, 교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에요.” 나이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수용을 추구하는 본인의 기준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을 고집한다. 그녀의 꿈은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고, 지금 기자 앞에 있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충실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보톡스를 안 맞는 거죠. 배우는 자기를 관리하는 게 의무입니다. 그런데 너무 인위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면 안 예뻐 보이더라고요. 예전부터 하는 얘기지만 나이든 얼굴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책임지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이 사실 굉장히 두렵죠. 저도 그것에 대해선 자신 없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냥 잘하려고 노력해요. 가능하면 모든 것에 감사하고 기도하고 기뻐하고 내게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라는 거죠. 그렇게 나이 들다 보면 향기가 나지 않을까요(웃음)?” 배우로서 사랑받는다는 의미를 깨닫다 윤석화는 연극배우로서 살아왔고 연극배우로서 세상을 익혔다. 그래서 그녀의 삶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연극이다. “제가 연극배우로서 삶을 배우고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 관점이 저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TV나 영화나 음반 제의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유명해지는 게 싫어서 연극을 했어요. 연극을 해보니까 이건 유명해지지도 않고,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 같았죠.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연극이 무엇인지 깨달을 무렵 내가 평생을 걸어도 좋을 나의 업이다 싶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국을 갔죠.”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언론은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꾸밈조차 싫었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가 없었다면 좀 더 자유롭게 큰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을지도 몰라요. 늘 주목을 받는다는 게 제게는 자유를 뺏기는 기분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도 넘고 저 강도 건너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스타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백 명이 날 좋아한다고 쳐요. 그중 구십 명은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이고 열 명은 정말 윤석화를 사랑하는 팬으로 남을 수 있겠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찌됐든 인기가 있다는 것, 윤석화를 보러 그 연극을 보러 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거예요. 인기가 있었으니 그만큼 연기를 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은 감사해요.” 연극에 뼈를 묻고 살아온 윤석화가 변신을 하려는 걸까? 그녀는 최근 SBS 드라마 에 출연했다. “드라마를 무조건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좋은 드라마가 있으면 하고 싶어요. 그런데 워낙 안 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됐죠. 물론 제 본분은 연극이니 선배로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첫 번째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고집들에서 좀 자유로워졌어요. 뭐든 때가 있는 거겠죠(웃음).” 어머니는 위대하다 연극인으로서의 삶만큼이나 윤석화의 삶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늦깎이 엄마로서의 삶이다. ‘가슴으로 낳은’ 수민(아들 14세), 수화(딸 10세)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 걸까? “어머니는 정말 희생이에요. 육아를 해보니 힘들더라고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된다면 어떤 이유라 해도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꿈꾸면 안 될 것 같아요. 어머니는 그 아이가 정말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아는 게 중요하죠.” ‘제일 부러운 사람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있어서 급할 때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그간 겪었던 육아의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저의 경우 가장 힘든 것은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그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죠. 공부를 하라고 해야 하는지 놀라고 해야 하는지, 야단을 쳐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정말 ‘뇌가 흘러내린다’는 표현이 딱 맞아요.” 그녀는 어머니가 가정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단적으로 말했다. 가정은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인내심도 많아야 하고 포용력도 있어야 되고 단호함도 있어야 해요. 그게 여자예요. 남자는 그게 안 돼요.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지만, 생각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결과는 정말 다르다고 생각해요.” 국내 입양 위한 일곱 번째 자선 콘서트 아이에게서 너무 멀찌감치 떨어져 생각 없이 말하는 것보다는 다치고 상처받더라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윤석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니 그렇게 예뻤던 애가 지금은 내 아들이 맞나 싶고…. 한편으론 애가 컸구나 싶어 뿌듯하지만 ‘잘못 크면 어떻게 하지?’ 걱정도 돼요. 말하는 것만 봐도 ‘으유~!’ 이러고 싶을 때 있죠. 그러나 ‘엄마 말 들어봐~’하며 인내심으로 달랩니다. 이론은 쉽죠. 저는 말하는 게 굉장히 직설적인데 아이한테는 그럴 수 없어요.” 아이를 키우기로 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과감한 결정을 한 것은 열악한 국내 입양 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래서 그녀는 국내 입양을 위한 자선 콘서트와 바자회를 지금까지 여섯 차례 열었다. 2015년에는 이틀 동안 가수 이문세, 배우 황정민과 박건형, 기타리스트 함춘호 등 그녀와 친분이 있는 유명인사들이 무대에 나와 그녀를 도와줬다. 올해는 하루 더 늘려서 5월 5, 6, 7일 3일 동안 동숭동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일곱 번째 콘서트와 자선 바자회를 연다. 그녀는 2003년부터 국내 입양기관과 미혼모 자립을 위해 자선 콘서트를 계속 열어왔으며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도 모두 기부하고 있다. 의연하게, 담대하게, 온유하게 “제가 오늘 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에요. 기쁘게 죽을 거예요. 저 자신을 위해선 할 만큼 했고 누릴 만큼 누렸어요. 누군가는 가소롭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제 그릇이 그러니까요. 물론 제 신념은 ‘죽을 때까지 결코 죽지 않겠다’예요. 미리 죽지 않고 그래서 그냥 인생을 다 사는 여자(웃음).” 시원시원한 목소리 톤만큼이나 인생을 논하는 그녀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에게도 아직 해보고 싶은 게 있지 않을까? “왜 없겠어요, 많죠. 하지만 사람이 자기가 해보고 싶은 거 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뭘 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 것 자체가 살아있음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걸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면서 길을 가야겠죠.”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저는 저답게 살기를 바라요”라는 말에는 윤석화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침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사람이 말할 수 있는 확신에 찬 결론이기도 했다. “누구처럼 멋있게, 누구처럼 돈 많게, 누구처럼 가난하게도 아니고 저다운 저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저답게 살고 싶었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십 넘게 살면서 약간의 후회는 있죠. 부족하고 거칠었던 철없던 날들이었지만 다시 다잡고 살았어요. 그래도 살아오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의연하고 담대하고 온유하게 산 것이 바로 저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조금 더 깊어지면 예쁜 할머니가 되겠죠(웃음).”
- 2017-03-1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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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여자: 피의 복수 (Even Lambs Have Teeth)
- 캐나다, 프랑스 영화로 테리 마일즈 감독 작품이다. 주연에 늘씬한 금발 미녀들인 커스틴 프라우트(슬론 역), 티에라 스코브예(케이티 역) 등이 나온다. 원제가 ‘어린 양도 이빨이 있다’인 것처럼 생쥐도 구석에 몰리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든다는 뜻이다. 작품성은 얘기할 것이 없지만 오락성은 풍부한 영화이다. 한창 미모를 자랑할 때인 슬론과 케이티는 금발의 미녀들이다. 둘이 친구 사이로 한주일간의 뉴욕 여행을 위하여 한 달 간 시골마을의 유기농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떠난다. 동네근처 카페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픽업트럭을 운전하는 두 청년이 태워다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두 여인은 차에 탔다가 두 청년의 집까지 가게 된다. 나이든 어머니가 들어 와 차라도 마시라고 권하고 둘은 약이 든 생크림 파이를 먹고 기절한다. 깨고 보니 숲속의 컨테이너 박스이고 각각 손목에 수갑과 쇠줄이 채워져 있다. 둘은 이집 형제와 동네 남자들에게 강간당하고 죽을 날만 기다린다. 한편 이 둘의 안전을 염려한 삼촌은 FBI요원으로 문자 말미에 쓰는 암호가 약속과 다르자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동네 보안관도 한 통속이었다. 오히려 삼촌도 보안관에게 묶이는 신세가 된다. 두 여인은 살해 직전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들을 피의 복수를 하자는 것이다. 사이코 패스 가족을 상대로 하나 하나 복수한다. 철물점에 들러 도끼, 망치, 대못, 로프 등을 사서 복수에 나선다. 최초로 약을 먹여 납치한 어머니와 형제들은 같은 방법으로 약을 먹여 실신 시킨 후 로프로 묶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한 명 한 명 죽인다. 뒷마무리는 그 중 한명이 권총으로 집단 자살 한 것처럼 꾸미고 돌아온다. 그리고 태연히 일상으로 돌아간다. 복수는 대리 만족을 준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사이코 패스들을 통쾌하게 죽이면서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참혹하게 죽일수록 대리만족이 커진다. 로프에 묶여 꼼짝 못하게 되자 반응은 돈으로 흥정해 온다. 돈을 줄 테니 용서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돈이고 복수는 복수이다. 풀려나면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저주를 퍼붓지만, 거기서 막 바로 응징을 받으면서 끝난다. 우리말에도 ‘말만한 처녀들’이라는 말이 있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두 젊은 여성이 한적한 시골마을에 일하러 간다는 것부터가 위험한 일이다. 집을 떠나면 일탈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픽업트럭을 태워주겠다는 남자들을 따라 덥석 차에 올라타는 행위도 위험하다. 도발적인 옷차림부터가 위험을 부른다. 그러나 ‘호랑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거나 ‘하늘이 무너져도 살 길이 있다’는 말은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연약하게 자란 우리 여성들은 이런 일을 당하면 스스로 자지러질 소지가 많지만, 독립심 강하게 자란 미국 여성들은 종종 남자들을 상대로 한 몫 제대로 한다. 땅이 넓고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비슷한 영화도 많다.
- 2017-03-1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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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협회장 김흥국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거창한 표현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김흥국(59)은 현재 대한민국 문화계의 어떤 현상이다. 세상에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가수가 ‘대세’라 불리우며 방송가의 블루칩으로 신출귀몰 활동하는 장면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얼마 전에는 그가 1994년에 내놓은 희귀 ‘레게’ 앨범이 LP로 복각되어 발매되기까지 했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보장하는 ‘예능 치트키’ 김흥국. 그러나 모든 웃음의 이면에는 사람들이 쉬 보지 못하는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예능에서 볼 수 없었던 ‘가수협회장’ 김흥국이 직접 말하는 약간 진지한 이야기, 그리고 인생에 대한 시선을 들어보자. 2016년 방송 예능계는 김흥국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장된 ‘예능 치트키’이자 네티즌에게는 ‘흥궈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김흥국 ‘가수협회장’은 나오는 방송마다 터뜨렸고 들이댔다.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는 방송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기와 실적. 그러나 그는 아직 기획사가 없는 소위 ‘외로운 늑대’였다. “평생을 혼자 해와서… (방송에) 많이 나가는 거 자체가 손해예요. 자기가 관리 못하면 그냥 ‘가는’ 거니까요. 돈에 미치고 방송에 미치고… 그런 거 좋아했으면 이 나이에 이렇게 올 수 없었어요. 관리하는 사람 없이 혼자 다하는데.” 바닥까지 경험해야 꼭대기가 보인다 홀로 무명 시절에서부터 시작해 ‘호랑나비’로 가요계 정상에 서봤다. 그리고 지금 젊은 세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예능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제 곧 60세인데 실감은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 그런 거 없잖아. 이 나이에 유재석, 김구라, 신동엽과 함께 프로그램할 수 있는 연예계 선배가 많지 않아요. 제가 방송 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장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요.” 김흥국과 함께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의 MC 송해. “물론 송해 선생님 같은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연예계의 아주 귀중한 일이고 저의 좋은 본보기죠. 같은 국민 프로그램을 90이 넘어서 한다는 건 방송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잖아요. 라디오에는 가 있고 강석이라는 분이 있고요. 이분처럼 한 프로에서 30년 이상 한다는 것은, 청와대나 국민이 주는 상을 줘야 해요. 그분들에게 감사해야 해요.” 그는 그런 것도 못해준다면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으로 불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연스럽게 ‘가수협회장’ 김흥국이 나오는 순간이다. “한류 따지는 것도 훌륭하지만… 한류가 지금 최고라고 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그 안에 몇 배의 시너지가 있어요. 브랜드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발굴하지 않고 맨 있는 것만 갖고 우려먹고 있어요.” 가수끼리 똘똘 뭉쳐보자 그러고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김흥국은 어느 방송에 나오든 ‘가수협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무게감 있게 들이댔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가수협회는 원래 한국연예협회의 분과로 배치되어 운영되다가, 2006년에 창립총회를 갖고 사단법인으로 인가받고 독립했다. 김흥국은 가수협회장으로서의 삶에 대해 “쉽지 않다”며 그간의 역경을 토로했다.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엄청나게 홍보를 했죠. 국민들이 우리 단체를 잘 알죠. 그래도 해보니까 허허허…(웃음). 책임감이 무겁죠. 무명가수나 원로가수들은 ‘김흥국 대단하다’ 하면서 기대를 많이 갖고 있는데, 정작 히트곡을 가진 가수의 마음이 변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분들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팬들에게만 사랑을 돌려줄 게 아니라 선후배들이 이렇게 어렵게 활동하는지를 알고 복지를 위한 활동도 해주셨으면 해요.” 그는 복지란 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밝혔다. “정치적인 게 아닙니다. 각 분야의 구호복지기관 많잖아요? 그분들이 열심히 하듯이 우리도 뒤늦게 출범했지만 같은 가수로서 진짜 똘똘 뭉쳐야 해요. 한목소리를 내려면 선후배 가수들이 인기가 있든 없든 가족이라 생각할 적에 힘이 생기는 거죠. 누구 하나 열심히 해서 된다고 보진 않아요. 우리도 보면 열심히 노래만 했지 다른 것은 신경을 안 썼잖아요. 이제 그런 것을 해놔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원로가수는 나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 앞서 말했듯 대한가수협회는 원래 연예협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연예협회 자체가 너무 오래됐고 다섯 개 분과가 있다 보니 너무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분과로 가면 안 된다, 우리도 협회가 있어야지 않냐’ 하는 자각에 의해 만들어진 게 대한가수협회다. “대한민국 스타들 의 모임을 나 몰라라 한다는 건 이건… 정부 예산이 하나도 없잖아요. 명색이 사단법인인데. 그런데 우리가 뭉쳐서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니….” 그가 복지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명백했다. “원로가수 분들은 제 입장에선 부모예요. 그런 부모 같은 존재가 연세 드셔서 몸도 아프고 형편이 좋지 않아요. 옛날 분들은 그냥 노래가 좋아서 국민들 위로를 해드렸지 돈 보고 노래하고 그런 게 아니었단 말예요. 그런 분들을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나 싶죠. 그래서 우선 어른들부터 챙겼으면 하고, 어려움에 처한 유가족이나 무명가수들도 챙겼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수협회장을 맡는 3년 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이나 에 안 나가고 있어요. 오퍼가 와요. 그러면 미안하다고 하죠. 회장으로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저보다는 ‘ 출연가수를 원로 한 분이라도 새로운 분으로 초대해달라’고 해요. 저야 예능에 나가고 있으니까(웃음).” 그는 이미 올해 계획 생각에 분주하다. “5월에 가수의 날 행사를 해야 하고… 우리 협회 재정이 열악하니까 튼튼해져야 하고, 그리고 유명한 가수들 있잖아요? 그분들의 가요제가 전국 여러 곳에서 열리더군요. 그런 것도 찾아서 기획해야 하고요. 그분들도 우리와 함께 공동체로 가면 보기도 좋은데… 그걸 먼저 했던 단체들이 독점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게 가장 마음 아파요.” 인생도 축구처럼 플레이해야 김흥국에게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바로 “가수가 안 됐으면?”이다. “푸하하하! 저도 그 생각할 때가 있어요. 무명생활을 십 년 했고 워낙 안 풀려서 서른 넘어서야 데뷔했죠. 돌아가신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많았고. 다행히 제가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을 보고 돌아가셨습니다만. 어머니가 제게 ‘가수 안 되면 뭐할 거냐?’라고 묻곤 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해병대 나온 정신으로 무명생활도 즐겼어요. 이게 한탄이나 원망을 한다고 풀릴 사안도 아니고 내가 더 부지런하게 노력을 안 해서 늦는 것 아닌가 싶었죠.” 그러나 그는 막상 정상에 서보니 본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축구에서도 나만 잘하면 좋은 플레이가 될 수 없어요.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거든요. 축구경기를 할 때 우리 팀이 강팀이고 상대가 아주 약한 팀이면 팬들은 재미없어 합니다. 방송, 라디오도 그런걸요.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반응이 없으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축구는 플레이가 되는 날이 있고 안 되는 날이 있어요. 왜 제가 작년에 조세호를 히트시켰느냐. 이게 바로 축구에서 나온 나의 생각입니다. 연예계, 방송계의 어시스트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을 조금만 건드려주면 바로 될 수 있는데, 못 보는 거예요.” 그는 ‘가만히 보면 배운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자기가 죽을까봐, 다 뺏길까봐, 탄로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안 돼요. 정치하는 사람이나 지도자나 선생님이나 왜 그리 힘들게 해요. (능력이 있지만) 어려운 사람이 보이는데. 옛날 기업인들을 봐요. 뭔가 생각을 하면 그날 밤을 새서 끝을 내죠. 그런데 미루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차이예요.” 간절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들이댐’ 가수 김흥국은 ‘십 년 무명가수’였다. 간절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행동에는 절박함이 없으면 안 되는 ‘들이댐’이 있었다. “이야, 오늘 스님이 부채에다 적어둔 얘기를 하시네. 날 보더니 ‘그대 간절한가’ 하시더만. 그게 없으면 누가 도와주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이거예요.” 절박해야 깨닫고 보이는 것이라고. 김흥국은 자주 웃었다.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면도 있지만, 그의 삶이 성공적으로 흘러와서이기도 할 것이다. 한때 ‘기러기 아빠’의 아이콘이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 아들딸과 함께 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했다. “아들이 잘 컸다고 말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아버지를 생각하는 게 다르고 속이 깊다고. 외국생활을 해서 한국말이 어눌하긴 하지만 기러기 생활을 한 보람이 있어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기러기 아빠로서의 삶은 절대 반대한다. 누구에게 추천하지도 않으며 더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고 딱 잘라서 말했다. “아내가 힘들었죠. 나야 돈이나 부치는 거지, 말도 안 통했을 텐데.” 요즘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화제가 된 그의 딸 김주현에게는 벌써부터 기획사들이 계약하자는 연락을 해오는 모양이다. “아내는 안 된다고 하죠. 주현이는 좋아하는데. 대학 가서 해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에요. 나야 뭐…(웃음).” 사람들을 위한 문화공간 만들고 싶어 누가 봐도 영원한 현역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김흥국. 그러나 그에게도 흐르는 시간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일 년 일 년 바뀔 때마다 ‘내가 언제까지 방송에 매달려야 하지?’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도 뭔가 해야겠다 싶은데 엄두를 못 내겠어요. 그쪽은 경험이 없으니까. ‘얼굴만 빌려주면 우리가 다 해주겠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믿어요? 그런데 ‘이때 해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혹시 준비해서 하고 싶은 것은 있는 걸까? “손해 안 보는 거(웃음). 어려운 거 말고 쉬운 거.” 정말 김흥국다운 대답이었다. “김흥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와서 아지트식으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술도 한잔 할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면… 어유, 좋죠. 꿈이죠, 꿈.” 하고 싶은 일만 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판타지를 그가 꼭 보여주면 참 좋겠다.
- 2017-03-0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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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안방
- 10년 전에 미국을 처음 여행했던 친구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며 미국 여행을 계획했다. 지난번에는 서부였으니 이번에는 동부를 가고 싶은데 가는 김에 마침 아들 집에 와 있는 필자를 만나러 뉴욕도 잠시 방문하면 좋겠단다. 그러라고 했다. 그러나 뉴욕 집은 필자 집이 아니고 아들 집이라서 의논을 해야 했다. 아들은 한국에서 오시는 어머니의 친구 분이니 흔쾌히 허락을 했고 필자는 친구가 묵는 동안 필자가 쓰는 방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가 오기 전부터 은근히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필자가 쓰는 방이 친구에게는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미리 잠자리의 환경을 자세하게 얘기해줬다. 친구가 조금 불편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필자 방이 지하에 있기 때문이었다. 뉴욕은 주거 공간이 비싸다는 걸 잘 알고 있어도 막상 지하에 있는 방에서 지내다 보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한국인이다. 아들 집은 지하라 해도 3분의 1은 지상으로 나와 있고 3분의 2가 지하다. 지상으로 나와 있는 곳에 유리창을 크게 내서 채광도 좋다. 성능 좋은 제습기까지 켜놓아 공기가 습하지도 않다. 아들 집이 있는 주택가는 특히 집값이 비싼 동네라 지하에 가족 일부가 주거하는 집들이 많다. 하지만 생활하기에 비위생적이거나 불편한 점은 전혀 없다. 친구에게 전화로 미리 이런 상황을 설명했을 때 그런가보다 이해하는 듯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어머니, 아니 시어머니가 사용하는 방이 지하라는 게 영 마뜩치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며느리의 친정에서도 필자의 지하방에 대해 여러 차례 거론했던 터라 아들 내외는 필자가 뉴욕 체류 중에는 손녀 방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늘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사는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1년에 석 달 머무르는 필자를 위해 손녀가 그때마다 물건들을 옮기고 다시 정리하는 번잡을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 집은 필자 집이 아니니 그러지 말라 했다. 아들 식구를 번잡하게 하고 싶지 않아 지하방을 사용하겠노라고 필자가 선택한 것이다. 지하방에는 필자가 오랫동안 잘 사용해온 묵은 친구 같은 침대도 있다. 서랍장도 하나 있어 꼭 필요한 기본 용품들을 간수해놓는다. 오갈 때 짐을 줄일 수 있어 간편하고 좋다. 친구가 오기 전 필자 침대 옆에 공기 주입 침대를 하나 들여놓고 새 시트를 깔았다. 친구가 쓸 침대였다. 3일 낮밤 동안 우리의 이야기는 줄줄이 사탕으로 엮어졌고 맨해튼을 비롯해 친구가 가보고 싶은 곳들도 더듬더듬 찾아가봤다. 참 오랜만에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은 우리의 감성을 건드려줬고 아름다운 추억들을 들추게 했다. 가슴만큼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무척 젊어진 날들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친구와 함께하면서 그토록 즐겁기만 했는데, 그렇게라도 친구에게 베풀 수 있었던 작은 마음들이 스스로 감사하고 고마웠는데. 친구는 떠나면서 “귀찮더라도, 네가 머무는 기간이 아무리 짧더라도 손녀 방을 사용하도록 하렴. 네 방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내 발걸음이 너무너무 무거웠다”는 말을 남겼다. 친구가 떠나면서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타 주에 살고 있는 미국 친구에게 그 얘기를 해주고 의견을 물었다. 필자의 지하방에 와본 적이 있는 친구였다. 미국 친구는 ‘어머니와 안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우리가 변하긴 변했나보다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일이었다.
- 2017-02-28 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