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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초등하교 전학] (17) 남녀평등과 편견 없음
- 아이들은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다! 로 교육을 받는 거다. 못을 박는 건 남자가 해야 된다던지, 힘든 일들은 남자가 하도록 시킨다던지 하는 일이 없었다, 남녀 구분 없이 내게 맡겨진 건 누구나 다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자라고 못하게 하는 일은 자존심 문제였다. 밥 하는 일, 바느질 하는 일을 여자들에게만 가르치는 게 아니었고, 급식하는 일도 돌아가면서 순번대로 밥을 푸거나 머리에 급식 장 모자를 쓰고 누구나 몇 번을 돌아가며 하게끔 해서 저절로 책임감을 몸에 익히도록 했고 여자니까 봐주는 일이란 절대 없었다. 자기의 몫은 자기가 꼭 해내는 어른수업을 제대로 하게 하는 교육이었다. 그런 모든 행동들을 요이 주시해 가며 관찰해 가는 것이 담임이 하는 일이었다. 어머니보다 더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어찌나 책임감이 강한지 어떤 때는 엄마인 나보다 더 우리 아이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것에 놀라곤 했었다. 둘째가 보기와는 딴판으로 약간의 덜렁 끼가 있다는 것도 선생님 말씀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운동은 무슨 종목이든지 어떤 아이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수영을 시켜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까지 모두 선생님의 눈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굉장한 관찰력과 세심한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 아이들은 담임을 잘 만나 책임감이 강해지고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힘을 저절로 잘 키워갔다. 어쨌든 모든 아이들을 남녀라는 걸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았고 모든 일을 누구나 다 할 수 있게 지도했고 그런 낌새를 절대 갖지 않도록 했다. 무슨 일이든지 남자도 여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익히도록 지도했다. 여자라 못해 라는 포기는 용납되지 않았다. 정말 절대로 그런 마음은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갖게 하는 기회는 없었다. 이 세상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이었다. 또 편견도 용서하지 않았다. ‘저 애는 못해’ 가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너도 할 수 있다 이었고, 하도록 서로 도왔고 하고나면 칭찬을 해 주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같이 해나갈 수 있도록 협심하는 힘을 키웠다. 같은 반이면 모두가 함께 해내서 편견 없이 서로 믿고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키워가는 교육이 좋았다. 뜻을 함께해서 협력하는 살아있는 교육이 좋았다. 생각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교육인 거 같았다. 한 사람이라도 해내지 못하면 다른 팀에게 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이 힘을 합해야 하는 산교육이었다. 좋은 초등교육 과정이었다. 여긴 선물을 선생님께 가져오면 안 된다. 처음 전학할 때 교장 선생님께 우리나라 고유의 강강술래가 수 놓여 있는 작은 액자를 선물했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며 황송하게 받는데 내가 더 부끄러워졌었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고른 건데... 담임한테는 거실용 덧신을 드렸다. 외국에서 온 분이라 받는 거라 했다. 거긴 그 옛날부터 ‘김영란 법’ 이 시행되고 있었나? 부다. ‘선물은 그 사람 마음의 정성이다!’ 라는 걸 진심으로 느끼게 해 주는 감사할 줄 아는 분들이었다. 고맙게 받아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이 맞았다.
- 2016-10-1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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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초등학교 전학] (8) 우리와 다른 교육제도
- 아이들은 전혀 문제없이 잘 다녀 주었다. 담임선생님의 배려도 아주 각별했다. 초등학교인데도 미술과 공예가 합친 일어로 ‘즈고~’라고 발음하는 과목은 교실을 옮겨서 수업을 받는다는 것이 특별했다. 선생님도 담임이 아니란다. 처음 목공예라는 수업을 교실을 옮겨했다며 신기하고 재미있었다며 큰 애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그 교실엔 전기로 나무를 잘라서 었다. 전기 톱 같은 기계가 다 준비되어 있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고 한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을 계속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멋진 집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그 시간을 무척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층계도 만들고 다락방도 꾸밀 거라며...전기기계라는 말에 걱정이 약간 앞섰지만 선생님과 아이를 믿어버리고 꾹 참았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남자 아이들도 편견 없이 바느질을 위시해서 혼자라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전부 배우는 것이었다. 자기 주변에 필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들이 바느질을 하고 다림질을 하는 건 군대 가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정이라는 과목이 있고 본인이 해야 되는 것은 남녀 불문하고 모두 배우도록 교육과정이 짜여 있어서 자기가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면 모든 것들을 예를 들면 바느질과 밥하기, 빨래하기 등등이다. 물건을 넣는 주머니라든가 지갑, 손수건, 앞치마 만들기, 과자나 케이크, 밥 짓기, 된장국, 샐러드 만들기, 운동화 빨기, 양말 빨기 등등... 자기가 시장에 가서 헝겊도 고르고 아이디어도 생각해 가면서 준비해가면 바느질 하는 방법을 아주 세심하게 잘 가르쳐 주는 것이다. 취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작품은 현저하게 달라지는 걸 확연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몸이 약하고 골골해도 그 아이는 공부에 목숨 걸고 하며, 뛰어 놀기에 바쁜 아이들은 운동으로, 얌전하게 바느질을 좋아하는 아이는 디자이너의 길, 밥하기에 신이 난 아이들은 음식점... 직업이 거의 정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들에게 물어보니 일본은 중학교 까지 의무교육이며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빠짐없이 이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고 이 교육을 다 받고나면 어느 곳에든 즉 아프리카 정글 속에 혼자 살게 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자신이 할 수 있도록, 살아 갈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는 전인교육 체제라 그렇단다. 대답을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초등교육에서는 그 아이들의 앞으로 나갈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란다. 공부를 못해도 뭔가 잘 하는 것이 하나는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걸 발견해 주고 발굴해 키워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다는 목적이 있다는... 정말 얄미운 교육정책 아닌가? 일본에도 수많은 학원들이 있다, 태어나면서 와세다 코스냐, 케이요 코스냐가 정해서 그 학원 코스를 무조건 따라 학교 수업은 저리가라 하고 학원 방침대로만 공부하는 불쌍한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초등학교 수업에만 충실하다. 선생님은 수학은 매일 빵점이라도 작문은 최고라는 걸 모든 아이들이 알기 때문에 그 시간만은 그 아이에게 관심과 눈길을 끌게끔 발표도 하게하고 칭찬도 아낌없이 해주며 기를 살려 주는데 노력하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자기의 특별한 점을 알고 깨닫게 해서 주눅 들지 않게 배려하는 수업을 한단다. 그런데도 왕따 문제가 심각한데... 절대 남 따라 안하는 부모들의 정신에 감탄~ 너무 부러운 일들이었다.
- 2016-09-1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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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 우리옛돌박물관 실내 전시실
- 웃는 얼굴, 근엄한 얼굴, 크고 작은 석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쩌면 100년도 더 넘는 시간동안 비바람을 맞고 어디엔가 쓰러져 있던 석상. 사람의 욕심에 끌려 바다 건너갔다 돌아온 고단한 돌들의 쉼터가 서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우리옛돌박물관’이다. 우리옛돌박물관은 2000년 경기도 용인에 문을 열었던 세중옛돌박물관을 서울 성북구로 옮겨와 재개관한 것이다. 이곳은 이사장인 천신일씨가 40여 년간 찾아 모으고 일본에서 환수해 온 우리의 석상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미술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우리네 어머니들의 정성이 담긴 자수 작품 등도 만나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석상은 크게 4종류가 있다. 장군, 문인, 동자, 벅수다. 장군, 문인, 동자상은 묘지를 지키는 석상이었고,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일종의 돌로 만든 장승이었다. 1층 1. 환수 유물관 환수 유물관은 천신일 이사장이 환수해 온 70점의 유물 중 문인석 47점을 전시했다. 일본에 약탈당하고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 보니까 없어진 것이 많다. 짝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대로 전시했다. 문인석이나 장군석은 키에 따라서 묘주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키가 170~180cm정도는 왕릉 혹은 정일품의 묘 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금강역사 사찰 앞에 한 쌍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흥금강역사’라고 부른다. 박물관에 있는 것은 ‘흥금강역사’다. ‘아’와 ‘흥’은 산스크리트어의 AtoZ와 같은 의미. 모든 불경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며 한 쌍의 ‘아흥금강역사’가 사찰을 지켜왔다. 3. 무병장수의 길 1층 오른쪽에는 걸어서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무병장수의 길이 조성돼 있다. 길상을 상징하는 양과 물고기를 낮은 층에 배치했고 올라가는 내내 다복이나 장수 등을 비는 석상들을 배치해 놓았다. 이 외에 여인상, 장명등이 전시돼 있다. 2층 1. 장군석 우리옛돌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다. 화강암임에도 불구하고 눈썹이 날리는 터럭의 모양 등이 잘 표현됐다. 석조유물의 특징은 3등신이다. 3등신이 정확할수록 가치가 높다. 도깨비 문양이 칼과 양 어깨에 있다. 옛날 석공들은 도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 모양을 비슷하게 잘 만들었다는 것은 기술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동자석과 벅수 동자석과 벅수가 발전한 곳은 제주도다. 동자석은 원래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했지만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런데 제주도는 섬이고 전파가 되고 나서 거기서는 계속 발전했다. 무덤 앞에서 주인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했고 장군과 문인이 있는 무덤에서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장군, 문인, 동자가 석공이 조각을 한 것이라면 벅수는 손재주가 있거나 여행을 좀 해봤다 하는 사람들이 직접 민간에서 만든 작품이다. 장승의 돌 버전이다. 암수가 있다. 노인 형상을 한 벅수는 장수와 지혜를 상징하고 마을 사람들이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에서 만들어졌다. 3. 카페테리아 카페테리아 쪽으로는 한국 여성들의 정성이 깃든 자수 작품들이 전시돼있다. 작은 골무에서부터 보자기, 바느질 용구, 주머니 등이 있다. 3층 1. 양이 조선시대 길상이었던 이유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되기 전에 양 꿈을 꿨다고 한다. 꿈에 양을 잡으려고 양의 뿔을 잡았는데 뿔이 떨어져 나갔다, 꼬리도 잡았지만 꼬리도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꿈이 이상해 무학대사에게 물어 보니 왕이 될 꿈이라고 했다. 그 이유가 양(羊)에서 뿔이 빠지고 꼬리가 빠지면 왕이 된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유난히 양을 조각한 석조 유물들이 많다. 2. 3층 기획 전시실 근·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3층은 바깥 전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테라스로 연결돼 있다. 날씨가 맑으면 제2 롯데월드도 보일 만큼 시야가 탁 트여 있다. 전시안내 전시(도슨트) 설명 오전 11시, 오후 2시, 3시 (50~60분 정도 소요) 멤버십카드 연회비 1만원 혜택 1년간 전시 무료 관람, 박물관 소식 메일링 서비스 가입문의 - KOSA@ksmuseum.com - 안내데스크에서 현장 가입할 수 있다. - ‘문화가 있는 날’은 매월 마지막 수요일.
- 2016-08-3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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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 몸이 아프면 슬프기 짝이 없다. 필자는 감정이 많아 그런지 몸이 약해지면 눈물이 쏟아진다. 그러나 조용히 반성도 한다. 또 초심을 잃고 욕심을 부려, 가장 중요한 건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유 중에 가장 첫 번째가 건강 문제였다. 갱년기가 오면서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건강을 급격히 무너트렸다. 세탁소에서 바느질 만을 한다는 것이 영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오랜 세월, 수고한 덕분에 목과 허리에 약간의 디스크도 얻었다. 그로 인해 가끔씩은 머리 병을 호되게 앓는다. 머리가 아프면 구토도 한다. 결국 몸은 녹초가 된다. 다행히도 건강을 다 잃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깊은 체험이 있었기에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점점 더 악화되는 정신건강은 몸을 상하게 만들었고, 드디어 어느 날에는 부나 명예보다는 건강만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위대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필자도 어제는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 영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책상에 오래 앉아 너무 무리를 했나 싶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큰딸이 처방해 준 항생제 덕분에 조금 덜 한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살 것 같아 꼼지락거렸더니 다시 구토를 시작했다. 구토가 시작되면 남편은 초긴장을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점심 먹은 것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결국 병원을 찾아 수액을 맞고 두어 시간을 낭비한 끝에 호전이 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후유증으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죽을 것만 같았는데 조금 살만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곁에 붙어서 안절부절못하는 남편이 있으니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아프다니 절절매며 옆에서 간호를 해주는 것이, 그저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에 또 눈시울이 젖어왔다. 평상시에는 귀찮기만 하던 남편이, 몸이 아파 나약해지니 그저 세상에 최고라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남편의 두 손을 잡아 보았다. 미국에서 살 때의 이야기이다. 미국은 병원비가 상당히 비쌌지만, 어느 날인가 몸이 너무 안 좋아 병원을 찾아갔다. 우울증 시초라며 약을 지어준다. 우울증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남편은 필자와 함께 등산 다니기를 시작했다. 다른 세탁소들은 아침 7시면 정확하게 문을 열었지만, 남편은 조금 늦게 8시에 가게 문을 열었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필자와 산에 다니는 것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등산을 고집한 남편이 더없이 필자를 배려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필자는 한국에 돌아와, 아직도 아침 일찍 눈을 뜨면 깜짝 깜 짝 놀래곤 한다. 미국이 아닌 한국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안 난다. 미국에서의 삶은 오랜 세월을 지내 온, 제2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침마다 눈을 뜨면, 아파트 베란다 앞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고국의 눈부신 햇살과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은 또 하나의 행복이었다. 더구나 내 나라에 돌아와 자식들과 함께하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기쁨인지 모른다. 마음먹고 생각하기에 따라 행복은 지천에 깔려있었다. 또한 글쓰기로 필자의 마음을 쏟아내니 그 시간에 행복은 넘쳐흐른다. 지나간 일들의 부질없는 욕심으로 집착하기보다는, 지금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깊은 감사를 하니 부자가 따로 없는 것 같았다. 엊그제는 잘 아는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필자를 위해 김치를 담아놓으셨다고 했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대신하는 것 같아 또 다 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를 담아 보지 않아, 방법을 모르는 필자를 위해 형님은 늘 마음을 베풀어주신다. 그날따라 몸이 많이 무거웠지만, 형님의 마음에 비하면 견딜만하다는 생각에, 경기도 수원으로 달려가는 길은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물론 한번 다녀오면 경비는 더 들고 마켓에서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많이 나간다. 한국으로 돌아와 살다 보니,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은지, 모든 것들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 하 나 사소한 것들에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욕심보다는 감사함으로 채워진 긍정의 마음은 필자의 얼굴을 밝게 해준다. 어쩌면 건강을 지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의 표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또 욕심은 건강만 해칠뿐, 허망함 밖에 없다는 초심을 늘 간직해야만 한다. 살아가면서 늘, 아주 작은 것들에도 깊이 감사를 느끼며, 항상 그 마음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
- 2016-08-1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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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타-자신만의 코디법] 외국처럼 우리 시니어도 화끈한 코디를
- 어렸을 적 한땀 한땀 바느질해 곱디고운 옷을 지어 인형에게 입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종이옷 만들어 입힐 때는 예쁜 무늬를 그려 넣고 색칠해가며 한껏 재주를 피워댔다, 특히 헝겊으로 인형 옷을 지을 때는 어머니가 모아 놓은 일본 잡지들을 꺼내 신식 스타일의 원피스를 만드느라 고심했었다. 길에 다니다가 바람에 굴러다니는 잡지 쪼가리가 패션에 관한 거라면 무조건 집으로 가져와 깨끗하게 걸레로 닦아서 모았다. 그 지저분한 것들을 결혼해서도 이사할 적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고이 모셔 뒀는데 잡지 모델같이 변신하는 건 단지 꿈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60세 되었을 때 죄다 태워버렸다. 이 잡지 태우면서 얼마나 아까웠던지 모른다. 마음 비우기는 그리 어려운 것이다. 결혼하고서도 눈은 묘한 것들을 찾으려 반짝였다. 외국에라도 나가면 발발거리며 여자들의 차림에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1970년대에 영국에 갔다가 알아낸 것은 호호 할머니가 돼도 매니큐어 짙게 칠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다이애나비처럼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에 예쁜 꽃 모자를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시니어가 됐을 때 차림을 그려가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 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아무리 나이 먹어도 긴 머리를 늘어뜨릴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런 시니어의 모습을 교훈 삼아 발목 걸이까지 자신 있게 걸고 다녔다. 요즘 가끔 젊은 여성들이 하고 다니는 발목걸이를 무척 오래전부터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1995년 아르헨티나에서는 탱고를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할랑대는 원피스를 입은 시니어들에게 꽂혔다. 이어 1996년엔 스페인에서 한 달 보름을 지냈는데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모피를 걸친 채 앞을 트고 다니는 멋쟁이 시니어들에 반했다. 그리고 획기적인 쫄바지에 푹 빠져 귀여운 판다 곰 무늬가 들어간 쫄과 검은색 쫄을 두 개나 사게 되었고 지금까지 즐겨 입는다. 한국에는 언젠가 대유행했지만 그 당시엔 쫄 바지가 없었다. 필자가 쫄바지의 원조였던 셈이다. 일본에서 1년간 일할 기회가 있었던 어느 아줌마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큰 소리로 “일본 여성은 늙어도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모른다. 보는 내 눈이 황홀해질 정도다”라고 했다. 필자는 동의의 의미로 깔깔 웃었다. 그가 일본 시니어 여성이 예쁘다고 한 것은 진짜 겉모습이 예뻐서가 아니다. 그들의 패션이 그들을 눈부시게 만든 것이다. 필자도 이 아줌마처럼 일본에서 시니어 여성들의 패션에 눈이 갔다. 시니어가 되면 아이들과 같이 마음이 순진하고 귀여워진다니까 차림새도 밝고 깔끔하게 챙겨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아주 눈에 나지 않는 한 인형처럼 곱상하게 차려입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한국 아줌마의 전형처럼 돼버린 뽀글파마는 거부하는 대신 긴 생머리를 한다. 너무나도 파마를 안 해서 길이 안 든 탓에 이젠 파마도 안 나온다. 다만 긴 생머리는 바람 부는 날에는 흩어져 산발이 돼 버리니 모자도 꼭 가지고 다니며 쓴다. 프랑스 파리 거리에서 자주 만나는 바게트 한 봉지를 끼고도 끼리낌 없게 걷는 자신만만함을 시니어들도 배워야 한다.
- 2016-08-0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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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캐주얼과 메이크업으로 이미지 업
- 매일 매일 옷을 입고 살고 있지만 때마다 적절히 센스있게 옷을 매칭해서 입는다는 것은 어쩌면 의상을 디자인 하는 작업보다 크게 쉽지도 않은 것 같다.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어도 젊었을 때는 무난히 소화할수 있었지만 나이들어 체형도 변하고 이미지도 변하다 보니 좋아하는 옷이라고 무작정 선호할 수는 없다. 누구나 젊었을 때는 날렵한 투피스를 입고 자신의 여성스러움에 스스로 도취해본 경험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는 가장 씸플한 선으로 보이쉬하게 표현된 자신에게 충실하여 자유로운 영혼의 흉내를 내어본 경험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날부터인가 투피스라는 정장을 입고 거울앞에 서면 40대의 아름답게 완숙했던 여인은 온데간데 없고 거울속에 서있는 완고한 교장선생님같은 딱딱한 이미지를 보고 말없이 벗어놓고 다시 최대한 부드럽게 보이는 케쥬얼의 의상을 선택하게 된다. 의상디자이너들은 색상, 질감, 트랜드 등의 조합이 한눈에 스쳐야만 전체 실루엣을 잡을수 있고 디테일의 기술이 따라주어야지 그려졌던 디자인이 성공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옷을 입는 사람들은 바느질같은 기술과 트랜드의 감각은 디자이너 만큼 없어도 되지만 색상과 질감의 선택만은 의상 코디의 기본사항이다. 옷입기에 대해서 그런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특히 요즘같은 더운 여름에는 거울앞에서 옷을 고르거나 외출준비도 점점 귀찮아 지려고 한다. 정부는 2021년까지 2.000억원을 투자해서 의류를 비롯한 다양한 패션, 소비재 아이템을 프랑스의 대표적인 브랜드 루이비통급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육성하여 소비재분야 상품을 수출주력산업으로 재편하겠다고 밝히면서 디자인 고급화의 한방편으로 ‘시니어 자문단’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하는 뉴스를 접하고 같은 시니어로 살면서 자문단까지는 못해도 나자신에게라도 충실하자는 자각심은 가져보았다. 필자는 자신을 표현하는 옷입기나 메이크업같은 장르도 미술의 한부분같은 예술행위라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이 포인트를 두는 부분이 품위나 성숙함 또는 명랑하거나 밝음등등의 이미지가 있겠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살아왔던 이미지가 숨길수 없이 표현된다는 것이 시니어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니어의 나이에는 모든 작은 움직임이나 선택에도 자신의 철학이 표현된다는 진리를 잊고 살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의 핵심이면서 최고의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의 말을 잠깐 컨닝해야할 것 같다. 피카소는 “예술이라는 행위는 불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없애는 작업”이라고 규정지었다. 이 이론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는가는 자신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전문가의 생각을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 2016-08-0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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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7) 아메리칸드림 1*
- 미국 세탁소는 오후 7시까지 꼬빡 12시간 영업한다. 전 지역 어느 곳에서나 거의 똑같다. 드디어 이민생활 3년 만에 국제적 해변도시 산타모니카에 작은 클리너(세탁소)를 갖게 되었다. 필자의 가족은 커다란 꿈이라도 잡은 듯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것은 첫 번째 아메리칸드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100년이 넘은 건물, 세탁소 옆에는 이란 마켓과 침대 파는 곳이었다. 철창으로 된 세탁소 뒷문은 오랜 세월에 녹이 슬어 있었다. 50여 년 전통의 세탁소 철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웅장한 각종 기계들이 새 주인을 맞으며 우뚝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낡고 수명을 다한 것들도 눈에 띄었다. 필자는 미국의 세탁소에는 낯이 설었고, 시커먼 바닥과 높은 천장에는 몇 십 년 묵은 먼지들이 너덜너덜 달려있었다. 마치 납량 영화 속 창고 같아 대대적인 청소를 시작했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먹을 것들을 준비하고 6시쯤 집에서 출발을 한다. 세탁소까지는 약 33마일로 40분 거리에 있었고, 405번 프리 웨이를 타고 산타모니카로 달려가는 새벽 공기는 아침을 산뜻하게 열어주었다. 신나는 팝송을 틀어놓고 남편과 함께 가는 길은 드림(꿈)만 같았다. 미국의 프리웨이는 부지런한 차량들로 이른 새벽부터 삶을 향해 거대한 불바다를 이룬다. 영락없이 6시 40분, 중고차는 덜덜거리며 세탁소에 도착했다. 미국의 몰(상가)들은 뒷문 쪽에 대체로 주차장이 마련되어있었다. 철창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가 남편은 제일 먼저 전기 불 스위치를 올리고 가장 중요한 보일러를 켠다. 하루 시작을 알리는 웅~소리와 각종의 기계들이 뒤섞여 묘한 소리가 신고식을 한다. 진한 커피와 함께 초보 이민자 필자에게 남편은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아침 7시가 되면 뜨거운 다림질을 해대는 멕시칸 2명이 도착하고 9시면 바느질 아줌마가 출근을 한다. 금발 머리 첫 손님과 남편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미국 사람들은 남녀가 수다 떠는 것을 참 좋아했다. 남편은 전날 들어온 각종 세탁물에 손님마다 제각각 다른 색깔로 번호 딱지 붙이는 작업을 지시했다. 왜냐하면 손님들 옷들이 서로 뒤섞이면 찾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얼룩 부위에는 빨간색 테이프를 붙여 그 위치를 선명하게 표시해주고, 옷 색깔 별로 분리해서 세탁 장소로 이동을 한다. 남편은 스팀 건(총)으로 우선 얼룩을 빼주고는 커다란 드라이 기계 통속으로 던져 버렸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과 수많은 빨래들 속에서 필자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도대체 남의 나라에서 때묻은 옷에 딱지를 붙이는 삶이 아무리 생각해도 꿈같지는 않았다. 클리너(세탁소)란 온갖 더러움으로 굴러 온 삶의 얼룩들을 깨끗하게 빨아주는 직업이다. 그야말로 3D 직업 중 하나로 지극 정성으로 노동을 투자해야만 달러로 연결된다. 옷 구석구석에 세심한 노력과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아주 정직한 비즈니스였다. 아무리 곰곰이 따져봐도 결코 아메리칸드림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 남편은 빨리하라고 독촉을 했다. 세세하게 주머니 속까지 먼지 하나 없이 털어내라고 하더니 느리다고 보채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 온몸이 쑤셔왔다. 남편은 필자가 오기 전부터 단단히 당부를 했었다. 미국은 노동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며 몇 번을 확인해왔고, 필자는 알았다고 했지만 아무 개념이 없이 가족과 함께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태어나 생전 처음으로 피땀 흘리는 노동의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 날, 대형 보일러가 터졌다. 세탁소 모든 작업이 중단되었고 남편은 이리저리 뛰더니 거금을 들여 메카닉(기계 고치는 사람)을 불렀다. 그는 이민생활 30년 동안 아직도 떠돌이 생활로 미국 전 지역을 다닌다며, 필자 부부가 세탁소 하는 것을 엄청 부러워했다. 그는 필자에게 행복한 줄 알라며 충고도 했다. 자기는 방방곡곡 힘들게 일해도 수입은 겨우 먹고 살 지경이라며 푸념을 해댔다. 삶의 질을 찾아온 곳,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왔지만 결코 남들이 말하는 아메리칸드림은 실감 나지 않았다. 육체적 노동이 피부로 익숙해지기까지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필자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정신적 안정감의 결함이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 속에서는 저녁이면 초주검 되어 쓰러지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일어나야만 낯선 곳에서는 살아갈 수가 있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처음 와서 1년은 지옥 생활이고 2년쯤 되면 숨을 쉴 수가 있고 3년쯤 돼야 조금씩 미국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적어도 5년은 지나야 적응이 되면서 한국 생각이 덜 난다고 위로를 했다. 이민 생활에도 공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과 싸워가며 견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결국 며칠을 쓰러져 약에 의존했다. 병원은 한국보다 10배는 비싸서 갈 수도 없었다. 급기야 우울증까지 겹쳐오며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필자는 어스름밤이 찾아오면 아파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국을 향해 울고 있었다. 남들이 말하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은 엄청난 과정을 겪어내야만 이룰 수가 있었다. 세탁소를 갖게 된 행복은 꿈을 향한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필자는 하루하루 녹초가 되어 병자가 되고 있었고,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피나는 노력을 그 필수조건으로 요하고 있었다.
- 2016-07-0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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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강추하는 아름다운 사람
- 필자의 이민 시기는 1980년대 초반. 이민 가기 전에 이민1세가 살아야 할 삶의 행로가 불보 듯했다. 이미 필자보다 먼저 이민한 언니로부터 기능도 익혀오지 말고 노동력이나 강화하여 오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래서 필자가 한 이민 준비는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밭매기 봉사 두어 달 한 것이었다. 흙과 함께 잔뼈가 굵은 농군의 아내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땅거미 뉘엿뉘엿 긴 그림자 드리우는 저녁까지 보수도 없이 긴 하루를 농사일 했다 보수로 받은 신선한 야채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런 알짜의 이민정보와 마음의 준비로 미국 땅을 밟았건만 여전히 복병은 있었다. 취미로도 하지 않았던 바느질을 해야 하는 세탁소를 인수했다. 드랍 오프(drop off)다. 세탁은 자체 처리하지 않고 옷수선만 하는 가게인데 주수입원이 옷수선이다.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필자를 전 주인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준 아이디어는 “ 처음에는 쉬운 것만 소화하고 어려운 것은 반반 나누는 외부로 보내세요”다 필자도 걱정하였고 주위의 사람들도 걱정하였던 그 어려운 일이 들어왔다. 한 눈으로 봐도 고급여성 수트인데 소매의 끝을 완전히 디자인 바꾸는 일이다. 주문받는 순간부터 가슴이 벌렁거려 그 일을 밀어내고 싶었다. 가격 높게 불러 손님 쫓아내리라 생각하고 높은 가격을 불렀건만 손님이 쾌히 받아들인다. “고급이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수트이니까 일이나 잘해줘. 왕창 세일해서 400달러야” 한다. 할 수 없이 납품일을 최대한 멀찌감치 잡았다. 혹 손님이 그 시간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필자에게 맡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었다. 여전히 좋단다. 두 주 약속의 시간동안 필자는 늘 수트만 생각하였다. '할까, 말까, 외부로 보낼까'를 왔다 갔다 했다. 400달러 공탁 걸고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실수하면 변상하겠다. 인명이 왔다갔다하는 일도 아닌데 위험부담 줄이려는 소극적인 자세로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다른 일 다 마쳐놓고 하루를 잡았다. 기도하는 자세로 옷을 손에 잡았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면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온 몸과 마음을 다한 정성이지만 역시 기술적인 작업이라 메뚜기 뛰어봤자의 결과다. 약속한 날 손님이 왔고 필자는 감히 손님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보지 않아도 손님의 실망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할 게 뻔했다. 형량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그 짧은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한참 만에 손님은 “탱큐”라는 마지못해 하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5달러의 팁을 놓고 옷을 낚아채 듯 내 가게를 떠났다. 그 손님의 얼굴을 다시 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한 달 후에 그 손님은 필자를 찾았고 단골이 되었다 6개월 후 어느 날. “숙, 너 내 옷 망친 거 아니? 그날 나는 너를 쥐어박고 싶었다. 그날 네가 이민 초년생이란 걸 알 수 있었기에……. 내 부모가 처음 이태리에서 미국 왔을 때의 어려움이 생각나 너에게 불평을 할 수가 없었지. 잘 버티라고 힘주려고 팁을 놓고 갔다. 하지만 너 아주 스마트하다. 겨우 여섯 달 짧은 기간에 좋은 심스트레스(seam stress)가 되었네! 이제부터는 내 친구들 데리고 올게.” 이 일방적인 약속은 철저히 지켜졌다. 캐더린이 데리고 온 가족과 친구들은 오랜 동안 단골손님이었다. 작은 몸집의 줄담배인 캐더린은 필자 가슴에 온정이라는 작은 불을 켜들고 있다.
- 2016-06-2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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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실개천의 삶
-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이 무척 쉬웠다는 것이다. 돌 지나고 6개월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는데 우후죽순의 지도자들과 새로운 정치ㆍ사회 조류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였다. 우선 산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서민의 삶은 더 어렵고 고달팠다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있다. 특히 대구의 10.1사건 때는 좌파의 폭력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취학 전 여자 아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두 딸 아이에 필자까지 네 명의 자녀들이 일터 없는 어머니에게 맡겨진 부양가족이었다. 대구 중심가에서도 더러더러 초가지붕이 보이는 시절 기와집이 필자 집이라 가난에 대한 물질적인 아픔은 없다. 필자의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은 아니었고 문화 욕구에 대한 가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낀다, 절약한다, 쓰지 않는다는 방어소비에 집착했다. 세금, 교육비, 식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팡이는 자녀를 지켜내야 하는 모성본능과 체면과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 안 드는 놀이로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돌 주워 하는 공기놀이, 반들거리는 흙마당에 가느다란 선을 귿고 하는 땅뺏기, 선교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탄력성 있는 공으로 삼박자 노래 부르며 다양한 모양으로 공차기 등이었다. 다만 책에는 아끼지 않아 집에 책이 풍부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화책은 물론 소설책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소공자’, ‘소공녀 같은 외국의 책들도 그 무렵에 읽은 것 같다. 책 내용 가운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지만 독서는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 상자이었다. 언니는 ‘태양계’란 이름의 동네 구멍가게 겸 책대여점에서 부지런히 신간잡지를 빌려왔다. 필자는 이것도 열심히 탐독했다. 10대를 위한 잡지 ‘학원’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연재된 조은파의 ‘얄개전’은 익살스런 행동이 얼마나 기발했던지 지금도 흥분이 느껴진다. 익살의 세상이 휴전 직후의 가난과 닫힌 사회에 답답해 하는 청소년에게 스트레스 분출구 역할을 했다. 이상스러운건 대구 시절 어떻게 넉넉한 책이 주어졌던가 하는 것이다. 한참 성장기의 아동이었을 때 세 끼니의 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이채로운 먹거리에 대한 허기가 가끔 기억나지만 놀이와 독서에 대한 허기는 없었다는 기억이다. 특히 필자 집은 새 책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돈으로 책을 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격변의 시기다. 3.15부정선거를 고등학교 1학교, 4.19혁명을 고등학교 2학년, 5.16군사쿠데타를 고등학교 3학년에 맞은 것이다. 특 ,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일사천리로 대학입시제도를 무 토막내듯 확 바꾸어버렸다. 국가고시 점수를 개별 대학 입시에 100% 반영하고 각 대학은 오로지 체력장과 면접만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제도 변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체력장의 한 과목에서 완전히 빵점을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대구 한 대학의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서울 연세대학으로 튀었다. 약학과 팔촌쯤 되는 화학과였다. 필자는 18년 동안 내륙의 소도시 대구서 살았다. 어디 여행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처에 대한 선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원래 가족과 함께 대구의 교회를 다녔는데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교회를 옮기자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YMCA에서 하는 ‘대학생을 위한 기독교 사상 강좌’를 들었고 일요일에는 연세대학 교회를 출석했다. 당시 필자는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가슴 벌렁거렸다. 기독교가 기성복이 아닌 시대별 노력과 아픔 및 정서를 담아 걸어왔다는 것, 큰 테두리에서 문화와 사회 및 역사를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해는 인간,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을 안겾줬다. 또 종교와 인간관계,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류 복합체로서의 인간, 생각하는 존재로의 인간 등 참으로 많은 분야의 인문학적인 호기심도 갖게 했다. 전공이 화학인데 인문학에 홀딱 반하였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또 전공을 바꿀 수도 없다. 이미 약학과에서 화학과로 한 번 바꿔서다. 덕분에 대학의 전공 성적표는 엉망이다. 이 성적표 때문에 졸업 후 20년 동안 대학을 말하지 않는 결백증이 있었다. 71년 4월 5일 식목일 공휴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80년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고온 건조한 나라 수단은 정부의 정체가 공산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산업의 불모지대다. 수단은 남북한 공관이 공존하는 나라다. 포장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소나 양같은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을 쉽게 보는데 단 시간에 건조되어 부패하지 않고 박제가 된 모양을 본다. 중동에서 제왕이라도 죽으면 그날로 매장하는 문화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척박한 땅, 공기 중에도 물기라고는 없는 갈증의 땅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체를 볼 수 있는데 생명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였다, 생명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다. 사람은 태양열에 지치고, 영국의 지배 200년 동안 문명인의 안면무치 이기심에 착취당하면서 비옥한 땅이 물을 만나지 못하여 석녀처럼 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가난으로 기력이 없다 아이들의 손으로 밀쳐도 무너질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무슬림의 나라에서 들개들은 늘씬하게 잘난 모양이고 기름기까지 돈다. 떼 지어 다니는데 들개 떼가 수단인보다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습게도 한 대접의 물로 목욕하는 물이 귀한 나라, 상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 필자는 공짜로 미터기 없는 전기 물 풍족히 쓸 수 있었다. 핫(hut)이라는 원두막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에서 필자의 사택은 큰 저택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필자 아이들은 수단에서 살았던 집이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태리 가구를 갖추고, 에어컨이 방마다 있으며, 냉장고에 냉동기까지 구비한 그 사택은 원주민의 생활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환경이었다. 필자가 근무한 곳은 나일의 지류인 백나일의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들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설탕까지 생산하는 그 나라 기간산업체였다. 인공 수로에서 쉽게 낚시한 물고기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수단인들도 낚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단인들의 극성스런 낚시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나니 수로에는 거의 고기가 낚여지지를 않았다. 무계획 노획이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이어 미국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우선 유학이 아니고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부터 필자 속은 무척 상했다. 그리고 미국은 필자 꿈 실현의 땅이 아닌 생존의 땅으로 전락했다. 선배들이 버리라는 학력, 경력, 배경이 낯섦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도 알게 됐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노동의 미숙함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바느질이 필수인 세탁소를 인수했을 때도 필자는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인계한 전 주인이 어쩌려고 무조건 가게를 사느냐고 더 걱정을 하였다. 기술을 쉽게 익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데려갔다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체험기가 필자를 독려했다. 하지 못하면 죽으리로다란 명제 앞에 누군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두 아이들의 똘망거리는 눈망울도 필자의 용기에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주민의 95%가 백인인 부촌에 세탁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 남자 단골손님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호적이었다. 필자 글씨체와 암산 실력이 학력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게서 “네 나라에서는 화이트칼라 잡을 가졌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남편과 큰 소리로 다툼하는 현장을 본 이 손님은 남편에게 “ 내 아내는 일하지 않으면서 가사 도우미를 두는데 하드워킹 아내에게 무얼 불평하느냐”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교육 수준이 높든 아니든 미국 남자는 여자와의 다툼은 꺼렸다.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신사문화를 이루는 근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일만 하자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침 일어날 때의 피로는 첫 손님이 내미는 달러에 확 가셨다. 난산의 아이도 돈을 보이면 달려 나온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1994년 남편이 준비도 이별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시폰처럼 흰 눈이 투명한 3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기상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 목이 깔깔하다고 물 가지러 간 사이 심장마비의 공격을 받고 평화의 나라로 갔다. 필자는 남들의 두 배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으니 10년 미리 은퇴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리란 약속을 자신과 가족과 하였다. 그러나 남편 떠나고 4 년 후에야 가게를 팔았다. 남편 보내고 금방 가게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가게 처분하고 파트타임 일했다. 여유 시간에 시립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다. 이런 학구적인 활동이 경직된 내면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가 멈추고 손발만이 분주하였던 시간이 머리와 손발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바로 그 시기에 영원히 걸 프렌드를 못 만날 것 같던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다. 드디어 형식도 내용도 필자 혼자가 된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은퇴 후 제주도로 갔다. 역이민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냥 이사한 기분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이너리티인 필자에게 어디고 완전한 행복의 파라다이스는 없다. 두 땅 서양과 동양의 지구촌 마을이 필자의 삶터다. 더 넓어 좋고, 더 다양하여 좋고, 더 배워야 하여 좋다.
- 2016-06-2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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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모성애 꽃은 그렇게 피어났다
-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 2016-06-22 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