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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도 귀향도 멈춰버린 섬 ‘교동도’
- 강화도에 접어들어 관광객이 붐비는 도로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다 보면 앳된 군인이 차를 막아선다. 그가 전해준 비표는 이미 많은 이의 손을 거쳐 낡아 있었지만, 잃어버렸을 때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쥐어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때마침 잘 나오던 라디오 음악에 잡음이 끼어들며 괜한 으스스함을 더한다. 그렇게 언덕을 넘으니 교동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리 앞에서 다시 군인의 출입통제 시간에 대한 당부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이 섬과 마주할 수 있다.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와 말이다. 키가 큰 오동나무[喬桐]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자리 잡은 섬으로 면적으로는 14번째로 꼽힐 만큼 큰 섬이다. 섬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 때는 탈출이 어려운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연산군은 이 섬에 유배돼 생의 마지막을 보냈고 광해군과 임해군, 고종 황제의 조카 이준용도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고려 때는 중국과의 교역 중심지 중 한 곳이었지만, 교동도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부분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집성촌이라는 것이다. 교동도는 수영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탈북자가 있을 정도로 북한 황해도와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위해 교동도로 월남했던 황해도 도민들이 휴전 후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집성촌이 형성됐다. 교동도의 대표적 관광지로 꼽히는 대룡시장을 황해도 연백군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의 슬픈 사연도 시간의 흐름에 바래버린 것인지 대룡시장에서 만난 한 실향민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이 시장에서 실향민은 별로 없어요. 다들 일흔이 넘은 나이이니까요. 많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두 인천이나 서울로 떠나 남은 실향민 가족도 거의 없어요.” 실제로 대룡시장의 명물 중 하나였던 시계방도 이곳을 지키던 주인의 죽음으로 멈춰버렸지만, 이어받은 이가 없어 문을 닫았다. 시간이 멈춘 것이 이 때문인가 싶을 정도다. 실향민의 한, 켜켜이 쌓인 곳 이전까지 교동도는 북한 땅과 맞닿아 있는 탓에 출입제한이 있었고, 강화도에서 건너오는 뱃삯은 차량 편도가 1만6000원이나 되어 관광지로 환영받지도 못했다. 유동인구도 적었다. 이런 외부와의 단절은 시간이 지나도 그 시절을 붙잡아둔 듯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들었다. 약국이며 양복점이며 시계방, 잡화점 할 것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다. 교동도의 대룡시장이 유명해진 것은 지난 2010년 KBS2 TV 예능 프로그램 을 통해 소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19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얼마 후인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완공되면서 사람들의 높은 관심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이어졌다. 교동도 토박이들은 아직도 이런 관심에 의아해한다. 대체 이곳에 볼 게 뭐가 있다고 몰려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관광객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교동다방이다. 이 마을에 살면서 15년째 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은 섬의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한 이 중 하나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동네 장사였죠.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섬에 사람이 꽤 많았어요. 다들 쌀농사를 크게 지어 풍족했죠. 술 마시다 흥에 겨워 2차, 3차 오는 모임도 몇 개나 됐으니까요. 그러다 사람들이 서울로 빠져나가면서 한동안 섬이 조용했다가, 다리가 생기면서 관광객이 밀려들었어요. 여기 사방에 붙어 있는 메모도 다리가 생기면서 다녀간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써놓고 간 것들이에요. 장사가 잘될 때는 쌍화탕을 하루에 100잔까지 팔아봤어요. 이후 석모도에 다리가 생기면서 서울 사람들이 그리로 갔고, 요즘은 손님이 좀 줄었어요.” 대룡시장에서 관광객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간식 ‘꽈배기’다. 관광객들의 배를 채울 만한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교동도의 한 주민이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시장의 대표 상품이 됐다. 일부 상인이 놀러온 사람들이 물건은 안 사고 꽈배기만 입에 물고 다닌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최근에는 외지 상인들이 대룡시장의 빈 가게들을 채우면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복각해 곳곳에 붙여놓은 군사정권 시대의 포스터들도 시장의 옛 모습 위에 개성을 더하고 있다. 1970년대의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등 일부 가게의 수익은 마을 공동체를 위해 쓰인다. 북한과 맞닿은 땅 키가 낮은 시장 건물의 처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제는 낯선 제비집이다. 교동도 사람들에게 제비는 지켜야 할 귀한 손님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건물 안에 집을 지어도 내쫓는 법이 없다. 바다 건너 고향 연백평야의 흙을 물어다가 집을 짓는 제비를 마치 북한의 가족처럼 대하는 실향민들의 마음 때문이다. 시장 곳곳에는 제비집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동네 주민 중 한 사람은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맘껏 드나드는 제비가 부러워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라며 심지어 이곳 사람들은 간식도 제비콩을 즐겨 먹는다고 말한다. 대룡시장에서 차로 30분 정도 달려가면 망향대를 만날 수 있다. 실향민을 위한 작은 쉼터와 고향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 두 대가 설치되어 있다. 섬에 많지 않은 높은 장소 중에 군사시설을 피해 고른 탓인지 접근도 쉽지 않고 전망도 그리 시원치 않다. 그래도 지척에서 황해도 땅을 볼 수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북한 땅이 가깝다는 것은 실향민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지만 외지 출신 주민들에게는 공포가 되기도 한다. 2010년 바로 옆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이곳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한 주민은 자다 깨면 눈앞에 간첩이 서 있는 것 같은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며 한동안 불안장애로 신경정신과 치료도 받았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교동도는 다리가 생긴 지금까지도 일부 통제가 이뤄진다. 교동대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왕래가 완전히 차단된다. 여행지 정보를 미처 챙기지 못한 남녀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갇혀 밤을 지새울 수도 있겠다는 괜한 걱정이 든다. 섬 안에 대형 숙박시설은 아직 없지만 몇몇 민박집이 운영 중이다. 인력으로 만들어진 평야 교동도의 또 다른 이색적인 모습은 벼 이삭으로 가득한 넓은 평야다. 섬에 무슨 평야가 있을까 싶지만 육지에서도 보기 힘든 대형 농기계들을 길에서 쉽게 마주친다. 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미소가 이곳의 쌀농사 규모를 짐작케 한다. 교동도의 쌀은 맛이 좋기로 소문나 섬 주민의 넉넉한 생활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되어왔다. 섬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교동 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곧고 길게 쭉 뻗어 있어 한국전쟁 때 활주로로 사용되었을 정도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넓게 펼쳐진 논이 바다처럼 보이고, 가운데 작은 동산이 황금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진다. 교동도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 즉 분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땅이기 때문이다. 3개 섬 사이의 바다였던 이곳은 고려시대 때 대대적인 간척이 이뤄져 평야가 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영 장군이 간척을 주도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섬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지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구저수지는 가물치와 베스가 잘 잡히는 낚시 명소로 낚시꾼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난정저수지는 농업용 저수지로 지정돼 낚시는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으로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교동도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교동향교와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교동향교는 고려시대인 1127년에 창건돼 국내에 남아 있는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초입을 따라 펼쳐진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군락이 빚어내는 풍광은 이곳이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또 하나의 이유다. 교동도를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다면 강화군에서 만든 강화나들길 중 두 개의 교동도 코스를 추천한다. 바로 ‘교동도 다을새길’과 ‘교동도 메르메 가는 길’이다. 한 코스당 소요시간은 6시간. 만만치 않은 거리이지만 그래야 교동도의 멋진 풍광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 2017-10-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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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브라보 마이 라이프>, 첫 방송부터 폭풍 전개 눈길
- 브라보 마이 라이프. 누군가에겐 가수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가 또는 2007년 개봉한 영화가 생각날 수 있다. 5070세대라면 시니어 잡지 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10월 21일 드라마로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탄생했다. SBS 새 토요드라마 는 열정 과다 드라마 조연출 하도나(정유미 분)와 여왕처럼 살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왕년의 여배우 라라(도지원 분), 두 모녀의 화해와 도전, 사랑을 통해 인생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가족 멜로극이다. 정유미, 현우, 강지섭을 비롯해 도지원, 박상민, 연정훈 등 주요 배우 6명의 개성을 골고루 담아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토지’ 이후 12년 만에 SBS 드라마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도지원은 “‘라라’라는 인물이 색다른 캐릭터라 끌렸다”고 캐스팅 소감을 밝혔다. 여기에 라라의 남자로 박상민과 연정훈이 가세하면서 중견급 배우들의 은은한 로맨스도 관심사다. 이날 첫 방영분에서는 송미자(도지원 분)가 정영웅(박상민)에게 하도나(정유미)의 존재가 드러나 이혼을 요구당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첫 포문을 연 가 주말 안방극장을 차지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 2017-10-2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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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영화 '범죄도시'
- 강윤성 감독 작품으로 주연에 마 형사 역으로 마동석, 조폭 두목 장첸 역으로 윤계상이 나온다. 예매 순위 1위 작품이며 이미 개봉 한 달 만에 5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하여 기대를 갖고 봤다. 상영시간 121분 동안 치고 박고 칼로 찌르는 장면으로 가득했다. 2004년 한국으로 귀화한 조선족이 많이 사는 서울 가리봉동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권을 둘러싼 조폭들의 물고 물리는 난투극과 복수극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는 금천 경찰서 강력반 형사들이 이들을 소탕했다는 것이다. 마동석은 평소 좋아하는 배우이다. 우람한 근육질로 체격이 좋고 액션 연기가 좋다. 남자라면 그런 사람을 부러워할 것이다. 대학 시절 체격이 좋고 얼굴이 험상궂은 후배가 있었다. 어딜 가든 가만히 있어도 대접해주는 것을 보니 부럽기도 했었다. 주먹을 휘두를 필요도 없이 인상을 한번 쓰면 알아서 눈길을 돌리는 것이 통쾌하기도 했다. 조연배우들도 하나 같이 인상이 험악했다. 출연진들을 그런 사람들을 잘도 모았다. 남자들이 폭력배가 되는 경우 험악한 인상이 한 몫 한다. 조폭 두목 장첸 역에 인기 아이돌 그룹 GOD의 윤계상이 발탁된 것은 의외였다. 인상도 그런대로 어울렸고 연기도 잘 했다. 나이가 들면 취향도 바뀌는 모양이다. 그전 같으면 액션 장면들이 사실감이 넘쳐 잘 만든 영화라며 좋아했을 것이다. 스트레스가 해소 된다고 했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칼, 도끼, 망치 등이 난무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폭력 장면이 나오자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가 밀려 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심란하고 꿈자리까지 뒤숭숭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같이 영화를 보려 하면 여자들이 이런 영화를 왜 안 보려고 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될 것 같다. 영화는 여러 장르로 만들지만, 이런 영화는 가급적 피하고 잔잔한 감동이 있는 영화를 골라 봐야할 것 같다. 관객 동원 수나 평판에 휩쓸려 보고 나서 후회하는 일은 피하고자 한다. 남자들도 나이가 들면 감동 있는 영화를 볼 때 눈물을 줄줄 흘린다는데 그런 영화가 좋아진다. 이번에도 무대가 귀화한 조선족들이 몰려 살고 있는 동네이다. 조선족들이 몰려 사는 동네가 마치 범죄도시로 인식되는 것에 대해 조선족 출신들이나 현지 주민들은 불만이 많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므로 조폭들이 상인들을 갈취하고 불법 업체가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나라이므로 그런 범죄가 자라지 못하도록 치안을 철저히 해야 한다.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강력반 형사들은 목숨을 걸고 일한다. 강력범들과 대치하며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경찰들에게도 대우도 개선해주고 박수도 보낼 일이다.
- 2017-10-2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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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시장
- 재래시장에 갈 일이 생겼다. 떡 장수, 튀김 장수, 꽈배기 장수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전통시장 펄떡이는 생선처럼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곳. 왜 이럴까 비린 생선 냄새도, 발 구르며 떠들썩한 골라골라 소리도 최상의 정원이라는 곳에서 풍기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들만의 잡담도 없다. 영원의 잠이 지배하는 듯하다. 거래하는 동물이 없다. 곰처럼 두껍고 딱딱한 손마디가 힘을 잃었다. 휑한 바람이 피부로 느껴진다. 장바구니 푼돈이 나라경제 척도라는데 대형마트도 장사가 안 된다는 기사 본 게 엊그제 아줌마들은 찬거리를 구입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혹시나 하고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워 묻기도 망설여지고 걷기도 민망하다. 빨리 빠져나와 긴 숨 한 번 내 쉬었다. 한 동안 다시 가기 어려울 듯하다.
- 2017-10-2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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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돈지간
- 사돈은 아주 멀고도 어려운 사이라고 한다. 필자는 아들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사돈댁과 멀리 지내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서 필자는 “남들은 사돈이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는 좋은 사돈 사이가 돼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라고 말해버렸다. 그렇게 서로 격차가 나는 사이도 아니고 장인 장모 될 분들의 인상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쉽게 그 말이 튀어나왔나 보다. 우리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처음 보는 자리인데도 술을 좋아하시느냐며 자주 만나 술친구가 됐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사돈어른도 술을 몹시 즐기신다며 의기투합으로 화기애애한 자리가 되었다. 필자 주변에서 사돈들끼리 해외여행도 같이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은 적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필자도 사돈이 생기면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싶었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아이들이 결혼한 후에 충청지방에 계시는 사돈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1박 2일동안 계룡과 전주 시내까지 안내받아 여행도 잘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전주로 가는 길에 들른, 처음 가본 대둔산은 충남 논산시와 전북 완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는 명산으로 멀리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케이블카도 보이고 올려다본 하늘이 정말 맑고 푸르러 청정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근처의 수목원에는 이름도 모르는 탐스러운 꽃들과 소박한 야생화가 지천이었고 온통 꽃동산으로 예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계룡시와 전주는 충청도와 전라도로 그리 가까운 곳은 아닌듯한데 전주의 한옥마을 구경도 시켜주시고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대접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전주에는 막걸리를 주문하면 따라 나오는 안주가 10여 가지가 되는 술집이 유명하다고 한다. 맛집 소개 책에서 보았는데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할 때마다 푸짐한 토속안주가 한 상 가득 차려지며 필자가 좋아하는 삭힌 홍어는 기본으로 나온다니 언제든 전주지방 여행을 하면서 꼭 한번 들러야지 마음먹고 있는 곳이었다. 이번엔 사돈댁과의 동행이었으므로 그냥 간판만 보며 지나쳤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사람들이 많아 너무 혼잡해서 제대로의 모습을 감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옥마을이 생긴 유래를 알고 보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뿌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일제 강점기 중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데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고 한다. 그림 같은, 기와의 늘어진 곡선이 아름다운 용마루가 즐비한 한옥들이 눈길을 잡았다. 그리고 전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맛있기로 유명하다는 비빔밥집을 찾았다. 이렇게 초대를 받아 1박의 즐거운 여행을 다녀온 터라 그 후로 사돈이 서울에 오실 때면 자연스레 식사 대접을 하게 되었다. 외식도 몇 번 했지만, 집으로 오시게 하는 일이 많았다. 없는 솜씨지만 정성으로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사돈이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올라오셨다. 저녁에 오시라 해서 소박하게 한 상 차려 식사를 같이 했다. 친구들에게 사돈을 초대해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집에서 대접을 했느냐며 필자보고 대단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도 대단할 게 없는 게 특별한 요리를 한 것이 아니고 한식으로 불고기 상추쌈에 잡채, 생선구이 등 평소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준비를 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단한 음식을 생각하지 않고 소박하게 정성을 다해서 만든다면 초대가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혹시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은 되지만 "맛있네요" 라는 인사를 들으니 정말 기쁘다.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니 사돈이라고 다 어렵고 불편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필자에겐 하나밖에 없는 사돈댁과의 이런 사이가 너무 좋기만 하다.
- 2017-10-16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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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 시니어 패션에 관한 불만
- 시니어들의 불만 또 한 가지는 요즘 옷들이 너무 젊은 사람 위주로 스키니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드레스 셔츠도 그렇고 바지도 그렇다. 오빠와 아저씨를 구분하는 기준도 바지가 헐렁한가, 붙는가란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편한 옷을 선호한다. 군살이 붙어 바디 라인을 뽐낼 일이 없는 시니어들이 늘 입던 사이즈 호칭만 보고 이런 옷을 샀다가 작아서 못 입는 낭패를 본 일이 많다. 두루 전 고객층을 상대로 베이직한 옷을 만드는 유니클로를 참고할 만 하다. 요즘 구매층이 젊은 층뿐 아니라 시니어 층이 대세라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시니어들이 가장 많이 입는 옷이 아웃도어 의류이다. 남자들이 아웃도어 의류 외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을 일이 적다. 용기 있는 사람이나 그런 유색 옷을 입었다. 그런데 아웃도어 의류도 아무 때나 입으면 곤란하다. 너무 알록달록하고 부분적으로 여러 화려한 칼라가 들어가 혼란스럽다. 아예 검정색으로 입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특수 임무를 띤 군인이나 경찰처럼 보인다. 해외에 나갔을 때 한국 사람을 알아보는 요령이 아웃도어 옷을 입었다면 거의 맞는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웃도어는 그야말로 등산복 개념이다. 이런 옷을 입고 외국에 나가서 절에도 가고 성당에 간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아웃도어 의류의 장점과 스트리트 캐주얼 웨어의 장점을 잘 살린 디자인이 요구된다. 우리나라는 겨울철에만 남자들이 목도리를 한다. 여름이나 간절기에는 여성들은 스카프를 하지만, 남자들은 스카프를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남자가 스카프를 하고 다니면 이상한 눈길로 본다. 그러나 스카프는 패션은 물론 보온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 작은 천 조각인데 목 부분을 감싸주면 훨씬 보온 효과가 좋은 것이다. 남자들이 스카프를 안 하니 안 만들 수도 있다. 필자는 여성 스카프 중에 무채색이나 무늬 없는 스카프를 사용한다. 겨울철에는 남자들에게도 필수품인 목도리를 다른 계절에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남자용 스카프도 사용 면이나 제조 면에서도 많이 대중화 되었으면 좋겠다. 남자용 모자에도 불만이 많다. 여성용 모자는 다양하다. 그러나 남성용 모자는 야구모자, 등산 모자, 밀리터리 캡 정도이다. 공통점은 불량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정장 용 모자도 있지만, 정장에 모자까지 쓸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탈모가 많이 진행되어 모자를 늘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앞 쪽이 비스듬한 헌팅 캡, 뉴스보이 캡도 있으나 키가 작은 사람은 잘 안 어울린다. 그리고 마린 캡이나 마도로스 캡처럼 윗부분이 역간 불룩한 캡이 그나마 무난한데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때 기관원들이 쓰던 모자가 연상되어 꺼려진다. 베레모는 예술가들이 쓰는 편이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 자외선이 강할 때는 햇빛을 가려주는 모자가 어차피 필요하다. 페도라나 보울러는 정장에 어울리니 부담된다. 그렇다고 니트로 만든 비니나 빙둘러 챙이 있는 버킷햇은 쭈글거려서 어울리는 사람이 한정적이다. 양말도 필자의 경우는 활동량이 많다 보니 스포츠 양말을 선호한다. 신사용 양말보다 두껍다. 신사용 양말은 신발 속에서 미끄럽다. 운동화를 주로 신고 다니는 시니어들에게는 맞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바지가 짧아 양말이 보이게 입지만, 시니어들은 바지가 길어 양말이 보이지 않으니 모양보다는 실용 위주로 신는다. 양말에 대한 불만도 발목 조리개 부분이다. 조리개 부분이 너무 조여 벗고 나면 그 부분에 자국이 생긴다. 내의까지 그 속에 끼어 입는 날은 더 조여 와서 피부병이 생길 지경이다. 너무 느슨한 것도 문제지만, 너무 조이는 것도 문제이다. 대부분 너무 조인다. 우리나라는 양말에 관한 한 천국이다. 값도 싸고 다양하며 품질도 좋다. 한 켤레에 500원짜리부터 있다. 몇 해 전 남자 직원과 같이 이탈리아에 출장 갈일이 있었다. 다른 건 다 챙겼는데 여분의 양말을 못 가져왔다며 현지에서 살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해 보니 양말 한 켤레에 몇 만원을 불렀다. 명품 양말 외에는 우리나라에서처럼 값싸고 실용적인 양말은 파는 곳도 없으니 살 수도 없었다. 매일 호텔에 돌아오면 신었던 양말을 빨아 널고 다음날 다시 신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 2017-10-1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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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언덕 너머 뙈기밭을 바라보면서
-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우리나라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시발(始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관념의 이입(移入)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 보이자’는 화풍은 특히 중국의 관념적이고 과장된 그것에 비해 스케일이 적고 다소 초라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풍광을 소박한 그대로, 진솔하게 그림으로 남기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화폭에 정지시켜야 하는 속성상, 실제의 입체 공간을 평면화하자면 화가의 고민이 깊어진다. 평론가나 미술기자들은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이래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해진 인상파풍의 과학적 특성을 철저히 연구, 우리나라 언덕길의 전형적 각도, 전형적 시야, 경상 지방의 낯익은 한국의 땅이 그 살가죽을 부끄럼 없이 다 드러내놓는 겨울을 많이 그리는 작가’로 이원희(李源熙, 1956~)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의 구도는 웅혼하여 일체의 장식이나 꾸밈이 없다. 거칠고 척박한 산비탈 뙈기밭을 그대로 그려낸다. 봄부터 씨앗을 뿌리고, 김매고, 물 주고 가꾼 농작물들이 나름대로 결실을 맺고, 농부의 손길로 추수되고 난, 빈 밭에 서리가 희끗하다. 이제 이 황토의 밭들은 겨우 내내 찬바람 눈서리에 뒤척이다, 다음 봄 새 씨앗을 심을 때까지 아픈 몸부림을 할 것이다. 이원희 화가는 경북 의성 안평리의, 궁벽한 마을 산비탈에 서서 내려다본 풍경을 눈에 가득 담는다. 야트막한 왼편 언덕을 따라 이어진 황톳길이 작은 밭을 나누어 가며 구릉을 지나 야산으로 이어진다. 계곡이 깊지 못하니 물이 흐를 리 없고 땅 모습이 평평하지 못하니 경사 따라 밭둑을 이루며 대여섯 곳의 밭 자리를 구분 짓는다. 길섶 소나무의 모습을 보니 이곳은 바람받이임에 틀림없다. 가시나무 떨기 몇 그루만 자라는 척박한 곳이지만 농부는 한 삽, 한 삽, 돌을 골라내고 풀뿌리도 솎아내며, 오랜 날들 뙈기밭을 일구었을 터다. 화가는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라며 노상 접했던 풍경이기에 원숙한 필치로 이 현장을 실경으로 그려냈다. 이 작가의 다른 그림에서도 추수 후의 황량한 논밭은 대표적 주제가 되었다. 모교인 계명대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치되 데생 과정을 혹독하게 검증해 ‘계명대 출신은 스케치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인물화도 마음까지 그려낸다는 중평이다. 섬세한 극사실의 화필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표준 초상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고, 역대 대법원장 두 분, 국회의장 다섯 분의 초상화 또한 이 화백의 작품이다. 대기업 총수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도 밀려 있어, 내 아내의 초상을 그려주겠다는 약속은 언제나 지켜지려는지…. 이 그림 는 최근 온라인 옥션에서 270만원을 주고 낙찰받았다. 고향의 선산(先山) 가는 길과 얼마나 흡사하던지, 거실 벽 중앙에 바다 그림과 바꾸어 걸고, 해지도록 뙈기밭에서 뛰놀던 유년을 회억하는 달콤한 향수에 젖는다. 김승연(金承淵, 1955~)은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 뉴욕 주립대에서 서양화와 판화로 석사학위 취득 후 모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서울의 야경’, ‘거리의 낮 풍경’을 리얼하게 판화로 표현하고 있다. 1970~1980년대의 채색 판화에서 1990년 초부터는 흑색 단색의 동판화 , 시리즈를 제작 발표해왔다. 서울의 야경은 불빛에 갇힌 거리에, 건물들과 차량의 그림자들을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해 보는 이들에게 블랙홀에 빠지는 듯, 꿈꾸는 듯, 환상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한다.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심사평과 함께 1993년 ‘루블리아나 국제 판화 비엔날레’에서 ‘차석상’을 수상하고, 2011년 ‘국제메조틴트 페스티벌’에서도 ‘전통판화상’을 수상하면서 서울 야경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영박물관에서도 작품을 소장하는 영예를 안았다. “밤 풍경이 낮의 풍경보다 사실적이고 감성적 느낌이 풍부하고, 불빛 하나하나가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는 아우성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보통 한 달이 걸리는 고행(?)을 작가는 계속해오고 있다. 는 벌써 15년 전에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6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판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작품의 복제성 때문에 다른 미술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작가는 한 작품당 대개 10~30여 점씩 판화로 찍는다고 했다. 그러나 전시회에서도 판매되는 작품이 4~5점에 불과해 작품 구상에서 완성까지 두어 달, 틀과 유리를 맞추고 10여 점을 판매해도 500여 만원의 수입이 안 되니 허무한 일이다.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작품들이 같은 것이란 사실이 발견되면, 예술성에 대해 만족하거나 행복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예술 작품을 향한 환상 속에서 판화의 인식과 보편성이 무시되고 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란 작품은 뉴욕의 예스런 건물의 계단에서 기둥과 추녀, 그리고 건물 앞에 선 나무의 그림자까지 한낮의 풍경을 정밀하게 찍어내어 현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가는 우리 일상에 너무나 접하기 쉬운 풍경들을, 그러나 깊은 관찰과 섬세한 손길로 예술성 높은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하염없이 작품에 눈길을 맞추다 보면, 우리는 작가의 의식 너머 고요한 심연(深淵)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재준(李載俊) >>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 2017-10-0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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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 속으로 떠나 본 터키 여행 ‘터키의 날’
-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시원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만으로도 완벽했던 지난 9월 초. 직장인들과 동네 시니어들의 휴식처이던 서울의 ‘작은 터키’ 앙카라공원에 진짜 터키가 생겨났다. 무심코 지나지던 이곳에 ‘하루에 한 가지만 들어준다는 모래요정 바람돌이 선물’처럼 터키가 정말 짠 하고 나타났다. 참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heritage.unesco.or.kr) 화창한 서울이 터키를 맞이하다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인도네시아대사관과 9호선 샛강역 사이에는 시민들의 작은 쉼터 앙카라공원이 있다. 1971년 터키의 수도 앙카라와 서울특별시가 자매결연 맺은 것을 기념해 1977년 문을 연 곳. 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테마공원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장소다. 지난 9월 1일 이곳에서는 한국과 터키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행사가 열렸다. 주한 터키대사관(대사 아르슬란 하칸 옥찰)이 주최하고 터키문화관광부와 서울시, 영등포구청의 협조로 ‘터키의 날’ 행사를 진행한 것. 평소 만나기 어려웠던 터키의 문화와 전통 예술, 음식 등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앙카라공원 내 앙카라하우스 앞에 마련한 간이 부스에서는 터키 전통 음식으로 유명한 케밥과 아이스크림, 커피와 터키식 젤리 로쿰을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특히 이번 ‘터키의 날’ 행사에는 터키에서 활동하는 터키문화관광부 소속 예술가들이 직접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전통 음악과 노래, 춤 등 공연과 터키 전통 미술을 감상하고 구입도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터키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푸른색으로 무늬를 낸 도자기 치니(ini, 수공예 도자기)와 에브루(Ebru, 터키 전통 마블링 공예) 작가도 이곳에 와 터키 전통 예술을 한국에 알렸다. 치니 전통 공예와 에브루 모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터키에서 날아온 예술가들 나지예 누르 아블루프나르는 치니 전통 공예가다. 치니는 도자기 공예로 터키 전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다채로운 색깔로 식물과 동물 문양, 기하학적 패턴을 그려넣고 유약을 발라서 만든 터키의 전통 수공예가 바로 치니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아블루프나르가 활동하고 있는 퀴타히아 지역은 서부 아나톨리아 내륙의 도시로 14세기부터 치니 중심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디뎀 유스튄은 에브루 공예 작가다. 에브루는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에브루는 금속제로 된 큰 그릇 안에 기름과 물을 담고 그 위에 여러 색상의 물감을 흩뿌리거나 붓질을 한 후 무늬를 만든다. 그 위에 종이를 덮어 전사(轉寫)하면 화려한 무늬가 종이 위에 그대로 연출된다. 흔히 ‘마블링(marbling)’이라고도 알려진 에브루는 꽃, 꽃잎, 격자무늬, 모스크, 달 등을 주로 표현한다. 전통 도서의 장정에 쓰이는 예술작품으로도 이용한다. 예심 카라이브라힘오울루는 터키문화관광부 소속 가수다. 이날 행사에서 터키 전통 음악인 할크 음악(Tu¨rk Halk Mu¨zig˘i) 연주에 맞춰 노래해 이곳에 모인 터키인들의 흥을 돋웠다. 커피 한잔이 40년의 우정을 나타낸다 행사 시작에 앞서 아르슬란 하칸 옥찰 주한 터키 대사는 환영사를 통해 모든 터키와 한국이 오래전부터 형제의 나라로서 특별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또한 서울에는 앙카라공원이, 터키에는 한국공원이 있다고도 소개했다. ‘커피 한잔이 40년의 우정을 나타낸다’는 터키의 격언을 얘기하면서 이날 행사처럼 터키와 한국사람 모두 모인 자리에서 좋은 음악을 듣고 음식을 먹으면서 더욱 관계가 가까워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창범 서울시 국제관계대사도 축사를 통해 “한국과 터키가 수교를 맺은 60년 동안 양국 모두 경제와 문화가 발전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이 행사가 정기적인 축제로 거듭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오전 오후 2부로 나누어 공연이 진행돼 지나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잡았다. 케밥과 아이스크림 등이 일찍 동이 날 만큼 성황을 이뤘다.
- 2017-09-2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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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평창 봉평, 여기는 다시 ‘메밀꽃 필 무렵’
- 가산 이효석(可山 李孝石)의 단편소설 의 주 무대로 알려진 강원도 평창군 봉평. 이효석의 고향이기도 한 봉평은 매년 가을이 찾아오면 메밀꽃이 활짝 펴 수만 평의 메밀밭을 하얗게 물들인다. 한때 수입산 메밀에 밀려 사라질 위기도 있었지만 2002년 ‘이효석 문학관’이 개관되면서 다시 한 번 더 흐드러지게 그 꽃을 피우게 됐다. 소설가 이효석은 1907년 출생해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나이로 단명했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경성농업학교에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는 30세가 되던 해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거취를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이 탄생했다. 이후 , , 등을 발표하며 ‘우리 문단에서 가장 참신한 언어 감각과 기교를 겸비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이효석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문학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평창IC에서 빠져나와 약 10분간 달리다 보면 양옆으로 봉평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며 현수막을 내건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맛집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효석을 기념하는 가산공원과 이효석 생가가 위치한 남안동을 이어주는 남안교를 건너자 오른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효석 문학관이 어느 새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대표적 문학작품 제목이 새겨진 책 모양의 문학관 입구가 인상적이다. 들어서자마자 이효석의 연보가 펼쳐진다.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간략한 설명과 함께 놓인 사진 자료는 그의 생애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깔끔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이효석의 학창 시절 사진과 단란한 가족사진이 인상적이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1930년대 이효석의 집필 공간을 재현한 코너가 눈길을 끈다. 피아노와 축음기도 놓여 있고 그 뒤로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이 이국적이다. 그 시절에 커피를 즐겨 마시고 빵에 버터를 발라 먹었다고 하니 이효석이 서양문물에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생전 활약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육필 원고, 영화 의 대본 등 유족과 연구자들이 기증한 흥미로운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밖으로 나가면 산책길과 더불어 이효석의 좌상을 볼 수 있다. 비록 조각상이긴 하지만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여분의 의자도 마련되어 있다. 자세한 안내를 원하는 방문객을 위해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이효석 문학관 해설’ 서비스도 제공한다. 문학관 홈페이지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신청서를 보내거나 전화로 예약 가능하다. 의 주인공이 되다 문학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봉평 읍내는 그야말로 의 배경 그 자체다. 봉평장터 주위로 큰 마트가 3개나 생겼지만, 아직도 2·7일이면 봉평장이 열린다. 문학관에서 장터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소설 속 주인공 허생원이 되어 메밀밭과 복원한 물레방앗간을 구경하며 장터까지 걸어가볼 것을 추천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中)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9월에 방문하기를 권한다. 7월 초에 심은 메밀은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8월 하순쯤 꽃을 피우기 시작, 9월 중순까지 봉평 일대를 하얗게 수놓는다. 관람 정보 주소 강원 평창군 봉평면 효석문학길 73-25 전화 033-330-2700 관람 시간 09:00~17:30 (비수기)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성인 2000원
- 2017-09-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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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된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
- ‘삼포세대’, ‘비혼’, ‘1인 가구’ 등의 유행어는 전통적 가족 형태의 붕괴가 급속하게 진행됨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조차 시대와 트렌드에 뒤처진 박제된 구호로 전락한 지 오래다. 취업난과 치솟는 집값 등으로 초래된 경제적 어려움이 고조되고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꺼리는 ‘관태기(인간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의 사람들이 늘면서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요즘 TV 화면은 이 같은 현실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남녀 만남을 전면에 내세운 다양한 포맷의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쏟아지고 있다. 젊은 남녀의 만남을 내세운 채널A의 , Mnet의 , E채널의 부터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된 중년의 짝 찾기를 다루는 KBS Drama의 까지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이전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보다 진화된 채널A의 은 폭넓은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9월 1일 막을 내린 . 남녀 각각 4명의 출연자가 한 달 동안 정해진 숙소에서 동거하며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선택한다.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퇴근 후나 휴일에 숙소에 머물며 관심이 가거나 호감을 느끼는 상대를 찾는다. 매일 상황과 감정 변화에 따라 전개되는 밀당과 탐색전으로 달라지는 남녀 만남의 판도가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 윤종신, 이상민 등 판정단은 연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출연자의 감정 변화의 원인을 분석하며 성격, 취향, 심리, 직업, 외모 등 출연자의 상황에 따른 만남을 전망한다. Mnet의 역시 과 기본 포맷이 비슷하다. 서로 ‘남사친(남자사람 친구)’, ‘여사친(여자사람 친구)’이라고 생각하는 네 쌍의 남녀들이 일상을 공유하며 만남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 카메라로 보여준다. 또한 은 최양락, 김태원 등 4명의 연예인 딸들이 남자 친구를 소개받고 만나는 과정을 보며 아버지의 입장에서 코멘트하는 포맷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다. 은 황혼 로맨스 심폐소생 프로젝트를 표방한 프로그램으로 사별, 이혼 등으로 혼자된 연예인 어머니에게 데이트 상대를 찾아주는 과정을 담았다. , 를 비롯한 요즘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취업난과 경제적 고통, 인간관계 맺기의 어려움, 가족 해체 등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따른 남녀 만남 풍속도의 변화를 반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결혼은 아득하고 연애조차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서로 좋아하고 자주 연락하며 데이트는 하지만 정식으로 교제하지 않는 ‘썸’과 사랑이 아닌 우정 관계인 이성 친구를 의미하는 ‘남사친’, ‘여사친’처럼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남녀관계를 흥미롭게 드러내 인기가 높다. 같은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의 역사는 오래됐다. 남녀의 만남만큼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기에 방송사들은 오래전부터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이들 프로그램에서는 남녀 만남의 트렌드와 문화를 엿볼 수 있고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 외모, 성격, 성적 매력, 직업, 재산, 학력, 지위 등의 영향과 비중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사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남녀의 만남 과정과 행태를 공적 공간인 방송으로 드러내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고 엿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그 시대의 남녀 만남 풍속도나 트렌드를 반영하거나 선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했을까. 남녀 만남 프로그램은 크게 일회성 이벤트로 보여주는 연예인 만남 프로그램과 일반인 남녀가 출연하는 일반인 만남 프로그램으로 나뉜다. 시청자와 대중의 관심을 이끈 것은 일반인 남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다. 산업 성장기 초입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서민이 많았고 가부장적 분위기가 엄존했고, 남녀의 공개적인 만남이 자유스럽지 않았던 1970년대에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 등장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바로 1977년에 방송된 MBC의 다. 코미디언 구봉서와 곽규석이 진행한 는 각각 3명의 남녀가 나와 대화를 나누며 데이트 상대를 찾는 TV 맞선 프로그램이었다. 공개적인 만남이 많지 않았던 시절의 는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관심은 22 대 1이라는 출연자 경쟁률에서도 잘 드러났다. 고도성장과 가부장적 분위기가 감소하면서 남녀의 만남이 자유롭게 이뤄졌던 1980년대의 대표적인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1989년 MBC의 다. 1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이 출연해 만남 상대를 찾는 포맷이었다. 는 당시 사회문제로까지 떠오른 농촌 총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 총각과 도시 처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가족 해체가 본격화하며 남녀의 만남이 매우 자유스러웠던 1990년대에는 남녀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졌다. KBS, MBC, SBS 등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사들은 한두 개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 남녀 만남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MBC의 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방송되며 높은 인기를 얻은 는 남녀가 각각 4명씩 출연해 게임과 대화를 하며 마음에 드는 상대를 선택하는 일명 ‘사랑의 작대기’가 일치하는 남녀 커플이 데이트를 하는 포맷의 프로그램이었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미팅 문화를 보여준 는 7년 동안 1432쌍이 출연했고 이 중 47쌍의 커플이 탄생해 화제가 됐다. 학벌, 재산, 직업, 외모에 의한 서열화가 본격화하면서 결혼이 재산, 외모, 학벌 등 외형적 조건의 교환시장 성격을 띠기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남녀 만남 프로그램도 물화된 조건이 중시되는 풍속도를 보여줬다. KBS2의 , Mnet의 , JTBC의 등 진화된 형태의 다양한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와 만났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방송된 SBS의 은 이전과 전혀 다른 포맷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논란도 컸다. 남녀 9~16명이 ‘애정촌’이라는 공간에서 합숙 생활을 하며 짝을 찾는 과정을 리얼리티 쇼 방식으로 보여준 은 연애와 섹스에 대한 개방적 자세, 외모, 재산, 직업 등 외형적 조건 중시 등 2000년대 남녀 만남의 현실을 반영했다. 여기에 관찰 기법, 사회자의 이야기 등 사실성과 일상성을 높이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남녀 만남의 극단적 상품화라는 논란 속에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은 한 여성 출연자가 촬영 도중 자살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해 막을 내렸다. 이처럼 남녀 만남 프로그램은 시대와 현실, 그리고 남녀 만남의 풍속도를 반영하고 선도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에게 남녀 만남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트렌드를 제공하는 등 긍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은 남녀 만남을 외형적 조건의 교환시장으로 전락시키거나 극단적으로 상품화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 2017-09-22 1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