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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언제쯤 오려나?
- 겨울 떠나보내고 봄을 재촉하며 창가를 소곤소곤 두드리는 비가 밤새도록 귓전에서 맴돈다. 어느덧 절기상으로 ‘우수’가 성큼 다가와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사위어가는 한 줄기 희망의 모닥불을 살려냈으면 좋겠다. 24절기중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는 봄으로 들어서는 입춘(立春)과 겨울 잠자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驚蟄) 사이에 있는 절기이다. 우수는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로 이때가 되면 추운 겨울이 가고 대지에는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겨우내 서해바다에서 모질게 불어대던 서풍한설(西風寒雪)도 주춤하고 훈훈함이 설핏 묻어있으니 조금은 살만하다. 이제야 봄은 오려나? 겨우내 나라 안팎은 시끌벅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 모진 한파속에 수많은 촛불이 바람에 나부끼고 태극기가 맞불작전으로 세과시(勢誇示)를 하면서 서로에게 쏟아낸 혐언(嫌言)들은 공허하게 부딪치는 파열음이 되어 서민들의 마음을 허탈하게 만들었으며 자괴감마저 들게 했다. 흑백의 논리가 판을 치고 외눈박이사랑처럼 자신의 진영만이 옳다는 짝사랑식 막말을 쏟아부은채 표류하는 허송세월이 길어지고 있다. ‘배려’라는 단어는 이미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에게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고 있다. 자신의 논리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반대편 사람으로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반쪽짜리 사회를 심화(深化)시켜 가고 있다. 인간은 어차피 사회성(社會性, social qualities)을 가지고 있기에 혼자서는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기는 어렵다. 어차피 둘이상이 모여 살아가는한 사유(思惟)의 상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식과 보편, 관습과 배려를 모두 동원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의 핵심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각자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 해결되지 않는 시시비비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이지만 요즘은 초법적 발상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흔히 말하는 ‘떼법’이 ‘헌법’의 상위에 있는지 궁금하다. 뭐니뭐니 해도 편가르기식 정치를 등에 업고 무엇인가 변화를 설레발치는 수준 미달(?)의 정치인들의 영향으로 사회는 더욱 양분화 되어 갈등을 조장해 낸다. 이래저래 이번 겨울은 차가운 한파와 더불어 서민들의 마음마저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봄은 언제쯤 오려나? 봄이 오기는 할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지만 이러 저리 표류하는 이 사회는 좀처럼 오는 봄을 두 팔벌려 맞이하려는 기세가 보이지를 않는다. 세상만물의 조화는 오묘한 것.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도 때가 되면 해동이 되고 나뭇가지에는 물이 올라 만물이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겠지. 혹독했던 지난겨울은 그 겨울에 묻어버리고 이제는 따뜻한 봄기운으로 삼천리 방방곡곡 대지를 물들였으면 좋겠다. 이 겨울의 갈등과 반목은 잠시 접어두고 꽃피는 봄이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나라는 흔치 않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마다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금수강산은 우리나라만의 축복이요 선물이지 않겠는가? 자손만대에 물려줄 이 멋진 나라를 더욱 잘 가꾸고 꽃을 피워내 오늘을 살아내는 필자가 훗날 멋지고 아름다운 선조였다는 말을 후손들에게 들었으면 좋겠다.
- 2017-02-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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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인연
- 필자는 좋은 모임을 여럿 갖고 있는데 고등학교나 대학교친구 모임, 그리고 우리 아이 초등학교 때부터 만나고 있는 학부모 모임 등이다. 그중에서 남편 때문에 갖게 된 좋은 모임이 있다. 남편의 대학친구들 모임으로 멤버는 다섯 명이지만 각자의 부인과 아이들까지 합하면 매우 큰 인원수가 된다. 필자가 결혼할 당시 남편과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한 분들이었다.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만들어 대접을 하였는데 필자가 갓 결혼했을 때 필자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었다. 그런데 세 명의 부인들은 정말 훌륭한 요리사들이었다. 달마다 돌아가면서 친구댁을 방문해 남편들은 포카를 치고 아내들은 수다를 떨면서 초대한 집 부인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필자 차례가 왔을 때 서툰 솜씨로 차렸지만 다들 칭찬해주고 맛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좋은 분들이었으며 아이들이 어릴 땐 단체로 대가족이 되어 여행도 많이 가고 낚시도 하러 가는 등 친목을 돈독히 하는 사이였다. 세 명의 다른 부인들보다 좀 나이가 어렸던 필자를 모두 예뻐해 주는 배려를 받았는데 마지막 한 분이 뒤늦게 결혼을 해서 필자 인기는 시들고 새로운 막내가 탄생하였다. 서로 격의 없이 친한 사이였으므로 먼저 결혼한 세 분의 부인들을 노계라며 놀렸고 필자는 영계라고 불렸다. 그런데 막내로 새로 합류한 부인은 나이도 엄청나게 차이 나는 그야말로 영계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만 영계자리를 빼앗기고 중닭이 되었다. 노계, 중닭, 영계, 그렇게 말하면서 얼마나 웃어댔는지 지금 생각해도 무척 재미있고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그중 한 커플인 진오 아빠 엄마는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결혼도 제일 먼저 해서 나머지 4명의 총각 친구들이 모두 그 신혼집에 가서 살다시피 해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다 받아주었다는 마음이 넓은 부인이다. 지금은 멤버들 모두 자식들이 다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부부만 남았는데 제일 나중에 결혼한 분의 아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뒷바라지가 다 끝나진 않았다. 아이들이 다들 결혼해서 부부들만 남으면 한곳에 모여 집을 짓고 살자는 계획도 세웠고 멀리 여행도 하며 살자고 약속을 했었는데 몇 년 전에 가장 사이좋은 부부인 진오 아빠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부가 너무 사이가 좋으면 하늘이 질투해서 한 사람을 먼저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그래서였을까, 정말 우리가 놀릴 정도로 서로 사랑했던 진오 아빠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났다. 남편을 보낸 진오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 후부터는 매달 모이지 못했고 3개월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그래도 진오 엄마는 항상 모임에 참석을 한다. 이제는 시간도 많이 흘러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 다행인데 사진 찍는 공부를 하고 사진동아리에 들어 출사로 여행도 다닌다며 작년에는 직접 찍은 사진으로 탁상용 달력을 만들어 멋진 선물을 해주었다. 20대에 처음 만난 부부모임이 이제는 모두 60이 넘은 시니어들이 되었으니 이 모임을 생각하면 우정의 인연이 얼마나 깊고 따듯한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뿌듯하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갖는다는 건 너무나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자면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새해를 맞아 부부동반 모임이 있었다. 물론 진오 엄마도 참석했고 올 한해도 열심히 건강 지키며 살자는 다짐을 하면서 반가운 모임을 가졌다. 오랜 시간 알아온 우리 석우회 멤버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해 본다.
- 2017-02-1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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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아이다>
- 매서운 한파가 며칠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차가운 날에 뜨거운 사랑 이야기 뮤지컬 한 편을 관람했다. 제목 ‘아이다‘는 이집트의 이웃 나라인 누비아 왕국의 공주 이름이다. ‘아이다’를 알긴 했지만,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가슴 아프게 이렇게 목숨까지 거는 사랑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아이다’는 우리나라에서 2005년에 초연되었고 2012년까지 총 574회의 공연을 한 대표적 뮤지컬 작품으로 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팝의 거장 앨튼 존과 음악의 전설 팀 라이스가 함께 완벽한 음악을 만들었고 고대 이집트가 무대이므로 의상이나 장신구가 매우 화려해서 듣고 보는 즐거움이 컸다. 이번 공연의 무대는 샤롯데 씨어터로 지난해 보았던 여러 대작 무대보다는 좀 작은 규모여서 뮤지컬이 어떻게 표현될지 관심이 갔는데 900개의 고정 조명과 90대가 넘는 무빙라이트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빛을 나타내었고 무대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800여 벌의 의상과 머리 장식 등이 어우러져 매우 환상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벽화에서나 봄 직한 고대 이집트를 표현한 안무도 강인함과 섹시함, 처절함과 비장함을 역동적으로 표현해 춤의 마력에 빠져들게 했고 웅장한 음악은 가슴 속에 한동안 남았다. 이 작품은 무대, 의상, 조명, 안무 등 모든 면에서 현대적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던 해 최고의 뮤지컬에 주어진다는 토니상 음악상과 그래미상 베스트 뮤지컬 앨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아서 작품의 훌륭함이 증명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운명 같은 애절한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다. 뮤지컬 ‘아이다’는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나일 강 변에서 시작된 전쟁 속에서 피어난 사랑 이야기다. 이집트의 장군 ‘라다메스’는 승전보를 울리며 귀국 항해하던 중 부하들이 잡아 온 누비아 포로들 가운데 끊임없이 반항하는 여인 ‘아이다’에게 관심을 두게 된다. 노예가 될 운명의 포로 사이에서 고귀하고 용감한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라다메스’는 이집트에 돌아와 누비아 사람인 부하 ‘메렙’에게 ‘아이다’를 자신의 약혼녀인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의 하녀로 보낼 것을 명령한다. ‘메렙’은 ‘아이다’가 누비아의 공주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지만, ‘아이다’는 자신의 신분을 감춰 달라고 부탁한다. ‘라다메스’ 장군은 9년째 약혼상태인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가 있음에도 자꾸만 노예 ‘아이다’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이다’ 또한 끌려온 백성을 구해야 하는 신분임에도 포로가 되어 적국의 장군을 사랑하게 된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괴롭기만 하다. 한편 상큼 발랄한 이집트 공주 ‘엠네리스’는 ‘라다메스’의 사랑을 갈구하며 ‘아이다’에게 속을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 누비아의 왕이 잡혀 왔다. 감옥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이다’는 누비아 백성을 이끌고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하는데 누비아 왕과 누비아 포로들이 배를 타고 출발하려는 때 ‘아이다’는 ‘라다메스’를 보기 위해 동행하지 못하게 된다. 배만 타면 고향으로 갈 수 있는데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아이다’는 이집트에 남아 ‘라다메스’와 만난다. ‘라다메스’를 사랑한 ‘엠네리스’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그들을 잡아들인다. 병중인 이집트 왕 파라오는 그 둘을 죽이라고 하지만 ‘엠네리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이 여왕이 될 것을 선포하고 ‘라다메스’와 ‘아이다’를 한 공간에 넣어 매장하는 벌을 내린다. 큰 죄를 지었으니 살아날 길이 없는 그들에게 함께 죽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 후 ‘엠네리스’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나라를 잘 이끄는 현명한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뮤지컬의 처음과 끝나는 부분에서 현대의 이집트 박물관이 나온다. 고대의 이집트 문화와 유물이 전시되는데 한 전시물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이 환생한 ‘아이다’와 ‘라다메스’라는 설정이 가슴 찡하고 전생에서의 인연을 잊어 서로 알아보지 못하니 애틋하기만 하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 뮤지컬은 ‘아이다’ 보다는 ‘엠네리스’가 더 큰 비중을 가진 것 같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공주의 역할을 잘해 낸 가수 아이비에게 환호를 보낸다. ‘엠네리스’는 ‘라다메스’와 결혼해 그를 이집트 왕으로 만들려 했다. 사랑에 배신당했지만, 그 둘을 같이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장면에서 한 왕국을 이끌 수 있는 여왕으로 큰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건 한 남자와 적국의 남자를 사랑한 죄를 진 공주와의 애절한 이야기 ‘아이다’가 가슴에 다가왔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 가슴 저미는 사랑에 애틋함을 느낄 수 있는 시니어가 되어보면 어떨까? 한 번 권하고 싶다.
- 2017-02-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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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지금은 라디오 시대> DJ, 그리고 <최유라쇼>의 쇼호스트 최유라의 인생 후반전은 지금이 최고의 순간
- 롯데홈쇼핑의 인기 프로그램 를 시작하기 위해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최유라(51)의 모습은 전문 CEO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녀를 MBC 표준FM 의 DJ로만 기억하는 사람은 그녀의 절반만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진행하는 는 2009년에 시작해 올해 무려 8년 차를 맞이하고 있는 독보적인 홈쇼핑 프로그램이다. 가 세운 매진과 완판의 기록은 최유라를 명품 비즈니스 업계의 블루칩으로 각인시켰다.그녀가 말하는 쇼호스트로서의 삶 그리고 인생 후반전을 들어본다. “저는 살면서 홈쇼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직접 만지고 느껴보고 사는 것이 재미가 있거든요. 어떻게 남의 말을 듣고 사느냐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그걸 파는 사람이 물건을 얼마나 알아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가 싶었어요. 그래서 아예 안 봤죠.” 현재 홈쇼핑에서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독보적인 홈쇼핑 프로그램 의 쇼호스트이자 를 이끌고 있는 베테랑 라디오 DJ로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최유라가 하는 말이다. 홈쇼핑에 전혀 관심도 없었기에, 그녀가 홈쇼핑 쇼호스트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쇼호스트, 결정까지 1년이 걸리다 “홈쇼핑 회사들이 저한테 제안을 해왔어요. 결정하는 데 1년이 걸렸죠. 이들이 제 요구사항을 결정하는 데 8개월 걸렸어요. 제 요구사항은 ‘내가 쓰는 것, 먹는 것, 우리 집에 있는 것부터 하자. 그럼 하겠다’였어요.” 그녀는 “내가 쇼호스트도 아닌데 직접 써보지 않은 걸 어떻게 팔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회사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르듯 한 말이었기 때문에 요구사항을 보낸 후에는 잊고 있었어요. ‘그게 될까?’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좀 답답하게 사는 사람이라…. 굳이 돈벌이하려는 거면 방송에서 벌면 되지 싶었고.” 당시 그녀의 제안을 가장 심사숙고한 회사는 롯데홈쇼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계약이 체결되고, 최유라는 홈쇼핑 무대에 서게 된다. 그게 벌써 7년 전 이야기다. “2년 차, 3년 차까지는 참 힘들었어요. 일단 업체들의 검증도 필요했고, 업체들에서는 ‘저희는 아직 홈쇼핑 계획 없습니다’라고 하고. 특히 외국 업체들은 명품 홈쇼핑 개념을 모르더군요. 독일도 일본도 마찬가지였죠. 저가 물건들의 판매를 홈쇼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홈쇼핑의 위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꾸준하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나갔고, 마침내 폭탄이 터졌다. 최유라가 쇼호스트를 맡은 제품들 중 명품 가전제품을 만드는 다이슨의 제품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연속 매진을 기록한 것이다. “직접 영국 다이슨 본사에 가서 확인하고 공장도 보면서 공을 많이 들였어요. 신제품을 방송하면서 대박을 쳤죠. 다이슨을 수입하는 수입사가 깜짝 놀랐어요. 그러면서 다이슨의 모든 신상품은 백화점과 최유라에게만 준다는 방침을 세웠죠.” 마담 초이, 인생이 바뀌다 최유라의 인생도 그때를 기점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계속 해외에 나가게 됐어요. 매해 2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암비안테 박람회가 열려요. 세계의 주방 가전 명품이 모이는 세계 최고의 박람회죠. 물건 판매는 안 하고 계약만 체결되는 자리예요. 그러다 보니 각 업체 CEO들과 친분도 쌓게 됐어요. 참 신기한 일이죠.” 그녀는 초청을 받아 암비안테 박람회 휘슬러 부스에서 라이브 요리쇼를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요리를 소개하면서도 휘슬러의 우수성을 선보이는 일석이조의 자리다. 이제는 박람회에 가면 ‘마담 초이’ 안 오냐며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박람회와 비즈니스 업계를 통해 친해진 친구들로 가득하다. “제가 정말 꿈에 그리던, 이건 이뤄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돼버렸어요.” 그녀가 확고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은 인터뷰 도중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쇼호스트가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는 스태프들과 함께 기획에서부터 디렉팅까지 전부 컨트롤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스태프들에게 꼼꼼히 지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자신답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여자 최유라는 마흔다섯 살 때부터 은퇴를 준비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말했어요. 은퇴를 할 때는 신중히, 오랜 시간을 두고 놓치는 거 없이 차근차근 마무리하고 싶다고. 그래서 은퇴에 걸리는 시간을 10년으로 잡자고.” 그녀는 예순 살이 되기 전에 뭔가를 이뤄놓고, 예순 살을 전후로 앞뒤 10년을 자신이 ‘키운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쉬고 싶었다. 남편은 좋다고 승낙했고, 그때부터 최유라의 인생 후반전은 시작된 셈이다. 그때 마침 홈쇼핑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방송 출연, MC 섭외도 많이 와요. 그런데 제가 재미가 없어요. 30대라면 할 수도 있겠는데 은퇴 준비를 하면서 방송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거죠. 너무 소모적이기 때문이에요. 감각적인 재미와 과장된 그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각해보니 지금 하는 라디오와 홈쇼핑의 와 역행하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뒤에서 욕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저건 뭐 혼자 잘났다고 잘난 척하고…. ‘아니, 를 왜 안 해? 웃기다 이거지?’ 이런 얘기도 듣고. 그런데 저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따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웃기고 있네, 네가 왜 할 얘기가 없어? 너같이 말 잘하는 애가.’” 그녀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나가지 못한다.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 특히 가족 이야기가 주가 되는 토크형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말썽도 부리고 가출도 하는 등 갈등이 있어야 시청자들이 재밌다. 그런데 최유라의 아이들은 너무 ‘평범하게’ 자랐다. 아침 먹고 학교 가고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그러니 방송에서 원하는 ‘에피소드’가 없는 게 당연하다. “다 상술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간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최유라의 성격은 쇼호스트 일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쓰는 물건만을 소개한다. 그래서 소위 ‘지르는’ 식의 제품소개를 질색한다. 그녀가 생방송 중에 실제로 요리를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사람만 사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방송 진행 중에 단점까지 다 말해버릴 정도로 그녀는 정직하다. “솔직히 홈쇼핑의 모든 용어가 불편해요. ‘추가 구성’이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미끼죠. 살 것도 아닌데 사게끔 만드니까. 그래서 ‘추가 구성이라고 하지 말고 선물이라고 하자’ 했어요. 그런데 선물이라는 표현이 심의에 걸리더군요. 너무나 걸리는 게 많아(웃음). 결국 부속이 아니라 동급의 명품으로 함께 줄 수 없으면 본 제품만 판매하고 가격을 낮추자는 쪽으로 정리를 했죠.” 그녀의 성공적인 도전은 소비자들의 반응으로 확인되고 있다. “중심을 잡아주는 게 정말 중요해요. 사람들은 다 느껴요. 내가 잘난 척을 하는지 말로만 어떻게 하려는 건지. 그래서 명확하게 해야 해요. 어떤 분이 문자를 보낸 적이 있어요. ‘홈쇼핑은 다 상술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간다’고. 그래서 저는 모든 의견을 받을 수 있는 SNS를 개방했어요. 물건 예고편, 개인적인 얘기까지 알려주는 공간을 만든 거죠.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쓰는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정직으로 승부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기업에서 봉급을 받는 게 아니라 롯데홈쇼핑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 기업에 ‘물건만 잘 만들라’고 말할 수 있다.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방송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어떤 때는 포장이 안 좋아 방송을 그만둔 적도 있어요. 회사가 고맙긴 해요. 그런 내 만행을 다 받아주니까. 그러잖아요, 고객을 만나는 건데, 부실하면 말이 안 되죠.” 내 이름을 걸고 하는 ‘토크쇼’ 좋은 물건은 소통의 매개체이며 그걸 잘 이용하고 싶다는 최유라는 혼자 해도 어색하지 않은 토크쇼를 할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최유라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하고 있는 셈이다. 소위 MC들이 가지는 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하고 싶다는 꿈을 그녀는 이미 이루고 있다. 그녀는 휘슬러를 판매하기 위해 쇼를 시작할 때, 그날의 시사와 사회, 가사에 대한 내용으로 오프닝을 한다. 스토리가 있는 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쇼를 대하는 진정성의 증거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자신이 판매하려는 제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물건을 팔 때 그 물건을 왜 써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잘 사용하는 것인지도 알려줘야 소비자들의 마음이 움직이겠다 생각했죠. 그런 촘촘한 배려가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요즘에도 계속 매진행렬을 만들어내는 이유라고 봐요.” 이제 51세. 그녀가 말한 예순 살 이전 10년이라는 인생 후반전의 초반이다. “작년은 건강과 환경이 캐치프레이즈였어요. ‘좋은 명품은 환경적으로 우수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실행했죠. 그럼 2017년은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떤 캐치프레이즈를 제시해야 할까? 스태프들에게 물으니 다들 거창하게 생각하더군요. 저는 올해 ‘우리의 기본 밥상을 바꾸는 것’이 목표예요. 특히 설탕, 소금에 대한 것들을 바꿀 거예요. 설탕은 참 백해무익하죠. 그런데 안 들어가면 안 되는 재료예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해요.” 스쳐가더라도 기억에 남는 사람 되고파 “요즘이 가장 좋아요. 우리 부부는 살면서 더 좋아지는 중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느꼈던 아픔과 상처들이 있지만, 지금은 편안해요. 가감 없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거든요. 젊었을 때 저 사람 없이 못 살겠다는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이제는 저 사람과 끝까지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최유라는 아이들에게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위했는데’ 하는 기대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과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이제 그 나이에 이르렀음이 행복하고 요즘 그 행복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언뜻언뜻 스치는 기억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사정이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위로를 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연예인, 괜찮은 사람, 그렇게 스쳐가더라도 남는 사람.” 그녀의 소망을 듣고 있자니 마치 라디오를 듣는 듯 편안했다. 그녀의 아날로그적 매력이 훅 하고 밀려왔다. ‘마음’, ‘진정성’, ‘기준’이라는 단어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참 드문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최유라가 만들어갈 인생 후반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 2017-01-3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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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의 맛] 조미료 無 김치찜, 김치 본연의 맛을 품다
- 지난해 담가두었던 김장 김치가 맞춤하게 익어가는 때다. 잘 익은 김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식재료가 된다. 새콤한 맛이 살짝 도는 포기김치에 두툼한 생고기를 넣고 푹 쪄낸 김치찜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요리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재료와 김치만으로 맛을 내는 김치찜 맛집 ‘더 김칫독’을 찾아갔다. 모던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김치찜의 깊은 맛 김치찜은 김치찌개, 된장찌개처럼 부담 없이 즐겨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꼭 전문점이 아니더라도 차림표에 올리는 가게가 많다. 간혹 전문으로 하는 맛집을 찾아가 보면 대개 오래된 식당이라 정겨움은 더할 수 있지만, 깔끔하다는 인상을 느끼기는 어렵다. 경기도 일산 킨텍스(KINTEX) 인근에 자리 잡은 ‘더 김칫독’은 소박하면서도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이다. 더 김칫독의 뚜껑을 연 지는 이제 3년 차이지만, 그 맛만큼은 시골 할머니의 손맛처럼 깊고 진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더 김칫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 맞이한다. 곳곳에 뒤주나 도자기 소품 등이 현대식 인테리어와 어우러져 편안한 분위기를 낸다. 더 김칫독의 김치찜은 100일간 숙성한 김치를 사용하고 국물이 넉넉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묵은지를 사용해 자박하게 조리하는 김치찜과 비교했을 때, 한눈에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묵은지를 쓰게 되면 신맛과 짠맛이 강하기 때문에 물에 여러 번 헹구거나 설탕을 많이 첨가해 자극적인 맛을 줄이게 된다. 충청도식으로 절인 이곳 김치는 평창 고랭지 배추에 양념을 적게 넣어 짠맛이 덜하고, 100일 동안만 숙성하기 때문에 신맛도 강하지 않다. 아삭한 식감이 남아 있는 김치에 8년 숙성한 오미자 효소와 설탕을 넣지 않고 자연 발효시킨 감식초, 우리 콩으로 빚어 만든 된장·간장, 국내산 멸치·꽃새우·다시마 등으로 간을 맞춘다. 설탕을 비롯한 인공조미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차별화를 뒀다. 여기에 제주산 돼지고기(삼겹·전지·등갈비)가 들어간다. 처음부터 김치와 고기를 넣고 한꺼번에 끓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재료를 따로 삶고 손님상에 내기 전 육수와 함께 부어서 내놓는다. 육수를 넉넉하게 넣고 서서히 끓여가며 먹는데, 초반에는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 맛이 나고 육수가 졸아들수록 깊고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가게에서 직접 들기름에 구운 김 반찬이나 계란말이, 두부부침 등을 곁들여도 좋고 떡, 라면, 만두 등 사리를 넣어도 된다. 단골 사이에서 김치찜(1인분 1만원)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하는 메뉴가 있다. 바로 갓김치찜(1인분 1만2000원)이다. 포기김치와 마찬가지로 100일 동안 숙성한 전남 여수 갓김치가 들어가 독특한 풍미를 자아낸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삶은 우거지를 넣는다는 것인데, 보들보들하게 익은 우거지에서 구수한 맛이 우러나 국물 맛이 더욱 깊다. 김치찜을 주문하면 밑반찬과 함께 쌈 채소가 나온다. 두툼하게 잘라 넣은 우수한 품질의 제주산 돼지고기를 김치와 곁들여 먹기도 하지만 쌈을 싸서 먹으면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맛 좋은 한식에는 밥맛 또한 중요하다. 국내산 햅쌀과 흑미를 사용해 조금씩 여러 번 나누어 밥을 지어 최대한 갓 지은 밥맛을 선사하고자 노력한다는 주인장이다. 김치찜을 끓이는 냄비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전골냄비가 아니라 한국 전통의 방짜유기를 사용한다. 녹이 슬지 않게 닦고 관리하는 것이 번거롭지만, 그만큼 음식 맛을 좋게 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고. 김치찜의 쿰쿰한 냄새가 옷에 배지 않도록 옷장을 따로 마련한 주인장의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호수로 838번길 8-4 문의 02-334-6856 (매일 10:30~23:00) 점심시간에 가면 돼지고기김치찌개를 비롯해 참치김치찌개, 꽁치김치찌개 등의 찌개류를 맛볼 수 있고, 저녁에는 숙성한 제주산 오겹살, 목살, 앞다릿살 구이류를 즐길 수 있다.
- 2017-01-2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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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약자가 된다
- 전국에 걸쳐 수많은 관람시설이 있다. 주로 실내 시설인 전시관, 박물관, 생태관, 환경관, 수족관 등이 있고 야외시설로는 식물원, 수목원, 생태원, 동물원 등이 있다. 이런 관람시설은 사립, 공립, 국립시설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공립시설이 가장 많다. 요즘에는 특별한 주제를 특화한 사립시설도 많이 생긴다. 국립시설은 공립이나 사립시설에 비해 현저히 시설개소가 적다. 시설은 몇 개 안되지만 대부분의 국립시설은 공립이나 사립시설에 비해 그 규모가 매우 크다. 규모만큼이나 사업비가 많이 들어간다. 국립시설은 말 그대로 국가에서 사업비를 부담할뿐더러 대부분 입장료가 무료이거나 아주 저렴해서 관리 운영비도 국가에서 부담한다.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국민세금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립시설은 사립과 달리 영업이익을 추구하는 시설이 아니다. 공익성 관점에서 봤을 때 그 가치가 충분하다면 세금을 써서 건립할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교육적이라든가, 보존이라는가, 혹은 미래를 위한 국가적 투자의 당위성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건립이유가 된다. 서천에 국립생태원이 있다. 당초 갯벌을 매립해서 산업단지를 조성하려고 하다가 갯벌매립을 포기하고 대안사업으로 국립생태원을 만들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서천까지 가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이라는 시설의 위상을 잘 아는 관람객들이 큰 기대를 하고 이곳을 찾아간다. 서울에서 최소 두 시간 반이 걸린다. 일단 주차장에 도착하면 매표를 하고 코끼리 열차를 타야할지 그냥 걸어가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코끼리 열차를 타도 매표소에서 그리 멀지않은 방문자센터까지만 갈 수 있고 그 다음부터 주 전시시설인 에코리움 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봄가을 날씨가 좋은 때는 매표소에서 에코리움까지 산책하듯이 걷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습지를 채운 억새와 갈대를 보는 멋이 있다. 그러나 한여름에 매표소에서 에코리움 입구까지 걷는 것은 힘들다.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도 없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면 피할 곳도 없다. 겨울에는 더 심각하다. 허허벌판에 몰아치는 바람을 마주하고 걸어야한다. 몸이 좀 불편한 사람은 이곳을 방문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에코리움 내부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5대 기후관을 주제로 다섯개 동으로 이루어진 전시시설은 각 기후대에 서식하는 대표적인 식물과 동물, 어류등을 전시하고 있다. 처음 만나는 열대관에서부터 과연 이곳이 국립시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열대관을 들어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하나는 계단으로 내려가서 멋진 식물 사이로 걸으며 열대 밀림을 느끼는 것이다. 폭포도 있고 어류도 볼 수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다가 계단을 오르면 구름다리를 건너며 밀림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문제는 보행이 불편한 사람은 이곳 열대림을 재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관람객은 짧은 우회길로 다음 코스로 바로 이동하게 되어있다. 국립시설에서 장애인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립생태원은 현상공모로 설계 업체를 선정했고 국내에서 내놓으라하는 건축사사무소에서 당선되어 설계를 진행했다. 설계도 문제지만 선정에 참여한 심사위원들도 이런 중대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니 어이가 없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세금을 할인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세금을 사용한 시설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비단 국립시설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 각 분야에서 우리는 약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부족하다. 그러나 언젠가 약자가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시간문제가 아닌가. 고령자가 된다는 것은 곧 약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2017-01-2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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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박시룡 前 한국교원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
-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려봤다. 박시룡(朴是龍·65) 前 한국교원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의 기사는 그저 황새복원의 역사다. 읽다 보면 ‘박시룡’이 아닌 ‘황시룡’으로 읽힐 정도다. 한국에서 멸종된 황새 복원을 위해 살아온 세월만 20년. 황새들의 안녕을 잠시 뒤로 하고 사회에서 허락한 현역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고별 강연 준비에 여념이 없던 1월의 어느 날, 교원대 교정에서 박시룡 교수를 만났다. 한 분야의 대가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인생에서 그 분야의 것을 빼면 어떤 얘기를 하게 될까? 박시룡 교수와의 인터뷰가 궁금했다. 그래서 황새 복원에 관한 이야기는 최소화해보려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 승 전 황새 복원’. 박 교수가 교원대에서 한 마지막 강연 제목도 ‘황새를 부탁해’였다. “고별 강연 주제는 제가 정했어요. 제2권역인 충북을 통해서도 황새 야생 복귀를 실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가 떠나고도 교원대를 중심으로 황새 복원 사업이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죠.” 은퇴를 앞뒀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박 교수는 여전히 바쁘고 할 일이 많았다. 황새를 한반도 땅에 다시 날게 한 사람으로서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황새 복원 男, 알고 보니 박쥐 박사? 박시룡 교수는 원래 박쥐 연구로 공부를 시작했다. 경희대학교 학부와 석사과정을 통해 박쥐의 유전과 관련한 연구를 했고, 독일 유학 시절 박쥐 행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것도 흡혈박쥐에 관한 연구였다. “독일 유학 당시, 본 대학교에서 지도교수를 만나 박쥐를 연구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분이 흡혈박쥐를 연구하는 분이셨어요. 세계보건기구(WHO) 파견으로 흡혈박쥐 주 서식지인 남미 코스타리카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전문가셨습니다. 흡혈박쥐를 독일로 옮겨 실험하고 있었죠. 저는 박쥐의 감각, 생리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초음파를 이용한 일상적인 박쥐의 음성학적 소통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쓰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교원대 동물학 분야 교수가 됐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교육환경이 독일에 비해 매우 열악했다. 독일에서 썼던 초음파 녹음기는 당시만 해도 몇천만원 되는 고가 장비여서 살 엄두를 못 냈다. 교육부에서 기자재 지원 비용을 얻어냈지만 필요한 장비들이 너무 많았다. “소리를 분석하는 분석기가 필요해서 그걸 먼저 샀어요. 초음파 녹음기는 비싸서 포기하고 가청음이라고 있어요. 릴 테이프로 녹음하는 건데 그건 얼마 안 비싸더라구요. 가청음은 어디다 쓰냐면 새소리 녹음을 할 수 있었어요. ‘파라볼라(우산 모양의 극초단파 중계용 안테나)’라는 집음기를 들고서 새 가까이 가서 소리를 녹음해 수집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파라볼라가 없어서 TV안테나 뽑아서 썼어요(웃음). 조잡하다고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황새 복원 사업이 중요하다고요? 왜죠? 굳이 다른 얘기를 해보자고 해놓고 뜬금없이 물었다.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황새 복원은 멸종된 동물을 복원해 이 땅에 살게 하겠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유학길에 올랐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때가 1981년이었는데 광주 민주항쟁 바로 직후였어요. 외국에 처음 나가본 거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르푸트한자를 타고 이동하는데 프랑스 대학생 무리가 한쪽 좌석에 무리 지어 앉아 있었어요.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데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그 당시 우리가 많이 못살았어요. 저애들은 여유 있게 왔다 갔다 하는데 나는 지금 이 나이에 뭘 배우겠다고 유럽이라는 곳을 가고 있나. 눈물이 나더라고요.” 유럽에 가보니 모든 것이 풍부했다. 대형 마트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다. 문화충격이었다. 당시 한국은 모두가 급물살을 이겨내며 살던 시절이었다. 시국을 의식한 듯 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박근혜 대통령하고 저는 1952년생 동갑입니다. 대학 시절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계엄령을 내리고 학교 문을 닫아버렸어요. 공부를 못했어요. 저는 주동자가 아니었지만 경찰에 끌려들어갔다가 훈방조치됐고, 장발족 단속에 걸려 또 경찰서에서 하루 있다 나오고요. 통제당하고 어려운 시대에 박 대통령은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만 다녔어요. 나라의 아픔도 느끼고 성장했어야 하는데….” 또다시 유학생활의 단상이 이어졌다. 6년 동안 유럽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그들의 ‘배려’하는 국민성에 놀랐고, 과거·현재·미래와 함께하는 장묘문화가 새롭게 느껴졌다. “독일의 경우 우리와 정말 다릅니다. 묘소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데 화단으로 돼 있어요. 더 충격인 것은 30년이 되면 법적으로 없어집니다. 제한된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걸 다 놔둬버리면 지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황새 복원 사업은 근본적인 상생운동 박 교수는 독일 유학생활 이야기를 통해 황새 복원 사업의 가치를 전하려는 듯했다. 배려를 기본 바탕으로 자연과 마주하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는 독일인들의 삶이 귀감이 됐다. 황새가 대한민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개체 수를 늘려간다는 것은 상생과 순환의 근본을 잡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황새 복원 사업은 자연이 살고, 나라가 살고, 우리가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국민의 배려가 밑바탕이 돼야 합니다. 사람도 생태계의 한 구성원입니다. 사람은 숫자가 많으므로 표면적으로 잘 몰라요. 그런데 멸종 위기종, 한 개체의 멸종은 100년 200년 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그 종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요. 황새의 멸종은 결국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가령 ‘농약을 얼마나 많이 썼기에 개체의 멸종을 가져왔을까?’ 예를 들어 일고여덟 쌍 중 한 쌍이 불임이라고 해요. 1960~1970년대에는 1cc당 1억 마리 정도 정자가 생성됐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1cc당 5000만 마리밖에 안 된답니다. 4000만 마리 밑이면 불임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화학 물질에 어려서부터 노출되어 왔다는 거죠. 우리 생애는 너무 짧아요. 황새를 복원하기에는요. 황새를 넘어서 결국 우리 인간의 삶에 부메랑이 돼 어떤 형태로든 드러날 것입니다. 제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을 포함한 생태계와 우리 생활,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칠 거로 생각합니다.” 황새는 현재 한국교원대 사육장에 96마리, 예산에 67마리가 있고 자연 방사로 서식하는 개체 수는 14마리다. 작년에는 자연 번식을 했던 암컷 두 마리가 전신주에 걸려 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전반적인 시스템 재고의 필요성도 황새 복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법적인 정년퇴직을 맞은 저는 겨우 20년 했는데 이 사업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꼭 좀 이어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품은 것은 40년, 그림 그린 것은 1년 박 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있던 작년 말,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황새와 자연을 주제로 한 수채화 전시회를 가졌다. 손사래를 치면서도 “유년 시절 미술 선생님이 ‘수’는 꼭 줬다”며 청문회식 답변(?)으로 본인의 소질을 인정했다. “유학 시절이 외롭더라고요. 독일 본은 흐린 날이 많아요. 그래서 가끔 스케치를 하고 그랬어요. 수채화의 대가 에밀 놀데(1867~1956)의 수채화 책을 보고 난 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속앓이를 했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 그림을 팔아서 학비를 벌 정도였다고 하니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본에서 유럽 박쥐학회가 있었어요. 그때 박쥐를 그려 액자에 넣어 30점 정도를 전시했는데 다 팔렸어요. 그림 팔아 번 돈으로 몇 개월 생활비로 썼습니다.” 그는 황새복원사업의 홍보를 위해 그림 재능을 활용하고 있다. 시중에 본격적으로 판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컵이나 텀블러, 홍보용 티셔츠 등에 직접 황새를 그려넣었다. 글씨 디자인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 틈틈이 연습해 다양한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박 교수가 그린 황새 그림 100점은 질소 처리돼 고별 강연 이후 타임캡슐에 저장됐다. 이 캡슐은 100년 후인 2096년에 열게 된다고. “몇 작품은 학교 박물관에 기증했고 100점은 타임캡슐에 넣었습니다. 100년 후에 결국 황새가 복원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있게 되겠죠. 이 그림과 함께요.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생각할 겁니다. 우리 후손들이 되겠죠.” 은퇴 후 박 교수는 예산황새공원(충남 예산군 광시면) 쪽에 사무실을 얻어 황새 복원을 위해 다시 뛸 계획이다. 살면서 다른 길을 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단 한 번도 없다는 듯 멀리 시선을 둔 채 미소만 짓는다. “그래도 자연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인생을 살면서 감동 아닌가요? 황새와 상생할 100년 후를 상상해봅니다.”
- 2017-01-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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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깨어나는 실크로드의 나라들
- 가르치는 재미를 몽골국제대학교에 와서 배우고 있다. 학생들과 만나는 강의명은 ‘Liberal arts through Photography-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이다. 국제대학교라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여러 나라에서 왔기에 모든 행정절차와 강의는 영어로 진행된다. 여러 나라란 몽골을 비롯한 러시아, 중국,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한국, 인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홍콩 등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다른 대학과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문화가 스며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서로 배운다는 태도이다. 서로 호감을 갖되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는 현대 국제사회에서 요구되는 자세이다. 그렇다고 이 지역 정서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다. 몽골이라는 지정학적 특징과 역사에서 우러나는 유목민적인 성격은 언제나 바닥에 녹아 있다. 지난 호에 내보낸 ‘낯선 이국에서 새 시대와 새 세대를 본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알게 된 시간적인 내용이었다면 이번에는 새 시대에 공간적인 새 지역을 얘기하고 싶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난 한 번도 몽골에 들어와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사진가로 몽골을 촬영할 일이 여러 번 있었을 뿐이다. 먼저 1990년대 초 세브란스병원에서 몽골에 연세친선병원을 세우는 과정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는 행운으로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한 기업 총수의 국빈 초청 응답 선물로 몽골의 아름다움을 사진첩(Land of Lands Mongolia)으로 만들기 위해 아내와 방문하게 되었다. 그 사진첩은 국가원수의 격에 맞는 의전을 갖추어야 해서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원본 사진으로 만들어진 수제 책이다. 그리고 2005년에는 연세대학교 120주년 기념사업회로부터 ‘희석된 학교의 건학정신을 사진으로 되살려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부합하는 기획을 준비하다가 세브란스 2회 졸업생인 이태준 열사를 찾게 되었는데 그의 활동무대가 몽골임을 어쩌랴! 그렇게 ‘이태준 선배는 왜 몽골로 갔는가’를 위해 다시 제자들과 몽골을 촬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 비정부기구유엔총회라 불리는 인터랙션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몽골 양로원에서 촬영한 사진 ‘Such wealth and such freedom’이다. 그리고 사람뿐 아니라 가축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몽골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낙타의 눈물’ 스틸을 촬영하게 되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시 파인 아트 홀과 우리나라 안양시의 알바로 시자 홀에서 연 휴먼다큐 를 준비하기 위해 몽골과 또 인연이 생겼다. 이렇게 되짚어보면 몽골에 대한 인연이 특별히 많게 보이지만, 사실 몽골만 많이 다닌 건 아니다. 따져보면 어느 나란들 그렇게 안 다녔으랴! 사진가라는 직업이 그렇게 세상을 많이 다니는 게 일이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의 시작 지역이란 얘기를 꺼내기 위한 얘기가 길어졌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나라들이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몽골보단 ‘스탄’으로 끝나는 실크로드 천산북로로 이어진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몽골만큼이나 많이 다녔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으로 연결되어 유럽과 닿는 아시아의 서쪽 끝 보스포루스 해협이 관통하는 이스탄불까지. 또 다른 길도 다녔다. 천산 아래 중국 시안(西安), 신장 위구르 자치지역 북서쪽 파미르 고원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 카라코람 하이웨이, 훈자왕국을 지나 라호르와 이슬라마바드, 그리고 인도 중동 나라들과 만나는 옛 동로마제국 터키에 닿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나라들. 그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부터 왠지 가슴이 뛰었고 지금도 맥박이 빨라진다. 이 나라들을 꿈꾸고 가까이 보기 위해 난 몽골로 왔다.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보면 이 나라들이 시작되는 곳 중 하나가 몽골인 것이다. 오늘의 몽골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내몽골의 중국과 맞닿아 있다. 러시아를 부를 때는 시베리아라는 러시아 지역 이름이 난 더 좋다. 거기엔 몽골의 홉스굴 호수와 연결된 바이칼이 있고, 우리와 얼굴과 정서가 많이 닮은 민족들이 살고 있다. 길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관심으로 퍼지며 피어난다. 앞에서 얘기한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우리를 이어줬던 길들이 소위 실크로드란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많고 어떤 길보다 큰 길이었던 실크로드는 근세 서양 문명의 휘황찬란한 빛에 오랫동안 가려졌었다. 근세 대서양과 태평양 길의 번성으로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여기 몽골에선 분명히 보인다. 그 길을 따라 큰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를 떠나 있는 한국 사진가이기에 보이는 것이다. 새 시대는 공간도 시간과 함께 드러난다. 이제 가려졌던 길이 드러나면서 그 공간의 시간도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공간의 시간은 역사로 살아난다. 역사는 서로 다른 가치가 만나 각축하는 실질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덮였던 시간이 오랠수록, 드러나는 공간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그 길과 연결된 나라들이 각자의 역사와 함께 깨어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새 세대는 그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까지 너와 나를 가르는 남의 역사에서 이제 우리를 아우르는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려고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여 잃어버린 것이 소리에 있나 하고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연극을 하며, 각자 열심이듯 나도 잃은 것이 있나, 있다면 그것을 찾아보려고 여기에서 사진작업 중이다. 실크로드의 나라들이 깨어나듯이 나도 새롭게 깨어나고 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랙션대회(NGO의 유엔총회)에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 2017-01-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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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분 좋은 릴레이
- 이른 아침 창밖에 많은 눈이 내렸다. 위에서 내려다 본 주차장은 차 한 대마다 하얀 천을 덮어 놓은 듯하다. 방송에선 연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라 한다. 그래도 차에 눈이라도 치우고 나가야겠단 생각에 빗자루와 쓸개를 갖고 내려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한쪽 옆에 차는 없는데 내차에 눈이 말끔하게 다 치워져 있는 게 아닌가. 아래를 보니 옆 차와 내 차에서 치운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옆 차 주인이 누구인진 몰라도 자신의 차 눈을 치우며 내 차까지 치워 주었나보다. 기분이 묘하다. 내 평생 이런 일은 처음이다. 뭐라 할까 횡재했다는 생각은 전혀 아니지만 절대 나뿐 기분은 아니다. 생각치도 않게 아침을 이렇게 기분 좋게 만들어주다니 고맙다. 나도 이왕 눈 치우러 나왔으니 하는 마음으로. 옆 차 눈을 치워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차 눈 치울 때 의무감보다 더 기분 좋고 신이 났다. 하는 길에 내 차 눈 치워준 것으로 생각되는 텅 빈 옆 차 눈까지 2대를 치워줬다. 기분 좋게 눈을 치워서 그런지 시간도 내 차 한 대 치울 정도에 마쳤다는 게 신기했다. 아마도 그 분들도 나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는 생각에 미소가 절로 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 늦을 걸 생각해 평소보다 일찍 나오는데 미리 겁먹고 차를 두고 나와 대중교통 이용하는 사람들 때문인지 대로는 녹아있고 밀리지 않는 차들이 쌩쌩 달린다. 나이 들어 미끄러지면 큰일 난다며 아내가 챙겨준 아이젠이 제 힘을 발휘한다. 조심 또 조심하는 사람들을 패스하며 미끄러질 염려 없으니 어깨 펴고 신나고 당당히 힘차게 걸었다. 작은 배려 하나가 선물 받은 하루에 덤 주듯 선물하나 더 받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웃는 하루가 될 것이란 예감이다.
- 2017-01-2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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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할머니의 따뜻했던 마음
-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룻밤 새 참 많은 소식이 날아와 있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서 친구들과의 이메일 주고받기는 줄었지만, 간간이 전해오는 외국에 사는 친구의 메일 안부는 고맙고 반갑다. 필자에게 필요 없는 광고메일을 삭제하면서 그중 반가운 소식을 만난다. ‘따뜻한 하루’ 라는 곳에서 보내주는 글은 그야말로 따뜻한 내용이다. 어떨 땐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이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읽다 보면 내 마음도 순수해지는 것 같고 세상은 아름다운 일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주기도 하는 고마운 소식 글이다. 오늘 받은 내용을 보고 필자는 딱 우리 친할머니를 떠올렸다. 살림을 꼼꼼하고 알뜰하게 잘하는 엄마가 있었다. 그 엄마가 요즘 들어 시장에 다녀올 때면 누렇게 시든 파를 사 왔다. 매번 시든 파를 사 오는 엄마에게 딸이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시장 길의 노점상 할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취업 때문에 서울로 가고 혼자 농사를 지었는데 요즘 몸이 아파 밭을 돌보지 못했더니 파가 다 시들었더라고 한다. 그래도 그 파를 팔아보려고 나오신 할머니를 엄마는 모른 체할 수 없어 매일 시든 파를 사 오셨다는 이야기로 따뜻한 마음씨의 엄마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글을 읽으니 옛날 대전 가양동에서 포도밭을 하셨던 친할머니가 생각난다. 가양동은 당시 대전의 변두리였지만 이제는 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대전의 요지가 되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조신한 모습이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상이셨던 우리 친할머니. 친가는 대전 변두리의 시골집으로 왼편에 나무문이 달린 부엌이 있고 부엌 안엔 방 쪽으로 부뚜막과 커다란 가마솥 밑으로 아궁이가 있어 항상 시뻘건 불길이 타고 있었다. 아궁이 앞에는 풍구라고 하는 동그란 바람 일으키는 도구도 있어 재미로 아궁이를 향해 손잡이를 돌려 바람을 불어넣는 것도 놀이의 하나였다. 부엌 옆에는 디딤돌을 딛고 올라가는 넓지 않은 툇마루가 있고 왼쪽엔 안방, 그 옆엔 건넌방으로 일자 식 농가모습이다. 그 앞으로 수천 평 되는 포도밭이 있어 나이 차가 많지 않은 막내 고모와 친구처럼 포도밭 그늘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소꿉놀이도 했던 예쁜 추억이 있다. 포도밭 속은 싱그러운 포도나무 잎사귀로 그늘이 져서 언제나 어두컴컴했다. 막내고모와 같이 탐스러운 포도송이에서 한 알씩 포도 따먹는 재미도 쏠쏠해서 웃음꽃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 할머니가 장에서 사 오시는 사과나 채소는 항상 찌그러지고 못생겨서 이상하게 생각되어 여쭤봤더니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과일이나 채소 파는 사람들이 좋은 모양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도록 할머니는 일부러 못생기고 안 좋은 과일을 골라 오신다는 것이다. 그땐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못난 과일이 먹기 싫어 그런 걸 골라 오신 할머니가 바보 같아 보였다. 가난한 채소장수를 배려하는 마음이었던 걸 후에야 알고 할머니의 깊은 마음에 가슴이 따뜻했다. 필자는 요즘도 시장이나 마트에서 과일을 고를 땐 어디 흠집이라도 없는지, 좀 더 크고 보기 좋은 걸 고르려고 눈에 불을 켠다. 그러다가 가끔은 못난 과일을 사 오셨던 친할머니를 생각하고 미소를 떠올린다. 오늘 읽은 시든 파를 사 온 엄마의 이야기가 그 옛날 아련한 추억과 함께 할머니를 기억하게 해 주어 참으로 고맙다.
- 2017-01-20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