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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내가 만드는 구름 꽃
- 필자는 유엔이 정한 65세 노인의 나이에 해당되고 건설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니 노인노동자임에 틀림없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필자처럼 60이 넘은 늙은 노동자는 보기가 어렵다. 필자는 운(?) 좋게 아직 일을 하지만 건설현장에서는 나이든 사람을 전염병환자처럼 기피한다. 주된 이유는 나이 들면 행동이 둔하고 고집이 세어 부려먹기 어렵다는 선입견이다. 이런 선입견이 여러 곳에서 작용한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치기도 한다. 본인의 부주의든 남에게 피해를 입었든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는 일어난다. 사고가 나면 난 것이고 부상자는 치료하고 사고 원인을 파악하여 재발 방지대책을 세우고 이미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규정대로 잘잘못을 따져서 조치를 하면 상황은 끝나야 한다. 그런데 다친 사람이 만약 55세가 넘은 사람이라면 왜 이런 사람을 채용했느냐고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튄다. 나이 들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으로 단정해버리고 그를 고용한 사람은 덤터기를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건설현장에서 나이든 노동자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조심조심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머리도 염색하고 복장도 단정히 하고 가급적 나이를 잘 모르도록 모자를 푹 눌러쓴다. 출근은 빠르게 퇴근은 늦게 한다. 일은 솔선수범하고 늘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못해요‘라는 'No’가 아니라 ‘내가 하지요.’라는 ‘Yes’라는 말이 본능적으로 나와야 한다. 늙은 노동자들은 젊은이들과 같은 일을 하며 겉으로는 당당한 채 하지만 속으로는 주눅이 들고 마음은 움츠려 있다. 나이든 사람의 고용을 멈칫하게 하는 암초는 곳곳에 있다. 나이라는 잣대로 정년을 만들어 한창 일할 능력 있는 사람을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내보내는 것도 좀 생각해볼 문제다. 현장은 작업조건 외에도 춥고 덥고 비 오고 눈 오는 날씨와도 싸워야 한다. 봄은 일하기 좋은 계절이지만 봄이 짧아졌다고 한다. 5월의 중순이지만 한낮의 봄볕은 여름처럼 뜨거운 적외선과 얼굴이 검게 타는 자외선을 뿜어낸다. 특히 건설현장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많다보니 근로자들은 땀을 많이 흘립니다. 더우면 더 심하다. 요즘은 중국 황사 바람 탓으로 황사 마스크까지 까지 쓰고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현장에는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없다. 잠깐의 휴식시간의 배려를 위해 만들어진 천막그늘 막에 시원한 냉수가 제공되는 곳이 유일한 오아시스다. 사람은 살아있으면 젊으나 늙으나 먹어야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더우면 인체는 적절한 온도를 맞추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나이 들었다 해서 땀을 흘리지 않는 예외는 없다. 몸에서 흘러나온 땀 속의 소금물이 작업복을 적시면서 구름 꽃을 그려낸다. 아이들이 오줌 싼 요에서 오줌지도가 그려지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겨드랑이 밑이나 등판에 특히 땀이 많이 배어난다. 땀의 양에 따라 얼룩의 명암이 달라지고 한반도 지도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구름 모양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커다란 목련꽃 모양도 만들어 진다. 내가 만든 구름 꽃은 나는 보지 못하지만 남들은 다 봅니다. 앞사람 등에서 각양각색의 구름 꽃을 꽃으로 보면 웃을 수 있지만 꽃으로 보지 못하고 삶의 현장으로 보면 눈물이 난다. 땀이 나서 마르고 또 땀이 나서 마르다보면 머리비듬처럼 하얀 소금가루가 만들어져 떨어진다. 비비고 털어서 입에 넣어보면 찝찔한 소금 맛이 느껴진다. 땀의 소금은 조금전만해도 내가먹은 음식의 일부다. 내 몸의 여러 장기들을 돌고 돌아 할 일을 다 하고 마지막으로 내 체온을 조절해주는 것으로 운명을 다한 고마운 나의 분신이다. 땀이 만든 구름 꽃은 건강의 꽃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노동에 종사할 수 없고 노동자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우선 밥이 없어지고 몸이 건강할 수가 없다. 햇볕에 검게 변한 얼굴도 구리 빛 팔다리에 파동 치는 근육은 남자다움의 과시이자 건강의 상징이라고 추켜세우지만 노동현장에서 건강한 몸은 일하는 연장이며 든든한 삶의 보루다. 땀 냄새가 베어나는 구름 꽃은 행복의 꽃이다. 노동을 통해 받는 돈은 가장 고귀하고 깨끗한 돈이다. 원가에 덧붙여서 이익을 본 돈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쳐서 번 가장 원초적인 몸 팔아 번 돈이다. 어미 새가 입으로 먹이를 물어와 새끼들을 먹여 살리는 것처럼 노동으로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행복한 가정의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든다. 나아가 자식에게 미래의 희망을 잉태하게 하는 씨앗 값이 바로 땀으로 만든 구름 꽃값이다. 구름 꽃은 생산의 꽃이다. 오늘 구름 꽃이 그려지고 저녁에 빨래로 지워지고 다음날 다시 그려지고 또 지워지면서 시간이 흘러간다. 이런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맨땅에서 건물이 만들어진다. 건물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또 다른 생산을 위해 사용된다. 구름 꽃은 경제를 살리고 순환 시키는 피 같은 꽃이다. 혹 퇴근길의 땀 냄새나는 노동자를 만나더러도 피하지 말고 이들이 산업역군임을 알아줘야 한다. 오늘도 구름 꽃을 만들고 피우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간다.
- 2016-05-2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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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6월] 만약, 슬픔에 무게가 있다면
- 필자에게 외할머니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안방 한편 하얀 창호지를 바른 창살 한 부분에 한 뼘 정도의 작은 유리 조각을 덧대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 앞에 앉아 계셨던 모습이다. 할머니의 쇠약한 손에는 항상 갈색의 묵주가 들려 있었고 시선은 우물이 있는 마당과 함께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을 향해 있었다. 한옥이라 대문이 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나면 종종 낮잠을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시곤 했다.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 마음에 ‘왜 우리 할머니는 나와 놀아주지도 않고 저렇게 앉아만 계신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언젠가는 엄마 앞에서 “외할머니 미워!” 했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두어 해 전이라 어렸을 때인데도 많이 섭섭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할머니께서는 아들 1명과 딸 넷을 두셨는데 한 명뿐인 아들을 비롯해 첫째 딸과 셋째 딸의 남편인 사위 두 명까지 전쟁 통에 잃으셨다고 들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딸만 남은 집안에 막내딸이었다. 그 시대 여성들은 대부분 집안일을 돕다가 결혼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나의 어머니는 막내라고 모 여전까지 보내셨다고 한다. 내게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러나 외가에 대한 기억은 또렷이 남아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두 이모님이 자주 오래 묵다 가시곤 했다. 그 가운데 큰이모는 유복자 아들과 함께 오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살아남은 네 딸 가운데 그중 형편이 좋았고 또 손 아래 제부인 내 아버지께서 마음 편하게 계실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혼자되신 이모들을 위해 방 하나를 따로 비워두기도 하셨다. 그 시대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가장 큰 슬픔으로 치는 세상이었을 텐데 내 외할머니의 심정은 분명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큰 슬픔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시고 당신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신 채 돌아오지 못할 사람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슬픔에 겨워 세상 모든 것이 즐겁지 않으셨을 수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에, 더군다나 딸이 줄줄이 넷이나 있는 집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잃으셨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이제 생각해 보니 죄송한 마음이 컸지만, 어린것이 뭘 알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핑계를 댄다. 필자에게 6월에 대한 기억은 외할머니의 슬픔과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은 이종사촌 형제들의 쓸쓸한 모습이다. 또 아들이 없는 처가를 위해 늘 마음 쓰시며 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6월을 맞아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만약, 슬픔에 무게가 있다면 내 외할머니의 슬픔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 2016-05-1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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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사느라고 살았다”
- ◇ 입가에 미소 짓게 하는 어린 시절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아래 작은 도랑이 흐르는 포근한 동네…. 막내 오빠와 그 친구들이랑 논밭 사이를 선머슴처럼 마구 뛰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 시절…. 그랬다. 하늘이 유난히도 파래 눈부시던, 아름다운 경남 진주시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극히 온화하시고 자상하신 아버지와 적극적이고 생활력이 강하신 어머니께서는 육 남매를 두셨는데, 필자는 그중 다섯 오빠를 둔 막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공무원이신 아버지 덕분으로 필자 가족은 관사에서 생활했다. 관사에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아담한 텃밭이 있어 여러 가지 농작물을 가꾸며 필자의 정서를 포근하게 살찌워 갈 수 있었다. 그 텃밭 옆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물은 유난히도 차가워 여름날 오빠들의 뜨거운 몸을 식히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됐고, 여러 과일을 담가 식힌 뒤 먹기도 좋았다. 과일 접시를 한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여름밤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들은 아직도 필자를 미소 짓게 한다. ◇ 교사의 꿈을 꾸기까지의 청소년기 당시 필자가 입학한 진주사범학교부속초등학교는 교복이 있었는데, 입학 당시 엄마는 손수 교복을 지어 입혀 주셨다. 감색 교복은 필자가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교복에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 같은 모습이있지만 ‘이제 나도 어엿한 학생’이란 생각에 교복 입을 때마다 행복감에 져졌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 나시면서,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서울로 전학하게 됐다. 전입한 서울초등학교의 친구들은 경상도 말씨를 쓰는 필자를 신기해하며 놀렸고, 이 때문에 점점 말이 없는 아이, 폭넓은 친구들의 사귐이 없는 소심한 아이로 변해 갔다. 그러던 중 6학년 때 담임으로 박병직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그 선생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점을 잘 파악하셨고, 또 그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기 위해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애써 주셨던 고마운 분이셨다. 그분은 내가 성년이 돼 38년 가까운 세월을 교단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첫 디딤돌이 돼 주신 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의 진학은, 학업 성적이 남달리 월등하지도 못했고, 또 당시 멀미가 심해 버스 통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걸어서 등하교할 수 있는 가까운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입시가 있었는데, 그 입시에 아버지와 얽힌 이야기 하나가 있다. 입시 과목은 국어, 산수였는데, 시험을 마친 필자는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아버지께 전화했다. 아버지께서는 수고했다면서 대뜸 산수 시험 문제 하나를 거론하시며, 답을 무엇이라고 썼느냐 하시기에 ‘12’라고 말씀드렸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수화기를 드신 채 직원들에게 대견한 딸이라 자랑하시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내 귀에 들려 왔다. 그 날 밤, 당신의 막내딸이 어려운 산수 문제 하나를 맞춘 것이 그리도 신이 나셔서 한턱내셨단다. 별로 뛰어나지도, 그리고 내세울 것도 없는 이 막내딸을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키가 제법 큰 중학생 딸을 초등학생 때와 다름없이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곧잘 여기저기 다니시기를 즐겨 하셨다. 자상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대하실 때 한층 더 엄하셨다. 그것은 막내인 데다가 고명딸이고, 아버지의 절대적인 애정까지 받아 혹 남들로부터 버릇없이 키웠다는 소리를 들으실까 봐 내심 걱정이 많으셨던 것이다. 그땐 정말 철부지였었기에 한때 ‘내 엄마는 혹시 계모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홀로 심히 고민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중학교 2학년 6월 필자는 일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토록 자상하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땐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었고, 그 충격으로 필자는 다시 말이 적은 아이가 됐다. 19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여고 시절이 시작됐다. 13년 위인 나의 큰오빠는 다섯 동생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채워 주셨다. 특히 큰올케의 뒷바라지는 나에게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해 주셨다. 대대로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우리 가족은 서로 양보하고 사랑할 줄 아는 형제들이라는 것을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육 남매를 여자 혼자의 몸으로 자식들을 건강하게 키우시고 올바르게 가르치시느라 그 어느 어머니보다 피땀 흘리시며 사셨던 어머니. 지금도 애틋한 그리움으로 코끝이 시큰해 온다. 나의 신앙생활도 이때 많이 성장했다. 성장한 신앙심과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하다 보니, 중학교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감사가 넘쳤고 생기가 충만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임원 활동도 하게 됐다. 특히 교단에 서서 후진 양성에 젊음을 불태우리라는 인생의 꿈을 찾으면서 구체적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여고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나의 대학생활 및 교직 생활 필자는 대학 입시 예비고사는 무난히 합격하였으나, 대학 입시에서는 낙방의 고배를 마셔 후기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진학한 대학은 사범대학으로서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학교였다. 대학 생활은 순조로웠다. 신입생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로 선발돼 적극적이고 활달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교수님과 선배들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보다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나로 성장하게 하였다. 대학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뜨거운 열정으로 학과 연극제에서 두 번의 주연으로서 무대에 선 일과 학과의 전 학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진행을 맡았던 것이다. 비록 낙선은 했지만 학생회 후보로 출마한 일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의 가슴 어디에 그러한 열정이 숨죽이고 있다가 폭발했는지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다. 대학 4학년 때, 최선을 다해 순위고사(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꿈꾸어 오던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무난히 시험에 합격한 후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3월부터 교직 발령이 나 곧바로 교단에 서게 됐다 . 그 후 퇴직하기까지 아홉 개의 학교를 거치면서 약 38년이라는 짧지 않은 교직에 몸을 담았다. 돌이켜 보면, 교직 생활 중에 받은 표창(교육장, 교육감,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등)들은 내게 더욱 잘하라는 격려와 지지가 돼 힘이 드는 줄 모르고 참으로 신명 나게 교육의 현장을 즐겼다. 49세의 나이로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을 논하고, 젊은 교사들과 교육을 고민하며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던 것과 나 자신이 대학원생으로서의 열정과 낭만을 맘껏 즐겼던 2년간의 그 시간도 참 아름답고 소중했다. 그간의 많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들과 함께 하며 울고 웃었던 많은 일이 지금도 파노라마로 스친다. ◇ 교단을 떠난 후 ‘오늘’지난 2012년 8월, 약 38년간 교단을 지키다가 깊은 번뇌를 거쳐 명예퇴직을 결심하였다. 명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인생 후반전에 훌쩍 접어드니, 그간 바쁜 생활로 곁에 있는 사람의 눈과 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이 불현듯 아쉬웠다. 먼저 남편과 마주 보고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고 싶었고,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사람과 자연을 여유롭게 만나고 싶었다. 둘째, 크리스천으로서 말씀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기도회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셋째, 세태의 변화로 평생 천직이라 생각했던 교직에 깊은 회의가 찾아들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 한계를 만났는데, 그것을 뚫고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했던가. 퇴직 후 필자는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기쁨을 느끼며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아침 식사는 언제나 남편과 함께 마주 앉아 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해 성경공부 등을 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새벽기도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기회 될 때마다 임산부와 어린 친구들에게 태교동화와 구연동화를 들려주고 있으며, 동년기자단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바삐 지내고 있는 요즘이다. 또한 나의 든든한 언덕이 돼 주는 후원자이자 조력자인 남편, 그리고 언제나 제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겨주고, 때론 조언과 정보제공을 아끼지 않는 딸, 사위, 아들, 며느리,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단지 세 손주가 있어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성인이 돼 가끔 만나 식사하며 차 마시고,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며 같이 늙어가고 있는 제자들이 곁에 있기에 참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필자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날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고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이타적 삶을 살아갈 것을 자신에 주문해 본다.
- 2016-05-1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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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vo Life] 시니어들의 로망 “나도 연주 한번 해볼까?”
- 한국 사람들은 중산층이라 하면 보통 30평대 아파트나 중형차를 떠올린다. 물질적인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 같은 질문을 유럽인들에게 한다면 어떨까? 그들은 외국어 하나 또는 악기 하나쯤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중산층이라 한다. 맹목적으로 그들이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자세는 배워야 할 것이 아닐까.혹시 어린 시절 소망했던 악기가 있었다면, 이제라도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음악을 배운다는 것 혹은 악기를 익히는 것을 막연히 생각하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게 여겨질 지 모른다. 하지만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매우 쉽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찾아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니어를 위한 음악교실은 각 지역의 복지관이나 문화센터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악기 하나쯤 다루고픈 시니어들이 늘면서 수요를 소화하기 위해 크고 작은 학원이나 마을 동아리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기관이 나타나고 있다. 교육하는 악기도 다양해져서, 전통적으로 인기가 많은 기타나 색소폰 수업이 가장 활발하지만, 최근에는 우쿨렐레, 오카리나와 같은 다소 생소한 악기의 수업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리마포복지관의 김원이 팀장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시니어들의 욕구가 높은 편이라고 이야기한다. “마포구뿐만 아니라 다른 구에서 일부러 특정 악기나 강사의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입 회원이 들어오면 반장님과 강사님이 잘 적응하실 수 있도록 배려에 신경쓰는 편이고요. 이런 수업이 시니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습니다.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 다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니까요.” 보통 초급반으로 시작해 중급반을 거쳐 동아리로 정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꾸준하게 수업을 병행하면서, 동아리 형태로 친목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개관 때부터 다닌 회원들도 적지 않다. 또 연습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1층 광장에서 매달 연주회도 갖는다. 이곳에서 만난 기타 중급반 반장 김호영(72)씨는 음악이 주는 활력소는 기대 이상이라고 이야기했다. “교직생활을 마치기 직전 심장마비 때문에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체력이 떨어졌었는데, 회복하는 데 음악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치매센터나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연주 봉사활동을 통해 또 다른 보람을 찾게되기도 했고요. 주저하지 말고 일단 나오시길 권합니다.” 5만원 내외의 저렴한 수강료가 복지관의 매력 중 하나라면, 동네 학원의 매력은 전문성과 시설에 있다. 시니어 음악교실이 활성화된 학원 중 하나인 남주희음악연구소의 이승준 차장은 교육기관을 선정할 때 가격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건을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규모 있는 학원의 장점은 다양한 악기들을 확보해 놓고 있다는 점과 방음실을 맘껏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악기가 아닌 실제 드럼이나 피아노를 갖춘 곳은 많지 않거든요. 수업이 없는 음악실에서 편안하게 연습할 수 있는 것도 회원들이 선호하시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또 소그룹으로 운영돼 보다 전문적으로 강습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죠.” 이런 대형 학원의 수강료는 월 12만~15만원선. 특징 중 하나는 노래방처럼 여러 개의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밖에서 불러도 잘 들리지 않는 구조. 때문에 얼마 전 안산의 한 학원에서 난 화재는 19분만에 9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화재시설 등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학원에서 만난 9개월차 수강생 한상기(76)씨는 “나이가 많아지면 대화해 주는 사람이 없어 쉽게 외로움을 느낄 수 있어요. 혼자 노래를 듣는 것보다 직접 연주하고 부르면서 느끼는 성취감이 작지 않죠. 취미를 위해선 경제적 여건 등이 받쳐주어야 하지만, 여건이 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꼭 배워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 2016-05-1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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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처음으로 해본 결혼식 주례사
- 지난 달 중순 어느날에 한때 잘 알고 지내던 25년 대학후배 녀석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전화를 하였다. 반가워하며 서로 수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후배가 "선배님 저 이번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이녀석 최근들어 바뻐서인지 연락이 뜸하다가 결혼연락하기 위해 주소 물어볼려 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대짜고짜로 선배님 "저희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나이 63세가 되어 주례 설 나이도 되었건만 전혀 뜻밖이라 속으로는 쾌나 당황이되고 염려가 되었으며 이미 현직에서 물러나 전문위원이나 비상임 감사으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약간 부담도되고 또한 주례서기에는 직함이 좀 약한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간만에 아끼는 후배가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그러마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고민이 생겼다. 주례라 함은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는 신랑과 신부에게 축하를 전하고 두새람의 새로운 인생에 보탬이 될 금과옥조 같은 내용으로 주례사를 해주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그런 자격이 있을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결혼하는 후배의 간절한 청탁을 기꺼이 받아 들일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사실 젊었을 때는 첫아들을 낳아서인지 친구들의 결혼식사회는 거의 도맡인 해보았지만 더더군다나 결혼식 주례는 처음이어 상당히 부담이 간 것도 사실이었다.해서 주례를 많이 본 교수인 친구에게 어찌할까 조언도 부탁하고 인터넷도 참고하였다. 주례는 대개 날씨이야기 등 인사말,신랑신부의 소개,결혼의 의미,덕담표현,맺음말 이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36년 결혼생활 영위함에 있어 대학선배이자 인생 및 결혼선배로서 신랑과 신부에게 솔직하고 진솔한 나의 경험과 체험을 전달해주면 되지 앓겠는가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었다.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세가지 정도로 압축한다면 무엇을 이야기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식때처럼 늘 초심과 배우자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역시 36년전을 되돌아보면 그당시에는 배우자에게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다줄 것처럼 그녀를 위한 어떤 일도 하겠다 했는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과연 그것을 얼마나 지켰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항상 아쉽게 느끼는 것이 다름 아닌 남에 대한 배려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처럼 식구가 핵가족화되면서 집에서 옹야옹야 하면서 마마보이로 키워졌거나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던 외동딸 들, 참으로 그들은 많은면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키워졌으며 학교교육 역시 자아중심적 점수중심적으로 자랐기에 남에 대한 배려는 많이 익숙치 못한 것이 사실이 아닌 가 생각이 들어 결혼하기전의 초심처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경과 신뢰를 통해서 가정생활을 영위하게 된다면 부부는 서로 닮아가게 되고 늘 좋은 가정을 유지하여 지켜갔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그레이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남자와 여자는 본래 육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나 언어,행동 등에서 많은 점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 남녀가 서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면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상대방을 자기 틀에 맞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화성남자와 금성여자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상대방을 억지로 변화시킬려고 노력하거나 맞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다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더불어 잘 지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결혼이란 권리를 얻는 과정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배우자를 만난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의사결정의 결과입니다. 이에따라 서로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혼식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장차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동시에 의지를 표명하는 의식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가 부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평생을 해로 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결혼자체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성경 말씀에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여건에 늘 감사하며 만족하는 마음자세가 행복의 첩경입니다. 즉 행복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두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만든 청첩의 글처럼 지극히 작고 사소한 모습 하나하나 아끼고 사랑하며 소중하게 애정을 키워나가며 언제나 작은 것에도 서로에게 감사히 기쁜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그속에 늘 행복은 찾아오는 것임을 잊지 마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마음속으로 오늘 새신랑과 신부의 행운을 위해 조용히 기원합니다.
- 2016-05-0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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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트렌드] ① 시니어들이여! 젊음 대신 품격을 입자
- 시니어 패션에 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에 가슴 가득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사실 시니어의 스타일은 비단 입는 것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멋있게 늙어가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시니어 인생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 과거의 영광은 버리고 품격을 입어야 한다. 거기에는 물론 옷을 입는 패션 스타일도 있을 것이고, 봉사활동도 하며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시간만 보낼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개척하고 젊게 살아야 그것이 외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우선 시니어의 패션을 말해보자. 한국 시니어를 대표하는 시니어룩이 과연 있을까? 딱 잘라 말해 없다. 시니어들 또한 어떻게 하면 나이에 맞게 품격 있는 옷을 입을 수 있는지 모른다. 앞으로 시니어 의식을 깨고 바꿀 수 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시니어 세대에게 묻고 싶다. 젊은 사람들의 옷을 입으면 젊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착각이다. 젊게 산다고 그들의 브랜드를 좇고 입고 다니는데 그런 게 잘 입는 것이 아니다. 나이 먹은 사람일수록 나이에 걸맞은 품격을 입어야 한다. ‘패션’은 본래 변화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물질적 혹은 비물질적인 문화 전역에 걸쳐 적용되는 용어로 의복뿐만 아니라 액세서리, 라이프 스타일 전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미지를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이나 자신에게 전달되는 메시지가 결정된다.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바로 본인 자신인 셈이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는 말과 같이 인간은 각자 개성에 기반을 둔 본래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시니어, 이미지 메이킹은 필요하다 시니어 세대에도 첫인상은 특히 중요하다. 표정이나 복장, 말투와 같은 외향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진실함과 겸손함, 상대방을 배려하는 내면적인 모습들이 동반되어야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의상을 통한 이미지 연출은 무언의 언어로서 기능을 가진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 개인의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나타낼 수 있으며 자아 형성에도 도움된다. 좋은 이미지는 개인의 가치를 높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특정한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로만 생각됐던 ‘이미지 메이킹’은 현시대를 사는 시니어에도 필요하다. 자신의 개성과 신분에 맞는 이미지를 구축해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고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한층 더 살려야 한다. ‘좋은 이미지’란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미의식을 반영하되 무엇보다 나만의 개성을 찾아 만들어야 한다. 시니어의 색 ‘Grey(회색)’ 날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쉽게 남에게 보여줄 수가 없을 때 옷이 제일 먼저 그 역할을 한다. 옷을 보면 상대의 위치, 성격 등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옷은 예민하고 민감한 자기표현의 일부분이다. 젊은 사람처럼 입는 것이 아닌 제 본분과 나이에 맞게 입는 것이 시니어가 옷을 잘 입는 방법의 하나다. 유행에 대해 시니어의 패션을 말하지는 않겠다. 단, 기본적으로 시니어에 어울리는 색은 따로 있다. 시니어에게는 품위가 생명이다. 그 품위를 살려주는 색이 바로 회색이다. 회색도 색이 다양하다. 소재에 따라서도 느낌과 색이 다르다. 같은 색상도 원단에 따라 다르다. 스웨터나 양복 등을 살 때 진짜 멋쟁이는 회색으로 고른다. 회색은 얼굴이 검은 사람이나 흰 사람이나 누구한테나 잘 어울려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회색과 짙은 빨간색인 버건디와의 매칭도 아주 멋지다. 거기다 요즘 유행하는 브라운색 구두를 신으면 아주 멋진 시니어룩이 된다. 패션 업그레이드와 함께 자존감도 높이자 우선 남들에게 보이는 외모는 자기 자신의 태도나 감정,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더욱 나은 자신의 모습을 위해서는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면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과 더불어 자신감과 긍정의 힘을 기르자. 이미지 메이킹을 통한 자아상의 확립은 자존감을 높여주기 마련이다.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이란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앞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좋은 이미지는 개개인 간의 관계 증진은 물론 대인관계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이와 함께 패션을 통해 자기만의 개성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면 이것은 자기만족은 물론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을 주고 개인의 잠재적인 능력과 장점을 최대화하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 2016-05-0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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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따로 또 같이, 그리고 따로
- 4월 12일에 열린 의 동년(同年)기자단 발단식에서 저는 환영사를 겸해 몇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년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경위와 의미를 바탕으로, 모임이나 단체의 소속원들이 중시하고 지향해야 할 것을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의 말과 지금 이 글은 ‘한가지 同에 대한 몇 가지 생각’입니다. ‘한 가지’는 띄어서 쓰면 여러 가지 중 하나라는 뜻이 되며 ‘한가지’라고 붙여 쓰면 형태와 성질 동작 따위가 같은 것, 즉 同이 됩니다. 사람은 모이면 한가지가 돼야 하지만, 저마다 한 가지로서의 구실과 역할을 하고 서로 잘 어울려야 그 한가지가 오래가고 튼튼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를 의미하는 말은 참 많습니다. 동거 동기 동도(同道) 동문 동반 동복(同腹) 동사(同事) 동우 동인 동지 동창 동학, 이런 것들을 먼저 들 수 있습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동연(同緣)이라 하고, 함께 붓글씨를 배우거나 공부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동연(同硯)이라고 부릅니다. 나이가 같은 사람은 동갑입니다. 동령(同齡) 동치(同齒) 동년(同年)입니다. 이 중 동년에는 동갑이라는 의미 외에 같은 때 과거에 급제해 함께 방이 붙은 동방(同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의 공모에 응해 시니어 기자가 된 분들을 동년기자라고 부르는 것은 선발 절차와 방식은 예전과 다를지언정 과거를 통과한 것에 버금가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각 분야의 전문가요, 삶과 일에 관한 이야기가 풍부한 분들이니 동년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나이를 잊고 벗하는 망년지교(忘年之交)의 동갑이 되어 활동해주기를 바라는 게 ‘동년기자단’의 작명 취지입니다.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은 이른바 동기상구(同氣相求) 동성상응(同聲相應), 마음이 맞아 서로 찾고 친하게 모이고,의견을 같이해 서로 잘 통하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급제한 동년은 모두 우수한 인재입니다. 길이 사귀어야 할 벗이면서 한편으로는 발전과 성취를 다투는 경쟁상대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동기생끼리의 경쟁이 선후배간 경쟁보다 더 치열합니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동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단종을 몰아낸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됐고, 신숙주는 세조의 편에 서서 새로운 왕업을 도왔습니다. 둘 다 세종 임금이 사랑하던 인재요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탠 집현전 학사였지만 삶의 행로는 판이했습니다. 동년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대비와 대립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사람은 저마다 다르므로 다른 것 속에서 같은 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동공이곡(同工異曲), 같은 악공끼리도 곡조가 다르고, 재주가 같아도 문체에 따라 글의 빛깔과 결이 달라집니다. 동교이곡(同巧異曲)이나 동교이체(同巧異體)처럼 재주는 한가지인데 창작물은 다르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따로 또 같이’를 이야기하지만 실상 더 중요한 것은 ‘같이 또 따로’입니다. 같은 것 같지만 다른 것이 세상을 다채롭게 하고 서로 잘 어울리게 하는 조화의 요소가 됩니다. 논어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을 음미해봅니다. 군자는 남들과 잘 어울리되 같지 않지만 소인은 남들과 같은데도 어울리지 못합니다. 군자는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과 정체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어느 학자는 ‘엇비슷하다’는 우리말에 화이부동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어긋났는데 비슷하다거나 닮았지만 닮지 않았다는 뜻이니 이런 말을 만들고 쓰는 한국인들이야말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관용이나 포용 공존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만든 말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 새로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일 때, 상대와의 협상에 진전이 없을 때 흔히 쓰는 구동존이(求同存異)에도 ‘엇비슷’이 들어 있습니다. 차이점을 인정하거나 뒤로 미루고, 같은 점부터 먼저 확인하고 추구하는 자세입니다. 천하편에 나오는 대동소이(大同小異)는 흔히 그게 그거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실은 ‘크게 보면 서로 같으나 작게 보면 각각 다르다’는 뜻입니다.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大同而與小同異] 이것을 小同異라 하고,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하니[萬物畢同畢異] 이것을 大同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대동은 기르고 키우고 소이는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소이가 모이면 또는 소이가 모여야만 대동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천하가 번영하고 화평을 이루는 인류의 이상 ‘대동사회’입니다. 조선의 선비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시에 여러 색깔의 국화를 찬탄한 작품이 있습니다. “서리를 이기는 한가지 꽃인데/세상에선 너무 나누어 품평하지/색깔로만 같다 말다 그러지 말고/우리 집 둘러싼 여러 색 국화를 보소.”[好是凌霜一樣花 世間常苦品題過 休將形色分同異 且看交開繞我家]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렇게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과 배려를 통해 조화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잘 알아야 하며 학문과 견식이 넓고 높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나 문장이 뛰어난 사람을 대방가(大方家)라고 합니다. 추수(秋水)편에는 끝없는 바다를 처음 보고 놀란 황하의 신 하백(河伯)이 북해의 신 해약(海若)에게 “이제 선생의 끝없음을 보게 되니 내가 선생의 문 앞에 오지 않았더라면 길이 대방가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한다는, 이른바 망양지탄(望洋之歎)입니다. 를 발행하는 이투데이의 주소는 대방동입니다. 대방(大方)은 큰 네모, 곧 대지를 말합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믿어왔습니다. 노자 도덕경 41장에는 “큰 네모는 귀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게 이루어지며 큰 음은 소리가 희미하고 큰 형상, 곧 도는 형체가 없다”[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발족한 기자단을 대방동년(大方同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동갑인 사람들의 한가지 마음과, 화이부동의 자세와, 대방가를 지향하는 노력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마음과 자세는 동년기자단을 비롯한 특정 단체나 모임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두루 중시하고 추구해야 할 보편타당한 덕목이라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잡지에 굳이 이 글을 써서 싣는 이유입니다.
- 2016-05-0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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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나이 들수록 배우자는 ‘둘’이 필요해
-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아니, 배우자가 둘이 필요하다니? 나이 든 부부에게 불 지를 일이 있나? 필자가 강의를 하다가 불쑥 “나이 들수록 배우자가 둘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대다수 청중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나면 “아하, 그렇구나!”라고 하면서 무릎을 친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배우자 둘 중 하나는 남편 또는 아내를 뜻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뭔가를 배우자는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배우자는 가장 좋은 친구 다 아는 유머 한 토막. 나름 오순도순 살고 있는 나이 지긋한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부인이 여고 동기모임을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여고 친구들을 만나는 부인에게 남편이 멋진 옷도 한 벌 사고 머리도 예쁘게 하고 가라는 등 신경을 썼다. “그래, 다녀오든지~”하면서 시큰둥한 통상의 남편에 비하면 엄청 배려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모임에 다녀온 아내의 표정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남편이 “식당이 마음에 안 들더냐, 몇 명 안 왔더냐, 마음에 안 드는 친구가 있더냐”라고 물었더니 다 아니란다. “아니 그럼 도대체 왜 그러냐?”고 했더니 “나만 남편이 살아 있잖아~”라고 대답하더란다. 다른 친구들은 다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어서 마음대로 나다니는데 그 부인만 아직도 남편에 매여서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머는 어디까지나 유머일 뿐이다. 영화 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요즘 TV에서 늘어나고 있는 장수관련 프로그램을 보면 팔순, 구순의 노부부가 아이들처럼, 신혼부부처럼 아웅다웅하면서 재미있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둘이 한날한시에 먼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죽을 때까지 이마와 등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대화 상대, 밥을 함께 먹을 상대, 나들이를 함께 할 상대, 그 상대로 배우자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행복한 노후를 위한 5F’에서도 배우자는 필수 요건이다. 5F는 돈(Finance), 할 일(Field), 재미(Fun), 건강(Fitness), 친구(Friends)이다. 사실 젊어서는 학교 친구, 동아리 친구, 직장이나 사회 친구들을 주로 만나며 바쁘답시고 다닌다. 하지만 은퇴하고 나면 하나씩 둘씩 다 떨어져 나가고 남는 친구는 한 손도 다 못 채우기 십상이다. 그러다 마지막까지 함께 할 친구는 결국 가족, 즉 배우자와 자녀, 손자녀들이다. 가족을 뜻하는 영어 ‘FAMILY’가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알파벳인 것도 우연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도 배우자가 가장 좋은 친구라면 다른 것 다 제치고 성공한 인생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특히 부모와 조부모가 정겹고 애틋한 부부애를 보여준다면 자녀와 손자녀들이 보기에도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나의 제1 배우자와 친구처럼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이다. 소일거리를 찾아라 두 번째 배우자 또한 첫 번째 배우자에 못지않게 중요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기대수명이 이미 82세를 넘어서고 있고 지금의 40~50대는 적어도 90세를 넘어까지 살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의 우리 부모님들과는 달리 우리는 은퇴한 후 ‘뭔가 할 일(Field)’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오래 살면 오래 일을 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남성을 기준으로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는 53~54세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부터 정년이 60세로 의무화된다고는 하지만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설사 60세에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30~40년을 살아갈 계획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20~30년 이상을 열심히 일하다가 은퇴했으니 실업자는 아니지만 뭔가 할 일이 없다면 실업자 아닌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것이다. 죽치고 앉아서 TV나 보는 게 돈 안쓰고 가장 쉬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활기차고 의미있는 소일거리를 찾을 수는 없을까? 소일거리는 말 그대로 ‘소소한 할 일거리’로 꼭 상당한 소득을 얻거나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에서 내가 의미를 찾으면 그게 곧 좋은 소일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추천하는 것이 ‘뭔가를 배우자’이다. 나이를 들어 배운다는 것은 학창시절에 배우는 것과 크게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배우는 일이라면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것만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의 적절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하지 않는가. 배우고, 익히고… 새출발을 취미활동도 배워야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댄스와 악기 등과 같이 서로 맞대야 가능한 배움은 처음부터 친구들을 사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요즘엔 온라인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옮겨가는 모임도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으로만 주고받던 정보와 모임이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맞댈 경우 사람 사는 즐거움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 6만 곳이 넘는 노인 여가복지시설과 노인대학 등이 늘어나면서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가까운 곳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고 있다. 오죽하면 평생학습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좀 더 체계적인 배움을 원한다면 방송통신대학이나 사이버대학에 정식으로 등록할 수도 있다. 2013년 상반기 기준으로 대학 학점인정과정에 등록한 60세 이상 학생 수가 2만3000여명에 달하고 있다. 특히 방송통신대학에만 60세 이상 학생이 3000명을 넘고 있다. 1972년 방송통신대학 개교 이후 240만 명의 입학생 중 최고령자는 2013년 2학기 일문과 3학년에 편입한 정한택씨로 당시 92세였다. 방송통신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은 35만원 안팎으로 큰 부담이 없는데다 도서관 등 시설이 좋아 이를 이용하는 어르신 학생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분은 중국어과와 일본어과를 찍고 프랑스어과에 다니고 있다. 졸업기념으로 부부가 중국과 일본 여행을 했으니 프랑스어과를 졸업하면 유럽 여행을 할 계획이란다. 학점을 따고 졸업을 하는 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기념으로 해외여행까지 한다니 ‘행복한 노후를 위한 5F’를 완벽하게 갖춘 멋진 인생이 아닌가.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가수 서유석의 노래 ‘너는 늙어 봤냐 나는 젊어봤다’의 가사로 끝을 맺자. “마누라가 말리고 자식들이 뭐라 해도 나는 할 거야.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할 거야. 서양 말도 배우고 중국 말도 배우고 아랍 말도 배워서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 볼 거야. 너~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출발이다.”
- 2016-05-0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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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6. 놀면서 배우는 평생교육의 글로벌화, 평생교육원 ‘퀘스트’
-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볼링그린공원과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 동상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한 뉴욕시립대학교. 아침 10시 무렵이 되자 세련된 차림새의 신중년들이 삼삼오오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웅장한 대리석 건물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간다. 주변에 밀집해 있는 글로벌 금융기관의 고위직 인사들처럼 보이지만 평생교육원에 등교하는 학생이자 교수들이다. 배우, 심리학자, 엔지니어, 의사, 교수, 언론인, 관료, 금융전문가, 기업인, 음악가, 미술가 등 전문직업인으로 맹활약을 했던 은퇴자들이다. 틈틈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유로우면서도 열정적인 은퇴생활을 누리고 있는 신중년들이다. 스스로 가르치며 배우는 평생교육원 ‘퀘스트(Quest)’. 학교명처럼 진리 탐구를 갈망하는 신중년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배움터이자 아지트다. 취미활동과 문화 탐방 여행과 친밀한 교우관계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 커뮤니티 기능을 하고 있다. 안내서에 나열된 올해 봄 강좌가 얼른 봐도 30개를 넘었다. 고대 그리스, 마음과 뇌, 시 낭송, 클래식 록 앨범, 현대 오페라, 위대한 연극, 현대 단편소설 등 웬만한 대학 강좌보다 수준이 높지만 교수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구분이 없고 모두 ‘회원’으로 통한다. 내로라하는 전문가 출신 회원들이 직접 강의를 하고 관심 있는 회원은 강의를 신청해 수강을 하는 자급자족 방식이다. 현역 때는 배우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득이 접어야 했던 학업과 취미와 봉사활동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많이 띈다. 2주에 한 번은 외부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지적 탐구심을 더 높이곤 한다. 1년 3학기제로 운영되며 가끔 숙제는 있지만 시험이나 출석 점검은 없다. 한 과목만 수강하나 전 과목을 다 수강하나(물리적으로 불가능) 1년 회비는 500달러. 등록금은 물론 없다. 강좌 개설을 포함한 퀘스트 운영의 거의 모든 사항은 협의회와 분과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협의회는 회원들 중에서 선출된 임원 7명과 재정담당관 등 4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되고 2년 임기의 회원 대표가 회의를 주재한다. 산하 4개 위원회는 회원들로만 구성돼 강좌 개설, 교육자재 관리 및 섭외, 회원 관리, 각종 행사 기획 및 일정 조정 등을 나눠 담당하고 있다. 뉴욕시립대학은 장소와 행정적 도움만 줄 뿐이다. 오는 5월이면 개원 21돌을 맞는 퀘스트의 출범 내력을 알고 나면 이런 자율적인 운영 시스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성 있는 뉴욕의 은퇴자 교육기관이 은퇴자들의 생각과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입학 절차와 학사 관리를 매우 까다롭게 하면서 등록금까지 높이 책정하자 40명이 함께 탈퇴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1995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차에 뉴욕시립대학과 뜻이 맞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배터리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맨해튼 최고의 위치에 자리한 퀘스트는 자율적인 평생교육을 갈망했던 40명의 결단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다. 새로운 이념으로 퀘스트의 설립을 기초한 40명 가운데 로버트 하트만 회장을 비롯한 10명은 지금도 퀘스트의 열렬 회원이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창립 회원인 샌디와 앨 고든 부부는 매년 발간하는 종합 문예지 20주년 기념 특별판 기고문에서 “퀘스트와 함께한 지난 20년은 결코 지루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우리 은퇴자의 꿈은 따뜻한 햇볕을 쬐고 놀이와 내기나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모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식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롤 아브람스, 스텔라 체이스, 베버리 프란쿠스, 에버린과 러셀 굿 부부, 조 나탄 등 다른 창립 회원들도 퀘스트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대단하다. 멤버십 위원회의 에바 샤트킨 위원장은 퀘스트를 찾는 방문인을 일일이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설립 때의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샤트킨 위원장은 한국인 학생을 수양딸로 맞이해 함께 살며 교육시켰을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수양딸은 훌륭히 성장해 지금은 뉴욕대학(NYU)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교직생활을 한 국제적인 영어 교육자인 샤트킨 위원장은 구순을 훨씬 넘겼는데도 거의 매일 배우고 봉사하고 있다. 구순을 넘긴 회원은 보통이고 백세를 넘긴 회원도 지하철로 등교하기도 해 배움이 회춘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는 마이클 웰르너 원장은 “퀘스트의 평생교육에 참여하고 싶은 은퇴(예정)자가 인터넷이나 전화로 방문신청을 하면 하루 일정으로 강의도 듣고 회원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도 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웰르너 원장은 자택을 방문한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시설과 운영방식을 친절하고 상세히 안내했다. 회원들이 가장 신나는 시간은 함께 창작활동을 할 때다. 한때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유명배우인 도미니크 치아네스와 로이 클레어리 회원이 지도하는 연극 시간이면 모두 브로드웨이를 꿈꾸는 배우로 변신한다. 해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면 온 가족과 친지들이 관객으로 참석하면서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지고 회원은 현실에서도 주인공이 된다. 연극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도나 루벤스 회원이 건강 악화로 정기 공연을 놓쳐 몹시 안타까워하자 집을 방문해 즉석 공연을 했던 일화는 어떤 연극보다 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날씨가 나쁘지 않은 금요일이면 이스트강변 89번가의 콩츠마켓(Conte’s Market)에서 퀘스트 회원들이 연주하는 포크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문예지 발간은 소설가와 시인을 꿈꾸었던 회원들이 주도하고 있다. 퀘스트에서는 수학여행과 현장학습이 수시로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익스플로러클럽 등 주변에 즐비한 미술관과 박물관은 언제 들러도 즐겁고 배울 게 많은 현장학습장이다. 나이아가라폭포, 재즈와 ‘욕망의 이름이란 전차’와 프렌치 쿼터의 도시 뉴올리언스와 미국 전통의 여름철 문화교육타운인 이리호 남단의 쇼토쿼(Chautauqua)는 단골 수학여행지다. 여행전문가인 캐롤린 맥과이어 회원은 5월로 다가온 런던 수학여행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8월 수학여행지를 어디로 할지 고심하고 있다. 다채로운 여름축제가 벌어지는 캐나다와 기네스맥주를 즐길 수 있는 아일랜드를 놓고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 물론 회원들이 좋다면 두 곳 모두 갈 수도 있다. 여름 내내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회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학창 시절처럼 수학여행을 고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학여행에는 가족도 참가할 수 있어 더 신나고 추억거리도 넘친다. 뉴욕시립대학교와 교육이념에서부터 학사와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호흡이 척척 맞아 이제는 회원이 230명을 넘어섰다. 평생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 요즘 퀘스트에는 성공비결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해외 귀빈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평생교육이 국가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면서 묘책과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저 어울려 배우고 교류하는 커뮤니티일 뿐인데 해외에서까지 관심이 쏟아지니 회원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신이 난다. 지난해 9월에는 태국 총리 부인인 나라폰 찬오차 교수를 단장으로 한 태국 사절단이 방문했고 은퇴를 앞둔 캐나다의 리차드 솔터 변호사는 4년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평생교육에서도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다. ‘놀면서 배우는 것(Play and Learn)’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만 적용되는 교육이념이 아니다. 배움의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고 호기심은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퀘스트에서 깨닫게 된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고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되다(Liberty without learning is always in peril and learning without liberty is always in vain)”라는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교훈을 퀘스트가 실천에 옮기고 있다.
- 2016-03-3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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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4. 우아한 인생 2학기, 교양학점 올리기 ③백화점 문화센터
- 나이 들수록 지식을 뽐내기보다는 지혜(智慧)를 나누고 덕(德)을 베풀었을 때 자연스레 교양이 묻어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지혜와 덕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교과서나 시험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큰 숙제와 같다. 해결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동안의 소양과 더불어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체력(體力)이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오랫동안 인생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다. 교양 있는 중·장년의 삶을 위해 ‘지덕체(智德體)’를 향상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살펴봤다. ◇ Chapter 3.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體 학점 올리기 백화점 문화센터는 주부들이 애용하는 배움의 장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은퇴 이후 배움에 목말라하는 중·장년 남성들이 늘어나면서 ‘Only for Mens, 요섹남 쿠킹 클래스(현대백화점 목동점)’와 같은 강좌가 생겨났고 점차 남자 수강생의 비율도 증가하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다 보면 오히려 함께 하는 것들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모든 것을 같이 할 수는 없더라도, 한 가지 정도는 아내와 또는 남편과 배우고 즐겨보는 것 어떨까? 함께 익히며 쌓이는 교양만큼이나 부부 사이의 애정도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이다. 댄스스포츠를 함께 하는 남편 문숭철(文崇喆· 65)·아내 김영희(金英姬·61)씨 “동아리 활동처럼 즐거운 문화센터는 내 삶의 활력소” 올해로 5년째 빠짐없이 ‘부부 크루즈&파티 댄스’를 수강하고 있는 문숭철·김영희 부부. 분기마다 개설되는 강좌를 모두 들었으니 대학으로 따져도 4년 개근상은 받고도 남는다. 이토록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함께라서’이다. 부부가 함께해야 하는 수업인 만큼 짝꿍처럼 서로 돕고 이끌어주며 지낸 덕에 배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을 수 있었다. 김씨는 “남편이 해외지사에서 근무하면서 10여 년을 독일, 러시아 등에서 지냈어요. 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애로사항을 느낀 것은 언어가 아닌 ‘춤’이었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모임 등을 하면 꼭 댄스파티 시간이 있었어요. 그 순간만 오면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했죠. 그래서 춤을 배워보자고 각오를 했는데, 아무래도 남편이 현역에 있을 때는 출장도 잦고 함께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저 역시 아이들 교육에 힘쓰던 시기라 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죠”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늘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던 배움에 대한 욕구를 한국에 들어와서야 채워나갈 수 있었다. 해외 생활을 하며 아킬레스건처럼 느꼈던 춤을 극복하고 자연스럽게 즐기기 것이 목표였다. 단기적으로 계획하기보다는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문씨는 “춤이 생활화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모임이나 파티에 가면 우리는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 우아한 세계에 들어설 수 없다는 생각에 자존심도 상했어요. 그런데 춤을 배우고 돌이켜보니 막상 그때 그들이 추던 춤이 별 게 아니더라고요. 거리낌이 없었을 뿐이지, 아주 테크니컬하게 추는 것은 아니었죠. 최근 크루즈 여행을 갔을 때 댄스 콘테스트를 했는데, 우리 부부가 속한 모임에서 우승부터 여러 상을 휩쓸었어요. 자신감이 생겼죠. 하지만 욕심내지는 않아요. 지금 하는 것에서 조금씩 더 배운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수준을 올려갈 생각입니다. 급할 필요 없어요. 이게 내 직업은 아니니까요”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부부가 배움을 함께 한다는 것은, 핸들이 두 개 달린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남편이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치며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배움의 과정에서 서로가 융합하고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방법대로 익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부부가 함께 춤을 추려면 서로의 스텝을 살피고 배려해야 하나의 동작을 완성할 수 있어 이는 함께 핸들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움직임이나 표현 등을 서로가 완벽히 공유하고 익혀야만 한 바퀴라도 돌 수 있어요. 한 배를 탔는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안 되잖아요. 손을 맞잡고 우회전, 좌회전은 물론 그 이상의 동작까지 함께 해내려면 운전보다 더 힘들 수도 있어요.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더욱 힘들죠. 서로를 담금질해가며 하나둘씩 극복해나가면 부부관계도 아주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들은 함께 댄스를 하며 몸 건강은 물론 마음까지 건강해졌다고 이야기했다. 동작에 음악이 흐르면 댄스가 되고, 거기에 표현이 어우러지면 하나의 예술이 된다. 이러한 예술적 활동을 한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도 대단하지만, 단순히 운동하는 것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김씨는 “우리도 함께 골프를 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운동은 같이 가더라도 각자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몸은 건강해지겠지만, 서로 교감하는 부분이 없어 마음이 건강해진다는 느낌은 안 들죠. 손을 잡고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함께 호흡하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참 좋다고 생각해요. 또, 스텝을 외우고 익히다 보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라며 50대 이후 부부들에게 ‘부부 댄스’를 꼭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은퇴하고 갑자기 부부가 무언가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무엇이든 꼭 해보세요. 언어를 배우거나 하는 것도 좋지만 몸으로 부딪히면서 교감하면 더 좋겠고요. 또 이렇게 문화센터를 다니면 지역 주민들이 동기가 되니까 마치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처럼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오히려 친구들은 자주 보기 힘든데, 우리는 매주 만나니까 더 친근하죠. 그런 기분 좋은 관계가 현재의 삶에는 가장 큰 활력입니다.”
- 2016-03-30 10:54