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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하
- ‘하나 더하기 하니는 더 큰 하나’ 는 서울시 강서구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의 슬로건 이다. 각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하하하’ 로 함축했다. 둘이 아니고 계속 하나가 되려면 동질성을 지속 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적은 분명 한국인인데 이주민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놓고 차별하려는 경향이 있다. 전라도에서 태어났어도 경상도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사람이 분명하듯이 이제는 좀 더 넓은 안목을 갖고 베트남에서 태어났든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어도 대한민국의 국적이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이다. 강서구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에서는 다문화 축제를 개최하였다. 우리는 그간 알게 모르게 그 니라의 GNP로 그 나라 국민과 나라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다문화 축제의 현장에서는 ‘우리는 당신과 다른 이런 문화를 갖고 있어요. 우리의 문화도 아름답지만 당신의 문화도 역시 아름답네요.’ ‘우리의 음식도 맛있지만 당신네 음식도 역시 맛있어요.’ 서로 이런 격려의 말이 없어도 축제는 이미 국경을 넘어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들의 고유의상인 아오자이를 예쁘게 입고 나왔고 중국은 치파오를 입고 나왔다.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우즈베키스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했지만 문화의 경쟁이 아닌 서로가 잘 모르던 이국의 문화와 융합의 현장이었다. 아름다웠다. 문화에는 더 이상 국경이 없었다. 다문화 축제현장은 한마당 흥겨운 잔치판이었다. 우리국민들의 열심 있는 노력으로 당당히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었고 그 결과 수많은 외국인은 ‘코리아 드림’(Korea Dream)을 꿈꾸며 이 땅으로 몰려왔다. 한때는 길림 영사관 앞에는 대한민국에 입국을 위해 심사를 받으려는 중국 동포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던 적도 있었다. 미국 영주권을 위하여 미국대사관 앞에 길게 줄지어 서서 인터뷰의 순서를 기다리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들이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까다로운 한국 입국비자를 받기위해 결혼이란 쉬운 방법을 택하였다. 혼기를 놓친 수많은 농촌 총각들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외국인 아가씨와 결혼을 하였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 된 것 같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파경을 맞았다. 국제결혼에 대한 인프라(INFRA)가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초기에 결혼하여 입국한 외국인들을 감싸 안을 그들의 문화가 없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인천 월미도관광 특구에 가면 1905년 미국기선 ‘갤릭’ 호에 의하여 총 출항 횟수 64회 총인원 7415명의 이민 기록이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이민 초창기의 아픈 기록이 있는 한국이민사 박물관이 있다. 살아서 장례를 치르는 아픈 이별을 하며 아메리카 드림(America Dream)을 꿈 꿨던 우리의 선조들의 노력으로 이민 1,5세대~이민 3세대가 되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곳에 집도 없는 허허벌판에 사탕수수로 움막을 짓고 고생하며 지낸 기록도 있다. 슬픈 우리의 상처들을 안고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다문화라고 하기 보다는 융합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 같다. 우리의 고유문화가 외국의 문화와 결합되어 또 다른 문화를 창출하듯 문화는 진화 할 것이다.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오는 공동의 스트레스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기능이 있다. 서로 모여 정보도 교환하고 갈등도 해소 하지만 이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신경을 써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를 신경을 써야 한다면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지가 중요하다. 나의 시선이면서 너의 시선이기도 한 우리의 공동시선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국문화와 이 땅의 문화가 협력하는 융합 문화이다. 문화융합의 성공이 강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이미 그길로 들어섰다.
- 2018-09-2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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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무궁화와 연꽃의 어울림’
- 지금은 베트남이 친숙한 이름이지만 예전에는 월남으로 통칭되었고, 특히 월남전으로 상기되는 우리에게 있어선 ‘베트콩’과 미국 영화 ‘람보’가 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1964년 9월을 시작으로 건군 이후 최초로 해외에 우리 국군이 파병됐다. 주월사 부대를 필두로 맹호, 백마, 청룡, 비둘기, 십자성, 백구, 은마, 등 8개 부대가 파병되어 8년 8개월 동안 총인원 31만2853명이 참전하여 전사 3476명, 부상 1만6000여명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도 참전용사 중에는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오랜 세월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총부리를 겨누며 서로의 생명을 노린 전쟁의 아픔을 겪은 한국과 베트남이, 이젠 경제 발전의 동반자로서 협력을 나누고 있다. 한국을 선호한 결혼이주여성들의 증가로 이젠 주변에서 다문화가정의 베트남여성들을 흔히 보게 된다. 관계 부처가 추정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1세대 2만여명, 2세대 4~5만여명, 3세대 8만여명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우리나라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다문화가정이 한국 생활에 안정적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폭 넓은 지원정책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무궁화와 연꽃의 어울림’이란 비영리 민간단체(회장 방홍식)가 한·베트남 우호증진을 위해 결혼이주여성 조기 정착에 한 몫 하고자 지난 2016년 10월 7일 발대식을 가졌다. ‘무궁화와 연꽃의 어울림’의 방홍식 회장은 월남전에 파병됐던 참전용사 출신이다. 그는 인천지역 참전 전우회 지회장을 역임하면서 베트남이주여성들의 어려운 한국 내 삶에 보탬이 되고자, 베트남 국화(國花)인 연꽃과 우리나라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선정하여 ‘무궁화와 연꽃의 어울림’이란 민간 비영리 단체를 설립하게 됐다. 이 단체는 가정 형편상 친정을 방문하지 못한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에게 친정 방문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 아울러 친정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한국 방문을 주선 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하여 한국과 베트남 간의 문화 교류에 기여하며 민간외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 오는 11월 베트남 결혼이주여성들이 졸업한 남부 지역의 일부 초등학교를 선정하여 학용품을 비롯한 희망 물품을 전달할 계획이다.
- 2018-07-0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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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가 하석 박원규 제자 모임 ‘겸수회(兼修會)’
- 오랜 세월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연구하다 보니 따르는 이들이 생겼다. 스스로를 제자라 칭했다. 그리고 스승을 따라 정진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서로 의지해 돕는 일이 생겨났다. 눈빛 한 번에 손발 착착 맞는 환상적인 어울림으로 함께 익어간다. 사제지간 정이 쌓일수록 서로가 내는 향기는 깊고, 우정은 돈독하다. 일생일대 대업(?)을 마무리하고 오순도순 나들이 간다는 서예가 하석 박원규와 그의 제자 모임인 겸수회를 따라가 보았다.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소풍 길에는 기품 넘치는 특별함이 있었다. 何石이 아닌 兼修會가 주인공입니다 6월 초 화창했던 토요일 이른 아침,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주차장. 대형 관광버스 한 대가 겸수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 말, 예술의전당 한국서예박물관에서 있었던 하석 박원규(이하 하석) 선생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전’이 잘 마무리된 것을 축하하는 여행이었다. 하석 선생이 작업한 ‘부모은중경’의 실제 소장자이자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지원한 석주미술관 류성우 관장이 마련한 자리였다. 지금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은 하석 선생은 물론, 그 옆에서 그림자처럼 따라준 제자들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전하는 뜻이라고 했다. 겸수회원들은 이날 광주시립박물관 서예전 ‘예결금란(藝結金蘭)’을 관람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이어 류성우 관장이 20년 넘게 조성 중인 대단위 문화 공원 ‘청사지향(靑思之鄕:영원한 청춘의 고향)’으로 가서 맛있는 요리와 공연을 즐겼다. ‘겸손함과 배움을 아울러 닦는 모임’이라는 뜻의 겸수회(兼修會)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서예가 하석 선생을 따르는 제자 모임이다. 하석 선생의 작업실인 석곡실에 모여 글을 배우고 익힌다. 지역도 세대도 성별도 직업도 너무나 각양각색인 하석 선생의 제자들. 제자라지만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대 스승이기도 하다. 실로 색채 강한 무림고수 모임. 그럼에도 ‘겸수회’란 이름으로 모이는 순간 채도를 낮추고 묵색으로 모여 어우러짐을 즐긴다. 겸수회는 12년 전인 2006년에 생겨났다. 하석 선생이 붓을 잡은 지 55년이 됐다는데 너무나 늦은 출발이다. 하석 선생은 애초부터 본인을 중심으로 한 제자 모임 자체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작은 모임을 만들면 하석 선생은 모임 이름을 지어주는 정도였다. 스승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문하의 의미 또한 커졌다. 겸수회 총무 배효룡 씨는 겸수회 조직 배경에는 일종의 압박(?)과 필요에 의한 떠밀림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예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 선생의 제자 모임인 연우회 때문이었어요. 2006년에 우리 서단의 대표적인 스승과 문하, 문파가 모여서 합동 사대문파 사문전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석 선생님은 제자 모임이 없으니까 연우회 임원진이 당황한 거죠. ‘도대체 하석 선생님 제자와는 어떻게 연락을 하냐!’, ‘하석 선생도 전체 제자 모임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답니다. 그 바람에 겸수회가 생겨났죠. 2006년에 겸수회 창립전시 도록에 보면 왜 우리가 겸수회를 만들 수밖에 없었나가 적혀 있습니다.(웃음)” 당시 사문전이 없고 다른 서예가 제자의 요청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모임이란 뜻이다. 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키우는 데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하석 선생의 뜻도 품성을 잘 알기에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겸수회는 생기고 난 뒤 다양한 면에서 하석 선생을 돕는 전문 지원단이 됐다. 느긋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전시 달인들 하석 선생이 6년의 공을 들여 쓴 ‘부모은중경’은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불교 경전 중 하나다. 이를 폭 145cm, 높이 340cm의 한지 여든한 장에 광개토대왕비에 쓰인 서체로 수를 놓듯 써내려갔다. 전시회 당시 눈에 잘 띄지 않는 높은 벽까지 이용해 작품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후세에 역사적으로 남을 대작을 꿈꾸었고 길고 긴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진행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석 선생은 ‘부모은중경’ 여든한 장 중 마지막 장을 일종의 영화 엔딩 크레디트처럼 장식했다. 겸수회 제자의 활약도 여기에 기록했다. 이번뿐만 아니라 행사 때마다 도록 제작, 홍보, 현장 지원 등을 겸수회원이 도맡는다.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서거나 서두르지 않고 잔잔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바로 겸수회다.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는 아무 일 없었단 듯 벼루 앞에 앉아 먹을 갈고, 종이 위에 한 자 또 한 자 글을 써나가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잊힐지 모르는 것을 지키고 앉아 하루하루를 산다. 평범한 듯 특별한 겸수회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 2018-07-0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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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한 그루의 동의
- 요즘은 관계를 맺거나 끊는 것이 아주 쉽다고들 한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기능을 이용해 한 줄 보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만남도 쉽지만 이별할 때도 카톡으로 통보를 한다고 하니 기성세대가 살았던 시절과는 참 많이 달라진 세상이다. 어느 사진작가는 나무 사진을 찍을 때 나무 둘레를 천천히 한 바퀴 쭈욱 돌아본다고 한다. 사진 찍는 걸 나무가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동의를 구했을 때만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말을 필자는 믿는다. 나만 좋으면 그만인 이기적인 마음에는 소통되지 못한 불협화음이 남아 있다. 그저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즉각 무시하거나 툭 잘라내는 행위는 일상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평범하면서도 선한 마음을 잃은 흔적일 수 있다. 이제는 사람과의 관계보다 나만의 나무 한 그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함께하는 시간보다는 개인적인 시간을 더 추구하는 시대다. 굳이 누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내 일과 내가 원하는 장소, 도구만으로도 소통을 하고 위안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문명의 이기가 있다. 개인주의적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세대들에게 문명의 이기가 선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것들이 창조되고 흡수되는 과정에서 잠깐씩 가까운 이들을 잊고 살기도 한다. 심심할 때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불편할 때는 도움도 준다. 반드시 사람을 통해 위로받아야만 인간적이고 따스한 감정이 전달된다고 믿었던 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요즈음이다. 기성세대들은 흔쾌히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문명의 이기가 삶이 동력이 되고 있는 시대의 메시지는 진취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는 제각각의 결핍이 있다. 그래서 위로를 받고 누군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라기도 한다. 반면 상대의 그런 마음을 아프게 건드리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사람도 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이 진정성 있는 위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의 모습도 본다. 허약한 인간의 마음과 각자의 결핍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다. 필자도 최근에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식의 상처를 받고 인간이 주는 위로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주는 위로가 낡은 가치로 전락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사회와 문명사회의 장단점을 자신에게 맞게 부분적으로 수용하면 된다. 물론 인간과 만나 풀어야 할 문제까지도 기기들에게 의존하고 위안을 받는 요즘 세대들을 바라보며 공감하지 못하는 시니어도 있다. 그러나 삶의 방식에 정답은 없다. 새로운 문명사회를 억지로 이해하기보다는 인정해버리면 된다. 그렇게 두 시대를 공존할 수도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당한 어울림. 그 속에서 각자 자신에게 맞는 위안을 찾으면 된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보완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내 편이 되어줄 대상을 찾으며 의존적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맞춘 또 다른 삶의 방법도 찾아야 한다. 오직 인간 속에서만 본연의 가치를 찾기보다는 급변하는 세상에 맞춰 자유롭게 사는 방법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서 자신을 더욱더 사랑하면 될 것 같다.
- 2018-01-2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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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대비훈련 실전체험기
- 작년에 이어 사상 두번째 규모5.4 지진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사상 처음 수능시험이 연기되고 수백 차례 여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우리나라도 지진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난방송’이 날마다 화면을 가드 채운다. 시민의 관심을 끌기 좋다. 하지만 뭔가 조금 부족하다. 지난 해 재난대비 실전훈련에 몇 차례 참가하였다. 작년 이맘 때 소방재난본부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안전체험이 열렸다. 체험행사는 화재대피와 소화기·풍수해·지진체험 등을 주제로 하였다. 각 코스마다 시청각 교육과 체험실습으로 진행하였다. 안전체험의 무엇보다 인명의 안전에 최우선 목적을 두고 있다. 과거에는 화재진압이 우선이었으나 인명을 중시하도록 훈련방법이 확 바뀌었다. 안전한 대피가 먼저다. 우리나라에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지진대피체험이 특히 인상 깊었다. 지진 동영상을 시청하고 대피훈련을 거쳐 사후 수습가정을 체험하였다. “지진이야!” 구호를 외치고 머리를 보호하면서 탁자 밑으로 대피하였다. 지진을 가상한 흔들림이 언론을 통하여 보았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고령자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였다. 소화기체험도 확 변하였다. 과거에는 소화기 들고 불난 곳으로 달려가는 훈련을 하였다. 정전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벽을 더듬으면서 대피하는 요령을 배우는 대목에서 비상을 실감하였다. 교육자는 “벽면 쪽 손을 이용하여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화재현장에서 자세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바닥에서 30~60cm 정도에는 맑은 공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소화기를 인화물의 밑 부분에 분사하여야 소화효과가 있다. 태풍은 다른 재해보다 재해예보에 귀를 기울이고 미리 대비하면 극복할 수 있다. 시속 30km 태풍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하였다. 위험한 곳에서 멀리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버스사고 시 안전벨트의 중요성에 대하여 체험하였다. 버스의 급커브, 급브레이크의 위험성을 체감할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만약 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공중부양 하였을 것이다. 지하철 화재 때에는 골든타임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화재현장에서 2~3분 이내에 탈출하여야 한다. 제일 먼저 다른 칸으로 신속히 대피하여야 한다. 다음에 비상 탈출하여 1층 출구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철로를 이용하여 1~2km 떨어진 이웃 역으로 탈출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하여 최후로 선택하여야 한다. 특히 거동이 불편하기 쉬운 시니어들의 많은 참여가 요망된다. 즐기면서 익히는 2시간의 안전체험을 마련해 주신 서울소방재난본부 보라매안전체험관 및 친절과 성의를 다하여 안전체험을 즐겁게 이끌어준 소방관에게 감사한다. 관악구 응급처치 안전교육에도 참가하였다. 관악 안전지킴이는 안전 위해요인을 조기에 발견하고 사전에 안전사고를 예방하고자 생활 주변 위해요소를 발굴․신고하고 주민 관점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관악산, 도림천 등에 대해 지역 안전지도를 제작하였다. 응급상황 시 행동요령 등 이론 강의를 마치고 오후에는 응급처치 실습을 하였다. 체력이 엄청 요구된 것을 실감하였다. 서울 안전체험 한마당이 여의도공원 문화의 광장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재난, 교통, 화재, 신변, 생활 및 어울림 등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안전교육 체험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이 소화기를 뿌려보고, 비상탈출 훈련을 하면서 무서워하지 않고 거뜬히 마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였다. 어린이가 즐기면서 체험하는 이 행사가 성인이 되어서도 안전을 실천하는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2017-11-2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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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탈출작전 ‘You′ve Arrived’
- 시작은 단순했다. 양양고속도로를 개통했다는데 같이 한번 떠나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대상이 조금 특이했다. 내 절친도 가족도 아닌 페이스북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란다.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알게 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번개(갑작스럽게 만나자고 제안하는 것)를 외친 것! 중년 남녀 낯선 이들의 동반 여행! 과연 얼마나 모이고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페이스북 친구들과 난생 처음 마주하다 제보를 받았을 때 과연 이 도발적인 작전이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이메일을 통해 건네받은 파란하늘 바탕위에 ‘You′ve Arrived’라고 쓰인 포스터가 왠지 모르게 낭만적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페이스북으로 친구를 맺었다고 해서 현실에서도 친구는 아니다. 전 세계 사람이 모인 페이스북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 교류한다. 모이자고 해서 호응하고 따를 사람이 과연 있을까? 더군다나 페이스북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 사이좋은 댓글을 주고받는다.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은 일단 제쳐놓고 이 일을 추진한 이명재씨에게 물어봤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대한민국의 중년들이라면 페이스북을 통해서라도 이런 작당모의(?)가 가능할 법도 하다. “우리 나이대에 페이스북을 하는 사람들은 학교 동문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어요. 제 페이스북을 봐도 대학 동문을 시작으로 그들과 아는 지인의 지인들이 제 페이스북(이하 페친)친구거든요. 만나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성향에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죠. 차 한 대 정도 올까 예상했는데 너무 많은 분들이 왔어요. 일이 커진 거예요.” 교육업체를 운영하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는 이명재씨는 연세대학교 공대 출신. 대부분이 연대 동문과 그들의 친구로 구성됐다. 2012년에 페이스북을 시작했는데, 현재 600명 정도가 페친으로 등록돼 있다. 예상을 깨고 다양한 페친들 모이다 2주 정도 기획했다는 이 모임에 생각보다 다양하고 재밌는 사람들이 속속 찾아들었다. 이명재씨는 이 모임을 위해 사전 답사까지 하는 성의를 보이며 페친들의 구미를 끌어당겼다. 7월 20일 오전 10시 반경. 만남의 장소였던 가평휴게소에서 드디어 페친들이 얼굴을 마주했다. 그저 페이스북으로만 인사를 나눴던 이들과의 인사는 영락없는 맞선이다. 동문들의 등장으로 동창모임 같아 보였다. 다들 어디서 찾아왔는지 직업도 각양각색이다. 홍삼매장 사장님, 수학선생이 싫다는 수학선생님, 음대 나온 댄스스포츠 강사에 체대 출신 심마니, 알프스 스키장을 설계한 현직 농부 등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구성은 찾아보기 힘들 것만 같다. 최대한 성향을 보고 가리고 가렸다는데 인터넷 세상은 색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날의 일정은 아주 간단했다. 새로 뚫린 양양고속도로를 달려 가진항에서 물회를 먹는다. 자기소개 뒤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한 뒤 상경. 끝. 놀라운 일은 이 모든 걸 고속도로 개통으로 하루 만에 끝냈다는 사실이다. ‘페뮤니티’로 세상을 한번 바꿔보자 이명재씨는 이런 모임을 통해서 일종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재능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페이스북과 커뮤니티를 합쳐 ‘페뮤니티’라는 용어도 이미 만들어놓았다. “일종의 인맥으로 소통을 하자는 것입니다. 페이스북으로 만난 공동체 내의 재능 품앗이 같은 것이죠. 가령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니까 그것에 대해 나눠주고, 누구는 여행작가니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주고요. 외부에서 누군가를 모실 것 없이 모임 안의 전문가와 함께 심포지엄도 할 수 있고 이렇게 여행도 했으면 합니다.” 중년의 나이.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세대이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좀처럼 쉬운 것이 아니란다. 성향이 맞았으면 좋겠고 서로 검증된 사람끼리의 어울림을 원한다고 이명재씨는 말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온라인 중심으로 인맥을 이뤄가는 세상이니만큼 페이스북에 능하고 나름의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이루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모임을 자극했던 말 ‘You′ve Arrived’는 ‘당신은 도착했다’라는 의미다. 이번에는 어딘가를 향해가서 도착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언제든지 그 목적과 행동은 또 다르게 바뀔 수 있다고 이명재씨는 말했다. “뒤에 오는 동사를 바꿔가면서 유동적이고 다양한 모임을 계획하고 싶습니다. 회원의 개념은 아니지만 SNS 플랫폼을 이용해 뜻을 같이하고 시간을 내주는 사람들과 함께할 생각입니다. 봉사는 안 할 겁니다. 즐길 거예요(웃음).”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7-09-1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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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하고 세련되고 흥겨운 도시, 세르비아 노비사드
-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북쪽 90km 지점에 있는 ‘노비사드(Novi Sad)’는 세르비아 제2의 도시다. 세르비아어로 ‘새로운 정원’을 뜻하는 도시 명을 가진 노비사드. 19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 시절 때 세르비아인 중심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 도심 메인 광장에는 번성기의 멋진 건축물이 남아 아름답게 빛을 낸다. 거기에 도나우 강변과 페트로바라딘(Petrovaradin) 요새의 어울림은 환상적이다. 현지인들은 참으로 친절하고 순수하다. 누군들 이 도시에 머물고 싶지 않겠는가. 여행 안내소 여직원과 ‘안드리아’의 친절에 감복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역내에 있는 여행안내소의 여자 스태프의 친절은 반할 만하다. 기차역에서 노비사드로 가는 표를 사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안내소 부스에서 밖으로까지 나와 반긴다. 이렇게 적극적인 친절은 동유럽 관광지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다. 그녀는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다. 또한 묻지도 않았는데 그날 저녁, 도나우 강변의 보트타기가 무료라는 정보를 알려주며 꼭 예약해야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히 세르비아의 애국자다. 노비사드행 기차는 곧 폐차해야 될 정도로 낡아 보인다. 기차 안팎으로 그려진 그래비티가 어지럽다. 빈자리를 찾아 앉아 있다가 몸을 완전히 돌려 플랫폼에서 잠시 스쳤던 귀여운 청년 ‘안드리아’에게 말을 건다. 기차 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에게 이것저것 여행 정보를 묻는다. 말 튼 김에 수다도 떤다. 노비사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유명 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그.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프랑스어도 가능하단다. 그날은 애인을 만나러 가는 중이란다. 내친 김에 여행 안내소 직원이 말해준 “오늘 유람선이 무료라고 하니 예약 좀 해줄래”라는 부탁까지 한다. 그가 기차 안이 시끄러워 안 된다고 해서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유람선 타기는 포기한다. 그런데 노비사드역에 내리자마자 보트 회사에 전화를 하고 있다. 결국 정보 착오로 보트타기는 실패했지만 생판 모르는 여행객에게 베푸는 친절함에 감동이 물결친다. 시내버스 타는 곳까지 그를 따라가면서 “버스비 내가 내줄게” 했다. 전화비는 줘야 한다는 한국적 사고의 행동이다. “왜? 뭐하러?”라는 그의 말에 또 감동받는다. 그날 그에게 교훈을 얻는다. 고국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안드리아와 같은 친절을 베풀겠다고 다짐했으니 말이다. 19세기의 문화 부흥을 알려주는 중심 광장 노비사드 극장 거리에 내리자마자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이 필요할 찰나에 발견한 중국인 가게. 빨간 우산 하나 사들고 노비사드에서 교수로 있다는 젊은 중국 여성을 만나 또 한참 수다를 떨다가 길 건너 성모 승천 교회를 보고 세르비안 국립극장으로 다가선다. 1861년에 세워진 국립극장은 남부 슬라브인들의 첫 번째 극장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연극, 클래식 오페라, 현대 발레 등이 공연되고 노비사드 재즈 축제도 열린다. 몇 걸음 더 걸어 노비사드의 가장 번화한 슬로보데(Slobode, 자유) 거리에 이른다. 네오르네상스 스타일의 웅장한 시청사의 건물 중심부에 뿔 같은 탑(60m)이 불쑥 솟았다. 시청사 말고도 첨탑이 뾰족한 성 마리 성당, 보이보디나 호텔을 비롯해 화려한 건축물들이 주변에 한가득이다. 노비사드의 기원은 7세기경, 남슬라브족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지만 18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때 황금기를 맞는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이 발칸에 진출하자 투르크족의 지배를 거부하는 인근 세르비아인들이 도나우 강을 넘어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일궈낸 영광이다. 매일 축제가 열리는 즈마이 요비아 거리 자유 광장에는 스베토자르 밀레티치(1826~1901)의 청동상이 있다. 작가, 극작가이자 이 도시의 시장(1861년, 1867년)이었던 밀레티치는 노비사드 발전에 큰 역량을 발휘한 위대한 인물. 그의 청동상은 20세기 유고슬라비아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이반 메슈트로비치(1883~1962)의 작품이다. 이어 즈마이 요비아(Zmaj Jovina) 거리로 들어선다. 길 양쪽으로 쇼핑가, 식당가가 쭉 이어진다. 매일 축제가 열리는 흥겨운 거리라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런 모습은 볼 수 없다. 우선 마음 내키는 식당에 들어가 풍요로운 늦은 조식을 먹고 거리 끝으로 간다. 두나브스카(Dunavska) 광장이다. 비누거품 놀이에 빠진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배시시 웃음 지으며 쳐다보다 요반 요바노비치 드래곤(1833~1904)의 동상을 발견한다. 의사이자 서정시인이었던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 골목을 걸었던 듯하다. 1984년에 그 모습 그대로 재현된 기념비다. 동상 앞에는 주교 궁전이 있다. 1741년에 만들어진 정교회는 1849년에 폭발해 새로 지었다. 세르비아의 유명한 건축가인 블라디미르 니콜리치(1857~1922)가 1899년에 지어 1901년에 완공했다. 비잔틴 스타일에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멋진 궁전이지만 아쉽게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지 않는다. 메인 타운을 벗어나 도나우 강 쪽으로 향하면 거리는 다소 한적해진다. 이 거리의 외국인 아트 컬렉션 건물 앞에서 또 동상을 만난다. 기자, 정치가, 작가였던 자사 토미치(1856~1922)다. 그는 이 도시의 시장이었던 밀레티치의 사위였다. 부인 밀리카 토미치(1859~1944)를 모함한 상대 정치인(Branik 매거진 편집자)을 찔러 죽여 7년 동안 복역했지만 출옥 후 다시 정치에 출마해 현세에도 위대한 정치인으로 남았다. 동상의 손가락에 끼워진 빨간 반지는 눈이 좋아야만 보게 될 것이다. 이어 도나우 공원과 길거리 시장을 지나 근대 미술관을 보고 도나우 강 앞에 선다. 대교와 부서진 다리 등이 있고 강 너머 야트막한 언덕(40m) 위에는 페트로바라딘 성채가 있다. 그 모습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그래서 ‘도나우 강의 지브롤터(Gibraltar, 스페인의 영국령 반도)’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강변에는 레이드(Raid) 희생자 조각(The Family)이 서 있다. 1942년 1월, 3일(21~23일)간 헝가리의 파시스트들은 세르비안, 유대인, 집시 등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처형했다. 비극적인 역사의 기록을 노비사드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요반 솔다토비치(1920~2005)가 작품(1971년)화했다. 도나우 강변의 페트로바라딘 요새 다리를 건너 페트로바라딘으로 가면 시내 중심가와는 확연히 비교될 만큼 낡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낡은 건물들과 112헥타르(33만8800평)나 되는 요새가 촉촉이 비에 젖었다. 성채는 긴 세월 동안 파괴, 복구, 확장 등의 과정을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요새에는 시립 박물관, 시계탑, 카페, 아티스트들의 공방과 작품 숍 등 볼거리가 많다. 창조적인 디자인 숍에서는 기념품을 판매한다. 또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를 위해 시침보다 분침을 더 길게 한 시계탑도 볼 만하다. ‘한눈에도 예술가’처럼 보이는 화가 라이코 페트코비치의 아틀리에가 있다. 그 외 조각가 요반 솔다토비치의 기념관도 있다. 이 성채의 지하에는 무덤이 있어서 매년 7월 ‘EXIT 페스티벌’이 열린다. 비에 젖은 성채의 커피숍에 앉아 한참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다시 도시로 되돌아와 유대인 회당도 보고 아인슈타인과 그의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1875~1948)의 기억 접시관도 찾는다. 밀레바는 노비사드에서 멀지 않은 티텔(Titel)에서 태어나 노비사드에서 중등학교(1886년)를 다녔다. 아쉬움이 남는 노비사드 여행이었지만 두말이 필요치 않은 아름다운 도시다. 언젠가는 현지인처럼 이 도시에 머물고 있을 듯하다.
- 2017-08-3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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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진한 삶을 보다
- 마로니에 공원의 추억을 들추며 비 내리는 날의 외출이 신나고 즐거울 시기는 지났지만 때론 예외일 때도 있다. 빗속을 뚫고 혜화동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날씨에는 아랑곳없는 청춘들이 삼삼오오 손잡고 오가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마로니에 공원이지만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한때 젊은이들의 문화를 꽃피웠던 이곳에서 봄날의 파릇함, 낙엽 지던 가을의 스산함을 느끼며 보냈던 한때의 시간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그런 젊은 시절의 추억이 마로니에 공원에도 있을 것이므로. 이화마을과 낙산공원 산책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낙산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화마을의 복잡한 골목과 계단을 거쳐야만 하는데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걸어가는 재미도 있다. 조금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오래된 주택가와 상점들이 조금 전 지나왔던 대학로의 첨단거리들과 대조된다. 해발 124미터 높이의 낙산 낙산을 오르다 보면 옛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화마을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보았던 골목이나 담벼락 풍경에서 푸근함을 얻는다. 아무리 그래도 유의할 점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우리의 산책이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겐 편안한 산책길이고 또는 행복한 데이트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언덕과 좁은 골목길과 낡은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어찌 보면 비좁은 길이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길 옆 풀숲이나 비 맞은 꽃과 나무들이 정겹기만 하다. 비 오는 날의 정취가 풍경들을 더 아늑하게 그려낸다. 쭉 걷다 보면 길목마다 친절한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헤맬 일도 없으며 길을 선택해서 다닐 수 있다. 이화마을 텃밭, 이화동 대장간,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정, 그리고 아기자기한 벽화들과 놀이광장, 쉼터 등 지루할 틈 없는 산책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땀이 흐른다. 이럴 땐 골목 옆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바 하나 사 먹으며 숨을 고르거나 등나무 아래 정자에서 땀을 식히면 된다.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이쁜 카페도 있고 가락국수이나 초밥을 파는 작고 멋진 음식점뿐 아니라 예술 갤러리도 있다. 먹으며 놀고 즐길거리가 얼마든지 있는 낙산공원이다. 중턱 이상 올라오니 성곽이 보인다. 성곽 길을 중심으로 안과 밖으로 길이 나 있다. 성곽 밖으로는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가 보인다. 낙산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밤에는 성곽 길에 불을 켜는데 이 불빛이 성벽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낙산의 야경이 인기가 많아 촬영 명소가 되었다. 어느덧 전망대에 올랐다. 비에 젖은 서울이 내려다보인다. 한참을 내려다보며 땀 흘리면서 올라온 이화마을과 낙산을 되짚어 생각해본다. 낙타 모양의 산이어서 낙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단종비인 정순왕후가 단종 폐위 이후 평민이 되어 살았던 한 서린 곳이다.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던 정순왕후가 궁 밖으로 나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 모습을 생각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이다. 온통 도시화되어가던 서울의 한 공간이 이렇게 복원되어 휴식하며 즐길 수 있음은 고마운 일 아닌가. 낙산공원 산책을 마치고 대학로 문화거리로 나가 연극 한 편 보고 맛집을 들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동대문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낙산 성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대문의 DDP로 향해보는 것도 좋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동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시내가 나오고 최첨단 현대 복합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있다. 모든 건물들의 겉면이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고 밤이면 휘황한 조명으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3차원 첨단 설계기법 BIM을 도입했다.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어울림 광장,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각종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어서 즐길거리가 아주 많다. 특히 우주선을 보는 듯한 눈부신 야경이 일품이다. 쇼핑천국 방산시장과 광장시장의 눈요기와 먹거리 동대문은 우리나라 최고의 상권인 동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이 도처에 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면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이 있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방산시장이 바로 앞에 있다. 이곳에서 각종 식료품이나 제과제빵 재료, 포장재와 인테리어 용품들을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광장시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으로 점포 수가 5000개가 넘는 대규모 의류시장이다. 뿐만 아니라 농수산품을 비롯한 먹을거리가 풍부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 먹자골목의 녹두전이나 겨자 장에 찍어먹는 마약김밥은 먹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저렴하고 푸짐한 최고의 메뉴다. 맛있게 잘 먹은 후 그 옆의 시원한 청계천을 바람 쐬며 거닐면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다. 이렇게 한나절을 보낸다면 서울의 역사 유적을 감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볼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치열한 삶의 현장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산책길 내내 비가 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낙산의 여름이 비에 젖어 녹음의 짙푸름이 더했다. 비 오는 날의 외출도 보람 있고 즐거울 수 있음을 확인한 날이다. 동대문 DDP엔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고,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은 여전히 활기 찬 풍경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 2017-05-1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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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그런 봄바람에 매력자산 돋아나고 PART1] 매력의 외적, 내적 자산에 대하여
- 사람이 털북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살갗을 다치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아가 추위와 더위를 견디기 위해 거기에 맞는 옷을 마련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원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질기고 편하고 보기 좋은 옷을 입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마땅한 일입니다. 하물며 사람인데 자기에게, 그리고 경우에 따라, 잘 어울리는 아름답고 멋있는 옷을 골라 입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사람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마땅하고 사람다운 ‘옷 입는 일’이 그렇게 물 흐르듯 인간의 역사를 흘러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어쩌면 앞에서 서술한 흐름의 역류(逆流)라고 해도 좋을 법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옷 문화’는 참 서술하기도 복잡하고,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옷 입는 일에 대한 아무리 짧은 발언을 해도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는 자리를 넓히기보다 오히려 불편하게 얽히고설키는 언짢음을 낳곤 합니다. 사람이 아닌 옷이 주체가 된 세상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옷 입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말들을 합니다. 이를테면 남자가 여자처럼 입었다느니(반대도 마찬가지이고), 늙은이가 젊은이처럼 입었다느니(이 또한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감히 귀한 분 옷매를 흉내 낸다느니(반대로 자기가 언제부터 서민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아예 다 벗지 저걸 옷이라고 걸쳤느냐느니(반대로 아예 옷을 입었다 하지 말고 둘둘 감았다는 게 낫지~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1960년대 복고풍이라느니(반대로 우주시대 첨단 모습이라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품위가 돋보인다느니(반대로 속물처럼 보인다느니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하는 말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처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준거로 한 의상문화의 서술이 무의미하게 된 새로운 이른바 ‘패션담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담론의 준거가 무언지 가늠하기가 무척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유행’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이 무섭게 강한 규범적 가치로 누구나의 옷 입음을 판단하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새 패션 담론에 어울리지 않는 이전을 준거로 한 패션 서술이 얼마나 적합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한데 그렇기는 하면서도 아직은 이런 묘사를 아주 접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준거로 하든지 어울림과 그렇지 않음을 통해 옷 입는 일에 대해 발언하는 일은 멈추지 않을 거니까요. 그런데 좀 갸우뚱해지는 것은 이런 ‘옷 담론’을 듣다 보면 ‘옷’과 옷을 입는 ‘사람’의 자리가 묘하게 바뀐 것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입은 옷’이 사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요즘 우리네 삶에서 ‘옷 입는 문화’란 사람이 주체가 되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이 주체가 되어 사람을 드러내면서 그를 판단하고 설명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는 사실이 묘하게 저를 편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이 불편함이 무언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로워야 할 ‘옷’ 입기 아무튼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고, 비싼 좋은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부귀하게 보이고, 이른바 멋스럽게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고, 후줄근하게 입으면 그 사람은 좀 모자라다고 판단되며, 꾀죄죄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오갈 데 없이 그 사람은 그만큼 너절하게 보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 판단하며 살고 있고, 그런 판단에 상당한 긴장을 하면서 옷을 입으며 살아갑니다. ‘옷을 통한 사람의 규정’이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현상은 유니폼 문화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좀 과장을 하자면, 특정한 기능 수행을 위한 제복이 마련되면서 그 자리에서는 그 유니폼을 벗는 순간 아예 그것을 입었던 사람조차 사라져버립니다. 존재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유니폼, 부귀하다는 유니폼, 멋있다는 유니폼, 때로는 타의에 의해 후줄근하고 꾀죄죄하다고 여겨지는 유니폼, 그런데 그것이 세월 따라 흐르면서 끊임없이 바뀌는 그러한 옷 문화를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가 실제로 그렇든 말든 그러한 유니폼을 입고 또는 그런 유니폼을 입으려 애쓰며, 아니면 입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도 또한 다른 형태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필요의 발전만이 옷 문화의 진전’을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옷이 사람을 규정한 것이 오히려 진정한 옷 문화의 전개였던 것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 아득한 때부터 전해지는 ‘옷이 날개’란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옷 정의에 의하면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내게 날개를 다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가 승인한다면 어떻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일이 그리 큰 문제일 까닭은 없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옷을 입어도 옷 입음이 내가 내 날개를 다는 일이라면 아름답게, 부귀하게, 세련되게 입어 그 날개로 내가 꿈꾸는 가장 높고 넓고 자유로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하면 되니까요. 옷이 시원찮아 날개 꺾인 새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옷 입음이란 결국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기 위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옷을 입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옷 문화가 옷 입음에 대한 어떤 담론을 어떻게 펼치든 간에 아직도 우리가 여전히 옷을 입는 주체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유를 위한 비상(飛翔)이 옷 입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날개가 날개다워야 합니다. 치덕치덕 온갖 치장으로 날개를 무겁게 하면 그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날개가 먼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또한 내 날개로 날아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나 때라면 그 하늘로 그때 굳이 날 필요도 없습니다. 날개를 바꾸든지 그때나 그곳을 피하거나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에 대한 선택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앞에서 지적한 불편함의 까닭을 조금은 서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옷이 사람을 규정하는 일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자유에의 희구를 억제하기 때문일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 입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옷 입는 일에서의 이른바 ‘파격(破格)’이 그 자유를 보장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정석(定石)’의 정장(正裝)이 그 자유의 드러남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옷의 주인이 되는 일이 옷의 예속에서 벗어나 내 하늘을 확보하는 자유의 우선하는 규범이었으면 좋겠다는 무척 고루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관성적으로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옷의 자리에서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내 옷을 챙겨 입습니다. >>정진홍(鄭鎭弘) 서울대 명예교수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공주중, 대전고,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국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서울대·한림대·이화여대 교수 역임. 현재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 2017-02-2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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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물을 만난 꽃, 바람을 만난 물
- 카메라가 발명되고 나서 상업적 사진과 예술 사진의 경계에서 사진을 활성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단연 보도사진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 등이 시작한 보도사진작가 그룹 매그넘이 초기 사진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저명한 언론인 조셉 퓰리처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퓰리처상으로 보도사진이 주목받았다. 각 지역의 문화와 자연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촬영해온 잡지의 자연과학 사진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장르를 묶을 수 있으며, 이들이 20세기 사진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목받는 것은 사진의 정체성이 사실성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진의 전부는 아니다. 예술의 덕목에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사진 역시 다양성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진의 사실성과 함께 추상도 생각했다. 이는 사진도 예외가 아닌 예술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중요한 길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전통적인 시각예술이 모두 그렇게 폭을 넓히고 생각을 키워 왔다. 그 일환으로 나는 종종 다중 노출 작업을 진행한다. 다중 노출 사진은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겹쳐지는 대상이 원래의 피사체와 같거나 연결되는 외형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되풀이되는 패턴이 생긴다. 패턴이 서로 겹쳐지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끊어짐과 이어짐이 되풀이되는 리듬과 끊어지면서도 부드러운 선이 생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늬가 서로 잘 어울리기도 한다. 음악이 갖고 있는 박자와 멜로디 그리고 어울림의 화음이 만들어지면서 없던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아무 관계도 없었던 바람들이 한 장의 필름에서 만나 꽃을 흔들어 무늬를 이루었다. 자연에는 의외로 많은 패턴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두 번 겹쳐 촬영한 한 장의 이미지에서 만들어지는 패턴은 우연일까? 거기에도 자연스러움이 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두 장의 사진을 한 장의 필름 위에 덧씌운 이중노출 기법이지만 그것 또한 우연히 만들어진 자연의 한 모습인 것이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가족을 이루어 자식을 낳고 살 듯이 말이다. 제시한 사진은 바람과 물이 만나는 장면을 다중노출 기법으로 연출한 사진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사진 속의 사물들을 따로 따로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렇게 무심히 바라보다 서로간의 연관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바람 스스로 낸 물길에 따라 흔들리며 흐른다. 꽃과 바람이 실제로 만나는 장면이 포착되었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 없기에, 나는 우연을 적극적으로 기대하며 두 이미지를 한 장의 프레임에 담기를 되풀이하며 지켜보았다. 꽃뿐 아니라 그 배경으로도 이야기는 진행되며 퍼져 나간다. 물을 만난 바람이 물 위에 일정한 시간을 두고 연속적으로 흔적을 남긴다. 그 사이 꽃은 다시 바람에 의해 누웠다 서기를 되풀이한다. 뿌리가 물밑 바닥 땅에 박힌 풀의 제한이 일정한 박자를 만든다. 조금 더 길게 보면 모인 풀들은 흩어지는 시간의 여정을 각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꽃은 시들 것이고 먼지가 되어 바람을 타다가 끝내 바람이 될 것이다. 바람은 다시 꽃의 색을 모으면서 순환하며, 이따금 여기에 물이 겹친다. 바람과 꽃과 물이 함께 만난 자리에 나도 참석하여 우연에 필연을 섞어 작업한 작품이다. 샌프란시스코 근처 1번 국도 남쪽의 배면도로를 달리다 보면 만나게 되는 하프 문 베이에서 작업했다. 의도를 넘어 우연(偶然)이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도 내가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 과정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있게 기다려야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가능하면 아주 오래 오래 살아서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후에는 아마 10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닌 것이다. (중략) 사실은 시는 경험인 것이다”라고 했듯이 말이다. 장소가 어디든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과 구조를 보기 위해서는 겉모양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겉을 싸고 있는 껍데기가 얇고 가볍게 보일지라도 가장 무겁게 사물의 내부를 누르고 있는 것은 그래도 외모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존재들은 온힘을 쏟아 붓는다.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 보이는 것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님을 살면서 차츰 알게 된다. 통찰(洞察)이나 식견(識見)이란 뜻이 그렇고, 비슷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인사이트(insight)라는 영어 단어 또한 같은 얘기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대상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좋은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렌즈의 각도를 달리하며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빛이 뻗어가고 확장해서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핵심과 구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맨눈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었던 포장지 안의 속살이 뷰파인더를 통해 드러난다. 포장지 그 밑에 쌓여 있는 거품이 진짜 내가 보고 싶었던 속살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오는 껍질에 속지 않고 내용을 보기 위해 이어지는 껍질을 까다 본질이 바로 껍질인 경우도 있다. 사진으로 형성되는 인상은 다중 노출의 형태처럼 다양하고 복잡하다.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조합이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만큼 경우가 많다. 매번 선택하는 셔터 스피드와 조리개뿐 아니라 그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간격에 따라 모두 다른 결과가 나온다. 기대는 할 수 있지만, 예측은 할 수 없다. 그래서 본질을 볼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갖고 있는 사진은 역시 기대할 만한 예술의 한 장르이다.
- 2016-10-04 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